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2주일

‘파견 설교’라고도 불리는 오늘 복음의 골자는, 너희가 제자가 된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마태 10,32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인 까닭이지요. 그분이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숨긴다고 숨겨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리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마태오 복음이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입니다. 이는 함께하는 단어 앞에 붙어서 ‘~으로부터’ 또는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다는 의미를 강화하는 전치사 ‘아포’(ἀπό)와 ‘덮거나 감추다’라는 뜻을 가진 ‘칼립토’(καλύπτω)가 합쳐진 말이지요. 직역하면 ‘덮어진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니, 결국은 감추어진 것이 밖으로 환히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아포칼립토는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하신 말씀에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드러나게(아포칼립토)’ 하는 주체가 성자 예수님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숨어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직접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느님의 ‘자기 계시(revelatio)’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시는 걸까요? 그것은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주심으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계시헌장」(Dei Verbum) 2항 참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계시 진리를 통해 하느님을 뵙고(visio Dei)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하느님 본성에 참여’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라고도 하였습니다.(「신학대전」 I-II, q.3, a.8) 계시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만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빛입니다. 인간은 그 빛으로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계시는 항상 인간에게 ‘눈이 열리는 것’으로 체험됩니다. 이를테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루카 24,16)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루카 24,31)습니다. 예수님을 못 보던 이들이 다시 알아보게 된 건, 갑자기 또 다른 예수님이 새롭게 등장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포칼립토가 말하는 하느님의 드러냄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 앞에 새로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이 열리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눈을 뜬다는 건 때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나약함까지 고스란히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뜰수록 자기 환상은 무너지고, 꼭꼭 숨겨 두었던 상처가 드러납니다. 나의 위선은 그대로 폭로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나의 삶이 산산이 조각나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어쩌면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앞서, 인간 실존의 나약함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겨왔던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죄의 경향성을 ‘드러내’ 주심으로써, 당신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이 드러날수록 그분의 자비 또한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사람들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본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됨을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 사람은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영적 고전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의 저자인 월터 J. 취제크 신부님은 1940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에 잠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3년 만에 미국으로 귀환하기까지의 긴 세월 속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지 5년 만에 다시 드린 어느 날의 미사를 신부님은 잊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건포도로 만든 미사주와 부엌에서 간신히 구한 빵, 위스키 유리잔과 회중시계 뚜껑을 성작과 성반 대신 사용해 봉헌한 그 미사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짓밟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그 미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양식이 그들의 참된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을 지탱한 힘은 더 많은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준 성체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을 형성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길러낸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우리는 살기 위해 매일 양식을 먹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성찬례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양식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굶주림을 채우며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 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살과 피’는 성경에서 한 인간의 생명과 존재 전체를 뜻합니다.(마태 16,17; 1코린 15,50; 히브 2,14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그분의 생명 전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일상적인 빵과 동일시하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일상과 배고픔 속으로 들어오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빵을 매일 먹어야 하듯이, 성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분과 점점 더 일치하게 됩니다. 성체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이 우리를 형성하듯이, 영적 양식인 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사람은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는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장 안에서 성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동시에 공동체적으로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라는 진리 안에서 상호 일치와 친교의 형제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그 빵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게 합시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삼위일체를 단순히 ‘이해해야 할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삶’으로 가르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시나이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이는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먼저 전능함보다 자비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중심이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라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교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한 자연만이 아니라 때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 세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입니다. 저는 얼마 전 교구에서 인공지능(AI)에 관련된 사제연수에 참여하여 AI에 대한 장점과 문제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영성과 가장 극한이 되는 물성의 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AI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빠릅니다.’ ‘물음에 답을 완성합니다.’ AI가 ‘인간의 뇌를 닮게 만들었다’ 해서 인공지능일 텐데, 현대의 바벨탑 곧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고 있는 신격 모사처럼 보였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1만 년 동안 읽을 책의 단어를 48시간 만에 읽어댄다니, AI는 수학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문학적 가치와 특히 신학적 가치로 검증하지 않으면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을 간파했습니다. 연수의 마지막 메시지는 AI와 대화하지 말고, 필요한 때만 도구처럼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I가 불가역적 사건이고, 기왕에 하느님을 닮으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따랐으면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삼위일체의 성부께서는 성자를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닫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성부는 성자를 향하고, 성자는 성부께 응답하며, 성령은 그 사랑의 일치라고 설명합니다. 즉 삼위일체의 중심은 고독한 힘이 아니라 사랑 안의 관계입니다. 동방 교부들은 이것을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즉, 서로 안에 머무시는 사랑입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며, 성령은 그 사랑 안에서 일치하십니다. 삼위일체 안에는 경쟁도 없고, 지배도 없으며, 고립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기 증여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만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의 가장 깊은 뜻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지만 AI는 하느님의 뜻과 충분히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을 다시 봅니다. 삼위일체는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친교의 하느님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주장만 하면 일치는 깨집니다. 그러나 서로 들어주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 줄 때 사랑은 살아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워가는 공동체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때 흩어진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하나가 되고, 우리는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의 ‘고별사’(요한 13~16장)와 한 번의 ‘고별기도’(17장)를 남기셨습니다. 이때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요한 14,16) 보호자 성령을 약속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고별사 안에서 보호자 성령에 대한 약속은 모두 네 번 등장합니다.(요한 14,16-17; 14,26; 15,26; 16,7-15) 복음서에서 ‘보호자’로 번역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여기 옆으로(παρα) 오라고 살갑게 부르는(καλέω) 것을 뜻하는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유다교 회당에서 추방당하거나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지내야 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곁에 머물러 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얼마나 큰 용기와 위안이 되었을까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지요. 그런 다음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별사를 통해 약속하셨던 보호자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성령’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이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로 사용한 그리스어는 ‘엠퓌사오(ἐμφυσαω)’입니다. 엠퓌사오는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곳에만 유일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그 유래나 성경의 다른 용례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에 해당하는 ‘퓌사오(φυσάω)’는 생명을 산출하고 자라게 한다는 뜻의 동사 ‘퓌오(φύω)’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숨을 불어넣는 것이 곧 생명을 움트게 하고 생장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엠퓌사오는 한 생명체가 자라나고 형성되기까지(φυσάω) 그 과정 안(ἐν)으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엠퓌사오 곧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그들을 다시 살게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표현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네우마(πνεῦμα)’입니다. 프네우마는 창조 때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창세 2,7)과 태초에 땅이 아직 꼴을 갖추기 전,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을 적에, 그 물 위를 감돌고 있던 ‘하느님의 영’(창세 1,2)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지요. 프네우마는 바람처럼 스며드는 하느님의 숨결로, 생명을 생명이도록 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생명체의 힘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내쉬는 숨이나 호흡과는 또 다른 차원의 숨결입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이 생명의 숨결로 말미암아 비로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숨만 쉰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듯 내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지요. 제자들은 믿었던 스승 예수가 처참하게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살아갈 이유와 삶의 근거를 잃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스승을 배반한 죄책감과 온갖 두려움으로 순간순간 숨이 막혀 제대로 숨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이 내쉬는 숨이라 해 봤자 온통 좌절의 한숨과 슬픔의 탄식뿐이었습니다. 꺼져가는 그들에게 숨통을 트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숨의 근원이신 생명의 숨뿐이었습니다. 생명의 숨, 그것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 그분의 숨결, 프네우마, 그 거룩한 성령이 우리의 숨구멍을 통해 들어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희망의 숨결로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가 숨 쉬는 한, 우리는 그분 사랑의 숨결인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숨보다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청하십시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 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구경꾼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춤은 이제까지 흔히 보던 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놀라움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어이없어하며 이 남자의 춤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남자가 나와서 이 사람의 춤을 따라 추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며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이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처음에 춤꾼 한 명을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첫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당시 모습은 미친 짓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죄인과 먹고 마셨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안식일 법도 어기곤 했습니다. 만약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따름’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따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곁을 떠나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사라지신 주님의 부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성령을 통해 세상 어디서나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더욱 깊고 충만하게 머무르십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현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존이 우리의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깁니다. 이는 완벽하게 준비된 성인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모이고 모여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너무나 부족한 우리인데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엄청난 사명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사명만 던져주고 떠나시는 방관자 같은 주님이 아니십니다. 실패와 박해,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파견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우리입니다. 이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고, 또 부족한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도 들겠지만, 어떻게든 따르려는 우리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 문득 혼자가 된 듯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부모를 잃을 때만이 아니라, 믿고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기댈 곳이 사라진 듯 느껴질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깊은 상실감과 공허를 경험합니다. 그때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지금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은 누구인가?” 수녀원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떤 수도자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모두 선종하셨을 때, 주변에서는 슬픔을 나누며 더 이상 의지할 혈육이 없다는 현실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하느님께 봉헌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깊은 상실감과 고독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부터 21절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러한 두려움과 상실감의 한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떠나신 뒤 제자들이 겪게 될 불안과 공허 그리고 제자 공동체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깊은 염려를 품으신 스승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방황하게 될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경에서 ‘고아’는 단순히 부모 없는 아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고아는 사회적 약자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고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의 대상입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탈출 22,21)라고 명령하십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라 부르며,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시편 146,9)고 노래합니다. 고아는 흔히 결핍 속에 살아가며, 잃어버린 부모를 되찾고자 하는 갈망을 지닙니다.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속해 있고 싶어 하며, 보호받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이러한 고아의 현실을 잘 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로 홀로 두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며, 성부께 청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은 곧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아버지 없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며,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아버지께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호자”, “진리의 영”(요한 14,16-17 참조)이라고 부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법정에서 ‘변호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동시에 위로하고, 돕고, 곁에서 함께 머무는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장 불안하고 두려울 때, 이러한 보호자를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 공동체, 곧 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일 공동체에 성령은 가장 깊은 보호와 위로가 되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자, 많은 이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병자와 불구자들이 치유됩니다. 그 결과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사도 8,8)라고 전합니다. 이어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1베드 3,15)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이들을 하나로 묶어, 한 하느님 아버지께 속한 형제자매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아처럼 고독 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오늘 불안한 인간 영혼을 향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잘 들어보십시오. 주님은 먼저 세상을 고치려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마음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혼란은 먼저 인간 마음의 혼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살고 있지만 안에서는 자주 무너집니다. 젊은이는 지쳐 있고, 중년은 흔들리며, 노년은 외롭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자기 영혼이 얼마나 목마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보다 먼저 희망을 말합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말합니다. “주님...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길을 모른다는 이것이 사실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우리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끝내 남는 생명인지.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주님은 길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길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경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성으로 길이시고 신성으로 목적지이시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길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길이신 분께 자신을 맡기는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과부들이 소외되고 불평이 생겨서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불평이 있던 자리에 봉사가 생기고, 분열의 자리에서 친교가 태어났습니다. 성령은 무너진 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세우십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1베드 2,5)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이건 존재 선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로 세워지는 집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돌입니다. 우리는 무너진 돌이 아니라 세워질 돌입니다. 버려진 돌이 아니라, 성전이 될 돌입니다. 외로운 이여, 당신은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아무도 고아가 아닙니다. 이처럼 공동체의 분열은 사랑의 질서로 치유되고, 봉사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몸을 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놓일 때 집이 됩니다. 성령은 혼란을 버리지 않고 질서를 세워주십니다. 그리스도는 모퉁잇돌이고, 신자들은 그 위에 놓이는 산 돌입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흩어진 마음은 무너진 돌 같지만, 주님 안에 놓이면 성전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시킨 공작의 입을 통해 속삭입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름다움입니까?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아름다움, 상처 입고도 사랑하는 아름다움, 십자가를 통과한 아름다움 곧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고 이제 조용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폭력 앞에서 온유를 지키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버티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숨은 기도, 어머니의 눈물, 이름 없는 자비입니다. 「필로칼리아(Philokalia)」(기도와 내적 고요 수행, 특히 마음의 기도와 정화의 길을 다룬 교부·영성가들의 글을 모은 선집)는 말합니다. “흩어진 마음을 주님의 이름 안에 모아라.” 이 얼마나 깊은 처방입니까. 마음이 모이면 평화가 생기고, 평화가 생기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과거에 있었고 현재도 진행되며, 미래에 있을 세계의 전쟁도 인간 내면의 전쟁도 같은 뿌리를 가집니다.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고요는 도피가 아니라 평화의 시작입니다. 지친 젊은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길은 있습니다. 불안한 중년이여,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중입니다. 외로운 노년이여, 하느님은 당신 안에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은 힘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구원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기도입니다. 이제 침묵 안에서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침묵) 주님, 흩어진 마음을 모아주시고 우리를 살아있는 돌로 세우소서. 기도가 평화가 되고, 평화가 세상의 구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세상은 논쟁보다 기도로, 힘보다 아름다움으로, 지배보다 자비로 살아남습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부활 제4주일은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Vocatio Dei)이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결심이나 선택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부르시는, 당신 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부르심을 받은 이의 구체적 상황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이지만, 언제나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불러주시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교회 전체로 이끄신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이 전하는 목자의 비유는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부르심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을 잘 드러내 줍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목자는 먼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만, 그런 다음에는 양들이 한 무리를 이뤄 자기를 따르도록 하지요.(요한 10,3-4 참조) 이때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요한 10,4)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형은 ‘에이도(εἴδω)’입니다. 그런데 이는 본래 ‘보다’라는 뜻에서 출발하는 말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사용되지요. 이를테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을 때 “그분의 별을 보고”(마태 2,2) 따라갔는데, 이때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에이도입니다. 그들은 또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자’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는데(마태 2,11 참조), 이때도 에이도가 반복되고요. 그 후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그분은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는데(마태 3,16 참조), 이때도 역시 에이도를 씁니다. 그렇다면, 원래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왜 목자의 비유에서는 ‘안다’라고 번역할까요?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요? 내 눈으로 직접 ‘본다’라는 것은 곧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통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앎’을 형성하지요.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 냄새를 맡아‘보는’ 것, 음식을 먹어‘보는’ 것, 감각을 만져‘보는’ 것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은 보는 것을 통해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고백록」, 10권 35장 참조) 인간 정신의 인식 능력은 보는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는 것은 양들이 이미 목자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또 양들이 목자를 ‘보았다’는 건, 양들이 목자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체험적으로 목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다는 건, 알게 된 대상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따라서 복음에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요한 10,4)라고 한 건,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양들이 목자를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상호신뢰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목자가 양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양들이 한 무리를 지어 목자를 따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믿음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은 결국 관계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아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내가 그분을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보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기 위해서는 오래 보아야 하고 자주 만나야 하며 깊은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분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깊이가 곧 부르심의 척도입니다.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바라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나요?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기도 열심히 하시고요, 미사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성당 나오셨다는 분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병에 걸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병에 걸리신 분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데 병’입니다. 계속 ‘그런데’를 외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이 ‘그런데 병’은 삶 안에서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책 읽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바빠요.” “많이 웃어야 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요.”, “그런데 웃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병’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런데’ 대신 ‘어떻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제자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예순 스타디온’(약 11km)이 넘는 씁쓸한 도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여자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계속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 돌아가셨잖아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필연적인 계획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차갑게 식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로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날이 저물어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루카 24,30 참조) 최후의 만찬과 동일한 이 행위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제 ‘그런데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저물어 어둡고 위험한 밤길임에도 즉시 일어나 돌아간 것입니다. 절망 안에서 엠마오로 도망갔던 제자들이 마음을 바꿔 이제 기쁨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성경 풀이’를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었던 것”(사도 2,24 참조)이라고 완벽하게 논증합니다. 제2독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가졌던 현세적 해방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영적 해방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1베드 1,19 참조) 우리도 주님께 자기 삶의 고통을 없애주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내려달라는 ‘빗나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만을 외치면서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 ‘어떻게’를 말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이 타오르며 영성체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데 병’에 걸려서 엠마오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나의 이웃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루카 24,34 참조)라며 자기 삶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합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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