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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특별기고] 5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위한 신앙인의 영성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입력일 2017-04-30 수정일 2017-05-01 발행일 2017-05-07 제 304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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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인간을 멸망시킬 수 있다니?
“나의 한 표에 이웃사랑과 구원 달려있다” 생각해야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순간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생명이신 하느님 나라로 난 길을 걸어갈 것인지, 죽음의 골짜기에서 헤맬 지 오롯이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5월 9일 치러지는 제19대 대통령선거도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맞닥뜨린 중대한 갈림길이다. 어떤 길로 들어서느냐에 따라 자신은 물론 공동체의 미래가 바뀐다.

주님의 제자들로 어떤 자세, 어떤 마음으로 선택의 순간에 임할 지 되새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수천 년을 두고 철학과 종교가 수많은 답을 내놓았지만 우리 가톨릭신자들에게는 그 대답이 누워서 떡먹기다. “인간은 사랑이다!” 무슨 말이냐고? 간단한 논리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원형이신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모상인 인간 역시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착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의 중심(重心)은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리든 내가 그리로 끌려간다”고도 하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내가 어느 사랑으로 끌려가는지 지켜보라”고 하였다. 내가 하는 사랑의 성격대로, 내가 사랑하는 방향에 따라 영원한 구원이냐, 영원한 멸망이냐가 좌우된다는 심각한 가르침이다.

우리야 평소 참으로 경건한 천주교신자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치’ 얘기가 나오면 우리가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을 섬기는지, 실제로는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인지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고 지적하시는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다.

■ ‘정치적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지만 ‘정치적 사랑’ 역시 죽음만큼 강하다. 선거 때가 오면 집안에서 부부 사이가 갈라지고 부자 간에 언쟁이 벌어지고 친구들이 원수처럼 등지기도 한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선거철이면 딱 들어맞곤 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정치적 사랑이 그만큼 맹목적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어느 당 어느 후보에게 투표해야 ‘신앙인다운 선거’가 될까? 북한의 핵실험에 전전긍긍하면서 국가안보 걱정도 하고, 우리 ‘N포 세대’ 젊은이들이 비정규직 아니면 취직도 못하는 경제난도 염려하고,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구속된 시국 때문에 민주적인 정권도 탄생시켜야겠고….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할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의 운명에서 정확한 해답이 나온다!

■ 우리 주님이 ‘국가안보’ 때문에 처형당하셨다고?

사실이다! 예수님이 생전에 행하신 제일 큰 기적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이다. 과부의 외아들이 실려 가던 상여를 붙잡고 젊은이를 살리셨고, 금방 숨을 거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 심지어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 돌무덤에 묻히고 시취를 풍기는 송장을 살려내기도 하셨다. 라자로 이야기다.

그 뉴스가 퍼지자 예루살렘에서 당정회의가 열렸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세상에!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판단을 낳다니?

당정회의의 결정은 간단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소.”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대로, 그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예수님만 아니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70년을 두고 보수언론들이 국민의 눈을 가린 ‘국가안보’라는 바람몰이에 신앙인들이 함부로 쏠리지 않는 이유는, 지난 성주간에 들은 복음대로, 우리가 구세주로 섬기는 분이 무죄한데도 ‘국가안보’를 핑계로 처형당하신 까닭이다. ‘안보’를 내세워 반대자들을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온 편견은 동서고금 종교인들이 가장 흔하게 써온 우상숭배의 가면이었기 때문이다.

■ 하필 ‘갈릴래아 사람’을 주님으로 받들다니?

경상도든 충청도든 전라도든 자기 지역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 것은 타고난 애향심이다. 그러나 가톨릭신자라면 애향심을 내세워 타관 사람들을 까닭 없이 증오하고 배척한다면, 하느님의 매서운 손매를 각오해야 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구하러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인정도 못 받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까닭이 유대인들의 ‘지역감정’ 때문이었다는 말이 믿기는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무조건 죽이고 보자는 예루살렘 당정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를 한 사람이 있었다. 니코데모라는 사람이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니코데모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한 마디가 요한복음 7장에 나온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우리가 구세주로 섬기는 분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유다인 지도층이 성경을 샅샅이 연구한 끝에 나온 지역감정이었다!

“우리가 남이가?”는 25년 전 대선 때에 위력을 발휘한 영남인들의 향토애였다. “박근혜가 어때서?”는 그의 부친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담아 2017년에도 선거판을 움직이고 있다. ‘노사모’, ‘박사모’, ‘문빠’, ‘안빠’ 하는 낱말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를 향하는,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정치적 사랑’을 드러낸다. 설령 나라를 망치고 경제를 거덜 내고 전쟁이 터지더라도 자기가 투표한 정치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정치적 사랑은 강하므로, 그 정치가의 모든 선정과 실정을 하느님 앞에서 함께 책임진다는 교회의 가르침마저 나온다.

구약 「탈출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성막을 지은 뒤 모세는 그 장막 속에 들어가서 하느님과 단독면담을 갖곤 하였다. 5월 9일이면 나도 투표소 휘장 속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들어간다. 비밀투표여서 아무도 못 본다. 하느님만 지켜보시는 독대자리에서 신앙인은 그 한 표에 자기의 이웃사랑과 영원한 구원, 우리 국민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각오로 임할 것이다.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