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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평투(平妬) - 제2주, 우리누리 공부방 큰 이모 최수연씨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2012-03-04 제 278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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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투(平妬): 질투를 진정시키다
“가장 가난한 이들과 살며 자유·행복 찾았어요”
부산 감천동, 까치고개를 넘을 때까지만 해도 산동네 집들은 알록달록한 ‘지중해의 집’을 연상케 했다. 동네로 들어서자 산동네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가파른 비탈길,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다니는 골목길에는 콘크리트로 외벽을 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목 끝, ‘우리누리 공부방’이 보인다. 25년간 공부방을 꾸려온 아이들의 큰 이모, 최수연씨를 만나기 위해 허리를 굽혀 공부방 작은 문을 넘어섰다.

▧ 공부방 큰 이모

노동문제에 관심이 있던, 수녀를 꿈꾸던 33살의 작고 귀여운 처녀. 25년의 시간은 그를 ‘공부방 큰 이모’라는 애칭과 함께 중년의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부산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감천동 산동네, ‘우리누리 공부방’을 가꾸는 최수연(도미니카·57)씨다. 1988년 이곳에 들어와 공부방 문패를 붙여놓고 감천동 사람들과 삶의 터전을 함께한 사람.

윤종일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의 제안으로 시작한 일이라지만 산동네 사람들과 울고 웃으며 나이를 먹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예쁘다고 말해요. 잘 모르니까 그런 거죠. 처음 우리누리공부방 문을 열 때만 해도 공간이 너무 좁아서 길에다가 돗자리랑 신문지 깔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숙제라도 해야 하니까.”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은 사치에 가까웠고 가난은 대물림됐다. 우리누리 공부방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학교가 끝난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 동네 언저리에서 시간을 때웠다. 처음 아이들을 공부방에 초대한, ‘설마 올까’하는 조금의 기대도 없던 그날, 아이들 50여 명이 모였다.

“지금 같으면 인권문제다, 뭐다 난리 났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가 지금보다 어쩌면 아이들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힘든 건 똑같은데, 지금은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같이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상처 입은 날개를 안고 태어났다. 가정의 형태가 변화되며 단순히 돈뿐 아니라 마음도 가난해졌다. 사교육을 앞세워 예·복습을 마친 아이들에 대항해 가르쳐주어야할 것은 늘어났고, 주어야할 사랑은 배가 됐다.

“뉴스에는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때는 조금 있으면 모두 부자가 될 거니까 공부방을 그만 둬도 되겠다는 환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갈수록 더 힘들어지니 세상이 과연 좋아지는 걸까요.”

부산 감천동 산동네. 고개를 올라가다보면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보인다.

▨ 주는 것에도 속도가 붙는다

그가 공부방만 운영했던 것은 아니다. ‘감천동 사람’이 되기 위해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실밥따기, 신문배달, 장어껍질 펴기, 신발밑창 붙이기, 가정부. 학부모들을 따라 나선 부업전선은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온몸으로 함께하는데 도움이 됐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은 채, 내 집 한 번 마련해보지 못하고 공부방 아이들과 살아간다는 것, 그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한 10년까지는 갈등이 있었어요. 저도 사람인데, ‘보따리 싸서 집에 갈까’ 왜 생각이 없었겠어요. 제가 피아노를 엄청 좋아했는데 여기 올 때 돈을 구하려고 피아노를 팔고 왔어요. 너무 속상해서 한참을 울었죠.”

물질에 대한 포기는 차라리 쉬웠다. 결혼과 자녀, 터전, 노후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이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는 ‘참 잘했다’는 점수를 줬다. 수도자도 아닌 평신도가 부산지역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자유와 행복을 찾은 것이다.

“내 욕심, 내 소유. 모두 중요하지만 어느 날 사라지더라고요. 없는 것에 대한 자유가 있어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익숙해지니까 주는 것에도 속도가 붙더라고요. 수녀원에서도 이렇게 못 살았을 것 같아요.”

혼자라는 외로움을 피해 굴뚝에서 쪽잠을 자던 한 아이는 지난해 박사학위를 달고 공부방을 찾아와 첫 월급을 내놓고 떠났다. 시장갈 때도 놓지 않았던 손, 장난감 조립을 잘 한다고 건네준 칭찬, 대학교 학비까지 내어줬던 큰 이모의 사랑을 아이는 잊지 못했다. 아이들은 사회 곳곳에서 건실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어엿한 자녀들을 두었고, 몇몇은 공부방을 찾아와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부산 감천동 산동네, 우리누리 공부방 아이들이 올망졸망 골목에 섰다. 앞에서 세번째가 최수연씨.

▨ ‘같이’의 가치를 믿는다

최씨는 ‘같이’의 가치를 굳게 믿는다. 공부방 아이들에게도 함께하는 법을 주로 가르친다. ‘내가 주었으니 너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호칭도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모두가 삼촌, 이모다. 선생과 제자의 벽을 넘어 가슴으로 함께하는 가족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공부방에 들어오면 반드시 그 아이의 가정방문을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9년, 최씨는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이라는 책을 냈다. 조촐하게 이뤄졌던 출판기념회, 아이들을 들쳐 업고 찾아온 우리누리 공부방 졸업생들. 아버지가 된 한 아이가 ‘할 말이 있다’며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이모를 안 만났으면 저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이모에게 배운 사랑을 지금 제 아이에게 줍니다. 이모가 없었다면 지금 제 아이들도 없었을 거니까요.”

감천동의 세월을 아는 이들이 진심으로 울었다. 최씨의 삶은 공부방의 이름대로 ‘우리누리’다. 뜻은 넉넉한 마음,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오늘도 공부방의 시계가 돌아간다.

◎ 칠극과 함께하는 사순

칠극, 제2편 ‘평투’는 남의 나쁜 점을 헤아리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고, 남을 어질게 대하고 남을 사랑하라고 이른다. 타인의 복된 것을 근심하고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 ‘질투’는 분노와 인색보다도 나쁘다. 타인에 대한 질투를 뛰어넘어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 사상은 유가의 인애사상을 더욱 깊게 한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