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라 베르나(La Verna), 프란치스코의 골고타 언덕(2)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나와 오른편으로 오르면 라 베르나 성지의 가장 중심이 되는 해시계의 광장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장소는 1612년 자코포 리고찌(Jacopo Ligozzi)가 대성당 종탑 벽에 지금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해시계를 만들어 놓은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광장에는 이 산의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하늘과 계곡과 나를 이어주는 중심처럼 서 있으며, 카센티노 계곡의 탁 트인 전경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거대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은 바깥세상과 신성한 공간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성모 승천을 기념하여 14세기에 봉헌된 바실리카 대성당입니다. 성당 내부에는 안드레아 델라 롭비아의 수태고지, 예수 탄생, 예수 승천 등 테라코타 작품을 볼 수 있고, 유물 소성당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을 때 입고 있던 수도복과 오를란도 백작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사용한 손수건, 밥그릇, 물잔과 오상의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묻은 천 조각, 라 베르나 산을 오를 때 사용한 지팡이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성인의 시간으로 우리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인도하는 듯합니다. 광장과 연결된 계단을 따라 아래에 있는 ‘사소 스피코(Sasso Spicco)’는 라 베르나 지역 전체에서 가장 강렬하고 거칠며, 영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곳 중 하나입니다. 깊고 좁은 협곡 위로 솟아오른 거대하고 인상적인 암벽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땅을 뒤흔든 지진에 의해 이 거대하고 갈라진 바위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이 협곡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이었습니다. 성인은 사소 스피코의 희미한 빛과 고립된 환경을 고독한 기도와 참회 그리고 그리스도 수난의 신비에 대한 깊은 묵상을 위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사소 스피코 위에는 14세기 후반 모든 은수자의 주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봉헌된 경당이 있습니다. 라 베르나 성지에서 가장 아늑하고 유서 깊은 장소 중 하나로, 1214년 프란치스코 성인이 라 베르나 산에 처음 올라와 기도하고 잠을 자던 첫 번째 초막이 있던 장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성당 안에 보관된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약속의 탁자(Mensa delle promesse)’입니다. 현재 제대에 끼워진 이 돌은 성인이 잠자리이자 소박한 식사를 위한 식탁으로 사용했던 바위였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어느 날 성인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바로 이 바위에 앉아 그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순례자들은 그 신비로운 돌을 만져보며 예수님의 현존을 지금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상 경당’을 가기 위해서는 바실리카 대성당과 연결된 ‘오상 회랑’을 지나야 합니다. 오상 회랑은 대성당과 오상 경당을 연결하는 건축적, 신학적 구조물입니다. 1578년에서 1582년 사이 건설된 이 길고 지붕이 덮인 통로는 원래 혹독한 겨울철에 산을 강타하는 매서운 바람, 비, 눈으로부터 수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회랑이 건설되기 전 수도자들은 험준하고 종종 얼어붙은 길을 따라 악천후를 무릅쓰고 경당에 가야만 하였습니다. 당시 행렬은 하루에 두 번, 낮과 밤에 진행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오후 3시에 경당 방향으로, 오후 3시30분에 대성당 방향으로 행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어느 날 밤 강한 눈바람 때문에 수도자들은 그날 밤 행렬을 포기하게 됩니다. 다음 날 아침 행렬을 위해 이곳에 모인 수도자들은 눈 위에 수많은 발자국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숲속 동물들이 수도자들을 대신해 행렬했던 것입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날씨와 관계없이 행렬을 할 수 있는 회랑 건설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도의 벽면에는 피렌체 화가 바초 마리아 바치(Baccio Maria Bacci)가 20세기에 그린 프란치스코의 이야기가 18점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현대적인 스타일이면서도 전통을 존중하는 이 그림들은 프란치스코의 회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감동적인 순간들을 묘사하며 순례자들에게 깊은 사색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회랑 중간쯤에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깊고 축축한 바위틈 사이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침대가 보입니다. 아시시의 가난한 사람 성 프란치스코는 차갑고 습기 많은 곳에서 잠을 자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 고통에 오로지 일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라 베르나 성지의 신학적·영적 중심지인 오상 경당은 1263년 시모네 다 바티폴레(Simone da Battifolle) 백작의 요청으로, 1224년 9월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인장을 몸에 받은 바로 그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 경당은 단순하고 소박한 건축 양식을 띠고 있으며 수도자들이 매일 기도하는 자리가 양옆으로 채워져 있고, 제대 정면에는 안드레아 델라 롭비아가 1481년경 제작한 기념비적인 테라코타 십자가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흰색과 파란색이 주를 이루는 이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는 천사들과, 그의 발치에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 성 요한, 성 프란치스코, 성 예로니모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상 경당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는 제단 앞 바닥에 대리석 테두리로 표시된 곳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1224년 9월 14일경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이 세운 수도회 안에서 형제들 사이에 여러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여겨지는 여섯 날개를 지닌 세라핌 천사가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프란치스코를 초대하며,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그리스도의 상흔을 새겨 주었습니다. 이곳은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의 오상을 통해, 세상 삶의 무게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우리 모두에게 드러내신 자비의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10-18 제3511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라 베르나(La Verna), 하느님을 만난 거룩한 산(1)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상에서 가장 머물고 싶었던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아마도 성인에게 세상의 중요한 장소는 두 군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곳은 사람들을 만나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장소이고, 다른 한 곳은 하느님을 만나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말씀을 듣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계명이자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성인에게 이 장소는 사람들과,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는 곳이었습니다. 마을에서 설교라는 방법으로 사랑을 주었고 구걸이라는 방법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은둔소에서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스스로를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베네딕도 수도원처럼 사람을 피해 산속에 머무는 혼자만의 은둔 생활이 아니라 마을로부터 너무 멀지도 않은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장소를 선택하여 머물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성인의 은둔소 중 가장 높은 해발 1120m에 있는 성지 ‘라 베르나(La Verna)’는 언뜻 생각하면 베네딕도 수도원처럼 산속 깊숙한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람들이 살던 마을 ‘키우지 델라 베르나(Chiusi della Verna)’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1213년 몬테펠트로의 산 레오 성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명을 받은 키우지의 영주 오를란도 백작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라 베르나 산을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라 베르나 산이 매우 험준하고 거룩한 곳이라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고행하거나 은둔 생활을 하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이 산을 내주고자 했습니다. 소유를 원치 않던 프란치스코는 백작의 말처럼 속죄와 기도 생활에 적합한 산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형제 둘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 말이 다르지 않음을 듣고 1214년부터 오상을 받던 1224년까지 여섯 번 이 산에 오르게 됩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로 대부분 순례자가 다니고 있지만,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이 다녔던 돌길을 통해 올라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울창하고 거대한 너도밤나무와 전나무 숲으로 뒤덮인 산은 마치 신비로운 기운을 품고 있는 듯 장엄하게 솟아 있습니다. 햇빛이 거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오르는 길은 마음을 고요와 사색으로 이끌고, 순례자를 일상의 번잡함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해 주며, 800년 전으로 돌아가 이 길을 오르던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무엇이었을지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라 베르나 성지에 도착하기 전 가파른 길 때문에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즈음 조그만 경당이 나타납니다. 문이 닫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문 중앙에 뚫려 있는 작은 격자 틈으로 어둑한 안을 들여다보면 새 떼에 둘러싸인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전기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는 프란치스코가 처음 라 베르나에 오르는 도중 강하고 공격적인 맹금류부터 작고 연약한 참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새들이 요란한 날갯짓으로 프란치스코를 환영하였다고 합니다. 험준하고 고립되어 보이는 이 장소가 얼마나 거룩한 장소인지를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통해 보여 주신 표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당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602년에 세워졌습니다. 새들의 경당을 지나 약 100m 길을 오르다 보면 중세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나게 되고 문 위에 써진 라틴어 문장은 다시 한번 이곳이 거룩한 장소임을 되새겨 주며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Non est in toto sanctior orbe mons(이 산보다 거룩한 산은 세상에 없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에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프란치스코 성인이 봉헌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있습니다. 1216년 프란치스코는 기도 중에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발현한 동정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고, 마리아는 프란치스코에게 이 성당의 크기와 지을 장소를 직접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성당 내부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습니다. 성당에 들어서면 앞 공간은 1250년부터 10년간 확장된 곳이고, 수도자들의 기도 좌석이 있는 안쪽 부분은 프란치스코가 직접 봉헌한 공간입니다. 칸막이벽 양쪽에는 롭비아 가문의 안드레아와 그의 아들이 만든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테라코타 두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안토니오가 함께 있는 예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내려져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함께 무덤에 모시는 피에타입니다. 값비싼 대리석이 아닌 진흙이 주재료인 테라코타는 가난이라는 프란치스코의 성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예술 작품들은 모두 테라코타로 되어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기도석이 있는 제단 위에는 역시 안드레아가 단독으로 1488년에 만든 테라코타 부조가 있습니다. 중심에는 얼굴과 여섯 개의 날개로 표현되는 세라핌과 케루빔에게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가 있고 그 아래에는 왼쪽부터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사도 성 토마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보나벤투라가 동정 마리아의 승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는 성 토마스에게 당신의 성스러운 허리띠를 내려 주고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상처 난 옆구리에 손을 넣었던 성 토마스가 또다시 동정 마리아의 승천을 믿지 못하자, 마리아는 당신의 허리띠를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성유물은 피렌체 근교에 있는 프라토 대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중앙 제대 아래에는 1262년에 선종한 오를란도 백작의 무덤이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굽비오(Gubbio), 사람과 늑대 사이의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굽비오(Gubbio)는 해발 500m의 인지노(Ingino)산 자락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굽비오는 기원전 3세기부터 역사를 이어 왔으며, 중세에는 자치도시(Libero comune)로 다시 태어나 12세기부터 14세기 사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이 시기를 상징하듯 도시 중심에는 오르비에토의 안젤로가 1332년부터 1349년까지 건설한 웅장한 콘솔리 궁(Palazzo dei Consoli)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궁은 굽비오 최고 집정관의 집무실이 있던 관저이자, 도시의 주요 법적 판결이 내려지던 법정이었습니다. 또한 시민 회의가 열리던 시민 자치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굽비오가 전성기를 누리던 13세기는 무엇보다 굽비오와 프란치스코가 깊이 만난 시기였습니다. 아시시가 성인이 태어나 새로운 소명을 품고 세상의 옷을 벗어 버린 첫 번째 고향이라면, 굽비오는 그 소명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하느님의 옷을 입은 두 번째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06년 아시시 재판장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주며 회개의 삶을 시작한 프란치스코는 곧바로 굽비오로 향했습니다. 그는 가는 길에 강도의 습격을 받아 매를 맞고 옷까지 빼앗긴 채 눈 쌓인 도랑에 던져졌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굽비오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친구였던 부유한 상인 자코모 스파다롱가에게 피난처를 구했습니다. 스파다롱가 가족은 프란치스코를 자신들의 상점 창고에 머물게 하며 극진히 돌봤습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으며, 오래도록 기억될 상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거칠고, 염색하지 않은 회색 천으로 만든 옷을 허리끈으로 묶어 선물한 것입니다. 이 옷은 훗날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13세기 중반, ‘백 개의 독방’이라 불리는 수도원과 함께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봉헌된 고딕 양식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성당 내부에서는 두 곳의 중요한 장소를 볼 수 있습니다. 중앙 제대 오른편에는 프란치스코의 친구 스파다롱가가 프란치스코에게 첫 수도복을 입혔다고 전해지는 옛 창고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중앙 제대 왼편 성체 소성당에는 움브리아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후기 고딕 양식 회화 연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타비아노 넬리의 프레스코화 <동정 마리아의 생애>(1408~1413)가 그려져 있습니다. 정경이 아닌 외경에 전해지는 동정 마리아의 생애가 시간순으로 자세히 그려져 있어, 중세 사람들이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공경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그림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더 이상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 아니라 굽비오에서 모든 사람의 형제가 된 가난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듯, 굽비오는 포기에서 재탄생으로 나아가는 근본적인 전환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이곳은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합니다.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나는 어떤 물질적·정신적 짐을 벗어 던져야 할까?” 도시 외곽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공원 가운데 작지만 정겨운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나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Vittorina)을 만나게 됩니다. 1220년경 굽비오는 거대하고 사나운 늑대 때문에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 늑대는 동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해쳤습니다. 주민들은 무기를 들고 다녀야 했고, 도시는 공포에 마비되었습니다. 이에 연민을 느낀 프란치스코는 늑대를 만나기 위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성벽 밖으로 나갔습니다. 늑대가 그에게 달려들자, 성인은 십자 성호를 긋고 늑대를 “늑대 형제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매일 먹이를 제공할 테니, 다시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늑대는 순종하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 프란치스코의 손에 앞발을 올려놓았습니다. 비토리나 성당은 보편적 화해의 장소입니다. 포악했던 늑대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폭력과 불의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 갈등까지도 가리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두려움 앞에서 도망가거나 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감과 경청을 통해 화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도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겸손으로 각자의 삶에서 마주하는 ‘늑대’와 화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했듯, 우리 역시 외적이든 내적이든 삶 안에서 마주하는 두려움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비토리나 성당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도시 중심의 사벨리길에는 평화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della Pace)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도시 사람들과 늑대 사이의 깊은 유대감과 소중한 기억을 간직한 곳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비토리나 성당에서 길들인 늑대는 2년 동안 굽비오의 집들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주민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다가 늙어 죽었습니다. 평화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바로 그 늑대가 죽은 동굴 위에 세워졌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현재 제단으로 사용되는 돌이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돌 위에서 굽비오 주민들에게 설교하고, 주민들과 늑대 사이의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제단을 받치고 있는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굽비오 외곽에서 사람과 짐승을 해치던 늑대를 성스러운 십자가로 굴복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뒤, 그 늑대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돌 위에서 설교하며 늑대의 발을 통해 약속을 받았습니다. 늑대는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았고, 도시에서 먹이를 제공받으며 근처 동굴에서 사람들과 함께 순종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성당 지하에는 늑대의 무덤을 덮을 때 사용한 대리석 뚜껑이 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그 뚜껑에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른편의 작은 입구는 성 프란치스코를 만난 뒤 늑대가 약 2년 동안 살았던 동굴로 이어집니다. 이 성당은 프란치스코의 평화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의와 나눔에 기반한 지속적인 사회적 계약임을 일깨워 줍니다. 굽비오를 떠나며 다음 기도문이 떠오릅니다. ‘굽비오에서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에게 존엄의 옷을 입혀 주셨으니, 저에게도 새 내면의 옷을 입혀 주는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세상의 상처 입은 이들에게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환대의 기술을 가르쳐 주소서. 두려움과 편견의 벽을 넘어 제 삶의 늑대들을 마주할 수 있는 복음적인 용기를 주소서. 제 삶을 화해와 나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새들과 이야기를 나눈 ‘프란치스코의 사막섬’

포조 부스토네의 거룩한 동굴에서 선교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형제들만 낯선 땅으로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신앙을 ‘틀린 신앙’으로 여겼던 이 시기의 선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형제들을 비그리스도교 지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큰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프란치스코는 1219년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제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 다미에타까지 갔습니다. 당시 십자군은 나일강 범람과 홍수, 역병,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37세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측 교황 대리 펠라조의 허락을 받아 39세의 이슬람 술탄 말릭 알 카밀을 만났습니다. 그는 평화의 필요성을 말하며 술탄과 그 백성들에게 개종을 권고했습니다. 또 자신의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 제사장과 함께 그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 때문이고, 살아남는다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로 불을 등진 채 달아났고, 술탄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은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감탄해 보물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을 서약한 프란치스코는 재물을 먼지처럼 여겼습니다. 이를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는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간 프란치스코는 말릭 알 카밀을 만나 평화를 전한 뒤, 베네치아인들의 배를 타고 돌아오다 사막섬을 발견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있었다는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성 보나벤투라가 쓴 「대전기」에 나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1263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유해를 확인하고 대성당으로 옮기기 위해 파도바에 머물며, 프란치스코 성인이 베네치아의 사막섬에 머물렀다는 전승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베네치아의 석호를 건너는 동안 많은 새 무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새 형제들이 창조주를 찬미하고 있으니 새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시간경을바치자고 했습니다. 새들은 사람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지만, 새소리가 기도 소리와 뒤엉켜 시간경의 응송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성인은 새들에게 자신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잠시 소리를 멈춰 달라고 했습니다. 새들은 알아들은 듯 성인과 동료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다시 지저귀어도 좋다고 허락하자, 자기들의 방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섬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작은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프란치스코는 동료인 일루미나토와 함께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섬은 오래전부터 ‘두 포도나무의 섬(Isola delle due vigne)’으로 불렸고, 소유주는 베네치아 사람 야곱 미키엘이었습니다. 성인이 선종한 뒤인 1233년, 야곱 미키엘은 이 섬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했습니다. 이때부터 섬은 ‘프란치스코의 섬’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5세기 무렵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섬은 한때 방치되어 황폐해졌고, 지형적 의미에서 ‘사막(deserto)’이라는 말이 붙어 ‘프란치스코의 사막섬’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오히려 긍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곧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과 단절된 고요한 은수처’라는 뜻으로 더 빛나게 된 것입니다. 수도원 입구 현판에 적힌 ‘O BEATA SOLITUDO, O SOLA BEATITUDO(오, 복된 고독이여, 오, 유일한 행복이여)’라는 문구처럼, 이곳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고독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유일한 행복을 지금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인 13세기 사각 정원과, 염분 많은 섬에서 빗물을 받아 모아 사용하던 우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물은 육신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도자들의 생활 공간 한가운데 자리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사각 정원 한쪽 벽에는 13세기 부조로 만들어진 프란치스코회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벌거벗은 팔은 예수님의 팔을, 옷소매가 있는 팔은 프란치스코의 팔을 나타냅니다. 두 팔의 손바닥에는 모두 못 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십자 모양으로 교차된 두 팔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삶 안에서 온전히 따르고자 했던 열망을 상징합니다. 사각 정원과 붙어 있는 수도원 성당은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이 프란치스코가 시성된 해인 1228년에 처음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의 성당은 수 세기에 걸친 증축과 개축, 복원을 거치면서도 최대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성당과 성모 마리아 소성당 사이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장소인 프란치스코의 기도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새겨진 문장은 이곳이 성인께서 머물며 기도했던 자리임을 일깨웁니다. ‘Hic est locus ubi oravit seraphicus pater Franciscus(여기는 천사 같은 사부 프란치스코가 기도한 장소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땅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종교 간 갈등의 해소와 평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자국의 이익만을 외치고 이웃을 적으로 돌리며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오늘,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레 첼레(Le Celle), 무한한 주님의 사랑이 있는 프란치스코의 독방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코르토나는 해발 500m에 자리한 산간 도시로, 기원전 8세기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살기 시작한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1211년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코르토나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일과를 마치고 기도하며 휴식을 취하고 싶어 했습니다. 동료 중 한 명이었던 귀족 출신 귀도 바뇨텔리는 도시 안의 여러 장소를 제안했지만, 성인은 늘 그랬듯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자연에 둘러싸인 한적한 곳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귀도는 도시에서 4km 떨어진 레 첼레(Le Celle)를 추천했습니다. 이곳은 절벽에서 작은 폭포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는 장소였습니다. 이미 6세기부터 은수자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함께 온 동료들과 이곳에 머물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었습니다. 생명의 표징인 물과 믿음의 표징인 바위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 아시시로 가기 전, 프란치스코는 사순 시기를 보내기 위해 트라시메노 호수 안에 있는 큰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사막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쉽게 찾아오기 어려운 한적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뱃사공에게 자신을 섬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빵 두 덩어리만 들려 있었습니다. 섬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뱃사공에게 아무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성목요일이 될 때까지 자신을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 섬에서 나무와 가시덤불 사이에 있는 작은 굴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서 온전히 회개와 기도의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준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목요일이 되자 약속대로 뱃사공은 다시 섬으로 향했습니다. 빵 두 덩어리만 들고 섬에 들어간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떠오르자, 뱃사공은 혹시 굶어 죽은 성인의 시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다가오는 프란치스코의 손에는, 처음 들고 들어갔던 빵 두 덩어리 가운데 남은 한 덩어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작은 방들’ 의미하는 ‘레 첼레’ 산 중턱 골짜기에 숨겨진 수도원 성인의 마지막 유언이 깃든 곳 오늘날까지 기도 공간으로 이어져 프란치스코가 다시 레 첼레를 찾은 것은 1215년의 일입니다. 이번에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큰 섬에서 먼저 사순 시기를 보내고, 레 첼레에서 부활절을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그는 포악한 남편 때문에 절망에 빠진 한 여인에게 남편의 회개를 예언했고, 동료들이 자신을 위해 구해 준 새 망토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선종한 해인 1226년, 시에나를 거쳐 아시시로 가기 전 레 첼레를 다시 찾았습니다. 1224년에 받은 오상의 상처와 1225년 폰테 콜롬보에서 받은 눈 수술 때문에 성인의 몸 상태는 매우 위독해 보였습니다. 이에 형제들은 시에나에서 성인에게 마지막 권고와 유언을 적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인의 건강이 잠시 호전되자, 동료들은 성인을 아시시로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정을 좀 더 편안하게 이어 가기 위해 레 첼레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성인은 자신의 영적 삶을 기록한 나머지 유언장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성인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동료들의 결정에 따라 아시시로 돌아온 성인은 1226년 10월 3일 포르치운콜라에서 선종했습니다. 코르토나에서 한참 동안 산길을 걸어 레 첼레 정문에 들어서면, 먼저 놀라움이 앞섭니다. 수도원이 마치 부채꼴처럼 산 중턱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다른 은수 장소들과 달리, 이곳은 정말 은수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장소입니다. 이탈리아어 ‘Le celle’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작은 방들’을 뜻합니다. 영어의 ‘cell’도 생물학적 최소 단위인 세포를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된 ‘엑셀’ 프로그램의 셀 역시 행과 열이 교차해 만들어지는 작은 네모 공간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레 첼레는 여러 은수자의 독방들이 모여 벌집 같은 형태를 이룬 곳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적어도 세 번 머물며 기도했던 독방은 감옥처럼 답답한 장소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성인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 좁은 독방은 역설적으로 세상 어느 곳보다 넓은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성인의 독방 맞은편, 계곡 너머에는 복자 귀도의 동굴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에서 시중들었던 마르타처럼, 프란치스코가 오로지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돌봐 준 인물입니다. 성인이 선종한 뒤, 코르토나 출신의 엘리아 수사는 프란치스코회의 제2대 총봉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235년 성인의 독방 위층에 성인의 독방과 같은 크기의 방 다섯 칸을 증축했습니다. 자신과 형제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이 방들은 지금도 거의 같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의 한 분파인 영성파가 이곳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1363년에 파문된 뒤에는 한동안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후 1528년 인준받은 프란치스코회 남자 수도회인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1537년부터 이곳을 토스카나 관구 수련소로 사용했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프란치스코의 독방과 같은 크기인 가로세로 2m 넓이의 방 20개를 마련하고, 공동 기도를 위한 수도원 성당도 추가했습니다. 이곳은 1992년까지 수련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도 이곳은 여전히 수련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공간은 기도의 집으로 바꾸어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성소자들이 수도원 전례에 참석하며 피정할 수 있는 장소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고요하고 풍요로운 숲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주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이곳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 프란치스코의 신앙이 얼마나 깊이 이어져 있는지 느끼게 됩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폰테 콜롬보, 규칙서를 받은 프란치스코의 시나이산

이탈리아 리에티 지역, 수백 년 된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해발 550m의 폰테 콜롬보(Fonte Colombo)는 원래 파르파 베네딕도 대수도원의 소유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은수자들이 사용하던 작은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경당을 중심으로 기도 생활을 이어 갔고, 오늘날에도 경당 안에서는 그가 직접 벽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타우(ת)’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파스카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서 직접적인 타우를 언급하진 않지만, 문설주와 상인방의 형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의 문은 그들의 히브리어 알파벳 타우(ת) 모양과 같았고 이 표시는 ‘이집트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우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이며 세상의 마지막 날을 상징하는 예언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오메가(Ω) 또한 요한묵시록에 쓰인 것처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타우를 처음 접한 것은, 제4차 라테란공의회가 있던 1215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개회식에서 언급하면서라고 합니다. 교황은 에제키엘서의 타우 표식을 인용하며, 자신도 모든 교회가 가난한 옷을 입고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인장을 이마에 찍어주길 희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죽음까지 1년도 안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도전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많은 군중 사이에 프란치스코가 있었고 교황의 말씀은 메아리가 되어 프란치스코에게 강한 부름으로 마음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더욱 열정적으로 참회와 회개로 이끄는 설교를 하였고, 그 표시로 자신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에게 타우의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식은 사람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서명처럼 자신의 편지와 자신이 기도하던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에도 그려 넣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타우는 참회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었고 그리스도의 삶과 승리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타우 십자가는 프란치스코에게 누구보다도 특별하였고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샘물을 뜻하는 ‘폰테(fonte)’와 비둘기를 뜻하는 ‘콜롬보(colombo)’가 합쳐져 만들어진 ‘폰테 콜롬보’라는 이름은,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작은 비둘기들이 샘물 주위에 모여 물을 마시고 있던 모습에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 샘물을 마시며 평화를 누리는 비둘기들을 보면서, 프란치스코 또한 주님의 생명의 물을 마시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성인이 살아 있을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이미 수천 명의 형제를 거느린 공동체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선종 이전부터 형제들 가운데는 프란치스코의 규칙이 너무 금욕적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절대적 가난을 지키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설교를 통한 선교 생활에도 맞지 않는다며, 기존 수도원주의와 금욕주의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인은 수도회 총봉사직을 사임하고, 1223년 폰테 콜롬보에서 40일간 단식한 뒤 완화된 규칙서를 마련해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 인준을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 가운데에는 이 규칙서마저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해, 그것이 교황의 손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없애려 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규칙서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규칙서를 지키지 않으려면 수도회를 떠나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인준된 규칙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폰테 콜롬보는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은 것처럼, ‘프란치스코의 시나이산’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6세기 베네딕토 성인이 건물 안에 사는 정주 수도원을 위한 보편적인 규칙서를 썼다고 한다면,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건물을 허물고 세상 밖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새로운 규칙서를 쓴 것입니다. 폰테 콜롬보와 관련된 프란치스코 생애의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은 선종 1년 전인 1225년에 일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제5차 십자군 시기에 이집트까지 가서 이슬람 최고 지도자인 술탄 알카밀을 만났고, 그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평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눈병을 안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기에 1224년 오상까지 입으며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우골리노 추기경의 권유로 눈 수술을 받기 위해 폰테 콜롬보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리에티에는 교황이 머물고 있었고, 유능한 안과 의사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수술은 고문과 다름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눈으로 흐르던 고름을 막기 위해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귀에서 눈썹까지 찔러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인 곁에 있던 형제들은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 눈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달아났고, 그곳에는 성인과 의사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쇠막대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 성인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불의 형제’를 부르며 고통을 덜어 달라고 간청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눈 옆으로 파고들던 쇠꼬챙이의 뜨거움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돌아와 프란치스코를 본 형제들은 주님의 자비에 찬미를 드렸습니다. 비록 수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성인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찬가> 안에 불의 형제에 대한 내용을 쓰게 됩니다. “내 주님, 불 형제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그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씩씩하고 힘차나이다.” 성인의 형제애가 동식물을 떠나 물질에도 있었음에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포도주 기적으로 주님 현존 보여 주신 장소, 라포레스타 성지

오늘날 ‘라 포레스타’ 또는 ‘산타 마리아 델라 포레스타’ 성지로 불리는 이곳에는 11세기 성 파비아노 교황(236~250년 재위)에게 봉헌된 자그마한 성당과 가난한 사제가 머물던 2층짜리 숙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작은 채소밭과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성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는 옛 제대가 남아 있는 성 파비아노 성당의 모습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제대 뒤편 둥근 벽감의 그림들은 15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 세바스티아노, 성 파비아노, 성 요한 세례자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순교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현재 성당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이곳에 머물던 시기(1346~1568년)에 성 파비아노 성당의 왼쪽 벽을 허물어 확장한 것입니다. 현재 성당은 숲속의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산타 마리아 델라 포레스타’라는 이름을 새로 갖게 되었습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제대 위 유리로 가린 벽감 안에는 언뜻 보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장면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기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장면이며, 그 옆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인물은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이곳의 이야기는 1225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성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엘리아 수사의 권유와 훗날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되는 우골리노 추기경의 초청으로 프란치스코는 리에티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치스코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당시 리에티에는 호노리오 3세 교황이 머물고 있었고, 유능한 교황 주치의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리에티에 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성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근처 마을에서까지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부담을 느낀 프란치스코는 리에티 성문을 들어서지도 않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리에티에서 5km 떨어진, ‘숲’이라는 뜻을 지닌 라 포레스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온 네 명의 형제들 레오, 베르나르도, 안젤로, 마세오와 함께 그곳에서 50일가량 머물며 눈 수술을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성인은 자신이 기도하기 좋아하던 갈라진 바위 동굴에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어려움을 주님께 맡기며 자비를 청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이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리에티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이 평화로운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깊은 산속까지 모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포도가 맛있게 익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오후의 태양은 한여름과 다를 바 없이 뜨거웠고, 산속까지 걸어온 사람들은 허기지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들에게 라 포레스타의 탐스러운 포도는 유혹을 넘어 하나의 선물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포도밭 주인이었던 담당 신부에게 묻지도 않고,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그 자리에 앉아 포도를 따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구니에 포도를 담아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했습니다. 무참히 망가진 포도밭 절망…풍성한 포도즙 기적으로 바꿔 사람들이 마구 짓밟아 놓은 포도밭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머물 곳을 내어주었던 가난한 신부의 마음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곧 이 모든 일이 프란치스코 때문에 일어났다는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포도밭은 신부에게 일 년 동안 삶을 이어 가게 해 주는 생계의 터전이었고, 미사에 꼭 필요한 포도주를 마련해 주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망하고 화가 나 있던 가난한 신부에게 프란치스코는 말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누구에게도 무례한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제 말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적어도 두 배의 포도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당신께 채워드리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한 뒤, 남아 있는 포도를 모아 포도즙을 짜는 틀에 넣고 사람들에게 밟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많은 양의 포도즙이 흘러나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현존 앞에서 두려움과 찬미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포도즙을 짜던 틀 반대편에는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이 잠자고 식사를 했던 장소를 기념하는 제대가 있습니다. 그 왼쪽 벽에는 식사 준비를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벽난로의 나무 그을음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장소와 연결된 옛 수도원의 작은 사각 정원을 지나 오른편 통로의 계단을 내려가면,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갈라진 바위 절벽 동굴에 이릅니다. 성인이 머물던 이 동굴에서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면, 지금은 평원이 된 리에티 계곡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당시에는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건너갈 만큼 물이 많은 호수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프란치스코가 이곳에서 바람 형제와 물 자매에 대한 <피조물의 찬가> 일부를 썼다고 말합니다. 눈병으로 고통받던 시기에 성인은 시각에 의지하기보다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깊이 느끼며,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시각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찾았던 프란치스코처럼, 현재 라 포레스타에는 ‘몬도 엑스(Mondo X)’라는 공동체가 살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1960년대 밀라노의 엘리지오 신부의 구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마약이나 세상의 편리함 속에서 자신을 잃고 더 이상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모여, 기도와 노동, 그리고 함께 사는 형제들의 사랑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산과 바람과 물이 있는 이 숲속에서, 이들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과 참된 세상을 찾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레초 마을, 첫 구유 만들어 봉헌한 프란치스코의 베들레헴

주님 성탄 대축일이 가까워지면 떠오르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과 쌍둥이 도시라고 불리는 그레초(Greccio)입니다. 해발 705m에 자리한 그레초는 라치오(Lazio)주 리에티(Rieti)현에 속한 인구 1500명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도망치거나 유배된 사람들이 와서 세운 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이름은 Grecia, Grece, Grecce 등으로 변형되어 내려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3년부터 세상을 떠난 1226년까지 여러 차례 그레초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도시 사람들을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로 여겼으며, 그 어느 도시보다도 회개가 많이 이뤄진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1220년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온 그에게, 자신이 순례했던 예루살렘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활동했던 13세기 초반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회는 십자군에 참여하라고 외쳤고, 사제들은 십자군을 위한 봉헌금을 독려했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가 ‘성전’을 외치며, 이슬람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벌이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거룩한 땅에서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부터 수도자를 가리키는 호칭도 ‘혼자 사는 사람’을 뜻하는 ‘모나코(Monaco)’에서 ‘형제’를 뜻하는 ‘프라테(Frate)’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들, 곧 ‘프라텔리(fratelli)’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칭처럼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이슬람 사람들로부터 떼어 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이 지닌 좋은 관습은 받아들여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열심히 기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이 하던 것처럼 기도 시간 전에 종탑에 올라 종을 울려 모든 사람을 기도로 초대하게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성지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그레초에서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그 거룩한 땅을 만지려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그곳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거룩한 땅은 어디에나 있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이곳 그레초도 거룩한 땅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1223년 성탄이 가까워질 무렵, 아기 예수를 뵙고자 하는 열망이 프란치스코의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리에티에 머물고 있던 호노리오 3세 교황의 허락을 받아 이 세상의 첫 구유를 만들게 됩니다. 그 구유는 오늘날처럼 모형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유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단순한 자리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그레초의 귀족 요한 벨리타(Giovanni Velita)에게 여물로 쓸 밀짚과 소 한 마리, 당나귀 한 마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횃불을 들고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사제는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부제복을 입은 프란치스코는 목각으로 만들어진 아기 예수를 바위 위 움푹 파인 자리에 모셨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자리 같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곳에서 강생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도했습니다. 제대 위에서 성변화의 신비 안에 예수님께서 오시는 순간, 아기 예수도 함께 오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바위 위에 모셔진 아기 예수가 눈을 뜨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당나귀와 소는 밀짚 여물을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소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나귀는 다른 모든 민족을 가리킵니다. 밀짚은 바로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육화의 신비로 예루살렘의 한 부분이 된 그레초는 모든 세상의 예수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탄생 동굴의 제단화는 두 가지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오른쪽은 예루살렘의 성탄으로, 요셉과 함께 있는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께 젖을 물리는 장면입니다. 왼쪽은 그레초의 성탄으로, 앞에서 설명한 첫 구유의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조토 학파에 속한 익명의 화가가 1409년경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가 그레초에 왔을 때, 귀족 요한 벨리타는 마을에 성인이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기도의 장소를 찾으셨던 것처럼, 프란치스코도 설교와 구걸을 위해서는 마을로 들어갔지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는 마을 외곽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택했습니다. 성인이 머문 곳은 그레초에서 2km 떨어진 동굴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을 은수처처럼 사용했고, 오늘날 그가 잠잘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돌베개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첫 전기 작가로 알려진 톰마소 다 첼라노(Tommaso da Celano, 1185-1265)가 쓴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여러 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한 은인이 깃털이 들어간 베개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한 형제를 불러 베개를 치워 달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간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벤 베개에 마귀가 붙어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더 이상 마귀가 내 머리맡에 있는 것을 원치 않으니 그 베개를 치우도록 하시오.” 프란치스코는 그레초의 가난함과 단순함 속에서 예수님을 닮으려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란치스코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탄생 동굴과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동굴 위층에는 13세기 말에 만들어진 수도자들의 독방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머물렀던 공간은 가운데 좁은 복도를 두고 양옆에 독방을 배치한 구조입니다. 이 독방들 가운데 오른쪽 첫 번째 방은 성 보나벤투라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사용한 방입니다. 독방 맞은편에는 형제들이 공동 기도를 바치던 나무 기도소가 있습니다. 성무일도서가 귀했던 시절 함께 보았던 커다란 기도서도 눈에 띕니다. 기도소를 지나 반대편에는 프란치스코가 1228년 성인품에 오른 뒤,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처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포조 부스토네, 주님의 자비와 프란치스코의 선교 사명 시작된 곳

1206년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닮고자 부모를 떠난 프란치스코의 삶은, 자신을 따르는 형제들과 살기 시작한 뒤에도 마음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구걸과 설교를 하러 떠돌아다니는 형제들을 본 사람들은 “우리는 저런 수도복을 본 적이 없다”며 “마치 야만인들 같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형편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먹을 것을 주는 대신 진흙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비난받을 일이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어려움이 자신들의 생활 양식이 아직 교회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그동안 죄를 짓고 살아오며 쌓인 양심의 무게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로마로 가는 도중 포조 부스토네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리에티에서 18km 떨어진 포조 부스토네는 해발 756m에 자리한 마을로, 리에티 계곡 북동쪽 가장자리 언덕 위에 있습니다. 집들 가운데 일부는 길가에 있지만, 대부분은 언덕을 따라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중세 마을에 들어서면 ‘Buongiorno, buona gente!(안녕하세요, 선한 사람들!)’의 문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문에 다다릅니다. 이 문은 프란치스코가 1209년 동료들과 함께 아시시를 떠나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포조 부스토네 주민들에게 건넨 인사를 기념합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있는 로마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9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인사말은 여전히 이 마을에 울려 퍼집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인 10월 4일 아침이면, 북을 치는 한 사람이 마을의 거리와 계단을 지나며 모든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같은 따뜻한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선한 사람들!” 마을에서 성 야고보의 길을 따라 600m 정도 오르면 성 야고보 수도원에 도착합니다. 이 수도원은 본래 사비나에 있는 파르파 대수도원이 소유했던 곳으로, 1217년 프란치스코에게 기증되었습니다. 수도원 광장에는 14~15세기에 걸쳐 세워진 수도원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목조 지붕을 얹은 단일 공간의 성당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수도원의 사각 회랑은 16세기에 조성됐으며, 이곳에는 15세기 움브리아와 토스카나 지역 화풍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성모자상과 17세기에 그려진 프란치스코의 생애 그림들이 남아 있습니다. 수도원 뒤로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푸른 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포조 부스토네 마을과 호수, 목초지, 해바라기밭이 펼쳐진 리에티 평야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아래층에는 프란치스코가 도착하기 이전 수도원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된 동굴 성당과, 좁은 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프란치스코 은둔소가 있습니다. 성 야고보 수도원에서 해발 1075m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절벽 동굴’로 가기 위해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다 보면, 이곳에서 있었던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하는 여섯 개의 아주 작은 경당을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 경당이 있는 장소에는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바치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는 성무일도서가 젖을까 염려해 바위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바위가 기적적으로 무너져 내리며 성무일도서를 비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무일도서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직사각형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 빈 공간은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 대성당에 보존된 성인의 성무일도서와 크기가 같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경당에는 산에 오르다 지친 프란치스코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쉬었을 때, 그의 수도복 두건 자국이 기적적으로 찍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세 번째 경당에는 프란치스코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기대었던 바위에 그의 팔꿈치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네 번째 경당은 악마가 바위 위에 나타나 프란치스코를 유혹하고, 그의 기도를 방해하려 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섯 번째 경당에는 프란치스코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 경당 안에는 성인의 발걸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의 발자국이 전해집니다. 이 경당들을 지나면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절벽 동굴에 이릅니다. 바위 절벽 아래에는 14세기 초에 세워지고 16세기에 확장된 두 개의 작은 경당이 있습니다. 이 경당들은 마치 제비집처럼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던 은수처의 동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경당 내부는 바위를 깎아 만든 두 개의 공간이 위아래로 겹친 모습입니다. 장식은 거의 없지만,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떨리게 하는 공간입니다. 아래쪽 입구로 들어가면 14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제단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천사가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신시켜 주는 17세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바위 절벽에 만든 거친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 가난한 프란치스코가 머물던 동굴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기도하는 프란치스코와 함께 쉬고 있는 에지디오 복자를 그린 그림이 놓인 작은 제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가, 죄악 속에서 보낸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프란치스코에게 주님의 용서를 전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진정한 영적 탄생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고, 그의 수도회가 놀랍도록 확장될 것이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초기 교부들은 사람의 이성만으로는 볼 수 없고, 하느님께서 스스로 드러내셔야만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영역을 ‘신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모습을 드러내신 거룩한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리에티, 이탈리아의 중심에서 교회의 중심이 된 도시

‘옴파로스(ὀμφαλός)’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세상의 중심을 찾기 위해 두 마리의 독수리를 동쪽과 서쪽으로 동시에 날려 보냈습니다. 두 독수리는 그리스의 도시 델포이에서 만났고,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 몸의 중심을 뜻하는 ‘배꼽’이라는 말, 곧 옴파로스를 그 상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리에티(Rieti)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거의 중앙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배꼽’이라는 뜻의 ‘움빌리쿠스 이탈리애(Umbilicus Italia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에티의 특별함은 단지 지리적 위치에만 있지 않습니다. 리에티는 고대 로마가 탄생할 때 그 곁에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간 도시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8세기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군신 마르스는 어느 날 땅에 내려와 레아 실비아(Rhea Silvia)를 만나게 됩니다. 레아 실비아는 이후 로마를 세우게 되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레아 실비아는 순결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삼촌 아물리우스(Amulius)에게 벌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해 리에티의 옛 지명은 레아에서 유래한 레아테(Rheate)로 전해집니다. 지금도 리에티 지역 사람들을 ‘레아티니(Reatini)’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 리에티를 고대 로마의 어머니와 같은 도시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와 리에티의 관계가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두 도시는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고, 결국 기원전 290년 로마 공화국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Manius Curius Dentatus)에 의해 리에티는 로마의 식민도시가 됩니다. 덴타투스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 이미 이가 나 있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리에티는 로마식 도시 구조를 갖추며 로마 세계 안으로 편입됐습니다. 리에티가 그리스도교와 연결된 시기는 기원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의 제자로 여겨지는 성 프로스도치모(Prosdocimus) 주교의 도움으로 리에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리에티는 신앙과 문화가 함께 자라난 도시가 됐고, 중세에는 교황들이 머문 도시 가운데 하나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리에티가 경제적·종교적으로 번영을 누린 시기는 ‘교황들의 도시’로 불렸던 아나니와 더불어 교황들의 거처로 사용되던 때였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198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역대 교황 가운데서도 강력한 교황권을 행사한 인물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교회 안에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노리오 3세 교황도 1219년과 1225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회칙을 인준해 준 교황으로 기억됩니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27년, 1232년, 1234년에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전 든든한 후견인이었고,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를 성인품에 올리며 새롭게 일어난 복음적 수도운동을 교회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또 클라라 성녀와도 깊은 영적 인연을 맺었습니다. 니콜라오 4세 교황은 1288년과 1289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으로는 처음 교황좌에 오른 인물입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298년 리에티에 머물렀고, 1300년 교회 역사상 첫 성년을 선포한 교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황들이 머물렀던 중심에는 리에티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1109년부터 1225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금도 리에티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성당 왼쪽 문 위에는 리에티의 초대 주교로 공경받는 성 프로스도치모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교황들이 머물던 교황궁은 주교좌성당 오른편에 붙어 있습니다. 1283년에 세워진 이 건물 2층에는 교황들이 리에티 시민들과 프란치스코 성인을 축복했다고 전해지는 발코니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발코니 앞에 서면, 한때 이 작은 도시가 교회의 중심 가까이에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에티가 누린 이 영광의 시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머물렀던 시기와도 겹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덕분에 리에티 일대는 오늘날 ‘거룩한 계곡’이라 불립니다. 실제 지형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평야 지대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신앙의 기억 안에서 이곳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가 깊이 새겨진 영적 계곡입니다. 이곳에는 십자형으로 이어지는 네 곳의 프란치스코 성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209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시시를 떠나 로마로 가는 길에 포조 부스토네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참된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한 평화를 체험했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1223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회의 시나이산’이라 불리는 폰테 콜롬보에서 회칙을 완성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베들레헴과 닮은 마을 그레초에서 처음으로 살아 있는 구유를 마련하고 성탄 밤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성탄 구유 전통의 중요한 시작으로 기억됩니다. 1225년에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리에티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라 포레스타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포도주의 기적을 통해 주님의 섭리를 드러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피조물의 찬가> 일부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리에티는 이탈리아의 지리적 중심일 뿐 아니라, 중세교회가 새로워지던 시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이 깊이 새겨진 자리였습니다. 무너져 가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부르심을 들었던 프란치스코에게, 리에티의 네 성지는 네 개의 기둥과도 같았습니다. 그 기둥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다음 회부터 네 차례에 걸쳐, 리에티의 거룩한 계곡에 남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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