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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식분(熄忿) - 제4주, 참음의 덕으로 어려움에 맞선 채영희씨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2-03-13 수정일 2012-03-13 발행일 2012-03-18 제 278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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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예수님 떠올리면 인내 못할 것 있나요”
시계 바늘이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이것저것 집안 일을 하던 채영희(스콜라스티카·67·서울 해방촌본당)씨.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묵주와 기도책을 꺼내들었다.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지난해부터 매일 오후 3시에 바치고 있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어머니 고 유순흥(마리아)씨를 위한 위령기도. “시모 유마리아는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사오니 지옥 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시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올리자니 어느새 마음 한쪽에 애잔함이 가득해 진다. 지난해 7월, 오랜 투병 끝에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는 채씨와 46년을 함께했다. 무던히도 모질고 차갑게 시집살이를 시켰던 시어머니. 그러나 거의 반백년을 함께했던 세월 속에서 이제는 ‘미운 정’보다 ‘고운 정’의 대상이 되었다.

차가운 날씨지만 햇빛 속에 제법 봄기운이 느껴지는 요즘, 더 자주 시어머니의 생전 모습이 떠오른다. “나들이라도 좀 더 자주 시켜드릴걸.”하는 후회도 있고, “왜 그렇게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키셨을까”라는 푸념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렵던 결혼생활 시모와의 갈등을 견디어 냈던 시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세월이었음을 안다. 그렇기에 시어머니 영혼의 영원 안식을 구하는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이 보다 절절해진다.

생전의 시어머니와 함께 한 채영희씨.

모질었던 시집살이

21살에 5남매 장남이었던 서영환(마르티노)씨와 결혼,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를 함께 돌보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채씨. 결혼 당시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았던 시동생과 시누이를 키우다시피 하면서 전체 살림을 도맡았던 그였지만 시어머니는 살갑지 않았다.

바깥 출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친정에 발걸음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친정’ 소리가 입에 나올라 치면 이불 홑청을 다 뜯어 놓고 빨래를 시키는 식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뇌출혈로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흔쾌히 친정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친정 집과 부모를 무시하는 모진 말도 계속됐다.

매일 술을 즐기시는 시아버지의 주사(酒邪) 수발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9년 동안 병치레를 했다. 그 뒤치다꺼리 역시 며느리 채씨가 해야 할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어머니는 49재를 하기도 전에 “남편 혼자 돈버는 고생 그만 시키라”면서 일자리 구할 것을 재촉, 상복 차림으로 일자리에 나가야 했던 그였다. 그럼에도 한 번도 큰소리로 불평을 표현한 적도, 가족들과 말다툼을 한 적도 없었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인데 말씀을 따르고 듣고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속에만 그 어려움을 넣어 두었다.

영세를 통해 진정한 인내를 배우다

채씨가 영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지 유언 덕분이었다. 비록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대해 좋은 인상을 지녔던 시아버지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장례를 가톨릭 형식으로 치를 것과 남은 가족들이 가톨릭에 입교할 것을 원했다.

‘사는 것이 하도 고달파서’ 해방촌 언덕 어디에 성당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성당에 나가고 싶었어도 시어머니 눈치를 살피느라 성당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채씨에게 시아버지의 유언은 그야말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86년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던 날, 펑펑 눈물 흘렸던 것을 기억하는 채씨. 그 눈물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누가 날 위로해 줄까”라는, 그간 어려웠던 세월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느낌 때문이었다. 성당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채씨는 혹독한 시집 살이, 삶의 어려움을 신앙과 기도로 풀어 나갈 수 있었고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심적 위안도 찾았다.

2005년경 노환으로 시어머니가 앓아 눕자 채씨는 직장도 그만두고 병간호에 몰두해야 했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아예 화장실 출입을 못했던 탓에 대소변을 받아내며 시어머니를 돌봤다. 기도할 시간조차 부족할 상황이었다. 그런 며느리인데도 시어머니는 대놓고 다정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고맙다”라는 말은 가끔 들려주었지만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채씨는 구역반장 역할과 빈첸시오회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본당서 일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고 간병 시간을 쪼개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집과 성당을 오갔다.

인간적으로 미움과 원망만이 가득할 수 있었던 40여년의 세월에 대해, 채씨는 ‘특히 하느님을 알고 난 후에는 나 같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셨던 예수님을 떠올렸다’고 그 소회를 밝힌다. 그리고 “십자가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견뎌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독였다고 했다. 또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신체를 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러한 채씨의 삶은 본당에서뿐 아니라 살고 있는 지역 안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2010년 10월 서울 용산구청은 ‘용산구민의 날’ 행사를 기해 채씨에게 ‘용산구민대상 효행상’을 수여했다.

2010년 10월 18일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으로 부터 ‘용산구민대상 효행상’을 받고 있는 채영희씨.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요즘 채씨는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통해 그간의 세월 동안 인내의 힘을 주셨던 하느님께 더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시어머니의 선종 후 ,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라는 죄송스런 심정에 한동안 무기력한 시간을 지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는 채씨. 빈첸시오회 활동의 일환으로 방문하는 독거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떠올리게 해서 남 같지 않게 여겨진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되면 사정이 어려운 어르신들 돕는 일에 더 마음을 쓸 계획이다.

“어려운 일을 참아 내는 것은 미력하나마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시고 견뎌 내셨던 예수님을 떠올리면 인내하지 못할 것이 없지 않을까 싶네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기도를 드리고 있는 채영희씨. 채씨는 매일 오후 3시 ‘자비의 기도’와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영혼 안식을 위해 위령기도를 바친다. 지난해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오고 있는 기도다.

◎ 칠극 ‘식분(熄忿)’

칠극, 제4편 ‘식분(熄忿)’은 분노를 삭이는 것이다. 참음의 덕목으로 어려움에 맞서는 것이며 곤궁함과 어려움으로 덕을 더하는 행위이다. 분노는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으니 참음으로써 꺼뜨려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두렵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참음으로써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