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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가정과 일의 우호적 동맹을 위해 / 박영호 기획취재부장

박영호 기획취재부장
입력일 2012-06-05 수정일 2012-06-05 발행일 2012-06-10 제 279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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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한 아이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 때 한국의 한 그룹사에서 인턴사원으로 일을 했다. 나중에 그 아이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렇게 좋은 학교를 나와서, 그 뛰어난 능력으로 어쩌면 그렇게 밤낮으로 혹사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한국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실화다.

배부른 소리인 것은 분명하다. 입시지옥에서부터 취업전선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경쟁을 살아남은 한국의 대기업 직장인들에게 그 정도의 노동 강도야 견딜 만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하도 일해서 머리가 듬성듬성한” 아저씨들의 직장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용납되지 않는 이유는 많았지만, 크게는 사생활의 박탈과 함께 가정생활의 피폐였다. 한국 직장문화 안에서 ‘가정과 일과의 우호적 동맹’은 불가능해보였다. 한국에서 가정과 일은 적대적이었다. 많은 직장인들이 중년의 초반에 자신들의 직장 생활이 끝나리라고 예상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된다. 여성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사와 육아의 의무에 대한 용납은, 아무리 법이 좋아졌다고 해도, 역시 최소한에 그친다.

사회가 많이 변했고, 가정의 평화가 생산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가정에 대한 지원을 복지의 일환으로 여기는 회사들도 있지만, 극히 일부이다. 여기에서, 그러면 “교회는?”이라고 자문할 때, 과연 얼마나 가정과 일의 조화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실화이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아가씨는 강남쪽, 잘 나가는 유치원에서 일하다가, 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류 접수·1차 면접을 거쳐, 2차 면접에서 담당 수녀님의 질문은 단 두 가지. “결혼하실 생각이세요?” 그리고 “언제쯤이오?” 아가씨는 20대 후반 혼인 적령기였고, 오랫동안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 결론은 금방 났다. “아무래도 어렵겠네요.” 아가씨는 교회 안에서 일할 생각을 접었다.

이유는 있었으리라. 제한된 재정에 가정사에 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되고 이해도 간다. 하지만 여기에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사목적 배려의 하나라는 교회의 입장은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

올해 세계 가정 대회가 열리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오니지 테타만지 추기경은 성경과 사회교리, 그리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회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을 인용하면서, “노동과 가정 생활의 우호적 동맹”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이러한 동맹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노동자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교회는 일찍부터 훌륭한 사회회칙들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그에 준하는 윤리를 사회에 설파했다. 특별히 교회는 가정이 없으면 노동도 없다는 것을 이번 세계 가정 대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테타만지 추기경이 강조하듯이, 교회는 세속 사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특히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과 가정의 원만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제공해줄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

혹시 교회는 하느님의 일꾼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봉사를 요구하지는 않는지, 또는 일반 사회를 향해 노동조합의 가치와 필연성을 설파하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는 가정의 구성원이자 교회의 일꾼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자. 넘치지는 않더라도 궁핍하지는 않을 만큼 적절한 보수와 휴식을 보장하고 있는지, 궁극적으로는 여러 번 강조하듯이, ‘일과 가정의 우호적 동맹’을 기꺼이 인준해줄 의향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박영호 기획취재부장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