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천, 그 아름다운 기다림 -
승천의 의미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희망입니다.
그분께서는 2천년 전이라는 시간과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공간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존재해 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의 승천은 이별에 대한 아픔이나 하늘만 쳐다보는 넋 나감이 아니라 기대에 찬 희망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부단한 노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떠나신 뒤, 다시 오실 때에는 그토록 사랑하셨던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그 같은 노력 가운데 맞이하는 주님 재림의 기쁨을 승천 교리는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이미 승천 때부터 꿈꾸며 오르신 주님께서 우리 내면 깊숙이 들어오실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
하늘로 오르신 주님께서는 영영 떠나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겁내거나 두렵지 않은 이유도 어버이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희망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송기득이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희망의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아픔의 실체인 악의 세력과 그 밖의 요인에 대해서 끝까지 싸우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아픔에서 벗어나고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싸움은 두려워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고,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큰 용기와 믿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하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땅으로 내려오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당신의 수도회 규칙서 ‘겸손’의 장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려오셨기에 오르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내려와야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함께 하여야 우리 또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대가 하늘이고 그대가 하늘로 간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이나 사막의 성자들, 수많은 수도자들은 모두 이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우리가 하늘이라는 소중한 믿음을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가 하늘이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다가 들려오는 위로와 믿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 11)
제자들은 이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뒤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거나 예전의 비겁과 공포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과거의 나약한 모습의 제자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주님을 자신들 마음에 모시고 강인한 투사가 되어 기도하며 교회 공동체를 다시금 재정비하고 오시게 될 성령강림을 준비합니다.
예수님 승천이 제자들에게 실망과 고독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강한 확신과 희망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또한 주님을 모시고 다시 오실 희망의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