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하느님의 구원 경륜 3단계와 믿음

우리는 마음속에 ‘인간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큰 질문을 지니고 있다. 이 큰 질문에 대하여 가톨릭 신학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첫 번째, 양심대로 살면 구원받는다. 두 번째,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 세 번째,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바라신다.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구원의 방법을 달리하셨다.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던 기원전 2000년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양심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기원전 1500년 모세의 시대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약 2000년 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아브라함의 시대, 율법도 모르던 시대에는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모세의 시대, 율법이 주어진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시대에는 믿음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결국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과정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3단계로 이루어졌다. 즉 양심의 단계에서 율법의 단계로, 율법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과정이 역사와 더불어 진화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은 양심과 율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양심과 율법을 포함하면서 초월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 속에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믿음이고, 죽어 있으면 죽어 있는 믿음이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홀론(Holon)’ 이론과 같다. 홀론이란, 그리스어로 전체를 뜻하는 ὅλος(holos)와 개체 혹은 부분인 ὀν(on)의 합성어다. 실재는 전체(whole)이면서 부분(part)인 홀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는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홀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온전한 원자는 한 온전한 분자의 부분이며, 그 온전한 분자는 한 온전한 세포의 부분이고, 그 온전한 세포는 온전한 한 유기체의 부분이다. 현실적 존재들의 각각은 단순한 하나의 전체도 아니고, 하나의 부분도 아니며, 다만 한 전체이자 부분인 하나의 홀론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포는 아원자, 원자, 분자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초월하고 있다. 믿음 역시도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결여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이 많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신자들은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갖춘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초자연 신학은 신앙을 다룬다

초자연 신학 또는 고유한 의미의 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전통적 분류 방법에 따르면 네 가지 있다. 성서 신학, 역사 신학, 조직 신학, 실천 신학이다. 첫 번째, 성서 신학은 ‘신앙의 원천성’을 다룬다. 확실한 신앙의 증서로서의 문헌의 발생 그리고 원래의 의미와 현재를 위한 의미를 다룬다. 성서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성서학, 구약학, 신약학, 구약 입문, 신약 입문 등이 있다. 두 번째, 역사 신학은 ‘신앙의 전통성’을 다룬다. 세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는 신앙의 전달 과정 안에서 다양한 신학들과 교회들의 역사를 다룬다. 역사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고대 교회사, 중세 교회사, 근세 교회사, 현대 교회사, 한국 교회사, 교부학, 신학사 등이 있다. 세 번째, 조직 신학은 ‘신앙의 합리성’을 다룬다. 신앙의 합리성이란, 첫째로 신앙이 정서적 경험을 넘어서 논리적·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로는 신앙의 교리와 고백이 현대인의 이해 가능성 안에서 철학·역사·사회학적 근거들에 의해 설명·구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앙 내용의 논리적 진술, 표현 방식의 형성 그리고 그 전달 방식을 포함하는 포괄적 작업이다. 따라서 조직 신학은 교회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그리고 구조 안에서의 신앙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의 해명 가능성을 다룬다. 조직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기초 신학, 신학 입문, 교의 신학, 윤리 신학, 그리스도교적 사회학, 교회일치 신학 등이 있다. 네 번째 실천 신학은 ‘신앙의 실천 가능성’을 다룬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같은 시대를 살면서, 오늘날 하느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다룬다. 실천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사목 신학(설교학, 교리 교수법, 사목 심리학, 사목 사회학 등), 교회법, 전례학, 종교교육학, 선교학, 영성 신학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초자연 신학은 ‘신앙의 원천성’, ‘신앙의 전통성’, ‘신앙의 합리성’, ‘신앙의 실천 가능성’을 다룬다. 즉, 신앙을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진리를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 시대의 놀라운 신학의 발달로 이루어진 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읽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 중 하나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기초 신학은 단어가 의미하듯 신학의 영역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의 기초는 무엇인가? 바로 계시와 신앙이다. 따라서 이를 전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기초 신학이다. 신학의 방법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증적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변적 방법이다. 실증적 방법은 ‘신앙의 들음(Auditus fidei)’에 해당하고 사변적 방법은 ‘신앙을 이해함(Intellectus fidei)’에 해당한다. 실증적 방법은 신앙에 대한 사실의 문제를 다루고 사변적 방법은 신앙에 대한 본질의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은 따로 분리될 수 없고 서로를 도와 신앙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초자연 신학과 신비신학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 지난 연재에서 말한 것처럼 첫째, 자연신학을 통해서다. 이어 둘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과 증언(기적과 업적)을 통하여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의 빛으로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초자연적 신학이다. 초자연적 신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 체험의 기록인 성경과 성전을 읽는 것이다. 하느님 계시와 인간 신앙의 책인 성경과 성인전과 신심 서적을 읽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인류와 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힘찬 사랑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을 읽을 때 인생의 방향을 찾고 믿음이 깊어져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과 「성 프란치스코 성인전」을 읽을 때 큰 감동을 받게 되고, 우리 안의 무질서한 사욕편정(邪慾偏情)이 정화되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요즘 신앙생활이 힘든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성경과 성인전을 읽기를 바란다. ‘요즘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한다면 신앙 서적과 신심 서적을 읽기를 바란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사랑을 기록한 복음서를 읽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 귀로 들을 수 있는 하느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느님인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셋째는 신비신학을 하는 것이다. 신비신학은 다름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기도는 한마디로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기도의 1단계는 내가 말하고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단계이다. 기도의 2단계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내가 듣는 것이다. 기도의 3단계는 하느님도 나도 말하지 않는 가운데 사랑 안에서 서로를 고요히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대화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기쁘고 참으로 평화롭다. 이 작은 피조물인 인간이 위대하신 창조주인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은총인가? 믿음 안에서 기도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은총을 쏟아 주신다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믿음 안에서 기도하기만 하면 당신 자신까지 보여 주신다는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기도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의 영과 그분의 뜻이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게 된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게 된다. 기도하면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깊어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흐려진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자연과의 만남을 소홀히 할 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성경과 성인전을 읽는 것을 소홀히 할 때 우리들의 마음이 늘 불안하게 되고 세상의 달콤한 것들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할 때 하느님이 안 보이고 세상 것들이 더 크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자연과의 만남에서 나온 자연신학을 통하여 얼마나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되어 있는가? 나는 성경과 성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초자연 신학을 통하여 얼마나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되어 있는가? 나는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체험에서 나온 신비신학을 통하여 얼마나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되어 있는가?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아는 법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은 근원적 질문이다. 즉, 이 질문은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하여 가톨릭 신학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 인간은 하느님이 만든 피조물인 자연을 통하여, 이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자연신학이다. 둘째,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과 증언(기적과 업적)을 통하여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의 빛으로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초자연적 신학이다. 셋째, 인간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분의 본질을 영광의 빛(하느님의 본질 그 자체에서 나오는 인간을 초월한 신적인 빛)으로 직관하여 하느님의 신비 자체를 ‘지복직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신비신학이다.(르네 라투렐 「구원의 학문으로서의 신학」(Teologia scienza della salvezza) 참조) 신학이 무엇인가?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신학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느님을 잘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신학은 하느님을 제대로 인식하여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하느님께서 만든 피조물인 자연의 아름다움 통해서 그분의 현존 체험할 수 있어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신학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첫째로 자연신학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자연신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책인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인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연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묵은때가 씻기는 것이다. 지혜서는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고 말한다. 지구라는 생명의 별 속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깊이 묵상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어느 날, 우연히 보았던 석양 노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그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푸른 바다, 푸른 숲이 주는 그 생명력과 웅대함을 떠올리며, 그 생명력을 느끼는 일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우리들 각자의 앞마당에 있는 나무와 꽃들을 자세히 보면서 그 아름다움과 경이함을 느끼는 일은 대단히 거룩한 일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의 한 빛줄기를 체험하는 것이다. 대지 위를 낮게 읊조리는 바람 소리 안에서 인디언들은 만물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을 느꼈고, 아름다운 석양 노을에 침잠했던 앙리 베르그송은 그 황홀한 찰나 속에서 분절되지 않는 영원한 현재를 직관하였다.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역시 태양과 달을 형제라 부르며 만물에 깃든 완벽한 질서 속에서 창조주의 숨결을 노래하였다. 또한 사막의 교부들은 끝없이 펼쳐진 고요한 지평선 위에서 불필요한 감각을 덜어내고, 오로지 하느님이라는 실재와 대면하는 영성적 고양을 체험하였다. 이들의 경이로운 체험은 곧 자연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신앙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턱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학과 철학의 차이

“하느님이라는 말마디는 ‘믿는 사람’(신학자)이 사용하는 말마디이고 ‘부동의 제일동자’라는 말마디는 ‘생각하는 사람’(철학자)의 말마디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사람의 말마디와 믿는 사람의 말마디는 서로 다르지만, 그 말마디들은 서로 상대편의 말마디들을 잘 조명해 준다”(정달용 「그리스도교 철학」 참조)는 글은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암시한다. 신학과 철학은 공통성도 지니지만 차이점도 지닌다. 한마디로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며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스스로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며, 그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익을 경멸하고 포기하여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진짜 금화’(지혜, 정의 등)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선을 맞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예수님은 마태오복음에서 값비싼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산다고 하였다.(마태 13,46 참조) 이렇게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신학과 철학이 같지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물의 내용에 있다. 즉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신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리하르트 셰플러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II)」 참조) 철학에서도 신을 논하지만, 최고의 존재요 존재의 근거로서 신의 본체나 속성을 이성으로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추구한다. 쉽게 말해서 철학은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신학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과 철학은 현실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한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는 학문인 신학은 계시와 신앙에서 출발하고, 어원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인 철학은 자연과 이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신학은 계시를 통한 신앙의 학문이고, 철학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학문이다. 철학이 질문을 통해 솟아 나온 사색의 학문이라면, 신학은 철학이 질문한 것에 답을 제공하면서 신앙으로 응답하는 실행의 학문 즉 구원의 학문이다. 유한의 체험을 말하는 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이 존재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단지 이 존재를 생각하고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한다. 한편 무한의 체험을 말하는 신학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이 존재를 확실히 인정한 뒤, 이 존재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면서 존재의 신비로 들어간다. 철학이 이 존재의 문지방에 서성거린다면, 신학은 이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 그 신비를 향유한다. “철학 없이 신학 없다”라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추기경의 말처럼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을 해야 한다. 인간의 궁극적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은 신학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신학은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와 신앙을 설명한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노는 플라톤의 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현대에서 칼 라너 신부는 하이데거 철학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한 하느님에 대한 학문이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신앙으로 이미 받아들인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성을 사용하는 믿는 이들의 연구이다. 간단히 말해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인간은 신앙으로 수용한 계시가 신비일지라도 그 내용을 알고자 하는 지성적 관심을 항상 가지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믿으면서도 인간 지력의 힘으로 더 정확하고, 더 충만하게 파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지성적 탐구를 신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이성화하려는 노력, 즉 신학이 필요하다. 신학은 생각하는 머리로써 하는 신앙인 것이다. 신앙이 없는 역사가가 그리스도교 계시의 사실들을 학문적으로 다루게 될 때 종교학이나 역사학의 차원을 넘을 수 없다.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계시의 본질적인 내용과의 만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계시 사건들은 자연적인 종교현상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며, 이를 올바로 감지하기 위해 신앙이 필수적이다. 신앙은 말하자면 인식의 차원을 초자연적 차원으로 올려주며, 참된 의미의 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안셀모 성인의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바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없으면 가장 높은 것,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믿음으로써 더 큰 앎에 이른다. 즉 하느님을 지복직관하게 된다. 고통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 물질 안에 영이 있다는 것, 역사와 시간 안에 영원히 있다는 것, 세계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우리 눈과 이성으로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고통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세계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믿음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안셀모 성인은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Fides querens intellectum)”(안셀모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참조)라고 말한다.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즉 신앙의 대상을 이해하려는 신앙이다. 결국 신학은 신앙의 학문적 이해인 것이다. 신앙 없이 신학자는 신학을 전개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설만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신앙을 위한, 신앙의 행위이다. 신앙은 신학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신학의 중심이며 목표다. 신학은 신앙 안에서 태어나고 신앙 안에서 자라고 신앙 안에서 완성된다. 신앙 안에서 나온 신학 서적을 읽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어렵지만 1년에 한 권 정도 신학 서적을 읽으시기를 바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란?

숲을 바라볼 때 숲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부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신앙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인 신앙의 나무들을 바라보다 보면 신앙이라는 전체 숲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신앙(Fides)이 있기 전에 먼저 무엇이 있었을까? 계시(Revelatio)가 있었다. 계시가 없었다면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계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이 생겨났다. 가장 넓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이 신앙’이다.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보여주시는 하느님께(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통교, 자기 증여) 그분을 받아들여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하느님께서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계시의 원천(Fons revelationis)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하시는 하느님(Deus Revelans)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침묵만 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 역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셨기에 신앙이 생겨났고 이 신앙으로 인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생겨났다. 세 번째, 그렇다면 계시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계시의 전달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성경(Biblia Sacra)과,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전(Traditio Sacra)을 통해서 전달된다. 네 번째,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전달되는 계시를 현실화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의(Dogma)이다. 그리고 계시의 이해를 현실화 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학(Theologia)이다. 신학이란 ‘학문적 방법에 의한 계시와 신앙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결국 신학이라는 것도 거창한 것 같지만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신학보다는 교의가, 교의보다는 계시와 신앙이, 계시와 신앙보다는 하느님이 더 큰 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한다

예수님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꿈이나 환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살과 피를 지닌 인간,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따라서 신학은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에 토대를 둔다. 모세는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양을 치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좌선을 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제자들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다. 모세가 만난 그 하느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난 그 하느님을 신학은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인간 이성을 초월한 그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순도 있지만 돌파구도 있는 것이다. 이성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안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함을 통해 믿으려 하는 것이다. 이해할 때 더 큰 믿음이 생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생긴다. 모르고 믿으면 맹목적이 되지만 알고 믿으면 확실성을 얻게 되고 더욱 순종하게 되고 더욱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신학은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 신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움직인다.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은 다르다. 모르고 믿는 사람은 인생 안에서 시련과 고통이 닥칠 때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이런 분이 아닌데’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에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되고 더 크게 성숙하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앎의 세계, 신학의 세계로 들어왔으니 제대로 알면 제대로 믿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신학을 하는 이유이다. 신학을 통해 사도들의 하느님 체험, 교부들의 하느님 체험,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 성직자 수도자들의 하느님 체험, 하느님 백성의 하느님 체험을 알게 된다. 이 앎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되고 신앙의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진다

유명한 의사가 강의하던 중에 “이것을 먹으면 가장 오래 사는데 무엇일까요?” 하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밥을 잘 먹어야 오래 산다”, “욕을 먹어야 오래 산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깔깔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의사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이것을 먹으면 죽는데 무엇일까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이요”하고 대답했다. 의사는 “정답”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어 오래 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죽게 된다. 나이라는 것은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도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죽음을 모든 것이 끝장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하느님과 만나는 날로 생각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신앙의 민족인 유다 민족이 바빌론 유배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했는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의 유다 민족은 이웃 나라 강대국 바빌론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다. 그 고난의 유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멸망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다른 민족들이라면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강한 바빌론이 쳐들어와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맞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민족이었던 유다 민족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웃 나라가 강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부패해서도 아니다. 그러면 왜 멸망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늘날 유다교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건을 해석하고 난 뒤에 그 해석에 따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신앙이 달라지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고마운 돌’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은 그의 <고마운 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는데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물살이 무척이나 센 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건넌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강을 건너면서 어쩌면 그것이 거친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 줄 고마운 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은 한마디로 고마운 돌이다. 신앙은 돌처럼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위기의 순간에 생명을 주는 고마운 돌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거친 물살들,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닥쳐온다. 이때 신앙이라는 고마운 돌은 우리가 그 물살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굳건하게 붙들어 주는 닻이 되어 준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고통과 위기의 순간에 그 죽음을 편안하게 넘어가게 해 준다. 신앙은 삶 안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고마운 돌이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귀한 선물이다. 세례식 때 주례 사제는 세례받는 예비 신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앙을 청합니다.” 교회에 돈이나 부귀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말한다. 육체와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최고의 것, 가장 귀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이어 주례사제가 묻는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돈과 부귀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권력과 명예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인간을 참 진리와 참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따라서 신앙만큼 좋은 것이 없다. 신앙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 없으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 중 하나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에 이미 이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 입문할 때 첫 번째로 청한 것이고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신앙은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말하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깊고 정확하게 알아 기쁘고 올바른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 때 행복하고 죽을 때 웃으면서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일반 가톨릭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라는 신앙 시리즈를 연재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전공하고 대전교구 유성본당 주임, 대전 가톨릭대 교수, 정하상교육회관 관장, 법동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제주도에 있는 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의 연수원장으로 소임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