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학기 강의가 끝날 즈음, 칠십을 훌쩍 넘기신 한 만학도(晩學徒)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자꾸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어제 지하철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건너편 자리에 있던 서너 살쯤 된 한 아기와 눈이 마주쳤어요. 순간 아기에게 눈인사를 했지요. 아, 그때부터 아기와 저 사이에 만남이 시작된 거예요. 아기가 아빠 등 뒤로 얼굴을 감추었다 내보였다 하면서 숨바꼭질도 하고 저를 보고 방긋방긋 웃기도 하면서 저에게 눈으로 이야기도 하고 한참 장난을 치는 거예요. 제가 인상이 좀 험해서 어른들은 보통 저를 보면 무서워하거든요. 그런데 아기는 달랐어요. 제 마음을 읽어주었다 싶어 얼마나 고맙고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웃을 평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도 가능하다는 것, 아니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기분 좋은 눈빛과 웃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이 점점 첨단기술문명으로 덮이고 삶의 리듬이 바빠진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사람간의 관계는 사실 이렇게 소박한 몸짓에서 시작하고 무르익는다.
그런데 요즘 어디를 가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고요한 시선과 사심 없는 밝은 웃음을 지닌 얼굴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한 타인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우리 모두가 자기 세계에 묻혀 사는데 익숙해져 타인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 어색해졌다. 어쩌면 이웃의 얼굴을 바라봄은 결국 나 자신을 보는 것이고, 이는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위일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나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고 치유를 하실 때 그 대상을 ‘바라보셨다.’(마태 4,18-22 5,1 9,22 마르 6,48 루카 7,13 요한 5,6 6,5 참조)고 전한다. 이러한 표현은 특히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바라봄’은 의미 없는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담긴 관심과 염려를 뜻하기 때문이다. 좋은 눈길로 이웃의 얼굴을 바라봄은 세상과 대화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의 표현이며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건설적인 배움의 행위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마음 불편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거의 모든 승객의 눈과 귀가 전자기기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아이폰 세상 밖에는 삶이 정지된 듯, 아니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지하철 안의 풍경! 마치 우리 모두가 가상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스크린에 고정된 시선들은 왠지 서로 외딴 섬처럼 고독하고 지쳐 보인다. 왠지 나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하고 고독해진다. 서로 귀를 기울이며 듣고 이야기하고 웃는 모습이 너무 뜸한 요즘이라 어쩌다 옆에 앉은 아이에게 눈웃음을 짓고 말이라도 건네는 사람을 보면 따뜻한 인정이 전해져 얼마나 흐뭇한지….
무엇이 우리를 이다지도 각박하게 만들었을까? 여러 대답이 동시에 떠오른다.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불안한 삶, 더해만 가는 빈부격차, 정의가 부재한 현실 등.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문제로 생각되는 것은 인간이 문명의 주인이 아니라, 문명 수단이 때로 주인행세를 하도록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통신수단은 우리 사이의 관계성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주어진 귀한 선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좋은 수단이 역기능을 하면서 오히려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나의 행복이 이웃의 평화로운 시선과 웃음으로 맺어진 진실한 관계성에서 나온다면, 내 이웃의 행복 또한 내 사랑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문득 경건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내 이웃을 통해 나를 만나러 오시고 나를 통해 다른 이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느님 육화의 신비를 기억하며, 새롭게 주어진 이 새해를 의미 없이 허비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하느님을 아는 모든 이가 자기 삶의 자리에서 고유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며 희망의 메시지로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