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진리를 찾는 진실한 사람, 바르톨로메오

철학과 예술이 발달했던 아테네에서 거지꼴을 한 노인이 거리에서 큰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노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사는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현했다. 부자나 관리, 유명 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꿈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인은 “돼지가 되어 즐기기보다는 사람이 되어 슬퍼하겠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니까”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부패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비판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아테네 정부는 청년들을 미혹하고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체포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죄 없이 죽는 것이 억울해 그를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사형을 받아들였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을 같은 인물이라 여긴다. 사도의 명단에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항상 같이 짝을 이룬다. 실제로 필립보는 나타나엘의 친구였고 나타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참 예언자를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란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멈칫한다. 나자렛은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곳이 아닌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자 필립보는 그래도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갔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보자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타나엘은 첫 만남에서 예수님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제자가 된다. 그리고 ‘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서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경건한 사람인 바르톨로메오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참다운 이스라엘 사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많이 알수록 새로운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했다. 그는 칼로 가죽이 벗겨지고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칼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성화의 상징이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죽었던 진실한 사람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라오디케이아에 보내진 편지(묵시3,14-22)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부자간에 견주며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로, 구약성경에도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던 것입니다.(탈출 4,22; 이사 1,2; 예레 31,9.20 등)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백성의 불충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호세아서 1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또한 쥐엄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비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고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된 뒤 배고픔에 시달리다, 돼지 밥이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돼지 밥으로 나오는 ‘열매 꼬투리’가 바로 쥐엄 열매입니다. 이는 쥐엄 열매의 생김새가 콩꼬투리 같아서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듯합니다. 쥐엄 열매는 껍질을 먹는데요,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맛이 떫어 즐겨 찾는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좋다고 찾는 이들이 늘었지만 말입니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럽(carob)입니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도 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하루브’가 메뚜기를 뜻하는 ‘하가브’와 비슷해서 그런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마르코복음 1장 6절의 메뚜기를 쥐엄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늦여름부터 갈색으로 완숙하는 쥐엄 열매는 많은 양을 거둘 수 있으므로, 빈민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쥐엄나무가 가난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다 캐럽(carob)이 캐럿(carat)으로 발전하며 부의 상징으로 뒤집히게 됩니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의 씨가 무게를 재는 단위로 쓰였는데, 이것이 이후 보석의 단위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마태오복음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꼴찌가 첫째 된 셈입니다. 다만 쥐엄나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일흔 해가 지나야 첫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23ㄱ에 나오는데요, 이는 ‘호니’라고 하는 한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안에서 호니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기원전 6세기)의 ‘운명이 바뀌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어떻게 그 일이 잠들어 ‘꿈꾸는’ 동안 가능한지 연구하였답니다. 성경을 너무 자구적으로 해석한 사람 같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쥐엄나무를 심는 걸 보고, “그게 열매 맺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심느냐?”고 호니가 물었답니다. 그 남자가 70년이라고 답하자 호니는 “당신은 70년을 더 살 자신이 있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나는 내 조상이 심은 쥐엄 열매를 먹었소. 이건 내 후손을 위한 거요.” 그 뒤 호니가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열매를 모으고 있더랍니다. 호니가 그를 보고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의 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니가 잠든 동안 일흔 해가 흐른 셈이죠. 놀란 호니가 집으로 가니, 아무도 그를 호니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호니는 슬퍼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 뒤 쓰러져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에서 구원받기까지 과정은 길어 보이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꿈을 꾼 듯 쏜살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삶과 추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죠. 70년 자란 뒤 열매를 맺는다는 쥐엄나무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 실린 여호수아기의 말씀도 기다림과 인내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수치’를 떨치고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옛것을 넘어 새것이 되도록”(2코린 5,17)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기까지(2코린 5,21) 구약 시대 내내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열혈당원이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시몬

독립운동가 중에서 이봉창 의사(1900-1932년)는 처음으로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국인의 용기를 드러낸 인물이다.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이 일본인의 식민정책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1931년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스스로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애국선서식과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슬퍼하는 김구 선생을 오히려 위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봉창 의사는 사전답사를 하고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알려지자 특히 중국 신문들은 한국 청년 이봉창이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였다고 대서특필했다. 이후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독립투사의 활동을 은연중에 많이 돕게 됐다. 1932년 10월 10일 일본 경찰이 둘러싼 가운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이봉창 의사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체포부터 심문, 재판, 심지어 교수형 직전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의 제자 명단에 열혈당원 시몬(마태 10,4)이 등장한다. 열혈당은 극단적인 유다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모임으로 우상숭배와 배교, 율법적인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의로운 진노와 심판의 대행자로서 하느님께 헌신한 자들이다. 열혈당원들은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고 로마인들에 대한 세금 납부도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설명해서 대부분은 현대의 테러리스트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타협적인’ 유다인들에 대해서는 약탈, 살인을 저지르는 공격을 감행하였다. 서기 70년 열혈당은 로마에 대항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런데 열혈당원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 시몬은 이집트에서 설교하였다. 시몬은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화에서 시몬을 톱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예수님과 열혈당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에 대한 태도 속에 있다. 열혈당은 율법을 어기는 자를 엄단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새 율법을 선포하셨다.(루카 6, 27-36 참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인 행동의 중심이며 규준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의 모범이었다.(루카 10,30-37 참조)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지만 진정한 사랑과 화해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필라델피아는 다른 곳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건설된 도시다.(기원전 2세기 중반)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으로 불린 도시였다. 기원후 17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다.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약한 지진이 빈번했지만 비옥한 토양이 있어 여러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스미르나에서 폴리카르포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 열한 명이 함께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신앙에 관한 한, 필라델피아는 순수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에는 비판이나 꾸지람이 없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문의 형상에 빗대어 열고 닫는 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의 이야기는 엘야킴에게 왕국의 권력이 이양되는 장면에서 나온다.(이사 22,22) 엘야킴에게 문을 열고 닫는 데 필수적인 다윗의 열쇠가 주어지는데, 하느님의 구원이 다윗 가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 안에 배치한다.(묵시 3,3; 22,16)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 수렴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어진 문은 ‘열려진 문’(묵시 3,8)이다. 이제 문은 닫힐 리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열려진 문이라는 형상을 통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 역시 ‘열려진 문’을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 않던가.(1코린 16,9; 2코린 2,12; 콜로 4,3) 요한묵시록 21장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의 문도 사방으로 모두 열려 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힘이 약하다.’(묵시 3,8)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라델피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약한 힘이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징한 일이다. 믿음의 단순성은 주변 것들에 휘둘리는 일희일비의 가벼움을 걷어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우리의 편지는 10절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우리말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이렇다. ‘왜냐하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가 된다. ‘나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 본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당연한 운명으로 이해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살이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고 그 자리는 악을 제거하고 비워낸 천상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자리다. 필라델피아 교회도 ‘땅의 주민들’의 시험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묵시 3,10) 세상의 우상숭배와 악함을 말할 때 사용된 ‘땅의 주민들’은 필라델피아 교회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다.(묵시 6,10; 8,13; 11,10; 13,8.12.14; 17,2.8)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한 분을 향한 단순한 일이라면 우리 생애의 복잡다단한 일들은 대부분 부수적인 것이 된다. 부수적인 것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인 것들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가벼움이 이 세상을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과연 우리는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내 삶의 조각들’로 여기는가. 주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향해 맞추는가. 아니면 이런저런 조각을 내던지며 있지도 않을 새로운 조각을 갈망하며 애태우는가. 필라델피아 교회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제 것으로 당겨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갈망하며.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는 참된 유다인이다.(묵시 3,9) 세상이 유다인이라고 인식하는 혈육의 유다인을 ‘사탄의 무리(회당)’라고 거칠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유다인이라 말한다. 학자들은 필라델피아 내에 벌어지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생각하곤 한다. 추정컨대,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가 유다인의 혐오와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지금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 속에 살아가도, 제 힘이 약해 세상에 억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일, 매우 어려운 그 일로 필라델피아는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다인들이 누릴 복된 시간을 요한묵시록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돌려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유다인들이 엎드리게 하겠다는 말씀(묵시 3,9; 이사 45,14 참조),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말씀(묵시 3,12·유다 사회는 아브라함을 ‘세상의 기둥’으로 이해했다), 세상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승리하는 이에게 새기겠다는 말씀들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갔던 필라델피아 교회에겐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를 가리키는 ‘화관’을 ‘이미’ 쓰고 있었다.(묵시 3,13) 힘이 약하고 박해 속에 겨우 살아내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살이 자체를 제 운명으로 꼭 껴안고 있는 필라델피아에겐 이겨야 할 대상도, 이겨서 얻는 저만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처럼 오늘 하루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열린 문이 행여 닫힐세라 그렇게 구원을 지켜내며 필라델피아는 승리하고 있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오늘 제1독서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양 떼를 치며 살아가던 모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명은 아닙니다. 이미 동족에게서 배척받은 과거가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답은 수많은 신학자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있는 나’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어떤 보충설명이나 수식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수식어는 단순할수록 좋을 것이고 성서의 다른 부분이나 특히 탈출기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당신의 성향이나 행동 양식 등과 맥락이 맞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탈출기 3장의 하느님 말씀에서 찾아보자면,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장의 곳곳에서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탈출 3,7-10 참조)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니 그런 의미에서 늘 함께 계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8) “(나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3,17) 이 탈출기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인간의 고통을 직접 겪으시고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사 7,1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는 이름을 그분은 받으셨습니다. 구약에서 ‘있는 나’로 희미하게 계시된 그분이, 신약에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파스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함께 있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이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 말합니다.(1코린 10,5-6 참조) 예수님께서도 빌라도가 살해한 사람들과 사고로 죽은 이들을 언급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배척하여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그가 열매를 맺었는지 찾아와 살펴보고 포도 재배인을 시켜 돌보시는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입니다.(루카 13,6-9 참조)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와 성사를 통하여, 특히 당신의 파스카로 세우신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과 우리는 함께 하면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함께 있는 분’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도 서로 함께 있도록,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하도록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참조) 사랑은 함께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기입니다. 서로를 탓하고 미워하고 외면하기 쉬운 때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 하느님의 길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분은 당신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제때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2주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과 더불어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한 사순 시기가 벌써 열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온전한 믿음을 두는 아브람(아브라함)을 의로운 이로 인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없는 하늘의 별들만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참조),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창세 15,7)라고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십니다.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창세 15,8)라고 여쭈어보는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삼 년 된 암송아지와 암염소와 숫양 각 한 마리를 반으로 잘라 마주 보게 하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각 한 마리는 자르지 않고 바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지나가게 하시는 신비로운 표징으로 아브람의 제물을 받아들이십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하느님께 ‘후손과 땅’의 축복을 약속받았듯이 우리도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수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 기도 중에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변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에 대해 말씀을 나누십니다. 이 신비로운 광경에 할말을 잃은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필리 3,17) 그러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한편, 믿는 우리에게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으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라고 권유하십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을 맞으며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동방의 세 박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하였듯이 각자 자신의 선물을 준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주님께 드릴 선물’을 충실히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삶이 부활을 맞이하는 충실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자신의 주머니를 비우는 자선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따라 애착하거나 집착하는 것을 비우는 자선이어야겠습니다. 또한 기도하며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삶 안에서의 근심, 걱정, 분심을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음식만을 절제하는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인간적 본능을 비우는 단식이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삶을 스스로 확인하며, 노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사순 시기 동안의 부활 선물 준비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커피 단식을 십여 년째 실천하고 있는데, 커피 단식의 절약분으로 이웃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2~3잔의 커피를 마시는 저로서는 처음 시작한 해에는 커피 단식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한결 어려움을 덜 느끼는 것이 좋은 지향과 실천에 대한 주님의 손길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또한 몇 년 전부터는 음주 단식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커피 단식 외에도 무엇인가를 더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저에게 평소 술을 즐기는 지인이 놀랍게도 사순 시기만 되면 술을 끊는 모습이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건강도 챙기고 이웃 나눔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사순 시기를 맞아 무엇을 안 한다는 것도 좋지만, 부활 선물을 준비하며 무엇을 한다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최소한 하루에 세 번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인생 여정, 특히 올 사순 시기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면 좋겠습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묵시 3,1-6)

한때, 아시아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사르디스는 서기 17년 큰 지진으로 황폐한 곳이 되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사르디스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과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유다인들의 영향력도 제법 강한 곳이어서 사르디스의 공적인 일들에 유다인들의 참여 또한 활발했다. 사르디스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묵시 3,1)다. 1장 4절에 일곱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고 1장 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대표격인 일곱 천사를 지칭한다. 하여 사르디스가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교회,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절대적 주권을 지닌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은 사르디스 공동체가 ‘한 일’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이란 게 좋은 일, 모범적인 일이 아니다. 사르디스 공동체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겼으나 사람의 아들은 ‘너가 죽어 있다’고 직격하기 때문이다.(묵시 3,1) 사르디스가 ‘한 일’은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무언가 해내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자멸하게 만드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오면 이렇다.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2티모 3,5) 신심 있는 듯 행동하지만 자신과 돈, 그리고 제 욕망을 추구하는 일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신심의 힘’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사도 야고보도 마찬가지 말씀을 남긴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야고보서가 말하는 실천은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 저 혼자 배부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믿음이 걸어 나가는 ‘생명’에로의 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묵시 3,2) 깨어있음은 두 눈 부릅뜨고 제 인생을 갈고 닦는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된 명령이 아니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으로 규정된 사르디스 공동체가 깨어있음을 실천해서 얻어 내야 할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에로의 추구는 결국엔 서로에 대한 개방과 환대의 실천 유무에 달려있다. 3장 3절의 ’회개’라는 말마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근대 이후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되면서, 회개라는 말마디를 개인적인 반성이나 성찰의 관점에서 해석해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본디 회개는 ‘서로를 향해 돌아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타자성’을 빼놓고선 회개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회개는 사람됨의 근본 이유이자 목적일 수 있으리라. 사람은 ‘사회적 관계’ 안에 살아갈 존재이고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다움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다듬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할 동사가 있다면,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람바노’(λαμβάνω)가 될 것이다.(묵시 3,3) 요한복음은 육적인 완고함이나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복음에로 열려 있음을 논할 때 이 동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다. 회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또 한 번 빌려오자.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4)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기며 저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는 일은 저만의 외로운 고행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저 혼자만의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선포하는 이, 그리고 듣는 이의 형제적 친교와 일치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여러 번 강조되기도 했다. 하느님 나라는 저 천상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 몇몇 의인이나 영웅들에게만 드러나는 밀교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한가운데 이미 드러나 있다.(루카 17,20-21) 깨어있음을 살아내야 할 사르디스 공동체가 여전히 죽어갈 때, 곧 스스로 유폐되어 서로를 향한 회개를 살아내지 못할 때, 사람의 아들은 ‘도둑’이 되어 ‘갑자기’ 나타나신다.(묵시 3,3) 사람의 아들이 ‘도둑’처럼 온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도둑’으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회개의 자리, 친교의 자리는 예수님이 ‘도둑’이 아니라 ‘벗’으로서 다가서는 자리이므로. 믿음을 시작한 이래, 우리는 부족할지언정 스스로를 더럽히진 말아야 하겠다. 말하자면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묵시 3,4) 14장 4절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4만4000에 대해 말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이들은 흠도 결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 안에 더불어 살아간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비로소 스스로의 이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들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묵시 3,5) 사르디스는 지진 후 다시 살아난 도시였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가 희박하여 사르디스라는 도시가 지녔던 재건에의 역동성과 그 희망에 대해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주석이 힘들면 해석의 상상력을 펼쳐보면 어떨까. 저마다 ‘한번 해 보자’며 미래의 달콤한 삶을 향해 덤벼드는 분위기,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던 유다인들 마저 도시의 공적인 일에 열심히 뛰어드는 분위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해야 할까. 저마다 희망을, 노력을, 성공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희망 뒤편에 쓰러진 절망의 사람들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무언가 해내야만 한다고 핏대를 올리며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못 한 채 하루를 버텨내는 이들에게 ‘회개’라는 일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재건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마지막까지도 사랑을 설교했던 사랑의 사도 요한

서울 성북동의 고즈넉한 언덕에 유명한 길상사가 있다. 본래는 대원각(大苑閣)이란 이름의 건물이었다. 주인이었던 김영한 선생은 평생을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그녀는 20살 때 23살의 청년 시인 백석(白石) 백기연을 만났다. 젊은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서로 똑똑해서 대화도 정말 잘 통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妓生)인 자야를 반기지 않았다. 백석은 자야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도망하기로 했지만 자야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재인 백석의 앞길을 자신 때문에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석은 6·25전쟁 후 사회주의자로 북쪽에 머물며 문학의 꿈을 펼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공산당의 압력으로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다. 그 소식을 들은 자야는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30여 년 전 1000억 원(지금은 적어도 2500억 원 이상)을 법정 스님께 조건 없이 봉헌했다.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자야는 기자들에게 “돈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 값도 안 된다”며 백석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백석이 자야와의 이별의 심정을 담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교과서에도 실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사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도는 요한이다. 요한은 주님께 특별히 사랑받던 제자였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요한에게 성모님을 모시도록 했다.(요한 19,26-27) 이후 전승에는 요한이 오래도록 에페소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에페소 신자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에페소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성모님의 집은 전 세계 순례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후 죄인들의 손에 잡혔을 때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무서워 떨며 도망쳤다. 그러나 다음날 예수님이 처형당하는 십자가 밑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을 데리고 다가갔다. 그는 십자가 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스승의 임종을 지키며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겼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늘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라며 사랑을 역설했다고 한다.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인 스승이 살고 가르쳤던 가장 중요한 정수(精髓)가 사랑이라 몸소 체험한 인물이었다. 사랑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인간 삶의 최고 가치임이 틀림없다. 하느님을 표현할 때도 사랑 자체라고 하는 이유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40일 동안 머무십니다. 거기서 긴 단식을 하신 후 가장 쇠약해졌을 때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본디 유혹은 약한 틈을 파고드는 법이죠. 먼저 사탄은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시장하셨다(루카 4,2)는 말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매우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니 사탄의 제안은 아사 위기에 있는 예수님께 쉽게 떨칠 수 없는 매우 솔깃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유혹에는 단순히 예수님의 개인적인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일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6,31) 그리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세가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과 같은 기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요한 6,30) 이렇게 볼 때, 이 유혹은 예수님이 메시아심을 증명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메시아의 정체를 드러내라는 유혹입니다. 곧, 사탄의 유혹은 이렇습니다: “백성에게 빵을 주어라. 그러면 그들이 의심 없이 너를 메시아로 섬길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런데 신명기 8장 3절의 뒷부분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의 말씀 뒤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 뜻대로 살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따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세상 권세에 대한 것인데, 이 또한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하도록 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행하길 바라시는 것, 즉 고난을 통한 메시아 사명의 수행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도록 유혹할 뿐 아니라, 우상 숭배를 조건으로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원죄 이후 타락한 인류는 창조 때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통치권을 상실했고, 세상 권세는 상당 부분 사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악한 권력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악한 자들이 얼마나 잘 삽니까? 심지어 사탄에게 영혼을 팔아야만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사탄은 실상 제 것이 아닌 것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파하기 쉽지 않은 이 거짓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세상의 유일하고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만을 경배해야 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이 메시아심을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라는 것인데, 랍비 문헌에 메시아는 예루살렘 성전 위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다 전승에 따르면 자처하는 거짓 메시아는 신성 모독죄를 물어 성전 벽에서 키드론 골짜기로 던져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성전 벽에서 뛰어내리시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발을 떠받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온 유다 백성은 성전 높은 곳에 나타났으며(메시아라는 증거), 그곳에서 떨어져도 무사한(가짜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 예수님을 즉시 메시아로 떠받들 것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그분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시험하라고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마싸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 하느님을 시험한 일(탈출17,1-7 참조)을 배경으로 하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은 결코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경우를 볼 때, 모든 유혹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첫 인간에게 주어진 유혹 또한 그러했습니다. 세 번의 유혹에 실패한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하지만 영원히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유혹자가 다음에 등장할 때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그분의 제자 가운데 하나를 유혹함으로써 말입니다.(요한 13,27) 사탄은 절대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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