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평신도 주일

오늘 제1독서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587/6년 이스라엘은 가나안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완전히 주권을 잃고, 많은 백성이 정복국인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에제키엘이 활동한 장소도 이스라엘이 아닌 바빌론 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레미야와 더불어 ‘성전과 예루살렘 파괴’라는 충격적 사건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백성의 죄를 들며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혹독한 심판을 예고하였지만 멸망이 실현된 뒤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예고하여 동족을 위로하고 회복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 죄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절정에 자리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에제 47,1-12) 이는 에제키엘이 환시 가운데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생명력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환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면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큰 강을 이룰 것입니다. 그 강은 지나는 곳마다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며 죽음의 바다인 사해(死海)까지 닿아 그곳 역시 살아나게 합니다. 제1독서 8절에 언급된 ‘바다’가 사해임은 ‘아라바’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라바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동편 계곡의 이름이며 사해는 성경에서 ‘아라바 바다’(신명 3,17; 여호 3,16 등)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합니다. 사해의 부활 예고는 당시 백성에게 매우 적절한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잃고 유배 생활하던 그들은 죽음의 바다에 빠진 듯이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해는 죽음 같은 유배살이를 상징한 곳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백성을 용서하시고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시면 성전에서 생명수가 솟아나 사해를, 곧 죽은 듯 보인 이스라엘을 부활시켜 주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성전수 신탁에는 에덴동산 모티프가 많이 쓰입니다. 첫 번째 모티프는 산입니다. 에덴이 ‘하느님의 거룩한 산’이라 일컬어지듯(에제 28,13-14; 창세 2,8 참조) 에제키엘서 40장 2절과 43장 12절에 따르면 새 성전도 높은 산 위에 봉헌됩니다. 두 번째는 과일나무입니다. 에덴동산에 과일나무가 많이 자랐듯이(창세 2,9 참조) 제1독서의 12절에도 성전 생명수로 말미암은 과일나무, 시들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 나무들이 언급됩니다. 세 번째는 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강 하나가 네 줄기로 갈라져 흘렀듯이(창세 2,10 참조) 제1독서에서는 성전에서 솟아난 물이 강이 되어 흘러갑니다. 히에로니무스와 안티오키아의 테오도루스는 생명을 주는 이런 성전수에서 죄를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도록 돕는 세례수를 떠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수가 큰 강이 되어 흘러간다는 이 예언은 흥미롭게도 예루살렘의 실제 지형을 충실하게 반영한 신탁입니다. 사해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곳으로서 바다 밑 400m에 자리합니다. 그에 비해 예루살렘은 해발 750m의 고지대라 사해와 고도차가 1km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수가 아라바로 내려가 강을 이룬다는 제1독서의 묘사처럼, 지금도 예루살렘에 비가 내리면 고도가 낮은 아라바 계곡으로 모여 휘몰아치는 강처럼 사해로 흘러들게 됩니다. 다만 에제키엘이 전달한 새 성전 신탁은 바빌론 유배 뒤에도 문자 그대로 실현된 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에제키엘서에서는 재건될 성전을 묘사하기만 할 뿐 그걸 지어야 한다는 명령도 빠져 있는데요. 의미심장하게도 이후 예수님께서 당신 몸이 성전이 되리라고 예고하십니다.(요한 2,19-22 참조) 교부들은 에제키엘이 예언한 새 성전이 마지막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 곧 이상적 교회를 표현한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에제키엘은 실제 성전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관념상의 성전으로 예고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셨고요. 이처럼 제1독서의 성전수도 성전이 되실 예수님에게 적용되기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 합니다.(요한 7,37-38 참조) 에제키엘서의 새 성전 환시는 요한 묵시록 21장에서 22장의 천상 예루살렘 묘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성전수 신탁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 이미지에 반영되기에 이릅니다.(묵시 22,1-2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8면

[말씀묵상]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오늘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노력과 공덕만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기도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인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인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의미와 지향을 새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을 알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탓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희로애락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남아를 선호하고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지만, 주된 요지는 자신이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 또한 그런 미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욥은 자신의 희망을 바꿉니다. 구원자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살갗이 벗겨져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겠다는 희망과 믿음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학교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후회도 모두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어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고 나이 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고 노년과 죽음은 결실과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허무와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만 희망을 걸고 집착하지 않지만, 세상의 가치는 오히려 믿는 이에게 훨씬 큽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만날 희망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부와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는 세상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이 희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운 저주가 아니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 희망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 8-9)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30주일

‘묵주 기도 성월’이요, ‘전교의 달’인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며칠을 지내면 11월 ‘위령 성월’을 맞이합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라고 말씀하면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살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고백 말씀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묵주 기도 성월’을 되돌아봅니다.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그리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또한 ‘위령 성월’ 동안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그때를 준비하는 시간을 보낼 결심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신을 굳세게 해 주셨기’(2티모 4,17 참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의 삶의 태도, 삶의 모습에 대해 복음은 일깨워줍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질이나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으며, 세금을 포탈하거나 착복하지도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다면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 칭찬받을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사람은 이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삶을 살아왔던 바리사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그 세금을 포탈하고 착복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바리사이일까요, 아니면 세리일까요? 우리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태도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는 혼잣말로 기도를 합니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겸손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꼿꼿이 서서’(루카 18,11 참조) 기도를 합니다. 더욱이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났습니다’(루카 18,11-12 참조)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심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랑을 늘어놓고 싶어 합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루카 18,13 참조)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낸 채 자기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아룁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진솔히 자기 성찰을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잘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이고,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자신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잘난 척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경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라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데 너는 왜 못하니?’라는 판단과 단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바리사이와 세리 중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길에 있어서는 바리사이처럼 해야겠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세리처럼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었다면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로 보내주신 누군가가 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협력자를 떠올릴 수 있을 때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높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신부(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9주일, 전교 주일

오늘 이스카리옷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한 산에서 만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예루살렘이 아니라 굳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이유를 교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던 바로 그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든 민족의 사도로 삼으시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주님을 뵙고도 부활을 의심합니다. 이것은 객관적 검증의 영역을 벗어난 초자연적 사건인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와 보는 것이 반드시 믿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사실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조심해야 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물이 담긴 유리컵에 꽂아 둔 젓가락이 휘어 보이듯이 우리의 눈은 종종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도들의 이러한 모습이 실망스러운 이들은, 부활을 의심한 제자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일흔두 제자 중 일부였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날 때까지 줄곧 그들의 약한 믿음에 대하여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의심이 꼭 부정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의심하던 제자들이 목숨까지 바쳐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될 때, 그들의 증언은 더 강한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마태오복음의 정점인 이 말씀은 명령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사실을 밝히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다니엘의 예언(다니 7,14 참조)이 사람의 아들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알리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 대한 격려입니다. 이전에 마태오복음 10장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의 땅에는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안에서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온 세상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지니게 되심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 문화, 관습을 가진 모든 인종과 민족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인 선교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선교에 나서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 28장 19절에서 20절까지의 문장 구조상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주시는 사명은 하나입니다. 곧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로 삼는 것에는 두 가지가 포함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근본적으로 죄의 용서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번역된 표현은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에서’입니다. 이 표현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제자로 삼는 첫 번째 일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여 죄를 용서받고 원죄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거닐었듯이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온전한 친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제자로 삼는 두 번째 일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의 이중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적인 가르침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때 가능합니다. 마태오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예수님의 약속 또한 첫 구절처럼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진 것임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인 ‘너희’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마치 모든 길이 언젠가는 하나로 만나듯이 지금은 갈라진 모든 민족이 결국 주님의 집을 향하여 몰려올 것을 예언합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인터넷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 카를로 아쿠티스 성인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발에만 의존해야 했던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군인주일

물 귀한 이스라엘에서 요르단강은 젖줄입니다. 열왕기 하권 5장에 따르면 요르단강은 아람 장군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몸을 씻은 뒤 병에서 해방된 곳입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의 은총이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한정되지 않음을 암시해 주는 예입니다.(루카 4,27 참조) 곧 주님의 은총이 그분의 가르침과 더불어 세상 만민에게 전파되리라는 예고에 해당합니다. 다만 우리는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점에만 집중하고, 그가 어떻게 그런 은총을 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열왕기 하권 5장에서 엿보이는 그의 인품은 그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에 충분한 사람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아람 임금의 직급 높은 장군으로 소개됩니다. 하지만 한센병 환자였는데, 그런 그에게 은총의 서막을 열어준 이는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한 소녀입니다. 그 소녀가 나아만을 도와줄 수 있는 예언자가 사마리아에 있다고 알려줍니다.(2열왕 5,3 참조) 놀랍지요. 자신을 잡아 온 타국인을 위해 충언을 해준다는 점이 말입니다. 아마도 나아만 부부는 포로 소녀의 마음을 얻을 만큼 선량하고 덕이 있었던 듯합니다.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로 가자, 이스라엘 임금은 음모라 여겨 혼비백산합니다.(2열왕 5,7 참조) 엘리사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나아만의 방문 목적을 알려준 뒤에야 안심합니다. 그 뒤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으로 가는데, 높은 장군의 행차이니 그 모습이 얼마나 위풍당당했을까요? 마을 사람들은 다 구경 나왔을 테고 엘리사도 당장 나가서 맞아야 할 판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직접 가서 나아만의 상처를 들여다보거나 기도를 해주기는커녕 심부름꾼에게 전언하게 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말입니다. 이에 나아만은 실망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봅니다. 그런데 강이 어이없이 작은 걸 보고 그만 역정을 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하들이 나서 그를 아버님이라 칭하며, 손해 볼 것 없으니 엘리사의 말대로 해보시라고 설득합니다.(2열왕 5,13 참조) 여기서도 생각해 봅시다. 만약 부하들이 나아만을 미워했다면 이런 말을 해주었을까요? 나아만이 소녀의 마음을 얻었듯이 부하들의 마음도 얻었기에 그들이 충성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말하자면 나아만은 치유의 은총을 우연히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베풀어온 덕을 돌려받게 된 은총입니다. 나아만은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고 병에서 해방된 뒤에야 엘리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부터는 하느님께만 제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며(2열왕 5,17 참조), 흙도 두 가마니 청합니다. 이는 언뜻 이상해 보이는 청이지만 그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이스라엘 땅에서만’ 섬길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시편 137,4 등) 이방 땅은 우상숭배로 부정해진 곳인 데다(아모 7,17; 호세 9,3-5 참조), 당시 사람들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주신(主神)이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압은 크모스 신(민수 21,29 참조), 암몬은 밀콤 신(예레 49,1 참조), 바빌론은 므로닥 신(예레 50,2 참조)이 다스린다고 믿은 식입니다. 이에 나아만도 하느님을 아람 땅에서 섬기려면 이스라엘의 흙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나아만은 열왕기 하권 5장 1절에서 한센병 환자로 소개되지만, 격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아람 임금이 아끼던 장군이라 궁전 출입도 가능했을 터입니다. 여기서 나아만의 병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센병과 다른 종류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말 성경에 *‘나병’으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짜라앗’인데, 건선과 백반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을 통칭하던 말입니다. 옷·건물에 피는 곰팡이를 가리킬 때도 쓰였습니다. 신체의 일부가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는 한센병은 구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발굴된 구약 시대의 인골 어디에서도 이런 병의 흔적은 발견된 예가 없습니다. 한센병은 기원전 200년경 등장한 걸로 추정되며, 오늘 복음에 언급되듯이 신약 시대에는 존재했던 걸로 보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나아만은 우리가 아는 병이 아닌 모종의 악성 피부병을 앓았던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한센병에서 해방된 사람이 열 명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치유받은 뒤, 단 한 사람만 돌아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외국인이라 일컬어진 사마리아인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치 구약 시대에 주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우상숭배에 빠졌는데, 외국인인 아람 장군 나아만은 악성 피부병에서 해방된 뒤 엘리사를 찾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렸듯이 말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27주일

하바꾹 예언자는 3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예언서에서 당시 예언자들과 백성들이 크게 고민하던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께 기도하여도 왜 응답을 주지 않으십니까? 왜 세상에는 불의와 폭력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왜 멸망합니까? 제가 젊었을 때는 세상이 당연히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생각도, 사회와 인류의 의지도 경험을 통해 더 지혜롭고 풍요롭고 너그러워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젊을 때는 이상과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던 이들이 어른이 되면 개인적 욕심에 빠지는 경우를 보고, 이 사회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 차원의 갈등이 커지고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모습도 보면서, 세월이 지나간다고 발전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망이고 충격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로 답하십니다. 첫째로, 환시 즉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지체하지 않는다. 둘째로, 악인의 뻔뻔함은 잘못된 것이며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악인은 멸망할 것이니 그의 뻔뻔함은 부끄러움과 후회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에게 필요한 것은, 실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며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라고 하는 이 말을 여러 번 인용하는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로마 1,17; 갈라 3,11; 히브 10,38)라고 인용합니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당시 믿는 이들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에 힘입어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고 실제로 모두 순교했지만, 주님의 구원은 언제나 올지 모르겠고 박해는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격려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조급함과 불신을 버리고 믿음으로, 성실함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그런 믿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하는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권하는데 왜 세상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 배격할까? 실망하고 지쳐서 외로워지고, 부끄러워서 도망치거나 포기하고 싶어질 때,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작은 씨앗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 곁에 남아 있기만 하면, 우리는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일을 합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오겠습니까? 우리가 성실히 일하면, 하느님의 뜻은 예정된 때 지체하지 않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실망시키고 괴롭히는 것은, 우리의 조급함이요 불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놀라운 순간들은 잠시간에 지나가고 여전히 부족한 현실에 머물러있는 나 자신과 우리를 보면서 실망하고 의심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여 성실히 함께 걷기 힘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낸다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지고,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선명하게 본다고 하였습니다.(1코린 13 참조) 아주 작은 사랑과 아주 작은 믿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 수 있고,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사랑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예수님은 말해주십니다. 우리에게 그 믿음과 사랑을 늘 주시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주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걱정 없이 사는 자들, 마음 놓고 사는 자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아모 6,1 참조)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사는 삶은 대부분의 사람이 꿈꾸는 행복한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아모 6,6 참조) 곧 하느님과의 계약,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일에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사람들과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에 관해 관심과 시선을 집중하는 데에서 하느님과의 계약과 하느님의 뜻에 더 깊은 관심과 시선을 두어야 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일러주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한 편의 단편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물론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느냐? 그리고 죽음 이후 어떠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너무나 다릅니다. 부자와 라자로는 너무나 다른 삶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온갖 호화로움을 누렸던 부자는 죽음 이후에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라자로는 가난하고 종기투성이의 몸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단순히 몸과 마음에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개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라자로는 개와 같은 처지의 비참함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으며 성가시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다음 아브라함 곁에서 위안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저의 갈증을 식혀주게 해 주십시오”(루카 16,24 참조)라고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뒤바뀐 상황이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 위안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싶으실까요? 부자가 부자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 선물 받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쌓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의 관심과 시선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부자의 집 대문 앞에는 매일 종기투성이의 라자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라자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라자로는 늘 거기에 있었지만 부자의 관심과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고, 라자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자로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잊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부자는 부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루카 16,19)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나눔의 신비, 사랑의 신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은 부유하지 못하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그때 가서 나누며 살겠다는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상황이 부유하다고 여길 수도, 또는 가난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자신의 상황에서 나눌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역량 안에서 나눔이 가능합니다. 물질적으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기도와 위안의 말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과 시선으로 하늘나라에서 맛볼 행복을 미리 맛보는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며’(1티모 6,14)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삶을 삽시다! 글 _ 조성풍 신부 (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5주일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한 집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어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였는데, 그것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돌아 해고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에 호구지책을 궁리해 봤지만, 그는 땅을 파기도, 구걸을 하기도 싫었습니다. 사실 고대에 땅을 파는 것은 가장 고된 노예의 일이었고, 집회서는 ‘구걸하느니 죽는 편이 낫다’라고 합니다.(집회 40,28 참조)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부자에게 빚진 사람들의 채무를 일정 부분 탕감해 주어 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자의 집에서 쫓겨나면 그들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집에 집사로 재취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 문학에서 ‘집에 맞아들인다’라는 말은 친구로서 머물며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집사는 자기가 빚 장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채무자들이 자기들의 입으로 직접 부채 금액을 말하게 합니다. 이것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말이 서로 다른 경우 다툼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이 얼마인지 절대로 묻지 않던 관례를 깬 것입니다. 각각 50%에서 20%까지 부채가 줄어든 채무자들이 자기 빚이 얼마나 많이 탕감되었는지 실감하여 집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의 결과는 예상 밖으로 나타나 집사는 부자의 신뢰를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주인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한 것은 그가 어리석어 집사가 자기 몰래 벌인 일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쳐도, 예수님까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며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하시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수단과 관계없이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말씀처럼 들려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집사가 정말 불의한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이 집사는 불의한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그에게 문제가 된 부분은 횡령이나 절도가 아니라 낭비라는 점을 분명히 합시다. 그래서 그는 형벌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해고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조차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소문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정보나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헛소문이 얼마나 무성합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 소문의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무턱대고 집사를 해고하려는 부자의 처사가 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집사는 집안의 종이 아니라, 부기나 회계에 대해 대부분 사람이 무지하던 시절의 전문 재산관리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살던 어떤 사람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재산을 관리하던 관리인에 관한 기록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재산관리인들은 고용인으로부터 정해진 월급을 따로 받던 것이 아니라, 그가 창출하는 수익의 일부를 보수로 챙겼습니다. 그러니 집사가 부자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감해주는 것이 부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래에서 자신이 받을 몫을 포기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부자가 집사를 칭찬한 이유가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도, 채무자가 갚아야 할 빚은 줄어 채무의 상환이 빨라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사실 재물 자체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불의하지는 않습니다. 즉, 재물은 도덕적으로 중립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죠. 이것으로 미루어 오늘 복음에서 불의하다는 말은 도덕적 차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불의하다는 말은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불의한 집사 또한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자녀, 곧 신앙이 없는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 현명하게 대처하듯이, 우리 신앙인들은 구원을 위해 더욱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위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지 않고 재물을 포기할 줄 압니다. 하물며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재물을 땅의 곳간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18면

[말씀묵상]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스라엘 영토의 절반은 광야입니다. 우리나라 땅이 얼마나 좋은 금수강산인지 실감 나게 해주는 곳이지요. 이스라엘의 중간에 자리한 예루살렘 아래쪽부터 유다 광야가 펼쳐지고, 그 밑으로 네겝 광야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네겝 광야는 이스라엘의 최남단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곳에는 ‘팀나’라는 유적지가 자리해 있습니다. 팀나는 기원전 1200~900년경 구리 광산으로 유명하였습니다. 팀나에는 옛 광산의 흔적만이 아니라 과거 이집트인들이 지은 하토르 신전도 남아 있는데, 그곳에서 12cm가량의 구리 뱀이 발견되어 민수기 21장 4절에서 9절의 사건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을 중심으로 머물다가 민수기 10장 11절과 12절에서 광야 행진을 시작합니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증언판을 모신 성막에서 구름이 올라갔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나이 광야를 떠나 차츰차츰 자리를 옮겨 갔다.” 이때부터 민수기는 21장까지 가나안의 입구인 모압 벌판까지 가는 백성의 여정을 다룹니다. 탈출기 12장 1절에서 2절에 따르면,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때는 그 전 해 첫째 달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시나이 광야에서 일 년 남짓 체류하고 민수기 10장 12절부터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난 셈입니다. 그런데 도중 광야 체류가 40년으로 늘어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14장에 따르면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들을 정탐대로 꾸려 약속의 땅을 미리 탐사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탐대는 탐사에서 돌아온 뒤, 가나안 원주민들이 너무 크고 강해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며 백성의 의기를 꺾어 놓습니다. 백성은 그들의 보고에 부화뇌동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나안 땅 약속을 믿지 못하는 백성이 좀 더 단련될 필요가 있다고 여기시어, 광야에서 더 머물게 만드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더 체류하며 당신에 대해 더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건이 터집니다. 양식과 물이 없다고 백성이 또다시 불만을 터뜨리자, 주님께서 그들을 불 뱀으로 벌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갓 탈출했을 때만 해도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관대히 대하시고 불평해도 해결책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 주님의 보살핌 속에 단련 받고 그분의 능력을 볼 수 있었는데도 여전히 불신과 반역을 일삼으므로 엄하게 다스리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일부러 불 뱀 몇 마리를 보내어 백성을 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디 광야는 불 뱀과 전갈이 사는 곳입니다.(신명 8,15;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그렇다면 이는 감사를 모르는 백성이 불 뱀에게 공격당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제야 백성이 회개하며 모세에게 중재를 청하자 하느님께서 치유법을 알려주시는데, 백성을 문 뱀의 형상을 만들어 기둥에 달면 그걸 바라보는 자마다 낫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징벌 도구였던 뱀이 이번에는 치유 도구가 되어줌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동종요법(同種療法)이 이집트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옛 이집트인들은 뱀의 형상을 부적으로 달고 독뱀이나 악령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뱀의 형상으로 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파라오 왕관에 달린 코브라 휘장(우래우스)이 예입니다. 적이 나타나면 왕관의 코브라가 파라오를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백성은 이집트 탈출 1세대와 그 후손들이므로 뱀의 형상이 힘을 발휘한다고 믿은 이집트의 전통을 알고 있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불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면 뱀의 추가 공격을 막고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법합니다. 이때 모세가 ‘구리’로 뱀의 형상을 만든 건, 그가 백성과 더불어 가나안으로 향하던 경로에 구리 산지 ‘팀나’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팀나는 당시 백성이 떠나온 ‘호르산’과 그들이 향하는 ‘갈대 바다’(민수 21,4 참조) 사이의 지점이라 접근이 쉬웠을 터입니다. 구리 뱀 사건은 이후 요한복음 3장 14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십자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둥 위의 불 뱀에 견줍니다. 곧 요한복음의 저자는 기둥에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게 되었던 민수기의 사건을 예형으로 삼아,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선고받은 인류도 십자가에 현양(顯揚)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속죄하면 구원되리라는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에게 돌아서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가족에 대한 정에 얽매이지 말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두 번째 조건에서 설명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를 각자의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역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각자가 똑같이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듣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그 길을 따르려면 당연히 가족을 떠나야 할 것이고 목숨에 대한 미련마저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가족과 목숨까지 포기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따르고자 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이를 더 강조하십니다. 탑을 세우려고 하면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를 따져야 하고, 전쟁을 하려고 해도 먼저 승산을 따져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먼저 그분을 끝까지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란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재산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정, 목숨도 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라고 보면 그 모두에 대한 미련을 끊고 내려놓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분이 바라시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지혜 9,14-15) 세상 것들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한계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하느님의 지혜와 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구원입니다.(지혜 9,17-18 참조) 예수님은 그 구원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똑같은 두려움과 고뇌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반대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반대가 그분께 걸림돌, 즉 당신의 결심을 뒤흔드는 유혹이 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피땀을 흘리는 고뇌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분의 내적 고통은 아마도 숨을 거두시기 전 마지막으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고 말씀하신 순간까지 이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복음은 인간적인 정과 우리가 가진 재물과 우리의 목숨을 언제나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런 요청을 늘 받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과 선택의 순간, 우리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욕망,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편지를 받은 필레몬도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스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간곡한 요청 앞에서 그런 갈등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감정, 재산의 손해 등을 그는 분명히 이겨내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 모든 것보다 훨씬 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갈등의 순간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

가끔 기억 속 노래를 꺼내어 불러보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쁜 꽃들이 모여 사는 꽃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꽃들도 있지만, 한 편에는 자갈도, 잡초도, 흙덩이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곧 적당한 거리에서는 아름답게 보이는 꽃밭에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이런저런 흉하게 보이는 것들이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꽃밭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갈이나 잡초 또는 흙덩이와 같은 상처와 고통 등이 있을 수도 있지만, 누가 보아도 아름다울 꽃밭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다운 꽃밭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꽃밭 인생살이를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일상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초대받아 음식을 잡수시는 상황에서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오히려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8-10 참조)라고 하십니다. 사회에서 어떤 행사를 하게 되면,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중요도가 결정되고, 거기에 따른 의전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누가 어디에 앉고, 어떤 순서로 연설하고, 동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고민합니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적합한 예우를 갖추는 일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가 스스로 그러한 예우를 요청한다거나 윗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다툰다면 그것은 그리 아름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자리와 의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 역시 행사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또는 어떤 기념을 위해 사진을 촬영할 때마다 중앙에 자리하기를 요청받곤 합니다. 어떤 행사의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모든 행사 때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한쪽 편에 자연스럽게 무리의 한 사람으로 자리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는 주님의 말씀이 제 마음 안에 작동해서 그런가 봅니다. 어느 자리에 위치하느냐가 그 사람에 대한 존중과 중요성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중요하다 여겨지고 존중받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자리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리나 의전과 같은 외적인 면보다 영적인 면을 더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데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초대한 이’에 대해서도 말씀을 주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제가 주로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권유 말씀을 충실히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라는 말씀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그분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어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살기에는 아직은 제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그분들을 한 식탁에 초대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분들 상황에 관해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고 걸어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해 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행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똑같이 행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답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서 직접 받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올 수도 있고,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보답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늘나라에서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한 이’ 또는 ‘초대받은 이’로서 각자의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어 가도록 합시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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