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레 미제라블」: 혁명과 인간 존엄성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지식인은 “인간 본성의 새로운 탄생”이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 정치로 변질되어 버린 혁명에 실망한 영국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제도적 혁명도 필요하지만, 각 “개인의 내적 회심”이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완벽한 제도가 있더라도 미성숙한 사람이 운영하면 그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갈등을 빚었던 부분이 바로 제도와 내적 태도의 문제이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반문하신다. 율법의 완성은 제도적 보완이 아니라, 한 인간이 보여주는 생명과 자비다. 총 1752개로 이루어진 교회법전의 마지막 조항은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영어 단어 justice는 ‘공정한 행위’, 혹은 공정성을 이루기 위한 ‘법 집행’ 등을 의미한다. 올바르고 공정함은 한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의 관계를 규정하는 본질적 가치이다. 은 식기 훔쳐 달아났던 장발장, 용서받은 뒤 타인에 대한 자비·자기희생 실천 인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 자비와 용서로 존엄성 회복하는 진정한 혁명 1862년 출판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의 여러 혁명과 정치적 혼란, 산업화, 빈곤 등의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대서사시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베르 경감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준법정신이 철저한 타락하지 않은 경찰이다. 그러나 장발장의 대척점에 서게 되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이유는 법적 정의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에게 법은 인간의 제도를 넘어서 거의 신성한 도덕적 질서이다. 그는 자신을 “악을 짓밟아 없애는 천상의 사명을 수행하는 정의와 빛과 진리의 화신”으로 생각하였다. 법은 타협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에, 법에 대한 절대적 순명이 요청된다. 따라서 선과 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세상에 오로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은 죄수들로서 악한 사람, 법을 잘 지킨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선한 시민이다. 선함과 악함 사이의 애매모호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베르는 누군가가 법을 어겼을 때,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범법자는 그저 범법자일 뿐이다. 더욱이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즉 악에서 선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다. 한번 구별된 선과 악은, 그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러한 자베르의 법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인간 존엄성의 결여이다. 사람들에 대한 그의 판단은 주로 사회적 신분과 법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가난한 사람, 매춘부, 거지, 전과자 등의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존중이나 연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엄격한 법의 심판, 벌, 응징의 폭력적인 방법이 정의이다. 자베르와는 대조적으로, 장발장에게 정의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출소한 전과자에게 발급되던 노란색 통행증은 사회적 차별과 불신의 상징이었다.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장발장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 주교는 장발장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존엄성을 바라본다. 팡틴이 사람들 앞에서 체포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장발장은 자베르의 엄격한 율법주의에 도전한다. 자베르는 팡틴이 저지른 잘못만을 지적한다. 그러나 장발장의 첫 질문은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녀의 이런 상황에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먼저 물어본다. 샹마티외라는 노인이 사과를 훔치다 체포된다. 법정은 그를 탈옥수 장발장으로 오인한다. 마들렌 시장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던 장발장은 침묵해버리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자수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달콤한 목소리도 듣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노인의 삶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자수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어도 근본적인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장발장의 인간 존엄을 근간으로 하는 정의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으로 확장된다. 길거리에서 체포될 위기에 처했던 팡틴을 구출해 병원에 입원시키고, 임종까지 돌본다. 그녀와의 약속대로 코제트를 찾아 돌봐준다. 바리케이드에서 총상을 입고 기절한 마리우스를 망설임 없이 업고, 파리의 복잡한 하수구를 통해 구출한다. 궁극적으로 장발장이 추구하는 정의는 범죄자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비와 자기희생을 근간으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은, 19년 동안의 감옥 생활이라기보다는, 은 식기를 훔쳐 달아난 그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자비와 용서이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 스파이로 들통난 자베르는 혁명군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오랫동안 절대적 법의 심판을 믿었던 자베르는 장발장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확신이 사라진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법의 눈에도 눈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에게 의존하는 정의였다. 그는 지금껏 이런 정의는 알지 못했다. 도덕의 태양이 암흑 속에서 무섭게 뜨는 아침이었다. 아침이 그를 겁나게 했다.” 범죄자였던 장발장이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변화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 인간의 파멸이라기보다는, 법에 갇힌 정의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이야기다. 구시대의 악습을 개혁하는, 혹은 정의로운 사회를 회복하는 혁명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존엄성 회복은 혁명이나 법적 정의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능하다. 바리케이드 에피소드는 1832년 6월 파리 봉기를 배경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가난에 맞선 민중의 저항,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애를 상징하는 서사의 절정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적 미래의 열망은 폭력적인 현실과 죽음으로 얼룩진 비극의 공간이다. 예수님도 혁명가이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십자가 사건을 ‘위험한 기억’으로 해석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믿는 사람들은 부정의한 현실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혁명의 중요한 특징은 소외당한 사람, 죄인, 혹은 병자 등, 한 개인의 근본적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호밀밭의 파수꾼」: 순수와 경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 「순수의 노래」(1789)가 아이의 순수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경험의 노래」(1794)는 아이가 자라서 순수성을 잃고 대면할 타락한 세상을 보여준다. 시인은 인간의 실존적 인식을 분석하면서 어느 쪽이 더 진리인가를 선택하기보다, 순수와 경험의 이중성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초대한다. 예수님도 가라지의 비유에서 선과 악의 공존에 대해 언급한다. 선한 주인은 세상이라는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와서 슬쩍 가라지를 심어 놓았다. 종들이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한다.(마태오 13,28-29 참조) 그러나 종말에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된다. 위선적인 세상 철저히 비난하며 성장통 겪는 16세 소년 콜필드 상실의 아픔에서 멈춰버린 삶, 순수함에 집착해 스스로 고립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1951)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방황을 통하여 순수함과 죄스러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낸다. 16세 소년 주인공은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 동안 뉴욕 호텔에 머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주인공은, 순수함과 타락한 세상 사이에서 성장통을 겪게 된다. 콜필드는 어른들의 세계를 ‘가짜(phony)’로 인식한다. 그는 전체 이야기에서 가짜라는 단어만 50번 이상 사용한다. 유사한 단어들도 자주 사용한다. 주인공은 어른들의 대화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사회적 규범 등은 위선적이고, 피상적이며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엘크턴 힐스 학교를 떠났던 이유는 “주변에 위선자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특히 교장 하스(Mr. Haas)가 학부모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른들의 속물근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교장은 일요일이면 차를 몰고 학교를 찾아온 학부모들과 일일이 악수한다. 그러나 “늙고 볼품없는 학부형들”, “엄마가 뚱뚱하거나 촌스럽게 보이거나, 아빠가 어깨가 널찍한 구식 양복을 입고 촌스러운 흑백 구두를 신었다고 치면 교장은 그런 사람들과는 악수만 하고 억지로 웃음을 던지며 그냥 지나쳐 버린다.” 콜필드는 이 “사기꾼” 같은 교장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고,” “너무 울적해서 미칠 지경”이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 피비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매우 넓은 호밀밭에서 몇천 명이나 되는 애들이 놀고 있는데, 자신이 “아주 가파른 벼랑 끝 옆에 서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벼랑 너머로 떨어지려고 하면 그 애를 붙잡아 주는 거지”, “하루 종일 그 일만” 하고 싶다. 아이들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순수함을 잃고 가식적인 어른의 세계로 떨어짐을 함축한다. 어떤 비평가는 주인공의 이러한 희망이 “순수함과 타락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거의 세속화된 형태의 타락(원죄) 서사”라고 했다. 즉, 그가 추구하는 순수함은 단순히 어린아이의 순수한 모습이 아니라, 어른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에서 바라본 순수함이다. 인간의 원죄 때 잃어버린 순수함과 관련이 있다. 비록 콜필드가 진정성 없는 어른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의 갈망은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이상일 뿐이다. 그의 문제는 인간의 죄스러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실하지만 불완전한 사랑이다. 아이들도 인간의 유한한 조건 속에 있으며, 결국엔 경험의 세계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박물관은 시간을 변화시키는 흐름으로부터 순수함을 보호하려는 그의 갈망을 상징한다. 박물관에서 “제일 좋은 것은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요.” 사람이 성장하고 나이 들며, “가짜”가 되는 현실과는 다르게, 언제 돌아와도 그곳에 있는 것들은 항상 그대로이다. 주인공이 순수함에 갇혀버린 이유 중 하나는 남동생 앨리의 죽음이다. 동생이 죽던 날 저녁,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맨손으로 차고의 모든 유리창을 박살 내고 병원에 입원하느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해결되지 않은 깊은 상처에 사로잡힌 그는 상실의 아픔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피비가 주인공에게 도대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첫 대답이, “난 앨리를 좋아해”이다. 즉시 동생이 “앨리는 죽었어…. 오빠는 항상 그 얘기만 한다고!”라고 하자, 자신도 알고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보다 몇천 배 더 좋은 사람”인 앨리를 좋아하는 걸 멈출 순 없다고 한다. 동생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상실에 대한 결정적 경험이다. 동시에 완전한 순수함의 화신이었던 앨리의 죽음은, 순수함이 단지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아니라, 성스럽지만 쉽게 깨져버릴 수 있는, 삶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임을 각인시켰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수함이 부서지지 않도록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려고 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 속 삶의 이중성 온전히 바라보며 세상 통제하려 했던 집착 내려놓고 ‘진정한 성장’의 길 들어서 뉴욕에서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서 손을 내민다. 그러나 상실과 순수함에 멈춰버린 주인공의 자아는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며 방황한다. 마지막에 집을 떠나 서부로 도망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피비도 따라가겠다며 자신의 옷을 넣은 “무지막지하게 큰 가방”을 들고 따라온다.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 동물원에 가게 된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피비와 아이들이 말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황금색 고리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말한다.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린애들이라는 게, 황금색 고리를 잡고 싶어 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겁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죠. 뭐, 그렇더라도 끼어들어 뭐라고 말하면 좋지 않거든요.” 마침내 주인공 콜필드는 변화와 상실과 어른이 되어가는 것의 필연성을 거부하면서 세상을 통제하려 했던 집착을 내려놓게 된다.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회전목마는 순수함이 멈추어진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그는 순수함을 그대로 멈춰 있게 하려는 보호자로서 역할을 버리고, “피비가 빙글빙글 돌고 또 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너무나 행복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세상은 순수와 경험, 선과 악의 공존이다. 동시에 우리 각자 개인의 내면 세계도 밀과 가라지라는 이중적 층을 이루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세상과 인간은 죄스러움이라는 현실적 조건을 피해 갈 수 없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관조할 수 있을 때, ‘가짜’가 아닌 ‘진정성’ 있는 어른이 된다. 주인공의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고, 순수에서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리려고 한 것이다. 어른의 세계로 성장해 간다는 것이, 순수함을 포기하고 위선과 가식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선한 주인이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두는 이유는, 혹시라도 밀의 선한 영향으로 가라지가 밀로 변화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죄와 벌」: 거룩함

현대 종교학의 기틀을 마련한 종교현상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성과 속」이라는 명저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거룩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비록 현대사회가 세속화와 물질주의로 물들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속세의 삶 안에서 신성함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거룩함과 세속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호렙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계약의 궤가 있던 지성소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즉 거룩함은 인간 삶의 터전과 분리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러, 유한함과 죄스러움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거룩함이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필리 2,7 참조) 오로지 신성함만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1860년대 러시아 근대화 시기, 종교·도덕 거부하는 행태 유행 극단적 범죄행위 저지른 주인공, 오만·절망 오가며 내적 분열 소냐의 사랑으로 존엄성 되찾고 신앙 속에 새로운 삶의 길 열어 세계 문학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1860년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농노제 폐지 이후 급격한 근대화가 초래한 문제들을 인간 내면의 심리와 도덕성을 중심으로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특히 인간의 죄스러움과 거룩함이 어떻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다. 당시 러시아 지식인 청년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고, 허무주의 혹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극단적 공리주의가 유행하였다. 법학도였던 라스콜리니코프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초인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누어지는데, 평범한 사람과 달리 비범한 사람은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도 법률을 범하는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주인공은 극심한 생활고와 빚을 해결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이복여동생을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논리적 세계는 끔찍한 범죄행위를 정당화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이’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 같은 비범한 사람에 의해서 처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한 인간의 삶을 공공의 이익에 따라 저울질하고 계산한 후 폐기해 버린다. 그의 죄는 그냥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단순한 법적 차원이 아니라, 한 인간을 수단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이다. 비록 노파가 윤리적으로 부족한 존재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될 수 없다. 주차장 경비원이 부와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과 시비가 붙어서,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였을 때, 굴욕당한 자존감의 아픔은 몸의 상처와 비교될 수 없다. 살인 후에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면의 양심은 차가운 이성과 관념으로 무장된 주인공의 자기기만과 합리화를 치명적으로 흔들어 버린다. 아무도 보지 못한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로 양심은 그가 자신에게 강요했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열병 같은 오만과 짓눌리는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존재론적으로 고립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내적으로 분열된다. 여주인공 소냐도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창녀의 삶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매춘은 당시 러시아의 극심한 빈곤과 사회적 억압을 암시한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국가가 발행한 ‘노란 감찰’을 받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며, 시민으로서 기본권리를 박탈당하고, 최하층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와는 다르게,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소냐의 삶은 동시에 거룩한 희생의 사랑을 보여준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무책임한 계모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나중에 법정에서 계모는 소냐가 ‘노란 감찰’을 받은 이유는 “아이들이 굶어 죽게 되어서, 자기 몸을 판 것”이라고 소리친다. 즉, 그녀의 선택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순결과 삶을 희생한 거룩한 죄로 인식된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끄는 매개체도 된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참혹함을 온전히 인식하였을 때, 그녀는 매우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펄쩍 뛰며 손을 비튼다. 그 앞에 쓰러지고 흐느끼며 말한다, “당신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살해당한 노파뿐만 아니라, 살인자 자신도 겪었을 자신의 인간 존엄성 파괴에 대하여 암시한다. 그리고 꼭 껴안아 준다. 결코 도덕적 무관심, 혹은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먼저 그가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도록 초대한다. “네거리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땅에 키스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땅에도 죄를 지었으니까요.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하여 큰 소리로 ‘전 살인자입니다!’라고 하세요.” 소냐는 그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전에 그녀의 방을 찾아간다. 그녀는 라자로의 부활(요한 11장 참조) 이야기를 읽어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상징적 장면이 아니다. 죽음 이후뿐만 아니라, 부서진 삶 그리고 죄의 깊은 심연 한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삶이 열릴 수 있다는 그녀의 신앙이 실제로 현실 안에서 재현됨을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끄는 방법은 논쟁이나 강요가 아니다. 그와 함께하며, 그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고 결과에 따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죄의 결과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홀로 짊어지지 않도록 함께 견디어 준다.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고난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간다. 사실 시베리아에서도, 그는 ‘참지 못하고 자수해 버린 것’만 인정할 뿐, 여전히 자기 죄악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수하기 전에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한다. 또한 자신을 위해 험난한 이곳까지 따라온 소냐를 “늘 화가 난 말투로 맞았다.” 마침내 그는 소냐가 “원래 그의 삶만을 자기 삶으로서 살아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가 온전히 그를 위해서만 살아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뭔가에 끌려 그녀 발밑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피었다.” “그는 소생한 것이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다시 태어난 자기의 전 존재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냐의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한 구원과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래로 내려와서, 곁에 머물며, 함께 고통을 겪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였다. 죄를 지워버리거나 정의를 건너뛰지 않고, 죄와 고통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조건 안에 머물며, 그곳에서 인내하며 구원의 빛을 밝힌다. 거룩함의 원천은 오로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 바로 그곳에 거룩함이 머문다. 도스토옙스키는 급격한 근대화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페테르부르크 뒷골목의 지옥 같은 공간을 포기하지 않고, 소냐의 거룩함을 통해 새 생명을 잉태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고도를 기다리며」 : 내용 없는 기다림의 공허함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고통과 고립을 겪으면서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끔찍한 파괴를 가져온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항상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18세기,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신론(Deism)이 대두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 인간과 자연법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관이다. 정교한 시계공으로서의 신은 우주라는 완벽한 시계를 만든 후, 태엽을 감은 뒤 더 이상 시계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신론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인간 보편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유물론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조차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어버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계몽주의가 덮어버린 신화와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의미 없는 기다림 속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상징 하느님의 침묵 계속된다 해도 유혹과 허상 떨쳐내고 참된 부활 구원에 이르러야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부재와 침묵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과 응답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와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현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암시한다.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막과 2막은 상황 설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길가, 두 남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전날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시간에 다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이어간다. 막이 내릴 때쯤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소식을 전한다. 극에서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도착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는 언제나 곧 도착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각 막에서 소년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약속을 전한다. 두 주인공이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막은 내린다. 비록 고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현존한다. 그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의 도착에 대해서 논의되고, 기다림의 대상이며, 소년을 통해 그의 약속이 전달된다. 그의 부재는 언어 전반에 배어든다. 대화 대부분은 결국 고도로 귀결된다. 그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 고도의 부재는 언어적 현존을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적인 행위만 되풀이한다. “만일 안 온다면?” / “내일 다시 와야지.” / “그리고 또 모레도.” / “그래야겠지.” / “그 뒤에도 쭉.” 고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재 ‘ 때문에’ 그들은 행동한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림을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고 이어간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기다리는 행위는 끝날 것이고, 연극도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고도의 도착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의미 생성의 중심 동력으로 전환한다.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도착하지 않음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에, 고도의 부재는 욕망 그 자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닻이 되고, 기다림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된다. 동시에 고도의 부재는 그냥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조건이 된다. 기다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진다. 디디와 고고는 그의 부재에 대한 언어들을 함께 공유하고,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확인한다. 고고는 디디에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고 부탁한다. 디디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정체성, 도착 여부, 이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공동체적 확실성을 확인한다. 부재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공동체의 핵심 요소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절대자 혹은 신으로 해석되지만,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주인공의 기다리는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일상 안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으신다. 개인의 고통 앞에서,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그러나 부재와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그 말씀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재의 언어와 드라마에서 부재의 언어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과 육화 신비를 통하여, 기다림이 의미가 있음을 보증하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극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언어에서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소식만 반복될 뿐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기다리는 신앙적 행위만 있다. 내용이 없는 기다림은 부재 언어의 취약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고도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그에 관한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소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속 바뀐다. 언어로 표현되는 고도의 정체성도 명확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의 현존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고도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현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부재는 독특한 시간의 역동성을 형성한다. 그의 도착은 계속해서 연기되기 때문에, 진전 없이 반복만 있을 뿐이다. 도착 없는 기다림은 서사를 정지 상태로 가두어 버린다. 두 인물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경험한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다림과,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두 주인공은 바로 성토요일의 경험 안에서 맴돌고 있다. 성토요일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절규, 즉 하느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며 세상이 멈춘 성토요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토요일은 일시적이며, 결국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부활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부재와 침묵의 상태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는 이 극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혹은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절대자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인간 조건을 강조한다. 문제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육화 신비가 일어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합리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 문명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육화 신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미 부활이 왔음에도, 여전히 성토요일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틴턴 수도원(Tintern Abbey)>: 자연을 통한 인간 조건의 초월

도널드 위니컷의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유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돌보는 대상과의 관계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방식을 내면화한다. 살아가면서 대상은 바뀌지만, 대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형성한다. 즉,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대상(사람, 돈, 취미생활, 학문, 종교, 자연, 직업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내적 충만함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불안한 존재로 인식한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마음이 안달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이라는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결코 완벽한 내적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콜리지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던 워즈워스 시인은 <틴턴 애비>(Tintern Abbey, 틴턴 수도원)라는 시에서 내적 갈망의 여정을 자연과의 관계를 통하여 매우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시인에게 자연은 단지 아름다운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온전한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16세기에 영국국교회를 확립한 헨리 8세는 수많은 가톨릭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폐쇄하는 ‘수도원 해체’를 단행하였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수도원들은 18세기 들어서면서 여행지나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웨일스 남동쪽에 있는 틴턴 마을의 시토회 수도원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워즈워스는 5년 만에 다시 찾은 틴턴에서 자연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자연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된 현재의 자신을 확인하고, 변화될 타인의 미래를 희망한다. 「틴턴 애비」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청춘기’에 감각적 대상을 갈망하였다. 오 년 전 “처음으로, 이 작은 산들에 와서,” 그는 한 마리 “노루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산과 속이 깊이 팬 음침한 나무들의 색과 모양들은 젊은 시인에게 일종의 욕구였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 시인은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다. 자연으로부터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자극을 추구하였다. 워즈워스는 자연이라는 대상과 관계를 맺은 이러한 과거의 모습을 “생각 없는 청춘기”였다고 고백한다. 자연 안에서 경험한 느낌은 성찰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체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 평정이나 균형 없이, 마음은 쉽게 동요된다. 시인의 갈망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감각적 만남에 의존하기에, 자연과 떨어지게 되면 내적 충만함을 유지할 힘이 없다. 그래서 비록 자연을 통하여 기쁨을 맛보지만, 그 기쁨은 “서글픈 기쁨”이며, 환희도 “어질어질하던 환희”였다. 자연 안에서 무언가 강한 느낌을 체험하지만, 아직 그러한 감정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내면화에 이르지 못했다. 나이를 먹어간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섯 번의 여름과 그 길이만큼 다섯 번의 긴 겨울”을 보내면서, 시인은 젊은 시절의 서글픈 기쁨에 대한 상실을 겪는다. 과거의 “그 시절은 지나갔다.” “생각 없던” 젊은 날의 시인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세상의 열병과 약간은 슬프고 당혹스러운 수많은 인지를 맛보게 된다. 육체적 감각에 묻혀 있던 내면의 마음은 고통, 죽음, 그리고 인간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면서 깨어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더욱 깊게 만들고 과거의 갈망과 서글픈 기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폐허로 남은 수도원 돌아보며 자신의 과거·현재·미래 성찰 감각적 자극과 만족 추구했던 젊은 시절의 미성숙함 고백 자연과 일치해 평화 회복하며 영적으로도 충만한 삶 염원 그래서 이제는 “억제하고 억누르는 / 넉넉한 힘을 간직한 채, 거칠거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 인간의 고요하고도 슬픈 음악을 / 종종 들으면서, 자연을 관조하는 법을 / 배웠다”라고 노래한다. 이 음악은 물리적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한계, 삶의 복잡성에 대한 고요한 자각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 조건의 메아리로서, 삶의 버거움으로부터 도피하여 즉각적인 감각적 위로를 얻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그 버거움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공감 능력과 인간 조건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된 시인의 깨달음은 영적인 차원에까지 이른다. 그는 “고양된 사고의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우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의인화된 대상이 아니라, 내재적 신성의 한 형태이다. 이 존재의 형태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어떤 존재는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햇살과, 둥근 대양과, 생생한 공기와, 푸른 하늘과,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 더욱이 이 “어떤 존재”를 인식하였을 때 느끼는 기쁨은 “숭고한 감각, 훨씬 더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인간의 마음과 자연과 다양한 관계들 안에 머물고 있다. 워즈워스가 자연 안에서 경험하는 신적 체험은 자연 신비주의로 분류된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것을 범신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신은 자연과 세상과 인간 삶에 현존하고 있다. 절대적 존재로서 세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 현존의 형태로 스며들어 있다. 여러 사상가는 자연을 제2의 성경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은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과 자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땅과 바다와 심연과 산들바람에게 “저의 하느님”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모두, “우리는 너의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내셨다!”, “우리 위에서 찾아라”라고 답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깃들어 계신다. 5년 전에 바라보았던 자연과 현재 바라보고 있는 자연은 같은 자연이다. 변화된 것은 시인 자신이다. 과거엔 감각적 만족을 갈망하였다면, 현재는 “인간의 슬픈 음악”을 들으며 관조와 성찰의 태도로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의 자연은 단순한 감각적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절대자가 머무는 거룩한 곳이다. 그리고 시인은 마침내 자연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그리고 더욱더 성숙한 관계 형성을 통하여, 삶의 충만함을 살아간다. 동시에 시인에게 기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보존하고 다시 활성화한다. 그는 “외로운 방안이나, 읍과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자연에 대한 기억에 의지했다. 지칠 때마다 자연에 대한 경험의 기억을 “핏속에서 느끼고, 가슴으로 느낌”으로써, 평화를 회복하였다. 바로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자연과 일치를 이룬다. 흥미롭게도 워즈워스는 자신의 누이 도로시와의 관계를 통하여 현재의 깨달음을 미래로 확장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열광적인 눈이 발하는 빛 속에서 자신이 지녔던 감각적 열정과 서글픈 기쁨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녀 또한 지금 자신이 도달한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 야생의 황홀한 경험들이 무르익어 / 차분한 기쁨이 될 때, 너의 마음이 / 사랑스런 모든 형상들을 위한 저택이 될 때…. 오! 그때가 되면, / 고독이나, 공포나, 고통이니, 슬픔이 / 너의 일부가 되더라도, 네가 다정한 기쁨의 / 온갖 치유하는 생각들과 더불어 / 나와, 나의 이 충고들을 떠올리게 되리라!”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성장으로 나아간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걸리버 여행기」 - 약자에 대한 공감

현대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이언 매큐언은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9·11 테러범들이 치명적인 ‘상상력의 실패’를 겪었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만약 그들이 피해자들의 마음과 감정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폭력으로 인해 겪을 고통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그토록 잔혹한 행위를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감내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은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마음 혹은 공감 능력이다. 성경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내적·외적 상황을 깊이 살피도록 초대한다. 마태오복음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황금률을 선포한다. 1726년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완판되었을 정도로 당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소인국, 거인국, 날아다니는 섬 등의 놀라운 상상력은 독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아동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 본성과 문명의 어두운 면들 그리고 18세기 영국 사회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대표 풍자소설이다. 제2부에서 유럽의 정치 제도, 전쟁, 화약과 총기의 사용에 대한 걸리버의 이야기를 들은 거인국 브롭딩낵의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다니게 한 벌레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특히 인간의 이기적 오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일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선원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의사였던 걸리버는 어느 날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어, 우연히 소인국에 표류하게 된다. 지극히 평범했던 주인공은 소인국에서 자아와 우월감이 극대화되는 오만함을 경험한다. 개미 같은 소인국 사람들과의 압도적인 신체 차이로 인해 주인공은 보통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가 된다. 그의 우월성은 신체적 감각을 통해 느껴진다. 그들이 쏘아대는 수많은 화살은 그에게 거의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수백 명분의 식사를 한 번에 먹어 치운다. 걸리버는 아무리 많은 군인이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인국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자각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릴리퍼트인들을 짓밟을 수 있는 절대적 지배의 가능성을 통해 우월감이 내면에 자리 잡는다. 걸리버는 블레푸스쿠 제국의 군함 50척을 밧줄로 엮어 릴리퍼트 왕국의 항구로 모두 끌고 와 적의 침략을 막아낸다. 뭍에 상륙한 그를 황제는 온갖 찬사로 반겼고, 즉석에서 그 나라 최고의 호칭인 나르닥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걸리버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은 내면에서뿐만 아니라, 외적인 인정으로 한층 부풀어 오른다. 소인국에서 우월했던 주인공…거인들 앞에서는 미약한 존재 식민 지배 횡행했던18세기…오만한 권력을 향한 신랄한 비판 복음적인 가치 강조하면서도…실천하기 힘든 현실 드러내 그러나 제2부 거인국에서 주인공은 소인국 사람들의 처지가 되어 굴욕과 무력감을 겪게 된다. 소인국에서 부풀어 오른 자만심에 주변 사람들의 상황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그는, 홀로 남은 땅에서 거인들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소인국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릴리푸트 사람 하나가 영국인들 속에 있다면 아주 우습게 보일 것처럼, 내가 현재 이 나라에서 앞으로 얼마나 가소롭게 보일 것인지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소인국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던 그 신체는, 이제 거인들 앞에서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가 된다. 평소 상대조차 되지 않았던 대상들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쩔쩔매야 한다. 농부의 어린 아들은 그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공중에 매달아 올린다. 갓난아기는 걸리버를 꽉 움켜쥐고 그의 머리를 입에 넣으려 하다, 그의 비명을 듣고 놓아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걸리버가 여성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면이다. 당시 여성들은 독립적 주체로서 인격과 존엄성을 보장받기보다는, 신체를 타인의 사용이나 쾌락을 위한 대상 혹은 상품으로 취급받으며,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주인공도 어른이지만 항상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채로 옮겨 다니고 보호받아야 하는, 즉 강요된 의존 상태를 경험한다. 농부의 딸인 글럼달클리치는 인형 침대를 개조해 걸리버를 재우며,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벗겨주기도 했다. 옷도 여러 벌 만들어 주었다. 18세기 여성 패션의 확산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패션 인형처럼, 걸리버의 몸은 상품화된다. 상품화된 여성의 몸은 응시(gaze)의 대상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농부의 아홉 살 된 딸에게 종속되어 인형처럼 다뤄지는 걸리버도 응시의 대상이 된다. 그의 작은 몸은 호기심 혹은 신기함의 대상으로 관찰되고 전시되며, 구경거리로 돈벌이가 되었다. 심지어 왕비의 시녀들은 그를 ‘구경도 하고’, ‘완전히 발가벗겨서는 품에 껴안’기도 하는 등, ‘아주 역겨’운 행동을 했다. 18세기 영국은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종교 차별을 받았으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아일랜드 성공회 신부였던 스위프트는 누구보다도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뿐만 아니라, 다른 저서들에서도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 제1부와는 대조적으로 제2부에서 주인공이 겪는 굴욕과 무력함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배하는 자들의 자기중심적 오만함에서 벗어나,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려보도록 초대한다. 미약한 존재가 된 걸리버는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강조하는 소외된 존재들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다. 예수님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고 가르침으로써, 작은 이들이 예수님만큼 중요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신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히브 13,3) 비록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습고 골치 아픈 일을’ 당해야 했지만, 그 이후 나머지 이야기에서 도덕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 저자의 중요한 통찰이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걷다 믿음이 흔들려 물에 빠져버리거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복음사가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베드로 사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햄릿」: 불확실성과 섭리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를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가 그의 나약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복수의 윤리적 측면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찾지 못한 햄릿은 복수를 계속 지연시킨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불확실성은 비극의 중요한 역동성이다. 드라마는 햄릿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은 동생인 클로디어스에게 암살당했다고 알려주면서 시작된다. 당시 영국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개신교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연옥의 불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유령은 가톨릭 신앙을 암시한다. 마틴 루터가 공부하였던 위텐버그로 유학을 다녀온 햄릿은 신교도 시각에서 이 유령의 진실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놀랍게도 개신교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반응도 보인다. “그대가 그렇게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대를 햄릿으로, 왕으로, 아버지로, 덴마크 왕으로 부르겠다.” 마침내 유령과의 대화를 마치고, 호레이쇼가 왔을 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학문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있다네.” 아버지의 죽음과 유령에 대하여 주인공은 구교의 가르침과 신교의 가르침 사이에서 불확실성을 겪게 된다. 선왕의 죽음에 뭔가 수상쩍은 면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유령의 존재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분석하고, 의심할수록 불확실성의 고통은 더해간다. 그 유명한 ‘죽느냐 사느냐’의 독백이 주인공의 자살에 대한 충동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이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영역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도 죽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겪을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어떤 나그네도 돌아오지 못한 곳, 그 미지의 나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복수의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불확실성 앞에서 주저하던 햄릿 또한 주인공은 복수 자체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의 불확실성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경당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는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칼을 거둔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동안 죽게 되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문화의 전통적이며 정당한 복수와 자비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윤리적 모호성은 복수를 지연시킨다. 중세 시대 전통적 복수극은 안정되게 확립된 도덕 질서가 있었다. 복수의 명분과 정의는 명확하였다. 가족의 복수라는 상황에서, 질문과 의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러한 명확성을 붕괴시키고 있다. 제5막 1장에서 햄릿은 묘지를 거닐다가 무덤을 파고 있던 인부들이 던진 해골 하나를 발견한다. 해골의 주인은 그가 어릴 때 궁정에서 일하던 광대 요릭이다. 자신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키스했던 그 입술이 달렸었던’ 자리를 쳐다보며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천 번도 넘게’ 자신을 ‘등에 태워주었던’ 요릭의 해골 앞에서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는다. “호레이쇼, 아는가? 알렉산더 대왕도 무덤 속에선 이 꼴일까? 우리가 죽어 흙이 되면 무슨 천한 용도에 쓰일지 상상 좀 해봐!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흙을 추적해 보면 술통 마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은 죽어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여러 작가가 언급한 “죽음은 위대한 평등자다”라는 말처럼, 아름다움도, 지식도, 권력도, 재산도, 모두 궁극적으로 동일한 물질적 종말을 맞이한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한스 홀바인의 명작 <대사들>이라는 그림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묘사한다. 과학기술, 음악, 화려한 의상, 다양한 학문을 지닌, 유학을 다녀온 르네상스 인물인 햄릿도 인간의 “이성은 고결하고 그 능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 한구석에는 굴절된 해골의 이미지가 숨겨져 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필연적 죽음의 진리 깨달은 뒤 자기 삶의 주도권을 신에게 의탁 중세 시대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를 추구했던 르네상스의 또 다른 정신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성찰이었다. 재의 수요일에 드리는 기도처럼, 결국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싸우며, 요릭의 해골을 보며 죽음의 냉엄한 진리를 대면한 주인공은 허무주의나 체념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의 섭리에 의탁한다. 죽음의 통찰이 자신을 괴롭히던 불확실성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인공을 사로잡고 있다. 그 유령(가톨릭 신앙)이 진실일까? 복수는 정당화(그리스도교의 자비) 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나 자신이 지옥 불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계속되는 질문과 의심은 햄릿의 행동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흔한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10,29 참조)는 성경 말씀처럼, 햄릿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라고 엄숙히 말한다.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삶의 통제권을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햄릿이 불확실성으로 고통받았던 핵심적인 이유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유령을 만난 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다. 비록 여전히 불확실성은 남아있지만, 주도권을 신에게 넘김으로써, 불확실성이라는 불안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며,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한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갖는다는 말인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가족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다. 하느님께 순명했던 마리아처럼 적극적인 용기와 헌신의 길 걸어 천사의 설명이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명예가 위태로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Let it be)를 바랍니다”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불확실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 뜻대로 될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는 체념적 수동의 삶이 아니다. 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신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위험할 수 있으니 피하라’는 호레이쇼의 충고에 햄릿은 멈추지 않는다. 확실성이 없이는 행동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불확실성의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의 행위에 나선다. 이제 햄릿에게 ‘순리를 따르는’ 것은 바로 때가 왔을 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마리아도 천사의 소식에 순명한 후, 그냥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제일 먼저 ‘서둘러’ 산악 지방으로 올라가 엘리사벳을 만난다.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예수의 탄생,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 카나의 혼인잔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등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고, 적극적인 헌신, 식별, 용기의 삶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노인과 바다」: 일상의 고통과 성사적 은총

미사의 마침 예식은 성체성사의 거룩함과 세속과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의 은총을 일상 삶으로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미사의 라틴어 어원인 ‘missa’는 ‘파견하다’ 혹은 ‘보내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는 미사를 통한 성사적 체험을 일상 안에서 살아가도록 파견받는다. 가정, 혹은 일터는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면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인과 바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겪었던 인간 존재 의미의 위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1950년대 지배적인 정서는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피로감과 도덕적 모호성이었다. 작가는 역사나 이념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일상 안에서 겪는 시련의 과정과 태도를 통하여 인간과 삶을 긍정한다. 이 소설은 고기잡이하며 살아가는 노인 산티아고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허무함과 좌절감에 빠질 수 있는 배경으로 시작한다. 노인은 지난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과 함께 일했던 어린 조수 마놀린의 부모는 노인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해, 아들을 다른 어부의 배에 타도록 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자신을 ‘놀리는 어부들’의 시선이나, 계속 허탕 치고 있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오늘도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바다에서 고기 잡는 준비와 행위는 생계를 위한 단순한 노동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례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 바다로 나가야 하는지, 물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미끼를 꿰는 방법, 낚싯줄을 당길 때 힘의 조절 등의 규격화된 반복적인 동작은 기계적인 습관이 아니라, 한평생의 고기잡이를 통해 응축된 몸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노인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일종의 몸에 각인된 의례이다. 종교의 의례적 행위가 정형성과 반복성을 통해 속세 한가운데에서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듯, 노인의 몸에 새겨진 고기잡이 행위는 바다에서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창출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차를 마시게 될 때, 이 차 한잔을 마시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의 부대끼는 시끄러움 속에서 가장 거룩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돈을 제법 많이 벌어들인 젊은 어부들은 전통적인 ‘찌’ 대신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며 부표를 사용하여 고기를 잡는다. 그들은 바다를 남성인 ‘엘 마르 (el mar)’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바다는 ‘경쟁자나 투쟁 장소, 심지어 적’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바다에서 거룩한 창조 질서의 흐름과 관계를 거스르지 않고, 온전히 살아간다. 비록 바다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야 하지만, 주인공은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만’(「찬미받으소서」 82항) 여기지 않고, 존중, 친밀감, 연민 등을 바탕으로 깊은 인격적 관계를 형성한다. 창조는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만남의 역동성이다. 매일 고기잡이 허탕 치는 현실…굴하지 않고 바다로 나간 노인 물고기 잡기 위해 처절한 사투…결국 빈 손이지만 ‘존엄’ 지켜내 시련 딛고 사명 지키는 삶 사는…진정한 신앙인의 가치 보여줘 젊은 어부들과 달리,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라 마르 (la mar)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다를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스페인어였다.” 또한 날치를 ‘좋은 친구’라고 부른다. 밤사이 배 가까이 다가온 돌고래 두 마리의 물을 뿜어내는 소리만 듣고도 누가 수놈인지 혹은 암놈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친밀감을 보여준다. 또한 외적으로 내적으로 고통받는 대상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늘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지만, 허탕 치기 일쑤인 작고 가냘프고 까만 제비갈매기’가 인간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살고 있다고 가여워한다. 노인은 과거에 청새치 한 쌍 가운데 암놈을 잡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수놈이 항상 암놈에게 먹이를 양보하기에, 암놈이 낚싯바늘에 걸려들었다. 마지막까지 암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수놈을 보며, 마음 아파했던 노인은 ‘암놈에게 용서를 빌고 도살 작업을 신속하게’ 마쳤다. 바다에서 경험한 ‘가장 슬픈 광경’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84일간의 허탕을 뒤로하고, 자신의 작은 낚싯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잡는다. 그러나 배 옆에 매달려 있던 고기를 상어들이 다 먹어 치워버리고, 뼈만 남은 채 항구로 돌아온다. 바로 이 부분이 헤밍웨이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이다. 여러 날 동안 몸을 망치며 어렵게 잡은 물고기가 결국 다른 포식자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주인공의 위대함은 물고기를 잡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겪게 된 극도의 고통과 피로감과 심리적 압박을 견디어 냈다는 점에 있다. 한밤중에 상어들이 다시 달려들면 끝장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노인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라며 굽히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노인은 ‘패배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노인은 패배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한다. “나를 패배시킨 것은 없어,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저 집을 향해 배를 몰고 간다. 항구에 정박한 노인의 배에 묶인 뼈를 보며, 사람들은 “그런 물고기는 정말 한 번도 본적이 없어”라며 경외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세상의 칭찬과 인정이 노인의 인간 존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물질적 혹은 경제적 보상이 없더라도, 어부로서 노인이 보여준 의례적 행위, 친밀감, 용기, 충실함, 끝까지 버틴 인내심이 그의 가치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물고기를 성공적으로 잡는 것보다는, 고통과 피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떻게 인간 존엄을 보존할 것인가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흥미롭게도 비평가들은 노인이 바다에서 겪은 고통과 인내의 경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닮았음을 언급한다. 여러 날 동안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손은 경련을 일으키며 굳어지고 상처를 입는다. 기력은 소진된다. 그의 몸은 탈진되고 부서진다. 3일 동안의 바다 여정을 마치고 항구에 도착한 후, ‘돛대’를 빼서 ‘어깨에 메고 기슭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부서진 몸은 무거운 돛대의 무게로 인해 여러 번 넘어지고 주저앉아야 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엎드려 얼굴을 신문지에 대고, 양팔을 밖으로 쭉 뻗어 내밀고 손바닥은 위로 향한 채 잠이 들었다.” 미사의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친밀감과 고통을 동시에 수반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상처받아야 했다. 그 상처에 대한 순명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운다. 사람들은 이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친밀감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바다와 깊은 친밀감을 형성한 노인은 동시에 바다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게 된다. 공동체의 도움이 닿기 힘들어 홀로 서야 하는 ’먼 바다’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체력, 잠, 땀과 피, 심리적 힘 그리고 정신적 힘까지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다시 빈손으로 돌아온다. 십자가의 역설은 외적으로 패배하였지만, 진정한 내면의 더 깊은 승리라는 것이다. 3일 동안의 사투 끝에 또다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노인의 상처 난 빈손은 물질적으로 실패였지만, 한 어부로서 인간 존엄을 지켜냈다. 바오로 사도는 긴 선교여행과 박해 속에서도 사명을 완수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산티아고의 상처난 빈손도 말한다. “나는 부끄럽지 않게 싸웠고 견딜 것을 다 견디었으며, 어부로서 소명을 지켰습니다.” 헤밍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보다, 일상 안에서 거룩한 창조 질서의 회복을 바라며, 인간 존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를 초대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부활」: 양심의 부끄러움과 은총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함의 척도는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공동체나 죄스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죄스러움에 대한 태도가 그 공동체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법적인 판단과 처벌에 따른 처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양심에 기초한 부끄러움의 감정이다. 1899년 71세의 나이에 톨스토이는 10년의 작업을 거쳐 「부활」을 출판한다. 로맹 롤랑이 ‘예술적 성서’라고 극찬한 작가의 마지막 장편 소설은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내적으로 부활하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출간 2년 후인 1901년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교회와 사회의 무디어진 양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동시에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다시 깨어나는 양심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바오로 사도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주된 이유에 대해, 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한다.(사도 24,16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덕적 감각과 관련하여 외적인 법정보다는, 내적인 법정을 강조한다.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한 것처럼, 내적 양심은 단지 고귀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를 만나는 성스러운 곳이다. 네흘류도프는 살인 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는데, 절도와 살인 혐의로 피고석에 앉아 있는 매춘부가 과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쫓겨난 카츄샤임을 알아본다. ‘그 같은 죄를 양심에 파묻은 채 편히 살았던’ 그는 자신의 ‘냉혹함과 잔인함, 비열함을 인정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만, 혹시라도 그녀와 변호사에 의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당할까 두려워한다. 또한 주인공은 과거의 죄스러운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특히 동물적 욕망을 채우고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쥐여주고 달아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비열했는지‘ 자책한다. 소리 내어 자신을 ‘그런 무뢰배, 그런 악한‘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악행으로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실한 성찰엔 부끄러움이 따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면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끄럽고 역겹다. 역겹고 부끄럽다’라는 감정을 경험한다. 남들 앞에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외적 창피함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적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선 내적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고, 내면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세상의 심판을 대면해야 하는 진퇴양난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의 대립이다. 외적 창피함은 남의 평가나 시선을 중요시한다. 의도적으로 내면의 상태를 감추는 외적 이미지를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위선과 자기기만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적 부끄러움은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 혹은 진리에 기초한다. 두 개의 가치관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어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 개의 가치관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활」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여성의 삶 파괴했던 과거 악행에 부끄러움 느끼며 진실하게 반성…이타적인 삶 결심하고 사랑 실천 부활은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하느님의 가치관 지켜내는 여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대립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지상의 도성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가치관을 따르지만, 하느님의 도성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관이 우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지상의 도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상의 가치관을 경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 결국 이러한 대립 사이에서, 네흘류도프는 진리의 목소리를 선택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마음대로 판단하라지. 그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라고 깨닫는다. 지상의 도성에서 창피함보다, 하느님의 도성에서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초월하여 내면의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책임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가슴속에는 고통스럽기는 하나 평안을 주는 뭔가가 있었다.” “정말 좋다! 정말 좋다. 아, 정말 좋다!”라고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카츄샤를 버린 이후 ‘그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신적 존재가 깨어난 것을 기뻐하는 눈물‘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의 중요성을 여러 강론에서 언급한다.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반드시 ‘양심 성찰‘을 한다. 고해소에서의 진정한 고백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단순히 ‘죄의 목록‘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바로 도덕적 판단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것이다.”(2020년 9월 3일 강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은총이다”(2025년 10월 13일 강론)라고도 한 바 있다. 왜냐하면 죄스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은 나약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절망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 악행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카츄샤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참회하고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양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은 더 이상 내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나를 얽매고 있는 이 허위를 부숴버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며 진실만을 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카츄샤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간다. 감옥에 있는 그녀를 방문해 용서를 구하고, 자기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녀의 유배지인 시베리아까지 따라간다. 그러면서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불의를 목격한 후에, 카츄샤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전히 이타적 삶을 결심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에게 구원의 문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물리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양심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양심을 흔들어 깨울 때, 발생하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이 감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다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삶 안에서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며 부끄러워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다.(루카 5,8 참조) 그래서 부활한 양심은 내면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간다. 부활은 한 순간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의한 사회 안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도성의 가치관인 이타적 사랑을 살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어린 왕자」: 불완전한 대상과 온전한 사랑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이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근본적 경험인 사랑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관계를 통해서 용서와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신처럼 흠 없는 인간은 없기에, 완벽한 관계의 대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 대상이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는 그 대상을 온전히 품을 수는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방황과 회귀의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행성인 B612를 떠나 여러 행성을 여행하며 마침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떠남, 여행, 귀향에 대한 여정은 모두 관계에 대한 선택의 문제와 연결된다.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도 여행과 귀환의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 여정을 시작한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예수님은 소외당한 죄인들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 다시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스승을 만나고 복음 전파를 시작한다. 어느 날 어디에선가 날아 온 씨앗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되었다. 어린 왕자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지만, 동시에 장미의 여러 가지 요구들과 태도에 묻어나는 ‘교만함‘과 ‘허영심‘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더 이상 장미를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자신의 행성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비록 그 꽃이 ‘자신을 향기롭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지만, 주인공은 꽃의 완벽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여섯 개의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여섯 명의 어른을 만난다. 모든 것을 통제하며 권력에 집착하는 왕, 남들의 칭찬만을 갈망하는 허영쟁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술에 중독된 술꾼, 자신이 소유한 별들의 숫자만을 세고 있는 탐욕스러운 사업가, 기계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로등 켜는 사람, 실제 경험을 무시하고, 책으로만 탐구하는 지리학자. 이들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갇혀 있다.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몰두한 나머지, 삶의 더욱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한다. 겉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뭔가를 이루어 가며 스스로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지만, 내면은 공허할 뿐이다. 삶의 참된 충만함을 채울 수 있는 관계의 역동성을 놓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껍데기만을 추구하는 어른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어린 왕자는 매번 “어른들은 정말 아주, 아주 이상해”라며 다른 행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황하던 어린 왕자 ‘길들임’으로 소중한 존재 만들며 관계 속 ‘선택’ 의미 깨달아 예수님이 죄인들 회심 시키셨듯 윤리적 책임감 갖고 관계에 끝가지 충실해야 마침내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에 도착하여 여우를 만난다. 주인공이 여우와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슬픈‘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아서‘ 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길들이기는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두 존재가 서로에 대한 의미를 천천히 가꾸어 가는 과정이다. 갑작스럽게 처음부터 뜨거운 열정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좀 떨어져서‘ 앉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서‘,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라‘고 요청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 길들여지게 된다. 여우의 길들이기는 관계를 맺는 상대방에게 물리적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는 것이다. 한 존재에 대한 지식을 밤새워 달달 외워서, 그 존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함께 보낸 평범한 일상 시간의 양만큼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제 뭘 알려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 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는 거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길들임의 관계를 통해 평범한 것은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가 된다. 길들이기 전에는 각 존재가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주인공이 길들이기 전 여우는 다른 여우로 대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이 여우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내재적으로 타고난 속성이 아니라, 주인공이 들인 시간과 정성이다.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함께 물리적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기적들과 죄인들의 용서를 말씀으로 행하신다. 세관장인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 즉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한다. 사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회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캐오는 죄인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한 존재가 된다. 어린 왕자는 깨닫는다. 자신의 행성에서 돌보던 장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도망쳐 나온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비록 장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장미를 돌보며 보낸 시간이 이미 장미를 소중하게 했다는 것. 그래서 그 장미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매우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길들임은 인식의 변화를 불러온다. 마지막에 여우는 주인공에게 “본질적인 건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고 일깨워준다.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장미는 교만하고 허영심으로 가득했지만, 비로소 마음으로 바라본 장미는 모든 장미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유한 존재가 된다. 시간을 통한 길들임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장미는 어린 왕자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목사인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싸우다 죽은 작은아들의 장례식에서, “이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루카복음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변명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들로서 안아주고 잔치를 베푼다. 또한, 이 관계는 단순한 정서적 친밀감을 넘어서, 윤리적 책임감을 수반한다. 여우는 주인공에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라고 알려준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면, 그 관계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 동물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도 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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