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음을 눈앞에 둔 시메온의 기도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루카 2,29-31, 성무일도의 본문)라는 시메온의 기도로 성무일도가 하루를 맺습니다. 이 기도는 모사의 달인인 루카 복음사가가 ‘이방인들의 빛’이라는 희망의 인물을 다루는 제2이사야서의 신학을 이용해서 직접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이사 40,5; 42,6; 46,13; 49,6.9; 52,10 참조) 루카는 구약을 대표하는 노인인 시메온과 안나가 구약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두 노인을 통해 복음의 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 끝’까지 이르는 구원의 예표인 아기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루카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당시 세상의 끝 또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는 말로 끝납니다. 루카는 이로써 시메온이 노래한 만민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전망이 실현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루카의 전망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빛을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을 집필한 루카이지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하지 않고 통합합니다. 평생 메시아를 고대했던 노인은 죽기 전에 부르는 마지막 노래에서 ‘이제는!’이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오랫동안 신앙 속에 희망을 간직했던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노령화 사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노인분들은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경험과 지혜와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시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시고 10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시는 나이 칠십 자매님이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며 당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노랫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날이 언젠가 오리라 기대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끝기도를 바치듯이, 지난 반년 동안 연재를 마치면서 성경의 도움으로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었음에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세상이 제 자리를 찾기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기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2,34-35)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성모님께 고통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스럽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풍파에 휩쓸릴 것인지, 세상의 풍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갈 것인지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상되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루카의 전망에 기대어 여러분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희년에는 로마 성문만 통과해도 직천당이다?

12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聖門)을 열면서 2025년 희년이 시작됐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이란 25년마다 돌아오는 거룩한 해인데요. 이 시기에는 특별히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로 모여듭니다. 무려 약 30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는데요. 바로 성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성문이 뭐길래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요? 여기서 성문이란 희년에만 열리는 ‘거룩한 문’(聖門)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문만 통과하면 직천당”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면 3000만 명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 모두 모여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희년에 로마의 성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물론 희년의 가장 중요한 표징인 성문은 ‘천국의 문’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부채를 탕감 받고 자유를 얻었듯이,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은총을 얻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50년마다 한 번씩 축제를 거행했는데, 이때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이 축제에서 유래한 희년을 선포하면서 교회 안에서 희년을 지내게 됐고 5번째 희년부터 성문을 여는 예식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요한 10,9)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이 말씀처럼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버리고 은총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희년의 대사(大赦)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지만,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벌은 갚아나가야 합니다. 이 벌을 면해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대사는 나를 위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돌아가신 다른 분을 위해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문을 통과해야만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각 교구가 정한 희년 행사 참여나 순례지 방문, 자비의 활동 등으로도 대사를 얻을 수 있고, 또 희년 중 수도원, 병원, 요양원, 교도소 등에서 장소 이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기도와 신앙고백, 희년의 목적에 맞는 기도, 희생 봉헌 등을 통해서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들어가야 할 문은 우리와 아버지 하느님을 이어주시는 ‘문’이신 예수님입니다. 성문은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지요. 희년에 성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성문은 희년에만 열리지만 예수님의 문은 회개하는 이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있으니까요.

2024-12-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이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면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산타 할아버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산타 할아버지, 바로 산타클로스는 성탄 전야에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인물입니다. 산타클로스라고 하면 붉은 모자와 붉은 옷, 그리고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한 음료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특히 이 음료의 로고 색깔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산타클로스의 옷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산타클로스는 나라에 따라 묘사되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러시아 등의 나라에서는 파란 계통의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산타클로스가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원래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알려면 ‘원조’ 산타클로스를 찾아야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원조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니콜라오 성인입니다. 니콜라오 성인은 4세기경 지금의 튀르키예 남해안에 해당하는 ‘미라’(Myra)라는 도시의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생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선을 많이 베풀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성인의 전설 중에는 3명의 어린이를 살려낸 일화도 있지요. 이런 이유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 즈음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이 풍습은 17세기경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이 풍습을 소개하면서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오를 신터 클레스(Sinter Claes)라고 부르는데요. 이 말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산타클로스(Santa Claus)가 됐습니다. 앞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을 상징합니다. 음료회사가 산타클로스에게 빨간 옷을 입히기 전에도 이미 산타클로스는 빨간 옷을 입었던 것이지요.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네덜란드의 신터 클레스도 빨간 옷을 입고, 심지어 주교관 형태의 빨간 모자를 쓰고, 지팡이도 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콘이나 성화에서도 니콜라오 성인은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이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는 성탄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고, 성탄에 떠오르는 색깔이라고 하면 역시 빨간색을 빠뜨릴 수 없게 됐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홍색 옷은 추기경이 입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추기경을 ‘홍의주교’(紅衣主敎)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붉은 색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한 피(血), 바로 순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거리를 수놓은 빨간색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떠올리나요?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2024-12-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성모님의 찬양 마니피캇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와 시므온의 노래(루카 2,29~32)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저녁기도와 끝기도에서 불리는 복음서의 찬가로,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사슬 기도)의 주요 부분인 성모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합니다. 천사와 만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믿을만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의 인사말만 들은 엘리사벳이지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수태 사실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그것이 알려지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큰 영향을 끼치고, 시편 및 구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양 시편입니다. 그 전반부는 메시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개인의 감사를, 후반부는 높이고 낮추는 세 개의 반대되는 움직임 속에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1사무 2,1; 시편 34,3~4)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시편 35,9; 이사 61,10; 하바 3,1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9,32; 1사무 1,11)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창세 30,13; 시편 72,17; 루카 1,45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21)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시편 72,19; 111,9)  <2절>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시편 89,2; 100,5; 103,11.13.17)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시편 89,11; 118,15-16)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시편 147,6; 집회 10,14).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시편 107,9)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시편 98,3)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이사 41,8-10)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2사무 22,51; 미카 7,20) 마리아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마리아와 같이 겸손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그분께 자신의 빈손을 내밀며, 실제로 하느님이 당신의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능하신 팔’을 뻗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달리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칭하는데, 이는 아들인 예수의 이름과 같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와(루카 1,69.71.77; 2,11.30; 사도 5,31; 13,23 등) 동일합니다. 이름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닙니다.(하바 3,18; 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없는 이를 구원하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느님은 도움을 주시고 구하시는 분입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백성을 향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충실하신 분이고 나를 알고 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항구함에 걸맞은 응답은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1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예수님이 없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를 수놓는 특별한 장식이 있습니다.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입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트리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담긴 장식입니다. 그래서 신앙 유무를 떠나서 크리스마스트리의 우듬지에는 별 모양 장식이 달리곤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구간 위에 떠 있었다는 별(마태 2,2)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별은 있지만, 별 아래 태어나 계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종종 나무 아래에 구유 등의 성물을 두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아기 예수님의 성상 등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래는 계셔야할 예수님이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크리스마스트리가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돼서 예수님을 모시는 걸 잊어버린 걸까요? 답변을 먼저 드리자면,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아기 예수님 성상을 두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푸른 잎을 지닌 나무가 그 자체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언제부터 두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16세기경 독일 남서부 지역에 성탄을 앞두고 나무를 장식한 기록 등에서 크리스마스트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낙원극(樂園劇)을 공연하는 전통이 있었는데요. 낙원, 즉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는 이 낙원극 중에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창세 2,9)를 나타내는 상록수에 과자를 달거나 촛불로 꾸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에덴동산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는데요. 바오로 사도는 연결고리에 관해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는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 나무’(1베드 2,24)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열매를 장식합니다. 첫 번째로 빨간 구슬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죽음이 찾아왔음을 기억하게 해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얀 구슬은 ‘생명의 빵’(요한 6,22-59)이신 예수님의 몸, 성체를 상징하는 장식입니다. 이런 크리스마스트리의 풍속은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전 유럽으로 퍼졌고, 미국으로도 전파됐습니다. 1891년에 처음으로 워싱턴 백악관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전시됐고, 이제는 종교를 넘어 세계의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성탄 장식이 됐습니다. 올해 성당과 거리 곳곳에 서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때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의 나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십자 나무’가 돼주신 아기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2024-12-08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는 공동체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사랑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개신교 목사님이 만드시고 천주교 생활성가로도 불리고 심지어 야구 응원가로도 쓰이는 ‘실로암’이라는 성가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열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는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의 기도이고, 전례 중 공동체가 함께 부르던 성가였습니다. 1절: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6-8) 2절: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9-11) 가장 오래된 기도인 그리스도 찬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난 그리스도 스스로 낮추며 높아지는 모습 담겨 찬가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느님 곁에 계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하시면서 종살이와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시기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신성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자기 낮춤의 밑바닥에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주의 모든 권능을 위로 높이 올리십니다. 왕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그분의 이름이 선포되고 모든 이가 그분을 경배하는 가운데 그분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이사 45,23-24)는 예언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홀로 높으심을 강조했습니다. “나 주님(야훼)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21)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선포하며 유다교의 하느님 상을 확장합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아드님을 통해 세상에 내려오시고, 누구보다도 저 삶의 밑바닥에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신 분이시지만 아드님을 통해 인간 곁에 오시며 인간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습니다. 당장 망할 것 같은 세상과 이 순간이 예수님을 통해 해방되고 중심을 잡고 목적을 얻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심오한 그리스도론을 이용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3-4) 믿는 이들과 교회 공동체가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자신 주위만을 맴맴 돌며 다른 이들을 돌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이기심과 선입견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져 다른 이들을 섬기기를 권고합니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돌보는 이는 예수님과 함께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자꾸 넘어지는 우리는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현양 된 예수님과 함께 다시 일어설 힘을 청하며 함께 노래합니다.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무금은 십일조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시기가 왔습니다. 대림시기하면 아무래도 성탄을 위한 여러 준비가 떠오르는데요. 우리가 준비해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교무금 책정입니다. 교무금은 ‘교회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내는 봉헌금’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교회 유지를 위해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예물이라 하면 떠오르는 규정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규정인데요.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줬고(창세 14,20 참조), 야곱도 하느님께 10분의 1을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창세 28,22 참조). 이 전통은 구약성경에 십일조 규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며 언급(루카 11,42 참조) 하시지요. 십일조는 사제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되곤 했습니다. 교회법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222조 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무금만이 이 활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외국에는 교무금 제도가 없습니다. 유럽 국가에서는 ‘종교세’의 형태로, 미국 등의 나라는 기부금이나 주일헌금으로 교회 운영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는 “신자들은 주교회의나 교구의 규정에 따라 교무금, 주일헌금, 기타 헌금과 모금 등으로 교회 운영 활동비를 부담해야 한다”(165조)고 밝히고 있는데요. 교무금만이 아니라 여러 헌금 등도 교회 운영을 위해 활용될 수 있습니다. 또 교회는 교회 운영비 외에도 2차 헌금이나 모금 등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무금과 십일조가 동일하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무금은 우리 신앙선조들의 공소전(公所錢)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부족하던 시절, 공소에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공소와 공소공동체 운영을 위해서 모았던 기금입니다. 이 전통이 1931년 ‘전조선지역 시노드’를 통해 교무금 제도로 정착됐습니다. 교무금이라는 제도에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제 없이도 신앙공동체를 꾸려나갔던 우리 신앙선조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무금 액수를 규정하지도 않고, 미납한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사정이나 수입 감소로 교무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자신의 수입에 10분의 1에서 30분의 1 정도를 책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적어도 한 달 중 하루의 수익은 하느님께 봉헌하자는 취지입니다. 다만 교무금은 수입을 기준으로 책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쓰고 나서 남은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입 즉 하느님께 받은 것 중 일부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4-12-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주님의 기도를 전체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고 오늘날에도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성무일도 아침·저녁 기도와 미사 등 하루에 세 번씩 바칩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및 그와 유사한 시기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마태 6,9-13;루카 11,2-4; 디다케 8,2)가 주님의 기도를 전하며 후대에 삽입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마침 영광송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모두가 사용합니다. 종말론과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후기 유다교는 여러 청원 기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청원을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내용상 그와 유사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로 모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선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넘어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주권자이시면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와 유혹과 악 등 우리의 구차한 삶을 돌보시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의 품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과 관련되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첫 번째 청원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청원에 답하실 때 기도하는 이는 이 거룩함에 사로잡히고 변화됩니다. 두 번째 청원은 하느님이 지니신 임금의 주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나라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곳으로 기대했고(이사 9,6; 32,15-17; 52,7; 60,17)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은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자기 뜻을 억누르거나 윤리적으로 완벽히 행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인 정의와 평화는 기도하는 이가 하느님이 원하신 피조물로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때, 하느님과 함께 자기 뜻을 펼치고 행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네 번째 청원은 유일하게 물질적 선물에 관계되지만,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신뢰, 타인과 함께 나눌 시간 등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을 선물하시고 과거에 대한 미련 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을 온전히 살도록, 영원한 현재인 하느님 앞에서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다섯 번째 청원은 상처받은 삶의 치유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얽히고설킨 자기 삶의 역사 전체의 화해를 청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너그러우심을 청하듯이 자신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른 마음을 드러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이끌어 주십사는 여섯 번째 청원은 일상의 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궁극적 유혹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늘 동행해 주시기를,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기를 청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청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눈감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청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지시어 그분의 품 안에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일곱 가지 청원 중 용서의 청원에서만 인간의 행위가 나타나므로 주님의 기도는 완전히 하느님 중심적인 기도이며 그 안에 그분 안에서 평화로이 숨쉬고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의 여여함이 드러납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신뢰하는 보잘것없는 이들: 루카복음서의 기도

성전에서 시작해서(1,8-10)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끝나는(24,53)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분으로 제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은 기도 자체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시편 22,19)라는 시편 말씀을 예수님의 입에 올리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1,6)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 제시한 루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 드러내며 죽음도 봉헌의 의미로 달리 해석 같은 루카가 저술한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등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을 입에 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스테파노는 그분의 첫 증인입니다. 분명 시편을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은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는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실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루카는 다른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과감하게 달리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부재중에 사람들 멸시를 받으며 처절한 외로움 속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당신에게 죽음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기도 중에 봉헌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기도하시면서 죽으시고 죽으시면서 기도하시는 루카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뛰어난 비유 세 가지를 들려줍니다.(끊임없이 간청하여라: 11,5-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18,1-8;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14) 끊임없는 간청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첫 번째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11,2-4)를 해설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지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께서 비유에서는 친구의 청을 귀찮게 여기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마지못해 그에 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십니다. 비슷한 모습이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그다음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어떤 재판관의 모습과 하느님이 비견됩니다. 과부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재판관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과부가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그에 응합니다. 항구한 신뢰와 용기가 기도에 필요합니다. 과부와 세리가 지닌 용기와 겸손 하느님 향한 따뜻한 신뢰가 핵심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겸손도 필요한데, 이것을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라는 세 번째 비유가 이야기합니다. 성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남다름을 내세우며 장황한 감사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대비됩니다. 과부와 세리, 그들이 지닌 용기와 겸손을 연결하는 것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은 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품는 따뜻한 신뢰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으로 마무리됩니다(18,15~17). 루카는 기도하는 이들이 부모 앞의 어린이들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기도의 골자로 가르칩니다. 우리도 늘 자신의 사정을 하느님께 아뢰고 그분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리시라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그러한 삶에 초대하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2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제2경전은 외경(外經)이다?

2005년 「성경」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공동번역 성서」를 썼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성경」과 목차가 조금 다른데요. 몇몇 성경들을 ‘제2경전’이라는 목록에 따로 모아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 제2경전을 ‘외경'(外經)이라 부릅니다. 외경이라 하면, 한자로는 ‘성경(經)의 바깥(外)’이라는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제2경전은 성경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성경이더라도 조금 덜 중요한 성경인 걸까요? 제2경전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그리고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에 해당하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들은 구약성경에 해당하는데요. 초대 교회 시기에는 두 종류의 구약성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칠십인역’이라 부르는 그리스어 번역본 성경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 번역에 얽힌 전설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스라엘에서 70명(혹은 72명)의 번역가를 선출해 구약성경을 번역했는데, 이들이 각각 번역한 성경들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번역됐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성경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나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작성했습니다. 이때 구약성경도 인용했는데 대부분이 칠십인역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어 생활권에 살았기 때문에 칠십인역이 구약성경의 기준이 됐고 제2경전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리스도교 교양」 등의 책에서 성경 목록에 제2경전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제2경전은 히브리어 성경이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없던 성경을 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지요. 특히 개신교가 갈라질 당시 개신교는 이 의혹을 내세우며 제2경전을 외경으로 보고 성경에서 제외했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수용해야 할 성경과 성전에 관한 교령」으로 교회가 오래 전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 온 제2경전을 포함한 신·구약성경을 정경(正經)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해 인근 쿰란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쓰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된 것인데요. 이때 발견된 성경 중에는 그동안 토빗기나 집회서 같은 제2경전들도 있었습니다. 제2경전도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습니다. 제2경전은 외경이 아니라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정경입니다. 그렇기에 미사 전례 중에도 제2경전 역시 봉독됩니다. 교리면에서도 제2경전에는 천사, 연옥 등 교회의 여러 교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2’경전이라 불린다고 중요도도 두 번째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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