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 유학 마치고 돌아가는 남수단 산티노 뎅씨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7-03-07 수정일 2017-03-08 발행일 2017-03-12 제 303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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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크란 바바! “고국에 새 희망 건설하며 받은 사랑에 보답할게요”
이태석 신부와 인연으로 한국행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나눔과 사랑’ 의미 몸소 배워
남수단 미래 위한 헌신 다짐

산티노 뎅(오른쪽에서 두 번째)씨가 유학 올 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대전교구 박진홍 신부(가운데)의 사제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감사’보다 더 큰 말은 없을까요?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6년, 쉽지 않았던 한국 유학을 마치고 남수단으로 돌아가는 산티노 뎅(31)씨. ‘감사’보다 더 큰 말이 없다면서 같은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2월 24일 충남대 국제문화회관 정심화홀에서 졸업식이 열렸다. 드디어 대학을 졸업했다. 언어, 문화, 풍습도 다르지만 한국은 이태석 신부의 땅이었다.

“만약 수단에 계속 있었다면 군인이 되었겠지요. 나라가 온통 전쟁터니까요. 신부님께서 저를 여기까지 끌어주신 셈이지요. 슈크란 바바.”

‘슈크란 바바’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남수단 말이다. 3월 15일 남수단으로 돌아가는 산티노씨를 대전교구 박진홍 신부(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 주임) 사제관에서 만났다. 2006년 이태석 신부와 톤즈에서 한 달간 함께 생활했던 박 신부는 산티노와 친구들이 유학 올 때부터 세심한 배려로 이들을 돌봐왔다.

■ ‘혼밥’이 가장 힘들어

산티노가 한국에 온 것은 2011년. 고(故) 이태석 신부의 뜻을 이어가는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오이화)의 지원 덕분이었다. 우선 서강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여주대 토목과에 입학했다. 2015년엔 충남대로 편입했다.

유학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2013년 여주대에서 열린 ‘스토리텔링 100초의 품격’에서 한국 학생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산티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지난 5월에 학과 대표로 계주를 해서 1등을 했습니다.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스토리텔링 100초의 품격’에서 1등을 하고 나서 자신감이 더해졌다. “그래도 학과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며 웃는 산티노씨. 그의 가장 큰 재산은 ‘사람들’이다.

“학기 중에는 친구들과 있어서 힘 안 들어요. 방학이 되면 다 가족들한테로 가서 혼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혼밥’(혼자서 밥 먹기)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옆에 있는 캄보디아 친구와 끊임없이 눈길과 장난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한국 생활은 따뜻했다. 한국은 이태석 신부의 나라였고, 방학 때마다 신세를 졌던 살레시오 수도회, 박진홍 신부를 비롯한 대전교구 신부님들과 친구들, 그리고 유학 내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수단어린이장학회 회원들, 모두가 그에게 나눔과 사랑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산티노(오른쪽)와 유학생 친구들은 매년 이태석 신부의 묘지를 찾아 그가 남긴 사랑을 되새긴다.

■ 이태석 신부와 함께

이태석 신부와의 첫 만남은 ‘의아함’이었다.

“잘 생기고 재능 많은 분이 왜 이 빈곤한 전쟁통 나라에서 고생을 하실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압니다. ‘사랑’밖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 산티노씨는 성가 소리에 이끌려 성당에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세례도 받았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호흡 곤란을 겪으면서 이태석 신부에게 치료를 받았다. 이 신부를 만난 후 아버지는 산티노씨에게 “톤즈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했다.

2007년, 톤즈에서는 콜레라가 유행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진료소에 환자들이 넘쳤지만 돌볼 손이 없었다. 이태석 신부 제안으로 진료소에 머물기 시작했다. 2명이 교대하면서 밤낮없이 진료소를 지켰고, 한밤중에도 아픈 사람이 오면 뛰어가 이 신부를 깨웠다.

“콜레라 무서워요. 정말 무서웠지만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돼’라는 신부님 말씀을 믿었지요.”

때를 놓쳐 치료할 수 없는 사람을 둘러싸고 가족들이 슬퍼했다. 아픈 가슴 저 깊숙한 곳,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결심이 자리 잡았다. 그 후 이태석 신부는 산티노씨와 친구들 곁을 떠나갔다. 남의 병을 치료하다가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하고. 하지만 산티노씨는 해마다 친구들과 함께 이태석 신부의 묘지를 찾는다. 그와 함께 쌓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가 전해준 신앙 또한 꿋꿋이 지켜나갈 뜻을 다진다.

산티노씨는 아버지 넷째 부인의 외아들이다. 남수단은 일부다처제 사회다. 아직도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소(牛)를 지참금으로 여성을 주고받는 일종의 거래다. 게다가 산티노씨의 나이면 남수단에서는 거의 ‘노인’ 취급을 받는다. 평균 수명이 워낙 짧아서다. 산티노씨는 아버지와 달리 일부다처제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꼭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결혼해 그리스도교적인 ‘성가정’을 꾸릴 계획이다.

“수단의 전통문화와 관습들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가톨릭 신자로서 제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 남수단의 미래, 사람을 키워야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다 나쁩니다.”

남수단의 정치인들에 대해 물어보니 버럭 화를 낸다.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합니다. 끝없는 전쟁의 원인입니다. ‘안전할까?’ 하는 걱정 없이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남수단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다.

“배고픈 사람과 먹을 것을 나누고,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싸움 말리는 것,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학교입니다. 국민 75%가 문맹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꿈은 교육이다. 대학에서 토목학을 가르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를 해야 할 필요도 있다. 고등학교 교사도 좋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 줄 인재들을 키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1년간은 남수단 100개 학교 짓기 프로젝트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다. 이 프로젝트는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원선오 신부(본명 도나티 빈센트·87)와 공 고미노 수사(본명 코미노 쟈코모·76)가 2012년부터 남수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육 인프라 건설 계획이다.

아직 미래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받은 만큼, 더 많이 사랑을 나누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다. 이미 넘치게 사랑을 받았기에.

산티노는 다시 말한다.

“슈크란 바바!!!”

이태석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산티노씨. 그는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 있을 때 그를 도와 진료소를 지켰다. 수단어린이장학회 제공

■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이태석 신부와 함께 설립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이태석 신부 생전에 그와 뜻을 같이했던 후원자들은 톤즈 지역 청소년 교육 및 의료 지원을 위해 장학회를 세웠다. 이태석 신부가 선종한 2010년 이후에는 아프리카 전역으로 지원 범위를 확대하고, 아시아 지역 저개발국도 지원하고 있다.

장학회 사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던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바르게 알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태석 신부가 했던 일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취지에 따라, 장학회는 현재 살레시오회 선교국과 MOU(양해각서)를 체결, 실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선교사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산티노씨 외에 토마스 타반(31)씨와 존 마옌(29)씨 등 2명의 청년이 수단어린이장학회 지원을 받아 이태석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본과 4년 과정을 수학 중이다.

※후원문의 02-591-6210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