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모젤(Mosel) 강변 포도밭과 뜻밖의 피정(2)

독일 라인 강변을 가던 중 차질이 생겨 하룻밤 묵었던 곳은 모젤 강변의 ‘퓐데리히’였다. 다음 날 아침 마주친 동화 같은 경치에 놀랐는데, 빵을 사러 마을로 들어섰다가 또 한 번 놀랐다.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은 마을 전체가 수백 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루터 앞 골목길에는 반들반들한 자갈이 깔려 있고, 흰 벽에 짙은 갈색 나무 받침목을 댄 독일식 건물 정면에는 1516, 1621이라는 건축 연도가 새겨져 있었다. 벽에는 수확 철 즐거운 풍경이 그려져 있었고 대문과 창문은 포도 넝쿨로 장식되어 있었다. 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하고 뾰족탑 성당에서는 15분마다 종소리가 울렸다.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에 유럽 사람인 남편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여기에 머물자!” 둘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해부터 7년째 여름마다 오고 있다. 숙소는 대대로 포도밭을 가꾸고, 수확한 포도로 집안 이름을 건 와인을 만들어 파는 집의 2층 스튜디오. 여기서 일주일쯤 머물며 자전거를 타는데 경치 좋은 곳마다 멈춰 멍하니 바라보거나, 다른 자전거 여행자들과 수다도 떨며 느슨한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는 우리 일상도 포도를 중심으로 흐른다. 포도밭 사이를 자전거로 달리고, 포도송이 무늬 접시에 담긴 케이크를 먹고, 하루 종일 가톨릭성가 <나는 포도나무요>를 흥얼댄다. 저녁엔 숙소 베란다에 앉아 첫날 봤던 언덕 위 하얀 수도원 ‘마리엔부르크 성’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신다. 알고 보니 이 수녀원은 특별한 곳이었다. 오래된 성채 자리에 1146년 아우구스띠노 수도원이 세워졌고 폐쇄될 때까지 370년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대 귀족이나 부호들이 자녀를 수도원에 입회시킬 때 엄청난 포도밭을 봉헌하는 관습 덕분에 이 수녀원도 대규모 포도밭을 경작하고 관리했다. 그 수익으로는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어제저녁, 노을 지는 포도밭과 수녀원을 바라보며 남편에게 물었다. “저기 살던 수녀님들도 매일 이런 풍경을 보았겠지?” “그래, 포도밭은 마르지 않는 묵상 거리였을 거야.” 남편이 말했다. 문득 20대 때의 피정이 떠올랐다. 성모님의 청으로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기적을 두고, 나는 “흥겨운 잔치가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발표해 엉뚱하지만 신선한 해석이라고 칭찬받았다. 내게 성경 속 포도주는 여전히 풍요와 기쁨, 축복의 상징이다. 포도주는 희생과 새 계약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루카 22,20 참조) 최후의 만찬 말씀처럼 포도는 으깨지고 발효되어야 포도주가 된다. 우리를 위해 스스로 포도주가 되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새기라는 신부님 강론도 생각났다. 순간, 떠오른 성경 구절을 휴대폰에서 영어 성경으로 찾아 남편에게 읽어주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참조) 낭독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큰 소리로 화답했다. “아멘!” 우리, 여기 피정 온 것 맞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2면

독일 모젤(Mosel) 강변 포도밭과 뜻밖의 피정(1)

“넌 이 더위에 죽었니, 살았니?” 강원도에서 여름휴가 중이라는 친구가 안부 카톡을 보내왔다. 올여름, 유럽 역시 연일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니, 생사가 궁금할 만도 하다. 다행히 내가 있는 네덜란드 남부는 요즘 최저 기온이 섭씨 11~12도로 선선하다 못해 추워서 이따금 전기장판을 켜기도 한다. 게다가 지금 나는 7년째 여름마다 찾아오는 독일의 아름다운 모젤(Mosel) 강변에 와 있다. 7년 전, 네덜란드인 남편과 라인강변으로 자전거 여행을 가는 길에 공사 중인 도로를 만나 우회하게 됐다. 날이 저물어 울며 겨자 먹기로 모젤 강변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음 날 새벽 텐트 밖으로 나오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코앞에는 초록색 강물, 눈앞 언덕에는 푸른 포도밭, 그 꼭대기에 우뚝 솟은 하얀 수도원…. 동화 속 같은 모젤의 매력에 풍덩 빠져든 순간이었다. 모젤강 유역은 로마 시대부터 유명한 와인 산지다. 굽이치는 강이 만든 평지와 가파른 언덕에는 수천만 그루의 포도나무가 끝없이 펼쳐진다. 2000년간 로마 문명과 중세 기독교 문화, 독일의 와인 문화가 겹겹이 쌓인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기도 하다. 명성에 비해 한적한 자전거길은 환상 그 자체다. 중세 성과 뾰족탑 교회, 고풍스러운 마을과 다리, 수백 년 된 와이너리와 로마 유적, 가파른 수도원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은 내가 가본 자전거길 중 단연 최고다.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포도 재배지임에도 최고의 포도 산지가 된 데는 독특한 자연조건이 있다. 남향의 급경사 포도밭은 햇빛을 오래 받고, 강물에 반사된 빛까지 더해져 당도를 높인다. 또한 낮의 열을 머금다가 밤에 방출하는 점판암 토양과 강물의 기온 조절 덕분에 포도는 천천히 익어가며 풍부한 향을 품는다. 시작은 놀랍게도 2000여 년 전 로마 군인들이었다. ‘포도주가 미치지 않은 곳은 로마 영토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정복자 로마인들은 이곳에도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후 모젤 강변에 자리한 도시 트리어(Trier)가 로마제국 서쪽의 중심지가 되면서 재배는 크게 번창했다. 로마의 쇠퇴 후 버려진 포도밭을 부활시킨 건 6세기 가톨릭 수도사들이었다. 특히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정신의 베네딕도회와 시토회 수도사들은 고된 포도 농사를 영적 수행으로 여겼다. 경사 60~70도의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해 만든 명품 포도밭 대부분이 이들에 의해 탄생했다. 또한 이들은 토양, 품종, 재배 기술 등을 연구해 기록으로 남겼고 귀족이나 부자들에게 기증받은 포도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와인 품질을 한층 높였다. 모젤 와인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린 이도 가톨릭 주교였다. 1787년 트리어 선제후 겸 대주교인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는 수확량은 많지만 질 낮은 품종을 금하고 최고의 품종만 재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는 단순한 농업정책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영적 결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모젤 포도주와 가톨릭 신앙이 빚어낸 이야기는, 모젤의 자전거길처럼 끝없이 이어지며 깊은 묵상으로 이끈다. 마치 피정 중인 기분이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22면

효창동의 어느 ‘성당’과 아버지

처음 성당에 가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느 봄날, 아버지와 남동생, 나는 서울 효창동 친척 집에 가는 길에 어느 성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들어가 보자고 하셨다. 호기심에 따라 들어간 성당 마당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고, 그 앞에는 예쁜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평일 성당은 고요했고,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그 당시는 혹독한 독재 시대였다. 일간 신문 정치부 기자였던 아버지는 반정부 기사로 인해 필화를 겪으며 여러 차례 수감과 고문을 당하셨다. 그날 이후 부모님 대화에 ‘미사’, ‘교리공부’, ‘세례’ 같은 낯선 단어가 들렸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4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당신의 바람대로 우리 가족은 몇 년의 시차를 두고 각자의 선택으로 성당을 찾아 신자가 되었다. 주변에 인도해 줄 천주교인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어떻게 모두 자석에 이끌리듯 스스로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받았는지 생각할 때마다 불가사의하다. 나는 학교와 가까운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세례받고 학생회에 들어가 즐겁게 활동했다. 하지만 성당을 열심히 다닌다고 저절로 하느님과 깊이 만나는 건 아니었다. 신앙인의 기초인 성경 읽기와 기도하는 법을 알려준 곳은 뜻밖에도 내가 다니던 개신교 미션스쿨 숭의여고였다. 학교에선 성경 읽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매일 ‘오늘의 말씀’을 강제로 외웠고, 방학이면 성경 암송 대회를 위해 본인이 고른 상당한 분량의 성경을 통째로 암기해야 했다. 가톨릭 성경이 허락되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3년 내내 개신교 성경으로 외웠는데, 놀랍게도 그때 외운 성경 구절이 아직도 ‘툭’ 치면 곧바로 튀어나온다. 그 시절 성경 읽기가 몸에 배었는지, 지금까지 꾸준히 성경을 읽으며 ‘일 년에 일독하기’를 이어가고 있다. 또 하나는 자유로운 기도다. 정해진 기도문에 익숙한 가톨릭과는 달리, 학교에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외에는 상황에 맞는 ‘맞춤형 기도’를 했다. 반 예배 기도는 돌아가면서 했는데,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어찌나 청산유수인지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내 차례가 오면 전날부터 잔뜩 긴장해서 준비한 기도문을 달달 외워 겨우 마치곤 했다. 그러나 그런 훈련 덕분에 나는 여전히 아침, 저녁기도 때 가톨릭 신자답지 않게(!) 큰소리로 자유롭게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용서와 자비를 청한다. 크고 작은 행사에서 성경 말씀을 곁들여 대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때 얻은 보너스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신앙의 유아기에 억지로 익힌 성경 읽기와 기도 습관이 평생 내 믿음의 든든한 뿌리가 되고 있다. 돌이켜보니, 생고생시킨다며 미워했던 여고 시절의 교목, 담임, 교장 선생님이 고맙기 짝이 없다. 그분들은 내 신앙의 훌륭한 조련사였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성당으로 이끌어 준, 내 신앙의 시작인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세례는커녕 대세조차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린 셋째 딸이 무럭무럭 자라서 이렇게 100년 전통의 가톨릭신문에 연재까지 하는 걸 보며 흐뭇해하실 거다. 그리운 나의 아버지에게, 이 글을 바친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2면

몽골 별빛의 두 얼굴

“별 많이 봤어요?” 몽골에 다녀왔다고 하니 모두 이렇게 묻는다. 요즘에는 오로지 별을 보러 몽골에 가는 사람도 많단다. 지난달에 ‘별나라’ 몽골에 다녀왔다. 네 번째 방문이다. 첫 번째는 여행자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긴급구호팀장으로, 이번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갔다.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으로 <국제구호와 개발협력> 수강생 10명과 현장탐사차였다. 수업에서 배운 이론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와 대응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몽골은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급속한 사막화와 ‘주드(dzud)’가 대표적이다. 초원에서 가축을 키우는 유목민들에게 풀은 생명이다. 여름에 풀이 충분히 자라야 가축도 건강하고 겨울을 날 건초도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여름 가뭄과 이상고온으로 풀이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겨울 폭설과 한파가 닥치면, 가축이 먹이를 찾지 못해 떼죽음을 당한다. 이것이 몽골어로 재난을 뜻하는 주드다. 최근 주드는 더욱 잦고 심해졌다. 2023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주드로 전 국토의 90%가 피해를 보았고, 1999년부터 3년간 계속된 재난으로 전체 가축의 5분의 1 이상이 폐사했다. 가축을 잃은 영세 유목민은 도시로 이주, 도시 빈민이 되었다. 긴급 식량 지원차 몽골에 갔을 때가 이 시기였다. 그런 유목민 한 가족을 만났다. 허름한 게르 안에 들어서자, 부인이 땔감 대신 신문지를 똘똘 말아 난로에 넣었다. 밖은 영하 40도, 어린 딸의 작은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식 같은 가축 200마리가 매일 굶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죠. 지금은 도시에서 허드렛일하며 살지만 봄이 오고 가축 한 마리 살 돈만 있으면 초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거예요. 우리가 살던 방식대로요.” 젊은 아빠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날 본부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에는 셀 수 없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와, 이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봐요!” 내가 감탄하자 몽골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별이 유난히 많이 보이면 다음 날은 더 춥답니다. 더 많은 가축이 죽는다는 뜻이죠.” 아름다운 별빛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차가운 경고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귀국 전날 밤, 학생들과 국립공원에 별을 보러 갔다. 흐리고 비까지 와서 돌아가려던 순간, 하늘이 살짝 열리면서 그 틈으로 별들이 쏟아졌다. 북두칠성은 물론 은하수도 희미하게 보였다. 별을 바라보자니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서 보여준 ‘우주 속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고, 그 작은 지구에 사는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라는 통찰이 머리를 스쳤다. 동시에 시편 말씀도 떠올랐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그렇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인간은 티끌같이 작은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티끌을 기억하시고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계신다.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졌다. 학생들이 시끌벅적 별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2면

이름값

“한비야가 본명이에요?” “네, 세례명을 개명해서 본명으로 쓰고 있어요.” “비야라는 세례명도 있어요? 비야(飛野)라는 한자까지 있고요?”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때마다 듣는 질문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은 비아로 표기가 통일됐지만, 내가 세례받은 1970년대에는 삐아, 삐야, 비아, 비야를 함께 썼다. 교리 담당 수녀님은 비야로 골라주셨고, 영세 후 나는 세례명을 ‘새로운 삶의 증표’라 여기며 성당 밖에서도 될수록 한비야라는 이름을 썼다. 개명이 쉬웠던 어느 해, 아예 이를 본명으로 개명했고 공적 이름에는 한자가 필수여서 날 비(飛), 들 야(野)를 붙여 한비야(韓飛野)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한 씨라서 다행이다. 김비야, 박비야는 좀 어색하고, 변비야, 공비야라면 놀림감이 되었을 거다. 나비야, 왕비야도 괜찮지만, 어감상 한비야가 제일 예쁜 것 같다. 이름의 뜻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인도에선 내 사랑(Priya), 이란에선 이리 와(Biyā), 스페인어권에서는 길(Via)이고 베트남에서는 맥주(Bia)를 뜻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동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선 한은 물이고 비야는 큰항아리라는 의미란다. 극심한 가뭄이 든 에티오피아 마을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말하자, 일제히 어깨를 들썩이며 환성을 질렀다. 큰 물항아리가 왔다면서. 놀랍게도 그날 밤, 몇 년 만에 땅이 흥건할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름값 하기 버거운 이름도 많을 거다. 개신교인들이 대부분인 남수단에서 우리 긴급 식량 지원팀은 모세, 솔로몬, 마리아, 바울 등 신구약 인물들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한 팀원 이름은 예수였다! 발음도 우리말 그대로 ‘예수’여서 그를 부를 때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르는 사람도 이런데, 평생 예수로 불리는 그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울까? 생각해 보면 내 이름 비아(pia)도 절대 가볍지 않다. 비아는 라틴어 덕목에서 온 세례명으로 경건하고 신앙심 깊으며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고백하건대 오랫동안 나는 예쁜 세례명을 가졌다는 사실만 감사하며 살았다. 그런데 작년 봄, 피정 중에 각자의 세례명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에 비로소 깨달았다.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 이름을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라는 것을! 따라서 이름값을 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담긴 뜻대로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개인 묵상 후 나눔 시간에 피정 담당 노수녀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비아는 단순히 신앙심이 깊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무엇을 맡기시든 끝까지 충실하게 해 내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답니다. 지금까지 자매님이 걸어온 구호 활동의 삶과 딱 맞는 세례명이네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그동안 세례명을 마음에 쏙 드는 이름으로만 여겼을 뿐, 그 뜻과 소명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겠지? 50년 전에 하느님은 내게 새 이름을 내려주셨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그 이름값 하며 살고 싶다. 정신 바싹 차리고 살아야겠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이제 저는 조금만 돌봐주세요

“신입 요원을요? 절대 안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전후 복구 본부장에게 단호한 답장이 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입사 몇 달 차, 현장 경험 전혀 없는 햇병아리에게 그런 중차대한 현장 파견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월드비전 한국은 나를 보내야 했다. 한국 정부의 첫 긴급구호 자금이 투입되는 곳이고 여행가에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변신한 내 첫 파견에 언론의 관심도 커서, 현장을 알리고 국민적 모금을 이끌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48시간 이내에 꾸려지는 선발대에 반드시 합류해야 한다. “한비야 팀장을 위해 집중기도 부탁합니다.” 거절 메일을 받자마자 월드비전 회장은 전 직원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이어 이례적으로 국제 월드비전 총재에게 직접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재검토를 부탁했다. 나 역시, 개신교 신자가 대부분인 월드비전에서 우려와 반발에도 가톨릭 신자인 나를 발탁한 회장님의 선택이 옳았음을 이번 파견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두려웠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새내기 소방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심정이었다. 급하면 기도밖에 없다던가? 파견 논의가 오가던 며칠간 내 평생 가장 뜨겁게 기도했다. 시간만 나면 화살기도를 쏘아 올렸다. “하느님, 저를 보내주세요. 꼭이요.” 밤이면 고상 앞에 촛불을 켜고 무릎 꿇고는 떼쓰듯 기도하는 ‘떼쟁이 기도’를 드렸다. “보내만 주세요. 젖 먹던 힘까지 다하겠습니다.” 가까운 분들에게 부지런히 기도 부탁도 했다. 이웃 교우에게도 알렸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5살 지영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하느님께 기도할게요. 이제 저는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세요.” 앗살라무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2002년 2월, 마침내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았다. 놀랍게도 파견지는 난민촌 여자아이가 빵을 건넸던 헤라트였다. 약식 안전교육 후 식량 지원팀에 배치되어 처음 찾은 산악 마을은 참혹했다. 전쟁과 가뭄으로 7년째 농사를 짓지 못해 주민들은 풀로 연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즉각 2000가구에 식량을 배분하는 한편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20여 명의 아이들을 데려와 두 시간마다 치료용 죽을 먹였다. 2주쯤 지나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아이들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눈이 마주치면 웃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먹은 죽을 번번이 토하는 압둘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헤라트 본부로 돌아가는 날 아침, 압둘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바르르 떠는 손은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게 그럴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발 직전, 압둘을 안고 마지막 죽을 떠먹이며 말했다. “압둘, 넌 살 수 있어. 아니, 꼭 살아야 해.” 그러자 아이는 내 엄지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더니 작은 앞니로 힘껏 깨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 이렇게 힘세요. 꼭 살아날게요”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 하느님은 옆집 꼬마 천사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저는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간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세요!”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2면

난민 아이가 건네준 빵 한 조각

1초, 2초, 3초. 아이 한 명이 죽었다. 1초, 2초, 3초. 또 한 명이 죽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배부르게 먹지 못한 5세 미만의 아이들은 설사, 말라리아, 홍역 같은 병에 걸리면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다. 이들을 살리는 건 복잡한 수술이나 비싼 약이 아니다. 설사에는 링거 한 병, 말라리아에는 키니네 한 통, 홍역은 백신 한 병이면 된다. 약값은 1달러. 약 1500원이면 한 아이를 살려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나도 아프리카 오지 여행 중 처음 알았다. 지독한 길치인 나는 그날도 길을 잘못 들어 오지마을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영양실조로 바싹 말랐거나 배가 부어 있었지만, 처음 보는 동양인이 신기한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사진을 찍으려면 10여 명이 일제히 분홍색 혓바닥을 내미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나는 아이들을 ‘핑크 보이 1, 2, 3’이라고 부르며 삼색 볼펜으로 손목에는 시계를, 손가락에는 꽃반지를 그려주며 놀아주었다. 겨우 하룻밤 머물렀을 뿐인데 여행 내내 이 아이들이 생각났다. 결국 여행 경로를 바꿔 다시 그 마을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어른이 말없이 작은 무덤 두 개를 가리켰다. 내가 다녀간 직후 마을에 급성(수양성)설사가 돌아 핑크 보이 두 명이 죽었다고 했다. 너무나 가엾고 미안했다. 이 아이들은 1달러짜리 링거 한 병이면 살 수 있었는데, 내 주머니에는 천 달러도 넘게 있었는데. 그날 밤, 여행 후 홍보회사에 복귀해 세계적인 홍보인이 되겠다는 계획은 어디 가고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느님, 이 아이들을 살려주고 싶어요. 벼랑 끝에 매달린 아이들을 끌어올려 주고 싶어요. 세계 일주 끝나면 저를 이런 일 하는데 써주세요. 꼭이요!” 띄엄띄엄하던 이 기도를 매일 하게 된 건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아이 덕분이었다. 이란 국경도시 헤라트의 자생 난민촌 아이들은 감히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배낭을 멘 여자를 경계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나라에도 태권도가 인기라는 말을 들어서 기본동작 몇 개를 해 보이자, 아이들은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한참을 놀다 돌아가려는데 한 여자아이가 수줍게 다가왔다. 지뢰를 밟았는지 오른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은 아이가 내민 건 빵 한 조각! 난민촌에서 이 빵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헤일리 맘눈(고마워)” 하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와아!” 더 크게 환호하며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그날 저녁, 아프리카에서 했던 그 기도가 다시 튀어나왔고 그 후 매일 밤,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 난민촌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있는 힘을 다할게요. 꼭 시켜주세요. 꼭이요!” 그분이 길을 열어주신 게 분명하다. 6년간의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오자마자 국제 구호 개발 NGO 월드비전에서 특별 채용 제안이 들어왔고 입사 석 달 후, 긴급구호 팀장으로 첫 번째 파견된 곳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였으니 말이다.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지난 25년간 구호 현장마다 언제나 나와 함께 계셨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재난과 분쟁지역의 이웃을 도왔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국제구호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바람의 딸’로 불리며 세계 오지 여행과 구호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그건, 사랑이었네」,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아!」 등 11권의 책을 펴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