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을 묻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뉴미디어 홍수 시대에 숏폼 플랫폼은 단 몇 초 만에 다음 또 다음을 클릭하게 할 만큼 인간의 심리를 뚫고 들어왔다. 4차 산업혁명의 과학과 기술들은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에 변화를 주었고, 이제 개인의 영역에까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거대한 물결을 막을 순 없지만 진정 ‘사람이 중심이 되는 변화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우리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교회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성찰하고 인간을 더 깊은 차원으로 본질적인 차원으로 초대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과학 기술이 그 존재와 가치를 대신할 수 없는 창조주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친교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생명, 혼인, 가족… 이 거대한 담론들을 어떻게 새롭게 만나야 할까? 아니 어떻게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다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나는 누구이지?’ ‘너는 누구이지?’를 대면하도록 한다. ‘나’가 ‘나’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진 나/인간,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가진 나/인간,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름다운 나/인간이다. 결국 아름답고 큰 존재로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가 내 안에 있음을, 또 다른 영역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 또한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이 연재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나침반과 지도가 되려고 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교회의 가르침으로 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몸 신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제목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교리서다. 이 교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79년 9월 5일 시작해 1984년 11월 28일까지 5년 동안 129회에 걸쳐 선포된 교회 가르침이다. 교황은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을 하나의 교회로 보고, 교황을 만나러 온 그들에게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을 통해 목자로서 그들을 안내했던 것이다. 전체 129과로 이루어진 이 교리는, 몸의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근거로 둔 인간의 근원과 그 정체성의 특징을 말하는 한처음편(1-23과), 창세기 3장 이후 욕구에 의해 변화된 인간의 시각을 어떻게 회복하는지에 대한 마음의 구원편(24-63과), 육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가이들과의 대화에서 육의 부활편을(64-72과), 구약시대에는 없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편(73-86과) 그리고 혼인과 혼인성을(87-113과), 문헌 「인간 생명」(114-129과)에 관한 주석으로 이루어졌다.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바탕 위에 이 가르침은 펼쳐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가르침을 환영하고, 자신의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얻은 기쁨과 행복으로 주변에 그 영향을 주고 있다. 함께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몸(육-정신-영혼), 사랑(에로스-아가페), 자신과 공동체(개인과 사회)를 규범론과 단일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를, 너를,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과 친교를 더 깊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변화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적, 결의론적 사유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고통 중에도 희망의 기도 드린 토빗

‘교황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1732-1809)은 열성적인 그리스도교인,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이든은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는 작은 기도방이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이 그의 유한한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작은 기도방에서의 기도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이든은 동료 음악가에게 “나는 일에 지치게 될 때 작은 기도실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제 경험으로 이 방법이 성공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하이든의 곡은 특별히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역시 기도 중에 주님을 묵상할 때 무한한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으로 춤추는 악보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처럼 하이든의 곡들은 기도 자체였다. 1808년 그가 작곡한 <천지창조>가 비엔나에서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며 일어나 하이든에게 감격의 박수를 쳤다. 하이든은 “내가 아닙니다. 이 음악은 하느님에게 나온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말했다. 토빗기는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 시대에 티스베에서 포로로 끌려간 토빗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토빗 1,2 참조) 토빗은 살만에세르 시대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궁궐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관리였다. 이후 살만에세르가 죽고 그 아들 산헤립이 왕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비참하게 죽은 이스라엘 사람의 장례를 지내다 임금의 눈 밖에 나 벗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토빗은 낮잠을 자다가 불행하게도 새의 배설물에 의해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나가던 토빗은 자신의 어려운 생활을 하소연하는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다. 기도를 들은 하느님은 라파엘 천사를 보내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토빗의 이야기는 사실 유배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토빗기의 주제는 하느님의 섭리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있다. 보통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결과를 연결시킨다. 토빗서는 유배 시대, 특히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 신앙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준다. 토빗은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한 동포들의 운명도 예언자들의 빛으로 해석한다. 토빗은 때가 되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으로 재건되리라는 밝은 희망을 선포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도 기도로 장식된다.(토빗 13장 참조) 포로 생활과 나그네 살이라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안고 미래를 향하면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행복에 이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기도하는 토빗의 모습은 유배지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 중에 있는 기도하는 이의 전형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01

[말씀묵상]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24년의 마지막인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며,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삶의 터전인 가정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성가정의 모범은 축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이루신 가정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구세주인 예수님과 성인들이 그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성가정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자라고 삶의 경험이 쌓이자, 이분들의 가정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는 자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슴 아픈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이분들의 가정이 성가정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알린 하느님의 초대를 처음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가졌지만, 결국 “예”라는 응답으로 하느님 뜻을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응답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알아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나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대임에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배운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으로의 초대를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용기 있는 응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아버지 요셉의 응답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약혼녀의 임신 소식에 너무도 마음이 상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는 인내심을 보였던 요셉에게 하느님은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와 함께 가정을 이루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대를 하십니다. 요셉 성인이 이러한 쉽지 않은 초대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착한 성품 때문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부부 관계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함에 있어 부모가 끼치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성장에도 마리아와 요셉 두 분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면서도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한 인간으로서 성장의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춘 어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작고 약한 어린아이로 오셔서, 하느님의 총애뿐 아니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인생에서 겪어야 할 것을 겪으며 성장하셨습니다. 그 여정을 함께 한 이들이 바로 가정 공동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신뢰하며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부모의 깊은 신뢰 속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 날로 지혜와 키가 성장했을 것입니다.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며 따듯하게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자녀 역시 부모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을 키우신 마리아와 요셉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은 줍니다. 많은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기대를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살아갈 때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모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여정을 통해 성화 됩니다. 자녀 역시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자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 동안 부모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헌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녀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부모님께 순종했다는 구절은 단순히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성장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의 모형이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성가정은 단순히 서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그 뜻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되고 구체화되는 자리이며, 세상 속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여정입니다. 이번 ‘가정 성화 주간’ 동안, 우리 가정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가정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2025-01-01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연재를 시작하며 - 사막 교부란

신문사로부터 올해부터 격주로 사막 교부의 삶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우리와는 너무도 먼 4세기 이집트 사막이었다. 이렇듯 큰 시공의 차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심지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욕망과 싸우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치열한 삶, 그 삶이 가르치는 지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가 되었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란 주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이다. 그에 앞서 이번 첫 회에서는 먼저 사막 교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막 교부 어떤 이에게는 ‘사막 교부’(Desert Father)란 표현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 교부라고 말할 때, 엄밀한 의미로 4세기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의 사막에서 생활했던 유명한 독수도승을 일컫는다. 초세기 교회에서 ‘교부’는 본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성립되는 부자 관계를 적용한 데서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놓고 교회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준 분을 교회 교부(Church Father)라고 칭한다. 한편 실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수도승 생활의 토대를 놓은 거룩하고 위대한 수도승은 수도승 교부(Monastic Father)라고 불린다. 사막 교부는 수도승 교부에 속하며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의 시조라 하겠다. 4세기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던 그리스도인들 안에 점차 새로운 영적 부성(父性)이 생겨났다. 이 영적 부성은 더 이상 교회 안의 공적인 기능과 교계제도에 연결되지 않고 ‘지혜’(분별력)와 ‘말씀의 특별한 은사’에 연결되었다. 이 은사를 얻은 사람만이 남을 지도하는 영적 사부가 될 수 있었다.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은 자기 압바(Abba, 영적 사부인 원로)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따라서 독수도승을 지도하는 원로를 ‘사막 교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막으로 간 이유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자 악령들의 본거지였다. 또한 온갖 유혹과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장소,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였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자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한 가지 필요한 일’, 곧 ‘하느님 찾는 일’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소음과 동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깊은 고독과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하고 근본적인 포기와 물러남은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더 잘 응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막에서 새로운 박해자 악령들과의 치열한 싸움과 엄격한 금욕생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 자체가 자신을 포기하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순교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수도승 생활을 순교의 지속이라 하였고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도 했다. 그들의 삶이 중요한 이유 사막 교부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사막 교부들은 복음을 더 철저히 살려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 삶의 심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수도승 생활과 영성의 뿌리와도 같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을 충만히 실현하는 삶의 한 양식이며, 수도승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막 교부의 모범적인 삶과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사막 교부의 삶과 그들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그들의 외적 삶의 모습이나 방식을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오늘 우리를 위한, 나를 위한 어떤 가치와 정신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가치다. 구체적 삶의 양식은 그것을 담는 외적인 그릇에 불과하다. 외적인 틀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금언을 통해서 우리는 온갖 인간적 욕정과 악습에 맞선 치열한 싸움, 인간의 나약함, 하느님의 자비.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 신앙과 희망 등 우리 삶을 위한 지혜로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여전히 영적 사부인가? 사막 교부의 영웅적인 삶과 성덕은 당시 수많은 사람을 사막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벌이 향기를 맡고 꽃을 찾듯 수도승들의 거룩한 삶과 성덕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그들은 구원에 필요한 한 말씀을 듣기 위해 유명한 원로들을 찾아갔다.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사막의 원로를 찾아간 이들의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적 스승, 영적 사부를 갈구한다. 우리에게는 가시적인 모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려 노력했던 참 신앙인의 모범이 필요하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에 나타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승의 인격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이자 영적 사부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제자가 스승에게 다가가듯 그들에게 다가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의 지혜를 청해보자. “압바,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기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참조할만한 자료를 소개한다. 「수도 영성의 기원」(분도출판사, 2015), 「사막 교부들의 금언」(분도출판사, 2017), 「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분도출판사, 2006), 「담화집(제1-13담화)」(분도출판사, 2022), 「담화집(제14-24담화)」(분도출판사, 2023), 「천국의 사다리」(분도출판사, 2020),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1995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립 로마 성안셀모대학교 수도승 연구소에서 수도승 신학을 전공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성 베네딕도회 사막수도원에서 3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원장, 분도출판사 사장,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 등을 거쳤다. 「수도 영성의 기원」, 「천국의 사다리」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2025-01-01

[말씀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의 시작은 축복과 결심과 변화를 위한 때입니다. 그중에서도 축복은 우리가 다른 이에게 해주는 것으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면서 또한 그가 어떤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좋은 축복은 결심과 변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축복을 할지가 중요합니다. 세태를 따르는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와 같은 축복의 인사는 그 사람의 새해가 물질과 이득을 따라 매진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하는, 그다지 신앙인답지는 못한 인사가 아닐지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제가 백성을 축복할 때 사용하도록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문장은 두 가지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리고 뒤의 두 문장은 그것들을 다시 설명해 줍니다. 다음 문장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다음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평화’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여건입니다. 생명의 위협, 시기와 질투, 사회 모순과 혼란으로 나 자신과 이 세상이 평화 속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는 모든 복의 전제 조건이며, 그 완성입니다. 이 축복에는 두 번 다 하느님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감당할 수가 없어 구약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이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축복은 말 그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탄으로, 아버지가 아드님을 내어주시고 아들은 여인에게서 탄생하시어 온전한 인간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이 축복이 실현됩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는 주님이 성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에게 얼굴을 들어 보이시는 주님은 복음 속에서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자비로이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우리에게도 큰 응답 요구 성모님의 모범 기억하며 하느님 뜻 따라 걸어가길 그러면 우리는 그 평화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택배 기사처럼 잘 포장된 평화를 건네주고 휙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초대와 응답, 그리고 친교와 일치의 과정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우리에게도 큰 응답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이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은 헛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과 머물며, 그분께 배워서 그분의 길을 함께 걷습니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합니다. 평화는 선물이지만 그저 받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완성해 가는 구원 역사 자체입니다. 복음에서 목자들을 비롯한 성모님과 성 요셉, 예수님은 모두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한없이 무력하고 무고한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표징입니다. 그분은 천사의 찬양을 받으시는 세상의 구원자입니다.(루카 2,8-14 참조) 목자들이 전한 이 소식에 모두가 놀라워하지만, 경탄은 순간적인 느낌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 놀라운 사명을 곰곰이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어주셨던 주님을 이제 가슴에 품으시고, 그분과 함께 걸어갈 내일의 사명까지 마음에 품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서 주님과 함께 앞장서 걸으실 준비를 마치신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어떻게 기도하고 축복하고 결심하고 살아야 할지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눈을 감고 침묵 중에 곰곰이 새겨봅시다. 두려움도 경탄도 분노나 슬픔도 근심 걱정도 잠시 가라앉히고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을, 그리고 부족하기만 한 우리를 모아 주시어 구원의 길, 평화의 길, 희망의 길을 함께 걷도록 불러주신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주님께 드립시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땅에서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이가 주님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2025-01-01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상

신악성경의 마지막인 ‘요한묵시록’을 1장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며 묵상하는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와 함께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지금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성찰해 본다.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상상’(想像)이란 단어에 집착한다. 실제로 요한묵시록은 ‘상상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Ιησοῦ Χριστοῦ)는 미래에 펼쳐질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다. 예전부터 유다 사회 안에 켜켜이 쌓여 온 신앙의 흔적들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예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어낸 게 요한묵시록이다. 요한묵시록이 적혀진 시절(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들었고 알고, 그래서 믿고 있던 터였다. 그분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싶어 요한묵시록을 쓰고 읽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고 이 삶을, 이토록 애틋하나 힘겨운 삶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갈까 ‘상상’하며 쓰고 읽고 간직한 게 요한묵시록이다. 대개 요한묵시록을 공부한, 혹은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주석서들을 찾기 마련이다. 주석서에 기록된 내용들의 대부분은 문법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열거, 또 아니면 구약 이곳저곳에 요한묵시록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를테면, 글의 ‘지시적 기능’에 충실한 것이 요한묵시록을 바라보는 주석서들의 흔한 경향성이다. 이 단어는 원래 이런 뜻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 상징은 이렇게 읽혔다 등등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요한묵시록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고, 대개의 신앙인 역시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이 지시하는(가리키는) 사건이나 사람, 혹은 실제 상황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게 사실이다. 그런 주석서의 내용들은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쓰고자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대해 간과할 수 없고 당연히 설명해야 하겠지만,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징과 표현들을 적어 내려가야만 했던 요한묵시록의 공시적(共時的) ‘의도’에 있다. 이 ‘의도’는 한 시대, 한 시절의 이야기로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많은 역사서들을 읽어나갈 때,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넘어 지금 우리 삶에 어떤 교훈이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지 우리는 묻게 된다. 요한묵시록도 마찬가지다.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한묵시록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2000년 전 그들만이 아닌, 지금의 우리, 미래의 암묵적 독자들에게까지 열려 있다. 2000년 전 글인 요한묵시록이 당시 어떤 의미로 읽혔다는 주석적 분석은 필요한 것이나 지금과 미래의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꽤나 진부하고 게으른 일이 될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께서 말씀하셨듯 ‘성경은 읽는 이와 자라는’ 역동적인 생물체고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독자를 만나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놓는 모든 글의 본성이자 운명이다. 오늘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매몰된 주석서에 의존한 성경 읽기는 수많은 신앙인,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독자들의 다양한 읽기 앞에 필자 자신의 한계성과 편협함을 반성하는 게 옳다. 우리는 끝없이 요한묵시록을 읽을 것이고 그 읽기의 결과는 전혀 기대치 않은 신앙의 다양한 결과물들로 쏟아질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글의 문자적 의미와 지시적 의미에 치중한 ‘주석’의 작업 너머 오늘날 우리에게 이 상징과 표현들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고,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 것인지 캐묻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요한묵시록은 이 상징과 표현들을 통해 왜 이렇게 상상했을까’ 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사회적 사유와 묵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한묵시록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고민하는 것은 지난 시대에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흔적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님을 묻고 또 물어 얻어낸 것이 갈릴래아의 지형과 그분이 실제 하신 말씀, 혹은 그분의 연대기적 활동 흐름 정도라면, 요한묵시록을 해석해서 얻어낸 것은 천상과 지상, 태초와 종말의 시공간적 연대 안에 ‘어린양’으로서 늘 함께하시는 초월적 존재의 예수님이다. 역사의 예수님을 좇아가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요한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들 안에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고 해석해서 얻어 낸 결과가 요한묵시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읽어나갈 요한묵시록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도대체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는 요한묵시록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내일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읽혀져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요한묵시록은 어떻게 우리에게 행복을 전해주는가?” 요한묵시록에 “행복하여라”라고 하는 말마디는 총 일곱 번 나온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묵시문학적 가치는 ‘완전함, 풍성함’ 정도로 해석되는데, 요한묵시록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완전하고 풍성한 ‘행복’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다. 필자는 가톨릭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동안 이 두 질문에 계속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을 통해 물을 것이고 그 물음의 답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행복한 삶으로 전해질 것인가 또한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이 또 다른 우리 삶을 ‘상상’하는 신앙의 기폭제이자 신앙의 사회학적 전망이 되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을 통해 간절한 기다림과 설렘으로 당신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요한묵시록의 끝이 이렇게 끝나는 건, 바로 상상의 자유로움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아닐까. 이미 오셨지만, 아직 오셔야만 한다는 예수님은 그분을 이미 만났으나 아직 기다리는 우리 삶을 그분에 대한 상상과 해석의 풍요로움으로 가꾸길 나가길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25-01-01

희년 맞이, 교회가 말하는 ‘희망’은?

2025년 희년의 표어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다. 이 세상이라는 여정 속 순례자인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미국 신학자 M. 그리핀 신부는 논문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의 빛이 맹렬히 타고 있는 한,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에 필수적이며 올 한 해 특히 강조되는 ‘희망’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희망은 구원으로 가는 열쇠다. 전 가톨릭대학교 교수 박일 신부(알렉산데르·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는 논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신앙, 희망, 사랑」에서 “희망은 우리 영혼의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도우심에 확고히 신뢰를 두게 한다”고 설명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항에서 “희망하는 이는 새 생명의 선물을 받는다”고 밝혔다. 향주덕 중 하나인 희망은 영원한 것이다. 성경은 희망이 믿음, 사랑처럼 계속되기에(1코린 13,13 참조),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전한다.(로마 5,5 참조) 인내와 수양이라는 바른 기다림의 자세로(로마 5,4 참조) 복된 희망을 품고 간구하는 자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기는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핀 신부는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최후에 가서 실패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노력은 어렵다”면서 “왜냐하면 그 노력의 결과는 볼 수 있는 월계관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희망을 찾는 방법으로 우선 기도가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척도요 넓이”라고 했다. 독일 윤리신학자 베른하르트 헤링 신부는 “기도만큼 우리 희망을 강하고 굳세게 하는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2항에서 “희망을 배우는 첫 번째 중요한 자리는 기도”라고 설명했다. 또한 고통을 통해 희망할 수 있다. 프랑스 신학자 J. 뒤퐁은 저서 「성서 어휘 사전-희망」에서 “교회의 희망은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기쁨에 차 있다”고 밝혔으며,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9항에서 “모든 고통에는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위로가 있으며, 그래서 희망의 별이 떠오른다”고 전했다. 아울러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희망해야 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이라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이 구원받고 그들에게도 희망의 별이 떠오르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야 한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48항)고 덧붙였다. 박일 신부도 “희망하고 있는 사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용기를 소생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2025-01-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희망 준 유딧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을 꾸려 가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체험한다. 디즈레일리(1804~1881)는 영국의 수상으로 유다인의 집안에 태어났다. 영국의 영토를 넓히고, 정당제에 의한 의회 정치를 실현했던 인물이라 존경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영리하고 재주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개인보다 그의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는 유다인에 대한 나쁜 편견이 존재했는데, 그는 유다인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자만 영국 사회는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디즈레일리는 소설가가 되었고 차별이 비교적 적은 예술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진정한 영국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드디어 정치가로 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주는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닥쳤을 때 굴복하지 말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실패에도 계속 반성과 사색을 통해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귀한 메시지를 남겼다. 누구나 삶에서 고통을 겪지만 이를 반성의 계기와 자기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유딧기는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유딧기는 토빗기의 경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딧기에는 유딧이라는 과부가 전쟁 중에 홀로 적진에 가서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시리아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는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이스라엘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당시 우찌야 왕은 닷새 동안만 기도하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항복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이때 유딧이 등장해 위기에 빠진 유다인들을 구해냈다. 유딧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과부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 경건하게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와 지혜와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찌야의 주장을 반대했는데 이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홀로 적진으로 향했다. 빼어난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유딧은 술에 취해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죽인 후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장을 잃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유딧은 과거와 달리 고통을 우상숭배나 죄악의 결과라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시는 배려와 자애라고 해석했다. 유딧이란 인물은 많은 박해를 당하고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25

[말씀묵상]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는 ‘로고스 찬가’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특별히 1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밤미사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과 그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알려주었다면(루카 2,1-14), 낮미사에서는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정체, 곧 다윗 고을에서 태어난 구원자(루카 2,11-12 참조)에 대해 찬가의 형식에 맞추어 신학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강론지침」 115항 참조) 요한복음 1장 14절을 원문에 따라 직역한다면, 그 표현은 조금 달라집니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에 장막을 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먼저 ‘살’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사륵스’는 ‘살’ 혹은 ‘육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말씀의 육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하였고, 이를 통해 신성을 지니신 분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표현은 “장막을 치셨다”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스케노오’는 ‘머물다’ 혹은 ‘거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어 명사 ‘스케네’와의 어원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막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이자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장막 안에 현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탈출 25,8-9; 40,34; 1열왕 8,10-11.27 참조). 말씀이 살을 취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육신은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이 머무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살을 취하신 말씀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동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개념적 혹은 사변적 대상이 아닙니다. 로고스 찬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실제적이며 역사적 사건으로 알려주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그분의 신원과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곧 ‘말씀’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세상 창조에 참여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1,1-4 참조)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 특별히 1장 14절에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며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요한 1,1-2), 당신이 소유하였던 부유함을 포기하시고 가난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천상의 권한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힘없고 나약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요한 1,14 참조)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이가 되시어 초라한 구유에 머무르고자 하십니다.(루카 2,7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풍요로움’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하며, 이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낮미사 본기도) 10여 년 전 유학 중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순례 일정 중에 베들레헴을 찾아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념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헬레나 성녀의 관심과 주도 아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라고 전해지는 동굴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의 구조 중에서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 있었는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굉장히 좁고 작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몸을 낮추지 않고서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작은 이’, 곧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적 가난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고, 나눔을 통해 실현할 수 있습니다. 가난의 상대 개념은 ‘부’(富)가 아니라, 재물이나 물건에 집착하여 놓지 못하는 ‘탐’(貪)입니다. ‘부’(富)를 나눈다면, 풍요와 충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갈등과 분열은 부유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인색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소유한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을 직접 살아갈 때, 그 곳에서 살을 취하신, 곧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2-25

[말씀묵상] 대림 제4주일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사이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배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어머니의 만남이 두 개의 탄생 이야기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불임이자 가임기를 훨씬 넘긴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입니다. 이렇게 두 어머니 모두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신적인 개입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점이 닮았습니다. 루카복음은 두 개의 탄생 이야기를 다루며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요셉도 즈카르야도, 그저 조연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제 즈카르야의 불신앙을 그려내는 한편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찬 인물로 나타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믿음의 여인으로 그려냅니다. 사실 성경은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유일한 단서는 ‘마리아’라는 이름뿐입니다. 성경은 그녀의 신원이나 외적 정보에 관하여서는 침묵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들려주며 그녀가 지닌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전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순명’을 강조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요셉의 ‘순명’을 강조한 것과 달리 루카는 마리아의 ‘순명’하는 모습을 더욱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상대도 요셉이 아닌 마리아입니다. 중심이란 단어와는 멀리 떨어진 주변의 존재들이 탄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성 예언자이자 모세의 누이인 미르얌과 이름이 같습니다. 이 사실이 그녀의 신원과 소명에 대해 어렴풋이 보여줍니다. 마리아 역시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로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분임을 절묘하게 엮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향합니다. 자신과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바로 행동하는 그녀의 반응이 ‘서둘러’라는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생명,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쁜 소식은 땅에서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선포는 목동들의 반응을 일으켰고, 마리아를 행동케 하였습니다.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으로 간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습니다. 엘리사벳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녀의 잉태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성령의 충만함에 가득 찬 엘리사벳이 찬송합니다. 선구자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복되다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서 노래하는 첫 번째 인물은 바로 엘리사벳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마리아가 ‘모든 세대에 걸쳐 복되다고 일컬어질 분’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의 인사말은 두 번의 ‘복되다’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복되시고, 두 번째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복되다고 칭송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라는 엘리사벳의 인사말이 마음에 깊이 박힙니다. 이 말은 30년 후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강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세례자 요한은 묻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의 찬양이 공명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두 가지 신비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기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벳의 이중 축복 선언은 마리아와 그녀가 품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건넨 첫 번째 인사말인 ‘모든 여인들 가운데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는 성모송의 뒷부분에 자리 잡아 교회와 우리 모두의 인사말이 되어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두 믿음의 거장,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는 환희와 벅참이 가득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의 모든 만남에 구세주를 모셔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성모님은 오늘도 삶의 중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모시고 다가오십니다. 이제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가 우리의 노래여야 하겠습니다. 복되어라, 믿으신 분! 복되어라, 구세주를 품고 오시는 분!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징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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