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해외 원조 주일

오늘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초점은 죄인들의 회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신 일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회개와 제자로의 부르심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는데 “그들은 어부”(마태 4,18)였습니다. 좀 더 가시다가는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마저도 제자로 부르셨는데 그들도 “그물을 손질”(마태 4,21)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부였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네 어부를 다음과 같이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아무래도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제자로 삼겠으니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는 것보다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편이, 당신의 뜻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물고기 잡는 ‘어부’였던 이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따라나설 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을까요? 어떻게 하여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마태 4,22)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이들은 모두 ‘어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어부를 ‘페쉐(pêcheur)’라고 합니다. 그런데 발음은 매우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른 ‘페쉐(pécheur)’도 있습니다. 전자는 어부지만 후자는 죄악에 빠진 사람, 곧 ‘죄인’을 가리킵니다. 정확한 발음표기를 보자면, 어부를 뜻하는 페쉐(pêcheur)는 [pɛʃœːʀ]이고, 죄인을 뜻하는 페쉐(pécheur)는 [peʃœːʀ]입니다. 모음이 ɛ와 e의 차이니, 프랑스인이 아니고서야 구별해서 듣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단어에 속합니다. 저 같은 외국인이 ‘어부’와 ‘죄인’을 구분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pêcheur)였다”가 아닌 “그들은 죄인(pécheur)이었다”라고 들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물을 손질하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직업적으로는 물론 기록된 대로 ‘어부(pêcheur)’가 맞지만, 인간 본성상 ‘죄인(pécheur)’이기도 하므로,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업상 어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상 죄인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그들은 페쉐(pécheur)였다”라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인간 본성상 ‘죄인(pécheur)’인 그들을 부르시어,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릴, 사람 낚는 ‘어부(pêcheur)’가 될 것이라고 선언해 주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죄인들의 회개를 선포한 공생활의 시작점에서 일어난 이 부르심을 어부가 아닌 죄인을 부르신 사건으로 이해하는 건 어떨까? 물론 저의 이런 엉뚱한 발상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신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마태 9,13) 오신 분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도 처음부터 완전한 성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죄인이었기에 부르심을 받은 것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부족하고 죄가 많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따르는 한, 우리는 모두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말씀의 우물] ‘나’(Adam, 사람)는 누구인가

‘사람의 아들아’(히브리어 Ben-Adam, 벤 아담)라는 표현은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만 100여 번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생로병사, 곧 생성 소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에 비해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아람어 Bar-Enash)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사람의 아들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가 섬기게 될 ‘영원한 임금님’을 뜻합니다. 이미 전기 유다교 전통에서부터,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이분이 바로 다윗 집안에서 나올 구세주(메시아)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네 복음서에서도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본디 사람(Adam, 아담)은 영원하신 분을 닮아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이어서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자손이 번성하도록 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잘 가꾸고 다스리도록 축복해 주십니다.(창세 1,28 참조)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첫 인간은 그분을 피해 숲속에 숨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 아담(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히브리어 Ayekah)”(창세 3,9) 이 물음은 그분께서 어제도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실존 전체를 꿰뚫어 보시며 던지시는 그분의 물음은 실은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축복의 주인공들입니다. 나아가 첫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의 늪에서,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를 입은 새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바오로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세상에서, 온 우주를 통틀어 ‘나(我)’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잘 가꾸어 가도록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이제 우리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결법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먼저 ‘나’의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깨달음과 함께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세 율법의 초석으로 가르치십니다.(마태 22,37-39 참조) 우리의 생각과 능력만으로 무슨 일을 하기보다는, 다음 말씀으로 기도드리며 일을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8면

[말씀의 우물] 혜성처럼 나타난 여인

유딧은 어떤 기적이나 외부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지혜와 기도와 덕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 속에 유다 왕국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원로 우찌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 13,18) 이 유딧 칭송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천사 가브리엘의 성모 마리아 찬송과 맥을 같이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루카 1,41-42) 일찍이 성 예로니모는 유딧을 훗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우리 신앙인들은 유딧처럼 악마와 죄(폭력과 전쟁)의 ‘머리를 잘라 내야’(유딧 13,7-8 참조) 한다고 했습니다. 유딧은 미인계를 쓰지 않고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품위 있게 행동하며, 매사에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 속에 자신과 민족의 정당방위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입니다. 고통과 재난은 어디서 올까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고통과 재난을, 흔히 율법을 어기거나 ‘잡신 공경’(에제 36,18 참조) 등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데 대한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유딧기와 욥기에서는 고통과 재난이 우리 자신이나 민족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도 시험하고 계십니다. … 주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운 이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유딧 8,25-27) 유딧기는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 이를 재해석해서 교훈을 주고자 하는 해설서 「미드라쉬」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그 핵심 줄거리는 실제 사건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유딧기의 주요 신학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우선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지고의 하느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인간에게, 곧 개인 또는 민족에게 허락하신 시련의 기간이나 범위를 그 누구도 예측하거나 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분의 섭리와 우리 미래는 작은 요인들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유딧기 안에는 위로부터 오는 기적이나 아무런 사건도 보이지 않습니다. 베툴리아 주민 모두가 벌벌떨 때 원로 우찌아는 제안합니다. “만일 닷새가 지나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응답)이 오지 않으면”(유딧 7,31) 적군에게 항복하고 성을 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유딧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또한 유딧기에서는 율법 준수의 테두리에 얽매이거나 선민 이스라엘 보호에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율법이 금하는 암몬족 아키오르(신명 23,4 참조)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받아들입니다.(유딧 14,10 참조)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유딧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일치 주간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는 집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없애는 예전의 유행이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텔레비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과 같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경기에서나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거실에서 보기 위해 굳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 쟁탈전으로 서로 싸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됩니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졌던 거실은 이제 텅 빈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채널 쟁탈전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는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가 익숙합니다. 친구나 가족보다도 스마트폰이 더 가깝고, 때로는 나의 전부이고 심지어 마치 배우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또 자극적인 것 등을 모두 이 스마트폰에서 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사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쉬운 것,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주님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면 안 되나?’, ‘성체도 그냥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될까?’, ‘굳이 고해소에 들어가 고해성사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등 인격적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얻기 힘들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석에 앉아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기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실 진짜 구원자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귀찮다’고, ‘지루하다’고, ‘힘들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하기보다 피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심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중 두 번째 노래로, 하느님께서 선택된 종의 사명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민족들의 빛’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실수로 북쪽으로 1도 다르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비행기가 60마일을 날아갈 때 1도가 틀어지면 1마일을 벗어난다는 60대 1의 법칙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8,800km, 그래서 148km의 오차가 생깁니다. 인천 기준으로 북쪽 150km이면 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겨우 1도라 해도 목적지가 아예 바뀌게 됩니다. 우리 삶의 항로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편하고 쉬운 길,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딱 1도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매일 1도쯤 더 기도하고, 매 순간 1도쯤 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이루어지는 1도의 방향 전환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인터넷카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를 운영하고 있으며,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하는 강연 요청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사제다. ‘빠다킹’은 목소리가 느끼하게 들린다고 해서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으로, 25년 넘게 이 별명을 버리지 않아 공식 애칭이 되었다. 저서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요한을 “찾아가셨다”(마태 3,13)는 표현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파라기네타이’는 단순히 어떤 장소로 이동해 ‘왔다’는 의미를 넘어, 의도적이고 결정적인 공적 등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의 한가운데로 내려오신 현현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세례 사건은 예수님의 사명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고 전개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죄인들과 연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더욱이 놀랍게도 죄 없으시면서도 죄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세리들, 죄인들, 병자들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완고하고 차갑고 동정심 없이 살피고 감시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분리와 판단을 넘어서 그들 모두를 형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 방식은 공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죄인들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실 때(루카 19,5; 요한 4,7; 요한 5,6 참조), 엠마오로 향하던 낙담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루카 24,15 참조), 그리고 부활 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요한 20,19 참조)도 예수님은 먼저 움직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은 도덕적 올바름이나 법적인 정의를 넘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행위인 그분의 자비하신 마음을 드러내는 삶을 뜻합니다. 곧 연민과 자비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들 한가운데서 이루어야 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드러난 이러한 ‘의로움의 실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3)라고 약자와 함께하는 정의를 선포한 이 예언은,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연대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에게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이사 42,6)라고 하신 약속 또한, 세례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는 장면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한 사건입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날이며,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 위에 머무르셨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들이다”라고 선언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은총은 예수님께서 먼저 요르단강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세례는 단순히 죄를 씻는 정화 예식이 아니라, ‘의로움’과 ‘성령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시는 존재로 변화되고,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여정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태도, 곧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이사 42,1; 마태 3,17 참조)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글 _ 전봉순 수녀(그레고리아·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1985년 입회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그 후 동 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부산 가톨릭 신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구약성경 주해, 시편 Ⅰ- Ⅲ권」, 「시편 90편과 지혜로운 마음」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말씀의 우물] 누구를 위한 성모송?

성모송은 성경 어디에 나올까요? 또 누구를 위한 기도문일까요? 우리가 미사를 비롯하여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때 바치는 가장 짧은 기도문인 십자성호가 마태오복음 28장 19절에서 나왔듯이, 성모송 앞부분도 루카복음 첫 장에서 나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인사합니다. 뒤이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께 찬미가를 읊어 올립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성모송 전반부는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가 합쳐져 이루어집니다. 성모송 후반부는 성모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며 주님께 올리는 기도와는 모양새가 다릅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는 “베푸소서!”라는 형식으로 직접 청원 양식인 반면, 성모님께는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대신’ 또는 ‘우리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전해달라는, 빌어달라는 전구기도입니다. 아울러 루카복음 첫 장에 나오는 두 여인의 만남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그때 태중에서는 선구자 요한 세례자와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 만나십니다. 엘리사벳은 외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요한 세례자)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그렇다면 성모송은 누구를 위한 기도문인가요? 전반부가 성모님 찬가라면 후반부는 청원기도입니다.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성모송을 봉헌하는 나 자신과, 믿는 이들과,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기도입니다. “저희 죽을 때에”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쉴 새 없이 매 순간 한 발짝씩 다가오는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도록 주 하느님께 전구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는 2001년 안식년 어느 날 성모송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아, 성모송은 우리 믿는 이들과 온 인류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빌어달라는 기도구나”라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뜻을 깨닫는 축복을 누리게 됐죠. 특히 ‘이제(nunc)’와 ‘우리 죽을 때에(et in hora mortis nostrae)’라는 표현 안에서 그저 쉼 없이 주님께 전구해 달라는 뜻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제(지금)’를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모송을 봉헌하는 우리는 성모님께 실로 엄청난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나와 우리 모두의 참 행복을 주님께 끊임없이 빌어달라는 기도니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말씀의 우물] 그분 이름을 거룩하게

구약과 유다 문헌에 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첫째, 율법학자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를 때 이스라엘 백성(믿는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레위 22,32; 신명 32,51; 이사 8,13 참조) “너희는 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나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드러나도록, 너희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레위 22,31-32) 둘째,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완성될 인류 구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뭇 민족이 보는 가운데 주 하느님께서 의로운 판관이며 구원의 완성자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스위스교회의 주보 성인 브루더 클라우스(1417~1487)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아인지델른 베네딕도 수도원 성지까지 약 50km를 성지순례 하는 동안 주님의 기도만 봉헌했답니다. 몇 번이나 바쳤을까요? 단 한 번도 못 바쳤다고 합니다. 놀랍지만 당연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다 보면, 그 첫 소절 안에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될 듯합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야고 4,14)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느님께 감히 직접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클라우스 성인은 이런 물음을 놓고 아마도 10시간 묵상으로도 그 오묘한 신비를 한껏 깨닫기에는 결코 흡족할 수 없었을 듯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실상 지상 최고의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온 우주 안에 둘도 없이 단 하나뿐인 나를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를 어찌 몇 시간 안에 단 10%라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고해성사 보속으로 가끔 “주님의 기도를, 뜻을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한 번 바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시겠습니까?”라고 교우분들께 제안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런 기도 매일 합니다”라면서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를 마치 대단치 않은 기도로 여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분들께서는 주님의 기도 봉헌 때마다 에제키엘서 36장에 나오는 구원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분의 축복이 이미 우리 안에서 활짝 피어오르리라 믿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해주는 날, 성읍들에는 다시 사람이 살고 폐허는 재건되게 하겠다. … 그래서 사람들이, ‘황폐하였던 이 땅이 에덴 정원처럼 되었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에제 36,33-35)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다. 그들은 왜 유다인이 아닌 동방 박사들이었을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이 혈통을 넘어, 진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별은 낮에도 빛나지만, 박사들을 인도하며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 위에서 멈췄다. 하느님은 각 사람의 수준과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데, 점성술과 자연법칙에 익숙했던 박사들에게 ‘별’이라는 자연적 표징을 통해 그들을 초자연적인 신앙의 신비로 인도하셨다.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될 수 있다. 동방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예물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본성을 고백한다. 황금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한다. 그분이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흠숭의 표현이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인성 곧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데, 인간의 죽음을 썩지 않게 보존한다. 그러므로 몰약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구세주의 인성을 미리 보여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사랑의 ‘황금’을, 기도라는 ‘유향’을, 육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절제라는 ‘몰약’을 바쳐야 한다.” 동방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제물은 한편 오늘 우리에게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준비하도록 인도한다. 황금은 물질의 헌금보다는 내 삶의 가장 귀한 가치와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는 것이다. 곧 나의 시간, 재능 그리고 돈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왕좌에 누구를 앉히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하는 삶이 오늘날의 황금을 바치는 삶일 것이다. 유향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에서 쓰였다. 이는 지적인 영혼이 하느님께 고양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대의 삶에서 소음과 분주함 속에서 마음을 모아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 시간이 유향의 내적 의미이다. 하루 중 단 5분이라도 세상을 향한 관심을 내려놓고, 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관상’의 향기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활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 현대의 유향이다. 몰약은 시신의 부패를 막는 데 쓰였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수난을 상징한다. 나의 이기심과 탐욕이 영혼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는 희생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이를 이웃을 위한 사랑의 도구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내 안의 미움이 흘러가도록 하는 사랑의 행위가 바로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내적인 몰약이다. 왕권으로서 황금이 내 우선순위의 봉헌이 되고, 신성을 고백하는 유향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기도의 봉헌이며, 인성의 수난을 뜻하는 몰약은 자기 욕망의 절제로 생기는 고통을 인내로 승화하는 희생 봉헌을 뜻한다. 이렇게 동방 박사들이 주님께 봉헌하는 세 가지 보물들은 오늘의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영적인 선물이다. 박사들이 보물 상자를 열어 예물을 드렸듯이, 우리도 마음의 보물 상자를 열어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물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꿈에 지시를 받은 박사들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고 전한다. 이것은 ‘회심’의 전형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길 곧 죄의 길, 세속적인 길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를 뵌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오늘의 동방 박사인 우리가 헤로데의 세속적 권력과 탐욕의 길을 피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본다. “나는 내 삶에서 떠오른 별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나의 황금인 재능, 유향(기도), 몰약(희생)을 기꺼이 준비하고 바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별’과 같은 질문을 통해, 동방 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영적 보물을 바치며 엎드려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198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96년부터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강의했다. 2019년 호주 시드니 한인본당 주임 신부를 맡았고, 2023년부터 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8면

[말씀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오늘 루카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로부터 메시아 탄생에 관하여 들은 말을 전해 줍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놀라워하였지만, 마리아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마리아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먼저 루카 복음이 ‘간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쉰테레오’(συντηρέω)입니다. 쉰테레오는 어떤 상태를 잘 유지하고 지켜 ‘보존한다’라는 뜻의 ‘테레오’(τηρέω)에서 유래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어, 잔치가 끝날 때까지 좋은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되자 과방장은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 2,10) 여기서 ‘남겨두었다’라는 말이 테레오인데, 포도주를 양적 차원에서 남겨두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포도주의 질적인 상태까지 변하지 않고 그 본래의 맛과 향이 잘 ‘보존되었다’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 테레오에 ‘~와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쉰’(σύν)을 덧붙여,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다’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보존했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천사의 말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온전히 그 말씀에 일치시켜, 말씀의 본질적인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간직한다는 것은 간직하려는 대상에 나의 생각과 뜻을 일치시키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내가 그 안에 머물면서 반복해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특별한 간직함은 끊임없는 ‘기억의 현재화’로서 ‘되새김’을 의미합니다.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번역되는 ‘쉼발로’(συμβάλλω)가 쉰테레오 뒤에 함께 사용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쉼발로는 원래 ‘의논하다, 함께 이야기하다, 협의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는 본래 주사위를 던져 제비를 뽑거나, 씨앗을 땅에 뿌린다거나, 그물을 바다에 칠 때와 같이, 무엇을 ‘던진다’라는 뜻을 가진 ‘발로’(βάλλω)에서 유래하지요.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βάλλω) 의미 물음은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한다는 점에서, 내가 나와 함께 의논하고 이야기하는 것(συμβάλλω)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할 때, 곰곰이 되새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곰곰이 되새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전할 때에도 마리아는 이미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 참조) 하였고, 잃었던 소년 예수를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루카 2,51 참조) 하였었지요. 마리아는 항상 곰곰이 생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이해하기 힘들 때마다 그 안에서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며 순종하였습니다. 간직하고 되새긴다는 것. 그것은 결국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끊임없이 주님의 뜻과 말씀의 의미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기념하는 우리는 마리아의 그 모범을 따라 힘겨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안에 숨겨진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그분 마음에 내 마음을 두는 거룩한 행위이며, 내 마음이 주님 마음 안에서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201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 부원장, 의정부교구 고양동본당 주임을 거쳐 2024년부터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5학년 원감으로 소임하고 있다. 2025년 「애니그마, 말씀의 수수께끼1」을 저술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8면

[말씀의 우물]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님의 기도(마태 6,9-13)에는 일곱 청원 기도가 나옵니다. (참조: 루카 복음서 11장 2-4에는 다섯 청원만 나옵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를 각 나라말로 옮겨서 봉헌합니다. 그중 첫 번째 청원 “아버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빚나시며”는 무슨 뜻일까요? 그 뿌리를 우리는 에제키엘서 36장에서 찾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의 거룩함이 선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와 같은 표현이 에제키엘서 안에서만 25번이나 나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스라엘)을 민족들 사이로 쫓아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버렸다. 그들의 길과 행실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였다.”(에제 36,19) 주님 말씀과 뜻대로 살지 않은 대가로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제국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뭇 민족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 “이자들은 주님의 백성인데 그분 땅에서 나와야만 했지.”(에제 36,20) 이는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남의 나라 땅에서 헤매는 이스라엘의 운명, 그들이 받고 있는 징벌적 상황을 타민족들이 고발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들을 선택하신 주 하느님의 무능을 폭로하며 빈정거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 이제는 이스라엘을 뽑으신 주님께서도 지치셔서 손수 뽑아 세우신 백성을 더 이상 지켜줄 힘이 없으시구나” 하면서 뭇 민족이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할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조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내가 뽑아 세운 백성은)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에제 36,20) 이제 주님께서 당신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안이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이름을 걱정하게 되었다.”(에제 36,21) 주님께서 다짐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에제 36,22) 주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그분의 인격과 속성과 그분의 존재를 보다 품위 있게 드러내는 전통적 표현 양식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을, 그분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유다교 전통과 구약 안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 표현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1979년 인천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독일 튜빙엔대학교와 스위스 루체른대학교에서 성서주석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과 총무,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인천교구 역곡2동본당 주임을 마지막으로 본당 사목 여정을 마치고 2025년 1월 6일부터는 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사제로 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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