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9) 양업시스템 개통

“서울대교구가 교회 역사상 최초로 교구 전체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한 종합정보시스템 ‘양업시스템’을 개통, 교회 정보화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서울대교구는 … 9월 20일 오전 11시30분 ‘천주교 서울대교구 종합정보시스템’ 개통식을 가졌다. 양업시스템은 서울대교구 교구청과 산하 각 본당, 기관을 네트워크로 연결한 종합정보시스템으로 1년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이날 정식 개통했다. 이번 종합정보시스템 개통은 정보 사회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 대응으로 그동안 다소 뒤처진 감이 있던 한국교회 전체의 전산화, 정보화 사업 추진이 가속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네트워크의 구축에서부터 그룹웨어, 교구 및 본당 행정 프로그램, 인터넷 홈페이지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발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 타교구 및 전체 한국교회 정보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가톨릭신문 1998년 9월 27일자 1면)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정보사회로 진입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특히 1994년 정보화 정책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가 이뤄진 것이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PC통신이 1980년대 후반부터 대중화되었는데, 1997년 이후 초고속 인터넷 보급으로 빠르게 인터넷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90년대 말, 이미 정보사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한국 사회 안에서 교회는 정보화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양업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양업’ 시스템의 명칭은 두 번째 사제이자,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던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종합전산화 구상인 ‘모세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한국교회의 정보화는 1998년 전 세계 가톨릭 최초의 단일 교구 행정망인 ‘양업시스템’ 개통, 2008년 전국 단위의 ‘통합 양업시스템’ 구축을 거쳐, 2026년 현재 인공지능(AI) 기반의 ‘성 가롤로 아쿠티스 프로젝트’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정보화 시대에 맞춰 행정·사목·선교 네트워크 구축 1998년 서울대교구 개통 이어 통합 시스템에 전국 교구 참여 한국교회 유기적 연결 체계로 독창적 ‘디지털 복음화‘ 이끌어 사목 행정 전산화의 모태, 모세 프로젝트 한국 천주교 사목 행정 전산화의 체계적인 출발점은 1995년 4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발표한 종합전산화 사업 ‘모세 프로젝트’입니다. 당시 정보화 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주교회의 사무처 특별기구인 ‘가톨릭 사목행정 발전위원회’와 ‘한국가톨릭전산원’ 등이 공동으로 이 청사진을 수립했습니다. 모세 프로젝트는 단순한 사무 전산화를 넘어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IT 기술을 통해 확장하려는 3단계 중장기 발전 전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단계는 전국을 하나로 잇는 종합행정망 및 표준 행정서비스의 완성, 2단계는 전국 신자 및 사목 정보 DB 구축과 사목·선교 정보 서비스 운용, 그리고 3단계는 멀티미디어 서비스 제공 및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인적, 물적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사실상 무산됐고, 교회 정보화는 멀어진 듯했습니다. 전산화, 정보화의 초기 투자비가 엄청났지만 눈에 띄는 사목적 성과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 프로젝트는 한국교회 최초로 행정 관리, 사목 활동, 선교 사업의 표준화를 도모하고 체계적인 교회 정보화를 시도한 첫 사례였고, 이후 ‘양업시스템’을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양업시스템의 출범 수년 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던 교회 정보화가 획기적인 진전을 이룬 것은 1998년 서울대교구의 양업시스템 개발이었습니다. 1997년 당시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이었던 염수정(안드레아) 신부를 중심으로 ‘사목행정 발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의 기술 및 자금 후원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실로 1998년 9월 20일, 서울대교구는 교구청과 전체 본당 및 산하 기관을 단일 네트워크로 연결한 종합정보시스템인 ‘양업시스템’을 세계 가톨릭 최초로 정식 개통했습니다. 양업시스템의 도입은 교회 행정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종이 교적 및 필기식 장부에 의존하던 신자 관리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로 전환되었고, 교무금 자동이체, 전자문서 유통 등 각종 행정 처리가 온라인으로 가능해졌습니다. 나아가 서울대교구는 선교의 지평을 넓히고자 가톨릭 포털 ‘인터넷 굿뉴스’를 함께 개통하여, 인터넷을 통한 미사 중계와 신앙 정보 제공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로써 서울대교구는 한국교회 정보화 사업에 획기적인 선례를 남겼으며, 그 기술력과 경험은 다른 교구의 정보화 추진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후 각 교구에 양업시스템이 속속 도입되었고, 이는 전국 모든 교구의 행정 전산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목 행정 표준화 완성과 통합 양업시스템 구축 1998년 이후 교구별로 독립적인 전산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데이터의 중복이나 처리 기준의 상이함 등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사목행정표준화위원회’를 구성, 사목 행정 문서와 회계 원칙 등의 통일 작업이 추진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업시스템이 개발되었으며, 마침내 2008년 9월 전국 대다수 교구가 참여하는 ‘통합 양업시스템’이 정식으로 가동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2008년 10월 5일자 통합 양업시스템 개통 해설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전했습니다. “개통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한국교회 종합정보화 시스템 ‘통합 양업시스템’은 전산 체계상의 통합 뿐 아니라 사목 행정 체제의 일관성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각 교구가 독자적으로 그물을 쳐 물고기를 낚아 왔다면 이제는 13척으로 이뤄진 대선단이 서로 협력해 그물을 치는 형국인 셈이다.”(가톨릭신문 2008년 10월 5일자 19면) 정보화는 사목을 지향한다 한국교회는 세계 가톨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이고 선도적인 사목 행정 전산화 모델을 구축해 왔습니다.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작된 교회 정보화 사업은 단순한 본당 업무 자동화를 넘어, 전국 교구를 하나의 유기적인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거대한 디지털 복음화 네트워크로 발전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올해 5월 인공지능(AI) 시대에 맞춰 교구 정보 시스템 전반을 사목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성 가롤로 아쿠티스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정보화를 통해 보유한 본당양업, 교구양업, 그룹웨어, 굿뉴스, 하상앱 등 다양한 정보 자산의 활용을 사목에 집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6개월간의 컨설팅 후 3~5년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할 계획입니다.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8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0) 10호, 1000호, 3000호…지면에 남은 이야기

가톨릭신문이 7월 19일 3500호를 발행했다. 지난 99년간 가톨릭신문은 100호, 500호, 1000호 등 기념비적인 호수(號數)마다 ▲소식보도 ▲보조일치 ▲조국성화의 창간 사시(社是)와 이념을 성찰하며, 미디어 사도직의 사명을 되새겨 왔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주간지인 가톨릭신문은 이미 제5000호를 넘어섰어야 한다. 그러나 제73호(1933년 4월 1일자)를 끝으로 휴간한 뒤 16년 만에 제74호(1949년 4월 1일자)로 복간하면서 발행이 오랫동안 중단됐다. 창간 초기에는 월간과 월 2회 발행을 거쳤으며, 제210호(1960년 1월 3일자)에 이르러서야 주간지로 전환된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휴간과 한국전쟁 등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제100호(1951년 12월 1일자)는 ‘본보가 100호에 이르기까지’ 제목의 기사로 그 의미를 전했다. 기사는 “전국 5개 교구장 회의의 결의에 따라 교회 출판물을 서울에서만 발행하기로 한 결정에 눈물을 머금고 휴간하던 당시의 심정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며 “창간 때부터 함께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늘에서 제100호를 함께 기뻐하고, 앞으로 제1000호, 제1만 호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길 청한다”고 밝혔다. 제500호(1965년 12월 25일자)는 신문사의 연혁을 정리하고, 창간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6년 만에 발행 부수가 2600여 부를 기록했음을 알렸다. 기사는 “체제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천주교회보’가 우수했다”며 “저 멀리 하와이에 있는 교포들에게까지 읽힌다”고 실었다. 제1000호(1976년 3월 7일자)는 특집 좌담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교회의 쇄신 움직임과 가톨릭신문의 수난사를 함께 담았다. 공의회 이후 10년을 돌아본 기사는 “교회의 토착화는 복음화의 관건이고, 대화를 바탕으로 조화롭게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쇄신을 개혁으로 혼동하지 말고, 사랑으로 일치된 초기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고(故) 윤광선(비오) 전 편집국장의 기고로 회고한 기사는 제1000호에 다다르기까지 있었던 어려움을 사명감 하나만으로 극복했음을 조명했다. 창간 69주년에 이어 맞이한 제2000호(1996년 4월 28일자)는 창간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요청했다. 기사는 “제2000호는 한국 가톨릭 언론의 맥을 오랜 기간 이어온 언론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며 “한국교회의 눈과 귀, 입과 손의 역할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정론을 선도하고 펼쳐가는 가톨릭신문의 절체절명의 사명”이라고 다짐했다. 기념비적인 제3000호(2016년 6월 26일자)도 그간 발행한 지면으로 한국교회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며, “이 땅에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를 알리는 미디어 사도직을 수행해 왔다”고 짚었다.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면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 메리 힐리 박사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하느님 음성 듣는 기쁨 누리길”

성경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읽고 연구해 온 성서학자 메리 힐리 박사. 미국 세이크리드하트대신학교 성경학 교수이자 교회 학위 과정 신학대학원장인 그는 「가톨릭 성경 주석(the Catholic Commentary on Sacred Scripture)」 시리즈 책임 편집자이자 「마르코 복음서」, 「히브리서」, 「창세기」 주석 저자로,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경신성사부 위원, 국제 가톨릭 성령쇄신봉사회 신앙교리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성경과 전례, 성령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지를 전해 왔다. 사적 서원(私的誓願, votum privatum)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고 평신도로 살아가는 그는, 최근 3년 동안 위탁 양육해 온 카일을 입양하며 말씀과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응답이 되는지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창간 100주년 기획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를 통해 힐리 박사는 성경과 치유, 여성과 평신도의 역할, 그리스도인의 화합과 일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와 가톨릭 미디어의 사명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Q. 성서학 연구 성과를 신자들의 성경 읽기와 신앙생활에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많은 가톨릭 신자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하느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요. 성경은 오늘날과는 먼 시대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본문을 본래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그것이 오늘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필요합니다. 현대 성서학의 뛰어난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일반 독자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는 것, 그래서 신자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말씀을 일상에 적용하며 그 안에 담긴 생명을 주는 힘을 체험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저와 동료들이 「가톨릭 성경 주석」 시리즈를 펴낸 목적이었어요.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도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나누는 문화를 길러야 합니다.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기쁨에 눈뜨는 일이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읽기 쉬운 성경 번역본과 주석, 영상 강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읽는 방법을 안내하는 자료 등이 필요할 거예요. 이상적으로는 모든 본당에 소공동체 성경 공부 모임이 마련돼, 신자들이 끊임없이 말씀을 만나며 영적 자양분과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 신학자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추기경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신자로서 사목과 선교에서 진정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계획을 세운 뒤 그것을 장식할 만한 성경 구절을 찾는 게 아니라, 성경에서 시작해 그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요. Q. 저서 「치유: 하느님 자비의 선물을 세상에 전하다(Healing: Bringing the Gift of God’s Mercy to the World, 국내 미출판)」에서 치유를 단순한 기적 체험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와 복음 선포의 문제로 제시하셨는데요. 치유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머무시며 행하시던 복음 선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었어요. 모든 시대에 걸친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놀라울 만큼 많은 치유와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루르드 같은 성지에서, 때로는 성인들의 전구와 유해를 통해, 또 가장 일상적으로는 평범한 신자들의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말이죠. 치유는 가시적으로 구현된 복음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죄와 그 모든 결과를 이기셨고, 우리에게 생명의 충만함을 주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주니까요. 복음 속 예수님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치유를 청하라고 가르치시죠. 즉각적 치유가 언제나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저는 주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우리를 치유하기를 갈망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치유를 위한 모든 기도는 고통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Q. 2014년 교황청 성서위원회 첫 여성 위원에 이어, 2025년 1월에는 경신성사부 위원으로 임명됐습니다. 성경 연구와 전례라는 중요한 영역에서, 여성이자 평신도로서 교회에 어떤 고유한 관점과 역할을 더할 수 있을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과 남성은 각각 고유한 은사와 특유의 천재성을 품고 있어요. 여성들은 사물을 더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인간 개개인의 독보적인 가치에 주목하며, 언제나 사랑이 가장 우선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둡니다. 제가 「창세기」 주석을 쓸 때도 남성 학자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간 이야기 속 요소들, 이를테면 등장인물의 영적 성장이나 소외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자애로운 모습에 주의가 끌리곤 했어요. 교회가 여성들에게 신학과 성서학에서 더 높은 학위를 받을 기회를 많이 제공해, 신자들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역할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현재 경신성사부의 주요 과제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에서 요청하신 대로, 모든 신자가 전례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그 거행에 더욱 온전히 참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들이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힘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도록 필요한 지침과 자료를 마련하는 것이죠. 제 역할도 이러한 노력에 힘을 보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in persona Christi)’ 전례를 거행하는 직무 사제가 아니라,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입장과 시각에서 전례를 바라봅니다. 저를 비롯한 경신성사부의 평신도 위원들은 전례에 관한 논의가 신자들의 실제 삶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도울 수 있어요. 신자들이 본당 주일미사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전례에서 받은 은총을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 가는지에 주목하는 것이죠. 경신성사부가 이처럼 상호 보완적인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진전입니다. Q. 일부 신학교에서는 여성이 강의나 연구를 맡고 있지만, 사제 양성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의 은사는 사제 양성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여성들이 양성 과정에 참여하면, 직관과 세심한 시선으로 신학생의 인간적·영적 성숙에 깊이 있는 통찰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남성 양성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정서적·관계적 어려움의 징후를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도 있죠. 사제는 정통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거행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중과 사랑, 연민을 품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양성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직자를, 비판을 초월한 존재, 인간적인 약점조차 없는 존재로 여기는 사고방식도 내려놓아야 해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에 뿌리를 내리고, 여성과 남성 모두와 건강하게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정체성이 없다면 삶의 온갖 압박 속에서 중독이나 미디어 과의존에 빠지거나, 타인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등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어려움에 대응할 위험이 있어요. 이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학대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죠. Q.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 주관 ‘국제 오순절-가톨릭 대화’에 2013년부터 12년간 가톨릭 대표 위원으로 참여해 오셨습니다. 서로 다른 전통이 지닌 은사를 식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복음화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교파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요. 성령과 그 은사에 열린 오순절 교인들의 태도,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침례교인들의 자세,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증언하려는 복음주의 교인들의 열정이 그 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쓰셨듯, 에큐메니즘은 ‘단지 다른 이들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 안에 심어 놓으신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며, 이는 우리를 위한 선물이기도’(246항) 하니까요. 2033년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2000주년을 기념합니다. 그리스도인끼리도 화합하지 못한다면, 비신자들에게 우리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어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려면, 우선 서로 더 가까워지고 협력할 길을 찾는 일이 필요합니다. Q. 2027 서울 WYD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와 청년들, 그리고 창간 100주년을 앞둔 가톨릭신문에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서울 WYD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될 거예요. 한국 청년들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세계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기쁨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예수님을 세상 그 어느 보배보다도 “값진 진주”(마태 13,46)로 깨닫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는 여정에 기쁘게 나서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도 서울 WYD를 교회 안팎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새롭게 선포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해요. 청년들은 에너지와 창의성, 열정만으로도 훌륭한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죠. 청년들이 직접 대회를 준비하고 친구들을 초대해, 더 많은 이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가톨릭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으로 향하게 하고, 신앙의 빛으로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도록 돕는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이 세계 모든 신자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가톨릭신문의 모든 구성원과 한국교회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빛을 따라갈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성령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어, 한국과 그 너머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도록 보살피시기를. ■ 메리 힐리 박사는 1964년 뉴욕에서 태어나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한 메리 힐리 박사는 가톨릭계 노터데임대학을 졸업한 뒤 스튜번빌 프란치스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성경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웠다. 졸업 후 가톨릭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뒤, 워싱턴 D.C.대교구 승인을 받은 가톨릭 에큐메니컬 평신도 은사 공동체 ‘하느님의 어머니 공동체(Mother of God Community)’에 합류했다. 이후 철학과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한 뒤 2000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하느님의 어머니 공동체에서 8년 동안 코디네이터(coordinator) 역할을 마친 후 힐리 박사는 미시간주 세이크리드하트대신학교(Sacred Heart Major Seminary)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현재 성경학 교수이자 교회 학위 과정 신학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국제 가톨릭 성령쇄신봉사회 신앙교리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경신성사부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9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8) 범교회적 ‘금 모으기’ 운동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단체 대표와 106개 시민, 소비자, 종교, 농민 단체 등이 참여하는 외채 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이 1월 12일 본격 가동됐다. 김수환 추기경과 송월주 스님, 서영훈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한국소비자연맹 정광모 회장 등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명동 YWCA 강당에서 외채 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발대식을 갖고 장롱 속에서 사장되고 있는 금을 모아 국가 외환위기를 극복하자는 운동에 돌입했다.”(가톨릭신문 1998년 1월 18일자 1면)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의 붕괴 1997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단순한 금융 시장의 유동성 부족 사태를 넘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일시에 폭발한 전대미문의 국가적 재난이었습니다. 외환 보유액 고갈로 인한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한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초고금리 정책, 강도 높은 긴축 재정과 노동 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금융·기업 부문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이 강요됐고, 이는 실물 경제에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8년 한 해에만 2만4000여 개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자 수가 200만 명을 상회했습니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극빈층이 양산되었으며, 경제적 빈곤은 가정 해체와 생명 경시 풍조로 이어졌습니다. 실직과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한 가장들의 투신자살, 부모의 실직을 비관한 청소년들의 동반 자살, 급격한 이혼율 증가와 결식아동의 양산 등 이른바 ‘IMF형 사회 병리 현상’이 사회 전반을 뒤덮었습니다. 교회의 새로운 소명 이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수호했던 한국교회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경제 폭력에 의해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하고 붕괴된 공동체를 복원하는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은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던 물질주의, 과소비, 허위의식에서 찾았습니다. 교회는 위기의 본질을 ‘가치관의 위기’로 규정하고, 위기 극복 노력이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삶의 양식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파탄 위기에 처한 국가 경제난을 극복하자는 적극적 선택에 나섰다.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는 최근 경제난 극복을 위한 노력으로 고급 스포츠와 해외여행의 자제, 과소비 근절, 우리 상품 애용 등을 촉구하는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마련, 전 교회 차원의 경제난 극복 운동에 돌입했다. … 신자들의 동참 또한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가톨릭신문 1998년 1월 11일자 1면) 신자유주의 국제 경제 구조의 비판 한국교회는 개인의 도덕성 회복에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인 국제 경제 구조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당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석희(이냐시오) 주교는 IMF 1주년을 맞아 「위기를 기회로 삼읍시다」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담화는 위기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고도성장 위주 경제 정책, 정경 유착에 따른 관치 금융, 기업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중복 투자 그리고 각자의 도덕적 불감증”에서 비롯됐다며 위기의 근본 원인은 “경제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정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담화는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맹목적인 자유시장경제 체제와 투기적 국제 자본의 횡포에서 위기의 외부적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어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무한 경쟁으로 개도국과 중진국 경제는 물론 인간과 자연의 파멸을 강요하는 비인간적 체제를 유발하고 있다”며 “자유경쟁을 강조하며 약자의 고통을 외면했던 자유주의에 대응해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듯 신자유주의 물결이 새로운 전체주의나 과격주의의 온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 이끈 한국교회… 종교계와 함께 위기 대응 교회 공적 책임 다해… 사회복지 전반적 역량 이정표 구축 금 모으기 운동으로 자신감을 한국교회의 IMF 외환위기에 대한 대응은 초기에는 위기 극복을 위한 기도운동과 금 모으기 그리고 인식과 삶의 변화를 위한 실천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실직과 빈곤, 가정 해체 문제에 대응하는 사회복지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국민이 보여준 집단적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외채 상환 금 모으기 운동’이었습니다. 39억 달러까지 곤두박질친 가용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기 위해 장롱 속의 금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이 범국민적 희생 운동에서, 천주교회는 기획 단계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국적인 동참을 이끌어냈습니다. 1998년 1월 12일 오전 10시30분, 명동 YWCA 강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송월주 스님, 서영훈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등 종교계와 106개 시민사회단체 대표가 모여 ‘외채 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발대식’을 거행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신자들이 선물로 준 것을 모아두었던 금 142.58g을 헌납하며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종교계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은 집단적 패배감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위기 극복을 향한 강력한 도덕적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국민이 석 달 동안 모은 금의 총량은 227톤(약 22억 달러 규모)으로, 당시 1500억 달러에 달하던 총 외채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집단적 공포와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붕괴된 사회 안전망의 복원 외환위기가 남긴 가장 뼈아픈 상흔은 대량 해고로 인한 실업과 노숙의 급증이었습니다. 구조조정과 연쇄 부도의 칼바람을 맞은 가장들은 지하철역과 공원 등 거리로 내몰렸지만 이들을 보호할 국가의 복지 안전망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교회가 가장 먼저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실직자 지원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은 서울대교구 명동본당이 1998년 4월 13일 정식 개원한 ‘평화의 집’이었습니다. 가톨릭회관의 지하 주차장을 개조하여 실직자들을 위한 대규모 무료 급식 및 취업 상담 시설을 조성했습니다. 1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IMF 후유증이 장기화되고 실직자가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 2002년 7월 16일 폐원 미사를 봉헌할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운영됐습니다. 누적 이용 건수가 14만 2002건에 달했고, 매년 1500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위기 대응 1997년 시작돼 수년간 이어진 한국교회의 IMF 대응은 단순한 애국 캠페인 참여를 넘어, 한국교회가 사회적 위기에서 어떤 공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은 교회의 ‘상징 자본’(비물질적이지만 사회적 위계와 권위를 만들어내는 자원)을 드러냈고, 평화의 집을 비롯한 교회 내 본당과 단체, 시설 등의 실직자와 가정 지원 활동은 교회의 사회복지 역량을 시험했습니다. 그 결과가 모든 요구를 충족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이후 한국교회가 사회적 위기 대응에서 보여줄 수 있는 표준을 상당 부분 이 시기에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8면

[Hearing the Intellectuals of the Global Church – Doctor Mary Healy]

This article is released on July 26, 2026, in both print and online formats. Biblical scholar Dr Mary Healy has long read and studied Scripture as « a living Word in which God speaks to us personally. » Professor of Scripture and Dean of Theology for Ecclesiastical Degrees at Sacred Heart Major Seminary in the United States, she is general editor of the Catholic Commentary on Sacred Scripture(CCSS) series and author of its volumes on The Gospel of Mark, Hebrews and Genesis. As a member of the 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 and the Dicastery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and as chair of the Doctrinal Commission of the international Catholic Charismatic Renewal, she has shown how the Church can be renewed through Scripture, the liturgy and the charisms of the Holy Spirit. Consecrated to Christ by a private vow while living as a laywoman, she recently adopted Kyle after serving as his foster mother for three years — offering a concrete example of how the Word and love can become a lived response. In this instalment of Hearing the Intellectuals of the Global Church, Dr Healy shares her views on Scripture and healing, the roles of women and laypeople, Christian unity, the 2027 World Youth Day (WYD) in Seoul, and the mission of Catholic media. Q. How can the fruits of biblical scholarship be connected with the faithful’s reading of Scripture and life of faith ? A. Yet many Catholics have never learned how to read the Bible as a living Word in which God speaks to us personally. Because the Bible was composed in a distant time, language and culture, we need good resources to interpret biblical texts in their original context and show how they apply to life today. In our Commentary series, my colleagues and I draw from the best of contemporary biblical scholarship and present it in a way that is accessible to ordinary readers. Our goal is for Catholics to fall in love with Scripture and experience its life-giving power as they apply it to daily life. Every parish and diocese should cultivate a vibrant biblical culture, so that it becomes normal for Catholics to gather regularly for Bible study and discover the joy of learning to hear God’s voice through Scripture. To do this, we need to ensure that good resources are available: readable translations, biblical commentaries, video courses, Bible study materials that show how to interpret Scripture, and so on. Ideally, every parish should have small-group Bible studies available so that parishioners can continually be nourished and strengthened by encountering the word of God. As Cardinal Raniero Cantalamessa has said: « if we want to be fruitful in our ministry and mission as Catholics, we must learn to begin with Scripture and remain in it, rather than making our own plans and then looking for suitable biblical verses to adorn them. » Q. In Healing: Bringing the Gift of God’s Mercy to the World, you present healing not merely as a miraculous experience, but as a matter of God’s mercy and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Healings were an intrinsic part of Jesus’ proclamation of the gospel during his earthly life, and they are meant to be an intrinsic part of the Church’s evangelizing mission in every age. Today the Lord is doing a remarkable number of healings and miracles ! Sometimes they occur at shrines like Lourdes, sometimes through the prayers and relics of the saints, and very often through the faith and prayer of ordinary believers. Healings are a visible embodiment of the gospel, because they demonstrate in a tangible way that Christ is truly alive, that he loves us, that he is victorious over sin and all its consequences, and that his ultimate plan is for us to have the fullness of life. In the gospels, Jesus himself teaches us to pray for healing with confident faith. Although we do not always see an immediate healing in response to prayer, I am convinced that the Lord loves to heal and desires to heal far more often than we think! Every prayer for healing is an opportunity for a suffering person to experience the love and compassion of Christ. Committed to Christian unity and reconciliation The 2027 WYD in Seoul: a new opportunity to proclaim the Gospel Catholic media essential for interpreting the signs of the times Q. In 2014, you became one of the first women appointed to the 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 and in January 2025 you were appointed to the Dicastery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As a woman and a layperson, what distinctive perspectives and roles can you bring to the Church in these important areas of biblical study and liturgy ? A. Women and men each have their own distinct gifts and ‘genius,’ to borrow a term from Pope John Paul II. Women tend to see things in a more integrated way and to keep in view the incomparable value of the person and the primacy of love. When I was writing my commentary on Genesis, I found that my attention was sometimes drawn to elements of the narrative that male scholars had passed over, such as the spiritual development of individual characters and the Lord’s tenderness toward the marginalised. I hope the Church will provide more opportunities for women to obtain higher degrees in theology and biblical studies and to ensure that they have roles in teaching and forming the faithful. The main focus of the Dicastery at the present time is on providing guidance and resources for the liturgical formation of all Catholics, as called for by Pope Francis in Desiderio Desideravi, so that all can enter more deeply into the liturgy and experience its transformative power in their lives. My role will be to contribute to this effort. As a layperson, my perspective is not that of an ordained minister who celebrates the liturgy in persona Christi, but that of a member of the congregation who exercises the common priesthood of the faithful. I and the other lay member of the Dicastery can help keep the reflections on liturgical formation practical and concrete, focusing on what the faithful actually experience when they participate in the Sunday Mass at a parish and how they carry the liturgy into their lives. It’s wonderful that the Dicastery now has these complementary perspectives. Q. At some seminaries, women teach or conduct research but have no role in priestly formation. What part can women’s gifts play in the formation of priests ? Women tend to be more intuitive than men and to see persons from the heart. For this reason, women sometimes have deeper insight into the human and spiritual maturity of a seminarian; they may notice signs of an emotional or relational difficulty that the male formators have overlooked. It is crucial that such matters be addressed, since the priest needs to be someone who not only teaches orthodox doctrine and celebrates the sacraments, but who relates to all kinds of people with the respect, love and compassion of Christ. All Catholics, both ordained and lay, need to abandon the mentality that regards the ordained as a special class above others, who are somehow beyond criticism and not subject to human weakness. All Catholics need to learn to relate to women and men in a healthy way, to know ourselves well, and to develop close friendships with others. Above all, each of us needs to be deeply grounded in our identity in Christ as a beloved son or daughter of the Father. Without this, under all the pressures of life there is a risk of developing unhealthy habits and coping mechanisms such as addictions, media overuse, or relationships of manipulation and control, which can even result in abuse of others. Q. Beginning in 2013, you served for about 12 years as a member of the Catholic delegation to the International Pentecostal–Catholic Dialogue organised by the Dicastery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 How does discerning the gifts of different Christian traditions contribute to Christian unity and evangelisation ? Many have become aware of how much we can learn from the gifts of others. For instance, we Catholics can learn from Pentecostals’ openness to the Holy Spirit and his gifts, Baptists’ love for Scripture, and Evangelicals’ fervor to bear witness to Christ. As Pope Francis wrote in Evangelii Gaudium, ecumenism « is not just about being better informed about others, but rather about reaping what the Spirit has sown in them, which is also meant to be a gift for us. » (no. 246) As we approach the year 2033, the two-thousandth anniversary of the event at the center of all history — Christ’s passion, death and resurrection — we are once again becoming aware of the scandal of our divisions, which are an obstacle to evangelisation. How can we convince unbelievers that we are ambassadors of Christ, bearing a message of reconciliation, if we cannot get along with each other ? It is more urgent than ever today that we find ways to draw closer to one another and to collaborate in proclaiming Christ to those who don’t yet know him. Q. What would you like to say to the Church and young people in Korea as they prepare for the 2027 WYD in Seoul, and to The Catholic Times Korea as it approaches its centenary ? Yes, WYD will undoubtedly be a moment of special grace for the Church in Korea ! I hope that through it many Korean young people will encounter Christ personally and discover the joy of belonging to a global family of faith. I hope all the participants will come to know Jesus as the treasure, the pearl of great price, and embark on the adventure of living as his disciples. I encourage the Church not to be timid about taking WYD as an opportunity to proclaim the gospel anew, both to those already in the Church and those outside it. Young people can be the best evangelists because of their energy, creativity and enthusiasm. I hope the Church in Korea will directly involve young people in the preparations for WYD, and that the WYD events will include many opportunities for Catholic youth to invite their friends to come and encounter Christ for themselves. Catholic media is all the more essential in our time, since it can turn people’s hearts and minds toward what is truly valuable — what is good, true, and beautiful. With all the troubling events going on in the world, Catholic media can provide a compass that helps people interpret the signs of the times in the light of faith. Congratulations to all of you and to the Church in Korea, whose saints and martyrs are a profound inspiration to me and to all Catholics ! May the Lord continue to bless you and to make you alive in the Holy Spirit, so that you can bear witness to Christ in Korea and beyond. ■ About Doctor Mary Healy Dr Mary Healy was born in New York in 1964 and raised in a Catholic family. After graduating from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she studied theology at Franciscan University of Steubenville, where she developed a great love for Scripture. After a brief period of teaching at a Catholic high school, she joined Mother of God Community, a lay charismatic community near Washington, D.C. She then went on for further studies in philosophy and theology, completing a doctorate in biblical theology at the 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 in Rome in 2000. After serving for eight years as coordinator of Mother of God Community, she came to Michigan to teach at Sacred Heart Major Seminary, where she is now Professor of Scripture and Dean of Theology for Ecclesiastical Degrees. She is chair of the Doctrinal Commission of the international Catholic Charismatic Renewal, and also serves on the 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 and the Dicastery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Dr Healy is consecrated to Christ by a private vow. Last year, after being a foster mother for three years, she adopted a son, Kyle, who is now 14 years old. reported·translated by reporter Bak Juhyeon ogoya@catimes.kr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9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7) 남북 신자 첫 통일 세미나

“남북한 천주교 신자들이 분단 반세기 만에 만났다. 남북한 및 해외 천주교인들은 10월 30일 뉴저지 포트리시 힐튼호텔에서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역할’과 ‘남북 해외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 차례의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서 남측의 장덕필(니콜라오) 명동본당 주임신부와 손병두(요한 보스코)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국제분과위원장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 김유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각각 주제발표했다. 남북 참가자들은 일요일인 29일 뉴욕 소재 퀸즈한인성당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교민 신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최창무(안드레아)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 미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전제, ‘평양의 장충성당 교우와 남한과 해외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고 양측의 만남에 기쁨을 표시했다. 이어 차성근 장충성당 회장은 ‘북측 신자들은 미흡하나마 주일을 거룩히 지켜왔다’며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지만 여기에 그치지 말고 통일의 그날까지 함께 하기를 기원하자’고 인사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11월 5일자 1면) 1995년 뉴욕에서 역사적 만남 남북 천주교 신자 친교 이루며 체제·이념 초월한 형제애 나눠 분단 50년 만의 감격스러운 만남 1995년 10월, 분단 50년 만에 남한과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형제애를 나눴습니다. 남북 대표단은 28일 상견례와 만찬, 29일 공동 주일미사에 이어 30일 뉴저지 포트리의 힐튼호텔에서 통일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남한 천주교 인사들의 간헐적인 북한 방문은 있었지만, 남북한과 해외 천주교 신자들이 직접 모임을 갖고 통일을 위한 논의를 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당시의 감격적인 만남의 순간들을 가톨릭신문은 11월 5일자 1면 보도기사에 이어 3면에서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미국 뉴욕 퀸즈본당 주임 안상인(요셉) 신부는 “여기 특별히 반가운 손님들이 오셨다”며 “우리 모두 북한의 형제들을 뜨겁게 환영하자”고 인사했습니다. 이어 북한 장충성당 차성근 회장은 “해외 교우들에게 장충성당 교우들의 뜨거운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만남에서 특히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노인들은 북측 참가자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 새삼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황해도 출신 신자들은 앞다퉈 북한 신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북한 신자들은 미사에 앞서 안상인 신부에게 북에서 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기도서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열린 만찬에서는 남과 북의 신자들이 함께 식사하며 일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자들은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되자 서로의 어깨를 껴안고 정을 나눴고,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리랑, 도라지 등 남북한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우리 민요를 열창했습니다. 남북 교류와 인도적 지원 물꼬 터 1995년은 통일과 민족화해 분야에서 큰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해였습니다. 서울대교구가 3월 1일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키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교회의 사목적 인식에도 중요한 전환이 이뤄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을 침묵의 교회나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대화와 화해를 통해 일치를 이뤄야 할 상대로 여기게 됐습니다. 주교회의도 1999년 기존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꾸고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남측의 민화위와 북측의 조선천주교인협회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마침내 뜻깊은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당시 세미나는 학술 토론 자체보다 단절됐던 남북 교회 구성원들이 공식적으로 만나 끊어졌던 관계를 잇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북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함으로써 향후 남북 간의 인도적 지원과 인적 교류를 상설화하는 공식적인 고리를 만들어내는데 그 참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측에서는 최창무 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를 포함해 7명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위원장(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과 차성근 회장(평양 장충성당 회장) 등 5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습니다. 해외 대표단은 박창득 신부(아우구스티노·미주 교포 사목부 총대리) 등 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신뢰 구축·교류 위한 대화로 남측 사제단 공식 방북 성사 민족화해 사목 지속 기반 마련 통일세미나의 성과와 영향 1995년의 뉴욕 세미나는 일회적인 교류에 그치지 않고, 남북 천주교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1년 반 뒤인 1997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는 제2차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베이징 세미나는 일회성 만남을 넘어 지속 가능한 교류와 민족화해 노력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실무적 성격의 대화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방북 추진과 이에 앞선 남측 관계자의 방북, 명동성당과 장충성당의 자매결연, 상호 방문 등이 논의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구축된 신뢰를 바탕으로, 1998년 5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최창무 주교 등 7명으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의 공식 방북이라는 역사적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북측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의 공식 초청으로 성사된 이 방북에서 남한 사제단은 평양 장충성당에서 북한 신자들과 함께 직접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분단 이후 한국 주교가 사목적 목적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첫 사례가 됐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0년 6월까지 서울대교구 민화위를 통해 총 78억 3000여만 원에 달하는 식량과 긴급 구호 자금이 북한 수재민과 취약계층에 전달됐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 1995년 남북 가톨릭 신자 간의 첫 공동 세미나는 단지 50년 만의 악수나 일회성 만남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남한교회가 북한 가톨릭 공동체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공식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으며, 남한교회 내부에 지속적인 민족화해 사목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026년 7월 현재 한반도는 분단 81년, 6·25전쟁 정전 73년을 맞이했지만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대화 채널이 전면 단절된 극단적인 경색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북한은 2024년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데 이어 2026년 개헌에서는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영토 조항을 신설하는 등 ‘두 국가’ 노선을 명확히 제도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실천적이고도 다각적인 화해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주영(시몬) 주교는 2025년 8월 15일 발표한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에서 “불신과 미움 속에서 무기와 군사력을 방패 삼아 상대를 굴복시켜 얻은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북한 동포를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호혜적 협력에 기반한 교류를 지지하며 함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8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9) 가톨릭농민회와 함께한 60년

한국교회는 매년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은 농산물 생산에 힘쓰는 농민의 노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살도록 이끈다. 가톨릭신문이 전해 온 농민 주일과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자. 농민 주일은 1995년 시작됐다. 1995년 10월 29일자는 주교회의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와 가농의 요청에 따라 농민 주일을 제정한 소식을 지면에 실었다. 당시 사설은 “7월 셋째 주일로 정한 것은 도시민과 소비자들이 여름휴가와 방학 등을 이용해 농민과 쉽게 만날 기회를 갖자는 취지”라며 “이날은 한국교회가 농민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 외에도 산업화와 물질문명의 극심한 폐해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농민 주일 제정을 이끈 가농은 1966년 ‘가톨릭농촌청년회(JAC)’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1966년 10월 23일자는 1925년 벨기에 루뱅에서 시작된 JAC가 한국에도 발족했음을 전하며, “농촌 생활개선·계몽·교육이 복음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또 1971년 12월 5일자는 JAC가 ‘한국 가톨릭 농민회’로 개칭하고, 연령과 종교 제한이 없는 범 농민운동으로 거듭났음을 조명했다. 가농은 1976년 주교회의 인준과 창립 10주년을 함께 맞았다. 1976년 11월 7일자는 “농민들은 팔도 지방 농업 특산물을 봉헌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하느님께로 바침으로써 신앙을 재확인했다”며,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의 말을 인용해 “산업 구조상 다른 직종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농민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계속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응답해 가톨릭신문은 농민의 생존권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1986년 4월 27일자는 안동교구 가농이 농업 희생 정책으로 소외된 농민을 위한 농가부채 탕감대회를 열었음을 짚었다. 1991년 8월 18일자는 “가농이 중심이 되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우리의 식탁을 우리 것으로 차리자는 민족자주생활운동이기도 하다”고 했다. 가농은 사회 문제에도 나섰다. 1985년 8월 11일자는 “전주교구 가농이 주관한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행렬 중 경찰이 십자가를 탈취했다”며 “십자가가 훼손되고, 문규현(바오로) 신부를 비롯한 가농 회원 등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또한 1987년 11월 15일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야권 후보단일화를 위한 단식 농성과 쟁취대회를 개최해, 군부독재 정권 종식을 요구했음을 알렸다. 창립 60주년인 올해도 기념미사 봉헌과 공동결의문 발표 소식을 담았다. 2026년 2월 8일자는 “공동결의문에서 기후위기의 고통에 응답하며 땅과 생명을 살리는 농민운동을 이어가고, 생명의 밥상을 지키는 신앙인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6) 역사상 첫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6월 6일 오전 8시 명동성당 내에 농성 중이던 장현일 쟁의실장 등 한국통신 노조원 6명에 대한 경찰의 기습적 구속 연행으로 한국교회 사상 첫 공권력 투입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명동본당 사제단은 ‘현 정부는 2000년 동안 지켜온 교회의 관례법을 침해했다’고 규정하고 ‘2~3일 내로 사제단회의 소집을 요청하고 서울대교구 차원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사제단은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5공과 6공 군사 독재 시절에 지탄받던 비도덕적인 권력의 남용과 현 정부의 모습도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6월 11일자 1면) 1995년 6월 6일, 현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거룩한 공간으로 여겨지던 명동성당과 종로구 조계사에 경찰이 전격 투입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과 통신시장 개방, 한국통신 민영화 추진, 노조 간부 징계·사법처리 방침에 반발해 투쟁하던 한국통신(현 KT) 노동조합 간부들을 강제 연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은 1970년대 유신 체제와 1980년대 제5공화국의 군사 독재 시절에도 민주화 운동가들과 약자들을 품어 안았던 ‘성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 독재 정권조차 넘지 못했던 이 성역의 문턱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안고 탄생한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무력으로 유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1995년 명동성당서 농성하던 한국통신 노조원 강제연행 종교계, “성역 침탈” 강력 반발… 4개 종단 공동 침묵시위 사태의 사회적 배경 우선 당시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세계화 질서로의 편입과 신자유주의적 노동 재편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국통신 파업 사태는 단순한 사업장 내의 임금 협상 결렬이 아니라, 국가의 거시적 경제 정책과 노동계의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정부는 ‘세계화’를 최우선 국정 지표로 내걸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고, 노조는 통신 시장 개방 반대와 대기업 위주의 통신 산업 민영화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노사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는 노조의 주장을 ‘국가 전복의 저의’라고 규정하고 엄중한 사법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경찰, 두 차례 명동성당 난입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경찰은 노조 간부 20여 명에 대한 검거에 돌입했습니다. 노조 지도부는 5월 22일 공권력의 출입이 제한되는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해 무기한 천막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농성 초기, 명동성당 측은 당혹감 속에서도 이들을 보호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노조 간부들에게는 극한투쟁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고, 사측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한 중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6월 초, 정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악화된 국정 지지율을 만회하고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해, ‘통신 대란’을 구실로 대화와 타협 대신 무력 진압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경찰의 명동성당 난입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경찰은 6일 오전 8시, 5월 22일 이후 3주째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 등 6명을 전원 연행했습니다. 전날인 5일 조계사 측과 중재안을 마련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명동성당 측은 정오에 사제단 기자회견을 갖고 배신감과 당혹감을 표명했습니다. 7일 저녁 9시 40분경 경찰이 재차 명동성당 내에 진입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을 무차별로 연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 성당에서 교리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신자들, 성당 직원들까지 연행됐습니다. 법치주의와 인권 보호 놓고 보수·진보 단체 극심한 대립 변화하는 사회 속 교회 역할 새로운 방향성 찾는 계기로 성역 침탈에 거센 분노 전두환 정권의 군홧발마저 멈춰 세웠던 성역이 유린당하자, 종교계와 시민사회는 비통함과 함께 정권의 비도덕성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틀 뒤 특별 메시지를 발표, 명동성당이 독재 시절에도 성역으로 지켜진 것은 ‘치외법권 지대’여서가 아니라, 불의에 쫓기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양심과 이를 존중해 준 시민사회의 도덕적 합의 덕분이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명동성당을 짓밟은 것은 곧 “(문민)정권 탄생의 모태를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에 정부는 다급해졌고, 6월 16일 이홍구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담화는 법 집행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명동성당이 치외법권 지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해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한국 사회는 교회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보수 세력과,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 주장을 폭력으로 짓밟고 종교를 모독했다는 진보 단체와 종교계의 규탄 사이에서 극심한 대립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습니다. 정치적 역풍과 명예 회복 정부가 명동성당 난입이라는 자충수를 둔 것은 6월 27일로 예정됐던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지지율이 폭락한 상황에서 정부는 보수 기득권층의 결집을 겨냥, 강한 정부의 이미지를 연출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거센 분노가 반정부 여론에 불을 질렀고, 집권 여당은 참패해 문민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국가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혀 명동성당에서 끌려 나갔던 노동자 대부분에 대해서도 그 혐의가 벗겨졌습니다. 결정적인 역사적 평가는 2006년에 내려졌습니다.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1995년 당시 해직 및 구속된 한국통신 노조 간부 26명 전원의 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하고 복직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성역’의 자발적 해제 이 사건은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에도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95년 공권력 투입 이후, 명동성당은 각종 단체와 노조의 농성장으로 변모하며 몸살을 앓게 됐습니다. 그해 12월, 결국 명동성당은 정상적 신앙 활동을 저해하는 집회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후 1997년 민주노총 지도부와 한총련 학생 농성, 1998년 퇴출 은행 노조 농성, 2000년 한국통신 노조 2차 농성 등 수많은 농성에서, 성당 측은 적극적 개입을 통해 자진 해산을 유도했습니다. 2000년 12월에는 관할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요청’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교회 안에서는 종교 본연의 기능 회복이라며 지지하는 입장과, 약자를 배제하고 교회의 기득권 계층화라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됐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은, 2010년대에 이르러 명동성당 구역에 대한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짐에 따라 어느 정도 그 방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본주의적 거대 소비 공간으로 재편된 명동성당 일대에서,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의 농성이나 공권력과의 대치가 벌어지던 ‘성역’의 면모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8) 가톨릭신문 속 ‘대건’

한국교회는 매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며 신심미사를 봉헌한다. 이날은 한국교회의 첫 사제로서 복음화를 위해 힘쓰다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박해의 역사를 딛고 한국교회가 세워졌음에 감사드린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가톨릭신문 창간 이전에 열린 시복식인 만큼 당시 지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가톨릭신문은 1928년 9월 1일자에서 시복 3주년의 의미를 조명했다. 기사는 “79위 복자의 간절한 전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성심을 움직여 우리나라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행복이 내려오도록 하자”며 “틈날 때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하루빨리 성인품에 오르시도록 청하자”고 당부했다. 이때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 김 신부는 한국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은 5월 6일자 호외를 통해 시성식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 기사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순교자를 성인 명부에 올리고, 이분들을 다른 성인과 함께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라는 교황의 말을 인용하며, “순교 선열들을 기리고, 신앙을 본받아 진리의 증거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신문은 김 신부의 신앙이 후손들의 삶 안에서 이어진 모습도 조명했다. 2003년 3월 30일자 「김대건 신부의 후손 ‘천주교 성인공파’」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배출한 가문이 ‘천주교 성인공파’로 독립 분파를 이룬 의미와, 후손들이 박해의 기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온 삶을 소개했다.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 희년의 의미와 주요 행사도 집중 조명했다. 희년 개막에 맞춰 보도한 2020년 11월 29일자 기사는 “희년 선포는 성 김대건 신부가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된 사실과 더불어 그가 한국교회를 넘어 보편교회 속 신앙의 모범으로 뚜렷이 인식되고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김 신부의 이름과 관련한 특집도 마련했다. 2021년 8월 29일자에는 ‘제가 김대건 신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대전교구 김대건(베드로) 신부와 광주대교구 김대건(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인터뷰를 실었다. 기사는 “김대건 신부님처럼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신부로 살고 싶다”는 두 사제의 포부를 전했다. 이 밖에도 김 신부의 영성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들을 소개했다. 2016년 7월 3일자는 김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성지와 성당들을 종합해 다뤘고, 2021년 3월 7일자는 김 신부의 이름을 담은 국내외 도로명을 안내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5)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

“재단법인 평화방송은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저동 본사 사옥에서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식을 가졌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선교적 요청에 따라 설립된 평화방송 케이블 TV의 개국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선교의 새장을 열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축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송하는 케이블 TV가 전국 교회를 하나로 묶는 뜻깊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곧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개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송출 버튼을 누름에 따라, 평화방송 케이블TV는 시그널이 행사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사적인 선교 TV 방송 첫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송출했다. ‘시대의 빛 가정의 벗’을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평화방송 케이블 TV는 채널 33을 통해 미사 중계, 성극, 종교영화 등의 직접 선교 프로그램과 생명, 환경, 가정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및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의 복음화와 인간화를 추구하게 된다.”(가톨릭신문 1995년 3월 12일자 1면) 영상 선교의 막 올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매체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케이블TV 방송국이 1995년 3월 1일 시작됐습니다. 평화 케이블TV 방송이 채널 번호 33번을 통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영상 프로그램을 최초로 송출함에 따라, 평화방송·평화신문은 TV와 라디오, 신문을 모두 갖춘 가톨릭 종합 매스컴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7년 11월 20일 개최된 서울대교구 사제총회 자리였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복음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인쇄 매체와 방송 매체를 동시에 아우르는 미디어 설립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듬해 1월 설립 추진 위원회가 구성됐고, 1988년 5월 15일 홍보 주일을 기해 주간 ‘평화신문’이 창간됐습니다. 당시까지 유일한 교회 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은 그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주간 ‘평화신문’이 지난 15일 홍보 주일을 기해 창간됐다. 매주 8면으로 발간되는 평화신문은 직접적인 교회의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으나 시사 문제를 교회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편집될 예정이다. 12면으로 발행된 창간호에는 광주 사태 해결 방안에 관한 김수환 추기경의 회견 내용을 비롯해, 한반도 핵 문제 및 공해 문제 등의 시사 문제가 폭넓게 다뤄졌다.”(가톨릭신문 1988년 5월 22일자 1면) 평화신문 창간 다음 해인 1989년 재단법인 평화방송 설립이 허가됨에 따라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취임했고, 초대 사장으로는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임명됐습니다. 이어 1990년 4월 15일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가 공식 개국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평화방송 라디오 개국에 대해서도 크게 환영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서울대교구 평화방송이 부활대축일인 4월 15일 오전 11시 개국, 본격적인 정규 방송에 들어간다. 국내 처음으로 보도, 사회, 교양, 음악, 오락, 종교 등 모든 것을 다루는 FM 종합 방송 매체로 개국하는 평화방송은 매일 아침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하루 21시간 주간 총 8820분간 방송된다.”(가톨릭신문 1990년 4월 15일자 1면) 초창기 전파 송출 시설은 남산타워에 가설됐고, 서울 중구 저동의 평화빌딩에 제작 스튜디오를 마련해 개국을 준비했습니다. 1990년 3월 6일 시험 전파를 첫 송출한 평화방송은 4월 1일부터 지상파 텔레비전을 통한 대대적인 광고를 시행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4월 15일 ‘맑은 소리, 밝은 세상’이라는 공식 캐치프레이즈 아래 FM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개국 초기 라디오 편성은 종교 18.1%, 보도 12.7%, 사회 교양 26.1%, 음악 및 오락 43.1%의 종합 편성 정책을 따랐습니다. 케이블TV 개국으로 종합 매스컴으로 발돋움 그런데 라디오 방송국 개국 직후인 1991년, 평화방송은 종교 방송의 사회적 역할과 보도 영역의 한계를 둘러싼 내홍을 겪게 됩니다. 갈등의 근원은 복음 선포와 영성 교육 중심의 순수 선교 방송을 지향했던 경영진과, 사회 정의 실현 및 비판 보도 기능을 우선시했던 제작진·기자들 간의 인식 차이에 있었습니다. 제작 거부, 파업과 농성, 공권력 투입과 대량 해고로 이어진 ‘평화방송 사태’는 국제기자연맹(IFJ)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할 정도로 대내외적 파장이 컸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보도 비중을 대폭 낮추고 선교 및 종교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내부 갈등을 수습한 평화방송은 1993년 8월 종합유선방송 가톨릭 채널 사업자로 허가를 받으며 영상 미디어 영역으로 진출, 다매체 선교 시대를 열게 됐습니다. 동시에 지방 방송국 네트워크 건립 사업을 추진, 1996년에 광주와 대구 평화방송이 개국했고, 2000년에는 부산과 대전 평화방송이 문을 열었습니다. 2002년에는 위성방송 가톨릭 채널(SKY-평화)을 개국했고, 2009년부터는 초고속 인터넷망 기반의 IPTV(Olleh TV, B TV, U+TV) 송출을 개시해 전국 어디서나 가톨릭 영상 프로그램을 가정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화방송은 2016년 11월 23일, 창립 이래 사용해 오던 영문 약칭 ‘PBC’를 ‘cpbc’로 개칭하고, 법인 및 매체 명을 ‘가톨릭평화방송’과 ‘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평화방송’이라는 사명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매체임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스마트 OTT 미디어 사목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공동체 미사의 중단이라는 전례 없는 영적 단절을 야기했습니다. 이에 가톨릭평화방송은 비대면 사목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대면 미사가 전면 통제된 시기에 가톨릭평화방송의 TV 미사 중계와 유튜브 성경 공부 콘텐츠는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적 유대감을 보존하는 가장 유력한 대체재로 부상했습니다. 이러한 뉴미디어 사목의 경험은 단발성 대응을 넘어 장기적인 디지털 플랫폼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졌습니다. 2023년 3월 3일, 가톨릭평화방송은 국내 최초의 가톨릭 전문 모바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인 ‘cpbc플러스’를 공식 출시했습니다. 46만 개에 이르는 방대한 가톨릭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스마트폰과 PC로 무료 제공함으로써, 현대 가톨릭 신자들의 일상에 최적화된 유비쿼터스 미디어 사목의 지평을 개척한 것입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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