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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뉴에이지 문헌 해설 -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3) 뉴에이지의 영성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03-09 수정일 2003-03-09 발행일 2003-03-09 제 2338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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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종교 문화서 유래...‘신영성’이라 할 수 없어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쉽게 개인주의에 빠지고 모든 것을 소비 대상으로 간주
뉴에이지는 ‘새로운 영성’?

뉴에이지는 종종 「신영성(newspiritualit y)」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 사상 대부분이 고대 종교와 문화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은 「새로운 영성」이라 불리우는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뉴에이지에서 실제로 새로운 것은 서구 문화와 유대-그리스도교적 종교의 뿌리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은 실재 전체와의 내적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모든 생명의 핵인 우주적 힘(force), 또는 에너지와의 깊은 연관성을 발견하고 그때 완성을 향해 나아가 자기의 삶과 세계와의 관계를 식별하며, 지속적인 진화 안에서의 새로운 창세기(New Ge nesis)를 맞이한다. 그 결과는 우주적 신비주의(cosmic misticism)이며 이는 역동적 에너지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우주적 에너지, 떨림(vibration), 빛, 신, 사랑, 초자아(supreme self) 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실재, 즉 모든 존재 안에 존재하는 일차적 원인(primal source)을 지칭한다.

이런 영성은 2가지 요소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다. 전자는 뉴에이지의 이교적이고 신지학적(theosophical)인 뿌리에서 유래하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이다.

신성에 도달하는 것은 숨겨진 신비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는 각 개인이 드러나 있는 것의 참된 이면, 시간을 초월하는 근원, 육화한(incarnate) 개인들을 넘어서는 우주적 신성을 모색하는 노력으로 가능하다. 이교적 영성은 『존재의 분열을 넘어선, 존재의 탐구이며 일종의 상실한 일치에 대한 향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교적 영성의 영지주의적 특성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를 부정하고 영성이 시간 또는 어떤 제도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는 신이 아니며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의 여러 역사적 현신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영성의 심리적 요소는 이교 문화와 심리학의 만남으로 이뤄진다. 뉴에이지는 개인적인 심리-영적 변모를 경험하는데 이는 종교적 경험과 유사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변모가 개인적인 위기나 오랜 영적 수련 후의 깊은 신비 체험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명상, 치료 또는 의식을 변화시키고 실재의 일치에 대한 내적 통찰력을 주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에서 온다고 말한다.

영적 나르시시즘(narcissism)

일부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뉴에이지 영성을 일종의 영적 나르시시즘 또는 가상의 신비(pseudo-mysticism)로 규정한다. 이런 비판이 데이빗 스펜글러(David Spangler)와 같은 주요한 옹호자에 의해 제기된 것은 흥미롭다.

그는 개인과 집단들이 모험과 권력에 대한 자신의 환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며 이런 수준의 일차적 특징은 개인적 세계에 집착하고 그에 따라 세상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준에서 뉴에이지는 낯설고 기괴한 존재, 지도자, 숙련자, 외계인 등에 의해 확산된다.

그는 이어 뉴에이지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나열해 지적하기도 한다. 즉 과거로부터의 소외, 자신만을 위한 집착, 전체와 일치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맹목과 분별없는 행동, 심리적 현상과 지혜의 혼동 등이다.

하지만 그는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기적, 비이성적 나르시시즘은 단지 일부에 국한된 것이며 뉴에이지의 긍정적인 요소는 변화의 모상, 성스러운 것의 육화이며 대부분은 매우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생명과 내적 성장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뉴에이지 상품들에 대한 비판은 미국의 예수회원인 데이빗 툴란에 의해 정리된다. 그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내적 삶을 발견하고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지녔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쉽게 개인주의에 빠지고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미에서 뉴에이지 영성은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기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한 불교적인 명상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신비적 일치의 꿈은 실제로는 단지 가상의 일치이며 이는 결국 인간을 더 외롭고 불만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