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1)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 납치 사건

“전주교구 문정현 神父 피랍 15시간 - 15시간 불법 강제 피랍에 항의, 단식에 들어갔던 전주교구 장계본당 주임 문정현 신부가 단식 7일째인 21일 당국이 정식 사과함으로써 단식을 풀었다. 이와 함께 20일부터 가톨릭센터에서 집단 단식 농성 중이던 일부 성직자 및 평신도 40명도 ‘사과’를 듣고 해산했다. 5·18민주화운동 5주기를 앞둔 15일 오전 9시30분경 문 신부를 강제 납치, 88고속도로를 거쳐 동해안 고속화도로를 경유, 경북 백암온천 입구까지 연행했다가 16일 새벽 1시경 장계성당에 돌려보낸 기관원들은 문정현 신부의 단식을 필두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항의가 강력해지자 21일 오후 4시경 교구청을 방문, 정평위 비상대책회의와 박정일 주교, 문정현 신부에게 차례로 사과를 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자 7면) 정부와 교회의 갈등 재개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와 교황 방한을 전후해, 교회와 정부는 행사 개최를 위해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축제의 분위기가 걷힌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정부와의 갈등은 다시 본격화됐습니다. 그 바탕에는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고통을 겪는 민중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민주화 운동 그리고 노동, 빈민, 인권 등 부조리가 만연한 제반 영역에서 참된 복음화와 인간화를 위한 노력에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정부와 교회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이 본격화된 사건이 5.18민주화운동 5주기인 1985년 5월 전주교구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 납치 사건입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자 7면은 불법 납치에 대해 항의하며 7일간 단식하던 문 신부가 당국의 사과로 단식을 중단한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지면에는 전국 각 교구의 5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문 신부의 납치와 단식 그리고 5주기 추모 소식이 나란히 실린 지면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문 신부는 당시 “이번 납치는 5월 17일 광주 남동성당에서 있었던 광주 의거 추모미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며 “신부라는 특권을 갖고 산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런데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얼마나 곤욕을 당하겠는가”라며 공권력의 폭력과 인권 유린을 비판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촉구 5.18 민주화운동 5주기인 5월 18일을 앞두고 정부는 추모 행사 저지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전국에서 온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2000여 명이 하루 전날인 17일 저녁 7시30분 남동성당에서 추모미사 및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광주 정평위가 주최한 이날 추모식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됐던 광주 항쟁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광주 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당시 서울 구의동본당 주임이자 정평위 중앙위원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5월 17일 광주대교구 ‘5.18 광주의거 추모미사 및 추모식’에서 강론을 통해 “언제까지 광주를 묻어둘 수는 없다”며 “속히 진실을 알려 화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추모 행사들을 축소하고 저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비 검속 과정에서 문 신부가 납치됐던 것입니다. 문 신부는 이에 대해 항의, 단식에 들어갔고 20일부터는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 40여 명이 가톨릭센터에서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교회 내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21일 오후 4시경 납치했던 기관에서 전주교구청으로 박정일(미카엘) 주교와 문정현 신부, 그리고 정평위 비상대책위를 차례로 방문, 사과함으로써 모두 단식 농성을 풀었습니다. 전방위적인 사회 참여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는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의 부조리를 양산했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가난한 민중들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교회의 사회교리에 바탕을 두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부와 극심한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1984년 7월부터 노동자들의 단결권 보장 등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전국 서명운동에 돌입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반년 만인 1985년 2월 25일까지 총 12만4941명의 서명을 모아 5월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또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85년 3월 근로자의 날을 맞아 정부 당국에 노동자들의 최저생계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저임금제 실시’와 정당한 교섭을 위한 ‘노동 3권 보장’을 강력히 촉구하며 노동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권과 빈민 문제로도 확산됐습니다. 정평위는 1985년 4월 11일 정치범과 양심수들의 조속한 석방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여기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민청학련, 오송회,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과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 정치인 및 종교인들의 사면과 복권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1985년 하반기에는 서울 목동과 신정동 일대 신시가지 개발 계획으로 대규모 철거민 사태가 발생하자, 목동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목동지역 철거대책 추진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이들은 무허가 철거민들의 생존권 보호를 위해 ‘선입주 후철거’ 및 철거 건물에 대한 현실적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시 당국과 크고 작은 충돌을 감내하며 끝까지 연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합니다. 그 여정은 고단하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었고 반독재 저항의 강력한 구심점이었습니다. 독재 권력은 학생 시위를 봉쇄하기 위한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 문정현 신부 불법 납치,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은폐 등 폭력으로 대응했지만 이는 오히려 천주교회 전체의 저항과 연대를 촉발하며 국가 권력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자충수가 됐습니다. 마침내 무소불위의 제5공화국 철권통치는 온 나라를 뒤흔든 1987년 6월 민중 항쟁으로 무너져 내릴 운명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이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0)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

“한국 가톨릭교회와 문화 종합 정리 -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지난 80년부터 기획, 만 5년여의 각고 끝에 간행된 ‘한국 가톨릭대사전’은 2백 년 한국 천주교 문화를 집대성하는 획기적인 작업으로 각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백 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2백 주년을 마무리하고 복음화 3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시점에서 간행돼 의의가 깊은 ‘한국 가톨릭대사전’은 한국 가톨릭교회와 문화 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바른 개념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한 해답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가톨릭신문 1985년 2월 24일자 1면) 역사상 최초 「한국가톨릭대사전」 발행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가톨릭대사전」 발행을 기획했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주관해 1980년부터 기획에 들어가 5년 동안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85년 2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게 됐습니다. 이는 200년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 종교의 사상적 깊이와 그 종교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엮은 ‘대사전’의 존재 여부입니다. 특정 종교의 교의, 역사, 문화, 철학, 그리고 제도적 규범을 총망라한 사전 편찬은 단순한 출판 및 인쇄 사업을 넘어섭니다. 이는 해당 종교 공동체가 지닌 학문적 역량의 총결산이자, 시대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세계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성사의 큰 기념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 수용으로 세워진 교회라는 독특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여 년에 걸친 혹독한 박해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독재 정치라는 근현대사의 격동을 거치면서 생존과 재건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 학술적 토대는 서구교회의 성과를 번역, 수용하는 수동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폭발적인 교세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 학문적 성숙을 모색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었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해 이러한 각성을 구체적인 기념사업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대사전의 발행이었습니다. 200년 천주교 문화 집대성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이 원대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5년 2월 20일 마침내 「한국가톨릭대사전」이 처음 선보였습니다. 이 대사전은 단순히 서구 신학의 성과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한국교회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편찬,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200년 한국 천주교 문화를 집대성하는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작업으로 각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편찬위원장 최석우(안드레아) 몬시뇰(당시 신부)을 비롯해 100여 명의 전문 학자들과 연구진이 집필과 감수에 동원되었으며, 교회법, 교회사, 문예, 사회과학, 성서, 신학, 종교학, 철학, 한국교회사 등 총 9개의 세분화된 분과 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대사전은 4·6배판 크기로 1430쪽에 달하는 본문편과 480쪽 분량의 별책부록 등 총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5000여 개의 표제 항목을 수록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학술적 성과는 전체 항목 중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2000여 개가 한국교회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서구 신학 사전의 틀을 맹목적으로 차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철저히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망라하려는 학문적 독립 의지의 발현이었습니다. 또한 나머지 3000여 개의 보편교회 관련 항목 역시 가능한 한국교회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되도록 서술 방침을 정했습니다. 특히 별책부록에는 성경 통계, 교황청 조직, 교부와 성인들에 관한 문헌 자료는 물론이고, 한국교회의 상세한 연표, 초기교회 신자의 가계표, 한국 순교자 명단 등 75종류의 귀중한 1차 사료들이 수록되어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식의 보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간행과 동시에 이 사전은 사목자들의 교리 교육과 선교 활동의 준거는 물론 평신도 재교육을 위한 종합 자료로 널리 활용됐습니다. 새 「한국가톨릭대사전」 총 12권 발행 한국교회사연구소는 4년 뒤인 1989년, 초판 대사전의 일부 오류와 누락된 서술 등을 수정·보완해 재판을 발행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학술적 진전은 단권 사전의 물리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신설된 ‘보유편(補遺篇)’의 간행이었습니다. 초판 본책에서는 자료 수집의 어려움으로 인해 주로 1950년 이전의 본당사(本堂史)만을 다루는 데 그쳤으나, 새롭게 발간된 ‘보유편’ 제1권에서는 6·25전쟁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1950년 이후의 현대 본당사를 상세히 수록하여 역사 서술의 연속성을 확보했습니다. 이 대사전 간행을 통해 축적된 역량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총 12권으로 완간된 새로운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1990년대 이후 급변한 시대와 사회 변화를 성찰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방대한 가르침과 새 교회법(1983년 개정)의 규범들을 체계적으로 담아낼 새로운 기획이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1993년부터 다시 시작된 새로운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 작업은 무려 13년에 이르는 험난한 장정 끝에 2006년 12권으로 완간되는 대역사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총 9952쪽의 방대한 분량에 8000여 개의 항목(가경자~힐턴), 1만여 점의 사진과 도표를 담고 있으며, 62명의 편찬위원을 포함한 각계 전문 집필자 1500명이 참여한 대장정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성과는 이미 1980년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엄청난 인력과 재정적 투입을 통해 대사전 발간을 이뤄냈던 숭고한 노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85년 발행된 초판 「한국가톨릭대사전」이 갖는 교회사적 의미는 참으로 막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9) 103위 한국 순교 성인 탄생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 반열에… 한국의 순교자 103位를 聖人 명부에 올리노니, 世界 敎會가 공경키를 명하노라.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를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노라. -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 복자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을 선언함으로써 한국 순교 복자 103인은 드디어 성인으로 공식 선포됐다. 103위의 복자들은 자신들이 피 흘렸던 이 땅의 절두산과 새남터가 바라다보이는 여의도에서 성인으로 선포돼 죽음으로 지킨 신앙의 위대함을 온 세계 교회에 증거했다.”(가톨릭신문 1984년 5월 6일자 1면) 103위 성인의 탄생 한국교회는 1984년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펼쳤습니다.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 우리 신앙 선조들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오롯이 신앙을 지켜냄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의 빛을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200년, 선교 3세기를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더욱 성숙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출 것을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도약의 시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았습니다. 더욱이 교황은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인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 역사적인 성인의 탄생을 환호하며 참된 하느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다짐했습니다. 이날 시성식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비롯해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등 국내외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 성인의 후예, 장애인, 교포 신자 등 100여만 명이 운집해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본받아 진리의 증거자가 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김 추기경이 시성 청원과 함께 103위 시성 대상자들의 약전을 낭독한 후, “교황 성하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성인의 도우심을 청한다”고 권고하자 모든 참석자는 무릎을 꿇고 ‘모든 성인의 호칭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어 교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 또 내게 맡겨진 권한으로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는 바이며, 세계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다른 성인들과 함께 정성되이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입니다”라며 시성을 선언했습니다. 성인 탄생의 의미 이날 거행된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보편교회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생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세계교회의 높은 평가입니다. 대개 시성식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러한 전례를 깨고 지역 교회인 한국 땅에서 시성식이 거행된 것은,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진리 탐구로 출발해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한국 고유의 순교 영성을 보편교회가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기적 심사 관면을 통해 성숙한 교회로 인정받았다는 점입니다. 시복시성 절차에서 가장 엄격하게 진행되는 과정이 기적 심사입니다. 시성 추진 대상자가 순교자인 경우에는 기적 심사가 면제될 수 있지만, 이 역시도 매우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의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들이 순교한 것이 확실함에 따라 기적 심사를 관면해 주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성숙도를 인정한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셋째, 미래 지향적인 신앙 쇄신의 촉구입니다. 성인의 탄생은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현대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신앙 유산을 이어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영적 쇄신의 출발점입니다. 즉, 103위 성인 탄생은 한국교회가 복음화의 새로운 세기를 열어나가는 거대한 영적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1984년 5월 6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시성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시성식의 열매는 교회와 더불어 모든 그리스도의 백성이 가난의 영성에 철저하고, 복음을 사는 가운데, 사회의 한복판에서 민중들과 함께 슬픔, 고뇌, 실의, 절망, 좌절을 같이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삶을 더불어 살아감으로써 맺어질 것이다. ... 시성식의 감동적 감정에 사로잡혀 외부적 신심에만 몰두할 때 시성식의 열매와 아울러 그 역사적 의미는 자연히 잃고 말 것이다. 우리의 시대가 병든 시대일수록 103위 성인의 존재는 빛날 것이고 암흑의 사회에 희망의 빛을 비추는 그 빛을 우리는 볼 것이다.”(가톨릭신문 1984년 5월 6일자 4면) 계속되는 시복시성 노력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은 2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순교자의 후손임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103위 순교자는 1839년(기해박해)부터 1846년(병오박해) 사이에 순교한 79위와 1866년(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24위입니다. 이분들은 각각 1925년과 1968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드디어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으로 선포됐습니다. 하지만 103위 순교자에 앞서 신앙을 증거했던 초창기 선조들에 대한 시복시성이 당시 이뤄지지 못한 점은 과제로 남았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한국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와 첫 대규모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 등을 포함해 1888년까지 순교한 124위에 대한 시복을 추진했습니다. 마침내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이 거행되었으며, 현재 이분들의 시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는 순교하지 않은, ‘땀의 순교자’로 불립니다. 최양업 신부는 이미 증거자로서 영웅적 덕행의 삶이 인정된 ‘가경자’로 선포됐고, 한국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전구를 통한 기적이 인정되고 시복이 결정되도록 하기 위해 많은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베네딕도회 덕원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 절차가 추진 중입니다. 아울러 초대 조선대목구장을 지낸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1792~1835)와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시대의 양심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스테파노, 1922~2009), 한국 순교복자 수도 가족을 창립한 방유룡 신부(레오, 1900~1986)에 대한 시복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8) 역사상 최초의 교황 방한

“순교의 터전에 감격의 입맞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일 김포공항 도착 -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평화의 사도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의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 땅에 입 맞추었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이 없나이다’(시편 22)라는 성경 말씀을 따라 무자비한 테러, 전쟁, 파괴, 분쟁 등 온갖 악의 세력, 그 위험을 뚫고 땅끝까지라도 달려가 평화와 사랑의 빛을 비추어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마침내 머나먼 동방의 한쪽 끝, 대한민국에 당도, 이 땅과 이 민족을 축복했다.”(가톨릭신문 1984년 5월 6일자 1면)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진행된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뤘습니다. 이 역사적인 때를 맞아 추진된 각종 기념행사와 정신운동, 사목회의 등은 선교 3세기를 여는 야무진 발걸음이었습니다. 더욱이 5월 3일,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뤄진 교황 방한은 교회 내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한국교회의 존재를 널리 알림으로써 선교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당시 교회 언론이었던 가톨릭신문은 매주 발행되는 주간지 외에도 5월 4일과 5일 특별호를 발행하여 200주년 기념행사와 교황 방한 관련 소식, 특히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 소식을 자세하게 전했습니다.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그날의 기쁨과 감격을 가톨릭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VIVA PAPA! 교황만세! 교황기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뜨겁게 뜨겁게 열광하는 김포 국제공항 주변의 열기는 사랑하는 최고의 목자를 마음으로부터 반기는 한국교회 전체 신자들의 진심을 숨김없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 … 4만 킬로의 여정이 무색할 만큼 정정한 모습으로 트랩 위에서 두 팔을 번쩍 위로 올린 교황은 환호하는 인파에 첫 축복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첫발을 디딘 순교의 땅에 감격 어린 입맞춤을 했다.” 공항에 내려 순교자의 땅에 입을 맞춘 교황은 곧바로 절두산으로 향해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 순교자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교황은 5월 3일부터 7일까지 닷새 동안 이 땅에 머물며 오직 사랑과 화해만이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이룰 수 있음을 일깨웠습니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교황은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해 103위 순교 복자를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또한 같은 날 오후 5시 전국 사목회의 개막식에 참석하여 복음화 3세기를 여는 한국교회를 격려했습니다. 이에 앞서 교황은 4일, 여전히 국가 폭력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광주를 방문해 화해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자고 위로했습니다. 격동의 시기에 주는 예언자적 메시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은 한국교회가 보편교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선포되는 긍지와 자부심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에 천주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절호의 기회인 동시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 안에서 무거운 사회적·정치적 메시지를 던진 예언자적 소명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1984년 당시 한국 사회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한 제5공화국 치하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 부재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교황 방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이를 홍보의 기회로 삼으려 했습니다. 반면 한국교회는 이를 통해 선교지 교회에서 벗어나 보편교회의 지역교회로 발돋움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방한 첫날인 5월 3일, 교황은 전두환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언론에 의해 화려하게 치장된 이 만남은 학살자로 지탄받는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듯한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5월 4일자에서 이 회담을 비중 있게 다루며 공동성명 전문을 실었습니다. 당시 교회 언론 역시 당국의 검열과 정권과의 갈등을 피하려 했던 교회 지도부의 입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광주의 화해, 위로와 단죄 하지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참된 의도는 광주행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교황은 방한 이틀째인 4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화해의 미사를 주례했습니다. 교황은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1980년 5월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시민들의 저항이 있었던 ‘피의 현장’ 금남로를 가로질러 행진했습니다. 정권은 이 거리를 ‘폭도들의 난동 현장’으로 규정하고 기억을 지우려 했으나, 교황은 바로 그 거리를 선택했습니다.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의 증언에 의하면, 교황의 차량이 금남로를 지날 때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교황이 그들의 거리를 지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을 단죄하고, 훼손된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교황은 강론을 통해 “용서하고, 화해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악의 권세는 딛고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악의 권세’는 1984년의 맥락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구조적 악’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직접적인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정의의 실천’을 명시함으로써 불의를 강력히 단죄했습니다. “악의 권세는 딛고 서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은 독재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을 선포한 것이며, 광주 시민들에게는 상처의 치유이자 승리의 약속이었습니다. 교황은 강론 후 정권의 방해를 뚫고 5·18 희생자 유가족들을 직접 만남으로써, ‘폭도’라는 프레임을 무력화하고 그들에게 강력한 위로를 전했습니다. 구조적 개입으로서의 교황 방한 이처럼 교황 방한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에 대한 구조적 개입의 의미를 지닙니다. 교황이 전한 메시지는 즉각적이든 지체된 것이든 우리 사회에 깊은 성찰과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198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재방한과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84년 방한은 군부 독재기, 순교자의 영광과 짓밟힌 인권의 회복이 핵심이었습니다. 1989년 방한은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당시, 민주화 진전 속에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 성체와 나눔이 강조되었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은 세월호 참사의 슬픔과 신자유주의 양극화 속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대와 교회의 쇄신을 촉구했습니다. 다만, 한국교회가 교황의 메시지들을 때로는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유보함으로써 온전한 자기 쇄신의 기회로 삼지 못했던 부분은 항상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7)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

“복음화 3세기의 좌표 설정- 복음화 3세기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사목지침이 마련됐다.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 사목회의 위원회는 11월 30일과 12월 1일 서울 가톨릭의대 강당 마리아홀에서 사목회의 총회를 속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의안 등 모두 12개 사목회의 의안을 확정, 통과시키고 4년 여에 걸쳐 추진되어 온 사목회의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물론 교회 밖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목회의 의안들은 각 의제마다 과거 및 현재를 엄격히 분석, 반성하는 것으로 출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를 개선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3백년대를 향한 사목지침서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가톨릭신문 1984년 12월 9일자 1면 중에서) 한국교회 사상 첫 전국 사목회의 개최 1984년은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 신학적이고 사목적으로 거대한 전환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전국 사목회의’는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인 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103위 순교자 시성식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전 세계에 알린 축제의 장이었다면, 사목회의는 내실을 다지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한국적 토양 위에 육화시키려 했던 자기 쇄신의 노력이었습니다. 시대적 징표와 교회의 과제 전국 사목회의는 교회의 내적 성숙을 향한 열망과 외적 사회 상황에 대한 예언자적 응답이라는 두 가지 축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둘은 ‘세상 속의 교회’라는 공의회의 가르침 안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했습니다. 첫째, 사목회의는 ‘한국판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선언하고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후 복구와 교세 확장에 주력하느라 공의회 정신을 연구하고 체화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1984년 선교 200주년은 공의회 정신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구현하는 기회였습니다. 둘째, 사목회의는 ‘민족과 사회에 열린 자세’를 핵심 기조로 설정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했습니다. 10·26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신군부의 집권은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심어주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 격차, 노동 문제, 인권 유린은 교회가 성당 울타리 안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공의회가 천명한,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해 응답해야 했습니다. 셋째, 양적 팽창에 대한 반성과 질적 성숙의 요구에 주목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고속 성장으로 인한 기복 신앙의 만연, 중산층화, 대형 본당의 익명성, 성직자 중심주의에 대해 성찰하고 쇄신의 요구에 부응해야 했습니다. 진행 과정과 12개 의안 사목회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1980년부터 4년에 걸친 준비 자체가 한국교회 전체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학교였습니다. ‘가정 성화의 해’부터 ‘교구 공동체의 해’까지 이어진 연도별 사목 지표는 쇄신을 가정과 본당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의안 작성 과정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문가 등 7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전국 교구와 단체에서 접수된 313개의 제안을 바탕으로 총 12개 영역의 의안이 마련됐습니다. 각 의안은 철저한 사회과학적 조사와 신학적 성찰을 거쳤으며, 본문 외에 구체적인 제안 사항을 첨부하여 실천력을 담보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평신도와 여성의 참여 확대, 기혼자 종신 부제직 도입, 평신도 연구기관 및 사회교리연구소 설치, 전례의 과감한 토착화 등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구체적인 미래 사목의 대안들이었습니다. 역사적 성과 200주년 사목회의는 제삼천년기 미래 교회의 지향점을 모색한 것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1980년대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2000년대 교회를 내다본 예언자적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미래 사목의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여성의 참여 확대, 사회교리의 중요성 강조, 소공동체 운동, 청소년사목의 전문화, 사제들의 재교육 등은 이후 30년 넘게 한국교회가 추구해 온 사목 정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둘째, 주체적 신학을 수립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서구 신학의 소비자가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신학을 생산하는 주체로 서게 됩니다. ‘민중 속의 교회’, ‘겨레와 함께하는 교회’, ‘전례의 토착화’ 등의 의제는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려는 주체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셋째, ‘시노달리타스’의 원형적 체험의 장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끌고 레오 14세 교황이 이어받은 시노드 교회의 여정이, 이미 1984년 한국교회에서 놀랍게도 선구적으로 실현됐습니다 미완의 여정과 남겨진 과제 그러나 이러한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실행 과정과 후대 평가는 ‘미완의 과제’ 혹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공존합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12개 의안이 정식 법규나 지침서로 공포되지 못하고, 단순한 참고 자료로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주교회의는 의안의 급진성과 이상적인 내용을 우려하여 “실천 가능한 것부터 선별적으로 수렴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의안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개혁적 활력이 훼손되었고, 평신도 종신 부제직이나 주교 선출 시 평신도 참여와 같은 획기적인 제안들은 사장되거나 장기 과제로 유보되었습니다. 공식적인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가 10년이 지난 1995년에야 발간되면서 사목회의의 열기는 식어버렸고, 사회교리연구소 설치 등 구체적인 제도의 안착도 지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목회의의 영향력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활성화된 우리말 미사 경본 개정, 가톨릭 성가 개편, 상장 예식의 정착 등은 전례 의안의 결실이며, 2000년대 각 교구 시노드의 활성화 역시 1984년의 경험을 토대로 합니다. 비록 1984년의 제안들이 온전히 제도화되지는 못했지만, 성직자 독점을 넘어선 평신도의 실질적 참여,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적 연대 그리고 형식주의를 탈피한 토착화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완수해야 할 시노달리타스의 과제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6) 북한 동포에 특별메시지

“북한 형제들과 손잡고 미사 할 수 있길 -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겸 북한선교부 담당 김남수(안젤로) 주교는 6·25를 맞아 북한 동포들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 ‘북한의 형제들에게 하루속히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도록, 또한 우리 모두 서로 손잡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한 우리의 한 양 떼가 되어 함께 감사의 미사를 드리게 될 때까지,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라도 여러분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천명했다.”(가톨릭신문 1983년 6월 26일자 1면)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1984)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부터입니다. 주교단은 지난 200년 동안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200주년 이후 교회가 나아갈 가장 중요한 여정으로 제시하고 북한 선교 사업을 공식화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영향도 컸습니다. 공산권 국가인 폴란드 출신이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민족적 비극인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민들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가졌고, 북한 지역의 교회 상황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한국교회는 북한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교단은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새삼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교회의는 1982년 12월 12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안에 ‘북한선교부’를 공식 설치하고 김남수 주교를 담당 주교로 선출했습니다. 이듬해인 1983년 6월 10일에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6월 25일에는 담당 주교가 북한 동포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 ‘주께서 함께 계시다’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남북한의 모든 형제가 함께 감사의 미사를 드리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북한 동포와 함께 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야 6월 26일자 가톨릭신문은 이 역사적인 메시지 전문을 4면에 게재하고, 1면에서는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분단의 아픔을 토로하며 다시금 한 형제로 일치하고자 하는 각오를 전했습니다. “북한선교부가 6·25를 앞두고 침묵의 북한교회 형제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기도회에 즈음하여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발표한 김남수 주교는, ‘같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같은 말을 하고 사는 한 형제자매인 우리가 조국 분단의 비극으로 잔혹한 비인간적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으며 특히 북한 동포들은 최고의 권리 박탈인 종교의 자유마저 잃고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동고동락하려는 마음의 자세와 어떤 희생이라도 바치려는 결의로 북한의 형제들과 모든 운명을 함께하려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김 주교는 1984년 개최 예정인 200주년 행사가 “결코 북한 동포 여러분을 소외시킨 가운데 진행될 수 없다”며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200주년을 기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1984년 11월 26일 ‘북한선교부’는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해체에 따라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되었고, 1985년 2월 16일 담당 주교에 이동호(플라치도) 아빠스가 임명됐습니다. 그해 6월 23일에는 북한선교후원회가 창립되고, 10월 13일자로 명칭이 ‘북한선교위원회’로 바뀝니다. 이후 북한선교위원회는 기도 운동을 중심으로 북한 선교 문제에 매진하게 됩니다.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 이처럼 한국교회가 1980년대에 접어들며 창립 200주년에 즈음해 북한 동포와의 형제애를 강조하고 관심을 표명했지만, 사실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공산주의와 유물론은 악마의 세력이었기에 북한은 동포이기 이전에 전쟁을 통해 말살해야 할 대상이라는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에 교회는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는 수십 년간 가톨릭신문의 지면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6·25전쟁은 “양을 가장한 이리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천주교회보, 1951년 1월 14일자)으로 간주됐고, 따라서 “동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때는 이미 지났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아픔에도 아랑곳없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살을 위해서 전쟁은 계속돼야 한다며 “우리의 싸움은... 공산주의 지배 세력이 지구상에서 말살되는 날까지 계속돼야 한다”고 ‘장기전을 결의’하기까지 했습니다.(천주교회보, 1952년 6월 25일자) 분단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교회는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참조)는 평화의 의지보다는, 여전히 반공과 무력 통일 의지의 강화를 결론으로 얻은 듯했습니다. 전후 한국교회는 북한 지역 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불렀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침묵에 빠진 북한 지역 신앙인들의 해방과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때의 통일관은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는 ‘흡수 통일’에 가까웠습니다. 통일과 민족화해에 대한 인식의 전환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와 교회를 지배하던 모습에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뜨겁게 펼쳐진 민주화 운동, 그리고 현대 교회에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맞물리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1984년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와 그에 즈음해 성사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그리고 5년 뒤인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등입니다. 특히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 아래 열린 세계성체대회는 북한 선교와 민족 통일을 교회의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부상시켰습니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만으로는 복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자성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1995년 3월 1일 한국교회 최초로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발족하고, 북한 선교와 인도적 지원을 위한 대북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 역시 1999년 ‘민족화해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후 순차적으로 대부분의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됩니다. 이는 북한을 용서와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인식을 벗어나, 북한을 한 형제이자 이웃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기도와 미사, 인도적 대북 지원, 북향민의 포용 및 정착 지원 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5)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

국익 내세워 신군부 지지한 미국, 광주 학살 묵인하고 독재 정당화 반독재·반미 투쟁 본격화…1982년 부산 미 문화원에 방화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 최 신부 등 5명 구속 - 치안본부는 지난 4월 8일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과 관련, 원주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39), 방화교사범 김현장(32), 교육원 관리인 문길환(37), 치악산 서점 주인 김영애(25), 가톨릭농민회 조사부원 오상근(29) 씨 등 5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최 신부에게는 범인 은닉, 다른 4명에게는 국가보안법·범인 은닉 및 교사 혐의 등이 적용됐으며... 최 신부의 혐의 내용은 80년 5월 김현장을 22개월간 교육원에 은신시켰고, 지난 3월 19일 김현장으로부터 방화 교사 사실을 고백받고 도피 자금 50만 원을 주었으며, 3월 28일부터 4일간 문부식과 김은숙을 숨겨준 것 등이다.”(가톨릭신문 1982년 4월 18일 1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치르며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오던 한국교회는, 1982년 4월 다시 한번 전 국민적 관심의 초점이 되는 사건을 맞게 됩니다. 이는 원주교구 최기식(베네딕토) 신부가 5·18 광주와 관련돼 수배 중이던 김현장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범 문부식, 김은숙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제5공화국과 미국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위원장 전두환)를 설치했습니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공직자 숙청, 언론 통폐합을 단행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켰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제5공화국 헌법 개정안 통과, 국회 해산, 기성 정치인 활동 금지, 관제 정당 급조 등 사전 작업을 거쳐, 1981년 2월 25일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미국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묵인함으로써 어두운 속내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나아가 5·18 이후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며 학살의 주범인 신군부를 지지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의 취임식 이전인 1981년 2월 말 그를 워싱턴으로 초청해 지지를 표했고, 1982년 4월에는 부시 부통령이,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재차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분노와 배신감, ’반미주의‘의 확산 무죄한 시민들의 학살을 묵인하고 그 주범인 전두환을 비호한 미국의 실체는 한국 국민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한국인을 비하하고 독재를 정당화했던 미국 고위 인사들의 망언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특히 존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의 ’들쥐 발언‘은 가장 치욕적이었습니다. 그는 1980년 8월, 미국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들쥐(lemmings)와 같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가 누구든 줄을 서서 그를 따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한국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으며,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보다 독재자를 통한 통제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폭력과 독재를 지원한 미국의 이중적인 모습은, 1980년대 내내 학생운동권이 반미 노선으로 기울게 만드는 원인이 됐습니다. 그 최초의 반미 투쟁이 광주 미 문화원 방화 사건입니다.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원들은 1980년 12월 9일 밤, 광주 미 문화원 지붕에 불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반미 감정의 확산을 우려해 방화 사실 자체를 숨기고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라고 거짓 발표를 했습니다. 성역의 침탈 최기식 신부의 구속을 불러온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은 광주 미 문화원 방화가 불씨가 된 것이었습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 문화원에 문부식, 김은숙 등이 불을 질렀습니다. 이들은 광주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을 묻고 반미 투쟁을 호소했습니다. 사건 후 수배 중이었던 김은숙과 문부식은 원주교구 교육원으로 최기식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이곳에는 수배 중이던 김현장이 2년 가까이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모두 교회의 주선으로 자수의 뜻을 밝혔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최 신부가 이들을 숨겨준 것을 두고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를 비호했다”며 범인 은닉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했습니다. 그리고 여론을 총동원해 방화범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으며, 천주교회와 원주교구, 가톨릭농민회 등을 국가 안보를 해치는 범죄의 온상으로 몰았습니다. 이에 교회는 최 신부의 행위가 사제의 양심에 따른 정당한 직무 수행이라고 맞섰습니다.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는 1982년 4월 2일, 가톨릭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사제의 직분”이라며 “최 신부는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최 신부의 동료 사제들은 4월 12일 성명서를 통해 “당국의 발표와 언론 보도가 사건의 실체에 대한 진상 조사와 발표보다는 천주교 신부의 범인 은닉 문제를 확대 선전함으로써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나아가 의도적으로 천주교회를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4월 16일, 주교단은 “가톨릭교회를 불온집단의 온상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언론보도에 유감을 표시하고, “교회가 보호하던 이들의 자수를 주선해 준 최 신부의 행위는 최선의 길”임을 확신하며, “쫓기고 있던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사제들의 양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최기식 신부는 부산지법(1심)과 대구고법(2심)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성직자의 직무라 하더라도 실정법(국가보안법 등)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판시하며 종교적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83년 대법원 확정판결에서도 형법상 범인은닉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불고지죄 등)의 죄목으로 같은 형량이 확정돼 실형을 살게 됐습니다. 이후 198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고, 사면 복권됐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비록 성역과 양심의 영역이 침탈됐지만, 역사적 승리는 오히려 교회와 민주화 세력의 것이었습니다. 이제 천주교회는 사회정의와 민주화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으로 나서게 됩니다. 정치적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은 공권력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성역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4)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광주의 비극을 목격한 이듬해인 1981년 10월,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대규모 집회를 통해 한국 사회 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교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피 끓는 여정에 온전히 함께하지는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의 진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는 하나의 독립된 지역교회로 설정된 지 15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날의 감격을 가톨릭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150여 년 전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터전을 마련하고 독립 교구를 이룩한 목자들과 선조들의 위업을 기리며 그 높은 뜻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한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10월 18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장엄하게 펼쳐졌다.”(가톨릭신문 1981년 10월 25일자 1면) 한국교회 성장의 기폭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조선대목구를 설정해 한국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구로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981년 10월 18일 거행된 기념행사는 단순한 축하를 넘어, 3년 뒤인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103위 성인 시성식’으로 이어지는,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서울 여의도에서 장엄하게 거행된 신앙대회에는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 총재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해, 주한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등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500여 명의 사제단, 그리고 80만 신앙인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날의 감격스러운 순간을 가톨릭신문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80만을 헤아리는 신앙의 인파가 여의도광장을 입추의 여지 없이 메운 가운데 오전 10시 막이 오른 신앙대회는, 순교자의 피로써 이 땅에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하나의 거대한 나무로 성장했음을 그대로 입증하는 한편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래 교회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이룩했다.”(가톨릭신문 1981년 10월 25일자 1면) 한국교회 성장에 경탄과 감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 신앙대회에 보낸 축하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더 심화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열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습니다. 특히 교황은 “이 기쁜 축제는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한국 겨레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으며,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서 꽃피어 신자들의 삶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했는지 잘 말해 주고 있다”며 경탄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특별 강론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 안에서 교회가 참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교회 지도자들이 가난을 말하면서도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 억눌린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또한 교회 역시 다른 이익단체와 같은 생리를 지녀 자기 팽창에만 몰두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사회의 구조악을 조장하지 않았는가”를 깊이 반성하자고 촉구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는 분명히 수적 증가를 모든 면에서 이룩하고 있으나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이 사회를 변혁하는 누룩의 구실을 과연 하고 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며 교회 지도자들이 부패를 연장시키는 방부제가 아니라 생명을 부패에서 보호하는 소금의 역할을 다하도록 반성하고 선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의 의미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은 한국교회가 북경 주교의 관할에서 벗어나 교황청 직속의 독립된 교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150주년 행사는 평신도들의 자발적 투신으로 세워진 한국교회가 보편교회와 일치하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게 된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5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펼친 다양한 기념사업, 특히 여의도광장에 80만 명이 모여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와서 보시오”라고 외치며 자신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날 기념행사에 이어, 한국교회는 3년 후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 및 103위 시성식 등의 대규모 종교 집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냅니다. 이러한 대규모 집회는 독재정권에 대항해 우리 사회 최후의 양심의 보루로 자리매김한 모습과 함께, 1980년대 한국교회의 비약적 교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날 대회에 이어 1984년 ‘이 땅에 빛을’ 주제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습니다. 각종 기념행사와 정신운동, 기념사업과 사목회의 등은 선교 3세기를 여는 야무진 발걸음이었습니다. 더욱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0년대 말까지 두 차례에 걸쳐 방한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명실상부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그 첫 발걸음이었던 셈입니다. 겨레의 운명에 부활을 하지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교회의 성장을 마냥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으로만 그칠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당시 불과 1년 전 폭압적 국가 권력에 의해 무죄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광주의 비극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광주라는 민족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150주년 기념행사에 앞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9월 9일 담화문을 통해 이를 일깨웠습니다. 김 추기경은 담화문에서 “오늘 우리는 빛나는 교회사를 기리는 한편 감격과 함께 무거운 사명감을 느낀다”며 “일제의 식민지 36년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지만 동시에 초래된 국토분단의 아픔이 이어져 다시 36년, 우리 겨레는 지금 유물과 배금주의 권력의 획일주의 아래 지치고 허탈감에 빠져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어 “하느님의 법 안에서 양심과 정의와 일치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오늘의 우리는 이 땅의 모든 형제가 의심하고 방황하며 괴로워할 때 희망을 주는 민족사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수난사로 특징지어진 우리 겨레의 역사로 하여금 인류 평화에 크게 공헌하는 소명의 길”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이러한 호소는, 이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해 펼친 새로운 선교와 사목 정책의 수립 노력, 그리고 이 땅의 민주화를 향한 거침없는 투신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1980년대는 그야말로 격동과 거대한 전환의 시기였습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3) 5·18 광주 민주화운동(하)

1980년 5월, 광주는 민족의 십자가였습니다. 국민을 지키라고 쥐여준 총칼로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던 그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며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그 참담한 시간을 과연 어떻게 통과하고 있었을까요? 강요된 침묵, 거대한 감옥 당시 대한민국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거대한 감옥이었습니다. 군화와 총검에 의한 공포 정치는 극에 달했고, 유언비어 유포죄로 즉결 심판을 받거나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신군부는 모든 언론을 사전 검열했습니다. 이 때문에 광주의 진상을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알더라도 침묵해야 했습니다. 언론은 광주의 참상을 불순분자와 간첩이 선동한 폭동으로 왜곡했고,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하는 기사만 내보냈습니다. 김대중 등 유력 정치인과 민주화 인사들은 이미 예비검속으로 구속되거나 수배 중이었기에, 폭압적 정치를 비판할 지도자들은 물리적으로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총칼로 공포 정치 만행 신군부,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왜곡 광주대교구 등 진실 외쳤지만…주교회의는 양비론적 태도 보여 진실을 향한 광주대교구의 필사적 노력 이 암흑기 속에서 한국교회, 특히 광주대교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2014년, 당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히지노) 대주교는 ‘5·18 광주민중항쟁 34주년 기념 학술발표회’ 기조강연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광주민중항쟁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참여했지만 지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제들이 평화적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만 체계적인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다만 사실 왜곡에 대한 진실 규명에 관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당시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구호 물품보다 ‘진실의 전파’였습니다. 비록 천주교회가 학살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묻혀버릴 뻔한 신군부의 만행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는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학살의 목격자 그리고 기록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와 수녀들은 학살 현장의 목격자였습니다. 남동성당 등은 시민군의 피난처가 되었고, 사제들은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며 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외신기자들과 협력해 학살의 증거를 해외로 반출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도청 최후 진압을 앞둔 5월 24일, 긴박한 상황에서 사목교서를 발표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광주도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전했습니다. 이어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6월 10일경, 최초의 5·18 진상 보고서로 평가받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발표했습니다. 대검 사용, 무차별 구타, 조준 사격 등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이 문건은 비밀리에 복사되어 전국 성당과 대학가, 해외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는 ‘광주는 폭동이 아니라 학살’이라는 진실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울지는 못했다 서울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지키고 있던 명동성당이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이곳에서 봉헌된 시국미사는 광주의 진실이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됐습니다. 성당을 중심으로 독일 제1공영방송(ARD)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일명 ‘광주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대학생과 시민들은 ‘폭동’이 아닌 ‘학살’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전두환 정권의 회개와 퇴진을 요구하며 최전방에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광주와 함께 울지는 못했습니다. 주교회의는 5월 23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주교단은 “정부, 군, 민간인 모두 자신의 입장만을 절대시해선 안 된다”며,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이성을 되찾고 형제의 입장에서 이해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양비론적 태도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일방적 폭력이라는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와, 목숨을 걸고 광주를 탈출해 진상을 알린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 등은 불의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에 깊은 고립감과 괴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광주 사제단이 7월 17일, 침묵하는 주교들에게 개별 서한을 보내 공식적 입장 표명을 촉구했던 것은 이러한 안타까움의 발로였습니다. 가톨릭신문의 침묵과 왜곡 그리고 동조 광주의 비극이 이어지는 동안 가톨릭신문의 지면에서 유혈사태의 진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6월 1일자 1면에 관련 소식이 실렸지만, 주교회의의 원론적인 담화문과 구호 활동 등 단편적인 소식뿐이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6월 8일자 사설은 이번 사태가 “견해 차이나 오해로 인해 대화 대신 대결을 택한 탓”이라며, 책임 규명조차 무의미하다고 썼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아 겪었던 시련은 우리 한국 백성의 것이기도 하다”며 광주의 비극을 하느님이 주신 시련인 양 묘사했습니다. 이는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비이성적 대결로 치부하고, 신군부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보도였습니다. 예언자 직무를 유기한 부끄러운 역사 물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검열 속에서 사실 보도가 어려웠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고 예언자적 직무의 수행을 자신의 본질로 여기는 교회 언론으로서 가톨릭신문의 당시 처신은 명백하게 비복음적이었습니다. 나아가, 단순한 침묵을 넘어 정권에 대한 ‘동조’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가톨릭신문은 노골적인 친정부 성향을 보였습니다. 1980년 9월 7일자 사설이 대표적입니다. 신문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을 두고 ‘새 시대의 지도자’를 맞아 국민이 희망에 부풀어 있다며 장황하게 찬양했습니다. 광주의 5월에 대한 정의로운 판단은 완전히 삭제됐고, 민주화의 꿈을 짓밟은 정권에 종교적 언어로 면죄부를 준 셈입니다. 후대의 역사는 이 시기를 가톨릭신문이 교회 언론으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권력의 시녀가 되었던, 가장 부끄러운 시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신문은 교회 내의 진보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고, 유일한 교회 언론이었던 가톨릭신문을 대체할 대안매체가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2) 5·18 광주 민주화운동(상)

민주화 열망 짓밟은 신군부…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교회 움직임은 구호·모금에 그쳐…언론 통제로 사실 보도 불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의 억압적 통치가 이어지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1980년에 접어들어 다시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계엄 철폐’와 ‘전두환 퇴진’의 목소리가 거리를 휩쓸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980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춘계 주교회의를 열고 시국 담화문을 발표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하루속히 민주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신군부는 민주화의 요구를 국가 안보를 해치고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짓밟힌 일상과 시민군 1980년의 봄은 잔인했습니다. 5월 18일 아침, 광주의 거리는 아비규환으로 변했습니다. 공수부대가 국민을 향해 곤봉과 대검을 휘둘렀습니다. 자식과 이웃이 짐승처럼 사냥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광주 시민들의 가슴속에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교구청 창문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공포에 떨며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진압이 아니다. 사냥이다. 인간 사냥이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들에게 저토록 잔인한 마음을 주셨나이까.”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계엄군은 조준 사격을 가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광주 시내 본당의 신부들은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을 수습하며 군인들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쏘지 마시오! 제발 쏘지 마시오! 이들은 당신들의 형제요, 누이입니다!” 총성은 멈추지 않았고,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고를 열어 ‘시민군’이 되었습니다. 고립된 섬, 사제들의 '죽음의 행진' 광주는 고립된 섬이 되었으나, 주먹밥과 헌혈로 서로를 살리는 ‘절대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23일 오후 2시, 남동성당에 민주인사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를 꾸리고 계엄사령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답은 없었습니다. 26일 새벽, 계엄군의 전차가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와 조철현(비오) 신부 등은 수습대책위원회, 수백 명의 시민들과 함께 전차 앞으로 ‘죽음의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살상했기 때문이오. 무력 진압을 멈추고 사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오.” 다행스럽게도 전차가 물러났습니다. 그날 밤, 다시 전차 진입이 임박하자 도청에 남은 시민군과 학생들은 사제들을 억지로 내보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여기서 죽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가 폭도가 아니었다고, 끝까지 광주를 지켰다고 증언해 주십시오.”(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가 사제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 광주의 진실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던 젊은 영혼들은 차가운 바닥에서 산화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침묵의 시간…. 6월 2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첫 번째 공식 성명서 <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과 우리의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언합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무력을 남용한 당국에 있으며,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의로운 시민들이었습니다.”(1980년 6월 2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성명서 발췌) 이 성명서는 복사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광주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진실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진실이 가려진 보도 광주 시민들이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했던 비극의 시대, 당시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교회는 광주와 광주대교구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신문 역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신문(1980년 4월 1일자부터 ‘가톨릭시보’에서 ‘가톨릭신문’으로 제호 변경)에 광주의 비극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6월 1일자부터였습니다. 그날 가톨릭신문 1면에 ‘광주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여기에서는 5월 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형제적 화해(和解) 기반 마련해야’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전했습니다. “한 핏줄 한 형제, 유혈 충돌만은 말아야 -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가톨릭신문 1980년 6월 1일자 1면) 강요된 침묵, 구호와 모금 활동만 전해져 같은 날 신문에는 ‘광주 성직·수도자 전원 무사’, ‘김재덕 김남수 주교 광주 방문 실패’, ‘전주 사제단 광주 희생자 위로 미사’, ‘전국 각 교구장 각 본당에 신자들 기도 당부 서한 보내’, ‘서정길 대주교 담화문 발표, 구호금품 모집 등 호소’ 등이 보도돼 행간에 숨은 긴박함을 엿보게 했습니다. 주교회의 상임위는 23일 서한 발표 후, 27일 긴급회의를 열고 6월 1일 주일에 광주 지역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각 본당에서는 25일 주일 미사 때 서한문을 낭독하고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어 대구대교구 이문희(바울로)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레나도)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아우구스티노) 주교와 성 베네딕도회 수련장 진 토마스 신부 등이 29일과 30일 광주대교구청을 방문했습니다. 전국에서는 헌혈 운동, 성금 모금 등을 전개하고 유족들에게 성금을 전달했습니다. 이후 가톨릭신문은 지속적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구호금품 모집과 전달, 오태순(토마스)·장덕필(니콜라오) 신부 등 7명이 광주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계엄사령부에 연행된 사실 등과 관련한 후속 기사를 보도했고 6월 8일자에는 사설 ‘광주민에 마음의 구호를’을 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주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광주에 대한 소식은 언론 보도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7월 6일자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아 발표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담화문 기사에서도 사태의 본질에 대해서는 관련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광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강요된 침묵과 절망으로 묻혀갔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듬해인 1981년 3월 3일 취임식을 가졌습니다. 온 나라가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특히 불의하게 가려진 진실은 하느님과 역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자적 소명을 한국교회는 길고 지루하지만, 끊임없이 이어갔습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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