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말고 인간!] AI가 공감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파한다

새벽 두 시, 병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있던 이는 결국 휴대폰을 켠다. 손가락이 떨리는 채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간다. 몇 초 뒤, 화면에는 흠잡을 데 없이 다정한 문장들이 도착한다.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문장은 매끄럽고 위로는 정확하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보다 먼저 찾는 것이 화면인 시대다. 그런데 이상하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가슴 한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 헛헛함에는 이유가 있다. 텍사스대학교, 하버드대학교, 토론토대학교, 히브리대학교 소속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은 2026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른바 ‘인공지능(AI) 공감의 역설’을 정리했다. 낯선 사람에게 위로의 글을 받아 든 이들에게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고 평가하게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AI가 쓴 문장을 인간이 쓴 문장보다 더 공감적이라고 평가했다. 문장이 더 매끄럽고, 더 세심하며, 감정을 더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의사나 위기 상담 훈련을 받은 상담원과 견주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평가는 곧바로 뒤집혔다. 같은 문장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덜 공감적이라 느꼈다. 결정적으로, 실제로 누구의 위로를 받을지 고르게 했을 때는 더 뛰어나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AI가 아니라 사람을 선택했다. 왜일까? 연구팀은 몇 가지 짐작되는 이유 가운데, 인간의 공감이 품이 드는 일이라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것은 내 마음의 일부를 내어 주는 일이다. 듣는 사람도 함께 무거워지고, 함께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인간의 위로는 그래서 한정되어 있다.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아픔마저 밀어두어야 가능하다. AI는 이 무게를 지지 않는다. 슬픈 사연 뒤에 곧바로 다음 사용자의 즐거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AI는 아픔을 이해하고 적절한 언어로 옮길 수 있지만, 그 아픔을 자기 몸으로 나눠지지는 못한다. 공감이라는 말 그대로, 함께 느끼려면 느낄 몸과 시간과 대가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위로가 서툴러도 뭉클한 이유는 정확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 말 뒤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과 무거워진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곁에 있는 이가 아파하면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몸이 움츠러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도 함께 아파하는 이 반응이야말로 오랜 세월 사람과 사람을 묶어온 끈이었다. 병자를 찾아가 손을 잡고, 상을 당한 이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일이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정확한 위로의 말이 없어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이기 때문이다. AI는 언제나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그러나 그 위로에는 대가가 없기에, 받는 이의 마음 깊은 곳까지는 가닿지 못한다. 진짜 위로는 나를 덜어 상대에게 건네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당신은 정확한 말을 고르고 있었는가, 아니면 함께 아파하고 있었는가. AI가 공감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파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발전한다? 그래도 발전을 이끄는 것은 인간이다

채용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자마자 화면에 숫자가 뜬다. 적합도 82퍼센트. 몇 년의 경력과 밤새워 고쳐 쓴 자기소개서가 화면 위에서는 퍼센트 하나로 요약된다. 이 숫자를 매긴 것은 인공지능(AI)이지만, 애초에 무엇을 ‘적합’이라 부를지 기준을 정한 것은 사람이었다. 서류를 낸 사람은 그 사실을 잊은 채, 화면에 뜬 숫자 앞에서 조용히 작아진다. 병원의 진료 예약도, 은행의 대출 심사도 다르지 않다. 사람은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새로운 숫자로 다시 태어난다. 스페인 국립과학연구소 총재실 산하 연구윤리국에 재직 중인 존 루에다(Jon Rueda)를 비롯해, 철학과 법학, 컴퓨터공학을 연구하는 유럽과 남미 여러 나라의 학자 13명이 2025년 3월 국제학술지에 함께 글을 실었다. 이들은 최근 AI 관련 법과 정책에 ‘존엄’이라는 말이 놀랄 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정작 그 뜻을 정확히 규정한 곳은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유럽연합의 AI법에는 존엄이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쓰였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조항은 없다고 덧붙인다. 학자들은 존엄을 두 갈래로 나눠 짚는다. 하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재적 존엄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과 처신에 따라 달라지는 지위로서의 존엄이다. AI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한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대개 염두에 두는 것은 내재적 존엄 쪽이다. 그런데 내재적 존엄은 애초에 침해될 수 없는 것이어서, 엄밀히 말하면 AI가 그것을 훼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다만 사람이 마치 그 내재적 존엄을 갖지 않은 것처럼 취급될 수는 있다. 존엄을 빼앗는 주체는 없어도, 존엄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로 결정하는 주체는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은 AI가 아니다. 지원자를 퍼센트로, 환자를 위험 등급으로, 시민을 신용 점수로 읽어 내기로 정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다. 무엇을 ‘위험’으로, 무엇을 ‘적합’으로, 무엇을 ‘효율’로 볼지 그 기준을 알고리즘 안에 심어놓은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저절로 생겨난 결론처럼 받아들인다. 자신이 세운 기준 앞에서 도리어 자신이 심판받는 처지가 되는 셈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기준을 정한 손은 점점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과 그 발전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AI는 계산을 더 빨리, 더 정교하게 해낼 수는 있어도, 무엇을 계산해도 되는지, 무엇은 계산 밖에 남겨 두어야 하는지는 판단하지 못한다. 사람을 숫자로 줄여도 되는 순간과, 결코 줄여서는 안 되는 순간을 가르는 것. 그 경계를 긋는 일은 어떤 알고리즘도 대신할 수 없다. 발전이 계속될수록 이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그럴수록 그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할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오늘 당신을 스쳐 간 화면 속 숫자와 등급 가운데, 누가 그 경계를 그었는지 묻지 않은 채 그저 받아들인 것은 없었는가. 기술이 아무리 앞서 나가도, 그 앞에 설 방향을 정하는 손은 결국 인간의 것이어야 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빠르다? 그래도 인간이 먼저 도착한다

채팅창에 질문을 남기면 AI는 순식간에 답을 내놓는다. 몇 초 만에 문장이 줄줄 이어진다. 그 앞에서 사람은 이상하게 조급해진다. 나도 이만큼 빨리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메시지에 답장이 조금만 늦어도 불안하고, 검색 결과가 바로 뜨지 않으면 답답하다. 물건을 살 때도, 밥을 고를 때도, 진로를 정할 때도 우리는 점점 더 빨리 정하려 한다. 빠른 것이 곧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어느새 믿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빠른 결정이 좋은 결정일까. 중국 칭다오대학교 심리학과 궁쥔 연구팀은 2026년 4월 이 질문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연구팀은 같은 참가자들에게 확실한 돈과, 딸 수도 잃을 수도 있는 도박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 참가자들은 한 번은 1초 안에 서둘러, 또 한 번은 시간제한 없이 여유롭게 같은 선택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가자들의 눈이 어느 선택지를 얼마나 오래, 몇 번이나 바라보는지 정밀한 장비로 하나하나 살폈다. 결과는 뚜렷했다. 1초 안에 골라야 했던 순간, 참가자들은 두 선택지를 제대로 비교하지 못했다. 눈길이 한쪽에만 짧게, 그것도 몇 번 머물지 않고 곧바로 결정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급히 고른 답은 눈에 먼저 들어온 정보나 표현에 쉽게 흔들렸다. 특히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일수록 더 크게 흔들렸다. 정작 신중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더 성급해진 것이다. 반대로 시간이 충분했을 때는 같은 사람들이 양쪽을 여러 번 오가며 천천히 비교했고, 그만큼 한쪽으로 치우치는 정도도 훨씬 적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급하게 고른 답은 그 순간엔 빨라 보이지만, 나중에 다시 확인하고 고치는 일이 잦다. 실수를 바로잡느라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충분히 살피고 고른 답은 처음엔 느려 보여도 다시 손댈 일이 적다. 결국 끝까지 다시 헤매지 않고 가는 쪽은, 서두른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살핀 사람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누른 주문 버튼은 다음 날 반품으로 돌아오고, 화가 난 채로 보낸 문자는 나중에 사과할 말을 덧붙이게 만든다. 회의 중 서둘러 정한 결론은 결국 다시 모여 논의하게 만들고, 급하게 정한 진로는 몇 해 뒤 다시 갈림길 앞에 세운다. 그 순간엔 빨랐어도, 전체로 보면 시간을 두 번 쓴 셈이다. 우리가 오래 써온 ‘빨리빨리’라는 말도 사실은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서두르라는 말이 아니라, 다시 하지 않도록 한 번에 제대로 하라는 뜻이다. AI는 빠르다. 하지만 그 빠름은 단 한 번의 대답일 뿐,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책임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오늘 내린 결정을 안고 내일을 살아야 하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언젠가 되돌아가 다시 걸어야 한다. 그러니 사람에게 진짜 빠름이란,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서두르다 놓친 것은 없었는가. AI가 빠르다? 그래도 인간이 먼저 도착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욕망을 채운다? 그래도 갈망은 인간 스스로 채운다

쇼핑 앱을 열었을 뿐인데 어느새 장바구니가 가득하다. 분명 필요해서 산 것 같은데, 막상 상자를 뜯고 나면 왜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물건들이 있다. 유튜브를 십 분만 보려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원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욕망은 어디서 왔는가. 내 안에서 자란 것인가, 화면 너머의 무언가가 심어놓은 것인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 컴퓨터정보과학부의 옥타비안 마키돈(Octavian M. Machidon)은 2025년 11월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추천 알고리즘이 이용자의 취향을 그저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한다. 쇼핑몰이 다음에 살 물건을, 영상 플랫폼이 다음에 볼 화면을 골라줄 때마다 우리의 욕망은 조금씩 그 방향으로 떠밀린다. 이용자는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미리 놓인 길 위를 걷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4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던진 물음을 함께 짚는다. 완전히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이 문화적 전환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방법은 무엇인가. 알고리즘이 인간의 판단과 관계의 자리를 대신 채우려 할수록, 이 물음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해진다. 이 지점에서 욕망과 갈망은 갈라진다. 욕망은 채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좋아요’ 하나, ‘알림’ 하나, ‘새 물건’ 하나로 잠시 만족했다가 곧 다음 자극을 찾는다. 손에 쥐는 순간 이미 시들해지는 것, 그것이 욕망의 본성이다. 반면 갈망은 채워도, 채워도 남는 무언가를 향한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의미 있게 살고 싶은 마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아무리 이루어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클릭과 체류 시간으로 욕망을 정교하게 다루지만, 갈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갈망은 애초에 숫자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욕망이 갈망의 자리를 조용히 대신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화면을 넘길 때마다 도파민이 터지고, 그 짧은 쾌감에 익숙해진 몸은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한다. 정작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고 느낄 때조차,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채우려 또 화면을 연다. 갈망을 마주할 시간에 욕망을 소비하며 하루를 지운다. 허기는 여전히 남아 있는데, 우리는 그 허기의 진짜 이름을 잊어 간다. 갈망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당장 채워지지 않기에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무언가를 오래 그리워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 불완전함을 견디는 힘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만든다. 알고리즘은 그 불편함을 서둘러 지우려 하지만, 정작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그 지워지지 않는 갈증이다. 오늘 하루 당신이 누른 ‘좋아요’와 장바구니를 되짚어 보라. 그 안에 진짜 갈망이 있었는가, 아니면 잠깐의 허기를 메운 흔적뿐이었는가. 알고리즘은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 원하는 것을 더 빨리, 더 정확히 가져다준다. 그러나 갈망은 누가 대신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스스로 부딪히고 견디며 채워가야 한다. AI가 당신의 욕망을 채운다? 그래도 갈망은, 당신 스스로 채워야 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나를 안다? 그래도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안다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 며칠 동안 비슷한 광고가 화면에 따라다닌다. 포털과 유튜브를 열면 내 취향에 맞춘 뉴스와 영상이 먼저 올라온다. 요즘은 한 해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정리해 ‘이것이 당신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서비스까지 나왔다. 사람들은 그 정리표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이게 딱 나다. 그러나 정리표를 그린 것은 알고리즘이지 내가 아니다. 이 현상에 이름을 붙인 학자가 있다. 인도 마리안 칼리지의 지나 조셉(Jeena Joseph)은 2025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요즘 사람의 자아는 혼자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서비스를 거쳐 조립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알고리즘적 자아(Algorithmic Self)’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이런 자아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정해진 틀에 맞춰 찍어내는 것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 정리표를 기록이 아니라 자기 모습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이 정리표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은 그것을 나의 전부로 믿어버리는 순간 시작된다. 조셉은 이런 예를 든다. 매일 아침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보여 주는 수면 점수 하나로 컨디션을 판단하다 보면, 몸이 실제로 느끼는 감각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를 아는 방법이 몸의 느낌 대신 화면 속 숫자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한번 그려지면 스스로 굳어진다. 내성적이거나 기운이 없다고 분류되면 같은 성격의 내용만 계속 돌아오고, 점점 그 틀 안에 갇힌다. 조셉은 이런 과정을 ‘정체성의 피드백 루프’라고 부르며, 사실상 악순환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원래 이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기록을 확인하라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고, 틀렸을 수도 있음을 견디며 살아가라는 뜻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무엇을 눌렀는지는 알아도, 왜 그 순간 마음이 흔들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예전에는 혈액형이 성격을 말해 준다고 믿었다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름보다 먼저 MBTI 네 글자를 묻는다. 방법은 달라졌어도 원하는 것은 같다. 나를 어떤 틀에 넣어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다 보면, 정작 자신의 모습이 그 틀과 어긋날 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규정당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알고 싶은 마음은 닮아 보이지만 다른 곳을 향한다. 앞의 것은 나를 틀에 가두고 안심시키지만, 뒤의 것은 그 틀 밖으로 걸어 나가는 수고를 요구한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기록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기록에 담기지 않는 부분을 끝까지 붙드는 일이다. 실패했던 순간, 이유 모를 눈물, 까닭 없이 마음이 끌렸던 얼굴. 이런 것들은 어떤 정리표에도 나오지 않지만, 바로 이것들이 나를 나로 이해하게 만든다. 내일도 AI는 당신에 대한 정리표를 건넬 것이다. 그대로 받아 들 것인가, 자기 손으로 다시 그릴 것인가. 그 답을 쥔 사람은, 언제나 당신 자신뿐이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선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결단한다

버튼 하나를 누르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생사가 걸린 결정이라면, 그 버튼 앞에서 사람은 멈춘다. 손이 떨리고, 마음은 수백 번 오간다. 그것이 결단이다. 인공지능(AI)은 그 버튼을 찰나에 누를 수 있다. 그 속도는 탁월함이 아니라 ‘무게’를 모른다는 증거다. 오늘날 생성형 AI는 선택의 형식을 띤다. 추천 알고리즘은 무엇을 볼지 고르고, 의료 AI는 어떤 치료를 내놓을지를 판단한다. 이 과정을 우리는 습관처럼 선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최적화다. 데이터 안에서 오류가 가장 적은 답을 골라내는 작업일 뿐이다. AI의 선택에는 떨림이 없고, 망설임도 없으며, 이후의 무게도 없다. 선택은 틀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내리는 행위다. 최적화는 답을 고르지만, 결단은 삶을 건다. 벨기에와 프랑스 출신으로 구성된 연구진은 2025년 4월, 사관생도들을 전장의 드론 조종사로 만들었다.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민간인 피해 위험이 도사린 상황에서 생도들은 AI의 권고와 함께, 때로는 홀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 공격을 부추기는 AI, 공격을 만류하는 AI, 그리고 아무 말도 않는 조건. 결과는 선명했다. 생도들의 판단은 AI의 성향에 뚜렷하게 끌려갔다. 더 놀라운 것은, AI와 함께할수록 스스로 느끼는 책임감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결정은 자신이 내렸는데도 AI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결정이 아닌 것 같다’는 감각이 생겨났다. 내가 결정했지만 내가 결정한 것 같지 않다. AI가 책임을 가져간 것도 아닌데, 내 책임감은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이것은 전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느 길로 갈지, 무엇을 살지. 그 작은 결정들이 하나씩 알고리즘에 넘어갈수록, 결단하는 힘은 오랜 시간 벼리지 않은 칼처럼 무뎌진다. 전쟁터의 사관생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매일 조금씩 결단을 반납하고 있다. AI는 선택하지 않는다. 계산한다. 어떤 답을 내놓아도 그 결과를 감당하지 않는다. 틀려도 괴롭지 않고, 옳아도 안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결단은 다르다. 선택했다는 것은 그 결과를 내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이 내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무게를 기꺼이 지는 것. 그것이 결단이다. AI에게 선택을 넘길수록 책임도 함께 흩어진다. 결과가 좋으면 내 덕, 나쁘면 AI 탓. 그렇게 책임의 언어가 우리 삶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결단의 본질은 정확성이 아니라 감당이다. 누구를 사랑할지, 무엇을 위해 살지, 어느 길을 걷겠는지. 이 물음들은 데이터가 대신 답해 줄 수 없다. 그 자리에 AI를 앉혀 두는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포기다. AI는 효율을 줄 수 있지만, 의미는 줄 수 없다. 결단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서명하는 방식이다. 그 서명을 알고리즘에 넘기는 순간, 삶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의 마지막 결단, 그것은 온전히 당신이 진 무게였는가.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생각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사유한다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진단을 내리는 시대, 우리는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조금씩 내어주고 있다. 인간은 도구의 부산물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목적이다. 새 연재 ‘AI 말고 인간!’을 통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묻고 답한다. ‘AI가 ~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한다.’ 앞 절은 AI가 던지는 도전이고, 뒷 절은 그에 맞서는 인간의 반격이다.​​​​​​​​​​​​​​​​ 요즘 우리가 즐겨 쓰는 생성형 인공지능(AI)에게 질문을 던지면 즉각 답이 온다. 문장은 유려하고, 논리는 그럴듯하며, 분량도 충분하다. 그 답을 받아 든 사람은 자연스럽게 느낀다. ‘이것이 생각의 결과물’이라고. 그러나 기계가 말을 배운 이 시대에, 우리가 정작 잃어버린 것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스웨덴 룬드대학교와 영국 런던 위생·열대의학대학원 공동 연구팀은 2026년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개념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대형언어모델은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해 다음에 올 단어를 확률적으로 골라내는 장치다. 언어의 형식을 정교하게 모방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며,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문장을 이어 붙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지식의 환상’이라 부른다. AI의 출력이 유창하기 때문에 사용자는 그것을 진짜 이해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AI는 다시 사용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답을 맞춰가고, 검증 대신 동조, 질문 대신 확인. 이 구조가 반복될수록 우리의 사유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나아가 연구팀은 AI가 우리의 지식만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적 오류까지 증폭시켜 되돌려준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AI에게서 정확한 답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 자신의 편견을 더 그럴듯한 형태로 돌려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사유는 질문에 즉각 답하는 능력이 아니다. 질문을 오래 품는 능력이다. 어떤 문제 앞에서 멈추고, 스스로와 논쟁하며,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통과하며 비로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인간의 사유다. AI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틀릴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도 계속 생각하는 것, 자신의 답을 의심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유의 본령이며, 인간이 AI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인간의 사유는 바로 그 불안과 버팀의 자리에서 깊어진다. AI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AI의 언어 생성과 인간의 사유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 혼동이 위험한 까닭은 AI를 과대평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를 과소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묻고, 받고, 소비하고, 넘어가는 일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스스로 흔들리는 법을 서서히 잊어간다. 편리함이라는 마취제 아래 사유의 근육이 조용히 약해진다. AI에게 편리함을 빌리되 사유만큼은 내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유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버티는 것,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 두는 것. 이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의 자리이며, 그것을 잃는 것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문제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언제, 답을 찾지 않고 질문 안에 오래 머물렀는가.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우리 사회가 미래 기술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 「AI 기반으로 재편되는 인터넷 사회의 특징과 필요 역량」, 「방송의 진화」, 「소셜 빅데이터를 활용한 미디어 분석 방법」, 「콘텐츠 큐레이션」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