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푸른 망토 안의 평화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던 신앙. 나는 첫째 아이의 첫영성체를 임하는 모든 과정이 기뻤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딸아이는 복사단 활동을 착실히 이어나갔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신앙생활도 가정의 평안도 급격히 빛을 잃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그때 나의 기도는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안정만을 위한 기복 신앙이었고, 나의 계획대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고 돌보기에만 급급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내가 누리고 있던 평범함과 편안한 삶에 감사할 줄 몰랐고, 그것이 내 것이기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내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걱정과 불안이 모든 것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때 내 손을 잡아주시고, 부드럽게 안아주신 분이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이셨다. 마리아 사제 운동 체나콜로 정신과 기도 모임을 알게 되면서 당신 모든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성모님의 손길을 느꼈고, 그 엄마와 함께 바치는 거룩한 묵주 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되었다. 나는 티 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되면서 삶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성모님의 이끄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하며 확실하고 완전한 길인 성모님! 하느님의 ‘자비’의 선물을 얻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성모님! 엄마를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성모님께 봉헌된 사람들에게는 은총이 함께 한다. 사람에 대한 배신, 불안한 미래,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던 우리 가정을 돌봐주셨다. 성모님의 원의와 나의 기도가 일치됐을 때 그리고 그것이 순수한 신앙이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도와주시는 성모님! 너무나 막막했던 나에게 체나콜로는 기도와 고통, 순종으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시켜주었다. 병들었던 나의 몸이 말끔히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성모님께선 가정 체나콜로 기도를 하는 아이들이 믿음을 키워가며 성장하도록 이끌어주고 계신다. 신앙이 없이 고통과 어려움을 견뎌내는 남편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성모님은 그런 나의 마음까지도 담아두심을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기도와 봉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모님께 봉헌하면서 계획을 세우지도 않게 되었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이고 행복이다. 내가 꿈꾸던 신앙이 성모님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이 선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이들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도가 동반된 봉사와 나눔, 사랑, 성모님은 순수한 신앙을 이끌어주신 분이시다! 성모님을 누리고 있다면 구원의 확실한 길이라고 했다. 행운인 것이다! 글 _ 김주연 마르첼라(수원교구 제1대리구 성복동본당)

2024-12-25

[밀알 하나]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사극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신부(新婦)가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길, 자신이 살던 익숙한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가족과 부모님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시댁 식구들과는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마음이 답답해 열어본 작은 창문 밖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지자, 어린 소녀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갑니다. TV 속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저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 살던 고향, 저를 키워준 모본당을 떠나 첫 본당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동할 본당에서 오신 분들의 차를 타고 환송 인사를 받으며 떠나는 차 안에서, 저는 이제 막 시집가는 어린 신부처럼 곧 다가올 일을 걱정하며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모든 것들이 슬픈 이별의 손짓을 건네는 것만 같아 속으로 연신 눈물을 삼켜댔지요.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방금 이별을 겪어 눈물 자국 남아있는 첫 본당 신자들의 어색한 환영 인사를 받으며, 저는 그렇게 정신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구 사제 서품식이 거행됐습니다. 아홉 분의 새 신부님들이 탄생한 기쁜 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곧 익숙했던 삶의 자리를 이동해야 하는 어린 신부(神父)님들의 마음이 어떠할지를 잘 알기에 마음속으로 작은 응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다시금 가슴에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나그네처럼 떠나고 또 떠도는 것이 신부의 삶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별할 때마다 마음을 정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넘치게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지 못해 죄송해서, 고운 정뿐만 아니라 미운 정에도 미련이 남아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시간이 아쉬워서, 마지막 짐에도 차마 마음은 다 넣지 못했습니다. 물론 또 시간이 흐르면 지난 것들은 잊히기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지금도 우연히 옛 본당 근처를 지날 때면 웃으며 박진영씨의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합니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약 한 달 전, 제가 살았던 ‘평화의 모후원’을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살았던’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지금 다른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이사였던 탓에 이번에도 가슴 한구석에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지만, 저의 마지막 ‘밀알 하나’ 글이 될 이 지면을 빌어 미처 다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남김없이 전해봅니다. 수녀님들, 어르신들, 그리고 모든 모후원 가족 여러분!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요.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글 _ 김영철 요한 사도 신부(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2-25

[밀알 하나] 여백의 미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를 즐겨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라디오 시그널 음악을 듣기 위해 알람을 맞춰놓을 만큼, 시간마다 듣던 프로그램이 달라 바삐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출 만큼, 그 시절 라디오는 저의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엽서로 보낸 사연이 소개되어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로 받았던 일, 야간 자습시간에 몰래 라디오를 듣다가 혼자 웃음이 터져 선생님께 혼났던 일, 새벽 경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뽀글이를 먹으며 들었던 새벽 방송의 잔잔한 음악들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라디오는 언제 어디서든 귀만 열어놓으면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운전할 때, 운동할 때, 다림질할 때, 청소할 때. 전원을 켜놓기만 하면 흘러나오는 수많은 사연과 음악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의 배경이 되고 동반자가 됩니다. 사람들 사는 이야기에 공감하며 함께 울고 웃을 때도 있고, 잊고 지냈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마치 잃어버린 은전을 되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합니다. 제가 라디오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라디오가 진화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보이는 라디오’, ‘실시간 채팅’이 등장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고, 라디오 앱 덕분에 세계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혹은 다시 듣기로 언제나 꺼내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빨간 점 버튼에 손을 올리고 대기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참으로 편리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워야만 할까? 그것이 꼭 좋기만 한 일일까?’ TV, 스피커 등 가전기기의 성능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고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VR기기도 점차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을 넘어서 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요. 이러한 변화 속에서 단순히 소리만을 전달했던 라디오의 진화는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소리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을 나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것이 라디오의 진짜 매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채워야만 만족하는 이 흐름은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 동양화의 특징은 ‘여백의 미’라고 합니다. 여백은 채우지 못해 미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는 이의 감정과 생각을 통해 빈 곳을 채워보도록 허용하는 여유와 너그러움의 공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홀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혹은 네가 완전하지 못해 괴로워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여백을 따뜻함으로 채워나가는 오늘이 되길 희망합니다. 글 _ 김영철 요한 사도 신부(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2-15

[신앙에세이] 기억의 솜사탕

5살 여자아이는 긴 의자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에서 덜 깬 아이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는 창문에서 비춰오는 햇살에 조용히 몸을 맡기고 앉아 있다. 그 햇살은 이 아이에게만 비춰지는데 너무나 영롱하고 따사롭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스르르 잠이 든다. 종종 하원 시간에 할머니가 데리러 오시는 시간이 늦어지는 날이다. 잔디밭에 나가 뛰어노는데 풀냄새도, 새소리도 모든 것이 정겹고 평화롭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유치원은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할머니는 손녀딸을 자주 업고 오르락내리락하셨다. 계단 옆에는 흰 성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묵주 기도 중에 떠오르게 해주신 장면이다. 성모님이란 존재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감사함을 알게 되면서 찾아온 기억들이다. 잠든 곳은 바로 성당 성전이었다. 흰 성상은 성모님이셨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들. 수녀님도 기억 속에 어렴풋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성당 유치원에 잠시 다녔다는 사실을 불과 몇 년 전에 알게 됐다. 부모님께서는 사정상 어릴 때 나를 외가에 맡긴 게 가끔 안쓰러워 말씀하시지만, 나는 3년여 동안 외가에서 지낸 기억이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시간임을 안다. 외가 식구들의 사랑도 따듯했고, 무엇보다도 그때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산 것이지 늘 나와 함께 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가정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신앙이 있는 친구들의 가정이 늘 부러웠고, 아주 우연히 성모님 성상을 마주할 때면 멈춰 섰었다. 성당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늘 한 편에 있었지만, 이끌어주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래도 힘들 때나 기쁠 때 하늘을 보면서 자주 대화하곤 했다. 내 마음을 아시고 늘 돌봐주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지켜보신다고 느꼈다. 다만, 내가 하느님 사랑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도 좀 더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셨겠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내가 엄마가 되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신앙을 주고 싶었다. 늘 신앙을 갈망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우리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힘이 되고, 은총이라고 여겼고, 마침 원하던 때에 이끄심으로 나는 성당에 가게 됐다.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과,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겸손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내 마음은 간절했다. 글 _ 김주연 마르첼라(수원교구 제1대리구 성복동본당)

2024-12-15

[신앙에세이] 당신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게 됐다. 처음으로 입관 체험을 했고 그 다음은 죽음에 관한 묵상글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중 고(故) 윤형중(마태오) 신부님의 「사말의 노래」는 십수 년 동안 거의 매일 일고 듣고 해서 지금은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들은 묵상서다. 「사말의 노래」는 일찍이 윤형중 신부님께서 ‘경향잡지’에 연재하신 내용을 약간 수정하고 증보하여 묵상서로 발간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사말 즉 우리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문제들, 죽음, 심판, 천국, 지옥의 과정을 신부님 특유의 필체로 때로는 무섭고 또 한편으로는 반드시 따르도록 정말 자세히도 써 주신 것 같다. “백년 천년 살 듯이 팔딱거리던 청춘이라 믿어서 염려 않던 몸 거기에도 죽음은 갑자기 덤벼 용서 없이 목숨을 끊어버린다.” 첫대목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아주 강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은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는데 당장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아주 급하게 책을 구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다 보니 꼭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책을 읽으신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생각이 든다. “죽음에는 남녀도 노소도 없고 빈부귀천 차별도 없다 하지만 설마 나도 그러랴 믿고 있더니 이 설마에 결국은 속고 말았네.”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왠지 잘못 살아왔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나거든 그 하루를 최후로 생각들하고 밤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되거든 임종하는 자리로 준비들 하소. 주 성모는 우리를 굽어보소서. 이 세상에 천만번 태울지라도 후 세상엔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렇게 끝나는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가정 제대 앞에 촛불을 켜고 무릎을 꿇게 된다. 요즘은 수원교구뿐만 아니라 다른 교구 본당으로도 연도와 상장례를 강의하러 많이 다닌다. 연도가 노래가 아니고 기도라는 것을,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낼 때 슬픔이 아니라 세상 창조 때 만들어 놓으신 그곳에서 다신 만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그래서 주님의 낙원에서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잠시 이별한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위령 성월에만이 아니라 우리 곁을 떠난 부모 친지 이웃의 형제들을 위해 끊임없이 매일 연도를 바치는 그런 생활이 필요함을 더 많이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 또한 언젠가 하느님 곁으로 갔을 때 “나보다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해 연도를 많이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참 잘했구나”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승용차 시동을 켬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연도와 함께 또 하루의 순례를 시작한다. 글 _ 김태은 안셀모(수원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

2024-12-08

[밀알 하나] 길들인다는 것

피천득 시인의 수필집 「인연」과 더불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 왕자」입니다.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이 책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프랑스 공군에서 활약한 비행기 조종사이기도 한데요. 1944년, 비행 중 실종되면서 마치 자기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처럼 홀연히 생을 마감했지만, ‘어른들의 동화’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삶을 사색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B612라는 행성에서 온 한 소년, 어린 왕자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바오밥 나무가 점점 커져 골칫거리인 작은 행성, 도도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그가 이 지구로 오기까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조종사는 소년과 대화를 나누면서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해 나갑니다. 저에게는 최애 동화인지라 모든 내용이 소중하지만,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사막여우를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새로 만난 친구가 반가워 함께 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자신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며 차근차근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것은 관계를 맺는 것, 서로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길들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인내심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위해서라면 말없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필요한 예의도 갖추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고, 나의 말을 하려 하기보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때로는 눈물 흘릴 일도 생기곤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 있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달라진 시선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너’에서 ‘오직 하나뿐인 너’로, ‘특별할 것 없던 너’에서 다른 그 무엇과도 구별되는 ‘나만의 소중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너에게 맞추고 또 낮추는 나의 변화이지요.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하나가 떠오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존재의 눈높이에 당신을 맞추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길들이신 나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어린 왕자가 사막여우를 길들이듯, 목자가 양들을 길들이듯 말입니다. 사랑은 가볍고 인내와 책임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져 가는 시대이기에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가 주는 울림이 더 깊이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글 _ 김영철 요한 사도 신부(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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