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세교회
초국가적 권위로서 교황직 재조명
종교개혁이라는 대혁명 속에서 교황들은 교회 개혁에 착수한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년)를 통해 이단을 배격하고 교회 생활의 전 분야를 혁신하는 조처를 취했다. 성 비오 5세(1566~1572년),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년), 식스토 5세 교황(1585~1590년) 등이 트리엔트공의회 결정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로마에 포교성성을 설립(1622년), 포교 사업을 지휘하는 등 선교 수도회들이 극동 선교에 적극 나선 때다. 17~18세기 프랑스와 독일에 국수주의적 교회관이 생겨 갈리아주의 등 소위 정교 분리 사상이 일어난 때로도 기록된다. 또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승리는 전반적인 교황권 실추를 초래했다고 교회사가들은 밝힌다. 이 때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로 끌려가 죽음을 맞아야 했던 비오 6세 교황(1775~1799년)과 후임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의 용기는 교황직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비오 6세 교황은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점령한 후 수장에서 물러나게 됐고 프랑스 발랑스로 이송, 그곳 성채에서 죄수 신분으로 죽음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사람들은 교황직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남긴 ‘비상시 차기 교황 선거 지침’에 따라 교황에 선출된 비오 7세 역시 나폴레옹에 의해 억류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비오 7세 교황은 바티칸 복귀 후 포교성성의 재설립 등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했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초국가적 권위로서 교황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했던 교황령(756~1870년)은 영토 대부분이 1860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고, 1870년에 로마 지역과 함께 나머지 다른 지역도 거의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됐다. 근 천년을 유지해 오던 교황 영토가 합쳐짐으로써 교황의 속권(俗權)은 사라지게 됐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5~1870년)에서는 ‘파스토르 애테르누스’(Pastor aeternus·영원한 사목자)가 발표됨으로써 “교황이 신앙과 도덕으로 내린 공식적 정의는 교회의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능력의 산물이므로 ‘무류적’”이라는 입장이 선언됐다. 이는 교황직에 대한 수세기 동안의 교의적 발전을 완료하고 공의회 결의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공의회주의자들의 해석을 무너트렸다.
한편 과학만능주의와 유물론 등의 성행으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교회를 벗어나고 있던 시대 상황 속에서 교황들은 당면한 사회 문제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교회 내에서도 개혁을 추진했다. 사유재산 뿐 아니라 공정한 임금,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을 지지했던 레오 13세 교황(1878~1903년)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발표를 비롯해 ‘교회음악 개혁’, ‘미사경본 수정’ 등으로 현대 전례운동의 개척자로 인정받는 성 비오 10세 교황(1903~1914년)의 역할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