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어른을 하늘로 보내드리고…어머니 안 계신 세상을 상상도 하지 못해 하늘이 꺼지고 시간도 그대로 정지할 것만 같았다. 「인생은 짧다」라 떠들어댔지만 어머니를 모시는 행복에 겨운 나머지 기쁘고 아름답던 순간순간에 끝이 없을 줄만 알았던 것이다』
지난 93년 작고한 소설가 고 향정 한무숙 선생의 아들 김호기(에너지자원 기술개발지원센터 소장·45)씨가 어머니 생전 나눴던 편지들을 모아 「못다 쓴 편지」(을유문화사 간)라는 제목의 한 권 책으로 엮었다.
지난해 고인의 타계 2주기를 맞아 아버지 김진흥(전 한일은행장, 현 한무숙재단 이사장)씨가 펴낸 「못다 한 약속」의 후편이라 할 「못다 쓴 편지」는 20여 년 동안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펴낸 서간집이다.
전편이 좀처럼 털어놓기 힘든 고백과 뉘우침을 담은 참회록으로 아내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처럼 느껴지는 고백록으로 잔잔한 감동과 슬픔을 함께 담았다면 이번에 고인이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아들이 펴낸 책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혈육의 깊은 정과 삶과 죽음의 갈림이 오히려 더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어머니가 가신 영원한 나라는 분명 나에게는 침묵도 아니고 허무도 아니요, 날마다 내 가슴 속에 크게 꽃 피는 영혼의 빛이 충만한 곳』이라며 지금도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며 삶과 죽음의 장벽을 극복하고 있다.
요단강 저편에 어머니가 계심에도 오히려 「풍요한 부재를 더 진하게 느끼는 저자는 가슴 속에 생전의 어머니가 인용한 릴케의 말이 담겨 있다.
『어느 봄이 황금같은 날로 차 있으면 나머지 생은 그 시절에 채운 빛과 따뜻함으로 항상 빛에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하며 그 말을 실감한다』
무릇 모든 모자가 그러하겠지만 저자와 어머니 한무숙 선생과의 사이는 유난히 애틋하고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이 나눈 대화는 항상 「예쁜 것」이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식견과 의견을 가진 두 사람이었지만 모자가 나눈 대화는 언제나 꽃과 자연, 삶의 기쁨과 희망, 방금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 같은 것들이었다.
저자는 어머니에 대해 조금은 쑥스러워하면서도 「구원의 여신」으로까지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가장 여성스런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강건한 심기와 높은 지혜를 갖춘 분이었다.
『6·25 때 피난길에 올랐다가 돌아왔을 당시 다른 집은 엉망으로 도적을 당했는데 우리 집만 무사했지요. 어머니께서 에드가 알란 포의 「도둑 맞은 편지」에서 힌트를 얻어 이미 도적을 당한 모습을 보이시려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시고 대문도 활짝 연 채 피난길에 오르신 것입니다』
「여신」이었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 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아들 용기를 잃고 한무숙 선생이 애통한 마음을 토로한 글은 그대로 저자의 심정을 나타냈다. 『네가 없는데, 네가 없는데 해가 떠다니. 별이 반짝이다니. 이 모든 것이 무슨 배리같이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오히려 「부재의 풍요」를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셨으니 죽음이란 것이 아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은 삶의 연속으로 유한을 무한으로 이어주는 마력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생명의 양단」 사이에 우리 사이는 더욱더 가까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