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인도로 간 이방인(하)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죽은 노파가 있었고, 쥐가 그 노파의 발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려는데 그 할머니가 움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쥐가 와서 갉아먹어도 떨쳐낼 힘이 없었다는 것에 수녀님은 ‘사람이 죽을 때만이라도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만든 곳이 임종자의 집 ‘깔리갓’이었어요.” 인도 콜카타에서 봉사하던 마더 하우스를 떠올리는 김성만 안드레아 신부님의 눈에는 신학생 시절 내가 보았던 진심이 담겨있었다. 어제 일 혹은 어제와 같이…. 인도에서 월세 포함 식비 30만 원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제 생활비 전부를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매달 기부하셨다는 신부님이, 어떤 계기로 이 ‘불편’한 상황을 해결하셨는지 궁금했다. 그저 ‘사제’여서였을까. 아니면 ‘사랑’해서였을까. “제가 벵골어나 힌디어도 못하고 한 두어 달 이렇게 허드렛일하다 보니,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길에서 쓰러진 분들을 깔리갓으로 모셔가면 3~4일 만에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는지 고민하던 중에 순간 딱 드는 생각이, ‘이 사람들을 위해 지상에서 마지막 친구가 되자! 힘들어할 때 손을 잡아주고 한 번 더 깨끗하게 갈아입히자. 먹여주고 그냥 이 지상에서 마지막 친구가 되어주면 어떨까’였어요. 이 마음으로 대하니까 모든 게 새로워졌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안다. 옳은 길과 그른 길을…. 잘못된 방향으로 들 때는 설득할 변명이 장황해진다는 사실 또한 안다. 빛은 언제나 말없이 세상을 살리니까. 인도·태국 등지에서 봉사하며 값진 경험한 김성만 신부 임종자의 집 ‘깔리갓’부터 에이즈 환자 수용시설까지 고통받는 이들 위해 진심 다해 # 때때로 내 안의 빛이 잦아들면 메마름 속에 검은 탓을 한다. 나는 그때 콜카타에서 봉사활동이 끝나갈 무렵 어둡고 지친 상태였다. 친구들과 따로 걷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쯤 오후, 그날 외진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크리켓 경기를 끝내고 나오던 동네 녀석들을 마주친 그때였다. 무심코 가로질러 가는데, 상대의 팔꿈치가 내 옆구리를 세게 찔러왔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수그리는데 상대는 점수라도 올렸다는 듯 낄낄거리며 친구들에게 자랑질을 해댔다. 이미 탓을 넘어 뚜껑이 열린 상태였다. 어쩌면 메마른 영혼의 탓을 거기서 찾았는지 모른다. 몸을 떨며 한참 분을 참다가 ‘무시‘라는 단어가 하얗게 머릿속에서 흩어질 때쯤, 파라곤 호텔 철문 손잡이에 걸린 자전거 체인이 보였다. ‘이 자식들이! 감히 나를!’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도 분노도 이미 사라진 상태. 성찰이라는 자책이 치열하게 이어진다. 거기에는 하느님이 안 계셨다. 현재의 나와 그때 처절한 자신은 다르게 이어져 있는가. 김 신부님은 인도에서 여정을 마친 후, 잠시 태국을 들렀다고 하셨다. 나는 이야기를 기다렸다. 영혼 깊숙이 담겨진 이유는 남달랐다. “한 달 동안 태국에 있는 에이즈 환자 병원에 다녀왔어요. 콜카타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가, 친형이 거기서 봉사를 했는데 너무 좋았다고 해서요. 롭부리, 기억에 방콕에서 버스로 3시간 되는 거리인데 원숭이가 많은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태국에 ‘왓프라밧남푸‘라는 절이 있어요. 태국에서 가장 큰 에이즈 환자 수용시설로 자체 화장장도 있었지요. 당시 150명 정도 환자가 있었고 독일 의사가 있고…. 처음에는 겁이 나더라고요. 전염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었고. 하지만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던 것이 생각나 결국 ‘다 사람 사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겁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요.” # 인도에서 맞기나 하고 이미 구세주가 되길 바라던 봉사는 날카로움으로 가득했다. 내 영혼의 쉼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이 계신 곳, 어디에나 평화가 있다던데 계시긴 한 걸까.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창가 옆에 있던 침대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왔다. 살며시 고요히 말이다. 배고픔도 절망도 하품처럼 사라진 오후. 그 빛은 잠을 깨우며 밖으로 난 창으로 나를 인도했다. 그때였다. 건너편 옥상에 놓인 가난한 빨래대가 눈에 들어오고, 인도 여인들이 널어둔 사리 천들이 갑자기 든 바람에 흩날렸다. 시간을 잊은 듯 하늘거리며 내게 손짓을 하고, 그 순간 평화가 불어왔다.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듯, 세상을 헤매지 않아도 ‘넌 좋은 사람’이라고 바람은 전하고 있었다. 평화는 찾는 게 아니라 닫힌 마음을 열어둘 때 오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알고 싶었다. 인도든 태국이든 어디나 계시는 신부님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를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마음 상태건 어떠한 위치에 있건 다 받아 주시는 분이에요. 한 번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받아 주시는 분. 제 경험으로 보면, 우리에게는 그분께 다가갈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물론 끌어 주시기도 하지만요. 그분은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랬다. 한 사제가 독특한 여정만을 골라 인생에서 특이한 깨달음을 얻고자 간 인도가 아니었다. 메마른 사제 생활에서 치열한 체험을 마다하지 않고 본질을 지키려 했던 분이 바로 인도의 파더 킴. 안드레아 신부님이셨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인도로 간 이방인(상)

‘그날 메마른 햇빛 아래 체인을 질질 끌고 가는 인도의 이방인을 본 일이 있는가.’ 겨울이 오면 몸은 인도를 기억한다. 그곳에서 '파더 킴’이라고 불리던 김성만 안드레아 신부님을 서울의 한 성당에서 뵙기로 했다. 차창 너머 풍경은 이미 20여 년 전 인도로 가는 겨울 비행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콜카타 공항 활주로를 거칠게 내리자, 흔들거리는 기내에서 인도 사람들은 기쁨의 손뼉을 쳐 댔다. 거리를 지배한 인도 택시 오토릭샤가 뿜는 비릿한 가스 내와 이국적인 향신료가 뒤섞여 이방인에게 여기가 인도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시간은 멈추다 못해 뒤로 흐르고. 순간 경유했던 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과, 마중 나온 신학생들의 미소가 복잡하게 부딪친다. 김 신부님을 거기서 만난 것은 후배들이 묵고 있는 파라곤 게스트하우스로 방을 옮긴 다음 날이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간단한 일정을 알려주고 매일 새벽 6시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 미사 때 보자고 하셨다. ‘돕기 위해 간 것인지 도움이 필요해서 왔는지.’ 예수님을 향한 병자들의 마음이 그랬을까. 낯선 땅에서 한국 신부님의 평화로운 얼굴을 대하는 순간, 속으로 몇 번이나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던가. 나에게 인도는 그런 곳이었다. 인도에서 사목하며 평화 얻은 서울대교구 김성만 신부 사제로서의 초심 찾기 위해 스스로 택한 가난한 도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봉사하며 기도하는 삶의 의미 깨달아 이윽고 차는 개포동성당에 선다. 이날도 김 신부님은 그랬다. 인도인들의 박수는 없었지만, 긴 세월을 날릴 정도로 반겨 주셨다. 인도에서 기르시던 수염이 사라진 지금 나는 묻고 싶었다. “콜카타 마더 하우스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때와 달리 본당을 맡고 계시는 데 차이가 있을까요?” 지금도 인도에서처럼 어깨에 달랑 가방 하나 메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실 것만 같았다. 제자 파견 때 스승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말씀은 의외로 간결했다. “주교님께 순명 서약을 한 사제이니,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 남대문시장준본당에 바로 가게 되었어요. 거기는 인도에 비하면 호텔이지요. 그 후에 어떤 상황인 줄 모르고 주교님의 명으로 또 임지에 가게 되었는데, 새 성전을 짓기 위해 100여 개 성당을 돌며 모금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 코로나19로 모금 시기가 겹쳐서 힘들었어요. 내적으로는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 위한 인간의 모금이 자칫 교만으로 우쭐대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쳐야만 했지요. 그래서 미리 본당에 도착하면 우선 성체조배를 하며 미사를 기다렸습니다. 그게 큰 힘이 되었어요. 기도가 없다면 뭐든 성공해도 금방 허해지니까요.” 파라곤 게스트하우스 옥탑 2인실에 짐을 풀었다. 이른 새벽부터 울려대는 힌두교 경문 소리와 제대에 바쳐지는 향불이 땀내와 뒤엉켜 폐를 적신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교만함은 진작 두고 와야 했다. 미사 후 마더 하우스에서 주는 빳빳한 크래커와 생강 향 밀크티 한 잔 그리고 두 개의 작은 바나나로는 영혼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리고 고단했다. 봉사를 끝내고 우리는 네팔 식당에서 그나마 만두를 먹었는데, 혼자일 때는 거리에서 150원짜리 볶음면을 주로 먹었다. 돌이 씹힐 때마다 영혼은 하늘 저 멀리, 몸은 천근 걱정으로 가라앉고… 인도로 온 이방인들에게 그들도 묻고 싶었을까.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오셨나요?”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을 때마다 ‘첫 마음’을 떠올리신다는 김 신부님께, 인도인의 질문을 드렸다. “왜 인도였습니까?” “저희 때만 해도 신부가 되어서 만 7년쯤 되면 본당신부로 나갈 수 있었어요. 주교좌명동본당에서 마지막 부주임을 끝내고 본당 나가기 전 어떤 체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사제가 되고 명동본당에서 부주임으로 사는데, 동시에 사회적 이슈도 대해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때로는 신부가 해야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내 안의 갈증으로 어떨 때는 ‘성사 집전하는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제 생활이 이러면 안 될 텐데….’ 돌파구를 찾던 중에 마침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그분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살 수 있었을까?’ 궁금했어요. 바로 주교님을 뵙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본당 가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의 정신을 체험하고 싶다고. 처음엔 6개월을 허락받고 갔는데, 1년 8개월 동안 있게 됐어요. 평소에 깔끔한 걸 좋아했는데 인도에 딱 가보니 그런 곳인 줄 몰랐지요. 그 나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갔거든요. 그렇게 불결하고 열악한 곳인지. 이러니 가서 한 달 동안 충격 그 자체였어요. ‘여기에 뭣 하러 왔나? 가난한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은데….’ 모든 게 힘들었습니다.”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닮은 개도 그들처럼 헐벗은 도시 콜카타. 손쓸 수 없는 ‘자기 되물음’ 속에 인간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는가. 인도든 인생이든 방향이 올바르면 속도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여기는 인도, 마더 하우스의 미사 풍경은 동네 새벽시장처럼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댔다. 신발을 잃을까 목에 두른 겁 많은 관광객부터, 밤새워 놀다 잠이 육신을 지배한 눈으로 배고픔을 채우러 온 청년들까지 뒤섞여 앉아 성가를 흐느낀다. 동방박사처럼 왔지만, 이제는 영혼의 약속을 구걸하는 노숙자라고 고백해야 할까. 성당 중앙에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석관이 자리하고, 구석 한편에는 수녀님 생전 모습을 한 조형물이 벽에 기대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 위에 조용히 내려온 햇살. 그곳 미사를 김 신부님은 좋아하셨다. “사랑의 선교 수도회에서 수녀님들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시멘트 바닥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분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구나 싶었어요. 그때 깨달았지요. ‘아! 그래서 이분들이 기쁘게 일하실 수 있구나.’ 그 후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과감히 버리고, 두 달 동안 프렘단(중년 어른들이 치료와 요양을 하는 공동체)에서만 일했어요. 처음에 너무 힘들어서 오후에는 일을 못 하다가, 두 달쯤부터 오전 일이 끝나면 ‘깔리갓’(임종자의 집)에 갔습니다. 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에서 임종자들을 위해서 이런 건물을 마련하시고 봉사를 시작하셨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이렇게 신부님의 인도는 어머니의 조용한 기도가 떠오르는 도시였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로마에서 온 지구인

고향을 떠나 자전거에만 의지하며 세상을 다닌 파브리지오가 처음엔 외계인처럼 신기했다. 세계 여행도 그렇지만 내심 의사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 적이 없다?’, 그건 좋은 일이라도 낯선 두려움이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나는 피자를 자주 먹어야 했다. 그럴 때면 함께 한 이탈리아인들에게 말했다. “한국에는 이탈리아에 없는 피자가 있어요. 새콤한 파인애플을 곁들여 먹는 메뉴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 말까지 하고 나면 그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상상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원래 맛만 고집하는 데서 오는 결과일까. 아마도 된장찌개 백반에, 파인애플을 넣는다면 한국인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보통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을 때 우리는 ‘평범’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것을 통해 비슷한 유대감과 부드러운 안정감을 바란다. 일상 속의 소품들을 단순하게 확대하고 우리가 아는 평범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색을 칠한 작가가 있다. 그는 ‘영국 현대미술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Martin)이다. 그가 그린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미 알던 일상적인 물건들이 독특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잊고 지냈던 일상의 기억을 오히려 회복시키는 감동이 거기에 있다. 특별한 것이 없는 일상에서 말이다. 파브리지오와 함께 한 아침,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 조각실에서 파브리지오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맺힌 오묘한 표정을 응시했다. 은은하게 다가오는 미소를 닮고 싶었던 것일까. “유럽인들은 안타깝게도 동양 문화에 대해 잘 몰라요. 아시아 역사에 대해서 배우지도 않고요. 알지 못하는 역사 안에서 비롯된 놀라운 작품들이 여기에는 참 많네요.” 그에게는 이 시간, 이 일상은 각별했다. 아쉽게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며칠 전까지 서로 모르고도 행복을 찾던 인생들이 겹치면서 인연이 되어, 다음 날 떠날 시간을 세고 있으니… ‘낯섦’이 ‘평범’으로 향하려면 시간은 얼마나 필요할까. 정해진 시간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듯, 박물관을 나서며 우리는 한국에만 있는 풍경을 찾아다녔다. 마지막 점심을 먹기 위해 콩국수가 유명하다는 회관을 찾아갔고, 휴일이라 쉬는 덕수궁 옆 돌담길을 걸었다. 언어는 이제 도구에 불과했다. 광화문을 배경으로 흑백사진을 찍어주면서 물었다. "앞길이 막막하고 힘든 사람들이 참 많아요. 누구보다 절망하고 있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까요?” 외국 의사인 그에게 나는 묻는 거였다. “저는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누구도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니까요. 교회는 외로운 이들을 기쁘게 맞이할 겁니다. 그러니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고, 주님께 오라고 초대하고 싶습니다.” 사제보다 더 사제 같은 대답에 부끄러웠다. 순간 손자병법에서 나오는 전략 같은 위로를 찾고 있었는지도. 우리는 남은 시간들을 알뜰하게 보냈다. 교보문고에 가서 영어로 된 ‘김치’에 대한 서적을 읽었고, 어린이들이 보는 한국 역사책을 하나 골랐다. 하루는 마음보다 빠르게 저물어 갔다. 걸어서 청계천을 지나 명동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한 후, 남대문시장의 유명한 야채 호떡집을 찾아갔다. 잡채가 든 야채 호떡이 2000원이었다. 서울 살면서 외국인 관광객처럼 이 호떡을 처음 먹다니. 일상에서도 이런 선물이 있었다. 익숙한 사물을 낯선 시선으로 그리던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미사 중에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는 ‘실체 변화’를 예로 들면서, 겉모습은 변하지 않지만, ‘시적인 변형’으로 작품에서 새로운 시각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항상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원래 있는 것을 저는 보여주려고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파브리지오에게 느끼는 마음이 이와 같았을까. 그는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색을 지녔다. 그러나 만나보면 어렴풋이 우리가 지녔던 익숙한 향기를 냈다. 같은 일상을 함께하면서 우리는 야채 호떡을 손에 쥔 채, 시장에서 기념 볼펜과 티셔츠 가격을 깎으며 기뻐했다. ‘주름 방지 크림을 사야 한다’는 파브리지오에게 ‘한국의 고쟁이 바지가 너희 어머니에게 더 필요할 것’이라며 부추겼다. 남자 둘이 여자 마음을 어찌 안다고 그랬는지. 다음 날 아침, 둘은 인천공항을 향하고 있었다.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이탈리아나 한국 사회에서나 의사는,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직업이에요. 처음부터 궁금했어요. 젊은 의사이고, 성공과 야망에 대한 생각도 많을 텐데 어떻게 일주일에 3번 봉사하며 지낼 수 있는지 신기했어요.” 질문하면서도 헛웃음이 났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한 삶이겠건만, 그의 행동이 이 시대에 ‘드물다’는 이유로 외계인처럼 여겨 물었던 건 아닌가 하고. 파브리지오는 깊이 회상하는 듯했다. “그동안 교회를 집처럼 여기며 살았어요. 거기서 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고요. 함께하는 동안 기쁨과 절망도 있었어요. 수월하게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헛되고, 잘못되어 보이는 순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믿음’은 저를 바로 서게 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살게 한 이 믿음을, 어느 순간 타인에게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지요. 바텐더든, 의사든, 우주비행사든 이 귀한 것을 저 혼자만 알 수는 없습니다. 기쁜 소식은 선포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설사 교회를 모르더라도, 그들에게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돈과 성공을 좇는 것이 처음에는 재밌지요. 그러나 영적 생활로 힘을 받지 못하면 그 인생은 고단해집니다. 저는 알아요. 오직 하느님의 선물인 교회를 통해서만 인생의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걸.” 우리를 닮은 외계인이 아닌, 지구인 파브리지오는 신기했지만 평범했다. 평범한 것이 낯설고, 독특하게만 보이는 이 시대. 흔히 알던 덕목이 오래된 전설처럼 저 멀리 밀리는데, 그를 만나고 있으면 잊고 지냈던 인간 본연의 색과 간결한 인생의 선이 그리워진다. 처음 만났던 기차역에서처럼 그는 길을 통해 다시 떠났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초대를 하면서.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로마에서 온 외계인

‘재봉틀과 해부용 탁자 위에 우산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처럼 아름다워’. 이 문장은 이시도르 뒤카스(Isidore L. Ducasse)가 쓴 ‘말도로르의 노래’ 중 한 구절이다. 필명 로트레아몽 백작으로 활동했던 그는, 작가를 꿈꿨지만 음침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라는 이유로 당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진다. 토요일 오후 3시. 주일학교 미사를 앞두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기차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젊은 여행가 혹은 주일학교 교사이며 의사인 파브리지오(Fabrizio Ettorre)를 정각에 내려줄 것이다. 나는 왜 그를 기다리며 로트레아몽 백작이 쓴 시가 떠올랐을까. ‘말도로르의 노래’는 작가 사후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앞에서부터 몰입해서 읽으나 뒤 문장부터 거꾸로 읽으나,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배설한 듯한 글은 아무리 현대소설의 기원이라 해도 난해할 뿐이었다. 서울역에서 만나기 전 파브리지오는 이태원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며칠간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던 신부님은 나에게 몇 번이고 그의 한국 여정을 부탁한 상태였다. 드디어 5번 정거장에 기차가 선다. 내리는 사람마다 출발지에서 가져온 낯선 땅 내음을 풍기고… 파브리지오는 양팔로 자전거용 안장 가방을 쥐고 내렸다. 문자 외에 그와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불현듯 그에게서 여행 중 방문한 안동찜닭과 추어탕의 진한 국물 향이 풍기는 듯했다. 우리는 자주 본 사이처럼 알아보고 웃었다. 내가 물었다. “틈틈이 자전거로 세상을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곳이 있던가요?” “네. 저는 자전거로 놀라운 곳을 많이 다녔어요. 그중에 아름다웠던 곳을 꼽자면, 북유럽에 위치한 라피(Lappi) 지역이에요.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국경에 접한 곳입니다. 그곳은 수평선까지 펼쳐진 숲이 있고 도로를 횡단하는 순록을 만날 수 있어요. 적어도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고요…” 나는 사실 부러웠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애초에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다’는 바람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이라는 빠져나갈 궁리를 댔으니까. 망설임 없는 그의 대답에서 봉우리를 타고 흐르는 알프스의 바람이 느껴졌다. 주일학교 미사는 오후 5시였다. 그의 눈빛은 60여 명의 꼬마 짹짹이들 속에서, 자신의 로마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본당을 떠올리며 비슷한 얼굴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줍게 ‘헬로’ 인사를 건네는 꼬마에게, 그는 ‘안녕’이라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본당에서 견진교리(5학년) 1년 차 학생들과 청소년(14세~18세)들에게 교리를 지도하며, 동시에 복사단을 담당하고 있다. 후에 그는 이때의 기억을 ‘온전히 환대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성가부터 독서까지 미사의 모든 부분에서 로마와 달리,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미사가 좋았다고 했다. 내 인생에 로마에서 온 손님과 미사를 함께 하게 될 줄이야. 그래서 ‘인간은 계획하고 하느님은 비웃으신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원인과 결과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고양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새들을 따라다니고, 물고기가 지하철로 출근하는 일은 현실에 없지만, 그보다 갑작스러운 사건과 사고 속에 상선벌악부터 시작해서 상식은 온통 흔들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말도로르의 노래’에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도 초현실적인 기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먼저 살바도르 달리는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낯설게 만들기’, 서로 다른 소재를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틈새로 이 시를 표현했다. 의사인 파브리지오가 일주일에 3일을 본당에서 보내고,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에는 청소년을 위한 학습과 교리를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편이 나을 텐데, 살면서 선택에 후회한 적은 없나요?” 그는 이 질문을 어려워했다. “저는 고집이 참 센 편이에요. 더 많이 공부하지 못할 때는 자학이 심했습니다. 사춘기 내내 사람들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애썼고, 언제나 익명으로 살고자 했지요. 이런 습관들이 제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다고 할까요. 제가 선택하는 것보다 결정된 것에 자주 끌려다니는 편이었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결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약점을 풍자하기(놀리기)’ 시작한 거지요.” 껍질에 갇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풍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습거나 어리석어 보이기보다 성당과 병원에서 온기를 주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묻기보다 우선 듣기로 했다. 파브리지오는 평소 주변 학생들에게 결정 앞에서 망설일 때는, 언제나 ‘바로’ 실행에 옮기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변과 함께하는 조화도 살펴야 한다며. 다음 날 새벽, 아주 평범한 하루가 다시 시작됐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는다.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할게요’라고 짧게. 그러니 ‘이 봉헌자를 보호해 주소서’.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이 하루는 내 것이 아니라 이제 당신 것이오니, 혹여 바쁘셔서 못 오시면, 천사라도 부르셔서 모르게 지켜 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다. 영혼을 파고드는 매일의 걱정을 물리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러면 하루의 탓이 내게 없으니 놀라지도 화내지도 안 테니까. 파브리지오와 나는 출국 전날 아침,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그날 박물관 앞에는 야외수업을 온 학생들로 붐분볐다. 가끔 화장기가 도는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우리를 스쳐 갔다. 박물관의 1층 선사시대관부터 발길을 들이며 물었다. “파브리지오! 이탈리아에서 ‘가정의’라고 들었는데, 환자를 대할 때 주로 어떤 위로의 말을 하나요?” “친근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해요. 의사도 환자의 가족이니까요. 누구든지 위로가 필요할 때가 오면, 그들이 질병 앞에서 겪는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애씁니다. 무엇보다 저는 환자들이 병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그들이 겁을 먹으면 치료와 희망을 모두 놓치니까요. 이럴 때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그들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줄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지요.” 말을 듣는 내내 낯선 그에게서 익숙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입안에서 부서지는 질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2번 출구. 여기 서면 방금 한국에 도착한 여행객처럼 무리에 숨어들고 싶어진다.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보기. 솔라도레 미솔미레. 출구 인근 호텔 앞에는 노동자들이 써 둔 구호가 손님들을 먼저 맞이한다. 호텔 진열장에 든 풍경화는 아무도 보지 않는 정지된 평화를 외치고…. 솔라도레 미솔미레.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는 수녀님의 소개로 오늘 자리는 마련됐다. 김정희 에프렘 수녀님. 젊은 시절, 치유의 은사와 악령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으셨다고 했다. ‘오늘날 성녀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자, 생각은 팽팽해졌다. 나는 바람에 밀려 다시 걸었다. 어릴 때 성령 기도를 하는 사제의 손바닥이 엄마와 이웃 교우들 머리에 닿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지던 모습을 기억한다. 고등학생이었던 친구의 누나도 마찬가지로 쓰러지는지 지켜보던 그 시절. 그것이 은사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고 악한 영을 쫓아냈다. 그리고 교회는 은사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겸손되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98세의 에프렘 수녀님을 찾아가는 길, 10여 년쯤 한 예술극장에서 본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로마 사교계의 왕인 주인공 잽은 그의 65세 생일을 맞게 된다. 감독은 로마에 대한 헌정의 뜻을 담아 미학적인 화면과 음악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로마 콜로세움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화려한 생일파티는 벌어지고, 저물어가는 인물들의 욕망과 가식적인 대화들이 화면을 채운 가운데 잽은 첫사랑의 부고 소식을 그의 남편에게서 듣는다. 40년 전에 쓴 소설 이후로 단 한 권의 책을 쓰지 못했던 주인공 잽. 밤이면 로마를 거닐다 만나는 이들을 통해 영화는 과거의 기억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순간 그가 오랫동안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이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그 후로 하느님을 제대로 느끼지도, 고백하지도 못한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잽은 영화 후반에 가서 만나게 되는 성녀 마리아 수녀의 질문을 받는다. “후속작을 왜 쓰지 않나요?” 영적인 질문을 하려 했던 주인공은 수없이 받았던 같은 질문을 눈앞에서 다시 받지만, 이번엔 솔직히 고백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찾지 못했어요.” 솔라도레 미솔미레. 명동 사무실에서 만난 에프렘 수녀님은 어느 고귀한 성녀의 모습보다 작은 체구에 시골 할머니의 미소를 지니셨다. 나는 미리 준비한 질문지와 녹음 장비를 부산히 꺼냈다. 초조했다. 시작 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 얼마나 인연이 깊은지, 서둘러 말했다. 그때 다시 수녀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솔라도레 미솔미레. 수녀님은 말이 빠른 편이었다. “네. 누구세요? 아유 혈압이 내려가 소변을 보느라 잠을 못 자요?” 사람들은 수녀님을 만날 수 없을 때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고 수녀님은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 주님의 기도, 성모송 자꾸 하세요. 그러면 나아요. 노인이 되면 원래 잠이 없어요. 마귀 때문에 그런 거냐고요?… (수화기에 대고) ‘너 마귀냐? 마귀면 기침해 빨리!’ 할머니! 나이 잡수시면 잠이 안 오고 그래요. 제가 기도할게요….” 오는 전화에 짧게라도 기도를 해준다고 하셨다. 너무 길게 말하면 듣는 이가 힘들다며…. 나는 궁금했다. “수녀님, 구마가 필요한 사람과 상담 의사가 필요한 환자가 다를 거 같은데요?” “맞아요, 신부님. 마귀는 세 가지로 와요. 교만해서 오고, 미워해서 오고, 점을 봐서 와요. 마귀 들었던 사람들이 증언하니까 저도 알게 된 거예요. 통화를 할 때 그 사람에게 ‘마귀면 기침해’ 하면, 그렇게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저는 바오로 병원에서 소임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어요. 환자와 마귀 든 사람을요. 마귀 든 사람들은 저를 보면 싫다고 야단을 쳐요.” “수녀님, 마귀가 무섭지 않으세요?” “뭐가 무서워요?! 꼼짝 못 하게 야단을 칩니다. 별짓 다 해요. 여러 번 해야 그 사람에게서 나가는 마귀도 있고, 피를 토하거나 침을 뱉거나 야단법석 요동치는 마귀들도 있고 다 달라요. 잠 못 자게 하고, 말 못 하게 하거나 밥도 못 먹게 해요. 또 다 버리거나 기도를 못 하게도 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저 하느님께 저는 청합니다.” 다시 벨이 울린다. 솔라도레 미솔미레~. 영화 <그레이트 뷰티>에서 마더 데레사를 닮은 성녀가, 주인공에게 선문답처럼 묻는다. “내가 왜 식물의 뿌리만 먹는지 아세요? 그건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이에 주인공 잽은 응시할 뿐 답하지 않는다. 마치도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거룩합니다(로마 11,16)’라는 성경 말씀이 연상되기라도 하듯…. 그가 찾고 있던 아름다움은, 어쩌면 ‘로마’라는 이름의 영광과 타락의 도시에 살면서도 인간 본연으로 향하는 시선과 한순간도 잊지 못한 그리움 안에 있었던 건 아닐까. 주인공 잽은 결국 첫사랑의 기억이 있는 섬으로 향한다. 에프렘 수녀님은 신비를 전하듯 내게 말했다. “억울한 것을 잘 참으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세요. 2년 전에 하느님이 은혜를 주셨어요. ‘침묵은 무기다. 기도는 평화다!’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잘 사는 거랍니다.” “수녀님, 수도자로서 살고 싶은 다른 삶이 있지는 않았나요?”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도 밤새 로마를 산책하며 아름다움을 찾던 주인공 잽처럼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고 싶었던 질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차갑고 흔들림 없이 들을 준비가 이제 되었다. “수녀님! 꼭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치유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지만 낫지 않고, 어떤 사람은 낫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목소리는 이미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 대신에 이 세상 고통에 관해서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그래요, 기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이 평소에 하느님 마음에 들면 즉시 이뤄져요. 하느님 뜻이 아니면 되지 않아요. 그 사람의 삶에 따라서 하느님이 해주시는 거랍니다.” 마법 같은 답보다 오히려 단순했다. 순간 속으로 ‘그러면 사제나 수도자가 낫지 않고, 착한 사람들이 아픈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애원에 가까운 질문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그 답이 신비를 뜻하는지도 모른 채…. 영화 중반에 주인공 잽은 장례식에서 ‘유족의 슬픔을 훔치면 안 된다’며 눈물을 보이지 말 것을 말한다. 정작 자신이 관을 들 때 흐느껴 울었으면서…. 그는 사람이었다. 에프렘 수녀님을 뵙고 나오는 중에 어디선가 ‘솔라도레 미솔미레’ 휴대전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원하던 답처럼 가슴에 뿌려진다. 그리고 나에게 외치고 있었다. ‘그만 참고, 이제 아버지를 위해 울어도 된다’고.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1-19 제3426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15분의 물음

‘당신의 유리알’은 박홍철 신부(다니엘·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가 인생에서 만난 이들의 저마다의 사연을 투명한 유리알처럼 하나씩 꿰어 들려준다. 그날 나는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한 줄 적지 못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물론 하얀 바다 같은 여백에 위대한 인물의 위인전을 애초에 쓰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그들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의 답을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자주 궁금했다. 오래된 건물이나 자리를 지키던 나무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뿌연 연기 같은 기억에만 의지해야 할 때, ‘그때 그래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자주 했던 탓일까. 인간은 어떻게 해야 앞선 시간의 후회를 미리 만회할 수 있는가. 단 15분만 허락된 이날의 인터뷰에서 ‘어떤 질문을 할지?’ 고민스러웠다. 어쩌면 ‘묻는다’는 행위보다 한 사람이 선택한 역사의 순간들을 세심히 ‘듣는다’는 게 우선일 것만 같았다. 이기명 신부님(프란치스코 하비에르·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은 처음에 ‘지금은 신학원장직을 떠나 좋아하던 목공 일과 전례박물관 일까지 그만둬서 더 할 말이 없다’고 만남을 거절하셨다. 교회가 가진 무형의 보석을 캐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여러 차례 전화 끝에 신부님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단 ‘15분’이 허락되었다. “너도 참 끈질기기도 하다. 내가 오래 앉아 있으면 이제 다리가 저려서 사람을 도대체 만나기가 어려운데 자꾸 보자고 하니.” 이럴 때는 오랜만에 외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손주의 응석이 필요했다. 솔직히 첫 문장을 써 내려가기 어려웠던 건 아마도, 뵙기로 한 그날 원로 사제들이 지내고 있는 숙소 앞까지 나와 주신 신부님을 못 알아봤다는 자책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방금이라도 교황님이 쓰실 여의도광장의 미사 제대를 만들자고 장군처럼 지시하실 수 있는 그분이, 내 기억 속에서 거친 비바람에도 거인처럼 우뚝 서 계실 것 같던 그분이, 지팡이로 세월만큼 힘없이 서 계실 줄이야. 주로 학생들은 신학원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주변을 거닐며 대침묵에 앞서 봉헌되는 묵주 기도를 준비했다. 이때 신부님은 운동장을 보시다가 생활부장을 통해 지나가던 학생들을 장난스레 부르셨다. 그렇게 다가온 신학생들은 최대한 손주 같은 얼굴로 꼬집히고 당신의 굳은 어깨를 안마해 드리면서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그분이 부서질 듯한 몸으로 지팡이를 의지하신다니. 언젠가 봤던 ‘윈스턴 처칠의 초상’이 떠올랐다. 영국 의회는 윈스턴 처칠의 80세 생일을 맞아 그레이엄 서덜랜드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였다. 하지만 처칠은 고집스럽고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말처럼 축 처진 모습을 한 자신의 초상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는 있는 그대로를 그렸다고 했지만, 당시 처칠 수상의 초상을 통해 노쇠해 가는 영국을 표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15분. 어느 순간 나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사제가 되려고 하셨나요?” 내가 선택한 15분의 첫 질문이었다. 신부님을 ‘잘 안다’는 누구도 이 물음에 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부모’라는 이름처럼 당연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다. 저린 다리를 연신 주무르시던 신부님은 첫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6·25 때 수복이 되어서 학교 다니다가 본당에서 신부님들과 손님 신부님들을 자주 봤단다. 그때쯤 대학을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본당신부님 추천을 받았지. 당시에 내가 한 건 학생회 활동밖에 없었거든. 70년이나 된 일이라 기억을 다 못하지만, 하느님께 기도하다가 이렇게 된 건 아니고, 본당 활동을 하다가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어. 그때는 가난했는데 학비를 지원해 주는 신학교에서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한 반이 67명이야. 학생이 많다 보니 성적 나쁜 사람은 한 학기에 20명씩 떨어뜨려 버렸거든. 그래서 서품받을 때는 39명밖에 안 남았어. 그때는 전쟁 후 폐허가 되어서 더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의 답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은 기억이 되고 보물이 된다. 첫 질문에 이어 얼른 다른 질문도 떠올렸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많은 신학생을 보셨을 텐데 이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는데 적합한지 식별이 필요하셨겠지요. 신부님 나름의 기준이 있으신지?”부터 “소신학교 교사도 하셨는데 헌병 출신 신부님으로 겉으로는 무섭게, 속으로는 따뜻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맞는지?”까지…. 보물을 캐는 작업은 이미 15분을 훌쩍 넘어섰다. 독설을 퍼붓는 윈스턴 처칠을 향해 초상화를 그렸던 화가 그레이엄 서덜랜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월은 잔인합니다! … 만약 당신이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면 저와 싸우는 게 아닙니다. 눈먼 당신 자신과 싸우고 있을 뿐이지요.” 개인적으로 사물을 비추는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리석은 내일을 꿈꾸거나, 지나간 영혼의 상처를 보면서 상상하는 건 인간의 탓이다. 누구나 오늘을 사는 만큼 주름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나도 30년, 40년 후에는 신부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 갈 것이다. 이분을 통해서 신학교 내에 있는 박물관을 직접 만드신 것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다. “전례박물관을 만든 목적은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야.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자기가 잘나서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배 사제들의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말씀을 들으며 마치도 보이지 않지만, 뚝심 있게 건물을 지탱하는 철기둥이 하나 떠올랐다. 나에게 인생의 물음들은 항상 낯설고 더딘 세상을 새롭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질문을 하는 행위’가 전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젊어서는 두려움 앞에 놓인 인간이 주님께 길을 묻고, 시간이 흐르면 그분의 물음에 귀담아듣고 답해야 한다. ‘너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찾느냐’,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리고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느냐’까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비치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으로 답하느냐가 인생을 살아가는 나침반이 될 테니까. 앞으로 ‘당신의 유리알’을 통해 그 여정을 조금씩 적어 가고 싶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2004년 사제품을 받고 교의 미술 분야 연구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국립 미술원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이후 밀라노와 라벤나 등지에서 모자이크 연수를 받았다. 저서로 「밀라노에서 온 편지」가 있다.

발행일 2025-01-05 제3424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