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12번째 성경필사’ 마산교구 하동본당 이진기 씨 “모든 순간 묵묵히 쓰며 기도했죠”

이나영
입력일 2026-06-17 09:22:56 수정일 2026-06-17 09:22:56 발행일 2026-06-21 제 3496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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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인 첫째·지적장애 둘째 위해 시작…24년째 하루 8~9시간씩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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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성경필사를 시작한 마산교구 하동본당 이진기 씨가 빼곡히 채워진 필사본을 펼쳐보이고 있다. 뒤로 보이는 벽에는 성경 완필자에게 주어지는 교구장 축복장이 가득 전시돼 있다. 이나영 기자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필사합니다. 매번 새롭게 느껴지니, 빠져들어 매일 쓰게 되더라고요.”

한 번 읽기도 힘든 성경을 12번째 필사하고 있는 이진기(토마스 베케트‧78·마산교구 하동본당) 씨에게 필사는 ‘습관’이다. 하루라도 쉬면 마음이 불편하다.

11번째 필사를 끝낸 건 지난 5월 20일.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하며 21일을 보내고, 22일 12번째 필사를 위해 다시 성경을 펼쳤다.

이 씨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건 첫 아이를 가지면서다. 임신 중이던 아내 김수열(안젤라‧76) 씨와 함께 교리를 배웠고, 첫째 동진(안셀모‧46) 씨가 태어난 뒤 세 식구가 함께 세례를 받았다. 둘째 동주(마르코‧44) 씨가 태어났을 때 부부는 ‘아들이 둘이니, 둘째는 사제가 될 수 있게 잘 이끌어 보자’고 약속했다.

둘째에게서 여느 아이들과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한 건 돌 무렵.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부부는 청력 문제라 생각해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대학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중증 지적장애와 자폐였다. 한 살 정도의 정신연령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도 저도 몇 년 동안 웃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신앙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 버틸 수 없었을 것 같아요.”

김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둘째 곁을 지켜야 했다. 부부가 집에만 머물던 그 무렵,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과 이웃 신자들, 수녀와 신부들이 차례로 찾아왔다. 둘째를 돌봐주고 말을 걸어주는 이들 덕분에 집안에 다시 온기가 돌았다. 부부의 성가정은 자연스레 본당 신자들이 드나드는 ‘사랑방’이 됐다.

그 사랑방에서 첫째 동진 씨가 자랐다. 다섯 살 무렵부터 “내 꿈은 사제”라고 말하던 첫째는 방황 한번 없이 신학교에 입학했다. 아들의 꿈을 들은 날부터 이 씨는 평일미사도 빠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들이 군에 입대하던 날, 이 씨는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혼자서 훌쩍 자라 버린 첫째에게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사제서품식 날, 완성한 필사본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해고로 직장을 잃고,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받을 때도 필사를 멈추지 않았다. 쓰고 기도했다. “사제로 잘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이 씨가 필사하는 동안, 김 씨는 매듭 묵주를 만들며 기도를 보탰다. “아들 신부님 잘 살아가게, 우리 둘째 다치지 않게 돌봐주소서.”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500여 개 묵주를 만들어, 아들의 첫 미사에 참여한 모든 신자에게 전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김 씨는 묵주를 만들고 있다. 이동진 신부가 일본 삿포로에 파견되면서는 작업 속도를 더 높였다. 성물을 구하기 어려운 일본에선 직접 만든 묵주가 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필사에는 둘째를 위한 기도도 더해졌다. 40대가 된 지금도 성당 유아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둘째가 언젠가 한 발만 더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를 바라며 이 씨는 한 글자 한 글자 종이를 채웠다. 필사가 거듭될수록 기도는 더 넓은 곳으로 향했다. 대자녀를 위해, 아들 신부가 맡은 공동체를 위해 기도했다. 하루 8~9시간, 24년째 꾸준히 이어온 필사. 기도에 기대어 묵묵히 버텨온 그 모든 시간에 대한 훈장처럼, 이 씨의 오른손엔 굳은살이 깊이 배어 있었다.

이 씨는 독자들을 위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추천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이 옵니다.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그 시간 동안 내 곁에 머무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죠. 많은 분이 그 사랑을 느끼고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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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김수열 씨가 아들 이동진 신부의 첫 미사부터 현재까지 20여 년간 꾸준히 만들어 온 매듭 묵주. 이나영 기자

이나영 기자 la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