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남아서 성당을 지켜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교 선조들의 마음과 다름없었다.
부둣가에서 성당까지 30여 분을 되돌아 걸어가며 김태헌 신부(연평도본당 주임)는 삶을 회개하고 삶 전체를 봉헌하는 절절한 기도를 바쳤다. 사제로서의 삶이 한꺼번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6·25 때 순교의 길을 걸었던 선배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이 떠올랐습니다. 사제로서 살아갈 것을 주교님께 약속드렸던 서약도 되새겼습니다. 순교를 각오하는 심정이었습니다.”
11월 24일 북한의 포격 도발이 일어난 다음날, 김태헌 신부도 신자들의 손에 이끌려 뱃터로 나섰다. 섬을 빠져나가 그나마 안전한 인천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성체만을 모시고 급히 나온 차림이었다. 그러나 눈물만이 쏟아졌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당을 두고 도망가는 죄의식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의 기분과도 같았습니다. 예수님께 너무 죄송하고 교구장님을 뵐 낯이 없어 눈물만 흘렸지요.”
그를 끌고 가려는 전례분과장 부부를 안심시키고 잠시 물건을 찾아달라며 배 쪽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그리곤 돌아섰다.
인천으로 가는 배를 뒤로 할 때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부모님과 본당 신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인간적인 무서움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기도를 바치며 성당으로 돌아온 김 신부는 우선 봉성체를 영하던 할머니들의 집 문부터 두드렸다. 구조인력들이 거동이 불편한 다른 어르신들의 집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에도 앞장섰다. 학교 교사들과 유치원에서 쪽잠을 자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성당을 지키다 공무원을 제외한 신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섬을 나섰다.
“첫날 포격이 멈추고 전화 연결이 가능해지자 우선 정신철 보좌주교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구장 최기산 주교님께서 너무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본당 신부로서 나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결단을 내리는데 두 분의 격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정신철 주교는 “포격 당일 전화를 끊은 후 김 신부님께서 곧바로 인천으로 나오신 줄로만 알고 있었다”며 “이튿날 연평도에 계속 남아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죽음 앞에서 결단을 내린 김 신부님의 모습이 평소에 어느 순간이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기도하며 살아온 사제로서의 신앙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교구장 최기산 주교도 “당시는 성당을 지키고 주민들을 돕는다는 결단을 내리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끝까지 성당과 신자들 곁에서 사제로서의 소임을 다한 김 신부님의 모습은 현대 사제들에게도 큰 모범이 된다”며 김 신부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전했다.
‘쾅, 와장창, 퍽퍽.’
11월 23일 오후 사제관 건물 전체가 들썩하는 듯 했다. 전등이 내려앉고 유리창은 성한 데가 없었다. 사제관에 있던 김태헌 신부는 귀청을 찢는 듯한 폭발소리가 사그라지기도 전에 곧바로 성당을 향해 내달렸다. 성당 유리창이 온통 깨지고 십자가의 길도 모두 떨어졌지만 다행히 감실과 십자가는 무사했다. 하지만 구사제관은 반파되고 본당 어르신용 승합차는 완전히 찌그러졌다. 성당과 사제관 곳곳의 벽도 갈라졌다. 문은 떨어져나가고 창문은 성한 데가 없이 파손됐다.
포격 연기가 사라진 뒤 살펴보니 앞마당에만 두발의 포격이 떨어졌다. 성모상을 몇 미터 피한 기적과도 같은 위치였다. 폭발이 조금만 가까이서 일어났어도 성당이 완전히 박살날 상황이었다. 본당 전례분과장도 혼비백산해 달려왔다. 먼발치서 포격이 떨어진 것을 목격하고 김 신부가 다치지 않았는지 놀라 뛰어온 것이다.
김 신부는 “평소 전 신자들이 매 미사 전후로 묵주기도 5단씩 총 10단을 꾸준히 봉헌해왔다”며 “성모님의 도우심과 전구로 이번 포격에서도 신자들과 성당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연평도 주민의 1/3가량은 본당 소속 신자다. 연평도는 평소 전국 어떤 섬지역보다 복음화율이 높은 모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본당을 잃었다. 사목지를 잃은 본당 신부는 인천 시내 한 찜질방 구석 식당에서 대림을 시작하는 미사를 주례했다. 28일, 연평도본당 신자들은 인근 본당에서 빌려온 미사도구와 성가책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신자들마다 임시 피란처인 찜질방 열쇠를 팔목에 차고 미사 시간 내내 울음을 멈추질 못했다.
김 신부는 강론을 통해 “힘겹고 어려울 때 더욱 더 신앙 안에서 한마음을 이루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자”며 “우리의 이 고통은 떡 한 조각 더 먹고, 보상 한 푼 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아픔을 대신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니 다른 피해주민들을 위해 신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해 양보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범을 보이자”고 당부했다.
김 신부는 현재 매일같이 찜질방을 오가며 신자들과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