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복음] 청소년은 교회의 현재

예전 한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모님을 따라 평일 미사에 나온 아이들은 미사 후 부모님이 여러 단체 모임에 들어가고 나면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성당의 작은 마당에서 휴대폰을 보거나, 친구랑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제관에 데려와 간식도 주고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본당 내에 교회의 미래라고 부르는 청소년들을 위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이 애석했습니다. 그 청소년들이 교회의 미래가 아닌 현재라고 느낀다면 더더욱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교리실 한 개를 아이들을 위한 쉼터로 만들어주기로 다짐하고, 아이들이 잠시나마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물품들을 마련하여 쉼터를 정성껏 꾸몄습니다. 안타깝게도 쉼터를 완성할 무렵,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아이들이 그 쉼터를 이용하는 모습을 정작 보지 못하고 다른 본당으로 떠났지만, 그 후에도 성당에는 청소년들이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계속 마음에 새겨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청소년들을 너무 자주 ‘준비 중인 신자’로 바라보곤 합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직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더 배워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 교회의 주역이 될 사람들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례받은 순간부터 그들도 이미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의 존엄과 소명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당신 곁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막아섰을 때도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마태 19,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미래의 제자로만 바라보지 않으시고, 현재 당신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청소년사목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이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어른을 만났을 때, 본당의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았을 때,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았을 때, 그리고 자신도 공동체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을 때입니다. 제가 만난 많은 청소년은 생각보다 깊은 신앙의 고민을 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생각보다 큰 열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게 해 주기도 했고, 공동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청소년들은 교회의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늘의 교회 안에서 기도하고, 봉사하고, 고민하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교회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청소년들에게 “언젠가 네가 교회의 주인공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너는 이미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구성원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청소년들은 비로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 우리는 청소년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통해 교회가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글 _ 이규성 요셉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청소년2국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일과 찬양 그리고 기도

저는 일과 찬양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일에 쌓인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찬양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일과 찬양을 함께 하면 시간이 서로 많이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에 찬양하러 가지만 사실 집에서 쉬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찬양을 가지 않는 대신 몸의 피로를 풀고 싶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의무감에 갇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는 반항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종 쉬는 시간 없이 찬양과 일을 함께 하다가 육체적 피곤을 해소하지 못해 실수를 한 적도 있습니다. 기뻤던 찬양 시간이 부담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고 일 생각으로 찬양에 성의를 다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일에 대해서도 성의가 떨어져 일에 대한 결과가 좋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이 마냥 즐겁고 편하지만은 않듯이 이 찬양 활동도 그럴 것 같습니다. 찬양은 신앙 안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신앙생활이 잘 돼야 찬양을 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주일미사에 참여하기 귀찮아할 때도 있고 일을 하면서 말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잘못된 행동도 많이 합니다. 때로는 이런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찬양과 기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저를 더 마음의 동굴 안으로 밀어놓기도 합니다. 저는 계속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찬양 활동만이 신앙생활이 아니라고도 생각하고 있고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저에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시간 관리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게 큰 기쁨을 주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찬양이 많은 양분이 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찬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이러한 경험과 생각들이 저를 더욱더 성장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마냥 쉬운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일이라도 준비가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생활 중 기도할 때, 짧게 할 때가 많습니다. 성모송이나 영광송을 하거나 정 안되면 ‘하느님 도와주세요’ 식으로 짧게 기도합니다. 일을 하다가 중간 중간에, 찬양을 시작하기 전 종종 그렇게 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부지런하지도 않고 능력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노력도 잘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기도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과 생각을 하느님께 바치면 성령께서 저를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를 바른길로 이끌어 가 주시리라 믿습니다. 글 _ 조성욱 루카(교구 찬양사도협의회 ‘루카와 요한’)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강아지에게 배운 놀라운 것

제게는 13년 동안 함께한 친구가 있습니다. 13년 전, 저는 진돗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친구가 되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개에 대해, 특히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 강아지는 진실함, 충성심, 이타적인 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제 강아지는 늙고 병들어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 것입니다. 강아지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슬픔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강아지가 제게 준 모든 것, 그리고 가르쳐준 모든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함을 느낍니다. 한 번은 한국을 잠시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강아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사다 놓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잠자리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사는 오블라띠 형제들에게도 강아지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약 한 달 만에 돌아왔을 때, 형제 중 한 명이 제게 말했습니다. “루나(제 강아지 이름)는 당신이 떠난 후로 하루도 개집에서 자지 않았어요. 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문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순간, 제가 준비했던 모든 것은 진정으로 강아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강아지에게 필요한 것은 곁을 줄 수 있는, 저라는 존재였습니다. 이 경험은 또한 제 삶과 사목 활동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주민들을 섬겨왔습니다. 그들은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고, 일자리를 찾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이나 휴식을 위한 장소도 필요합니다. 병원에 갈 때도 한국어를 이해하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한 다양한 이주민 사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도와주고 베풀어준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관심으로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제 강아지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힘과 안정감을 주는 동반자,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지켜주는 충실한 친구, 따듯하게 맞아주고 언제든 달려와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웃과 같은 사람입니다. 마치 서두르지 않고 저를 기다려 준 제 작은 강아지 루나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함께 있어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너희는 부자가 될 것이다, 너희는 병들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마지막 말씀대로, 매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글 _ 이청우 마우리찌오 신부(오블라띠 선교 수도회·광주 엠마우스 이주민 공동체 담당)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어느 성당에서의 찬양

얼마 전 수원교구에 있는 한 성당에서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성가를 부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떼제 성가도 함께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그 목소리가 순수하고 티 없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안에서 그 느낌을 망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미 봉사를 하고 계신 분들과도 함께하게 되었는데, 저를 반갑고 기쁘게 맞이해 주시며 함께 연습하고 찬양해 주셔서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당의 학생들은 정말 잘 불렀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그 안에서 제가 무엇을 했다기보다 정말 잘 들었고, 잘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 안에서 순수함과 기쁨을 느끼고, 그 마음을 찬양을 통해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너무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히 그것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저를 잡아 내리기도 하고, 자신감을 떨어뜨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그저 제가 기쁘게 그분 앞에서 찬양한다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그저 하느님의 기쁨 안에서 함께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찬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일 잠들기 전 기도합니다. 사실 그렇게 큰 지향은 아니고, ‘저를 도와주십사’ 하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최대한 담백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바치려고 합니다. 하루의 삶 안에서도 그렇게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때를 돌아보면, 어릴 때 성당 마당에서 즐겁게 놀던 시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때야말로 더 바라는 것이 없었고, 그저 그 안에만 있어도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기도를 이렇게 바치려고 합니다. 성가도 이렇게 부르려고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기쁘게 보시고, 저도 그분께 찬양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대입니다〉라는 갓등중창단의 성가가 있습니다. ‘그대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나도 그대 안에 있습니다. 나 그대의 눈으로 보고 그대 가슴으로 삽니다’라는 가사가 종종 제게 다가옵니다. 이미 하느님은 제 안에 계시고, 저도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종종 제게 힘든 일이 다가올 때가 있지만, 그럴수록 위의 가사처럼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그분 안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 기쁨 안에서 저는 찬양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_ 조성욱 루카(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루카와 요한’)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청년 도보 성지 순례

군에서 제대하고 신학교에 복학한 첫해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본당에 돌아와 주임신부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 국토대장정이 유행처럼 열리던 때였는데, 교구에서도 그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며 본당 신학생들은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신부님은 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초대 위원장이셨습니다. 남과 북의 분위기가 좋아지던 시기였던 만큼, 언젠가 북녘땅이 열리면 도로나 철도가 놓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걸어서라도 평양에 들어가자는 뜻을 담아 순례가 기획됐습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인 약 200km를 교구 성지를 따라 걷는 여정이었습니다. 물론 첫 행사였던 데다 준비 과정에서 여러 오차가 생기면서, 결국 우리는 270km를 걷게 됐습니다. 순례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비를 흠뻑 맞기도 했고, 무더위에 지쳐 발걸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남양성모성지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기쁨과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청년 도보 성지순례는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2001년 7월 1기를 시작으로, 올해는 23기 청년들이 다시 순례길에 오릅니다. 올해 순례는 7월 4일부터 11일까지 교구 성지들을 걸으며 진행됩니다. 오랜 시간 이 순례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신부님들과 봉사자들, 그리고 순례단을 맞아 준 성당과 성지의 환대와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그 모든 손길 덕분에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순례가 이어져 온 것에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특히,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게 된 사실들이 있습니다. 처음 도보 성지 순례에 참여했다가 이 행사가 너무 좋아 10년 넘게 봉사를 이어오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분들은 나이가 들어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도 봉사를 위해 자신의 모든 휴가를 도보 성지 순례에 쏟아 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토요일마다 모여 회의하고 답사도 다니면서 순례를 준비합니다. 또한, 무더위에 계속 걸어야 하기에 틈나는 대로 운동을 하면서 도보 성지 순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까요? 신자들에게 이렇게 봉사하라고 하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더구나 걸으면서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물론 평화통일 기원 도보 성지 순례이지만 지향은 거기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지향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지금의 분단 현실을 기억한다면 그것마저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올해도 약 200km를 걸을 것입니다. 9월에는 단기 순례도 있습니다. 이 행사를 사고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청년들의 바람이 하루빨리 이루어져 북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울리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밤 9시에 이루어지는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기도를 통해 이 청년들의 발걸음에 힘을 보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글 _ 허현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성지에서

어느 신부님의 초대를 받아, 원주교구 배론성지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학교 피정 마침 주일미사 중 성가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친분이 있던 분을 뵐 수 있었고, 제가 좋아하는 성가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작은 경당에서 봉헌됐고 반주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에게는 그 점이 부담을 덜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은 성당을 좋아해서였는지, 좋은 신부님을 만나러 간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미사에 참여하러 갈 때만큼은 모든 잡념을 내려놓고 행복한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미사에 방해만 되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실제로 많이 부족했습니다. 긴장하는 버릇은 여전했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실수를 하면 모든 신자분이 저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오해였습니다. 다행히 신부님과 신자분들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고, 함께 성가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에게는 그 시간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반주를 도와주시는 분도 생겨 더욱 기쁘게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실수도 처음보다 많이 줄었습니다. 자차로 이동해도 왕복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서는 일이 늘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주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라도 미사에 참여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성지를 향할 수 있었습니다. 삶 안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신부님과 상담할 수도 있었고, 성지에 머무르며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가는 것이어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달에 한 번 성지순례를 떠나는 기분이었고, 힘든 삶 안에서 위로를 받고 돌아오는 시간이었습니다. 때로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어하던 제가 스스로 전날 미리 성지에 도착해, 성지의 밤하늘 아래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봉사해야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는 신부님을 뵈러 간다는 단순한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제가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에게 선물을 주신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고민과 걱정은,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씻은 듯 사라지곤 했습니다. 제가 움직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고, 그 시간은 추억이 되어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저에게도 슬프고 힘든 일들이 종종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들 또한 곧 지나갈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제가 하느님 안에 머무르려 한다면, 그분의 도우심 안에서 다시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글 _ 조성욱 루카(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루카와 요한’)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성가가 기도가 되기까지

저는 사실 어릴 때 성가에 관심이 많지 않았습니다. 성가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가 가장 컸고,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물론 미사에 참여하면 이왕 참여했으니 성가라도 열심히 불러 보자는 생각은 있었지만, 단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간이 좀 지나 어떤 친구가 뜬금없이 제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지만, 저는 태어나서 처음 들은 칭찬에 우쭐해지기도 했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내 목소리가 정말 좋다면 성가도 잘 부를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성가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불러 보게 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력이 금방 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면서 성가에 아주 작은 흥미를 느낄 수 있었고, 성가에 집중하고 머무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성가에 관심을 가지던 중,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미사 안에서 성가를 부를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성가를 부르면서 행복을 느꼈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이 진정되기도 했습니다. 신자분들과 함께 성가를 부른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잘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분들과 함께 성가를 부른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혼자 부르는 성가보다 함께 부르는 성가가 더 기뻤습니다. 마치 저와 함께 기도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제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긴장을 많이 하고, 힘도 더 빠집니다. 함께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삶은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자분들 안에서 함께하는 것은 제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그 안에서 용기를 얻고, 하느님을 멀리하지 않게 됐다고 말해야 할까요. 사회생활 안에서 저는 종종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제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합니다. 어느 때는 그런 것이 편하고 큰 부담도 없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다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마치 사랑을 떠난 사람처럼요. 오히려 기도, 나아가 성가를 부르고 찬양하는 것이 큰 기쁨을 주고, 삶을 살아가는 데 많은 양분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든지 말입니다. 제가 부르는 성가가 기도가 되어, 듣고 계시는 신자분들의 기도와 함께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의 시작은 사소했고, 더 생각해 보면 순간적인 생각에 따라 즉흥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그런 저를 도와주시고, 이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하신 말씀으로 전해지는 말입니다. 제 부족한 기도가 두 배가 되어 하느님께 닿을 수 있다면, 저를 보시고 다른 분들도 기도하는 데 도움을 받으실 수 있다면, 저는 지금보다 더 기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조성욱 루카(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루카와 요한’)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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