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부자간에 견주며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로, 구약성경에도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던 것입니다.(탈출 4,22; 이사 1,2; 예레 31,9.20 등)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백성의 불충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호세아서 1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또한 쥐엄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비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고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된 뒤 배고픔에 시달리다, 돼지 밥이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돼지 밥으로 나오는 ‘열매 꼬투리’가 바로 쥐엄 열매입니다. 이는 쥐엄 열매의 생김새가 콩꼬투리 같아서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듯합니다. 쥐엄 열매는 껍질을 먹는데요,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맛이 떫어 즐겨 찾는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좋다고 찾는 이들이 늘었지만 말입니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럽(carob)입니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도 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하루브’가 메뚜기를 뜻하는 ‘하가브’와 비슷해서 그런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마르코복음 1장 6절의 메뚜기를 쥐엄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늦여름부터 갈색으로 완숙하는 쥐엄 열매는 많은 양을 거둘 수 있으므로, 빈민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쥐엄나무가 가난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다 캐럽(carob)이 캐럿(carat)으로 발전하며 부의 상징으로 뒤집히게 됩니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의 씨가 무게를 재는 단위로 쓰였는데, 이것이 이후 보석의 단위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마태오복음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꼴찌가 첫째 된 셈입니다. 다만 쥐엄나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일흔 해가 지나야 첫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23ㄱ에 나오는데요, 이는 ‘호니’라고 하는 한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안에서 호니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기원전 6세기)의 ‘운명이 바뀌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어떻게 그 일이 잠들어 ‘꿈꾸는’ 동안 가능한지 연구하였답니다. 성경을 너무 자구적으로 해석한 사람 같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쥐엄나무를 심는 걸 보고, “그게 열매 맺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심느냐?”고 호니가 물었답니다. 그 남자가 70년이라고 답하자 호니는 “당신은 70년을 더 살 자신이 있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나는 내 조상이 심은 쥐엄 열매를 먹었소. 이건 내 후손을 위한 거요.” 그 뒤 호니가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열매를 모으고 있더랍니다. 호니가 그를 보고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의 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니가 잠든 동안 일흔 해가 흐른 셈이죠. 놀란 호니가 집으로 가니, 아무도 그를 호니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호니는 슬퍼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 뒤 쓰러져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에서 구원받기까지 과정은 길어 보이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꿈을 꾼 듯 쏜살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삶과 추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죠. 70년 자란 뒤 열매를 맺는다는 쥐엄나무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 실린 여호수아기의 말씀도 기다림과 인내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수치’를 떨치고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옛것을 넘어 새것이 되도록”(2코린 5,17)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기까지(2코린 5,21) 구약 시대 내내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오늘 제1독서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양 떼를 치며 살아가던 모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명은 아닙니다. 이미 동족에게서 배척받은 과거가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답은 수많은 신학자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있는 나’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어떤 보충설명이나 수식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수식어는 단순할수록 좋을 것이고 성서의 다른 부분이나 특히 탈출기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당신의 성향이나 행동 양식 등과 맥락이 맞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탈출기 3장의 하느님 말씀에서 찾아보자면,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장의 곳곳에서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탈출 3,7-10 참조)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니 그런 의미에서 늘 함께 계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8) “(나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3,17) 이 탈출기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인간의 고통을 직접 겪으시고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사 7,1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는 이름을 그분은 받으셨습니다. 구약에서 ‘있는 나’로 희미하게 계시된 그분이, 신약에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파스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함께 있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이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 말합니다.(1코린 10,5-6 참조) 예수님께서도 빌라도가 살해한 사람들과 사고로 죽은 이들을 언급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배척하여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그가 열매를 맺었는지 찾아와 살펴보고 포도 재배인을 시켜 돌보시는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입니다.(루카 13,6-9 참조)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와 성사를 통하여, 특히 당신의 파스카로 세우신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과 우리는 함께 하면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함께 있는 분’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도 서로 함께 있도록,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하도록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참조) 사랑은 함께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기입니다. 서로를 탓하고 미워하고 외면하기 쉬운 때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 하느님의 길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분은 당신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제때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2주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과 더불어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한 사순 시기가 벌써 열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온전한 믿음을 두는 아브람(아브라함)을 의로운 이로 인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없는 하늘의 별들만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참조),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창세 15,7)라고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십니다.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창세 15,8)라고 여쭈어보는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삼 년 된 암송아지와 암염소와 숫양 각 한 마리를 반으로 잘라 마주 보게 하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각 한 마리는 자르지 않고 바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지나가게 하시는 신비로운 표징으로 아브람의 제물을 받아들이십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하느님께 ‘후손과 땅’의 축복을 약속받았듯이 우리도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수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 기도 중에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변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에 대해 말씀을 나누십니다. 이 신비로운 광경에 할말을 잃은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필리 3,17) 그러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한편, 믿는 우리에게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으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라고 권유하십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을 맞으며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동방의 세 박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하였듯이 각자 자신의 선물을 준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주님께 드릴 선물’을 충실히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삶이 부활을 맞이하는 충실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자신의 주머니를 비우는 자선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따라 애착하거나 집착하는 것을 비우는 자선이어야겠습니다. 또한 기도하며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삶 안에서의 근심, 걱정, 분심을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음식만을 절제하는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인간적 본능을 비우는 단식이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삶을 스스로 확인하며, 노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사순 시기 동안의 부활 선물 준비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커피 단식을 십여 년째 실천하고 있는데, 커피 단식의 절약분으로 이웃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2~3잔의 커피를 마시는 저로서는 처음 시작한 해에는 커피 단식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한결 어려움을 덜 느끼는 것이 좋은 지향과 실천에 대한 주님의 손길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또한 몇 년 전부터는 음주 단식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커피 단식 외에도 무엇인가를 더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저에게 평소 술을 즐기는 지인이 놀랍게도 사순 시기만 되면 술을 끊는 모습이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건강도 챙기고 이웃 나눔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사순 시기를 맞아 무엇을 안 한다는 것도 좋지만, 부활 선물을 준비하며 무엇을 한다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최소한 하루에 세 번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인생 여정, 특히 올 사순 시기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면 좋겠습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40일 동안 머무십니다. 거기서 긴 단식을 하신 후 가장 쇠약해졌을 때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본디 유혹은 약한 틈을 파고드는 법이죠. 먼저 사탄은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시장하셨다(루카 4,2)는 말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매우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니 사탄의 제안은 아사 위기에 있는 예수님께 쉽게 떨칠 수 없는 매우 솔깃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유혹에는 단순히 예수님의 개인적인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일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6,31) 그리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세가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과 같은 기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요한 6,30) 이렇게 볼 때, 이 유혹은 예수님이 메시아심을 증명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메시아의 정체를 드러내라는 유혹입니다. 곧, 사탄의 유혹은 이렇습니다: “백성에게 빵을 주어라. 그러면 그들이 의심 없이 너를 메시아로 섬길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런데 신명기 8장 3절의 뒷부분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의 말씀 뒤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 뜻대로 살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따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세상 권세에 대한 것인데, 이 또한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하도록 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행하길 바라시는 것, 즉 고난을 통한 메시아 사명의 수행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도록 유혹할 뿐 아니라, 우상 숭배를 조건으로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원죄 이후 타락한 인류는 창조 때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통치권을 상실했고, 세상 권세는 상당 부분 사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악한 권력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악한 자들이 얼마나 잘 삽니까? 심지어 사탄에게 영혼을 팔아야만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사탄은 실상 제 것이 아닌 것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파하기 쉽지 않은 이 거짓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세상의 유일하고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만을 경배해야 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이 메시아심을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라는 것인데, 랍비 문헌에 메시아는 예루살렘 성전 위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다 전승에 따르면 자처하는 거짓 메시아는 신성 모독죄를 물어 성전 벽에서 키드론 골짜기로 던져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성전 벽에서 뛰어내리시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발을 떠받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온 유다 백성은 성전 높은 곳에 나타났으며(메시아라는 증거), 그곳에서 떨어져도 무사한(가짜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 예수님을 즉시 메시아로 떠받들 것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그분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시험하라고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마싸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 하느님을 시험한 일(탈출17,1-7 참조)을 배경으로 하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은 결코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경우를 볼 때, 모든 유혹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첫 인간에게 주어진 유혹 또한 그러했습니다. 세 번의 유혹에 실패한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하지만 영원히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유혹자가 다음에 등장할 때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그분의 제자 가운데 하나를 유혹함으로써 말입니다.(요한 13,27) 사탄은 절대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8주일

명심보감 천리편(天理篇)에는 종두득두(種豆得豆), 곧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맥락의 말이 나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는 말씀과 상통하는 속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이어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도 가르치십니다. 이를 ‘종두득두’ 속담에 적용해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도 조금 다르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콩이 좀 더 긍정적으로, 팥은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물론 콩과 팥은 둘 다 콩과 식물로서 콩은 대두(大豆), 팥은 소두(小豆)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콩과 팥은 실제로 이런 어감을 담은 식물이라 흥미로운데요. 그 배경은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콩은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 일컬어질 만큼 단백질이 풍부합니다. 지방도 풍부해서 콩으로 기름도 짜고, 장도 담급니다. 그에 비해 팥은 탄수화물 식품으로, 단백질은 콩의 절반 정도만 들어 있습니다. 팥으로 장을 담그는 경우는 있지만, 밀가루를 섞어야만 끈기가 생기고 발효도 잘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팥 껍질은 콩보다 단단합니다. 콩은 여섯 시간 정도만 물에 불리면 물러지지만, 팥은 스물네 시간 불려야 약간 부풀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콩이 좋은 이미지로 등장하는 「콩쥐팥쥐」 이야기가 생긴 듯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차이는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무가 주로 매개로 등장하는데요. 이는 예부터 나무가 왕조·왕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상도 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대표적 예입니다. 시편 80장 9절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써서 이집트 탈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장 1절에서 2절에는 이런 신탁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나무로 심으셨는데, 백성이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성경의 말씀은 종두득두 속담과 비슷하지만, 깊이나 초점에서 조금 다른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콩 심은 데서 콩만 나오는 차원을 넘어 열매의 우수성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가르침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한 요한 세례자의 꾸짖음(마태 3,8-9)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 포도나무는 옛 이스라엘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과실수입니다. 하지만 열매가 딱딱하고 시큼하게 변해버리면 그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집니다.(예레 2,21; 에제 15장 등) 이런 ‘들포도’ 신탁은 백성이 죄를 지어 징벌을 앞둔 시기에 자주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이 있지요? 이 속담처럼 우리는 습관처럼 죄를 지으며 그 때문에 곤경에 처하지만, 성경에서는 구원의 역사도 반복함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징벌 예고에 들포도의 비유가 쓰이듯이, 백성이 죄를 용서받는 시대에는 예언자들이 같은 모티프를 써서 회복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서 31장 4절에서 5절에서는 사마리아에 포도가 다시 자라리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고합니다.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에는 제2 이사야(이사야서 40장 이후를 전달한 무명 예언자)가 집을 짓고 포도원을 가꾸게 되리라는 신탁을 전달하여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고합니다.(이사 65,21) 곧 옹기장이가 합당한 그릇이 만들어질 때까지 진흙을 뭉치고 빚는 작업을 계속하듯이(예레 18,1-12), 하느님도 이스라엘과 세상 만민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이사 64,7: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참조) 옹기장이가 진흙 작업을 계속해 마침내 좋은 그릇으로 빚어내듯, 하느님께서는 옛 이스라엘에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예레 6,27; 말라 3,1-3), 지금은 불같은 당신의 말씀을 제련사처럼 주시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예레 9,6ㄴ; 즈카 13,9)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당신 말씀까지 본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처럼, 우리 공동체의 흥망도 우리의 행동과 말에 내재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팔자 우리가 꼬지 않도록’ 세상이 아무리 수상하게 돌아가도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어지럽히며 여기저기서 만들어내는 속임수 논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5주일

예수께서는 겐네사렛, 즉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부인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루카는 안드레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첫 제자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 제자가 필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제자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옮기는 예수님의 발이요, 만민에게 하늘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의 입이며, 모든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팔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카파르나움과 타브가 사이에 있는 만에서 베드로와 동료들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이곳의 지형은 마치 자연적으로 형성된 원형극장과 같아서 아래서 말하면 위에 있는 많은 군중에게 의사 전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밤새 소득 없이 돌아온 베드로에게 다시 그물을 치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의 벳사이다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지만, 예수님은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 번도 그물을 던져보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기 잡는 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이미 태양이 눈부시게 비추는 시간에 그물을 치라뇨. 당시의 그물은 세마포를 꼬아 만들어서 해가 뜨면 물속에서도 훤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십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허탈감과 피로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껏 깨끗이 씻어놓은 그물을 다시 들고 호수로 나갑니다. 루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왠지 그분을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밤새 허탕 친 것이 억울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던져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더니 그물이 터지도록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베드로 사도가 행할 일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 베드로는 한 번에 3000명, 5000명의 사람을 신앙으로 이끄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사도 2,41; 4,4)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를 느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두려움은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분 앞에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 앞에서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물고기는 낚이면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낚이면 삽니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ζωγρέω는 생포한다는 뜻인데, 70인 역 성경에서는 사람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신성하고 고귀한 일에 동참하도록 영광스럽게 초대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함으로써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루카는 예수님을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로 묘사하는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5,1) 그리고 루카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에서 제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일을 이어감을 전합니다.(사도 6,2) 하느님의 말씀은 율법, 예언자의 선포 등을 가리킬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느님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 또한 우리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구원의 도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에 필요한 용기가 부족할 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야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살릴 것이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봉헌 축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사십 일째 되는 날은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루카복음 2장 22절에서 40절까지에 따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사십일 째 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산모의 정결례를 치르고 율법대로 아들을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습니다. 레위기 12장 1절에서 8절에 따르면, 산모는 남아를 낳으면 사십 일, 여아를 낳으면 팔십 일간 부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가난한 이의 경우에는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정결례 제물로 바친 듯합니다. 그리고 탈출기 13장 2절에 따르면 장자는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주님께 바친 다음 돌려받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성전에서 예루살렘 사람 시메온을 만나게 되는데요, 시메온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성령께서 그에게 알려주신 인물입니다. 그 예고대로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두 팔에 안으며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찬양, 이후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로 알려지게 되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때 성전에는 연로한 예언자 한나도 있었습니다. 한나도 아기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한나’는 사무엘기 상권 1장에서 2장에 나오는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에프라임 땅에 살던 엘카나의 첫째 아내로 소개되는데요(1사무 1,2 참조), 한나가 오랫동안 불임이어서 후처로 프닌나가 들어온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나는 후처에게 조롱당하며(1사무 1,6 참조) 괴로움을 겪다 주님께 서원합니다.(1사무 1,11 참조) 다만 서원의 내용이 역설적인데, 아이를 얻는다면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곧 아이를 얻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 셈이니, 당시 한나의 신세가 얼마나 암담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소에서 기도한 뒤 한나의 마음이 누그러진 듯합니다. 한나의 사정을 모르는 사제 엘리가 그를 축복해주자, 한나가 음식도 먹고 얼굴도 전처럼 어둡지 않았다고 합니다.(1사무 1,17-18 참조) 그리고 바람대로 아이를 낳은 뒤, 한나가 서원대로 아이를 봉헌하며 부른 찬양이 사무엘기 상권 2장 1절에서 10절에 이어집니다. 사실, 찬양의 내용은 한나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1사무 2,5)라는 구절이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해 줍니다. 한나의 찬양이 특별한 건, 그가 노래를 부른 시점이 소원이 이뤄진 임신 때나 출산 때가 아니라, 서원대로 아이를 바칠 때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이와 떨어지면 슬프고 괴로울 텐데, 한나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이는 일종의 ‘환희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희의 신비는 성모님 이전에 한나에게서 먼저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의 나날을 보내던 시기 사무엘을 낳아 이를 잘 넘기게 해준 한나의 이야기는 이후 문헌에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루카 1장과 2장이 대표적입니다. 이 대목도 불임 부부 즈카르야 사제와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얻는 사연으로 시작합니다.(루카 1,7 참조) 한나의 노래는 기쁨에 찬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의 노래, 곧 <마니피캇>에 반영됩니다. 사무엘이 머리를 깎지 못하는 나지르인으로 바쳐진 일(1사무 1,11, 민수 6,3-5 참조)은 루카 1장 15절의 세례자 요한에게 이어집니다.(“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다만 한나의 이미지가 루카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나뉘어 반영되듯이, 사무엘도 세례자 요한과 어린 예수님에게 조금씩 영향을 줍니다. 나지르인으로 바쳐진 아들은 요한이지만, 성전에 봉헌되는 아들은 어린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차지하는 위상을 사무엘도 다윗에 대해 비슷하게 지닙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듯 사무엘은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한나의 영향은 예수님 봉헌 대목(루카 2,36-38 참조)에서 여 예언자 ‘한나’에게도 이어집니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소극으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을 촛불혁명으로 몰아낸 우리가 또다시 비슷한 국면에 부닥쳐 웃지 못할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봉헌 축일은 비극만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역시 반복함을 알려주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희년의 기쁨을 체험하고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없이 부족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신비를 되새기며 연중시기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혼인 잔치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 희년의 삶을 살아갈지를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져 잔치를 주관하는 이들이 당혹해할 것을 헤아리셨을 뿐 아니라, 아들 예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임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께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대답하심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동이들이 물독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일꾼들에게 말씀하시고, 다시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개의 물독에 가득 찬 물을 좋은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일꾼들은 이 놀라운 기적이 누구 덕분에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신랑도 그리고 과방장도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 덕분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지는 상황을 알아차리고 아들 예수님께 상황 해소를 청한 성모님 덕분에, 더 나아가 실제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느님이신 예수님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 덕분에 사는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그리고 그분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이웃들의 도움의 손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깨워 주는 교회 공동체 덕분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성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덕분에’라는 마음을 간직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곧 하느님과 이웃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 덕분에, 곧 사랑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우리의 마음과 실천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회 공동체 덕분에 감사하다, 하느님 덕분에 감사하다’는 칭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과 이웃 덕분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와 하느님을 칭송할 수 있도록 하는 삶이야말로 희년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때에는 세상살이에서 오는 갈등과 상처와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견디어 내고, 극복해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길고 어두운 터널이라고 해도 그 끝에는 환한 빛을 가져다주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하느님 덕분에,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감사합니다!’라는 마음과 표현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증거의 삶을 살아가라고 각자의 직분과 활동에 맞게 적합한 은사를 주십니다. 곧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각자가 선물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연대하여 공동선을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이사야 예언자가 예루살렘을 두고 노래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이루신 첫 번째 표징 덕분에 제자들을 포함한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키울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하느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이웃의 손길 덕분에 더욱 감사하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 31,25)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조성풍 신부는 199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수학했다. 서울대교구 해방촌본당 주임, 서울대교구 사목국 일반교육부 담당,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등을 거쳤다.

발행일 2025-01-19 제3426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세례는 유다교의 ‘미크바’라고 하는 물로써 부정함을 씻어내는 예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제사의 가치가 상대화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씻는 예식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특히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고 광야로 들어간 꿈란 공동체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여러 세례 운동가가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씻는 예식이 반복적이었다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었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해 근처의 요르단강 하류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회개하게 하는 세례입니다.(루카 3,3) 그런데 회개해야 할 죄가 없는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왜 세례를 받으실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주기 위함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였기에 세례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모든 죄인과의 연대를 봅니다. 예수께서 요르단강 변에 길게 줄지어 서서 자기 차례의 세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죄인들 사이에 계신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 없으신 분이 가련한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우리 모든 죄인 가운데 하나가 되십니다. 요르단에는 ‘내려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을 스스로 더 낮춰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를 낮춰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의 자리에서 받으신 세례 구원의 문 활짝 열어주신 의미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뱃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물속에 던져지기를 청했던 요나가 떠오릅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에 비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온 백성’.(루카 3,21)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구원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립니다. 옛 아담의 원죄 이후 닫혔던 하늘과 땅이 새 아담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통하기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 즉 예수께서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이)이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6) 그리고 하늘에서 성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짧은 문장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먼저 메시아를 가리키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우리와의 관계와는 다름도 알려줍니다. 사실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맏아들이라 불렸습니다.(탈출 4,23 참조)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는 못합니다. 그리스어로 ‘사랑하는’이라는 단어가 아들이나 딸과 함께 사용될 때는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유일무이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현재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아들, 성부의 뜻을 잘 헤아려 받드는 순종적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구조 안에 있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자께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위해 성령을 받은 메시아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말합니다. 또한, 유다 전승에 따르면, 하늘의 열림, 성령의 강림, 하느님의 목소리는 종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세 가지 표지입니다. 종말은 믿는 이에게는 두려운 멸망이 아니라 바라마지않는 궁극적인 구원의 때이죠. 예수님의 세례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 (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안동교구 함원식 신부는 1999년 사제품을 받고 2017년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논문 「욥기 안에서의 조화 혹은 불협화음」으로 성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영덕·안계본당을 거쳐 현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겸 안동교구 성서 사도직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발행일 2025-01-12 제3425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이번 주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은 예수님의 신성이 처음 공식적으로 나타난 일을 뜻합니다. 곧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첫 사건을 경축하는 날로서, 구약 시대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드러난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따르면,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맨 먼저 방문해 경배한 이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성경에서 ‘동방’은 이스라엘 기준이므로 메소포타미아 방향이고, 동방 박사는 페르시아 전통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로 추정됩니다. 조언자로서 임금을 섬겼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로아스터’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책으로도 유명한 ‘차라투스트라’입니다. 말하자면,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로서 우리 문화권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의미의 배화교(拜火敎)로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속보다 천상의 일 중요시 메시아 만나는 큰 기쁨 누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던 점성술가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박사’는 학식이 뛰어난 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마고스’를 번역한 말로, 페르시아어로는 ‘마구쉬’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천체 운동을 관찰해 인간의 운명을 점치고, 꿈도 풀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동방 박사는 동방의 세 왕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3세기 초에 들며 이들의 신분을 왕으로 격상했기 때문입니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라는 시편 72장 10-11절처럼 모든 권세가들이 메시아께 복종하리라는 예고가 실현되었음을 강조하려던 목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점성술가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방의 임금도 도구로 쓰시고(예레 25,9 등 참조) 이방의 점술도 때로 진실을 말하게 하십니다.(에제 21,26-28 참조)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고(마태 2,1 참조) 헤로데의 왕실에서 현인들의 조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마태 2,6 참조) 그 현인들이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 나오리라.”라는 미카 5장 1절을 들려주며, 유다 임금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어야 한다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조언 덕에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내는데, 그 장소는 현재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 안에 자리해 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짓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유서 깊은 성당입니다. 더구나 전쟁 많은 이스라엘에서 이 성당만은 보존되었는데, 이는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의 성화 덕분이었습니다. 7세기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 탄생 성당의 성화 속에 그려진 동방 박사들이 페르시아 복장을 한 걸 보고, 자기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줄 알고 파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멀리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이 죽어서도 메시아의 탄생지를 보호해준 셈입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를 셋으로 보지만, 사실 성경에는 몇 명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친 선물이 셋이라 세 명으로 추정해온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예수님의 거룩한 사제직을 예고하는 제사 ‘유향’,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몰약’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듯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였습니다. 사진 속의 제대가 그 장소를 상징합니다. 페르시아 왕실을 섬긴 이들이 초라한 구유 속의 아기에게 무릎을 꿇었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처세술에 따르면, 자신에게 와 줄 것을 청한 헤로데에게(마태 2,8 참조) 돌아가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편이 더 이익이었겠지만, 동방 박사들은 세속보다 천상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마태 2,12 참조)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베들레헴까지 왔고, 이스라엘 백성보다 먼저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런 이들의 행보는 세속의 일에 몰두하느라 천상의 일을 잊곤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먼 데서 구세주를 알아보고 찾아온 일은 이후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이방인들의 예표도 되어줍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며 메시아를 찾아 나선 동방 박사들을 별이 인도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밤은 어두워도 별은 빛난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가 때로 칠흑 같은 곤경에 빠져 길을 잃어도 주님께서 늘 희망의 별빛을 뿌려주고 계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김명숙 교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2012년부터 2024년 1월까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그해 2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조교수에 임명됐다.

발행일 2025-01-05 제342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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