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라떼는 말이야!”

어느 날, 어린이 미사를 봉헌하고 마당에 나와 보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화 캐릭터와 능력치 등이 적힌 카드를 가지고 서로 대결하는 일종의 카드 게임인데, 저도 어린 시절에 비슷한 놀이를 했던 추억이 떠올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했지요. “이야~ 카드놀이 하는구나. 신부님도 어렸을 때 참 재미있게 했었는데.” 그러자 한 아이가 귀찮다는 듯 곧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라떼는 카페 가서 시키세요.” 아시는 바와 같이 한때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지루하게 늘어놓다가, 결국 우리 시대에는 감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너희는 왜 하느냐고 훈계하는 기성세대를 비꼬는 풍자적 표현입니다.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어른을 가리키는 속어인 ‘꼰대’도 이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요. 반대로 흔히 언급되는 ‘MZ’는 특정 젊은 세대를 뜻하는 신조어로 소개됐지만, 요즘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꼬집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책 제목처럼 “90년대 생이 온다”고 떠들썩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90년대 생들도 더 어린 세대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는 시대가 됐습니다. 하긴, 수천 년 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세대 간 갈등은 요즘 시대만의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모든 문화는 예외 없이 갈등과 변화를 겪어 왔고 이를 통해 때로는 악습들이 사라지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으니, 이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해와 소통 없는 무조건적 거부와 혐오입니다. 실제로 요즘 자주 접하는 표현 중 하나가 ‘OO충’이라는 말들인데요. 특정 집단 뒤에 ‘벌레’라는 뜻의 ‘충(蟲)’을 붙여 싸잡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비단 일부의 표현으로 끝나지 않고, 세대, 성별, 지역, 인종, 종교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점점 거대해지는 혐오의 문화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안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모두 사라질 수는 없기에, 여기에 속한 모든 존재를 혐오할 이유 또한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이란 감정의 동물이기에 때때로 무언가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좋아하지 않는 무엇을 꼭 싫어함의 영역에 두어야만 할까요?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수많은 영역과 존재는 당장 좋음과 싫음의 두 영역 중 하나로만 구분 짓도록 하는 흐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악의 작용을 느끼곤 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2) 악(惡)은 갈라지게 하지만 선(善)은 모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들을 하나로 모아들이기 위해 오셨고, 이를 위해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이제는 혐오가 아닌 사랑의 씨앗, 자기비허(自己脾虛)의 거름이 뿌려지기를 기도해봅니다. 글_김영철 요한 사도 신부(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2-01

[신앙에세이]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보리라. 주님의 장하신 일을 이야기 하고자

그렇게 연령회 봉사를 이어가던 중 여느 때처럼 가게에서 일을 하던 중 갑자기 숨 쉬기가 불편해지며 의자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직원이 119를 불렀고 난 근처 3급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위험하다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안산 고대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바로 중환자실로 올려버렸다. 아내와 가족 얼굴도 못보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나는 그날 저녁 여섯 번인가 일곱 번인가 숨이 멎는 아주 위험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첫 번째 숨이 멎을 때는 영문도 모르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그 다음부터 병원에서는 운명할 것을 대비해 아내와 아들을 옆에 있게 배려를 해줬다. 아내와 아들 손을 잡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 숨이 멎었다 깨어나기를 몇 번이나 계속한 끝에 죽지 않고 그 다음 날 아침을 맞게 됐다. 병명도 모르고 특별한 치료방법도 못 찾았기에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병원을 백방으로 찾았다. 그러던 중 아주대학교병원으로 가서 응급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그날 저녁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문 쪽에서 교수님과 아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봤는데, 갑자기 아내가 다리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퇴원하고 아내에게 그때 일을 물어보니 교수님이 엑스레이 사진 상으로 폐 한쪽이 다 죽어서 도저히 회복 가능성이 없으니 준비(죽음)를 하라고 해서 주저앉았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다고 하니 아내와 가족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믿기지도 않았을까... 그때부터 나만 모르는 나의 장례 준비가 시작됐다. 동생은 강원도 선산에 굴착기를 빌려 나를 묻을 땅을 파고 광중(壙中, 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까지 지어 놓았다. 친가와 처가 가족과 친구들은 병원으로 모여 들었다. 그날 저녁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임사 체험, 즉 죽음을 체험했다. 몸에서 내 영혼이 빠져나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끝도 안 보이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 곳으로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떨어지던 중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왼쪽 옆구리가 걸려서 멈추고 그 순간 또 눈을 떴는데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의사들이 내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서 있고 내 입에는 풍선처럼 생긴(아마 산소를 공급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가 물려져 있었다. 아내는 한쪽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다시 살아났다. 아내에게 왼쪽 옆구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아내가 옷을 올려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내는 아마 내가 죽기 직전에 헛소리를 하는 걸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교수님이 아내한테 마지막으로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폐에 직접 약물과 산소를 공급해 보자고 말씀을 하셨다. 아내는 뭐든 해 보자고 했다. 수술 후 나는 점차 회복돼 입원한지 6개월 정도 만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글_김태은 안셀모(수원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

2024-12-01

[신앙에세이] 이 교우를 받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이끌어 주소서

본당 연령회장을 맡아서 봉사하던 어느 날 생각하기도 싫은 가슴 아픈 큰 사건이 일어났다. 2014년 4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날도 장례미사를 드리고 장지에 동행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고 전 신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문자를 보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장례가 발생하면 전 신자에게 상장례 문자를 보내던 때였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전 신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문자를 발송하고 나니 다시 본당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침몰한 배에서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 잠시, 많은 학생들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저녁 학생들 가족과 신부님 모두 팽목항으로 달려갔고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시작됐다. 그날 이후 매일 매일 슬픈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본당에도 네 명의 아이들이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모든 교우들이 애타게 간절하게 기도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끝내 주검으로 돌아온 학생이 안산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그 친구는 당시 신부님 옆에서 복사를 하며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님이 되겠다던 학생이었다. 임마누엘. 지금도 복사 유니폼을 입고 관 속에 누워있는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입관 때 본당 신부님께서 주신 묵주와 친척 수녀님이 주신 묵주를 양손에 쥐어 주고 복사를 설 때 입었던 복사 유니폼을 입혀 줬다. 참으로 많은 분들을 입관해 드리면서도 울지 않았었는데, 이때만큼은 참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장례 미사 때 같이 복사를 서던 친구가 고별사를 할 때 미사에 참례한 모든 신자 신부님 수녀님들이 다 슬퍼하며 눈물을 훔치며 미사를 드렸던 기억도 난다. 그때 고별사를 읽었던 임마누엘의 친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얼마 후 신부님이 되신다. 12월에 새 신부님이 되시는 그분께서도 아마 임마누엘 성호 군을 잊어보신 적이 없으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지금은 다른 본당에 다니지만 우리 신부님 첫 미사 때 꼭 참례하려고 한다. 그래서 친구 임마누엘 몫까지 다 하셔서 가장 훌륭하고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목자가 되시기를 기도드리려고 한다. 지금도 위령 성월이면 내가 기억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특히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 그중에서도 우리 본당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기억하며 연도를 바치고 있다. 글_김태은 안셀모(수원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

2024-11-24

[밀알 하나] 렙톤 두 닢 커피

신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 신부님께서 강조하신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신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야 해.” 다양한 신자분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식사를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음식을 가리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여전히 입 짧은 신부로 남아있습니다만, 이런 식성에도 다행히 딱 한 가지 장점은 있습니다. 유일하게 2차 성징이 오지 않은 미각 세포 덕분에 입맛이 저렴하다는 것입니다. 식도락은 남의 이야기이고 맛집은 손님이 오실 때만 찾아봅니다. 고양이 똥 속 원두로 만든 커피가 비싼 값을 받는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적어도 제 입에는 커피, 프림, 설탕의 삼위일체가 빚어내는 영성적인(?) ‘믹스 커피’가 언제나 최고입니다. 이제는 K-커피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만큼, 다들 이 믹스 커피와 관련된 추억들이 한 가지씩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에게는 신학교 시절 동기 수녀님들이 사주시던 자판기 커피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한 교시 수업이 끝나고 꿀맛 같은 10분의 쉬는 시간이 되면 신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커피 마시러 가자. 오늘은 내가 쏜다!” 비몽사몽 중인 동기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수녀님들은 자신의 동전 주머니를 아낌없이 탈탈 털곤 했습니다. 때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끌려나가기도 했지만 시원한 바람과 함께 다디단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장정만도 수십 명가량이나 됩니다. 일반 대학교와는 달리 카페 한곳 없는 작은 신학교이기에 ‘커피 하우스’라고 이름 붙인 그 야외 휴게실의 자판기 커피를 참 많이도 즐겨 마셨습니다. 하지만 수녀님들이 뽑아주시던 커피가 조금 더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아마도 서로에게 200원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돈이 궁한 학생 시절이었어도 자판기 커피값 정도는 거의 문제 되지 않던 우리들이었지만, 정말 적은 용돈을 받는 수녀님들에게는 몇 잔만 모여도 적잖이 영향을 주는 금액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을 때는 아낄지언정 베풀 때는 주저함 없이 자판기 배를 불려주던 수녀님들의 마음이 담겨있었기에 지금까지도 그 커피 맛을 잊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몇 해 전 인기 있었던 드라마 제목처럼 ‘커피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수녀님’들의 그때 그 커피에, 저는 이제야 이렇게 이름 붙여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렙톤 두 닢 커피’라고 말이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마르 12,41-44)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넣은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절대적인 양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담겨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눈여겨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 얼마만큼의 소중함을 예수님께 내어드릴 수 있을까요? 글_김영철 요한사도 신부(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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