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5) - 형제 안에 계신 예수님

2024년 11월 2일, 한국아동보호안전교육위원회(한국마리아사업회 소속)에서 실시한 ‘아동 및 취약한 성인 안전보호교육’을 받았다. 공동체의 온전한 성장을 위해 기본적으로 알고 지켜야 할 내용들이었는데,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항상 청소년들과 함께하고 있는 나에게도 꼭 필요했다. 특히 유엔아동권리협약 4대 기본원칙 중에서 아동의 의견 존중(제12조)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 지난여름 피정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왔는데 둘째 날 저녁, 축제의 시간이었다. 율동을 준비했기에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휴대전화를 걷어서 따로 보관하기로 했다. 그런데 서른 명의 청소년 중에 한 명이 이를 거부했다. “내 폰인데 왜 가져가요? 싫어요.” 무대 위에 서는 동안만 잠시 걷는 것이라고 잘 설명해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긴장한 그 아이는 휴대전화를 걷기로 한 결정에 기꺼이 동의하지 않는데 순식간에 결정된 사항이라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마침 그 아이는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기에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지 말고 가방에 잘 넣어두자고 제안했더니 얼굴에 긴장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성 모임은 학교 수업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휴대전화 사용 예절 문제는 청소년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마다 과제로 떠올랐다. 모든 청소년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절차에 의견을 표명할 권리와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정확하게 배우고 나니 그때처럼 단 한 명의 청소년이라도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좋은 의견을 구하고 그러한 의지를 말씀드렸다. 그러자 즉시 이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누어 준 것에 감사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바로 나와 같은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보조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그는 모임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했다. 얼마 후, 성탄을 앞둔 리빙모임을 준비하는 보조자 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스마트폰 사용 수칙’에 대해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정하기로 했다. 리빙모임 첫날, 20여 명 남짓한 청소년들은 원형으로 둘러앉아 토론을 했다. 보조자들은 청소년들 안에 계신 예수님께 청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길잡이 역할을 하다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들 스스로가 기꺼이 실천할 수 있는 수칙을 세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불과 7분 만에 청소년들이 결정한 수칙들은 우리가 제안하고 싶은 내용과 별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1박 2일 동안 모두가 이를 잘 지켜주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놀랍다! 글 _ 안현정 소피아(수원교구 제1대리구 용인본당)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3면

[밀알 하나] 봄의 쓸쓸함

이곳저곳 쌓인 눈들이 땅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새순이 아니라 가을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작년의 낙엽인지, 재작년의 낙엽인지 모를 지난날의 흔적은 한껏 초라해진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작년에 단풍이 유독 예뻤는지, 유난히 별로였는지는 상관없습니다. 가을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볼품없는 모습은 따듯해진 날씨와 상관없이 쓸쓸한 시간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 허무를 체험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은 자신의 과거가 찬란했든 비참했든 과거를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고,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순이 돋기 전, 황량한 나무들과 바닥에 보이는 나무들의 지난날에서 우리도 성장하기 위한 굳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나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고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무는 성장하고 기적과 같이 새잎을 다시금 피워냅니다. 지난날을 충분히 수용하며 과거에서도 자양분을 얻고 성장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종종 과거의 영광은 언제나 빛나길 바라고 과거의 상처는 빨리 사라지길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없어질 결과물에만 집착하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만약 나무가 자신의 잎이 너무나 아름다워 월동 준비를 하지 않고 잎들을 붙잡고 있다면, 겨울에 내린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지마저 부러질 것입니다. 만약 지난해 충분히 노력하고 뿌듯한 결실을 맺었다면 그 순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 또 다른 결실을 위해 한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부족했던 순간이 부끄러워 외면하기만 한다면 그곳에서 얻을 귀중한 보화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만약 나무가 풍성히 자라지 못한 잎들을 저 멀리 치워버린다면 내년에는 더 빈약한 잎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만약 지난날의 실수나 상처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한다면 같은 곳에서 또다시 넘어져 더 많은 아픔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에 따라 함께 작용하고 우리에게 선으로 이어짐을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켜켜이 쌓인 낙엽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나무에게 선으로 작용하듯이, 우리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 모든 것도 영원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깨닫고 자유로워진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영원함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고 주님의 작품입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통해 모든 순간 체험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바람, 곧 성령을 통해 하루를 살아가고자 기도하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충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3면

[신앙에세이]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4) - 서로 간의 사랑

“나이가 많아도 신체가 불편해도 분과위원이 될 수 있나요?” 나는 하고자 하시는 분은 모두 분과위원으로 모셨다. 생태영성의 길은 나이가 많아도 신체가 불편해도 다 같이 잘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사랑만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활동을 못 할 때도 생긴다. 그러면 미안한 마음에 아무 도움도 못 되느니 차라리 그만둘 결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분께 공동체 안에 남아 기도로써 공동체를 지탱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느님께서는 시련 중에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들과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약할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하기도 한다. 초자연적인 사랑은 자연적인 사랑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분과 활동을 위해 모이는 것 외에도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대방이 원한다면, 더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돌본다. 이런 시간을 내어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세속적인 친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다른 봉사직을 위해 떠나거나 다른 봉사를 하다 되돌아오는 분도 계신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 온 사람들의 관계가 세속적으로 변질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버티기 힘들다. 이러한 일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서로의 영적인 성장을 돕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을 성실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부족함이 많다. 그래서 서로에게 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단순한 친교로는 극복하지 못하는 갈등도 생긴다. 이때에는 서로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이 요구된다. 그러지 못하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드물지만 진리 안에서 서로 충고하며 악습을 고쳐가기도 한다. 이를 허락하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이처럼 우리는 모든 활동에 앞서 복음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핍된 최선보다는 사랑이 감도는 차선을 기꺼이 선택하고 역할 분담을 했어도 항상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한 분이라도 소외되지 않도록 여러 차례 일을 하거나 이미 결정된 사항을 미룰 때도 있다. 늘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기도가 필요한 분을 위해 마음을 모은다. 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분들이 바쳐주시는 기도에 감사하며 모든 공로를 함께 나눈다. 궂은일일수록 더욱 솔선수범하시는 분과위원들이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함께 기도하고 봉사하는 가운데 자라난 서로 간의 사랑은, 우리를 내적·외적으로 성장시키고 작지만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글 _ 안현정 소피아 (수원교구 제1대리구 용인본당)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3면

[밀알하나] 성전의 초는 하루 중 아주 잠깐만 타오릅니다

성전의 초는 하루 중 아주 잠깐만 타오릅니다.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 수많은 시간 동안 차갑게 식어 있을 뿐입니다. 제단 위에 있는 종은 미사 시간 중 세 번만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때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나머지 모든 시간은 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침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있는 세탁기는 자리도 많이 차지하면서 하루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신발장은 집을 오가는 사람이 없으면 한 번도 열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주변의 많은 것들은 자신의 시간을 침묵으로 지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침묵은 의미 없는 것일까요? 차갑게 식어 있는 초도,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제단 위의 종도, 꺼져 있는 세탁기도, 열리지 않는 신발장도 의미 있는 침묵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 침묵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지 못한다면 제때에 타오르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참지 못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실을 맺기 위해 땀 흘리고 때로는 실패하는 그 시간을 의미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조화가 아닌 이상 매번 피어 있는 꽃은 없는데 오늘날 우리는 향기 나는 조화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지금 나의 침묵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그분께서 마련하신 모든 것의 제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괜찮습니다. 그분께서 그리 해주시겠다는데 우리가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존재의 침묵 혹은 고요함을 견디고 그 시간을 성실하게 채운다면 어느샌가 아름답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를 기억하는 것,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사는 건 참 어렵습니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누군가를 바라보면 조바심도 나고, 자꾸만 실수하고 실패하는 자신을 보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더 깊은 침묵을 찾습니다. 하느님 빛으로 나의 침묵에 빛을 밝힙니다. 기도는 침묵이 어둡지만은 않음을 다시 알려줍니다. 만약 지금 마음이 힘들고 괴롭다면 침묵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선택한 침묵은 우리의 존재를 밝혀줄 것입니다.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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