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빈곤의 얼굴

이형준
입력일 2026-01-07 08:27:40 수정일 2026-01-07 08:27:40 발행일 2026-01-11 제 347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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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 남산 오르막길 옆 동자동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이 있다. 화려하고 분주한 도시 한 복판 곁에, 무너지고 내려앉은 폐허가 조용하게 숨어있다. 홈리스 활동가들과 함께 쪽방촌을 방문하다 보면, 이 세상은 빈곤과 풍요, 둘로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낡고 음침한 건물 하나에 한두 평 남짓한 30~40개의 쪽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누구라도 여기 와서 보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런데 왜 여기 사람들이 사는가?

거리 노숙인뿐 아니라 쪽방, 고시원, 숙박시설 같은 ‘비적정’ 주거 공간에 사는 이들을 모두 ‘홈리스’라 부른다. 홈리스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집은 모두의 권리이지만, 실상은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로 ‘땅, 집, 일’을 들었는데, 이를 각별히 ‘성스러운 권리’라고 불렀다. 이 권리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배제된 이들이 겪는 파괴적인 현실이 빈곤, 사회적인 불의, 환경파괴, 전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빈곤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우리는 음식과 집, 일과 안전 없이는 살 수 없다. 우애와 애정 없이는 온전하게 살 수 없다. 차별과 모멸을 당하며 수치심과 외로움 속에 웅크려 기죽어 사는 것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며 충만하게 살아야 하는 인간의 길을 방해하는 가장 결정적인, 그러나 극복 가능한 ‘사회적 해악’이 빈곤이다. 빈곤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관계적이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누리는 안락과 혜택은 사실은 누군가의 비참함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빈곤이 다양한 얼굴을 지닌 것처럼 그 해법도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그러나 빠질 수 없는 하나는, 우리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의미에 따라 살기 위해,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는 인간 본연의 자유를 확보하는 일이다. 부유한 사람과 달리 가난한 이에게는 이런 자유가 없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 위한 실질적인 가능성과 역량을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페루 리마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이곳의 가난한 이들을 대표해서 한 부부가 교황을 맞이하며 “교황님, 우리는 배가 고픕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시작했다. 교황은 너무 놀라기도 하고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응답했다. “여기 하느님께 대한 굶주림이 있고 또 빵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 매일 먹어야 하는 양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합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그 권리입니다.” 교황이 리마를 방문한 때는 1980년대이지만, 지금도 바뀐 것은 없다. 오히려 빈곤으로 인한 고통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때로는 그저 앉아서 듣기만 하거나, 뒤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상황은 행동을 요구한다. 신앙의 책임은 사회적 책임이다. 굶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성체성사를 말한다고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이 상황은 말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치료받지 못한 질병이 만연한 가운데서 병자성사를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이 상황은 돌봄을 요청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 배제된 이들, ‘작은 이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사셨다. 신앙은 그 부르심에 따라 헌신하는 일이다. 우리가 마치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깊고 중요한 의미에서 이런 부르심은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 부르심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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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1991년 예수회에 입회해 2001년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정치철학과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17년부터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을 맡아 사회적 약자와 빈곤, 불평등 문제 등에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