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기 위해 복음관상기도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거기 들어가기 전에 복음 사건 전체를 관통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좀 살펴보고 가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결론 삼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은 당신 마음에 일체의 금을 긋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금을 긋지 않으심으로써 마음속에 구분하고 나누는 경계의 벽을 쌓는 것을 일절 허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당신 마음 안에 단 하나의 예외 없이 그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다 들어올 수 있었고, 그것들은 하나로 조화를 이뤘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좀 더 제대로 알기 위해선 우리 마음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 얼마나 많은 금들을 그어 놓습니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금, 사랑과 미움을 나누는 금,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금, 남자와 여자의 금, 선생과 학생의 금, 부모와 자식의 금 등등 참으로 숱한 금을 그어 놓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곤 그 수많은 금들로 자신을 칭칭 묶어 옴짝달싹 못하며 살아가도록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결과 이래야 된다 저래선 안 된다 이건 선이다 저건 악이다 하면서 온갖 번뇌와 고통과 슬픔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이지 않습니까.
제일 먼저 긋는 금은 하느님과 나 사이에 긋는 금입니다. 그 최초의 한 획이 수많은 핵분열을 시작하면서 너무나 엄청나게 많은 금들을 긋기 시작합니다. 그 금들로 인해 철저한 분리와 배제가 일어납니다. 내 편 네 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 금들 속에서 끝없는 싸움과 투쟁이 일어나고 그 위를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습니다. 이렇게 우리 각자는 그리고 이 사회는 그 둘러쳐진 금들 속에 사로잡혀 신음하며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마음에 금을 그을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그 금 그어 놓은 마음을 한번 봤으면 합니다. 그 금 그어 놓은 마음을 가져와 내게 보여 줬으면 합니다. 마음에 금을 긋는다는 것은 마치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여 눈에 보이는 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과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애시당초 마음엔 금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가 마음에 불가능한 금을 그어 놓고선 그것이 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철석같이 믿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금을 긋고 하느님과 자신이 떨어진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이웃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금을 긋고 이웃 사람들과 자신은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망상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잊고, 배반하고, 이웃을 배제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이 그러하신 것처럼 끝없이 넓고 온전하며 완전한 자기 마음을, 좁쌀보다 작은 마음으로 축소 왜곡시켜 버리곤 극소수만 그 마음 안에 들어오게 하며 모든 이를 내친 가운데 스스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과거에 겪었던 온갖 아픔들에 사로잡혀 헤어나질 못하고 힘들어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과거의 체험이란 금을 그어 놓고 자신을 거기에 묶어 버림으로써, ‘지금 새롭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자신을 완전히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매 순간 끊임없이 새롭게 그리고 아름답고 완전하게 창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라는 금을 그어 거기에 스스로를 구속시키면서 진정한 자신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죽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 금을 그을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과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하나 된, 오직 하나의 마음만이 있음을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 하나의 마음이 사랑과 생명과 평화와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1997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수원 말씀의 집 원장, 서강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순천 예수회영성센터 피정지도 사제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