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과 금
자하브(금)보다 케세프(은)가 더 오래되고 귀한 것이었다. 은이 금보다 얻기도 쉽고 가공하기도 쉽기 때문에 훨씬 먼저 쓰였고, 일찌감치 귀금속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대 이스라엘보다 2000년 이상 오래된 수메르 문명부터 케세프(은)는 화폐의 역할을 했다. 기원전 19세기 함무라비 법전도 벌금은 모두 케세프로 지급하라고 명시한다. 자하브(금)가 부의 상징으로서 케세프(은)를 제친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로 쓴 구절이 ‘자하브와 케세프(금과 은)’로 쓴 구절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본다. 실제로 우리말 성경을 검색하면, ‘은과 금’(51회)이 ‘금과 은’(22회) 보다 2배 이상 자주 나온다. 한마디로 성경은 ‘금과 은’ 보다 ‘은과 금’이라는 표현에 더 익숙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고대의 언어 습관을 우리에게 전하는 책이기도 하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이런 고대의 관습을 일부 눈치챘으리라.
‘은과 금’으로 쓰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인용한 아브람 이야기에서는 줄곧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라고 쓰였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모세도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로 만든 혐오스러운 것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신명 29,17)
이민족과 전쟁을 벌여서 전리품을 얻거든, 절대 사유화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얻은 재물을 하느님께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따라 여호수아는 전리품을 얻으면, 모든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를 하느님께 바쳤다.(여호 6,19.24; 22,8) 다윗 임금도 “그가 정복한 모든 민족들에게서 거둔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를 주님께 바쳤다.(2사무 8,11) 그의 아들 솔로몬도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와 기물들을 가져다가 주님의 집 창고에 넣어 두었다.”(1열왕 7,51) 이런 언어습관은 유배 이후에도 이어져 에즈라는 온 백성에게 주님의 집을 재건하기 위해 ‘케세프와 자하브(은과 금)’를 후원하라고 독려했다.(에즈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