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남편을 떠나보낸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장례를 치른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사별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고, 사람들 앞에서 조차 감정을 숨기지 못해 종종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사람들이 드문 평일 오후 성당에 갔습니다. 그렇게 고요한 성당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바로 주임신부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건넨 한마디는 자매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제 그만 울 때도 되지 않았어요?” 자매님은 그 말에 북받친 슬픔과 서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성당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부님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했던 것일 테지만, 여전히 애도의 한가운데 있는 자매님에게 그 말은 위로가 아닌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작년, 사별가족 동반자를 양성하는 ‘모현상실수업’에 함께 참여한 한 수녀님이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수도회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던 한 자매님이 형제님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수녀님은 자매님을 마주하고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형제님은 하느님 곁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과부들을 특별히 보살피신다고 하셨잖아요. 앞으로 하느님께서 자매님을 잘 돌보아 주실 거예요.” 수녀님은 시간이 지나 그 말을 돌이켜보며 고백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상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내뱉었어요. 그게 자매님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만 들으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을 보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로의 마음은 가득하지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종종 준비되지 않은 말과 행동들로 상대방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 상실의 고통을 겪는 이가 충분히 울고, 사랑하는 이와의 기억과 감정을 천천히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랑, 그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그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함께 머물며 침묵과 기도 그리고 동행으로 곁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죽음은 신비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에게, 명쾌한 설명이나 조언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그 신비 앞에 머무르고 상실이 불러오는 시간과 감정의 깊이를 공감하고 나누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에게 어떤 사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성급한 조언자입니까? 아니면 조용히 함께 머물러 주는 동반자입니까?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3면

[신앙에세이] 주님께서 한계를 뛰어넘을 영감을 주신 순간

6년 전, 전주 전동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복원 작업을 맡게 되었다. 성당 자체가 문화재급의 역사를 지닌 건물이고, 14처 역시 100년이 넘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중 두 점은 6·25전쟁 당시 파손된 후 여러 차례 비전문가에 의해 수리됐으나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이렇게 막막한 조건의 복원은 처음이었다. 국내 최고의 성당 미술 복원 전문가라는 자부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과연 이 작업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고민 끝에 계약을 보류하고 한 달을 보냈다. 모든 고증 자료를 모으며 원본을 유추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뒤, 본당 측으로부터 성당 안에 1년간 아틀리에를 꾸밀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복원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단계는 14처를 아틀리에로 옮긴 뒤, 기존 물감을 벗겨내는 작업이었다. 적합하지 않은 물감 위에 새로 작업을 해 봤자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5개월 이상에 걸친 정밀한 다행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90%가량 진행된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자괴감이 밀려왔다.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완성에 가까운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가볍고 지루한 분위기였고, 십자가 위 주님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작업을 중단한 채, 서울로 돌아와 ‘잠수 아닌 잠수’를 탔다. 도무지 이 작업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실 한쪽에 놓인 예수님 조각상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조각상에 손을 얹은 채,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기도하듯 손끝으로 조각상을 어루만지던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손끝에서 전해졌다. ‘손끝… 손끝….’ 이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무릎을 ‘탁’ 치고 바로 전주로 내려가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붓이 아닌 두 가지 색의 물감을 손가락에 묻혀 직접 문지르면서 바르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보름이 지나니 14처 각 처마다 색채의 깊이와 역동성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작업 중인 14처를 지켜보던 주위의 수녀님들도 변화된 작품에 감탄을 연발하셨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지닌 능력의 한계를 주님께서 채워주셨다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글 _ 고승용 (루카) 성미술 작가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3면

[밀알 하나] 남겨진 이들의 몫

8주간 진행되는 교구 사별가족 돌봄모임 ‘치유의 샘’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꾸려져 있습니다. 미술테라피, 피규어테라피, 동작테라피 등 사별의 아픔으로 닫힌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특별히 모임의 막바지에는 다 함께 1박2일 여행을 떠납니다. 포천의 ‘힐데루시자연치유’라는 곳을 방문하여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을 나누고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하늘아래 치유의숲’을 찾아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명의 기운을 깊이 호흡하고 느낍니다. 정성 가득한 요리를 먹고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다시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모임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웃고 떠드는 시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윷놀이 시간입니다. 봉사자들을 포함하여 네다섯이 한 팀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체면을 차리며 얌전하게 윷을 던지던 참가자들이 몇 번씩 잡고 잡히다 보면, 깔깔 웃기도 하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신문지로 정체를 숨긴 소박한 물건들을 먼저 고를 수 있다는 선물 우선권뿐이지만, ‘함께’하는 팀의 승리를 위해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윷을 던집니다. 얼마나 간절한지 말판을 담당하는 제가 실수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웃음 섞인 항의가 쏟아집니다. 윷놀이 앞에서는 신부인 저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그렇게 달콤살벌한(?) 시간이 끝나고 우승팀부터 꼴찌팀까지 선물을 하나하나 고릅니다. 그리고 웃음과 기쁨 가득했던 순간을 기념하며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모두 밝은 얼굴들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옆에 있던 수녀님이 한마디를 꺼냈습니다. “여러분, 사별한 후에 늘 ‘내가 웃어도 될까’, ‘내가 기뻐해도 될까?’, ‘내가 맛있는 것을 먹어도 될까?’ 고민하지만 윷놀이하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었죠? 그런데 여러분이 이렇게 웃고 떠들며 기뻐할 때 누가 가장 기쁘게 여길까요? 바로 여러분이 사랑했던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 누구보다 여러분의 행복을 바라는 이들이기 때문이에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은 우리의 고통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우리 삶을 망치는 것은 그를 만족시키지도 않습니다.”(255항) 이처럼 먼저 떠나간 이들이 남겨진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삶을 살아갈 때 먼저 떠나간 이들이 하느님 곁에서 함께 즐거워합니다. 따라서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떠나간 이들과 나눌 기쁨을 조금씩 준비해 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지상에서 더욱 잘 살수록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행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사랑의 기쁨」 258항)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3면

[신앙에세이] 여행 중에 만난 내 인생의 소명

우리나라에서 성미술을 하는 작가에게 ‘성상 보수’란, 비주류 분야이고 일반 작가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 작업이다. 더욱이 명예를 꿈꾸는 작가로서는 시간 낭비와도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운명을 바꿀만한 계기는 아주 사소하게 우연히 다가오는데 이 또한 주님의 이끄심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 1998년, 신혼 초 아내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시골 길가 작은 공소 앞에서 나이 지긋하신 형제님이 성모상에 페인트 칠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형제님이 들고 있는 페인트를 보고 경악했다. 그의 손에는 자택을 수리하고 남은 외벽용 수성 페인트가 들려 있었다. 형제님은 정성을 다해 봉헌하는 마음으로 칠을 하셨지만, 성상을 제작하는 나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보기 흉해질 뿐만 아니라, 복원조차 어려워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특히 건축용 페인트에 덮여 사라진 성모님의 눈매와 은은한 미소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 당시만 해도 성상을 어떤 재료로 어떻게 보수하는지 지식이 없던 시기여서 내가 아는 지식과 기술을 봉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 열흘가량 시간을 비우고 춘천교구 김현준 신부님(율리오·2022년 선종)께 연락드려 성상 복원 봉사를 하고자 하니 교구 내 공소 중 네 곳을 선정해 달라고 하였다. 신부님도 반가워하시며 공소를 선정해 주셨다. 열흘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전문적인 보수에 관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어졌다. 이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 후 2년 정도 준비를 하여 아내와 함께 유럽 여러 나라의 성상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틈틈이 고미술 복원과 재료학에 대해 공부를 하였다. 또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은총의 중재자이신 어머니 마리아, 신자들의 도움이신 어머니 마리아, 바다의 별 성모님, 순교자의 모후 등 여러 가지 성모님 모습과 표현에 대한 공부를 하며 본격적으로 복원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80~1990년대 신도시 붐과 함께 성당 건축이 급격히 늘어나자 성상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그로 인해 졸속으로 제작된 성상이 많아졌고, 유지 관리 역시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이러한 현실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생각하니, ‘그분께서 나를 이 길로 이끄신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깊이 들었다. 그것은 내게 커다란 소명으로 다가왔다. 글 _ 고승용 루카(성미술 작가)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3면

[신앙에세이] 성모님의 이끄심을 깨달은 체험

2024년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님이 기획하신 미술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로마에서 몇 달간 생활하며 작업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주어졌다. 세계 최고의 대리석이 채석되는 이탈리아 북서부 카라라와 로마를 오가며 작업하던 어느 날, 모처럼 휴일에 근교 소도시 당일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 고민을 하던 중 수백 개의 지명 중 간달프라는 작은 마을의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완행열차를 타고 도착한 간달프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마을을 거닐던 중 작은 성당이 눈에 띄었다. 궁금한 마음에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간 본 적이 없었던 희귀한 성모자상을 보고 한 눈에 매료됐다. 넋을 잃고 한참을 감상하다 신부님께 양해를 구하고 촬영을 할 수 있었고, 그 성모상이 ‘신자들의 도움이신 어머니 마리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는 몰랐었다, 바티칸에서 작업을 1차로 마무리한 후 한국에서 추가 작업을 위해 귀국을 한 지 며칠 후, 인천 가르멜 수도원 원장 신부님으로부터 문의가 왔다. 창고에 오래된 이탈리아에서 온 성모자상이 있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복원할 수 있는지 한번 봐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찾아가 창고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바로 간달프 마을의 성당에서 본 그 성모님이었다. 그 순간 ‘아! 로마에서 성모님이 나를 이끄신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성상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같은 성상 사진이나 회화적 상본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나는 이 성상의 유일한 상본이 되는 마리아상을 직접 보고 사진도 찍어 뒀으니 복원이 훨씬 수월했다. 시골 성당으로 성모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고미술 복원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 그리고 우연히 들른 시골 마을에서 성당에 들어간 일 등 내게 벌어진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기꺼이 복원을 맡았다. 그러나 너무도 귀중한 성상이기에 창고 같은 작업실로 옮기기 싫었다. 할 수 없이 집 거실의 소파를 내다 버리고 임시 작업실로 꾸민 뒤 성상들을 옮겼다. 너무 많이 훼손된 채 창고에서 오랜 시간 변형된 탓인지 원래 색채를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어 하나하나 차분하게 복원하여 거의 일 년 만에 완성하고 수도원에 모신 날, 신앙인으로서 나의 삶도 의연하고 충만한 시절에 접어들었음을 느꼈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글 _ 고승용 (루카) 성미술 작가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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