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주도에서 30대 여성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자 일각에서는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에 의한 범죄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다. 경찰은 제주 예멘 난민의 범죄 연관성이 적다고 판단을 내렸지만 일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난민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추측성 여론이 일어나며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예멘 내전으로 생긴 난민 500여 명이 제주에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하면서 우리 사회는 예멘인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난민 신청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자는 쪽보다는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임을 강조하며 난민들을 모두 ‘잠재적 테러집단’으로 비난하고 배척하는 쪽이 우세하다. ‘단일민족 신화’가 아직도 민족적 배타성으로 강력히 작용하는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었던 반이민, 반이슬람 증오가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주류 언론의 대부분은 이민자 혹은 소수 인종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곤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주로 이들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최근 난민이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등장하는 끔찍한 범죄 문제가 잇따르고 있다. 18세 이탈리아 소녀가 살해된 채 발견된 뒤 나이지리아 출신 난민이 용의자로 체포되면서 큰 충격을 줬다. 이어서 같은 도시에서 극우 이탈리아 청년이 흑인들을 겨냥해 총격을 퍼부어 이민자 6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은 소녀의 피살과 난민의 연관성에 대한 기사를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장식한 반면에 이탈리아인이 저지른 비슷한 추악한 범죄 보도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보도량의 차이는 결국 자국민의 의식에 난민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공고히 고정관념화 시키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주류 언론 역시 이주노동자나 난민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주노동자를 타자나 불법 체류자 또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하층의 일꾼이나 범죄의 근원으로, 부정적인 프레임 안에 가두어 놓는 경향을 보여 왔다. 더 나아가 ‘이중적 인종주의’ 잣대를 갖고 백인/선진국 출신에게는 호의적으로, 흑인/동남아 출신은 무시하는 성향을 언론이 담론화 해왔다.
한국은 현재까지 난민 인정률이 4.1%로, 난민에 대해 매우 인색한 나라다. 이번 예멘 난민 사태를 통해 난민을 우리와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여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와 시민이 될 것인지 아니면 난민을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이미 가입한 유엔 난민협약과 난민법에 따라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 환대해야 한다. 환대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만이 아니라 난민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로 이어지고, 이는 곧 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극복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헤로데의 잔혹한 폭력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던 난민이 아니셨던가?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돌려보낼 것인가? 상처 입은 나그네를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이 진정으로 복음적인 태도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자신의 문을 열고 타인을 영접하는 것을 환대라고 규정하며, 타인을 나의 손님으로 대접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인종, 피부색, 언어와 문화가 다른, 쓰러진 희생자인 타인을 환대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환대 문화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제주 예멘 난민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뜻으로 자선기금을 지원했다는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졌다. 교황님은 착좌 후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아프리카 난민 수용소가 있는 람페두사였을 정도로 난민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난민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는 교황님의 미담이 전 세계에 보도될 때마다 난민에 관한 언론의 긍정적 시각이 형성되고 확산되리라 믿는다. 누군가 난민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행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제주 예멘 난민들이 슬픔을 딛고 희망의 삶이 되도록 그들을 손님으로 환대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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