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예수님의 나이는 33살이다?

성당에 가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문득 ‘저기 계신 예수님은 몇 살이실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수난·부활·승천이 모두 같은 해의 일이니 십자가 위 예수님의 나이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던 햇수기도 합니다. 흔히 그 햇수를 33년이라고들 합니다. ‘33살’이라는 추정은 복음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루카 3,23)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더해 33이라는 햇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공생활의 ‘기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세 번의 파스카 축제(요한 2,13; 6,4; 13,1)가 있었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보고 2~3년가량으로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33년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단 서른 살‘쯤’이라는 표현에서부터 명확하지 않고, 공생활 기간도 추측이기 때문이지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계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수난일이 “파스카 축제 준비일”(요한 19,14)이었고, 그다음 날이 “안식일”(요한 19,31), 곧 토요일이었다고 말하는데요.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지역에 파견된 서기 26~38년 사이에 이 조건에 맞는 해는 서기 30년과 33년 두 번입니다. 서기 33년이면 예수님 나이 33살이 딱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서기’를 만들 당시 계산이 잘못돼 서기 1년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헤로데왕 생존 당시 태어나셨는데, 헤로데왕은 기원전 4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기원전 6~7년경 탄생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학자들은 서른 살쯤과 가까운 서기 30년을 예수님 부활 연도로 추정합니다. 성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예수님의 정확한 나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33’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수난·부활을 묵상하도록 해줍니다. 구체적인 숫자 덕분에 예수님이 우리의 시간 안에 실제로 계셨음을 기억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1933년(1900+33)과 1983년(1950+33)에 희년을 지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2025년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얻어 주신 속량을 기념하는 2000주년이 될 2033년을 향한 여정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밖에도 여러 기도나 신심 활동에서 33이라는 상징이 활용됩니다. 오늘날 33살이면 청년입니다. 혹시 너무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예수님의 젊음은 매 순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향한,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한 ‘속량’의 소중한 준비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3항 참조)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을 맞이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지금, 한 번쯤 ‘청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영혼을 볼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영혼이 등장하곤 하는데요. 보통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종종 영혼을 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이 영혼, 영화에서처럼 보는 것도 가능할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영혼은 영화에 나오는 영혼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먼저 비슷한 점을 보자면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고 인간 창조의 장면을 전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하느님이 불어넣어 주신 영혼을 통해 생명력을 얻게 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66항, 이하 교리서) 이렇듯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교리서 363항)을 가리킵니다. 영혼이 육체에 생명을 깃들게 하고,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면, 인간이란 사실 ‘영혼’만 중요하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해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고 육체의 중요성을 말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4항) 육체가 살아있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육체가 없는 영혼도 온전하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 곧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개별 심판으로 연옥이나 천국이나 지옥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교리서 1022항 참조) 그리고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교리서 997항) 죽은 이의 영혼은 다시 육체와 결합해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곧바로 연옥·천국·지옥에 이른다고 하니, 영화와는 달리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라면 육체와 단일체를 이루고 있을 테니 영혼만 따로 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은 육화된 영, 즉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이요, 불멸의 영을 부여받은 육체이기에 통일된 전체로서 사랑할 소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 11항) 영혼과 육체가 아주 긴밀할 뿐 아니라 영혼은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겉모습, 일부분만이 아니라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영혼 전체를 바라보려 노력한다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우리도 ‘예언’할 수 있다?

‘예언’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종말을 예언했다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날 수도 있겠고, 이스라엘에 닥칠 재앙이나 메시아의 탄생 등을 알린 예언자들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예언은 어쩐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로 이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우선 예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예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豫) 말하는(言) 것’을 뜻하는데요. 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현재의 일을 과거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등 예언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다뤘고,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을 동시에 하기도 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정치, 사회, 신학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처지나 상황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세대에 하느님을 대신해 말한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두고 “주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내렸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예언자들은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위해 살고, 또 죽기까지 하면서 온 삶으로 하느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면서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그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때, 평신도이건 성직자이건 간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을 통해 이뤄진다”고 설명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85항)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예언자로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언자가 되기를 꺼렸거나 예언자적 자질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성경 속 예언자처럼 하느님 말씀을 환시로 듣거나 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위대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영광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당신의 예언자직을 수행하신다”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권력으로 가르치는 교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예언자직을 수행하신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35항) 일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며 말로써, 또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언입니다. 혹시 이번 주 복권 1등 당첨번호나 주가 상승 종목을 미리 알 수 있는 예언이 아니라 실망스러우신가요? 하지만 우리의 예언은 복권이나 주식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사랑을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알려줍니다.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혼배’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다?

성당에서 ‘혼배(婚配)’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하고 한자이다 보니 일반적인 용어처럼 느껴지는데요. 사실 이 말이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시나요? 아시는 것처럼 혼배는 ‘혼인’을 뜻합니다. 물론 조선시대나 옛 중국 문헌 등에 ‘혼배’가 등장하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혼배’라는 단어는 주로 신자들이 사용합니다. 여러 국어사전을 살펴봐도 ‘혼배’는 가톨릭 용어로 분류됩니다. 현재 전례나 교회 문헌에서는 혼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만, 신자들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혼배미사, 혼배성사, 혼배공시 등으로 자주 쓰입니다. 혼배는 신앙 선조들이 사용한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에서 온 표현입니다. 혼인, 결혼이라는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 있는데, 왜 혼배를 썼을까요. ‘혼(婚)’은 혼인을 뜻할 테니, ‘배(配)’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교요리문답」은 혼배의 특성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합(配合)인 것과 또한 부부가 서로 갈리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배합, 즉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혼인의 단일성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혼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혼인성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신자와 비신자의 혼인, 관면혼을 ‘관면혼배’라고도 부르는데요. 관면혼은 성사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신자들의 혼인은 성사로 이뤄져야 하지만, 교회법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면해 비신자와 혼인하도록 해주는 것이 관면혼입니다. 관면혼은 성사가 아니니 의미가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혼인의 제정자’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사목헌장」 48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혼인성사는 ‘한 처음에’ 창조주가 제정하신 부부 계약 자체의 성사”라고 강조하십니다.(「가정공동체」 68항 참조) 그러니 비록 성사는 아니지만 혼인이 지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고 혼인성사는 이를 완성해 줍니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교회의 신랑께서 혼인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러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그렇게 부부도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영원한 신의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48항 참조) “성사의 은총은 부부의 인간적 사랑을 완성하고 해소할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굳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그들을 성화”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1항) 혼인의 사랑은 배우자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이미 배우자에게 다 내어줬기에 ‘한 몸’이 되고,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그 모범입니다.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유아세례만으로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

모든 신자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에 일치해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삶의 정점이 성찬례, 곧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주로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야에 세례성사를 거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이의 경우 세례를 받았더라도 10세 무렵 첫영성체를 하기 전까지는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 능력대로 이해하고 주의 몸을 신앙과 신심으로 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식과 정성된 준비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교회법」 제913조 1)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꾸준히 다니면 자연스럽게 첫영성체도 받을 수 있는데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주일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성인이 된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성당에 오셔서 미사에 참례하셨다면 성체를 모실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별도의 준비와 예식 없이는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는데,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아세례는 온전한 세례가 아니라는 걸까요? 당연하게도 유아세례는 온전한 세례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요. 죽을 위험에 처한 분이 대세(代洗)를 받은 후 회복돼 신앙생활을 하게 됐거나,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적법한 방식으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로 온 경우입니다. 모두 온전한 세례지만, 곧바로 성체를 모실 수는 없습니다. 이분들은 예비 신자들처럼 일정 기간 교리 교육을 받으며, 신자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고, 전례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첫 고해성사를 하고, 대세를 받은 분의 경우 보충 예식(보례)을, 다른 그리스도교의 경우 일치 예식을 하면 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유아 세례만 받은 어른들도 이 기간이 필요한데요. 교회는 이를 “정화와 조명의 기간”이라고 말합니다.(「어른 입교 예식」 21항)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회개하는 ‘정화’와 신앙의 빛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이 되는 ‘조명’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성체를 모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첫영성체에만 ‘정화와 조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라는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순간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5항) 바오로 사도도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된다”면서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1코린 27-28 참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 앞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한 번쯤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주일, 즉 일요일은 휴일입니다. 그 유래를 물으면 많은 분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기 때문”이라고 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렛날’을 기억하는 날,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십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탈출 20,8)라고 나옵니다. 성경은 ‘안식일’을 지키라 했는데, 왜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을까요?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이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제정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성경은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라고 알려줍니다. 안식일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기리는 거룩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카’를 떠올리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희생제물이 되시어 성체성사로 파스카를 완성하신 것처럼, 안식일도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사실 안식일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빌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제자들의 활동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마르 2,27)라고 가르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부활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이 사건이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마태 28,1)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교회는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로서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주일이 됐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74항) 안식일이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키는 주일로 대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왔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은 이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옛 질서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됐으니,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살아간다”며 “주님과 그분의 죽음으로 이날에 우리의 생명은 솟아나게 됐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날, 여러분은 어떻게 새로 나고 계신가요?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4면

[교회상식 더하기] 사제직은 일 년에 한 번씩 갱신한다?

성주간 중 목요일,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아무래도 주님 만찬 미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해마다 이날 신부님들이 사제 서약 갱신을 한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사제 서약 갱신식은 해마다 성주간 목요일 오전 각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는 성유 축성 미사 때 이뤄집니다. 사제 서약을 해마다 갱신하다니…. 사제직도 면허처럼 갱신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는 걸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덜컥 신부님의 고용 안정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리 때 ‘성사’에 관해 잘 배운 분들이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례·견진성사와 마찬가지로 “성품성사도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새겨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한 번 받은 성품성사를 다시 받는 것도, 한시적으로만 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582항) 그렇다면 왜 성유 축성 미사 때마다 사제 서약 갱신식을 하는 걸까요? 바로 이날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제직을 우리에게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로마 미사 경본」 성주간 목요일 9항) 이날 사제들은 “성품성사 때에 했고 해마다 성유 축성 미사에서 갱신하는 엄숙한 서약”에 따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충실하고 열심히 거행”할 것을 다짐합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구원의 성사」 31항)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제사란 단 한 번에 완결된 유일한 제사 하나뿐입니다. 그 제사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제사를 통해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히브 10,14)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그분의 몸과 피를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트리엔트 공의회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와 법규들」 서론) 이렇듯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성찬례, 즉 미사는 십자가상에서 단 한 번 바쳐진 제사를 재현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이 유일한 예수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지요. 사실 신부님뿐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보편 사제직’으로 예수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편 사제직은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직무 사제직과는 다릅니다. 평신도들은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0항) 신부님들이 사제 서약 갱신을 하는 성주간 목요일, 우리도 유일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가 수행하는 사제직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 보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예수님’ 이름만 불러도 기도가 된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명소를 찾기도 하고, 신자들은 모범이 될 성인의 이름을 본명(本名)으로 삼습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하고, 또 이름이 그 사람에게 미치는 힘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교회도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룩하다”며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58항 참조) 그런데 이 중요한 이름 중에서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우리 주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에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우리의 신앙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에 관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에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거듭해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쳤고, 병자를 고쳤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는다”(필리 2,10)고 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됐다”(1코린 6,11)고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 14,26)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 기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 안에서 대부분의 기도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통하여’가 라틴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긴 합니다만, 1997년 주요기도문 개정 전까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기도’라는 기도도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 많이 바치는 기도인데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의 능력에 힘입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문구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바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기 때문이지요.(요한 10,1-21 참조)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일단 “예수님”하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예수님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를 받는다?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분이 본당 공동체와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대사라고 하면, 희년에 지정된 순례지를 순례하거나 11월 위령성월 첫 주간에 묘지 등을 방문해 얻는 것을 떠올립니다. 올해도 프란치스코 성인 선종 800주년을 맞아 특별 희년인 ‘성 프란치스코의 해’가 선포되면서 성인과 관련된 성당을 방문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지요. 이렇게 전대사라고 하면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장소를 방문하는,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 다니는 성당은 물론, 어느 성당·성지에서도 가능하고, 심지어 사순 시기뿐 아니라 1년 중 모든 날에, 하루에 한 번 받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 내사원이 발행한 「대사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할 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고, 또 하나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로 전대사를 받으려면 우선 성당이나 성지 등에 합법적으로 설치된 14개의 십자가, 즉 14처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처에서 처로 이동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공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하는 경우라면 인도자만 이동해도 괜찮습니다. 또 교황님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실 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경건하게 참여해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 등으로 여건이 되지 않아 이마저도 어렵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경건한 독서와 묵상으로도 십자가의 길 기도와 같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십자가의 길 기도만 바친다고 저절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반 조건이 전제돼야 합니다. 일단 전대사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을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상태여야 하지요.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부분 대사를 얻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판공이 있으니 이 일반 조건을 채우기도 좋지요. 그래서 ‘전대사 받기가 이렇게 쉬워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대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인의 공로, 무엇보다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거저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고, 그분의 상처로 우리가 낫게 됐습니다. 성인들도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의 수난을 따르려 노력해 공로를 쌓았습니다. 전대사가 쉽게 남용돼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전대사를 위한 다른 어떤 활동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꼭 전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사순 시기를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전대사는 ‘면죄부’다?

‘면죄부(免罪符)’라는 말은 ‘책임이나 죄를 없애 주는 조치나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사실 ‘대사(大赦, indulgentia)’가 잘못 번역된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대사는 교회가 정한 조건을 채우면 잠벌을 면해 주는 것(교회법 제992조 참조)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는데요. 잠벌은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와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받는 벌입니다. 이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을 ‘전대사’, 일부를 없애 주는 것을 ‘부분 대사’라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데 왜 벌이 남아있는 걸까요?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을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벌은 고해성사를 통해 벗어나게 되지요. 반면 모든 죄는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도 가져오는데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3항) 교회는 이를 생전에, 혹은 죽은 뒤 연옥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를 통해 잠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 견디고, 또 자비와 자선의 행위, 기도와 속죄 행위들로 잠벌을 정화해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잠벌을 정화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 도움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받은 교회는 대사를 통해 그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대사는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에 대한 증서를 표현하자면 ‘대사부’가 바른 번역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면죄부’라는 오역이 생긴 것일까요? 대사가 남용됐던 역사에서 비롯한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 반박문」에서 “연옥 영혼에게 벌의 면제를 전구의 방식으로 베푸는 것은 옳은 행위”라고 대사의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 소리를 내는 즉시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오른다”고 설교하며 대사를 파는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잘못된 설교와 증서 발부로 인해 신자들이 대사의 의미를 잊고 ‘돈을 내면 죄가 사라진다’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면죄부’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자 최근에는 역사학계나 교과서 등에 ‘면벌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후 교회는 대사의 남용을 바로잡고자 트리엔트공의회 「대사에 대한 교령」을 통해 “대사를 얻기 위한 모든 부적절한 돈벌이들을 전적으로 철폐”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전대사의 수를 줄이고 신자들이 전대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규범을 수정했습니다. 대사는 ‘면벌’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신심과 참회와 사랑의 행위, 특히 신앙의 성장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행위”를 북돋는 역할도 합니다. 또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봉헌하는 것은 “탁월한 사랑의 실천이자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령 「대사 교리」 8항)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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