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아멘’을 빼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하고,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사랑(아하바)과 아멘(아멘)은 히브리어로 모두 알레프로 시작한다. 아하바(사랑)와 아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상의 소박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가르침으로 이끌린다.
■ 가정에서 태어난 사랑
아하바는 본디 식구들 사이에서 체험되는 것이었다. 창세기의 이사악과 레베카 이야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은 서로 사랑하였고(창세 24,67), 그 결과 쌍둥이를 낳아 사랑하여 길렀다(창세 25,28). 이렇게 남녀가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에서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은 피붙이를 넘어서는 말이었다. 이스라엘인 종은 7년째 자유를 얻는다는 율법이 있다(탈출 21,2; 신명 15,12). 하느님 백성에 영원한 차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이 주인을 ‘사랑하여’ 주인과 영원히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탈출 21,5; 신명 15,16). 그런데 종이 주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스스로 ‘영원한 을’의 입장을 선택하는 일이 가능할까?
인간적 현실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거친 환경을 헤치고 살던 고대 사회에서는, 인간적인 주인의 집에 사는 것이 종의 가족 입장에서 더 나을 수 있었다. 믿음과 인격이 뛰어난 주인이 종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 잘 사는 길을 성경은 배제하지 않는다. 이 규정을 잘 읽어보면, 최종 결정권이 주인이 아니라 종에게 있다. 사랑은 작고 약한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만 참된 것이다.
■ 정의를 사랑하다
특이하게도 시편에는 ‘정의를 사랑하다’는 표현이 거듭되는데(시편 33,5; 37,28), ‘정의’라는 목적어에 하필 ‘사랑하다’는 동사가 결합된 것이 눈길을 끈다. 이 표현은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십니다.”(「자비의 얼굴」, 21항)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교황님은 정의는 매우 중요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만, ‘정의만’을 추구하다 보면 편협하게 되기 쉽다는 ‘정의의 속성’을 지적하셨다. 이미 성경은 ‘정의를 실현하다’가 아니라 ‘정의를 사랑하다’는 표현으로 사랑과 자비가 정의와 늘 함께 해야 할 가치임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