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4) 가톨릭신문이 전한 성모 신심

5월은 성모 성월이다. 1622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제정된 이후 교회는 이 시기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고 특별한 은총을 청하며 공경을 표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삼고 있는 한국교회는 태동기부터 특별한 성모 신심을 간직해 왔다. 가톨릭신문이 전한 한국교회의 성모 신심을 돌아보자. 가톨릭신문의 첫 성모 신심 보도는 1928년 8월 1일자(제17호)로 추정된다. 당시 기사는 “세상에는 천주교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기보다 성모 마리아를 존경한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성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느님의 어머님, 둘째는 영원한 동정, 셋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부터 올바른 성모 신심에 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해 온 가톨릭신문은 한국교회 성모 신심이 박해 시기인 19세기부터 형성돼 있었음을 밝힌다. 1996년 5월 5일자(제2001호)와 2004년 8월 15일자(제2411호) 등에서는 박해 당시 순교자들이 묵주 기도에 의지했으며, 압수된 물품 중에는 묵주, 성모 상본 등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성모 신심 단체의 활동도 여러 차례 소개했다. 1953년 발행된 지면들에서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운동을 안내하고, 도입 소식을 알렸다. 같은 해 5월 15일자(제125호)는 “성모님의 ‘죄인들의 회개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응답하는 운동이 곧 푸른 군대”라며 “회원은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고 희생하며, 죄를 멀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1974년 5월 19일 파주 자유의 다리에서 개최된 ‘제1회 통일 기원 기도회’ 소식도 지면에 실었다. 1962년 12월 16일자(제355호)에서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 10주년을 기념해 1953년 7월 28일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첫 쁘레시디움이 조직된 사실과 이는 기도와 활동으로써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채로운 성모 성월 행사도 보도했다. 1949년 6월 1일자(제76호)에는 대구대교구 계산동 주교좌본당 학생들이 성모상 행렬에 참여한 소식이 담겨있다. 기사는 “성모 성월을 기념해 성모님께 꽃다발을 봉헌하고, 성가 제창과 공동 기도를 드린 후 행렬에 들어갔다”며 “이날은 북한의 종교 박해 속에서 고통받는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교우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뜻깊은 행사”였다고 전했다. 또한 2010년 5월 23일자(제2698호)에서는 부산교구 양산 물금본당이 5월 한 달간 ‘성모 성월 축제’를 지내며 ‘파티마의 성모님 가정 순례’, ‘성모님과 함께하는 어린이날·어버이날’ 등의 활동으로 성가정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명시했다. 올바른 성모 신심을 촉구하는 역할도 해 왔다. ‘파티마 제3의 비밀’ 공개 전 유언비어와 나주 윤 율리아 관련 문제 등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했다. 1996년 5월 5일 자(제2001호) 사설에서는 “성모 신심이 그 열성만큼 삶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마리아를 닮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성모 신심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8) 임수경·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수산나) 양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파북 된 전주교구 문규현(바오로) 신부가 임 양과 함께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문 신부와 임 양은 군사분계선을 넘는 즉시 유엔군사령부 경비병에 의해 연행됐으며 유엔군사령부 측은 공동경비구역 외곽에서 우리 측에 신병을 인계했다. 문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오기 전 판문점 북측 지역인 판문각에서 거행된 환송집회 중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헤어질 수 없는 하나의 동포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신했다’고 밝혔다.”(가톨릭신문 1989년 8월 20일자 1면) 1989년 대한민국은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화 열기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전이되는 격동기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7 선언’으로 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했으나, 통일 논의는 철저히 국가가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임수경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의 동행 귀환은 국가의 독점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를 존립 기반으로 삼던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북한 선교’라는 시혜적 태도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사목 노선으로 대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투쟁에서 통일을 향한 갈망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 운동권은 6월 항쟁의 동력을 조국 통일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분단의 고착화가 남한 내 독재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와 남북 학생 회담 추진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당시 서울대생 조성만(요셉) 군이 조국 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한반도 전역에서 통일 운동이 더욱 세차게 번져가는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바야흐로 통일 논의의 주체가 정부를 넘어 민간으로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7·7 선언을 발표해 북한을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남북 교류를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민간 차원의 접촉은 철저히 통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재야인사들의 방북이 이어지는 가운데, 1989년 7월 전대협은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을 대표로 파견해 거대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분단의 장벽을 넘어, 사제단의 결단 임수경은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정부는 즉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에 착수했고, 그녀의 안전한 귀환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이에 정의구현사제단은 분단의 장벽을 깨기로 결단을 내리고 문규현 신부를 평양으로 파견했습니다. 광복 44주년인 8월 15일, 두 사람은 남북 및 유엔군의 경고 속에서도 나란히 손을 잡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습니다. 판문점을 넘기 직전 임수경은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극적인 귀환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남측 경계를 넘자마자 체포된 두 사람은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충격과 당혹감 정부는 이를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순 세력의 도발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안 정국을 조성했습니다. 교회 당국 역시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주교단은 7월 27일 담화문을 발표해 충격과 유감을 표명하고 “통일을 촉진하고 싶은 사제들의 마음은 이해한다”면서도 “우리 사회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행동이 앞섬으로 인해 많은 국민에게 우려와 불안을 준 것은 마땅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불법적인 정치 개입이라는 비판과, 교회가 비로소 분단 문제에 온몸으로 응답했다는 지지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토론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엄혹한 공안 정국 속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제 막 이뤄 노동 문제 등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들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국민 대중의 의식 수준은 아직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학생 대표와 사제단의 ‘불법적’인 방북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센 내부 갈등은 한국교회를 포함한 전 국민이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민족 화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고통스러운 산고의 과정이었습니다. 반공주의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이 사건은 북한을 ‘침묵의 교회’, ‘타도의 대상’으로 보던 교회의 시각을 ‘대화와 화해의 상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식의 변화는 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출범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주교회의도 기존 ‘북한선교부’를 ‘민족화해위원회’로 개칭하며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인도적 지원, 민족 화해 미사 봉헌, 평화 교육 등을 적극 전개하며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비록 당시의 법체계와 사회적 금기, 부분적으로는 교계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충격과 당혹감을 던졌지만,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가 독점해 온 통일 담론을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영역으로 확산시켰으며, 분단의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방북을 보는 가톨릭신문의 시각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가톨릭신문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1989년 8월 6일자 2면에 실린 사설에서 방북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 사설은 사제단의 행동으로 교회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졌으며, 거기에는 사제단이 창설된 1974년 이후 이를 방치해 온 주교단에 책임을 묻고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사제들을 질타했습니다. 충격적인 방식에 우려를 표할 수는 있으나, 민족 화해라는 본질적 가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외면한 채 교회의 기강 확립에만 집중한 점은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사설은 기강의 해이함이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이 창설된 후부터 시작됐다고 단정했습니다. 이로써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재 청산의 과정에서 보여준 사제단의 역할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결국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기반해 볼 때, 이 사설은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고 예언직의 수행에 소홀했으며, 그럼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다행히 1년 뒤인 1990년 6월 24일자 특집 기사에서는 “사제단의 방북이 교회 내 통일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통일 논의를 억압한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한층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7)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성찬례 통해 성체 신비 생활화 다짐, 교황 두 번째 訪韓, 미사 주례 -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를 통해 나눔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는 역사적인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핵심 행사인 장엄미사가 대회 마지막 날인 10월 8일 오전 10시30분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례하고 각국에서 온 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으로 집전한 가운데 성대하게 봉헌됐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지난 10월 4일 개막과 함께 기도회, 학술 심포지엄, 젊은이 성찬제 등 각종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 이번 성체대회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이날 장엄미사에는 전 세계 108개국에서 온 200여 명의 주교단 및 2000여 명의 사제단과 65만 명의 국내외 신자들이 참례, 성체 안에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성체 신비의 생활화를 다짐했다.”(가톨릭신문 1989년 10월 15일자 1면) 1989년 10월 8일,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 있었던 드넓은 광장에는 65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가톨릭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폐막미사가 거행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날 미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방한해 주례했습니다.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된 이 여의도광장은 원래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아스팔트 활주로가 있던 비행장이었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71년 ‘5·16 광장’이라는 이름의 비상활주로 광장으로서 대대적인 군사 및 국가 행사 공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군사정권 잔재 청산과 환경친화적 도시개발 계획이 추진돼 1999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됐습니다. 여의도광장 시절, 광장은 7만2000평, 도로 면적을 포함하면 총 12만 평에 달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최대 수용 인원은 약 70만 명이며, 현실적으로는 50만 명 수준이 한계였습니다. 그러니까 무려 65만 명이 한자리에 모인 이날 행사가 얼마나 큰 규모를 기록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이처럼 역사적 공간 위에서 열린 대회는,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전환과 깊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아직은 동양의 작은 나라였던 한국, 선교지역의 미미한 교세를 가진 작은 지역교회에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국제행사가 열린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은 가장 역동적이고 고통스러운 전환기였습니다. 1970년대 고도성장 뒤에는 노동, 빈곤, 인권 유린, 군사 독재 등 첩첩이 쌓인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 상황이 있었고, 이는 1980년대 들어 전 사회적인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아픔에 깊숙이 참여해 교회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고, 민주화와 인권 수호의 보루로서 복음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양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정치적 민주화의 달성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시민 사회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됐고, 그 한가운데에 천주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단순한 신앙 행사가 아니라, 민주화 이후 사회적 치유와 통합을 향한 교회의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계성체대회는 1881년 프랑스 릴에서 시작, 4년마다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개최됩니다. 이 대회의 본질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비로운 일치를 통해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특히 1960년 독일 뮌헨 대회 이후 세계성체대회는 교회의 담장을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적 의미가 강화됐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수성과 민주화 이행기라는 시대적 요청, 그리고 신흥 성장 국가인 한국이 아시아 선교의 거점이 되리라는 기대가 맞물려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정치적 민주화의 성취는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 참여적 에너지를 신앙과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는 복음적 실천력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용서가 전제된 복음적 평화였고, 이는 민주화 이후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려는 교회의 사목적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평화, 감사, 회심과 일치를 향한 염원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열린 세계성체대회는 평화와 감사, 회심과 일치를 향한 한국민들의 염원을 가득 담아 성대하게 개최됐습니다. 대회는 평화의 사도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인 10월 4일 전야제 평화의 날을 시작으로, 5일 감사의 날에는 제찬과 성찬 심포지엄이 개최됐습니다. 6일 회심의 날에는 세계 평화와 교회를 주제로 한 강연회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본 한반도의 평화 심포지엄 및 젠 베르데의 공연 ‘깨어나라’가 열렸으며, 이어 참회 예절과 철야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7일 일치의 날에는 성공회 성당에서 각 교파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회가 개최됐고, 한반도의 분단 지점이 보이는 도라산에서는 ‘하나 되게 하소서’를 주제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 통일 기원미사가 봉헌됐습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 도착한 교황은 서울대교구 논현동성당에서 ‘엠마우스 성시간’을 주재한 뒤 ‘젊은이 성찬제’에 참석했습니다. 대회 마지막 날인 8일 축제의 날에는 교황이 직접 주례하는 장엄미사가 여의도광장에서 성대하게 봉헌됐습니다. 교황은 이날 강론 서두에서 “한국교회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지 5년 만에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폐막미사를 거행할 수 있게 된 은총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한 뒤, “성도들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은 근원이 있으며 성찬례 안에 가장 충만한 성사적 표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한마음한몸운동’의 제도적 정착입니다. 이 운동은 성체대회의 정신을 '생활 실천'으로 구체화했는데, 초기에는 헌미헌금운동을 중심으로 시작됐으나, 점차 생명 나눔, 환경 보존, 국제 원조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지금도 왕성하게 나눔운동과 생명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비록 5일간의 짧은 기간 개최된 대회였지만,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의 현실 속에서,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참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의 마음을 모아,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8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3) 가톨릭신문 속 신학교 역사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시기에는 그중에서도 사제, 수도자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한다. 신학교는 사제 성소 식별과 계발을 도우며, 사제를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 가톨릭신문이 담아온 ‘성소의 요람’, 신학교 기사들을 살펴본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는 프랑스 출신 메스트르 신부가 1855년 충청북도 배론에 세운 ‘성 요셉 신학교’로 추정된다. 병인박해 시기인 1866년까지 운영됐으며, 박해가 끝난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로 재건됐다. 이후 1945년 ‘경성천주공교신학교’를 거쳐 1959년 가톨릭대학교까지, 가톨릭신문은 신학교 역사에 관한 자료를 취합해 종합 정리하는 기사를 1970년대부터 다뤄왔다. 또한 1931년 촬영된 성 요셉 신학교와 이후 촬영된 예수성심신학교 터 사진을 보유하고 있어 초기 신학교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은 1962년 문을 연 대건 대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학교)의 설립 배경과 개교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1960년 11월 6일자(제253호)에서는 공사가 곧 시작된다는 소식과 함께 당시 제5대 광주대교구장이었던 고(故) 현 하롤드 대주교의 노력 덕분에 설립이 결정됐음을 알렸다. 새로운 신학교의 필요성과 ‘대건’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설명했다. 1961년 6월 18일자(제283호)에서는 “교회 발전의 토대인 사제를 늘리는 일은 신자와 본당 수 증가에 따라 시급해졌다”며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만으로는 필요를 충족할 수 없어 1959년 1월 21일 로마 성청(현 교황청)이 설립을 허가했다”고 전했다. 이어 “타국에서 얻은 성직으로 전교하고, 푸른 충절을 선혈로 새기며 한국교회에 빛을 남긴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이름을 ‘대건 대신학교’로 정했다”고 덧붙였다. 1914년 개교했다가 일제에 의해 폐교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1982년 개교한 선목신학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설립 소식도 다루고 있다. 1982년 6월 6일자(제1308호)에서는 개교기념식을 보도하며 초대 총장 고(故) 이종흥(크리산도) 몬시뇰의 말을 인용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해 현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활달하고 창의적인 목자 양성에 노력할 방침”이라고 설립 목표를 밝혔다. 신학교 설립 기사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984년 3월 4일자(제1395호)에서 수원가톨릭대학교가 1984년 3월 2일 입학식, 4월 초 개교기념식과 본관 건물 축성식을 열 계획임을 밝혔다. 특히 1984년 5월 6일자(제1404호)에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해 수원가톨릭대학교 본관 머릿돌을 축성한 소식을 호외로 발행했다. 이 외에도 부산·인천·대전가톨릭대학교 설립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올해 1월 4일자(제3473호)에서는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대성당이 재건축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장면과 2025년 12월 21일 이곳에서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사실을 기록했다. 가톨릭신문은 앞으로도 신학교의 모습을 담아내며, 교회의 미래를 이끌 사제 양성의 현장을 계속 보도할 예정이다.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6) 6월 항쟁, 그 위대한 승리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온 명동성당 농성 시위 사태가 6월 15일, 농성 중인 학생, 시민들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사태 발생 6일 만에 극적으로 일단락됐다. 이번 농성 시위에서 극적인 해산 결정이 나오기까지 사제단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11일 경찰이 명동성당 구내에 최루탄을 다량 발사한 데 항의, 명동본당 주임 김병도 신부가 사제들을 소집함으로써 이날 오후 처음 자리를 같이한 서울대교구 사제들은 12일,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하고 오후 8시 농성학생, 시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으며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기도회를 갖는 등 ‘함께한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자 11면) 임계치에 도달한 분노 1987년 5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제단의 폭로 이전에 전두환 정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패착을 둔 상태였습니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일체의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고 ‘체육관 선거’로 불린 간선제 헌법 체제를 유지해 군부독재를 영구화하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 12명은 4월 21일 오후 7시부터 가톨릭센터 6층 소성당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4·13 특별담화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말살시켰다’고 말하고...”(가톨릭신문 1987년 4월 26일자 11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참상을 담은 ‘5·18 사진전’을 광주와 부산 등지에서 개최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참혹한 증거들이 시민들에게 공개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태생적 불법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폭로됐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다 사제단의 고문 조작 폭로와 단식, 5·18 사진전 등으로 촉발된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는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범국민적 연대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공식 발족했습니다. 이어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 5일 끝내 숨을 거둔 이한열의 피격 장면은 외신과 국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박종철의 죽음과 겹치며 분노는 마침내 폭발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권은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의 후계자를 내세우는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같은 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됐습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6월 민주항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발생한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이어집니다. 명동성당, 6일간의 해방구 명동성당 농성의 발단은 학생운동 단체의 기획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6.10 국민대회에 참가하려던 대학생 500여 명이 경찰에 쫓겨 성당 구내로 들어옴으로써 시위가 시작됐고, 성당 구내에 있던 상계동 철거민과 시민 100여 명이 가세, 600여 명이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11일 오전 시위대가 중앙극장 쪽 골목, 로얄호텔 쪽 골목, 판넬골목 등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 3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으며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등 강력히 저항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 자 11면) 당시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22년 6월 22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처음 학생들로부터 ‘해방구’란 말을 들었다”며 “성당은 본디 해방구이니 절묘한 은유법이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나를 밟고 가라” 정부는 비상계엄 선포나 경찰력 투입을 검토했습니다.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성당 측은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재가를 얻어 11일 밤 사제 50명을 소집해 철야 농성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 농성의 과정에서 비폭력의 도덕적, 영적 권위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사제와 수녀들이 위태로운 순간마다 농성대와 경찰 사이 최전방 대치선으로 나아갔습니다. 13일 새벽, 무력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전날인 12일 저녁, 공권력 투입을 통보하던 정부 고위 당국자를 향해 김 추기경은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가서 내 말을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해주시오. 공권력이 투입되면 내가 맨 앞에 누울 테니 나를 밟고 넘어가시오. 그다음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오. 그들을 모두 밟고 넘어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독재정권의 폭력적 공권력을 완전히 압도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쟁취한 민주주의 성당 내부의 결사 항전은 담장 너머 시민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고립과는 달리, 1987년의 명동은 수많은 목격자와 지지자를 양산했고 도심 한복판이 거대한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해방의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6월 15일,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의 끈질긴 설득 그리고 극단적인 유혈사태를 피하려는 정부의 부분적인 양보로 명동성당 농성대는 자진 해산했습니다. 농성은 끝났지만, 투쟁의 무대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항쟁의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고,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처럼 폭력 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범국민적인 저항의 불씨가 전국을 휘감았고, 국제사회의 압박, 특히 전두환 정권의 군 투입 불가와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의 뜻이 전달됐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있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의원은 이른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즉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그 골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전면 수용을 비롯한 8개 항의 민주화 조치였습니다. 7월 1일 전두환이 이 수습안을 공식 수용함으로써 국민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주권을 되찾게 됐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된 진실의 씨앗이 6개월간의 혹독한 겨울과 투쟁의 봄을 거쳐, 마침내 6·29라는 민주주의의 결실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여정의 한가운데, 한국 천주교회가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5)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박종철 군 사건 진상은 조작 - 정의구현사제단은 5월 18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전(前)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문화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가 아니라, 학원문화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경장 이정오’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광주사태 7주기 추모미사’ 후 이같이 밝힌 사제단은 ▲조한경 경위는 반장으로서 박종철 군에 대한 신문(訊問)을 담당한 3명(황정웅, 방근곤, 이정오)에게 ‘말 안 하면 혼내주라’는 말만 하고 고문실을 나왔으며, 한 시간쯤 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박종철 군은 이미 늘어져 있었다. ▲강진규 경사는 1반 반원이 아니며, 강 경사가 소속된 반에서 찾고 있는 학생에 대해 박종철 군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 방에 갔을 뿐이라며 두 사람은 직접적인 고문살인의 주범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또 사제단은 ‘경찰은 당초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조 경위에게만 지휘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려 했으나, 여론의 빗발치는 진상 조사 요구에 의해 고문치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인만은 계속 조작, 조 경위와 강 경사에게 덮어씌우고 있다’며 ‘범인 조작은 1월 17일 이후 두 경찰관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최초로 이뤄지고 같은 상황하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5월 24일 1면) 다시 불붙는 민주화 운동 광주의 비극으로 시작된 1980년대,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과 교황 방한으로 주춤했으나, 1980년대 후반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과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사제단은 1985년 6월 6일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 학원 문제, 언론 자유 침해 등 시국 전반에 걸친 독재 정권의 비민주성을 질타했습니다. 국가 폭력과 공안 정국 1985년 8월, 정부는 학생운동권과 민주화 세력을 영장 없이 ‘순화 교육’ 시킬 수 있는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을 시도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를 ‘위험한 발상’이라며 명백한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8일자 1면 기사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최근 정부와 여당이 서두르는 ‘학원안정법’은 나라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하고 “학원안정법의 제정을 즉각적으로 철회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85년 하반기부터 1986년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폭증하는 등 본격적인 공안 정국이 조성됐습니다. 이 시기 국가 공권력의 타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86년 6월 발생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었습니다. 위장 취업했다가 연행된 대학생 권인숙에게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고문을 가한 만행이었습니다. 공안 당국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가해자를 비호하며 도리어 피해자를 구속기소 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교회는 여성계, 재야 단체 등과 연대해 ‘천주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폭력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 열망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1986년 3월 9일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 시국 미사 강론을 통해 “법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간선제 헌법의 반민주성을 비판했습니다. 이어 “불의를 저지른 이들은 그 불의를 인정해야 한다”며 정권의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임기 내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간구하는 9일 기도’를 전국 각 교구에서 바치기 시작했고, 개헌 서명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탁’ 치니 ‘억’,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촉즉발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 속, 1987년 벽두, 전국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물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황당한 변명으로 박 군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박 군의 억울한 죽음에 교회는 전 국민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가톨릭신문 1987년 1월 25일자 보도에 의하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1월 19일 성명을 발표해 이 땅에서의 고문 종식을 지향으로 1월 25일 미사 봉헌과 기도회를 전국 각 본당에서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성명서는 “말단 수사관의 우연한 실책으로 이 고문이 자행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박 군의 죽음을 계기로 고문 행위의 근본적, 필연적인 원인이 밝혀져야 하고 고문 종식을 위한 민족적 결단이 이뤄지길 촉구”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주일 정오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정부 당국은 이번만은 참으로 정부와 나라 전체의 공정을 위해 사건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호도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밝힐 것”을 촉구했습니다. 진실의 폭로, 6월 항쟁의 도화선 경찰은 조한경, 강진규 두 명의 수사관만을 구속하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으나, 진실은 감옥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습니다. 구속된 두 수사관이 남부구치소 안유 보안계장 등에게 추가 범인 3명이 더 있으며 치안본부 수뇌부가 이를 은폐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안유 계장은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민련(전국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부영은 비밀 쪽지에 내용을 기록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반출시켰습니다. 재야인사 김정남을 거친 이 쪽지는 최종적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마티아) 신부와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전달됐습니다. 감옥 안의 의로운 교도관들과 민주 인사들의 목숨을 건 릴레이가 진실을 성당의 제단 위로 밀어 올린 것입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미사 직후, 김승훈 신부는 제단 위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경찰의 조작극 전모는 물론, 은폐되었던 진범 3명의 이름까지 정확히 실명으로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는 독재정권을 엄청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고, 숨어있던 진범 3인과 조작을 지휘한 박처원 치안감 등 수뇌부가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거대한 국가 폭력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시킨 이 폭로는 다가오는 6월 민주항쟁을 향한 완벽한 기폭제가 됐습니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2) 가톨릭신문 속 ‘부활’

“축 예수 부활. 그리스도는 죽음과 구속으로 인류를 구하셨다. 우리는 이에 감사하여야 하며,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하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이를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 가톨릭신문은 창간 1주년이 되는 1928년 4월 1일자(제13호)에서 부활을 맞아 위와 같은 글을 실었다. 그리스도 부활의 본질적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톨릭신문은 창간 이후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활을 둘러싼 여러 변화와 교회의 상황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부활 날짜에 관한 보도가 대표적이다. 1960년 1월 3일자(제210호)에서는 “최근 새로운 달력 개정 운동이 일어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고정하자는 등의 논의가 있으나, 교황청에서는 공익상 필요성이 분명하다면 이 문제를 공의회에서 논의하겠다고 알려져 있다”고 전하고, 이후 기사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해당 안건이 다뤄졌음을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날짜 고정은 무산됐지만,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날짜 산정 방식, 유래 등을 설명하는 기사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부활 제2주일에 지내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정 당시의 배경과 의미도 상세히 다뤘다. 2002년 4월 30일자(제2198호)에서는 제정 계기가 된 ‘자비의 사도’ 성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시성과 성인의 자비 신심을 전했다. 2001년 4월 22일자(제2246호)에서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첫 시행을 기념해 당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조규만 주교(바실리오·원주교구장)의 기고를 통해 하느님 자비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고찰했다. 대면 미사가 중단됐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상황도 담았다. 2020년 4월 12일자(제3190호)에서는 대부분의 교구가 TV와 인터넷 등에서 성주간·주님 부활 대축일 전례와 미사를 생중계하기로 한 내용을 실었다. 2020년 4월 19일자(제3191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텅 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파스카 성야 미사를 주례했다”며 “코로나19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오랜 격리 생활로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했다”고 전했다. 2022년 4월 24일자(3221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약 5만 명의 신자들과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소식을 전달했다. 이처럼 가톨릭신문은 부활을 시대의 맥락 안에서 조명해 왔다. 올해 4월 5일자(제3485호) 사설에서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를 선택하고, 무관심과 혐오를 넘어 이웃의 아픔에 마음을 여는 자리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했다. 가톨릭신문은 앞으로도 시대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도록 그 여정을 함께 기록해 나갈 것이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4) 분단 후 처음 북한 땅에서 미사 봉헌

“분단 40년 만에 종교가 말살된 북녘땅 공산 치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미사성제가 봉헌됐다.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집전으로 봉헌된 북녘땅에서의 미사는 평양 방문 3일째이자 한국순교성인대축일 주일인 지난 9월 22일 오전 7시 20분경 숙소인 고려호텔 3층 제1영화관에서 봉헌됐다. 분단 40년 만에 남한의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한 지학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1945년 해방 직후 모든 성직자가 순교하여 40년간 미사성제가 없었던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하게 돼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면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분단 후 북한 땅에서 첫 미사 1985년 9월, 남북 관계의 경직된 장벽에 작은 틈이 생겼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방문단의 일원으로 당시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 역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실향민으로, 당시 북한 방문을 통해 누이동생 용화(당시 61세) 씨를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주일이었던 9월 22일 오전 7시20분경, 지 주교와 함께 15명의 고향 방문 단원이 함께한 평양 고려호텔 면담실 제1영화관은 임시 성전이 됐습니다. 여기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홍성철(미카엘) 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강성숙(로욜라) 수녀, 가수 하춘화(체칠리아) 씨 등이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의 주례로 거행된 이날 미사는 분단 이후 북한 땅에서 공식적으로 봉헌된 최초의 미사였습니다. 이날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었습니다. 불과 1년 전인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의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에 중단된 미사 가톨릭신문은 9월 29일자 1면에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어 7면에서 3박4일 동안 이뤄진 북한 방문 소식을 화보와 함께 전했는데, 특히 첫 미사를 집전하는 지 주교의 감격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평양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한 지주교는 미사 중 본기도를 바치다가 눈물이 복받쳐 약 2분간 미사가 중단됐다. 이날 미사가 마침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 미사인 데다가 전날 37년 만에 누이동생을 상봉한 여운 때문인지 지 주교가 ‘순교자’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더 이상 잇지 못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울어 미사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7면) 지 주교가 복받치는 감격에 소리 내어 울자 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흐느꼈고, 면담실은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지 주교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1백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감격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남한 신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고, 민족 화해를 위한 교회의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상징적 사건이 됐습니다. 교차 방문의 정치적 배경 감격적인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해빙된 남북 관계와 국내의 정치적 필요성이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1984년 남한에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하면서 북한이 구호물자 제공을 제의했고, 이를 정부가 수용하면서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후 화해 무드가 조성됐고 1973년 이후 중단됐던 남북 적십자회담이 재개됐으며, 이를 통해 교차 방문이라는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부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반도 긴장 완화가 절실했습니다. 나아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진 가운데,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1985년의 교차 방문은 최초의 이산 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성과인 동시에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와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남북한 당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멸공’에서 화해와 일치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교회 안에서도 분단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신학적 성찰이 심화됩니다. 북한에서의 첫 미사는 한국교회가 멸공에서 복음적 화해와 일치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남한 교회는 분단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멸공의 이념을 취해왔습니다. 통일은 북한 정권의 멸망과 교회의 수복을 의미했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현대 세계와의 대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됐습니다. 특히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진정한 평화는 대결이 아닌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을 얻게 됐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교회는 교회의 공식 사목 방침으로 민족 화해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의 과정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미 1982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를 발족한 데 이어 1984년에는 북한선교부가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된 뒤, 북한선교회로 명칭이 바뀝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5년에는 서울대교구와 각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멸공을 넘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교회의 확고한 사목적 지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85년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의 민족 화해를 위한 노력은 더욱 담대해집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평양에서는 장충성당이 준공되고 당시 신부였던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와 정의철(다마소) 신부가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10월 30일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지학순 주교와 달리 공식적인 교회 대표 자격으로 북한 땅을 밟은 두 신부의 방문은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10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3) 가톨릭농민회, 소몰이 시위

1980년대 대한민국은 압축적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억압적 통치가 맞물려 사회 전반에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파열음을 내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이래 국가 주도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 전략 속에서 농업 부문은 철저히 소외됐고, 저곡가 및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접어들어 신군부 정권이 물가 안정과 산업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농축산물 수입 개방을 본격화함에 따라 농촌 경제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가 극적으로 폭발한 것이 1985년 전국 농촌 지역을 강타한 ‘소몰이 시위’였습니다. “재벌은 돈 밭에 농민은 똥 밭에” 1985년 7월 17일, 전남 함평 우시장에서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 마양분회 회원 김영천 씨가 2년 동안 키우던 소를 망치로 때려눕혔습니다. 105만 원에 사서 2년 10개월을 키운 소가 산 값의 절반도 안 되는 45만 원에 값이 매겨졌습니다. 분을 견디지 못한 그는 철물점에서 망치를 구해와 소의 머리를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그해 7월과 8월, 전국을 휩쓴 소몰이 시위는 일부 이익 집단의 생존권 투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사정권의 기만적 농업정책, 국제 자본의 통상 압력 그리고 정권 실세의 부패가 결합해 농민의 인간다운 삶을 수탈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1978년 2월 ‘수입자유화기본방침’을 확정한 데 이어,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인플레이션 억제와 독점 자본의 임금 상승 압력 완화를 위해 저물가 정책을 펴면서 농산물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350여 종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외국산 농축산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상황을 극단적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정부의 기만적 정책이었습니다. 정부는 ‘복합영농’을 장려하면서 소 사육을 권장했습니다. 빚을 내 비싼 값에 송아지를 입식한 농가가 120여만 호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뒤에서 싼값의 외국산 쇠고기와 생우 수입을 방조했고, 결국 소 한 마리 값이 개 한 마리 값보다 못하다는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천문학적 리베이트와 이권 탈취로 막대한 이익을 본 권력층의 거대한 범죄 카르텔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부패의 정점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전경환이 있었습니다.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시위의 전국 확산과 2만 농민의 합류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민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1985년 4월 기독교농민회(이하 기농)가 서울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미국 농축산물 수입 요구 반대 규탄 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농민운동이 국가 권력과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진입했음을 선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가농과 기농이 지역 단위로 조직적 역량을 결집하는 가운데, 경남 고성에서 7월 1일 처음으로 소몰이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실내 집회와 달리 소와 경운기를 몰고 거리로 진출했고, 경찰도 소가 날뛸 것을 염려해 함부로 최루탄을 쏘지 못했습니다. 쉽게 경찰 저지선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고성에서 시작된 소몰이 투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7월 12일, 충북 음성군 무극읍 무극성당 앞에 집결한 가농 회원들은 세 차례에 걸친 경찰의 저지를 뚫고 음성군청까지 행진했습니다. 100여 명의 농민과 8마리의 소, 경운기 7대가 함께 한 시위 행렬은 200m나 됐습니다. 7월 19일,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300여 명의 농민과 100마리의 소, 경운기 20대가 참가한 시위는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습니다. 막아선 청소차를 밀어내고 경찰차 3대를 언덕 밑으로 굴려버렸습니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경찰, 십자가 탈취 손상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전국에서 전개된 소몰이 시위는 모두 22건, 시위에 참가한 농민의 수는 2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농민 문제의 심각성을 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계기였고 전두환 정권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광주 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집권 세력은 소몰이 투쟁이 격렬해지자 위기를 감지하고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습니다. 소몰이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7월 28일 전북 완주에서는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평화적 십자가 행렬’이 가농 전주교구연합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1일자는 7면에서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전주 농민회 경찰과 충돌 - 소값 폭락에 대한 농민들의 소몰이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7월 28일 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주관으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행해진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평화적 십자가 행렬’을 경찰이 제지하는 과정에서 십자가가 경찰에 의해 탈취돼 손상되고, 교육국장 문규현 (바오로) 신부 및 농민회 회원 세 명이 크게 다쳤다. … 농민회 회원들은 이를 종교 탄압으로 보고 저녁 8시 전주 가톨릭센터에 집결해 ▲신부를 폭행하고 십자가를 손상시킨 경찰 색출 ▲구속 농민 석방 ▲수배자에 대한 수배령 철회 ▲소값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며 8월 3일까지 농성했다.” 당시 전주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는 해외교포 사목 방문을 위해 출장 중이었습니다. 총대리 김환철(스테파노) 신부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소몰이 시위나, 이와 관련된 시위 행위는 잘못된 농업 정책에 대항한 농민들의 당연한 생존권 행사”라고 규정하고 “가톨릭 농민회는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농민운동의 대전환 1985년 7월과 8월을 뜨겁게 달궜던 소몰이 시위는 9월 23일 가농이 주최한 전국 농민대회, 그리고 9월 25일 가농, 기농, 가톨릭여성농민회가 공동 주최한 ‘소값 피해보상운동 진상보고대회’를 통해, 전국 단위의 결집된 목소리로 수렴되며 1단계를 마무리했습니다. 완전한 피해 보상을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이 투쟁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사와 농민운동에 거대한 지각 변동을 가져왔습니다. 투쟁의 과정에서 가농은 파편화된 농민들의 분노를 하나의 정치적 구호로 결집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명서 발표와 성당이라는 물리적 성역 제공을 통해 농민들을 탄압에서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나아가 가농은 이후 도시 노동자 및 학생 운동과 연대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족 자주, 평화 통일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 주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종교의 지지를 넘어서 한국 농민운동 사상 최초로 전국 단일 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을 1990년 창립해 정치 세력화함으로써 농민운동의 대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8면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 - 안셀름 그륀 신부] “하느님께 나를 정직하게 드리세요”

가톨릭신문은 창간 100주년 기획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를 시작한다. 세계교회 안에서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 시대의 물음에 천착해 온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의 교회가 마주한 물음에 답을 구한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귀 기울여야 할 통찰의 언어를 세계교회 지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찾아본다.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의 첫 순서로 안셀름 그륀(Anselm Grün) 신부를 초대했다. 그륀 신부의 책은 서점 종교 코너에서 늘 눈에 띈다. 전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수백 권의 저서, 수천만 독자. 독일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살아온 이 수도자가 전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내맡기라는 것. 그는 자신의 저술과 영성 체험, 불안한 시대를 사는 이들을 향한 조언, 100주년을 앞둔 가톨릭신문에 전하는 당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와 청년들에게 보내는 격려 등을 들려줬다. 여든에도 ‘현역’으로 그륀 신부는 2025년 1월 14일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현역’이다.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영성 강좌와 경영자를 위한 리더십 강좌를 진행하고, 베를린 노동부와 연방정보국 등 여러 기관의 요청으로 지도자 교육에도 나선다. 영적 위기를 겪는 사제·수도자·교회 직원을 위한 영성 치유 센터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이들과 묵묵히 동반하고 있다. 왕성한 저술 활동의 비결을 묻자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영성을 살아가면서 자기 삶에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쉬운 언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도덕적 훈계나 가르침을 앞세우기보다 “인간 영혼이 지닌 지혜에 말을 건네려 한다”며 “모든 사람 안에는 하느님과 영성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며 글을 쓴다”고 덧붙였다. 그의 저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치유’다. 그륀 신부는 이 주제에 집중하게 된 계기를 4세기 초 사막 교부들에게서 찾는다. “사막 교부들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인간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길이었다”고 말한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역시 본질적으로 치유와 회복을 향한 것이었음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치유와 내적 성장에 더욱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변화가 아니라 ‘변모’ 자신의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물었다. 그륀 신부는 “신앙은 끊임없이 나를 과시하고 정당화하며,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신앙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내드리라’는 초대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내 안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나를 변화시켜 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게 한다”고 설명한 그는 “내 안에 있는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느님께 내맡길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며, 우리가 온전히 수용하고 하느님께 내드린 것만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변화’를 넘어 ‘변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그는 ‘정직함’을 꼽았다. 자신의 경우 “하느님 앞에서 고요히 머무르며 내면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그분께 내맡긴다”며 “이 고요한 만남 안에서, 평소 생활 속에서 억눌러 왔던 모든 어두운 면까지 마주하며 저 자신을 알아간다”고 들려줬다. 인공지능(AI) 시대, 위로는 화면이 아니라 만남에서 AI가 상담과 위로, 영적 조언의 영역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현실이다. 그륀 신부는 이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다. “현대 기술을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하지만, 거기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특히 AI는 ‘위로’를 제공할 수 없고, 위로에는 컴퓨터 화면으로 읽는 글자가 아니라 사람과의 구체적인 만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시대에 영성을 지키기 위한 실천으로 그는 건강한 ‘절제(Askese)’를 제안했다. “끊임없이 정보로 나 자신을 가득 채워 넣지 않으려는 선한 절제가 필요하다”면서 “자신이 읽고 듣는 것을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내맡길 때, 세상 문제들만을 맴돌다가 그로 인해 무력해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륀 신부는 오래전부터 일과 신앙, 영성과 일상의 균형을 강조해 왔다. 이 조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매일의 개인 ‘예식’(Rituale)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오직 하느님과 나만의 영역인 ‘거룩한 시간’을 자신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면의 태도입니다.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온전히 몰입해야 결코 소진되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에서 끊임없이 힘을 길어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며 “남에게 과시하고 자신을 증명하려는 ‘자아(Ego)’가 아니라, 내면의 중심인 ‘참된 나 자신(Selbst)’에서 솟아 나오는 힘으로 일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세월 수도자로 살아오며 경험한 가장 깊은 영적 체험이 무엇인지 묻자, 그의 대답은 “내가 겪은 모든 일을 하느님께 가져가 그분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내면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중요한 점은 단순히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내드릴 때, 내 안의 모든 것은 비로소 변모될 수 있습니다.” 서울 WYD를 앞둔 한국 청년들에게 2027년 서울에서 세계청년대회(WYD)가 열리는 때를 바라보며, 그륀 신부는 한국 청년들을 떠올렸다. 그는 “많은 한국교회 젊은이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며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켜 가야 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한국교회 청년들이 모범이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업과 경쟁, 미래의 불안에 짓눌린 청년들에게 그는 “결코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희망은 기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날 수 있지만, 희망은 실망할 수 없습니다.” 그는 “희망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어떤 모습이든 잘 되고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라고 얘기했다. 그륀 신부는 “이 불확실한 시대에 신앙이 우리에게 버팀목과 안정감을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바로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가톨릭신문에 바란다 창간 99주년을 맞은 「가톨릭신문」에 대해 그륀 신부는 “한편으로는 시대의 문제들에 당당히 맞서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침묵으로 초대받을 수 있는 성찰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어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독자들에게는 먼저 신앙의 선인들에 대한 감사를 권했다.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많은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내린 신앙의 뿌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분들이 가졌던 신앙의 힘을 함께 나누어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지금 이 시대에도 치유와 용기를 불어넣는 복음임을 신뢰해 달라는 부탁도 전했다.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이 복음은 희망을 선사한다”고 밝힌 그륀 신부. “한국교회 신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화해와 희망을 일구는 누룩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 안셀름 그륀 신부는 전 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현대 사회 대표적 영성가이자 다작 저술가다. 1945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1964년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한 뒤 철학과 신학, 경영학을 두루 공부하며 수도생활과 학문, 실무를 아우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륀 신부의 영성은 사막 교부 전통과 성경, 현대 신학, 심리학을 결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상과 감정,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제시한다. 지나친 금욕이나 이상주의보다 ‘중용’과 ‘균형’을 강조하며, 불안과 상처, 소진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치유로 나아가도록 돕는 글과 강연을 이어 왔다. 200권에 이르는 저서는 행복과 감정, 우정과 공동체, 일상의 기적 등을 평이한 언어로 담아내며 수십 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 수백만 독자의 영적 길잡이가 됐다.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아 강연과 만남 자리를 마련한 그륀 신부는 분단과 경쟁, 소진의 현실 속에 사는 이들에게 화해와 치유, 자기 수용의 메시지를 전했다. ■ 안셀름 그륀 신부가 친필로 전한 가톨릭신문 창간 99주년 축하 메시지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가톨릭신문」이 창간 99주년을 맞이한 것을 축하드리며 여러분께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이 신문의 글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굳건히 해 주어, 여러분이 한국 사회 안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믿을 만한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길에 언제나 함께하시어, 여러분 자신이 한국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시기를 빕니다. 당신들의 안셀름 그륀 신부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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