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희망 준 유딧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을 꾸려 가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체험한다. 디즈레일리(1804~1881)는 영국의 수상으로 유다인의 집안에 태어났다. 영국의 영토를 넓히고, 정당제에 의한 의회 정치를 실현했던 인물이라 존경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영리하고 재주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개인보다 그의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는 유다인에 대한 나쁜 편견이 존재했는데, 그는 유다인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자만 영국 사회는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디즈레일리는 소설가가 되었고 차별이 비교적 적은 예술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진정한 영국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드디어 정치가로 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주는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닥쳤을 때 굴복하지 말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실패에도 계속 반성과 사색을 통해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귀한 메시지를 남겼다. 누구나 삶에서 고통을 겪지만 이를 반성의 계기와 자기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유딧기는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유딧기는 토빗기의 경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딧기에는 유딧이라는 과부가 전쟁 중에 홀로 적진에 가서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시리아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는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이스라엘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당시 우찌야 왕은 닷새 동안만 기도하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항복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이때 유딧이 등장해 위기에 빠진 유다인들을 구해냈다. 유딧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과부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 경건하게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와 지혜와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찌야의 주장을 반대했는데 이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홀로 적진으로 향했다. 빼어난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유딧은 술에 취해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죽인 후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장을 잃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유딧은 과거와 달리 고통을 우상숭배나 죄악의 결과라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시는 배려와 자애라고 해석했다. 유딧이란 인물은 많은 박해를 당하고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교만 때문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우찌야왕

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태조 왕건>이란 사극이 방영되었을 때 정작 고려를 건국한 왕건보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한쪽 눈이 먼 궁예가 주목을 더 받았다. 나도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쳤고 늘 말썽을 피우다가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어 혼란해지자 궁예는 891년 절에서 나와 한창 득세하던 세력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서 “부하들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다.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궁예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협조가 절실했다. 궁예는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궁예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불렀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무리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공평무사한 인물이었지만, 왕이 된 후 민생파탄과 공포 분위기로 결국 백성들도 등을 돌렸다. 궁예는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분노한 백성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찌야는 16살의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선대 왕의 정신에 따라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중요한 성읍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찌야의 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우찌야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 그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성공을 이루면 교만해지기 쉽다. 우찌야도 강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몰락했다. 그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고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우찌야는 주변의 찬송에 취해 하느님의 율법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고쳐 실천하려고 했다. 이때 대사제들이 말렸지만 교만해진 우찌아는 하느님의 법을 거스렀다. 우찌야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한 우찌야는 별궁에서 홀로 한센병을 앓으며 쓸쓸히 지내다 죽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지만,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속엔 하느님이 사라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물거품이 되게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부 사랑에 비유한 호세아 예언자

우리나라의 가장 젊은 세대그룹인 Z세대(1997~2005년생)를 대상으로 실시한 어느 여론 조사 결과, “결혼은 안 해도 되고 자녀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응답이 50% 이상 나왔다. 우리 미래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출산률이다. 결혼은 사회제도이고 민주사회에서 자유로운 선택사항이지만 문제는 결혼을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적 요소도 많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더 큰 책임을 갖고 출산과 양육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결혼한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절반으로 하고 의무는 두 배로 걸머지는 일이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한 말이다. 그의 지인들은 쇼펜하우어를 성격은 고지식하지만 의협심도 강하고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라 기억한다. 그가 어느 파티에서 ‘남자와 여자는 누가 본래 영리한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당연히 여자가 영리하다. 여성은 남성과 결혼하는데 남성은 여성과 결혼하니까”라고 알 듯 모를듯한 답을 했다. 여성은 영리하니까 남성과 결혼하고 남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여성과 결혼한다는 뜻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에 빠지고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불우한 환경 탓도 많았다. 은행가였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어머니와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괴테같은 유명인들이 그녀의 살롱의 단골손님일 정도로 사교성이 많고 정열적인 여성이었는데 남성 관계가 복잡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의절하고 프랑크푸르트의 하숙방에서 친구도 없이 사색과 집필에만 몰두했다. 안타깝게 그의 염세주의 철학도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혼인한 예언자이다.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에서만 활동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성기 때인 예로보암 2세 시대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기원전 721년경)까지 20여 년가량 활동했다. 호세아에게는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부부간의 사랑에 비유해 ‘사랑의 예언자’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대혼란 속에서 백성들은 이방인의 신 바알에게 매달렸다. 호세아는 잘못을 저지른 아내를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인의 신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살아나려면 하느님을 다시 찾고 올바르게 섬기도록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연인 같은 분이라고 강조했다. 부부간 사랑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잘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부인을 사랑으로 맞아주는 너그러운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피와 눈물 나는 예언을 귓등으로 들은 왕과 백성들은 결국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신뢰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분위기는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도자들의 불의 고발한 용감한 예언자 미카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존경한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민중의 지도자였다. 사춘기 때는 술과 여자에 빠지고 종교적 반항심도 생겼지만 심성이 착하여 두려움과 죄책감에 곧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간디의 인생에서 힌두교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물질적 욕망을 끊고 고통이나 기쁨, 승리나 패배에 동요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인생의 방향타가 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어느 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의뢰한 소송을 맡았는데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남아공에서 겪은 철저한 인종차별의 심한 부당한 차별로 그는 옥살이를 반복하며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 간디가 만약에 남아공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도의 변호사로 인도의 높은 계급이 받아오던 대우를 받으며 편안하게 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역사의 물줄기는 참으로 신비하다. 미카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경 혼란의 시기에 남유다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미카는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이라 예언했고, 남유다왕국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어렵고 힘든 국제정세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엄청난 힘과 잔인함으로 무장한 아시리아는 여러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며 이스라엘도 위기에 휩싸인다. 특히 이 무렵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마저 위기에 처하면서 더욱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통치자들은 오히려 백성을 더 억압하고 끝을 모르게 부정부패에 빠져든다. 미카는 아시리아의 침공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위정자들이 저지르는 농민들에 대한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그들의 죄를 고발했다. 미카는 이스라엘에서 공공연한 부정과 불법을 고발하며 지도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전하고 있다. 권력을 자신의 사익으로 남용하는 고관들에 대해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사이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에게 돌아가 더 피폐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카가 예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전대미문의 메시지였다. 그러면서도 미카는 하느님은 마지막 때 결국 남은 자들이 번영과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가져다줄 구원은 이스라엘 국가가 아니라 고통을 겪어낸 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승승장구해도 시간이 지나면 불법과 부패는 결국 드러나 심판을 받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주님의 날, 표징을 알려준 요엘 예언자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다’라는 속담의 유래는 메뚜기는 여름에 한창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나왔다. 누구나 어느 한 시기에만 번성할 뿐, 영원하지는 않으니 겸손하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때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마구 날뛰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는 벼의 잎을 먹으려고 몰려오는데 벼잎이 성장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메뚜기의 서식처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열대우림의 저지대, 초원지대에 가장 많이 산다. 최근에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인도, 브라질 등에서 메뚜기떼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줬다. 2004년 가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엄청난 메뚜기 떼가 농작물의 3분의 1을 먹어 치우는 막대한 피해를 줬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조선 시대에 메뚜기(풀무치)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무리가 1000억 마리라면 상상이나 될까. 흥미로운 것은 메뚜기는 고단백 음식으로 레위기에는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벌레로 등장한다.(레위 11,22 참조) 메뚜기떼가 앞에 등장하는 장면 때문인지 메뚜기 하면 요엘서가 떠오른다. 요엘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다. 정작 요엘서에는 오직 “프투엘의 아들”(요엘 1,1) 외에는 그에 대한 단서가 될 내용은 전혀 없다. 요엘 예언서를 읽어보면 그가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이 추측할 수 있다. 요엘은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다.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주님의 응답과 축복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결국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사람의 성향이 그렇듯 안정기에 들어가면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아진다.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언급하며, 먼저 사제들에게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주님의 날이 가까웠고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과 멸망이 순식간에 들이닥치듯 다가온다는 것이었다.(요엘 1,15 참조) 성경에서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표징으로 나타난다, 요엘은 당시 상황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 차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한 것것이다. 요엘은 하느님께서 심판도 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준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도 많은 표징, 즉 사인(sign)을 본다. 야구 게임에서 보면 사인을 못보고 잘못 이해해서 아웃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 인생도 똑같다. 사업이나 인간관계 등 교훈이 되는 표징을 지나쳐 인생에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24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은 압살롬 왕자

‘삼일천하’로 불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젊은 개화당(開化黨)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守舊黨)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한 일종의 쿠데타이다.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당시 문제를 일으키던 민 씨 친인척들과 부패 관리들을 처형하고 축출하였다. 12월 6일에 개화당은 중국 내정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국민들의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변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갑신정변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이해가 적었고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많이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중흥을 위해 구습의 봉건체제를 변화를 시도했던 혁명이라는 점에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긍정적 가치를 두고 있다. 주동자 김옥균은 외국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종로거리에 걸렸다. 한 영화의 대사 생각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 아닙니까!”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은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어릴 적에 죽었다. 압살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논은 압살롬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타마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꾀병을 부려서 병간호를 위해 찾은 타마르를 자기 침실에 끌어들여 몹쓸 짓을 했다. 한참 후 사랑이 식은 암논은 타마르를 쫒아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압살롬은 암논을 처치할 복수를 계획했다. 다윗 왕도 암논이 타마르에게 한 사건의 전모를 듣고 노발대발했으나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다. 다윗 자신도 부하의 처인 밧 세바를 빼앗아 아들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암논에 대한 징계는커녕 오히려 다윗의 마음이 암논에게 기우는 것을 눈치챈 압살롬은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 사건으로 압살롬은 국외로 나가 3년간 타향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스라엘로 압살롬이 돌아왔지만 다윗은 문전박대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초조해진 압살롬은 자기의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드디어 일으켰다, 압살롬은 큰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압살롬의 책사였던 후사이라는 인물은 사실 다윗의 첩자였는데 그의 말을 듣고 추격을 멈추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전투 경험이 많은 다윗의 정예병들은 압살롬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출정하는 부하 요압에게 다윗은 압살롬이 반란자지만 죽이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죽였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통곡했다.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책임이 있는 르하브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13세에 가출을 했고 평생 애정 결핍에 목말랐다고 한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는 교육은 최소한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유교 경전의 기초지식을 배우다 중단하고 집안의 농장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마오는 잦은 구타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로 가서 일하면서 외화도 벌고 동시에 외국어와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마오쩌둥도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여비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북경대 도서관에서 일했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구열이 높은 마오는 도서관에 산처럼 쌓인 책더미 안에서 지식을 쌓았다. 특히 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고대의 제왕들은 유학을 가지 않고 정무를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중국의 역사서를 독파하며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함구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게 없지만 르하브암도 겉으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안으로 품고 후일을 도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 제4대 국왕인 르하브암(기원전 931~913년) 때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된다. 그는 다윗의 손자이자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았다. 솔로몬으로부터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솔로몬의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 등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 왕가에 대한 반감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로보암을 앞세워 부당한 부역과 높은 세금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다. 르하브암은 사흘 뒤 답변하겠다고 하며 솔로몬을 보좌하던 관료들과 논의했다. 관료들은 솔로몬왕 때 세금이 너무 과했다며 예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견에 긍정적 답변을 줄 것을 권고했다. 르하브암은 자신과 함께했던 소장파 신하들과도 회의를 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은 백성들을 너무 풀어주면 새로운 왕을 우습게 보며 권위가 실추된다고 더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조언했다. 르하브암은 약속한 사흘이 지나 신하들을 만났는데 인생의 최고 악수(惡手)를 두었다. 이 한 마디가 바로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지도자는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불이 타고 있는데 휘발유를 부은 셈이다. 이미 실망으로 다윗 가문에 등을 돌린 10지파는 분노하며 ‘우리와 다윗과 무슨 연관이 있나. 이제부터 너나 잘 하세요’하며 떠났다. 르하브암의 통치 영역 안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만이 남았다. 르하브암은 부역 감독으로 아도람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죽여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르하브암 왕도 위기를 느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하였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0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율법 준수 통해 개혁 외친 에즈라 예언자

가톨릭교회는 공의회 등을 통해 개혁을 계속해 왔다. 물론 개혁은 중요한 교리나 교회의 전승을 간직한 채 교회가 그 시대에 맞갖게 살도록 하는 변화였다. 1914년 8월 20일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는 사도 바오로를 주보로 모시는 수도회를 만들어 사회홍보 수단을 통해 선교에 종사하려고 시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현대문명의 이기는 세속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심지어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오히려 홍보 수단을 이용해서 선교에 선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의 시도를 위험하다고 악평하는 교회 내 의견도 적지 않았다. 개혁은 자고로 공격과 비판에 직면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현대의 최고 영성 지도자로 존경받는 안셀름 그륀 신부님에게 코로나가 성행할 당시 나는 ‘코로나 종식 후 교회에 변화가 올까요?’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그륀 신부는 단호하게 코로나가 끝나도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힘들다고 하셨다. 교회는 많은 이탈자(특히 젊은층)가 생길 것이며 교회는 다각도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최근 주임 신부님들은 젊은이들의 이탈이 심각하다고 우려한다. 그륀 신부님은 그동안의 사목 패러다임이 변화되지 않으면 신자의 감소는 계속될 것이라 염려했다. 이제 교회는 안에서 신자들을 기다리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야말로 개혁이 절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사제들과 레위인들, 바빌론에서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은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 공사를 시작하였다. 집 짓는 이들이 주님의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찬송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성전이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에즈라 3,8-13참조) 그리고 성전은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완공되었다. 예언자 에즈라(기원전 480-440년)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해이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그를 제2의 모세로 부른다. 그는 유배 기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우상숭배를 강력히 규탄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즈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옷을 찢고, 하느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동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동체를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벽 공사를 완성하자, 에즈라는 모세 율법을 모은 책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 유배된 많은 유다인들이 이방인 여성들과의 결혼으로 더욱더 이스라엘의 신앙에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했다, 백성과 제사장은 율법을 지키고 모든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겠다는 언약을 맺었다. 에즈라의 개혁은 모세오경의 준수 등, 이스라엘의 기본에 충실한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0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우정과 의리의 사나이, 킹메이커 요나탄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유세 내내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깨뜨릴 것이라 주장했다. 유리천장이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는 비유적인 경제학 용어이다. 유리천장은 직장에서 대다수 여성들,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들이 영향력 있고 수입이 많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우리나라의 예능계에서 유리천장을 깬 사람 중 한 명은 서혜진(레지나) PD라 생각한다. 그동안 이류음악 취급을 받던 트로트를 일시에 주류 음악으로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임영웅과 송가인 등 트로트 가수들을 대스타로 발굴해 냈다. 서 PD는 보수적인 조직의 방송국, 예능분야 안에서 적어도 유리천장을 깨뜨린 독보적인 인물이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본가수들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어 크게 흥행시켰다. 그는 흥행은 기대했지만 문화교류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서 PD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는 문자투표를 할 때 시청자들이 100원씩을 내고 참여하는데, 매해 이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사용하려고 한다. 올해에는 5000만 원을 적십자에 기부하고 1000만 원 정도를 우간다에서 봉사하시는 수녀님들께 드리게 됐다. 팔순이 넘으신 수녀님은 “마침 보건소 봉사자들을 위한 쉼터를 지으려고 주님께 기도했는데 이틀 만에 응답이 오네요”라고 하셨다고 한다. 서 PD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려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세상에 활짝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탈렌트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살기 등등한 사울왕을 피해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다. 그런데 몰래 찾아와 그의 힘이 되어준 사람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표지로 자신의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주었다. 요나탄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지만 전투에서는 용맹스런 전사로 많은 공을 세웠고 생의 마지막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장군이다. 요나탄이 사울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당시에 반대할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요나탄은 일찍부터 다윗의 인품에 마음이 끌려 다윗과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리를 지켰다.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여 처단하겠다는 속내를 전한 것도 바로 요나탄이었다. 그리고 사울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는 다윗을 왜 죽이려 하느냐며 직언을 한 것도 요나탄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요나탄의 다윗에 대한 우정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나탄은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는데도 다윗의 큰 능력을 보고 왕위마저 양보한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사실 요나탄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고 이스라엘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권력의 탐닉은 부자간에도 양보가 없는데 요나탄은 개인보다는 국가, 우정을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양보나 의리와 정의도 메마른 요즘 요나탄과 같은 인물이 더욱 그리워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2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에스테르

6·25전쟁이 시작됐을 때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에게 밀렸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1950년 7월 5일에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였는데, 세계 최강인 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북한군에게는 소련제 전차가 있었는데 국군에게는 전차를 파괴할 만한 화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군 전차에 직접 올라가 해치를 열고 준비한 수류탄, 화염병을 안으로 던져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차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국군들은 결사대를 자원으로 뽑았다. 6·25전쟁 하면 남성들만 주로 언급되는데, 사실은 1950년 8월에 해병대 4기 모병에 1300여 명 중 여성에 126명이나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9월 6일 서울수복 후 여군 5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 여성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최근 한 모임에서 요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우리나라도 걱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전문직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면 바로 입대해야죠”라고 담담하게 말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성경에서 용감한 여성을 꼽을 때 에스테르가 빠지지 않는다. 베냐민 지파 모르도카이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모르도카이는 왕궁에서 일을 했는데 용모가 빼어난 에스테르를 양녀로 삼았다. 나중에 에스테르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왕비가 되어 목숨을 걸고 유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애국 여성이 되었다.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두 내시의 반역 모의를 듣게 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을 고발하였고 두 내시는 처형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로 왕의 신임을 더 얻게 된다. 한편 이 두 내시와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재상 하만은 이 일로 모르도카이와 그의 민족 유다인들을 말살하려고 작정한다. 에스테르가 왕후가 된 후 모르도카이도 궁궐 대문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모든 신하들은 재상 하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하만은 왕에게 유독 유다인들만이 다른 민족과 화합하지 않아서 앞으로 위협이 되기에 처단해야 한다고 고발하고 왕에게 허락까지 받았다.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모르도카이는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은 다음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을 하며 에스테르에게 소식을 전했다. 에스테르는 유다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흘 동안 자신을 위해 단식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왕궁에서 단식기도를 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만나 유다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에스테르의 지혜로 하만이 되치기를 당해 오히려 죽게 되었다. 에스테르가 모르도카이에게 보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다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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