저에게는 현재 ‘탈북자’, ‘새터민’ 등 많은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수식어는 바로 ‘루치아’입니다. 남한에 정착하여 세례를 받은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가끔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주위에서 물어보곤 한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하느님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정말 오래전부터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에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폐쇄적인 사회에서 저는 운 좋게 학자의 딸로 태어나, 문학소녀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제가 잊을 수 없는 작품은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외제니의 인색한 아버지 그랑데 영감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신부의 은빛 십자가를 금이나 은붙이로 착각하고 욕심내면서 손을 뻗치다가 숨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외국서적을 접할 때마다 신앙생활을 하는 외국인들의 삶을 알게 되었지만 그땐 그저 미기한 미신행위로만 생각하고 별다른 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을 느끼게된 곳은 중국에서였습니다. 사회주의 중국사회에서의 신앙은 일면의 제한이 있는 듯 보였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선택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주일을 지키던 중국인들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고향에서 교육 받은 대로 하느님은 절대로 없고, 만일 있다면 그것은 곧 ‘김일성’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제게 이 세상에 적어도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가 세 번째로 하느님을 알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한국 입국을 위하여 중국과 몽골 국경을 넘던 밤이었습니다. 브로커의 안내로 중국과 몽골의 국경까지 도착했고,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는 몽골에 무사히 도착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단 20분이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던 브로커의 말과는 달리, 우리는 오후 9시에 국경을 넘기 시작해 새벽 4시가 되도록 사막을 헤맸습니다.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없이 나침반만 가지고 밤길을 걸어가는데 중국 공안에 체포되면 끝장이라는 무서움과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절망 속에서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사막의 밤길을 걸으며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순간에 저는 불현듯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함께 가던 동료가 왜 자꾸 뒤 돌아보냐고 했지만, 저는 한참 뛰어가다가도 불안하다 싶으면 뒤를 돌아보곤 했습니다. 브로커가 준 나침반이 고장인지 왠지 제자리로 오곤 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함께 가는 동료는 겁에 질려 불안해 했지만, 저는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꾸 뒤에서 환한 빛이 제게 비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 순간 저는 “아~ 세상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알립니다
‘민족회해일치’ 칼럼은 평화통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북한 동포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mar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