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 주일

오늘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케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마태 16,18 참조) 베드로는 아람어 케파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촌 벳사이다(어부의 집)에서 요나의 아들(시몬 바르요나)로 태어나 어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불림을 받습니다.(마태 4,19 참조)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는 순수하고 솔직하기도 하지만, 수제자의 자격이 의심될 정도로 허술하기도 합니다.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나약하고 겁도 많습니다. 스승은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계시는데 잠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마태 26,40 참조)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가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마태 14,30 참조) 결국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의 배반은 작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하물며 갈릴래아인 특유 억양의 사투리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임이 탄로 난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마태 26,70 참조) 비록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말입니다.(마태 26,74 참조)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달은 베드로가 대사제의 저택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2) 하지만 베드로는 죄에 절망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주저앉아 뒤만 돌아보고 있는 것이고, 회개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보다 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한편,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사울은 유다 땅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17㎞나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 서둘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울은 눈이 멉니다. 그런데 사울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사울이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사도 9,8 참조) 이는 영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흘 동안 사울은 영적인 혼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사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박해자가 되기로 작정했지만, 이제는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바오로는 더는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 외에는 다른 형벌이 없는 그 치명적인 죄를 말입니다.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니아스로부터 성령의 안수를 받아 사울은 눈을 뜨게 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사도 9,18 참조)은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눈을 뜬 바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유다처럼 자신이 지은 죄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감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로써 사울이 바오로로, 최악의 박해자가 최고의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1코린 15,10)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 모두 죄를 지었지만,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담대히’(사도 4,13; 28,31 참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담대한, 어찌 보면 뻔뻔한 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있게 해준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누구나 회개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스라엘 빵 가게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을 보면, 납작하고 둥그런 것이 광야의 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실 때 사탄이 빵으로 유혹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이 오래 굶고 나면 눈앞의 것이 빵인지 돌인지 헷갈릴 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당신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을 먹이셨다는 빵도 이런 것일 듯합니다. 지금은 먹을거리가 많다 못해 식이 조절을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상들은 굶는 자식을 보며 파종할 씨앗으로 배고픔을 달랠지, 다음 농사를 기약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씨를 뿌린 이들이 수확하여 기뻐하는 모습이 시편 126장 5~6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옛 이스라엘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보리 빵, 부유한 이들은 밀 빵을 먹었다고 하니 ‘꽁보리밥’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 하권 7장 16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밀 가격은 보리의 두 배였습니다. 요한 6장 9절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징을 일으키실 때 한 어린아이가 마중물처럼 내어놓은 빵도 보리 빵입니다. 요한 6장 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표징을 일으키신 때는 파스카 즈음입니다. 곧 보리를 수확하던 때입니다. 사실 파스카 축제는 맏배의 재앙에서 백성이 구원받은 기적을 기념하지만, 농사와 관련된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탈출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주님의 은혜를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주님의 계명도 상대적으로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주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체감하지는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탈선을 방지하려고 오경에서는 백성이 자자손손 이집트 탈출의 구원을 기억할 수 있도록 파스카를 비롯한 명절들을 주님의 현존 앞에서 지키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다만 당시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팽개치고 주님 현존을 찾아가기는 어렵겠지요. 이에 성경에서는 주요 명절들을 농사 절기와 맞물리게 제정하였습니다. 탈출기 23장에도 그런 명절이 무교절, 수확절, 추수절이라는 농경 용어로 등장합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이므로 파스카를 가리키고요, 수확절은 밀을 수확하는 주간절, 추수절은 포도와 올리브 등을 거둬들이는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 무교절, 곧 파스카 즈음에는 보리 수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명절은 농사 절기와 맞물리므로 기후와도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마르코 복음 6장 39절도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때가 파스카 즈음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 자리 잡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나라이므로 풀밭이 푸른 시기는 늦가을부터 늦봄까지의 우기뿐입니다. 파스카를 지내는 봄에 늦은 비(신명 11,14)가 내리고 나면 건기로 접어들며, 그때부터는 온 들판이 누렇게 뜹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기적은 천지가 비를 맞아 생기를 되찾은 봄에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기념하는 성전도 갈릴래아 바닷가에 자리했습니다. 예부터 ‘일곱 샘’이 있던 장소라 하여 그리스어로 ‘헵타페곤’인데, 지금은 발음이 와전되어 ‘타브가’라 합니다. 이곳 성전의 제대 아래 검은 돌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장소라고 합니다. 제대 앞에는 비잔틴 성당의 유적인 사병이어 모자이크도 있습니다. 다만 오병이 아니라 사병인 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한자리를 차지하신다는 상징성을 살린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기적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아이 말고도 군중에게는 비상식량이 조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도, 식당 등의 시설이 흔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나누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내 식량을 타인에게 주었다간 언제 굶게 될지 모르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내어놓은 빵을 예수님께서 나누기 시작하시자 덩달아 제 것을 꺼내다 보니 모두가 먹고도 남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하니 이는 분명 빵이 많아진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나눔 끝에 풍성하게 돌려받은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위격으로 세 분이시나 본질과 실체로는 한 분이시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명제를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했지만, 저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너무 단순한 비유들은 오히려 그냥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여 이제는 그런 시도를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득되는 까닭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알려주셨고 교회가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비롯하여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고백하는 기도인 성호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17장)에서는 ‘보호자’, ‘진리의 영’으로도 불리는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께서 하실 일을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의 맥락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의 바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전제요 목적이며 근거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믿어야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요한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순종하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관계이고 이를 통해 하나가 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아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에 모두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과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사랑하고(요한 14,21 참조), 그들이 계명에 순종하면 아버지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주실 것이며(요한 16,23 참조), 그들은 아들을 증언할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 15,27. 17,22 참조) 이 사랑의 관계로의 초대가 예수님의 본론입니다. 성령의 파견에 대한 약속과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하여는, 이 두 주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들이 그러셨듯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주실”(요한 16,13) 것입니다. 그분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보내어지신 것처럼(요한 17,8 참조),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요한 15,26 참조) 보내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참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령께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믿는 이들,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요한 14,16 참조) 그들이 하느님과 믿음의 일치를 이루도록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사실 부활 이전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세례성사나 주님의 말씀 안에서 간접적으로 체험된 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신 그분은 세상 끝까지 교회와 함께하시는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잘 묘사된 그 체험은 사도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깊고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과 일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은 우리를 늘 곁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의 모델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아드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은 살아계신 사랑이 되셨고, 교회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은 영원히 살고 일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언제나 현재형의 사랑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8면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를 하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에 제자들은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내려앉자, 성령으로 가득 차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믿기 어려운 부활에 대한 소식을 우리가 믿고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걸어주시는 성령께서는 다양한 직분과 활동을 통해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적합한 사람에게 적절한 ‘은사’를 베푸십니다. 곧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을 하는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또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를 주십니다.(1코린 12,4-11 참조) 한편, 성령께서는 개인의 성화를 위해 ‘성령 칠은’(지혜, 통찰, 지식, 식견, 공경, 용기, 경외)을 베푸십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자신의 저서 「성령의 약속」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을 ‘성령 칠은’과 연결 지어 설명합니다. 곧 믿음의 덕을 키우기 위해 ‘의견, 지식, 통찰’의 은혜를, 희망의 덕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경외와 용기’의 은혜를, 사랑의 덕을 쌓기 위해서 ‘지혜와 공경’의 은혜를 청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의견’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 공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멀리하는 세상 안에서 영적 식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식’의 은혜도 구해야 합니다. 이때의 지식은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고, 창조된 만물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하느님과 연관시키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영혼의 힘이 되는 ‘통찰’의 은혜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뿐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 영광의 부활,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꿰뚫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기억하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외’의 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희망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령께 이끌려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용기’의 은혜는 하느님께만 두는 믿음과 희망의 표현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온전히 맡기신 예수님의 의탁을 기억하며, 삶에서의 시련, 고통, 질병, 일탈 등의 극복과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용기의 은혜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성령께 ‘지혜’를 일깨워 주고, 알아차리게 해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지혜에 참여해야 합니다. 매 순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지혜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이 다릅니다. 제한된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이러한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구구팔팔이삼사’를 외치며 바라는 건강, 허비하지 않고 최대한 아름답게 사용해야 하는 시간,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하는 재물, 그리고 인생 여행에 함께하는 동반자(배우자, 가족, 친구, 신앙 공동체 등)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선’을 지향하며, ‘일치’를 이루고, ‘겸손’하고, ‘교도권에 순종’하고, ‘이성’을 적합하게 사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라 5,22-23 참조;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코린 12,3)라고 선포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사랑의 삶,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 여정을 가꾸어야 합니다. 글 _ 조성풍 신부(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승천은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도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성모님의 승천은 교리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과 성모님의 승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고, 성모님은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두 사건 모두 승천이라고 부르지만, 라틴말로는 구별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Ascensio’, 성모님의 승천은 ‘Assumptio’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신 뒤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승천(昇天)이야말로 참으로 귀천(歸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승천 사건을 상식과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죽음을 잠시 멈추는 소생이나, 영원히 죽음을 반복해서 맞이해야 하는 환생이 아니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놀라운 사건인 부활을 이미 믿고 있는 이들에게 승천은 믿지 못할 일이 아니겠죠. 예수께서 언제 어디서 승천하셨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때에 갈릴래아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2.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지 40일째 올리브 동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각각의 저자들이 모종의 이유로 승천의 때와 장소에 대한 기록을 달리하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입니다. 게다가 예수께서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승천하셨는지도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승천 사건의 의미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승천이 공간적인 수직 이동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미완료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의 눈앞에서 훨훨 날아오르신 것처럼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1장 9절은 예수께서 하늘로 날아오르시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셨다고까지 합니다. 이 말씀을 고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우주여행까지 가능해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문자 그대로 믿기 어렵죠. 이미 구름 너머에 하느님의 성전이 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간적인 수직 이동으로 묘사된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에는 특이하게 단수와 복수 외에도 쌍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손이나 눈, 귀처럼 반드시 쌍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것인데, 히브리어로 하늘은 ‘하샤마임’(השמים), 즉 쌍수입니다. 하늘은 쌍으로 존재하는데, 하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창공이요,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이 두 번째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곧 승천은, 오늘 제2독서인 에페소서 1장 20절이 증언하듯,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그 오른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부활 사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가 예수님의 승천을 가시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육신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다는 진리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마치 달에 갈 때 우주복을 입어야 하듯, 지상에 존재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하시고는 사용 후에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신 채로 아버지께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은 줄곧 ‘나자렛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사도 2,22; 3,6; 4,10; 6,14; 22,8; 26,9) 이렇게 이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사람이 천상의 존재가 될 길이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비록 흙에서 왔으나,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오를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오늘 복음(요한 14,23)에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한 신명기 6장 5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받은 율법 가운데 으뜸입니다(마태 22,36-38 참조). 그만큼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지키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규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위기 19장 17절에는 이와 반대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미운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듯 사랑도 함양해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씁니다. 안식일이 되면,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규정(예레 17,22)을 지키려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기원전 6세기에 시나이산 계약을 어긴 죗값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었기에, 그런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면 하느님 사랑이 실천해야 하는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높게 보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인들의 행동이 몸에 밴 습관처럼 비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제정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무래도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인 의미가 원 뜻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고대 근동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이 도움을 줍니다. ▶ 파라오에 대한 사랑: 옛 이집트에 자리했던 ‘아마르나’라는 성읍의 유적부터 보겠습니다. 아마르나는 한때 이집트를 뒤흔든 종교 혁명의 중심지로서, 고대 이집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신을 섬긴 파라오의 수도였습니다. 옛 이집트의 종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다양한 동물 형상을 한 신들을 섬겼지만, 기원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톤은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며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이런 행보가 기존 종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기에 아마르나 시대는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르나는 이후 성경 학계에서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옛 가나안과 이집트를 오간 서신이 이곳에서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르나 편지’라 일컬어지는데, 옛 가나안과 이집트의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따르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루살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서간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파라오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파라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네들에게 사랑은 정치적 의미로서 ‘충성’을 뜻하였습니다. ▶ 아시리아 주군에 대한 사랑: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에사르 하똔이 봉신 국가들에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하는데요, 이 역시 파라오에 대한 사랑과 맥을 같이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 계약의 맥락에서도 쓰인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성경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거나 요구하는 구절이 신명기 6장 5절 외에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에 대해 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이는 ‘누구든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21장 15절에서 19절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을 재확인하신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신 의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이 애틋한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신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라는, 때를 알리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앞의 장면은 성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뒤,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긴장감이 도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어 제자들이 나중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신자를 미리 지목하셨고, 심지어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씀하시어 적어도 유다에게는 당신이 알고 계심을 명확히 알리십니다. 유다는 이미 마음에 사탄을 품었기에 그 말씀에도 회개하지 않고 배반의 길로 나갑니다. 그의 마음속의 어둠을 요한 복음사가는 “때는 밤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요한 13,21-30 참조) 이 밤은 배신의 밤이자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이 시작되는 고통의 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사람의 아들은 두 번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이제 곧’, 즉 머지않은 미래에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유다가 나간, 또는 유다를 보내신 ‘이제’라는 시점에 이미 이루어진, 또는 이미 시작된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를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들어 올려짐’으로 여러 번 표현되는데(요한 3,14. 8,28. 12,32), 이는 죽음의 형벌이기도 하지만 영광스러운 표징이기도 합니다. 구리 뱀을 본 사람이 모두 살아났듯이 그분을 믿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택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이 아드님이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됩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목숨을 내어주는 참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에, 또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영광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기 위한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사랑하셨듯이 목숨을 바치는 참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면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희생을 통해서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물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는 일치를 완성하셨듯이, 제자들이 당신과 같이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4,3-11 참조). 그리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모두 같은 것이고,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20-21. 15,1-17 참조). 이것이 제자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구원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렸지만 계속되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회가 겪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는 교회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 구원이 이천 년이 지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정도면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이가 주님의 사랑을 살고 전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 구원은 늘 이 세상에 넘쳐흘렀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고, 그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묵시 21, 3-5 참조)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하느님의 선한 마음, 깊은 지혜, 넓은 아량을 느끼며 감사드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꽃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사랑하시기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다르기에 서로에게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한마음 한 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세월의 흐름 가운데 지난날을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의 어느 한 순간을 돌아보며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떠올리게 되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두 길을 한 번에 다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과 미련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을 충실히 걸어가며 감사와 행복을 더욱 느낄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크고 작은, 중요하고 사소한 수많은 길들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고 응답하였고, 또 그 길을 충실히 걸어왔습니다. 이런 인생 여정을 살아온 한 분 한 분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아름다운 만남과 사건들이 자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매일 가장 의미 있는 삶을 가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 삶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아닐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자녀, 가톨릭신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신앙인으로, 가톨릭신자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가운데서도 사제직과 수도생활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을 생각하는 ‘성소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 중 하나는 ‘왜 사제가 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느꼈고, 또 ‘예’라고 응답할 수 있었는지의 물음입니다. 어느 호젓한 밤 앞날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가운데, 인생살이의 제한된 시간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한 가장 좋은 삶은 ‘사제의 길’이라고 마음속에서 울려왔습니다. 그래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순수한 마음이 퇴색된 듯 느껴질 땐 부끄러움과 아픔을 느끼며, 조금이나마 더 잘 살아가려고 애쓴다고 여겨질 땐 하느님께 감사와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부르심과 응답의 그 순간을 되새기며 부족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부님들, 수녀님들, 평신도분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의 존재가 되고 있는가?’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르심과 응답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며,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고하십니다.(사도 13,43 참조)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묵시 7,9 참조)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여야 합니다.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성소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인 밤에 배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맙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될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치 짙은 어둠이 삼켜버린 것만 같았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부활과 참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옛 교우들은 부활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고, 태양이 뜨고 있음을 알리는 수탉은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예수님께서 약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신 ‘얘들아’(παιδία)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사실 이 단어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은 어색합니다. 7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실까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괘씸한 죄인이 아니라 마냥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상서로운 방향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에 따르면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였다고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는 온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루카 5,1-11 참조)과 흡사한 이 장면은 예수께서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다시 불러 모든 민족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렸으나, 스승은 제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내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옷을 입고 그분께로 헤엄쳐 갑니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죄인의 반응입니다.(창세 3,10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죄책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 손수 한 끼 식사를 챙겨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이시는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서 늘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슬픔은 곧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도 슬픔을 통하여 세 번 배반한 자신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두 번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질문하시고 마지막 질문에는 ‘필레오’(φιλέω)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레오’라는 동사로 대답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필레오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물으시는 첫 두 개의 질문에 필레오로 대답한 것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아직 미숙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필레오로 질문하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 명하십니다. 형제에게 향하는 필레오에 주님께로 향하는 아가파오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루살렘의 구도시(old city)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하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해 골고타 언덕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고통의 길’입니다. 지금은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끄러운 시장이 됐습니다. 비아 돌로로사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골고타까지 가다 보면, 순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상인과 행인들의 눈길이 꽂혀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형틀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행렬을 많은 이들이 구경하였듯이 말입니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구경하며,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고 혀를 찼을 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골고타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죄인들의 형 집행이 이루어졌고, ‘해골터’라는 지명 뜻처럼 무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종류로서, 베드로도 이 형벌이 두려워 예수님과 한패가 아니라며 세 차례 부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은 고통에 시달리다 서서히 죽었다고 하니, 예수님이 당일 운명하신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마르 15,44)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이 그런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점이 가장 놀라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마르 15,38) 광경을 그가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전은 예부터 주님의 현존이 상징적으로 자리하신 곳으로서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전이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곳임을 암시해 주는 실마리는 성경에 여럿 존재합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원조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뵐 수 있었듯이, 성전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식적으로 만나 주시던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두 곳 모두 죄 없는 상태, 정결한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건 죄를 지어 합당한 정결함을 잃어서였고, 옛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과 9장의 실로암 못이 예수님 시대 사용한 대표적인 정결 예식터였습니다. 셋째, 커룹의 존재도 공통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에덴동산의 입구에서는 커룹이 불 칼과 함께 지켰고, 성전에는 지성소의 계약 궤에 커룹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커룹들이 지켰듯이, 지성소 또한 커룹이 자리해 있음으로써 일반 백성의 접근을 상징적으로 제한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곳의 공통점은 ‘기혼’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납니다. 기혼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 가운데 하나이자(창세 2,13) 예루살렘 성에 자리한 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옛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성전이 봉헌돼 있었고, 기혼 샘은 성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형태였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혼강이 흘러나왔다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대, 옛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전에서 에덴동산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만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2.29.33) 그러나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그 금지된 정원, 곧 에덴동산을 상징한 지성소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비가 이방인 백인대장의 고백 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그분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지만, 이방인 백인대장은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만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준 성전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졌고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덴동산을 상징한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께서 성전이 되셨고(요한 2,20-21 참조), 또한 우리 모두가 그 이후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됐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 2코린 6,16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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