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복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3-44)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이 복음을 읽을 때 나는 다시 자유롭게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된 라자로의 심경을 상상해 본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과의 자유로운 만남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 내 육체의 감각, 자연과 인간관계들, 귀를 통해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코를 통해 느껴지는 다양한 내음 등….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만남을 통해 확인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반면 억압되어 있거나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들을 발견할 때는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죽음을 연상한다. 아무런 만남이 없거나 아무런 새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아마도 가장 큰 공포일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면 그들이 너무도 만남을 좋아하고 즐기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고된 작업과 노동으로 지친 와중에도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들은 항상 서로 모인다. 그들의 숙소나 편의점이 주된 만남의 장소이다. 공단 주변의 편의점에서는 밤늦게 소주를 쌓아놓고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일에 이주민을 위한 미사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성당을 바로 떠나지 않고 꼭 모여 음식을 나누며 시끌벅적한 만남의 시간을 즐긴다. 휴일이면 만남을 피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TV와 컴퓨터와 배달 음식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요즘 우리 사회의 풍조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나도 휴일에는 딱히 만남의 기회를 바라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습은 마치 돌무덤 속 라자로의 모습과도 같다. 어느 때부터인지 몰라도 우리는 스스로 몸을 감싸고 돌무덤 안에 들어가 죽음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남과 친교가 더 이상 우리 삶에 기쁨과 활력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일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우리에게 점점 익숙해지는 삶의 방식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비록 그 삶의 방식이 아직은 그다지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지 몰라도, 이주민들의 친교와 만남의 모습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이주사목위원회를 방문한 경찰관 한 분이 이런 말씀하셨다. “저희 업무는 그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계도하고 도움을 주는 역할이지, 체류 비자와 관련하여 단속하는 업무가 주가 아닌데 이주노동자들은 서로 모여 대화하다가도 저희가 출동하는 모습만 보면 흩어져 달아나곤 합니다. 그들이 오해하지 않고 저희를 편안히 대할 수 있도록 신부님께서 이야기해 주세요.” 타국 땅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주민들의 삶은 때로는 불안에 의해 자유로움이 억압되기도 한다. 그런 이주민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그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경찰관의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부활을 맞이하면서, 이주민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떠한 속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함께 자유롭게 걸어가는 삶을 희망해본다.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떠오르는 태양

그동안 일출이나 일몰 사진을 많이 찍어 왔다. 일출, 일몰의 모습은 사진이 찍히는 순간에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형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떠오르는 태양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감동을 안겨 준다. 우리나라의 일출 명소는 대부분 동해안에 몰려 있어 촬영 위치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시간과 예산 문제가 생기고 무엇보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러던 중 설레는 꿈을 안고 12월의 어느 날 청량리역에서 열차로 일출 명소로 알려진 강릉 정동진으로 떠났다. 촬영 장소인 현지에 가서 사전 점검을 하고 정해둔 숙소로 돌아와 밤에 잠을 자면서도 다음 날 일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이불속에서 손목시계의 시, 분침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드디어 새벽 6시가 넘고 있다. 오늘의 일출 시각은 아침 7시30분경이다. 서둘러 일어나 삼각대 등 카메라 가방을 챙겨 메고 모두 잠든 어두운 마을을 벗어나 예정된 해변의 촬영 장소로 나갔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수평선 너머로 카메라를 맞추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캄캄하고 넓은 모래 해변에 혼자 서 있으려니 적막감이 밀려왔다. 사진사들로 붐빌 시간인데 오늘은 왜 한 사람도 없는가.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며 손전등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가 조금 지나고 있다. 아니, 이럴 수가? 일출까지는 아직 5시간이나 남았다.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숙소로 되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 6시경에 일어나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촬영 준비를 마치고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정동진역으로 들어오는 열차에서 해맞이 관광객들이 쏟아져 내려와 해변에 사람의 병풍이 쳐졌다. 이윽고 동녘 바다 멀리서부터 밝아오면서 신비스러운 여명의 아름다운 하늘이 열린다. 억겁의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하늘은 점점 붉어지고 태양은 초 단위로 떠오른다. 무아지경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지구 곳곳에서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가장 많이 울리는 순간이다. 카메라 파인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숨이 차다. 잠깐 사이에 둥근 해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토록 염원해 오던 놀라운 오메가 현상이 나타난 게 아닌가! 심장이 쾅쾅 뛴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의 뒤에서 근엄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이 보인다. 위대한 조물주 하느님께서 당신이 손수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빛, 그 가운데 지으신 천지간의 만물을 굽어보신다. “빛을 받아라! 생명을 받아라!” 글 _ 김영덕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사진가회)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기록의 예술

사진은 발견의 예술이고 또 사진은 기본적으로 기록 예술이다. 사진 기록은 당대뿐 아니라 10년 20년, 아니 100년 200년 후의 후대들에게 조상이 살아왔던 모습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기록에 약했다. 특히 근대에 와서도 한국인 스스로 찍은 사진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진에 관심 있는 신자로서 가톨릭출판사에서 발간한 흥미로운 사진집이 있다. 바로 「사진으로 본 백년전의 한국, 근대한국(1871~1910)」(김원모·정성길, 1985)이다. 200여 년 전 서구의 천주교 사제나 개신교 선교사들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을 세계 곳곳을 수소문해 찾아내 수록한 것이다. 이 사진집이 발행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다시 들여다보며 당시 조상들의 삶을 엿본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진을 정리한다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 자손들에게 물려주지 말라고 권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사진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진은 기억을 되살리는 최고, 최선, 진실의 기록이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당시의 현재로 변함없이 진실을 증거한다. 당신이 남긴 사진 한 장이 당신을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으로 떠오르게 할 것이다. 당신의 생애에서 사랑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은혜를 베풀었던 일들이 감사와 존경심을 불러오게 할 것이다. 누구에겐 눈물겨운 그리운 기억으로 되살아 날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섭리로 창조된 귀한 피조물이다. 가치 없고 의미 없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사진 찍을 기회가 갑자기 늘어났다. 초기 가족사진에 머물러 있던 단순 촬영에서 세상의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넓어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전부 피사체다. 24년 전, 수원교구 가톨릭사진가회에서 개설한 사진 교실에 등록해 6개월의 중급, 고급반 과정을 거치면서 사진 이론과 카메라의 설정법 등을 새롭게 배우며 실습을 통해 현장 학습을 익혔다. 사진을 찍으면서 시각적이면서도 먼저 마음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한다. 지도 신부님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영성을 키우라고 강조하신다. 사물을 대하는 감성도 닦으면서 점차 보이지 않던 피사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풀잎에 맺힌 수정처럼 반짝이는 그러나 곧 사라질 아침 이슬 하나도 조물주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영적인 마음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 글 _ 김영덕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사진가회)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부활을 사는 사람들

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북향민들을 자주 만납니다. 특히 하나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교육받고 수료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물어봅니다. “이제 하나원을 수료하고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대부분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중국이나 북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서’가 가장 많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적지 않은 수가 ‘성형수술’을 이야기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수술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얼굴인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수술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결국 참다못해 물었더니 그 이유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의 얼굴이 이미 중국에든 북한에든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혹시 사진이 찍혀 북에 있는 가족들이 피해를 볼까 봐 다른 얼굴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쌍꺼풀 수술 정도가 아닌 확실한 변신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나원에 들어갈 때도 사진을 찍지 말라고 교육하고, 혹시 사진을 찍으면 절대 인터넷에 올리지 말라고 교육받습니다. 그리고 가끔 수료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다고 이름 좀 지어달라고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이들의 삶이 이해는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북향민에게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넣었는데 면접 때 북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탈락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차라리 조선족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북이 싫어서 도망쳤는데, 이미 대한민국의 국적을 받았고, 대한민국 여권도 가지고 있는데 대한민국에서도 차별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대한민국에 적응하기 위해 말투도 바꾸려고 노력하고, 외모도 대한민국 사람처럼 꾸미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인식이 바뀌기까지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대한민국에 와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도 이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는 부활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새로운 삶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거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미 부활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의 노력이 더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부활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여러분도 모두 부활할 수 있기를, 그래서 부활 이후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글 _ 허현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처음 사진기를 접하며…

내가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6·25전쟁이 끝난 뒤, 미군 병사들이 들고 온 어른 주먹만 한 장난감 같은 까만 플라스틱 필름 코닥 카메라를 손에 넣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에는 일본제 카메라가 시중에 많이 나돌았는데, 당시 일본제 소형 카메라인 캐논 필름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후 카메라 기종을 여러 차례 바꿔 가면서 사진을 찍어 오다 디지털카메라 시대로 진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필름 카메라 시대엔 거의 가족사진에 머물렀다. 촬영 횟수에도 한계가 있었고, 현상과 인화의 번거로움도 있었기에 사진은 대체로 가족사진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시절의 사진은 적어서 더 귀했다. 아이들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과 사소한 생활 변화에도 사진을 찍어 남겼다. 돌잔치와 입학식 같은 특별한 날뿐 아니라, 집 안에서 웃고 떠들던 평범한 하루도 내겐 소중한 기록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 속 인물들도 함께 자랐다. 자녀들이 자라고, 다시 손주들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자연스레 카메라를 들었다. 손주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는 시간 속에서 기억에 남길 일상뿐 아니라 국내외 가족 여행에서도 가능한 틈을 내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기록했다. 이런 나의 가족사진 찍기의 결과로 가족사진 부자가 되어 30여 권에 이르는 사진집을 갖게 되었다. 인쇄본으로 정리한 가족사진집은 11권. 사진집에는 ‘DEO GRATIAS(감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말하자면 6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세월의 가족사다. 지금도 우리 가족의 주요 행사를 빠짐없이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가족사 사진은 지금, 우리 가족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눈물겨운 회상, 즐거운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가난했던 시절의 삶이었지만, 기쁘고 행복했던 갖가지 일들이 사진에 생생히 살아 있다. 세월이 겹겹이 쌓여 침묵하고 있던 이미지들이 클로즈업되면서 지나간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꽃이건, 구름이건, 태양이건, 바다이건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사진 속에서 이제는 60세를 넘기고 있는 자녀들과 30세를 바라보는 손주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은혜를 깊이 느끼면서 감사한다. 감사의 마음은 우리 온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게 했다. 본당에서 성가정 상을 받기도 했다. 본당 창설 초부터 본당의 여러 행사마다, 그리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성당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찍어 왔는데 이는 초기 본당의 역사 자료로 남게 되었다. 주임신부님은 이렇게 찍은 본당 관련 사진들을 추려 두 번이나 성당 달력으로 엮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진이 찍혔을 때의 성취감은 기쁨과 감동을 안겨준다. 단순한 사진에서 작품으로, 마침내 삶의 지친 영혼이 치유되게 하는 사진 예술로 승화되어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사진을 찍는다. 글 _ 김영덕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사진가회)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 바라보기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인류는 가장 큰 시련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호한 행동은 멀어 보이기만 합니다. 많은 이가 제대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태환경위원회에서는 ‘생태영성학교’와 ‘생태영성으로 읽는 성경이야기’, ‘생태탐방’을 운영합니다. ‘생태영성학교’는 매년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생태적 문제를 각계각층 전문가의 강연을 통해 이해하고, 신앙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올해는 1강 ‘기후위기 시대, 신앙인의 선택’(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원장 주경자 마리 가르멜 수녀), 2강 ‘신규 핵발전소와 송전탑 문제’(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하승수 변호사), 3강 ‘기후위기 시대, 신앙인의 역할과 생명농업운동’(한국가톨릭농민회 안영배 요한 사도 신부), 4강 ‘핵발전소의 폭력성과 위험성’(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 사무국장)으로 꾸며졌습니다. 인공지능(AI)의 광범위한 이용과 이에 따른 데이터센터의 증가, 반도체 산업 등으로 인해 예측되는 전력 수요의 증가 문제로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적 갈등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어나갈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4월부터 진행되는 ‘생태영성으로 읽는 성경이야기’는 생태영성의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통해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며, 하느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우리, 하느님과 피조물, 우리와 피조물의 관계를 살피는 것을 시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대화’, 생태계 속에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으로서의 ‘성소’, 생태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이 마련됩니다. 이어 우리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게 해주는 ‘거룩한 상징들’로서의 역할을 하는 수많은 피조물의 모습 배우기, 생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찾아보며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는 ‘성사’, 생태계의 수많은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전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 선포’를 명하신 주님의 뜻을 살피는 등 8가지 주제의 성경 이야기 나눔이 8주간 이뤄집니다. 4월 18일 새만금 수라갯벌에서 ‘생태탐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환경다큐영화 <수라>로 많이 알려진 수라갯벌은 새만금의 마지막 남은 갯벌입니다. 저어새를 비롯한 멸종위기종들이 머무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갯벌을 직접 걸으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소중함과 창조질서 보전이라는 신앙인의 책무를 확인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생태환경위원회가 준비하는 ‘생태영성학교’, ‘생태영성으로 읽는 성경이야기’, ‘생태탐방’은 우리 교구의 모든 가족이 조금 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글 _ 양기석 스테파노 신부(수원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교회 안의 친구들

한국에서 살다 보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종교를 접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개인정보란에 ‘종교’라는 항목이 따라붙기 시작합니다. 보통 개신교 신자인 친구들이나 종교가 없는 친구들이 가장 많고, 가톨릭은 불교와 비슷한 비율일 때가 많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종교의 차이로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주일에 성당에 가보면 학교나 학원에서 보던 친구들에 비해 성당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수는 훨씬 적습니다. 몇 명 되지 않는 친구들과 매우 친해질 때도 있지만, 싸우고 서로 토라질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소수로 남은 친구들은 점점 더 끈끈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시기도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주일이 되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친구, 주일에도 학원이나 독서실에 가는 친구 등으로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하나둘 줄어듭니다. 결국 성당에는 형, 누나, 동생들 몇 명만 남게 됩니다. 청년이 되면 동갑 친구들이 거의 없는 성당 안에서 작은 사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당을 벗어나 지구나 교구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비로소 또래 신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찬양 활동을 하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연령대도 매우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하나둘 친구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노래하는 김다영(루치아), 최홍엽(라파엘), 작곡가 이원락(예로니모), 선교사 추준호(예레미야)입니다. 동시대를 살아온 만큼 공감대도 많고, 함께 나누는 수다가 무척 즐겁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 만난 덕분에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 큰 다툼없이 지내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같은 활동을 하다 보니 서로 나눌 이야기도 많아집니다. 다 같이 모일 때면 자연스럽게 약속 장소를 성지로 정하는 것도 매력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는 경험하지 못했던, 성지를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지금도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가끔 함께 찬양할 때면, 평소에는 수다를 더 좋아하던 우리가 찬양을 시작하는 순간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과 함께해 온 시간이 목소리를 통해 다시 떠오릅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간은 쉽게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행복으로 남습니다. 교회 밖에서 삶을 살다 보면 각박한 사회생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 만나는 친구들과의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특별한 시간으로만 남는 현실은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성당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친구들과 교회 밖에서 노는 시간보다 교회 안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친구이신 주님과 함께, 친구들과 손을 잡고 뛰어놀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글 _ 장영환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연주분과장)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룩스메아를 체험할 수 있는 첫 자리

교구 청소년국 산하 단체 가운데 ‘룩스메아(Lux Mea)’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뜻을 지닌 이 모임은 자녀를 위한 부모들의 기도 공동체입니다. 현재 61개 본당, 91개 팀이 매주 모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룩스메아는 단순히 자녀의 성공이나 출세를 청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부모들의 영성 생활과 기도 생활을 돕고, 이를 통해 가정의 복음화에 동참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대리구청에 부임하여 청소년 관련 소임을 맡으면서 제가 새삼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부모의 신앙’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라는 말처럼, 부모의 말과 행동, 삶의 태도는 고스란히 자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의 신앙 역시 자녀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개인주의의 심화, 관계의 단절은 가정이 본래의 역할을 다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녀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일조차 드물어졌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함께 기도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앙 교육의 제1차 장소는 가정입니다. 아무리 본당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다양한 활동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 신앙 교육의 전제는 무엇보다 ‘부모의 신앙’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할머니의 손에는 늘 묵주가 들려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일을 하실 때도, 청소하실 때도, 심지어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다 할머니께 붙잡혀 집으로 돌아갈 때도 할머니의 손에는 늘 묵주가 들려 있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는 어머니께서 새벽마다 거실의 기도 초를 밝히며 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말이 아니라,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며 몸소 신앙 교육을 실천하셨습니다. 가정이 신앙 교육의 첫 자리라는 말은 부모의 신앙이 삶으로 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에게도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그 어려움을 견디고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기쁨을 삶으로 증언할 때, 그것은 자녀에게 깊은 울림이 됩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녀는 다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만남은 줄어들고 대화는 메말라가는 시대일수록, 기도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기도를 통해 전해질 때, 그 안에서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자녀뿐 아니라, 기도가 필요한 다른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자리, 그 안에서 가정의 신앙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삶으로 전해질 때, ‘Lux Mea - 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고백은 단순한 표어가 아니라 가정 안에서 체험되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분명 그 가정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글 _ 이규성 요셉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청소년2국장)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주사목은 이주민들을 향한 사목적 돌봄을 수행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지만, 단순한 사목적 돌봄을 넘어 때로는 이주민을 환영하고, 만나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도와주는 일들도 하게 된다. 영성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법률적, 물질적 도움도 주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중의 하나가 당장 갈 곳 없는 이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이다. 쉼터의 목적은 갑자기 실직하였거나 치료의 목적으로 단기간 머물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국적에, 다양한 사정으로 많은 이가 거쳐 갔다.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보통 2~3명의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 따라서 공동생활 안에서 요구되는 규칙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잠시 지내다 떠나는 곳이지만, 공동체 생활이기에 각자 곤궁한 사정의 경중을 따지기에 앞서, 함께 지내기 위해 자기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난민 인정을 희망하며 체류하는 어떤 이주민이 쉼터에 왔다. 쉼터에는 이미 다른 국적의 이주민 두 명이 있었다.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쉼터에 마련된 식기와 식재료도 공유하고 요리도 직접 해야 하며, 청소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관리자나 봉사자 없이 그들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쉼터에 온 후 스스로 요리도, 청소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다 덩치가 큰 그는 함께 지내는 이주민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참다못한 이들이 이 이야기를 담당 사제에게 전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며 부인한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자신은 그들보다 도움이 더 필요한 처지임을 주장하는 데 열심이다.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태도에 화가 나서, 결국 그를 곧 쉼터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도움 앞에서는 간절한 모습이지만,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는 작은 배려와 희생에도 인색한 사람이라는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희생을 당연한 듯 여기고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인색한 모습을 보면 베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괘씸한 마음이 든다. 약자의 사회 안에서도 벌어지는 약육강식과 이기적인 행태로 보인다. 복음에서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뒤돌아서 나올 때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의 마음’(마태 18,23-35 참조)이 그러했을까? 하지만 이런 결정에는 늘 후회와 반성이 따른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받았기에 베풀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내가 제공하는 도움은 나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명과 소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앞세워 처음에 지녔던 따뜻한 시선은 거두고 쉽게 의심과 미움에 사로잡히는 냐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어버린 인색한 종’은 아닌가.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쉼과 함께

찬양이 있는 곳을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한 해가 금세 지나갑니다. 대림과 사순 시기에 늘어나는 음악 피정, 성탄과 부활, 연중 시기를 가리지 않는 찬양 미사와 공연 그리고 연습과 준비의 시간까지 더하면 한 해는 참 알차게 흘러갑니다. 본당이나 교구, 단체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행사를 하나하나 준비하고 마무리하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훌쩍 지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행사가 끝날 때마다 기뻐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수고했다”,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 보람을 느끼며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종종 뜻하지 않은 갈등이 생기거나 정성껏 준비한 노력이 빛을 잃는 순간이 찾아오면, 다음 봉사도 신앙생활도 내려놓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마음과 에너지를 나누는 일을 하다 보면 작은 일에도 깊이 상처받고, 뜨거웠던 마음이 쉽게 식기도 합니다. 저 역시 바쁜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때는 깊이 돌아보지 못했던 오해와 미움, 실수들이 떠오르며 뜨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우연히 피정과 성지순례의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곳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느님과 마주하는 시간, 나 자신과 머무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찬양의 여정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것처럼 더욱 설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이 가볍고, 하루에 대한 기대도 커졌습니다. 이전에는 맡은 역할에만 집중하느라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고, 좋았던 순간들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은 다녀온 장소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곳에서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신부님들의 어우러진 목소리와 함께 찬양하는 동료들의 연주, 신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던 그때가 또렷이 기억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힘을 모아 봉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알아주지 않을 때도 많고, 서로 뜻이 맞지 않을 때도 있으며, 생각처럼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머리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생각보다 더 여리고 약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가기도 합니다. 갑작스러운 ‘신앙생활의 멈춤’이 오지 않도록, 틈틈이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합니다. 피정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고, 본당을 벗어나 다른 본당이나 성지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미사가 없는 시간에 성당에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 _ 장영환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연주분과장)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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