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안일해지는 어느 날이면, 일찍 일어나 장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어스름을 깨고 전을 펴는 가운데, 끓어오르는 솥은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터의 일상을 마음에 담다 보면 발걸음은 어물전에 이르고, 짠내가 덮쳐와 안일한 정신의 따귀를 칩니다. 제가 맡았던 어물전의 짠내는 생명이 넘치는 바다 냄새인가요, 죽음을 맞아 살이 썩어가는 고린내인가요. 물속을 춤추던 물고기들은 이제 나란히 누워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대답합니다. 생선이 죽어야 산 사람이 밥을 먹지 않느냐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어느 서생이 말했습니다. 삶이란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것이라고.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요한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밥을 먹고 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장터에 다녀옵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성서를 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요한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른 세 복음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네 복음서는 저마다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지만, 복음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5000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의 쟁점은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12절) 두 구절은 막 바로 이어집니다. 복음사가는 그 과정에 대해 조금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이야기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행간을 줄여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숙박시설이나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여정을 떠날 때 간단한 식량을 챙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서, 긴 여정을 대비해서 먹을 것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겠지요.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므로, 얼마만큼 식량을 챙겼는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아이 하나가 자기 먹을 것을 꺼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요. 지금도 보리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보리빵은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옵살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어부들이 내다 버린 작은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가난한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던 거지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가난한 아이 하나가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부끄러운 마음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람들이 내놓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시간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은, 빵이 많아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따뜻한 해석을 세차게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표적인 기적을 인간적인 문제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하느님 아들의 절대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두 구절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할 뿐, 행간의 진실은 여전히 멀고 아득합니다. “빵이 어떻게 많아지는가?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남은 빵 열두 광주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던진 이런 질문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빵의 늘어남이나, 그 숫자가 아닐 겁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책입니다. 복음사가가 애써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자 함이었겠지요. 다시 복음서를 마주합니다. 나누어 먹은 빵과 남은 빵을 살피다가, 잊어먹은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예수님은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네셨을까요. 한 끼 굶는다고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님이 건네주시고자 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 지옥을 헤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셨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밥을 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밥을 벌기 위해 땀을 흘리고, 그 땀 내음은 바다 냄새와 고린내 사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성당을 찾은 분들에게,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풀이 많은 호숫가에 자리 잡게 하시고, 보잘것없은 음식이지만 저마다 원하는 대로 먹게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만히 앉아 쉬시라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 풍요로움을 누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글 _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7-28

[말씀묵상] 연중 16주일

오늘 복음은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이야기는 우리에게 고유한 묵상 주제를 제공합니다. 복음의 앞부분은 지난 주일 들었던 복음(마르 6,7~13)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여러 고장을 돌며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며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의 병을 고쳐주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늘 함께했던 선생님 없이 제자끼리 둘씩 다니면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제자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서 회개를 외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마귀들의 저항이 강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병자들을 최선을 다해 고쳐준 제자들이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왔고, 그들은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과 너무도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현실 때문에 아픔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파견한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파견되어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 백성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한 모든 활동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천명합니다. 물질과 돈이 주인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눔과 섬김의 복음적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회개를 권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세상을 치유하는 사도직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겪었듯이 세상의 냉소와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삶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공동체는 파견되고 사명을 다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서로의 체험에 대해 나눔을 하고 하느님 안에서 쉬고 서로를 격려하는 터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전례에 참여하여 세상 속에서 각자 살아간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위로를 얻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고 다시 파견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또 다른 묵상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보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애쓴 이들을 좀 쉬게 놔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움을 절박하게 원하는 많은 사람이 제자들이 쉬어야 할 곳에 먼저 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명을 갖고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쉬어야 하는데 자신들 생각만 하고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매정함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 사람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있나 하는 의문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제자들의 상황, 능력과는 별개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가 도움을 바라며 그토록 매달리듯 찾아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비롯하여 선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세상의 아픔과 고통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어떨 때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입니다. 불가능, 좌절, 절망, 포기,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밀려오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요동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들을 보면서 일어난 ‘가엾은 마음’입니다. 복음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가엾은 마음’은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예수님 안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 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Compassion입니다. 흔히 ‘연민’이라고 번역되지만, ‘함께’(Com)와 ‘고통’(Passio)이 결합한 단어로, ’함께 고통을 겪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좀 불쌍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을 창자가 끊어지듯이 함께 아파하시며 마주합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죄와 고통 중에 있는 인간들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 절망 가운데 도움을 바라는 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아파했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도 당신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의무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삶은 그분의 삶을 보고 배울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엾은 마음’이 어디서 오는 마음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7-21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7-14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07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30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마르 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상들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참조)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비유를 만나는데, 그중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관한 비유(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입니다. ‘비유’는 그리스어 ‘파라볼레’의 번역으로,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파라볼레’는 하느님의 통치 혹은 행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등장하는 ‘파라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어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의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파라볼레’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원적 기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먼저 첫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이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특별히 첫 번째 비유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가 되어 곡식에 낫을 내는 농부를 언급하며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주님의 날’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직경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 과정 자체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거대한 나무를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당장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고 확신하셨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자연 속 작은 것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비유(마르 4,32)는 구약성경의 전통,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적 예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제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종류에 속하는데, 목질이 견고하고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다윗의 후손, 곧 바빌론 1차 유배 당시 끌려간 여호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향백나무에 관한 짧은 비유를 통해 다윗 왕조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장 23절의 말씀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본래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과실수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로 소개합니다. 하느님 없이 세상 만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약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거대하고 강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변화에서 우리는 경이로운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속에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인간의 통찰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신적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자에게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비유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허구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힘찬 어조로 고백한 그 믿음을 우리도 각자의 삶 안에서 고백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6-16

[말씀묵상] 연중 제10주일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들과 예수님 가족들의 오해와 억측이 빚어낸 사건을 들려줍니다. 긴장감이 역력한 이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군중 때문에 요기할 시간마저 없었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라는 표현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집에 머물고 계실 때 두 집단의 사람들이 이 집으로 접근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한 부류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예수 조사단 율법교사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두 부류는 서로 다른 용건을 가지고 왔지만, 목적은 예수님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며 비방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는 엄청난 모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모략과 예수님의 치유 활동에 대한 적대적 모욕이 오히려 그분 치유 기적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긴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 친척들의 행동으로 확대됩니다. 친척들의 반응은 그분이 “미쳤다”(3,21)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직역하면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뜻으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곧 귀신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급기야 친척들은 “그분을 붙잡으러”(3,21) 나섰습니다. ‘붙든다’는 표현이 마르코복음에서 ‘체포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로 여러 번 등장함을 볼 때 가족과의 날 선 긴장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오해하고 율법교사들은 그분이 ‘귀신들렸다’고 음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척들에게 그 어떤 대응도 없이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시지만, 율법교사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시며 다른 듯 같은 반응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의 모함에 세 가지 반증으로 답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3,23),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3,24),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하십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마저 바알의 도움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들에게, 노골적이며 의도적인 거부는 용서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 또한 퍽 흥미롭습니다. ‘집’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집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두고 ‘안’과 ‘밖’을 나누는 분리가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집 안팎의 공간적 구분은 ‘내부인’과 ‘외부인’에 대한 날카로운 구분으로, 사건 전개의 유용한 계단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척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으로 대변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주위에 앉은 사람들”(3,34)은 ‘내부인’으로 대표됩니다. 이러한 절묘한 대구는 저자가 어디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외부인은 그야말로 집 밖에 있는 이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거리두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러합니다. 혈육적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내부인’이지만,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이 되어버립니다. 율법교사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종교적 역할 수행의 중심인으로서 ‘내부인’이라 자부할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음해하며 공격하는 이들로서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외부인’이라 지칭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고 주장하며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장벽뿐만이 아니라 율법교사들과 친척들은 외적으로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서 있는’ 율법교사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3,23)하셨고, 예수님의 친척들은 “밖에 서서”(3,31) 예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설전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내부인’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십니다. 이른바 새로운 하느님 가족(Nova Familia Dei)으로서의 ‘새로운 범주’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혈연도, 율법 중심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부인’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마르코에게 있어서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복음이 던지는 질문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당신은 외부인인가요? 내부인인가요? 아니면 내부인 같은 외부인입니까?” ‘내부인’이지만 ‘외부인’이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에 깨어있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6-09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목요일 아침, 학생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미사를 기다립니다. 경당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아이들이 몰려오곤 하는데요. 미사에 참례한 학생들에게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명의 빵’ 보다는 ‘간식’을 찾아서 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곧잘 두 손을 모으고 성가를 함께 부르며 기도 소리에 목소리를 보태곤 합니다만, 미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단지 간식을 먹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다보니 가끔은 애를 먹기도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고 계속해서 잡담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신 분들은 여쭈어보시곤 합니다. “신부님, 아이들이 이 미사의 의미를 알까요?” 아이들이 미사에 몰입하는 것 같지도 않고, 신부님 이야기도 잘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간식비도 많이 드는데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럴 때면, 오늘 마주하는 복음 이야기를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날 마지막 만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고,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파스카(페사흐)와 무교절 축제인데요. 이 무렵이면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묵을 방을 찾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예수님 일행은 ‘큰 이층 방’을 마련합니다.(학자들은 이 방의 주인이 마르코 복음사가라 보았습니다만, 근래에는 사도 요한이 속한 사제가문의 별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르던 사람 중에는 그 정도 되는 실력자가 있었음을 생각할 만한 대목이지요.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신다는 파스카 축제, 환영받으면서 들어온 예루살렘, 부러울 것 없이 큼직한 방에 모인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장담에서 유다의 배신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 모두를 세세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분명하게 짐작해 볼 만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마음과 같은 이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함께 나누어 먹은 그 빵은 예수님의 부서진 마음 조각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누어 마신 그 잔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만찬을 행하고, 만찬 때의 일을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그분을 기념하고 기억해 왔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찬례에 참례하고 있나요.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성체분배자는 성체를 전해드리면서 “그리스도의 몸”하고 초대하며, 성체를 배령받는 교우는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아멘”이라는 대답은 할 수 없고, 여러분 각자가 나름대로 대답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아멘” 외에 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으시는가요. 다시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성체를 받으면서 “아멘”하고 응답하실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는 그 말그릇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그 한마디는 선언이자 질문입니다. 이 동그란 밀떡의 모양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받아먹은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멘”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을 아우릅니다. “아멘”은 믿음입니다. 이 작은 빵조각이 주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멘”은 동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기억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음식이 되셨다는 것, 우리가 주님을 음식으로 먹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성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습니다. “아멘”은 다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실천하기로 합니다. 적어도 그의 삶과 방식을 흉내내보기로 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그렇습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같지는 않겠지요. 때로는 질문과 의심, 때로는 무심하고 냉담한 마음, 때로는 한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도 “아멘” 말마디에 담아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말로는 다할 수 없어, 우리 마음을 “아멘” 한마디에 담아내는 것이겠지요. 미사를 마치고 핫도그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에 누군가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핫도그에 담은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무심히 핫도그를 먹다가, 불현듯 우리의 눈길과 사랑을 기억하기를 바란다고요. 그때라도 아이들과 우리의 마음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요. 지금은 어긋난 그 마음도 언젠가 결국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제자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사랑을 기억하며 행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신 조각난 빵에는,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부서진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도 그 빵을 모시며, 그 사랑을 조금 더 닮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02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5-19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대중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 사도직 수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홍보 주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이 홍보 주일로 제정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특별사명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복음 홍보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사로부터 ‘말씀묵상’ 원고청탁을 받고 망설일 무렵, 친구 수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 모친 고 분다(베네딕타) 어르신은 시골 작은 동네에 사시는 여건상 주일미사를 대체로 공소예절로 하셔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매주 가톨릭신문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홍보 매체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순간인 것은 물론, 가톨릭신문이 수행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교회’ 역할이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께서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사건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영원한 축복의 복음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주님의 승천은 부활 사건의 완결입니다. 그런데 주님 승천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복음서가 매주 적은 지면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 이야기는 단 한 구절에 불과하고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승천 이야기를 아예 생략했으며, 루카복음 역시 후속책인 사도행전에 유보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주님 승천 이야기를 요약하면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주님의 지상 사명의 완성으로 사도들 앞에서 일어난 공개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승천은 주님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를 복음선포 홍보대사로 위촉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은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선포(16,15)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부활 메시지 전체는 다른 이를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에게 선포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과 주님 부활 소식은 선교라는 사명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와 사도신경이 선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마르코만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시편(2편과 110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구절을 마르코가 전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표징으로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이적들이 그 보증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위임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귀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극복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이 표징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6,20)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크고 대담한 배포를 선물한 듯 보입니다. 기적의 첫째 목적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의 탁월한 본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선교지가 ‘온 세상’임을 확인합니다. 지역과 대상의 제한 없이 온 세상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번째 선포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사명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존재가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 삶의 지표를 재정립하는 은총을 빕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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