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특집] 100여 년 전 로마로 간 한국 신학생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0-06-30 수정일 2010-06-30 발행일 2010-07-04 제 270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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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인 사제’를 꿈꾸다
숱한 역경 견뎌내며 로마 도착, 베네딕토 15세 교황 알현하고
우르바노대학서 사제직 준비했지만 안타깝게도 병으로 선종
역사의 꼬리를 잡고 올라가다보면 종종 의미있는 만남과 맞닥뜨린다. 한국 최초의 로마 유학생으로 일컬어지는 전 아우구스티노와 송 안토니오의 만남 또한 그러했다.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본지에서 연재하고 있는 ‘드망즈 주교 일기’(22회, 6월 20일자 참조)에 첫 한국인 로마 유학생 전 아우구스티노와 송 안토니오 신학생의 사진이 공개되자 독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잊혀진 신학생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그 존재에 놀라워했다. 그런데 그 전화 중에는 두 신학생의 후손들도 있었다.

‘사제’가 되고자 로마를 찾았지만 사제가 될 수 없었던 그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는 지금, 그들에게 과연 ‘사제’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신학생들에게 그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찰나’지만 강렬하다.

■ 1919년 그날의 이야기

드망즈 주교가 서품식을 11월 23일로 정하고, 로마에 데리고 갈 두 신학생인 전 아우구스티노와 송 안토니오에게 통보를 한다.

‘로마에 간다.’

로마로의 여정은 드망즈 주교가 떠나는 ‘앗 리미나’(교황청 정기방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학생들은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꿈에 부풀었다. 1919년 당시 상황은 3·1운동이 일어나던 해라 일본 경찰의 감시가 매우 삼엄했다. 하지만 로마 우르바노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사제가 되리라’는 신학생들의 마음은 꺾을 수 없었다.

11월 10일, 드망즈 주교는 신학생들을 위한 2개의 여권 서류를 경찰에 보낸다. 여권 발급의 과정은 멀고도 험했다. 복사를 몇 번이나 시켜 도청에 갔으나 여권이 발급될는지, 발급되면 언제 될는지 말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듣고 왔다.

일은 진전이 없고, 끝날 것 같지도 않아 드망즈 주교는 직접 도청으로 나선다. 주교가 당도하자 도청에서는 ‘늦어도 20일, 21일에는 여권을 발급하겠다’는 약조를 했다. 여권뿐 아니라 절차 또한 까다로웠다. 서울에서 사증을 받는 등 천신만고 끝에 배를 탈 수 있었다. 좌석은 모두 찼고, 두 신학생들은 서 있어야만 했다. 어떤 일본인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드망즈 주교는 직접 3등실 담당 소년을 찾아가 신학생들에게 좌석 2개를 마련해준다.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려는 드망즈 주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일행이 탄 ‘쓰시마 마루’호는 2시간이나 연착돼 일본 시모노세키 만에 도착했다. 두 신학생은 항해를 잘 견뎌냈고 뱃전에 기대어 구경을 했다. 정신없는 항해에도 불구하고 전 아우구스티노는 드망즈 주교를 찾아 ‘같은 칸의 한국인 여자가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넓은 마음을 보인다.

일본, 중국 상하이, 홍콩,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 등 거친 파도를 헤치고 로마에 도착한 그들은 마침내 교황(베네딕토 15세)을 알현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이것은 교황이 먼저 이들이 도착하면 즉시 알현 요청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을 만나기 전, 드망즈 주교는 우르바노 대학 총장을 만나 ‘신학생들이 올해는 라틴어를 배울 것이고 내년에 철학을 시작할 것’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교황을 알현하던 1920년 1월 26일, 신학생들은 가장자리 장식을 한 대학 정복인 수단에 붉은 띠를 두르고 교황을 알현했다. 신학생들이 교황의 오른발 슬리퍼의 십자가에 입을 맞추는 동안 드망즈 주교가 그들을 소개했다.

교황이 ‘누가 아우구스티노이고 누가 안토니오냐’고 물었다.

“너희들은 이미 교복을 받았다. 새 것이 아니지만 마음은 새로워지기를. 한국의 훌륭한 사제가 되어라.”

교황은 그 자리에서 한국인과 한국에 강복을 내린다. 신학생들은 몹시 기뻐하며 감격했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해 열심히 공부하고, 바뀐 환경에 적응해 나가며 ‘사제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2년 5월 13일, 드망즈 주교는 ‘전 아우구스티노가 협심증으로 인해 5월 11일 밤, 갑자기 선종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귀국한 송 안토니오도 1923년 5월 7일 전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하늘로 떠났다. 한 달 전인 4월 9일, 드망즈 주교는 날미성당에서 죽어가는 송 안토니오를 만났는데, 폐결핵에 걸려있던 그는 말도 못하고 단지 눈과 머리로 ‘감사의 표시’를 할 뿐이었다.

방인사제 양성에 힘썼던 주교의 노력은 그들의 죽음으로 아쉽게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에서 한국인으로서 많은 역경을 견디며 ‘한국인 사제’를 향해 끝없이 걸어가던 이들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일기에서 조용하고 경건하게 이야기한다.

“성당에는 송 안토니오와 전 아우구스티노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사진은 로마에서 1920년에 찍은 것이었다.”

샤르즈뵈프 성유스티노신학교 총장 신부(가운데)와 로마로 유학 떠나는 전 아우구스티노(왼쪽), 송 안토니오 신학생(1919년 11월).
드망즈 주교가 교황청 정기방문차 로마를 방문했을 때 동반한 첫 한국인 로마 유학생 전 아우구스티노(왼쪽)와 송 안토니오 신학생.
드망즈 주교가 두 신학생을 데리고 파리외방전교회 대의원회의 및 교황청 정기방문차 로마에 갈 때 탔던 여객선 스핑크스호(1919년 12월).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역경 속에 키웠던 사제의 꿈, 후배들에 귀감되길”

전 아우구스티노의 조카며느리 김분다씨가 사진을 보며 신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취재를 하면서 새롭게 밝혀낸 사실은 전 아우구스티노와 송 안토니오가 ‘남’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신학생이 ‘친척’ 관계일 수 있다.

송 안토니오의 후손 송경수(가브리엘)씨는 “고종사촌 누님께 신학생 두 분이 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 전태옥(마르티노)은 제주교난에서 순교했고, 당시 그의 아내였던 김 알로지다의 어머니가 송 씨였다고 한다.

전 아우구스티노가 신학생으로 로마에 가게 된 과정에는 ‘한국교회사’의 뼈아픈 사연들이 숨어있다.

제주교난에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외삼촌을 여읜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5일 만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남편과 아버지, 오빠의 순교를 지켜봐야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졌지만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천주쟁이’라는 이웃들의 따돌림으로 인해 일할 수 없던 어머니는 밥을 얻어 치마에 숨겨와 아이들을 먹였다.

전 아우구스티노 신학생의 조카며느리인 김분다(베네딕타)씨는 “유복자로 태어나 형과 엄마를 떠나 그 나라의 말도 못했던 어린 것이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로마에서 협심증으로 선종했다는 전보가 전해졌다. 전 아우구스티노의 형, 전 베네딕토는 매우 상심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지고 전 베네딕토의 아들마저 ‘주머니에서 묵주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난도질당해 순교했다. 전 베네딕토는 동생과 아들을 잃음으로써 상심한 나머지 죽는 날까지 병마와 투쟁해야 했다.

김분다씨는 “집안에 전 아우구스티노 삼촌이 보냈던 ‘사랑하는 동생들’로 시작하는 편지들과 사진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리고 없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로마에서 서로 의지했을 송 안토니오 또한 한국으로 돌아와 폐결핵으로 숨졌다. 사제가 되기 위해 애쓰던 두 신학생이 안타깝게 모두 선종한 것이다.

송경수씨는 “배를 타고 고생하면서도 ‘사제’가 되려던 선배 신학생들을 보고 지금의 신학생들이 훌륭한 사제가 돼주길 바란다”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마음에 많은 위로와 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