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공부는 어디에 서느냐의 문제

황혜원
입력일 2026-04-22 08:56:53 수정일 2026-04-22 08:56:53 발행일 2026-04-26 제 348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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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감정으로 흩어지고
삶의 방향 될 때…설 자리 알게 돼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만난 황용연(바오로 예레미야) 신부님은, 훗날 이태석(요한)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이끈 분이십니다. 황 신부님은 중학생인 저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빵집 유리창을 깨고 빵을 꺼내 먹었다면, 그 사람은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저희는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 나라 법으로 무죄입니다.”

그 말은 세상의 법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평가와 비교의 언어로 배워 왔습니다. 얼마나 잘했는지, 누구보다 앞섰는지를 묻고 답하는 데 익숙합니다.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가족과 나누지 않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들꽃을 가리키시며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아라”(마태 6,28) 하십니다. 무엇을 먹고 입을지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먼저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불안을 덜어 내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공부는 평가하기 전에 먼저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바라봄은 경탄을 낳고, 끝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서게 합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12,34),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복음은 생각보다 거칩니다. 그 거친 언어는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는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 앞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는 점수에는 민감하지만, 불의에는 침묵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의 점수는 묻지만,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결과를 요구하는 데 익숙합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우리를 머물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경탄은 우리를 바라보게 하고, 그 바라봄은 끝내 정의를 찾게 합니다.

공부는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서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공부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설 것인지, 외면당한 이들과 함께할 것인지, 이런 선택들이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를 드러냅니다. 분노가 감정으로 흩어지지 않고 삶의 방향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공부는 가족 안에서 드러납니다. 자녀는 버티고 있는데, 우리는 결과를 먼저 묻습니다. 함께 견디며 머무르는 일에는 서툽니다. 그렇게 자녀는 우리 곁에서 자라지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함께 배웁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이해하려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공부는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기보다, 더 깊이 바라보고, 외면하지 않으며, 끝내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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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