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⑥

다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마라” 성경은 인간 생명이 근원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닮게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존엄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인간이 다른 이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마땅히 받아야 하지만 그의 생명을 빼앗는 사형제도, 태아의 생명을 해치는 낙태, 자기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살 등을 금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축시키고 약화시키는 언행을 자제하는 것’도 이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대한 무시, 미움, 부정적인 선입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과 질책,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과 행위를 자제하는 것 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계명을 설명하시면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화를 내는 행위를 경계하시며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21-24) 서로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나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하느님께 사랑받는 소중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특히 신앙인으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과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는 보람과 기쁨, 진정한 행복, 나아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이웃 사랑의 은혜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 “간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창세 2,24)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남자와 여자는 자유로운 의사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의를 서약하고 부부로 맺어집니다. ‘부부 사랑’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전인적(全人的) 사랑입니다. 부부 사랑은 몸과 마음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둘째, 배타적(排他的) 사랑입니다. 부부 사이에 제3자의 개입을 거부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부 관계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사랑의 서약을 충실히 지키는 서로에 대한 신의입니다. 그런데 신의로 맺어진 부부 관계를 훼손하는 행위가 간음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일차적으로 부부 외의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계명은 ‘부부가 서로에 대한 사랑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인은 부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본격적인 의미에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각자 인간적인 부족함과 단점을 가지고 있기에 성경은 부부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요, 서로 협력하는 관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이 나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그들이 이루는 가정은 참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의 가르침이 우리 자신의 부부관계를 다시금 살펴보는 계기가 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배려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 행복한 가정 되시길 바랍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말씀묵상] 연중 제29주일, 전교 주일

갓 태어난 아기의 시력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색깔을 구별 못 하고, 시야도 흐립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눈에 힘을 주어서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20~30cm 정도 거리에 있는 물체를 보게 됩니다. 바로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부모의 얼굴과 아기 얼굴 사이의 거리입니다. 이 거리에서 아기는 빤히 쳐다봅니다. 결속과 유대의 대상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눈에 힘을 꽉 주고 또 크게 뜨고 누군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결속과 유대를 느껴야 이 세상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에 힘주지도 않고, 눈을 감고만 있습니다. 아예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셔?” 노력했습니까? 하루 중 눈에 힘 꽉 주고 찾아봤습니까? 기도하면서 그분과 시선을 맞추려고 했습니까?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도 않고 안 계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오랫동안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 자체인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바라보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역시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로, 복음에서는 교회의 본질이 왜 전교에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한 제자는 분부하신 산에서 뵙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런데 의심하는 사람도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의심은 주님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배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확신과 흔들림 사이의 주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 세상 것에 너무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교는 모든 의문이 해소되고 완벽한 성덕에 도달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함, 상처, 인간적 나약함을 지닌 불완전한 공동체가 부활하신 분의 부르심에 기대어 첫발을 내딛는 것이 전교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시선을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나약함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주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적극적으로 전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시선을 맞추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라고 외칩니다. 그래야 모든 민족이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밀려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되고 5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던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이 사람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고, 여기에 방송, 강의 요청 등을 계속해서 받게 되었습니다. 신기했지만,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입니다. 묵상 글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느님의 성실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쓴 것뿐인데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고민을 선배 신부님께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왜 무시해?”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쓰시는 것입니다. 나의 완벽함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한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나’라는 틀에 갇혀서 정작 하느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에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 나를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오로 사도의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로마 10,18)라는 말씀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교의 시작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10-18 제3511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군일 주일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할 때 우리는 먼저 상을 차립니다. 그 정성에는 손님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하는 식탁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친교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생명의 상을 차려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경에서 상과 잔치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은 왜 잔치를 베푸실까요? 성경에서 ‘상’과 ‘잔치’는 그저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행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과 친교를 상징합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친교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잔치는 관계와 친교, 배부름과 생명 등 하느님의 복을 나타냅니다. 제1독서에는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임이 잘 드러납니다.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먼저 준비하시고 죽음과 눈물과 수치를 모두 제거해 주시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잔치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 넓은 구원의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려 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돌보심 속에서 드러납니다. 시편 23장 5절에서는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합니다. 이는 위협 속에서도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시고 먹이시며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상은 하느님의 보호와 환대와 친교를 상징합니다. 이 상을 차려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의 식탁에서 당신 백성을 먹이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이야기로 비유하십니다. 임금은 먼저 잔칫상을 마련한 뒤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다른 이들은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임금의 초대, 곧 하느님의 초대보다 자기 일과 관심사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마음과 힘을 다 쏟으며 일과 책임, 계획과 걱정에 매여 하느님의 초대를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어 그분의 부르심에 선뜻 응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주 세상의 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겨 하느님께서 차려 놓으신 잔치의 기쁨을 놓치곤 합니다. 초대된 이들이 거절하자 임금은 종들에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라고 합니다. 이에 많은 사람이 잔치에 들어옵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애와 은총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잔치를 마련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풍요로움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필리 4,19 참조) 그런데 복음은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이 예복은 세례로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이 받은 은총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을 상징합니다. 예복은 하느님의 초대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우리를 초대하시지만,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생명의 식탁으로 초대받습니다. 혹시 우리는 그 초대를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께서는 먼저 생명의 식탁을 차려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의 예복을 입고 주님의 식탁으로 나아갑시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10-11 제3510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⑤

두 번째 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하느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을 합당한 존경과 사랑으로 불러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반면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입니다. 오늘날 신앙인은 기도하거나 전례를 거행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경건하게 부르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고백합니다. 대표적인 기도로 ‘성호경’과 ‘주님의 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은혜로운 생활을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의 삶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일상 가운데 하느님과 함께하며, 자기 전에 그날의 삶 안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생활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 커지게 됩니다. 세 번째 계명 “안식일(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구약에서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탈출 20,11)와 구원(신명 5,15)을 기념하는 거룩한 날입니다.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쉬면서 거룩한 모임을 가지고(레위 23,3), 감사의 예물을 봉헌하였습니다.(민수 28,9-10) 신약에 이르러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 주일(主日)로써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주일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며 거행하는 주일미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입니다. 신앙인은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심으로써 영적인 힘을 얻어 다시 한 주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신앙생활은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 은총의 오아시스’입니다. 네 번째 계명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이 계명은 근원적으로 생명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부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선물인 자녀를 세상에 낳고, 사랑과 수고로써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를 하는 것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 가운데 첫 번째에 자리할 만큼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집회 7,27-28) 또한 이 계명은 장성한 자녀들에게 부모님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환기시켜 줍니다. 특히 부모님이 연로하시거나 병환 중에 계실 때 자녀들은 정성을 다해 정신적·경제적 도움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10-11 제351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7주일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임자는 두 번 나오고, 그가 보낸 종들도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무려 여섯 번 나옵니다. 주인의 자리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만 잠깐 비칠 뿐, 한복판은 온통 소작인들의 차지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결국 소작인들의 이야기, 곧 우리 이야기입니다. 포도밭은 이미 다 마련돼 있었습니다. 주인이 포도밭에 울타리를 두르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습니다. 소작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할 일은 가꾸고 거두는 일뿐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 대목 앞에서 주인은 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놀라워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의 은총, 어머니의 기도, 먼저 믿은 이들이 흘린 피, 오늘 아침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숨결까지 포도밭은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필로칼리아의 은수자 마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공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고. 그러므로 소출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멀리 떠났습니다. 이 떠나심이 비유에서 가장 신비로운 대목입니다.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하느님께서 자리를 옮기신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그 긴 시간은, 사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비켜서신 자리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되 감시하지 않으시는 사랑, 하느님의 비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의 자리에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비극은 아주 짧은 한 문장이었습니다.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맡았다’는 말이 ‘차지하자’는 말로 바뀌는 데는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필로칼리아의 스승들은 이것을 소유의 생각이라 부릅니다. 맡겨진 것을 제 것으로 셈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은 이미 살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직분, 내 성당이라고 말할 때, 그 ‘내’라는 한 글자가 어느새 울타리에서 감옥으로 바뀌곤 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종이 맞아 죽자 더 많은 종을 보내고, 그들마저 죽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힘을 키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더 약한 이를 보냅니다. 무장한 군대가 아니라 아들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 앞에서 더 강해지시는 분이 아니라 더 약해지시는 분입니다. 아들은 포도밭 밖으로 내던져져 죽임을 당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이 순서를 일부러 그렇게 적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참혹한 이야기 끝에 시편을 읊으십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버려진 아들이 곧 버려진 돌입니다. 그리고 그 돌은 앙갚음하지 않고 기초가 됐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는 장면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열매를 내지 않는 포도밭은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포도밭이기를 그만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어떤 민족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택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새 소작인은 멀리서 오는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손을 펴는 바로 그 소작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칠 소출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제때에’ 바치라고 합니다. 수확에는 때가 있습니다. 용서에도 때가 있고, 화해의 전화 한 통에도 때가 있고, 병상에 계신 분을 찾아가는 일에도 때가 있습니다. 소출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그대로 참된 것, 옳은 것, 사랑스러운 것 하나를 마음에 품고 그대로 사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미사성제 때 빵과 포도주를 제대에 올립니다. 그것은 밀밭과 포도밭의 소출입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우리 손으로 조금 매만져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미사는 소작인들의 예식입니다. 그러니 소작인으로 산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신 그분께서 오늘도 우리 손에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제때에, 기쁘게 돌려드립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④

십계명 계명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삶의 길잡이입니다. 당신 백성을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이 주신 계명들 가운데 삶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으로서 그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처음 세 계명(1~3계명)은 ‘하느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으로 드려야 할 응답으로서, 사랑의 수직적 차원(하느님-인간)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일곱 계명(4~10계명)은 ‘이웃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실천해야 할 규범으로, 사랑의 수평적 차원(인간-인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십계명은 이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게 될 계약의 내용이 되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됩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십계명은 오늘날 신앙인의 윤리 생활과 고해성사를 위한 양심 성찰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첫 번째 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출애굽 사건 ▲마른 땅을 밟고 갈대바다(홍해)를 건너온 사건 ▲척박한 광야에서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느님께서 물과 메추라기와 만나를 보내시어 그들을 살려주셨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권능과 그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구원을 체험함으로써 주님만이 유일하시고 참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쉐마 기도를 합니다.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쉐마 기도를 할 때마다 신명기 말씀(6,4-5)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흠숭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안에서도 하느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흠숭하는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구약 시대에 물질적 풍요와 다산을 빌미로 이스라엘을 유혹했던 바알신이 대표적인 우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 우상은 무엇인지 다시금 살펴보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8면

[말씀묵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순교자들이 피로 증거한 신앙의 모범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특별히 더 결심하는 날이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고귀한 정신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에서 ‘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거절하다’, ‘거부하다’ 또는 ‘부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지요. “믿음으로써,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파라오 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였습니다”(히브 11,24)라는 구절에 사용됩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태 26,70)라고 할 때도 쓰이지요. 모두 어떤 주장이나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용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여기서 ‘버리다(아르네오마이)’는 물건이나 쓰레기 따위를 내다 ‘버린다’고 할 때처럼 물질적 차원에서 소유를 포기하는 버림이 아니라, 내적인 차원에서 결코 내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르네오마이는 단지 부정이나 거부 의사만 표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관계의 단절까지도 나아갑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어 완전히 인연을 끊어 버리는 거지요. 이때는 그냥 버리다가 아닌 ‘저버리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묵시 2,13) 이 ‘저버림’은 존재론적으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와 맺어왔던 관계 자체를 끊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가 표현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아예 ‘벗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옛것을 ‘버리고’ 옛 악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건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는 존재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따르려면,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와 회심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많은 소유 중에서 어느 정도만 덜어내는 ‘선택적 버림’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온전히 비워내지 못하는 건 양다리를 걸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버림’이란, 그냥 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 버림’입니다. 남김없이 비워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완전하게 끊어 버림은 단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버리고, 또 버려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버리는 일은 결코 일생에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공관복음 중에서 루카복음에만 유일하게 삽입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날마다”(루카 9,23)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날마다’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게 노력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만 내 고집을 꺾는다거나 이런 조건에서만 내 뜻을 접는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날마다’ 그래야 합니다. 어제 버린 나를 오늘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내일도 버릴 수 있어야 하지요. 자신을 버리는 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자신을 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처음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처럼 그분을 따르십시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③

시나이 계시 이번 편지부터는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인 시나이 계시에 대한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을 걸어간 지 석 달째 되는 날 시나이 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시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가르침들을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시나이 계시입니다. 시나이 계시에는 ‘시나이 계약’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시나이 계약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말합니다. 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삶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인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거룩한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탈출기 19~40장,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수기 1장~10장(10절)이 시나이 계시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말씀이 전할 만큼 시나이 계시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나이 계약의 의미 계약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버리트’는 사슬이란 뜻이 있습니다. 계약의 두 당사자가 사슬처럼 단단하고 확고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맺으신 계약으로 하느님 구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권능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참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이 바로 시나이 계약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시나이 계약은 구약성경의 구약(舊約)을 지칭하는 계약이라 하겠습니다. 시나이 계약은 네 단계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①계약 준비(19장) ②십계명(20,1-17) ③계약의 책(20,22-23,19) ④계약 의식(24,1-11). 계약 준비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기 전에 먼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하셨고, 독수리 날개에 태워 오듯이 광야 길을 인도해 주신 구원자이십니다.(탈출 19,4) 이어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축복을 약속하십니다.(탈출 19,5-6)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소유’가 됩니다. 본래 소유란 히브리어로 임금이 아끼는 보물을 뜻합니다.(1역대 29,3 참조) 이제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임금이신 하느님의 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사제들의 왕국’이 됩니다. 이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중개하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사제적 직분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성별 되어 하느님께 속한 ‘거룩한 민족’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을 준비를 하도록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19,16-25)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②

열 가지 재앙과 과월절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마음은 완고하기만 합니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재앙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 열 차례에 걸친 재앙을 통해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탈출 7,5.17; 8,6), 온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십니다.(탈출 9,16)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을 구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탈출 10,2; 11,7) 거듭되는 재앙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던 파라오는 이집트의 맏배를 치신 열 번째 재앙을 맞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로 표시를 합니다. 이윽고 열 번째 재앙이 닥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맏배의 생명을 보존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권능에 굴복하게 된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합니다.(탈출 12,31) 과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했던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중요한 종교 축제입니다.(탈출 12,1-14.21-28.43-51) 종살이의 억압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구원 체험을 기념하는 과월절은 ‘건너감’을 뜻하는 파스카라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과월절은 신약에 이르러 하느님의 인간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감)를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긴 여정을 가게 됩니다. 갈대 바다와 만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병거부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이 변한 이집트 파라오가 추격해온 것입니다.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탈출 14,13) 하느님께서는 바닷물을 밀어내어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갈대 바다를 건너가게 됩니다.(탈출 14,15-31)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다시금 체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벅찬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탈출 15장) 갈대 바다 너머 시나이 반도로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막과 같이 척박한 광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마라(탈출 15,23-25)와 르비딤(탈출 17,6)에서는 백성들이 물을 마시게 해 주시고, 신 광야에서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 주십니다.(탈출 16,13) 특히 하느님께서 매일 내려주신 만나는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는데(탈출 16,31)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양식이 됩니다.(탈출 16,35 참조; 시편 78,24-25; 105,40) 이스라엘 백성은 힘든 광야 여정 가운데 하느님을 더 절실하게 찾았고,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척박한 광야가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예전 신학생 때 만난 한 아이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일일 노동자가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저 같으면 “그래, 꼭 갚아라”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예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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