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나의 욥(JOB) 그리고 나의 일(JOB)

몇 주 전 7살 쌍둥이 아이 엄마가 돌연 심정지로 하늘나라로 가면서, 4명에게 장기를 기증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엄마 없이 홀로 남아 커갈 아이들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혹여나 헤어짐과 그리움의 슬픔이 점차 증폭되지나 않을지 하는 우려,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에게 행복하게 잘 있다 나중에 보자는 인사도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갔을 아이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게 됐다. 갑작스런 죽음, 특히 예고 없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된 가족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고, 오래 지속되는 슬픔, 즉, ‘복합비애’(Complicated grief)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매스컴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연으로 복합비애를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함께 욥(Job)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욥(Job)은, 그저 성경 상의 인물로만 생각할 뿐, 나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란 생각 때문일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보자면,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과 아내, 등교하는 아이들, 몇 시간 후면 저녁에 집에서 만나, 그날그날의 일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믿음에 살아간다. “다시는 저녁에 만나지 못할 것이란 생각, 아침에 눈을 뜨니 사랑하는 이가 인사도 없이 떠날 수 있다는 상상은 감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12년 전 쌍둥이 엄마 다니엘라가 갑작스럽게 나와 초등학생 아이들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대체 하느님은 계시는 것일까? 하는 원망과 회한, 슬픔에 잠겨, 사회생활조차 온전히 할 수 없는 욥(Job)이 되었고, 그렇게 2년이 흘러갔다. 자연스레 욥(Job)의 탄원 기도는 나의 탄원 기도가 되어 버렸다. 하느님! 정말 계시다면,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을 정리하다 습관처럼 주보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늘 그 자리에 있었을 ‘앗숨도미네 단원 모집공고’가 그날따라 유난히 큰 글씨로 눈에 들어왔다. 2011년 과천에서 뮤지컬 ‘YES’를 봤던 때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톨릭교회에도 이렇게 훌륭한 극단이 있구나 하면서, 잘한다, 멋있고 감동적이다 하였지만, 그 때는 그저 남의 일(Job)일 뿐이었다. 피폐한 욥(Job)에게 뮤지컬 선교의 일(Job)이 진지하게 다가온 2014년 어느 봄날까지는 말이다. 글 _ 오현승 가브리엘 포센티(앗숨도미네 단장)

2024-05-05

[밀알하나] 힘들고 궂은 일을 맡아준 이주노동자들(1)

국내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상당수는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일을 뜻하는 3D 분야에서 주로 일합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노동이 ‘전문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선입견은, 이주노동자들을 단순히 노동시장의 빈곳을 채우는 대체재로 바라보고, 이주노동자의 현실의 어두운 그늘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요즘 현장에서는 취업비자를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힘들다고 합니다. 사업주도 오히려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4대보험 등 사업장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 혹은, 불법체류자의 불안한 상황을 이용해 적은 임금으로 고용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 역시 고되고 위험한 일은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버려 사람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고용된 후에도 작업에 숙달되기도 전에 그만두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합니다. 다소 변명처럼 들리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실제로 김 양식장이나 염전, 어선 통발 작업 그리고 비닐하우스 작업 같은 일들에 종사하는 이주민들을 보면 주로 태국 또는 동티모르 국적의 불법체류 외국인들이 몰려있습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주노동 시장에 진출이 늦어 취업연계망이 부족하고, 한국어로 언어소통도 어려운 이들은, 타 국적 이주노동자들조차 기피하는 고되고 위험하며, 저임금에 긴 노동시간의 일들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일의 육체적인 노동 강도가 세다는 것은 부상과 안전사고의 위험도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대부분 불법체류자의 지위에 있다 보니,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주저하는 현실은 큰 문제입니다. 위험하고 궂은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욱 존중받고 그 권리를 보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비전문취업비자로 국내에 들어와 살다가 체류기간 연장에 실패한 후에도 3D 현장에서 일하며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임금체불과 부당대우의 문제는 차치하고도, 사고가 발생했을 때조차 기초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현대판 노예제도를 묵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구매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간주하는 정서 안에서는 어떠한 환대나 보호, 통합 그리고 증진의 측면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간절함으로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우리의 역할을 그들이 빼앗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못하는 역할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더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불법체류자의 절박한 상황에서 3D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부당하게 대우받거나 착취당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05-05

[신앙에세이] 디딤길8-2코스(죽산성지-가남성당)

“장미꽃 피었습니까?” 죽산순교성지는 오월이 되면 순교자관련 문의가 아닌 99%는 장미꽃 피었느냐는 전화가 가장 많이 오는 곳이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오월의 빨간 장미가 개화될 무렵 이곳으로 많은 분들이 끌려와서 참혹하고 혹독하게 고문을 받으며 순교하셨다.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터’로 불리며 사형지로 사용되던 성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단지 신자라는 것만으로 순교하신 분들. 많은 신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아픈 역사의 상처를 오월의 장미는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작년 5월 20일 죽산순교성지에서 가남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은 한가로운 농촌 마을을 누비며 걷는 길이었다.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 새들의 지저귐, 청보리밭에는 제법 키가 자란 보리가 바람에 살랑이며 순례자들에게 미소 짓는 순례길, 흙 담벽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시골 인심을 보는 것 같다. 5시간 넘게 걸어 가남성당에 도착했다. “환영합니다!” 성당 앞마당에서는 초등부 아이들이 우리를 보면서 두 팔 벌려 환영해 줬고, 신부님께서 반겨주시며 강복에, 땀에 젖은 머리도 마다않고 안수까지 해주셨다. 더위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죽을 만큼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었고 포기하고 싶었던 오늘의 순례 여정이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뜨거운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생각났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놀림과 조롱을 받는 건 물론이며 대신들에게 붙들려서 매를 맞기도 하고 저수동굴에 갇혀서 오랫동안 감금되기도 했던 예레미야 예언자. 그럼에도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했던 예레미야. “그 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 9) 그런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간직한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예언자를 보면서 하느님께 대한 소명 의식과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느껴진다. 마치 우리 신앙선조님들이 장미꽃의 붉은 빛처럼 순교하셨던 그 시대처럼. 신앙선조님들을 묵상하며 온몸으로 기도하며 동행한 은총의 순례길, 걷고 기도하며 사랑하는 디딤길의 도보 성지순례로 하느님과 만나고 교감하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크신 하느님과 나의 간격을 잘 좁혀 나가는 순례길, 항상 두드리고 계신 그분께 나를 활짝 열어가는 여정이다. 글 _ 박수희 아녜스(교구 디딤길팀 책임봉사자)

2024-04-28

[밀알 하나] 이주노동자 가정이 처한 위기와 귀환의 어려움

현대 가정은 새로운 위기와 어려움으로 인해 그 온전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주노동자들의 가정은 이러한 위기의 요소에 구조적으로 취약함이 있습니다. 가정의 경제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배우자 또는 가장을 타국에 떠나보내고, 뒤에 남은 가족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자국에서 고군분투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위기에 직면합니다. ‘부모의 부재’, ‘뒤바뀐 부모 역할’, ‘배우자와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등은 이주 노동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가족 구조가 직면하게 되는 대표적인 문제점입니다. 저는 법적으로 허용된 체류기간을 넘기면서까지 국내에서 장기적으로 일해온 많은 이주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예상과는 달리 저축을 전혀 하지 않으며, 고국에 남겨둔 가족과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계획 또한 확실하지 않은 것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일하고, 벌고, 자신의 수당의 대부분을 고국에 남겨둔 가족들에게 보내고, 자신을 위해서는 저축을 하지 않은 채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가정을 위한 일인가를 사목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지켜봤을 때, 저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보면, 그들이 5~10년 국내에서 번 수입의 일부만 송금하고 그 나머지를 저축해도 그 가족들의 자국에서의 경제 사정은 유지되며, 이주노동자는 고국으로 귀환 후 근본적으로 보다 개선된 경제 상황에서 가족들과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10년 이상 장기체류(대부분 미등록이고, E-9비자로도 ‘가족초청’은 막혀 있어 ‘장기근속 특례’로 이주노동자가 한 번 입국하면 10년 이상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합니다.)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정의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를 겪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오랜 부재로 인해 정서적으로도 깊이 타격받은 가족 간의 유대관계는 어느 순간 균열이 생기게 되고 더 이상 회복되지 못할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족의 위기와 해체를 겪은 이주노동자는 필연적으로 고향에 돌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타국에서의 생활을 연장하며, 새로운 이성 상대와 동거 형태의 불완전한 가정을 꾸리곤 합니다. 고국으로 돌아가 취업이나 사업의 기회를 찾기 힘든 것도 타국에 눌러앉게 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족에게 수입의 대부분을 송금하느라 모아둔 돈이 없는 경우에는 이 문제가 더 현실적인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정이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고려할 때, 저는 가족과 동반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의 장기 체류 문제를 교회적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그들의 장기체류를 반대 혹은 옹호의 입장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들을 위한 특별한 상담 또는 본국 귀환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들이 가정을 지키는 최선의 방향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목적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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