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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 특집] 교회 일치(에큐메니컬) 운동이란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0-01-13 수정일 2010-01-13 발행일 2010-01-17 제 268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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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는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
세속화 흐름속에 그리스도 통해 참 기쁨 누려
한국교회, 성서 공동번역으로 일치 지평 넓혀
타 종단과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대화 필요
2006년 에큐메니컬 국제 순례 당시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교황청을 공식 방문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김희중 대주교(가운데)가 대한성공회 전 서울교구장 박경조 주교를 소개하고 있다.
교회 일치운동의 배경과 필요성

천주교를 비롯해 교회일치에 나서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단들은 교회일치운동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기 전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11)하고 기도하신다. 이어서 예수는 이런 기도를 드리는 이유를 제자들이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자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유로 세상의 미움을 받는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 주시길 청하고 있다.

이렇듯 교회일치는 갈수록 거세지는 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게 되고 참 기쁨을 누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는 사상이 교회일치운동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교회일치의 과정은 교회 쇄신을 위한 노력과 결합돼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소외받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도와 지향이 모든 교회일치운동의 맨 앞에 자리 잡게 된다.

교황청 일치위원회가 펴낸 ‘교회일치운동의 원칙과 규범의 적용에 관한 지침서’(1993. 5. 25)는 ‘교회일치운동은 성령을 통하여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일치에로 인도하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의 설계에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교회의 신비에 대한 신앙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신자들에게 ‘분명히 사랑을 가지고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손을 뻗치고 그들을 서로 갈라놓는 것이 무엇이든지 진리 안에서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라’고 요청한다.

교회 일치운동 역사

교회일치운동은 개신교에서 17∼18세기의 신앙부흥운동과 19세기의 선교운동 및 청년운동의 과정을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교황 비오 9세가 1869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는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통해 교회론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림으로써 일치운동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일치교령은 통교(通交)로써 교회의 개념을 제시, 가톨릭과 개신교가 세례로써 통교를 이루고 있어 일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본격화된 일치를 위한 교회의 노력은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동방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방문함으로써 신기원을 이룩했으며 이듬해 12월에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는 가톨릭-정교회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신학적 대화를 이어오고 있다.

개신교와는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72년부터 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어 72년 말타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대희년을 앞둔 1999년 가톨릭과 루터교가 함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지난 450여 년간 두 교회 사이에 이어져온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장을 열게 됐다. 이어 의화교리에 관한 최초의 공동선언이 이뤄진지 7년 만인 2006년 7월 감리교와도 의화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이뤄냄으로써 ‘구원’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을 종식시키고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됐다.

한국교회 일치운동 발자취

우리나라에서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다. 한국교회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1965년 7월 4일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교회일치운동을 결의하고 ‘전국 그리스도교 재일치위원회’를 설립한다. 이어 1968년 일치기도주간(1월 18∼25일)을 맞아 한국교회 최초로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합동기도회를 열고, 교단 대표자 간담회도 개최했다.

일치운동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성서 공동번역 사업이었다. 한국교회는 1968년 가톨릭과 개신교 대표로 공동번역위원회를 구성해 1971년에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1977년에 구약 공동번역 성서를 펴냈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민주화현장에서 만나 일치운동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군사 독재는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정의 구현, 민주화·통일 운동 등에 투신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나누며 서로를 확인하고 한 형제임을 고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대 들어 교회 일치에 대한 인식과 참여도는 떨어졌고, 각 종단이 성장 위주의 선교정책을 펼침으로써 타 종단에 대한 거부감마저 높아져 일치운동은 뒷걸음치는 모습마저 보였다.

2000년 대희년을 기점으로 교회 일치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교회 차원의 공식적인 대화와 만남의 장이 마련되면서 일치운동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를 발족시키는가 하면 에큐메니컬 포럼을 개최하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는 물론 신학생, 평신도 등이 다양한 교류 행사를 이어오면서 일치의 지평을 넓혀오고 있다.

한국교회 일치운동의 과제

아직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일상에서는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이 팽배해있는 게 현실이어서 일치운동이 가야 할 길은 멀다. 실제 여러 통계들을 볼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일치운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직접 참여하는 사례는 더 미흡해 유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목자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경향은 크게 다르지 않아 타 종단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이 일치운동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교회 내 지도층을 중심으로 이뤄져오고 있는 교회일치운동이 개별교회나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것은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맞닥뜨린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치를 위한 보다 깊이 있는 대화와 만남이 절실하다.

호남신학대 정병준 목사(교회사)는 “교회일치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이어져오고 있지만 현장을 벗어나 신자들의 일상에까지는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삶의 터전 안에서 꾸준히 만나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나갈 때 일치운동의 지평이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자들 간의 지속적인 만남과 공동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일선 사목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장 조성기 목사는 “교회일치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 길을 발견하고 복음화의 비전을 확장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신앙과 자기 종단까지 풍요롭게 하는 계기”라고 밝히고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연대, 협력은 하느님 백성과 그 삶의 현장으로 육화하는 교회의 본 모습을 새롭게 체험하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세례에 대한 이해와 공유, 전례를 비롯한 각종 예식에 대한 공동참여, 성경 연구 등 신학적 이해의 공간 확대는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 인류에게 봉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함께 드러내는 사회적 실천운동에 함께함으로써 일치의 신비를 구체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신자들의 피부에 쉽게 와 닿는 가족 해체, 환경, 민족화해, 인권 등의 문제가 제기되는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함께할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와 공동의 목표를 찾아내고 함께하는 운동으로 일궈나감으로써 교회일치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려는 모색이 꾸준히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

에큐메니컬(Ecumenical)은 그리스어 ‘오이쿠메네’(οικουμενη·oikumene)에서 유래한 말로, oikeo(살다, 거주하다), 혹은 oikos(집)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파생돼 단순히 ‘사람이 사는 모든 땅’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런 지리적 의미 외에 그리스 문명의 영향권을 나타내는 문화적, 정치적 의미로도 사용됐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교부 오리게네스는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오이쿠메네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류로서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오이쿠메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5번 등장한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에서는 세계, 흙, 또는 대지를 뜻하는 다양한 히브리어 단어들을 번역하는데 오이쿠메네를 자주 사용했다.

신약성경에서 오이쿠메네는 단순히 ‘온 세상’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사도 17,31 마태 24,14).

하지만 거대한 정치적 단위체, 즉 제국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본문들도 나타난다(루카 2,1 사도 17,6). 그러나 신약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오이쿠메네를 지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참된 오이쿠메네는 그리스도의 왕국임을 암시한다(히브 2,5).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2장 5절에 기록된 ‘오이쿠메네 멜루사’(oikumene mellousa), 즉 ‘앞으로 올 세상’이라는 표현은 현재의 오이쿠메네의 일시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다스리실 새롭고도 변화된 오이쿠메네가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오이쿠메네는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지리적 공간(마태 24,14)이자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승리의 장(히브 2,5)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온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다는 ‘세계교회’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이자 교파나 교단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도모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