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 56,1.6-7 / 제2독서 로마 11,13-15.29-32 / 복음 마태 15,21-28 조건 없이 우리에게 생명 주신 주님 믿음으로 공정과 정의 실천하며 누구에게나 베푸는 삶 살아가길
성경을 읽으면 늘 예언자들의 담대함에 가슴이 뜁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는 그 담력에 탄복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흠모합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증거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유와 평화와 안위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믿음인의 꿈에는 하나 더, 영혼 정화의 열망이 보태집니다. 하지만 삶의 많은 일은 늘 ‘느닷없이 불현듯’ 다가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다사다난’으로 표현되는 것이겠지요. 지난 여름 장마는 길고 거세며 드셌습니다. 연일 들려오는 비보와 사고 소식은 우리를 헛헛하고 침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재해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요.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더욱, 우리는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주님의 자비심에 기대는 믿음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을 다만 찬미로 채움으로써, 앓는 세상에게 생명의 리듬을 선물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재해로 많은 것을 잃고 마음이 꺾인 이웃을 잊지 않고 살펴 도와야겠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의 안타까운 호소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이 오히려 주님을 부인하고 등을 돌리는 현실이 아파서, 자신의 동족이 구원되기를 갈망하는 사도의 심정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다 언뜻, 수천 년을 벼르고 별러서 마침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제물로 삼으신 하느님의 심정이 오죽이나 쓰라렸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듣는 복음이 찬물을 끼얹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평소와 너무나 다르니 말입니다. 마귀에게 시달리며 고통을 당하는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치유해주기를 간청하는 모성을 완전히 무시하니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안쓰러웠던 제자들이 제발 “돌려보내십시오”라고 사정을 드려도 보는 둥 마는 둥, 듣는 둥 마는 둥 하시니 그렇습니다. 그 뿐인가요? 주님께로 다가와 엎드려 절을 하며 도움을 청하고 있는 그녀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쌀쌀맞게 응대하시니,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본 제자들도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고, 그러한 주님이 민망했을 법합니다. 더러는 얼마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만나신 일을 떠올리며(마태 15,1 참조) 예수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히 등을 돌린 사람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복음의 결말을 압니다. 그토록 원하던 딸의 치유는 물론이고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며 칭찬을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께서 이리 재고 저리 재듯, 시간을 끌었던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믿음이란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임을 일깨웁니다. 공정이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공정을 외치고 정의를 꿈꾸니까요. 그런데 따져보면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는 모든 것이 불공정하다는 걸 생각해 보셨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그때부터 내내, 온통 내어주고 또 내어주고 계시니 말입니다. 한결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두에게 아무런 값없이 제공하고 계시니까요. 인간은 너나없이 모두가 주님의 것을 날름날름 받아 챙기며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2독서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 오직 주님 종의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일에서나 손해를 감수하고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베푸는 불공정을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 느낍니다. 다만 당신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손해를 계산하지 않으며, 무조건 내주고 퍼주는 삶을 살으라고 이르신 것이라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정을 부르짖는 세상의 화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당신의 자녀들, 그리스도인이 불공정 거래의 주역이 되기를 고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닮기 위해서는 미운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건네주라고 이르십니다. 신앙인에게는 미움이나 폭력, 교만 따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뜻이라 새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닮은 마음으로 동족을 사랑했기에, 자신보다 더 동족의 구원을 간절히 원할 수 있었습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에게도 몽땅 털어내어 주는 방법이 최고임을 배웁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주제가 바뀌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로지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생각에 골몰하시는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 내어주고 퍼주는 불공정 거래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애쓰는 한 주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