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음을 눈앞에 둔 시메온의 기도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루카 2,29-31, 성무일도의 본문)라는 시메온의 기도로 성무일도가 하루를 맺습니다. 이 기도는 모사의 달인인 루카 복음사가가 ‘이방인들의 빛’이라는 희망의 인물을 다루는 제2이사야서의 신학을 이용해서 직접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이사 40,5; 42,6; 46,13; 49,6.9; 52,10 참조) 루카는 구약을 대표하는 노인인 시메온과 안나가 구약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두 노인을 통해 복음의 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 끝’까지 이르는 구원의 예표인 아기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루카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당시 세상의 끝 또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는 말로 끝납니다. 루카는 이로써 시메온이 노래한 만민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전망이 실현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루카의 전망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빛을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을 집필한 루카이지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하지 않고 통합합니다. 평생 메시아를 고대했던 노인은 죽기 전에 부르는 마지막 노래에서 ‘이제는!’이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오랫동안 신앙 속에 희망을 간직했던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노령화 사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노인분들은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경험과 지혜와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시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시고 10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시는 나이 칠십 자매님이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며 당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노랫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날이 언젠가 오리라 기대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끝기도를 바치듯이, 지난 반년 동안 연재를 마치면서 성경의 도움으로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었음에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세상이 제 자리를 찾기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기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2,34-35)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성모님께 고통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스럽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풍파에 휩쓸릴 것인지, 세상의 풍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갈 것인지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상되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루카의 전망에 기대어 여러분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2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성모님의 찬양 마니피캇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와 시므온의 노래(루카 2,29~32)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저녁기도와 끝기도에서 불리는 복음서의 찬가로,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사슬 기도)의 주요 부분인 성모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합니다. 천사와 만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믿을만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의 인사말만 들은 엘리사벳이지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수태 사실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그것이 알려지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큰 영향을 끼치고, 시편 및 구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양 시편입니다. 그 전반부는 메시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개인의 감사를, 후반부는 높이고 낮추는 세 개의 반대되는 움직임 속에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1사무 2,1; 시편 34,3~4)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시편 35,9; 이사 61,10; 하바 3,1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9,32; 1사무 1,11)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창세 30,13; 시편 72,17; 루카 1,45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21)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시편 72,19; 111,9)  <2절>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시편 89,2; 100,5; 103,11.13.17)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시편 89,11; 118,15-16)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시편 147,6; 집회 10,14).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시편 107,9)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시편 98,3)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이사 41,8-10)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2사무 22,51; 미카 7,20) 마리아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마리아와 같이 겸손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그분께 자신의 빈손을 내밀며, 실제로 하느님이 당신의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능하신 팔’을 뻗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달리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칭하는데, 이는 아들인 예수의 이름과 같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와(루카 1,69.71.77; 2,11.30; 사도 5,31; 13,23 등) 동일합니다. 이름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닙니다.(하바 3,18; 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없는 이를 구원하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느님은 도움을 주시고 구하시는 분입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백성을 향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충실하신 분이고 나를 알고 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항구함에 걸맞은 응답은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는 공동체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사랑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개신교 목사님이 만드시고 천주교 생활성가로도 불리고 심지어 야구 응원가로도 쓰이는 ‘실로암’이라는 성가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열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는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의 기도이고, 전례 중 공동체가 함께 부르던 성가였습니다. 1절: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6-8) 2절: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9-11) 가장 오래된 기도인 그리스도 찬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난 그리스도 스스로 낮추며 높아지는 모습 담겨 찬가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느님 곁에 계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하시면서 종살이와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시기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신성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자기 낮춤의 밑바닥에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주의 모든 권능을 위로 높이 올리십니다. 왕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그분의 이름이 선포되고 모든 이가 그분을 경배하는 가운데 그분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이사 45,23-24)는 예언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홀로 높으심을 강조했습니다. “나 주님(야훼)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21)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선포하며 유다교의 하느님 상을 확장합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아드님을 통해 세상에 내려오시고, 누구보다도 저 삶의 밑바닥에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신 분이시지만 아드님을 통해 인간 곁에 오시며 인간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습니다. 당장 망할 것 같은 세상과 이 순간이 예수님을 통해 해방되고 중심을 잡고 목적을 얻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심오한 그리스도론을 이용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3-4) 믿는 이들과 교회 공동체가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자신 주위만을 맴맴 돌며 다른 이들을 돌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이기심과 선입견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져 다른 이들을 섬기기를 권고합니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돌보는 이는 예수님과 함께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자꾸 넘어지는 우리는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현양 된 예수님과 함께 다시 일어설 힘을 청하며 함께 노래합니다.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8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주님의 기도를 전체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고 오늘날에도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성무일도 아침·저녁 기도와 미사 등 하루에 세 번씩 바칩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및 그와 유사한 시기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마태 6,9-13;루카 11,2-4; 디다케 8,2)가 주님의 기도를 전하며 후대에 삽입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마침 영광송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모두가 사용합니다. 종말론과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후기 유다교는 여러 청원 기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청원을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내용상 그와 유사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로 모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선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넘어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주권자이시면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와 유혹과 악 등 우리의 구차한 삶을 돌보시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의 품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과 관련되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첫 번째 청원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청원에 답하실 때 기도하는 이는 이 거룩함에 사로잡히고 변화됩니다. 두 번째 청원은 하느님이 지니신 임금의 주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나라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곳으로 기대했고(이사 9,6; 32,15-17; 52,7; 60,17)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은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자기 뜻을 억누르거나 윤리적으로 완벽히 행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인 정의와 평화는 기도하는 이가 하느님이 원하신 피조물로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때, 하느님과 함께 자기 뜻을 펼치고 행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네 번째 청원은 유일하게 물질적 선물에 관계되지만,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신뢰, 타인과 함께 나눌 시간 등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을 선물하시고 과거에 대한 미련 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을 온전히 살도록, 영원한 현재인 하느님 앞에서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다섯 번째 청원은 상처받은 삶의 치유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얽히고설킨 자기 삶의 역사 전체의 화해를 청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너그러우심을 청하듯이 자신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른 마음을 드러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이끌어 주십사는 여섯 번째 청원은 일상의 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궁극적 유혹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늘 동행해 주시기를,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기를 청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청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눈감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청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지시어 그분의 품 안에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일곱 가지 청원 중 용서의 청원에서만 인간의 행위가 나타나므로 주님의 기도는 완전히 하느님 중심적인 기도이며 그 안에 그분 안에서 평화로이 숨쉬고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의 여여함이 드러납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신뢰하는 보잘것없는 이들: 루카복음서의 기도

성전에서 시작해서(1,8-10)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끝나는(24,53)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분으로 제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은 기도 자체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시편 22,19)라는 시편 말씀을 예수님의 입에 올리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1,6)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 제시한 루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 드러내며 죽음도 봉헌의 의미로 달리 해석 같은 루카가 저술한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등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을 입에 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스테파노는 그분의 첫 증인입니다. 분명 시편을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은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는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실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루카는 다른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과감하게 달리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부재중에 사람들 멸시를 받으며 처절한 외로움 속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당신에게 죽음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기도 중에 봉헌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기도하시면서 죽으시고 죽으시면서 기도하시는 루카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뛰어난 비유 세 가지를 들려줍니다.(끊임없이 간청하여라: 11,5-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18,1-8;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14) 끊임없는 간청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첫 번째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11,2-4)를 해설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지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께서 비유에서는 친구의 청을 귀찮게 여기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마지못해 그에 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십니다. 비슷한 모습이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그다음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어떤 재판관의 모습과 하느님이 비견됩니다. 과부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재판관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과부가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그에 응합니다. 항구한 신뢰와 용기가 기도에 필요합니다. 과부와 세리가 지닌 용기와 겸손 하느님 향한 따뜻한 신뢰가 핵심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겸손도 필요한데, 이것을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라는 세 번째 비유가 이야기합니다. 성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남다름을 내세우며 장황한 감사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대비됩니다. 과부와 세리, 그들이 지닌 용기와 겸손을 연결하는 것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은 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품는 따뜻한 신뢰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으로 마무리됩니다(18,15~17). 루카는 기도하는 이들이 부모 앞의 어린이들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기도의 골자로 가르칩니다. 우리도 늘 자신의 사정을 하느님께 아뢰고 그분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리시라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그러한 삶에 초대하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2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기도의 길잡이인 마태오(마태 6,5-8; 18,19-20)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산상설교(5~7장)의 한가운데 주님의 기도를(마태 6,9-13) 배치하고 그의 서두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태오는 이렇게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특성을 드러내면서, 당시 유다교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의 기도와 구분을 시도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환경에서 쓰인 디다케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너희의 단식은 위선자들의 단식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한다. 하지만 너희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셨던 것처럼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마라.” 여기서 단식과 기도 등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실천이 사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는 바리사이들이나 디다케가 쓰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달리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행동을 통해서 사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마태오 복음서는 기도를 개인의 것으로 변화시키고 유일하신 분과의 친밀함을 기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를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입에는 오르지만, 마음에는 없는 기도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그런 기도를 오래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식과 같이 그분을 신뢰하는 이만이 하느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몇 사람이 있어야 예배가 성립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많은 토론을 벌였습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남자 10명을 정족수로 여깁니다. 여기에 마태오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중요한 것은 숫자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 또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질입니다.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튼튼한 공동체, 보이지 않게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께 기도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이 바로 기도가 이루어질 정족수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 아니면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것, 아니면 주일에 공동체가 모여 성대히 미사를 거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느님을 푸근한 아버지로 느끼는 이에게는 이 모두가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자신의 소원을 앞세우는 이들에게,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그중 어떤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 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나의 기도에 대한 확신인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인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루카 11,9-10 참조)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모든 기도가 들어질 것처럼 여겨지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경우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내지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등의 성경 본문은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주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루카 11,11-13 참조) 이어지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핵심 본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들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떨치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라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사는 어린이들처럼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6,25-34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1-22; 마르 11,22-24; 루카 17,6 참조) 하지만 기도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빵과 생선을 주되, 돌과 뱀을 주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가 청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또 산을 옮기는 대신 산을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기도할 때는 마치 하느님만이 계신 듯이, 일할 때는 마치 자기만이 있는 듯 행하라!”는, 루터 내지 이냐시오 로욜라로 소급되는 영성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총의 영역에, 활동은 윤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은 각각 고유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자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설명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드릴 때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라는 데레사 성녀의 단순한 기준,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제가 옮길 수 없는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제가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제 자신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또 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혜를 주소서! (어느 수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활동과 기도: 마르코 복음서가 가르치는 기도

기도는 거룩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권력과 부의 상징이 아니라 기도의 장소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함이 기도와 활동을 연결시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2-38)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군중에 휩싸여 계시지만 당신의 활동에 매몰되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는 복음서 끝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에 질려 이 시간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시는 동시에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맡기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지막 활동, 즉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세 가지 힌트를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로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찾는 것이고, 셋째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간결하고 급박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즉각적인 특징을 지니며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활동은 바로 고요함으로 물러감 내지 홀로 하느님과 기도함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마치 생리 과정처럼 숨을 들여 쉼과 내심으로, 묵상과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긴장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각인시켜 왔습니다.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도미니코회의 ‘묵상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 예수회의 ‘활동 안에서의 관상’ 내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 가르멜 영성과 일반 직업 생활을 연결하는 최근 새로운 영성 공동체의 모습 등은 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을 낸다’, ‘충분한 시간’, ‘시간이 가는 것을 잊는다’, ‘시간을 투자한다’, ‘시간표’, ‘시간을 쓴다’, ‘예약 시간’, ‘시간을 희생한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적다’, ‘후회되는 시간’, ‘시간 낭비’, ‘무의미한 시간’, ‘시간을 죽인다’ 등.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반성하게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활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동은 기도를 실제가 되게 하며 기도는 행동을 진리 안에 놓는다.”(에버하르트 베트게: 개신교 신학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친구)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03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시편 22; 마태 27,46)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시편 22편을 읊으셨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침묵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만 기도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에 허무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선 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유다인 회당 안 동편의 기도하는 곳에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라!”는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기도는 자기 영혼에게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질문, 두려움과 의심에서 나오는 하소연과 고발, 침묵과 경청,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타인을 향함, 청원과 신뢰, 더듬으면서 답을 찾아감, 기도가 들어졌음에 대한 확신, 감사와 찬양과 충실함의 맹세 등으로 이루어진 시편 22는 기도가 상대방과 나누는 극적이면서도 참된 대화임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멀리 계신 듯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2,2) 시편 저자는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22,15)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22,22)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놓인 벽에 금이 가고 그것이 허물어지면서 기도하는 이는 갑자기 하느님 앞에 마주 섭니다.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가 실현되고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22,4)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바로 기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아계신,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답하지 않는 죽음의 벽 앞에서 서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마태 27,39-44; 시편 42,4)라는 믿지 않는 이들의 빈정댐,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라는 신앙인의 절규는 침묵하시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기도가 즉각적으로 들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갈고, 하느님이 관대함으로 맷돌을 천천히 돌리신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준엄하게 만회하신다.”(플루타르코스/섹스투스 엠피리쿠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는 말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때가 되면 그분이 개입하실 것이라 희망합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비극을 희극으로 당장 바꾸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혜와 희망의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22,25)라는 구절은 항구히 기도하는 이의 체험을 전해줍니다. 기도하는 이는 자신을 버러지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으로부터 긍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의 먼지를 응시하면서도 모태로부터 자신을 빚어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참회 기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시편 51편, 130편)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위령기도를 바치는 위령성월이 다가옵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하시나이다.”(시 130,1-40: 최민순 역)라는 구성진 위령기도 소리를 들으면 돌아가신 가족과 친지를 떠나보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막막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함께 바치는 위령기도는 경황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줍니다.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 51편과 130편은 죄를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죄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과연 들어 주실까요? 시편은 악인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를 행복한 이로(시편 1편 참조), 죄인을 하느님이 미워하는 이 내지 기도하는 이의 원수로(시편 63,10-12; 139,19-22) 칭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들은 깨끗하고 흠 없는 이들입니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라네.”(시편 15,1-2).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당신께서 제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중에도 캐어 보시며 저를 달구어 보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시편 17,3) 그러므로 반복하여 죄짓는 이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집회 34,31)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은 죄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 기도 반성과 회개, 신뢰로 용서 구하며 하느님과 관계 회복 위해 애써 하지만 참회 시편은 죄를 지음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 중의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의 결백하심에 대비시킵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5-6) 이어서 시편 저자는 변화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로이 만들어 주시길,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 51,12-14) 끝으로 시편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겸손되이 자기 잘못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종합하자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올바르고 정직하거나, 적어도 그렇기를 원해야 한다고, 또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반성과 회개, 그분에 대한 신뢰로 하느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힘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상태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죄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극명한 대비 속에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이 죄스러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에 근거합니다. 이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용서를 구하는 시편 기도가 이 무상함을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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