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로 살면서 신자들을 위해 좋은 마음을 담은 축복의 기도를 해주는 삶을 살다가 누군가로부터 아니, 그것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축복의 기도를 받을 때의 느낌은 조금 남달랐습니다. 사실 처음 만난 분에게 안수를 통한 ‘정화’를 받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진심이 담긴 축복의 기도’를 그분이 저를 위해 해주었다는 생각이 마음을 충만케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렇게 정화, 즉 축복의 기도를 받자마자 자매님이 먼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신부님을 정화하는 동안 신부님 내면의 타인을 즐겁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그러한 기운이 제게 들어온 것 같아 오히려 제가 더 큰 정화를 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축복의 기도를 하는 동안 행복한 마음이 전해졌어요.”
제가 “아니, 나 같은 인간 정화 좀 잘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자매님이 내 기운을 다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해요?”하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더니, 그분은 미소로 응답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정화라는 것을 받는 동안 전해지는 편안함!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제 안에 맑은 기운들이 감돌아 제 마음속 나쁜 성향의 기운들이 내면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도원에 돌아오는 동안에도 계속 느껴지는 평온함, 정말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곧 필리핀으로 파견될 준비를 하는 후배 형제가 식사 중인 제게 농담 같은 말투로 ‘오늘 따라 강 신부님이 끓여주는 라면이 먹고 싶다’며, 라면을 좀 끓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야단을 치면서, ‘어디 이 녀석이! 먹고 싶으면 네가 가서 끓여 먹어’하고 소리 쳤을 텐데, 그날 따라 저는 아침밥을 먹다 말고 그 형제를 쳐다보면서 뭔가에 홀린 듯 ‘그래, 내가 끓여줄게, 몇 개 끓일까?’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제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놀랐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같이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해서 저는 식사를 하다말고 주방에 들어가서 라면 네 개를 맛있게 끓여 식탁에 올려놓고 ‘맛있게 먹어라’고 말한 후, 다시 식탁에 앉아 아침식사를 마저 끝냈습니다.
그런데 하나 달라진 것은 예전의 저는 타인에게 뭔가 좋은 일을 했다 생각되면, 반드시 생색을 내고자 했습니다. 어떠한 생색이냐 하면, 예를 들어 제가 끓인 라면을 형제들이 먹을 때 은근히 제가 끓인 라면이 유난히 맛있다는 그러한 말을 해주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따라 그 어떠한 생색도 없이 아침식사를 끝냈고, 주방 설거지까지 한 후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더니 머릿속에 영적인 문장이 한줄 떠올랐습니다. ‘나의 아침은 형제를 위해 있다.’ 예전에는 저의 하루가 오로지 저에게 집중돼 있었기에, 저의 아침은 당연히 수도원을 위해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저만을 위해 있다고 생각했기에, 예민해 있었지만 ‘나의 아침은 형제들을 위해 있다’는 생각은 마치 영적 깨달음을 얻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