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5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마태 5,13-16 참조) 소금은 녹아 사라질 때 제 역할을 하고, 빛은 드러날 때 세상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 사라짐과 드러남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라 부르신 말씀은, 구약에서 소금이 지닌 계약과 상징을 배경으로 합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곡식 제물에 소금을 치게 하십니다. 소금은 부패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 계약의 변치 않는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민수기 18장 19절과 역대기 하권 13장 5절에서 언급되는 “소금 계약”은 바로 이러한 ‘영원한 계약’을 의미합니다. 예언자 전통에서도 소금은 정화와 치유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에제키엘은 신생아를 소금으로 문질러 깨끗하게 하는 관습을 언급하고(에제 16,4 참조), 번제물에 소금을 뿌리는 정화 의식을 소개합니다.(43,24) 엘리사는 오염된 물을 소금으로 되살립니다.(2열왕 2,19-22 참조) 지혜문학에서 소금은 음식의 풍미를 더함으로써 먹는 기쁨과 삶의 의미를 더해 주는 상징입니다. 욥이 “간이 맞지 않은 것을 소금 없이 어찌 먹겠느냐?”(욥기 6,6 참조)라고 말하듯, 소금은 삶의 즐거움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신약에서도 확장되어 바오로도 “말이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한다”(콜로 4,6 참조)고 하며, 지혜롭고 분별 있는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소금이 뿌려진 땅이 황폐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습니다.(신명 29,22; 판관 9,45 참조) 소금은 생명을 보존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타내는 강렬한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상징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부르신 뜻이 분명해집니다. 소금은 자신을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질 때 제 역할을 하듯, 우리 역시 자기희생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세상을 보존하고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빛”의 상징은 성경에서 더욱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일으킵니다. 구약에서 빛은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의 표지입니다. 시편 27장 1절은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시편 119장 105절은 하느님의 말씀이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말씀의 빛, 주님의 빛을 받아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을 “민족들의 빛”(이사 42,6; 49,6)으로 세우셨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4)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바로 이 종의 사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신학이 잘 드러나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시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전히 어둠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둠 속에서 빛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빛이 어떤 삶을 통해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나누고, 떠도는 이들을 맞아들이며, 헐벗은 이들을 덮어주는 자비와 연대의 실천 속에서 주님께서는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올 것”(이사 58,8 참조)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복음 역시 우리의 “착한 행실”(마태 5,16)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참된 빛이 드러나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의 근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임을 밝힙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선포가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1코린 2,4)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때는 소금처럼 기꺼이 녹아 사라지고, 어둠을 밝혀야 할 때는 담대히 믿음의 빛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4주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참행복(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진짜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세상과 복음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외치는 행복에 부, 명예, 권력, 쾌락 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가난’이 단순히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라 ‘겸손’과 연결된다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칠죄종 첫 자리의 교만이 모든 죄의 시작이듯, 겸손은 모든 축복과 미덕의 기초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 안에 가득 찬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욕망을 비워내어, 그 빈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도 “주님을 찾아라.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스바 2,3)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겸손한 이, 곧 비천한 이들은 힘이 없어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마음을 두지 않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이 내 영혼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즉 영적인 가난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세상은 강함, 지식, 가문, 능력을 행복의 조건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하느님의 선택 기준이 세상과 정반대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수단 곧 권력이나 지혜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약한 이들을 통해 구원사업을 이루시는데, 그 이유는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나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내 자신의 부족함과 악함을 인정할 때(마음의 가난),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하는”(1코린 1,31) 이유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가톨릭의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쾌락과 소유욕을 절제하는 단계로서 욕망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자를 말합니다. 둘째,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로서 사랑으로 활동적인 삶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단계로서 관상적인 삶으로 인간 완성을 향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해를 받는 것은 이 모든 덕행의 시금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옛 율법의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은총의 새 법을 선포하시는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비워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강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온유하고 자비로워야 땅을 차지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행복을 원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 아는 것에서 실수가 발생합니다. 오늘 나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행복을 찾고 있나요? 사라져 버릴 세상의 위로일까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하느님의 약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의 힘과 욕망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를 하느님으로 채워보시지 않으실래요?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지금 여기서 맛보는 유일한 길입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해외 원조 주일

오늘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초점은 죄인들의 회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신 일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회개와 제자로의 부르심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는데 “그들은 어부”(마태 4,18)였습니다. 좀 더 가시다가는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마저도 제자로 부르셨는데 그들도 “그물을 손질”(마태 4,21)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부였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네 어부를 다음과 같이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아무래도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제자로 삼겠으니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는 것보다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편이, 당신의 뜻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물고기 잡는 ‘어부’였던 이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따라나설 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을까요? 어떻게 하여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마태 4,22)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이들은 모두 ‘어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어부를 ‘페쉐(pêcheur)’라고 합니다. 그런데 발음은 매우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른 ‘페쉐(pécheur)’도 있습니다. 전자는 어부지만 후자는 죄악에 빠진 사람, 곧 ‘죄인’을 가리킵니다. 정확한 발음표기를 보자면, 어부를 뜻하는 페쉐(pêcheur)는 [pɛʃœːʀ]이고, 죄인을 뜻하는 페쉐(pécheur)는 [peʃœːʀ]입니다. 모음이 ɛ와 e의 차이니, 프랑스인이 아니고서야 구별해서 듣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단어에 속합니다. 저 같은 외국인이 ‘어부’와 ‘죄인’을 구분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pêcheur)였다”가 아닌 “그들은 죄인(pécheur)이었다”라고 들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물을 손질하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직업적으로는 물론 기록된 대로 ‘어부(pêcheur)’가 맞지만, 인간 본성상 ‘죄인(pécheur)’이기도 하므로,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업상 어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상 죄인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그들은 페쉐(pécheur)였다”라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인간 본성상 ‘죄인(pécheur)’인 그들을 부르시어,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릴, 사람 낚는 ‘어부(pêcheur)’가 될 것이라고 선언해 주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죄인들의 회개를 선포한 공생활의 시작점에서 일어난 이 부르심을 어부가 아닌 죄인을 부르신 사건으로 이해하는 건 어떨까? 물론 저의 이런 엉뚱한 발상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신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마태 9,13) 오신 분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도 처음부터 완전한 성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죄인이었기에 부르심을 받은 것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부족하고 죄가 많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따르는 한, 우리는 모두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일치 주간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는 집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없애는 예전의 유행이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텔레비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과 같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경기에서나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거실에서 보기 위해 굳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 쟁탈전으로 서로 싸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됩니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졌던 거실은 이제 텅 빈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채널 쟁탈전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는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가 익숙합니다. 친구나 가족보다도 스마트폰이 더 가깝고, 때로는 나의 전부이고 심지어 마치 배우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또 자극적인 것 등을 모두 이 스마트폰에서 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사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쉬운 것,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주님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면 안 되나?’, ‘성체도 그냥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될까?’, ‘굳이 고해소에 들어가 고해성사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등 인격적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얻기 힘들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석에 앉아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기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실 진짜 구원자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귀찮다’고, ‘지루하다’고, ‘힘들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하기보다 피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심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중 두 번째 노래로, 하느님께서 선택된 종의 사명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민족들의 빛’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실수로 북쪽으로 1도 다르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비행기가 60마일을 날아갈 때 1도가 틀어지면 1마일을 벗어난다는 60대 1의 법칙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8,800km, 그래서 148km의 오차가 생깁니다. 인천 기준으로 북쪽 150km이면 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겨우 1도라 해도 목적지가 아예 바뀌게 됩니다. 우리 삶의 항로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편하고 쉬운 길,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딱 1도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매일 1도쯤 더 기도하고, 매 순간 1도쯤 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이루어지는 1도의 방향 전환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인터넷카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를 운영하고 있으며,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하는 강연 요청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사제다. ‘빠다킹’은 목소리가 느끼하게 들린다고 해서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으로, 25년 넘게 이 별명을 버리지 않아 공식 애칭이 되었다. 저서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요한을 “찾아가셨다”(마태 3,13)는 표현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파라기네타이’는 단순히 어떤 장소로 이동해 ‘왔다’는 의미를 넘어, 의도적이고 결정적인 공적 등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의 한가운데로 내려오신 현현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세례 사건은 예수님의 사명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고 전개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죄인들과 연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더욱이 놀랍게도 죄 없으시면서도 죄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세리들, 죄인들, 병자들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완고하고 차갑고 동정심 없이 살피고 감시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분리와 판단을 넘어서 그들 모두를 형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 방식은 공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죄인들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실 때(루카 19,5; 요한 4,7; 요한 5,6 참조), 엠마오로 향하던 낙담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루카 24,15 참조), 그리고 부활 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요한 20,19 참조)도 예수님은 먼저 움직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은 도덕적 올바름이나 법적인 정의를 넘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행위인 그분의 자비하신 마음을 드러내는 삶을 뜻합니다. 곧 연민과 자비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들 한가운데서 이루어야 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드러난 이러한 ‘의로움의 실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3)라고 약자와 함께하는 정의를 선포한 이 예언은,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연대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에게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이사 42,6)라고 하신 약속 또한, 세례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는 장면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한 사건입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날이며,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 위에 머무르셨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들이다”라고 선언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은총은 예수님께서 먼저 요르단강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세례는 단순히 죄를 씻는 정화 예식이 아니라, ‘의로움’과 ‘성령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시는 존재로 변화되고,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여정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태도, 곧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이사 42,1; 마태 3,17 참조)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글 _ 전봉순 수녀(그레고리아·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1985년 입회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그 후 동 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부산 가톨릭 신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구약성경 주해, 시편 Ⅰ- Ⅲ권」, 「시편 90편과 지혜로운 마음」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다. 그들은 왜 유다인이 아닌 동방 박사들이었을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이 혈통을 넘어, 진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별은 낮에도 빛나지만, 박사들을 인도하며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 위에서 멈췄다. 하느님은 각 사람의 수준과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데, 점성술과 자연법칙에 익숙했던 박사들에게 ‘별’이라는 자연적 표징을 통해 그들을 초자연적인 신앙의 신비로 인도하셨다.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될 수 있다. 동방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예물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본성을 고백한다. 황금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한다. 그분이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흠숭의 표현이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인성 곧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데, 인간의 죽음을 썩지 않게 보존한다. 그러므로 몰약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구세주의 인성을 미리 보여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사랑의 ‘황금’을, 기도라는 ‘유향’을, 육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절제라는 ‘몰약’을 바쳐야 한다.” 동방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제물은 한편 오늘 우리에게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준비하도록 인도한다. 황금은 물질의 헌금보다는 내 삶의 가장 귀한 가치와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는 것이다. 곧 나의 시간, 재능 그리고 돈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왕좌에 누구를 앉히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하는 삶이 오늘날의 황금을 바치는 삶일 것이다. 유향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에서 쓰였다. 이는 지적인 영혼이 하느님께 고양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대의 삶에서 소음과 분주함 속에서 마음을 모아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 시간이 유향의 내적 의미이다. 하루 중 단 5분이라도 세상을 향한 관심을 내려놓고, 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관상’의 향기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활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 현대의 유향이다. 몰약은 시신의 부패를 막는 데 쓰였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수난을 상징한다. 나의 이기심과 탐욕이 영혼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는 희생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이를 이웃을 위한 사랑의 도구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내 안의 미움이 흘러가도록 하는 사랑의 행위가 바로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내적인 몰약이다. 왕권으로서 황금이 내 우선순위의 봉헌이 되고, 신성을 고백하는 유향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기도의 봉헌이며, 인성의 수난을 뜻하는 몰약은 자기 욕망의 절제로 생기는 고통을 인내로 승화하는 희생 봉헌을 뜻한다. 이렇게 동방 박사들이 주님께 봉헌하는 세 가지 보물들은 오늘의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영적인 선물이다. 박사들이 보물 상자를 열어 예물을 드렸듯이, 우리도 마음의 보물 상자를 열어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물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꿈에 지시를 받은 박사들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고 전한다. 이것은 ‘회심’의 전형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길 곧 죄의 길, 세속적인 길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를 뵌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오늘의 동방 박사인 우리가 헤로데의 세속적 권력과 탐욕의 길을 피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본다. “나는 내 삶에서 떠오른 별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나의 황금인 재능, 유향(기도), 몰약(희생)을 기꺼이 준비하고 바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별’과 같은 질문을 통해, 동방 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영적 보물을 바치며 엎드려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198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96년부터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강의했다. 2019년 호주 시드니 한인본당 주임 신부를 맡았고, 2023년부터 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8면

[말씀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오늘 루카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로부터 메시아 탄생에 관하여 들은 말을 전해 줍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놀라워하였지만, 마리아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마리아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먼저 루카 복음이 ‘간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쉰테레오’(συντηρέω)입니다. 쉰테레오는 어떤 상태를 잘 유지하고 지켜 ‘보존한다’라는 뜻의 ‘테레오’(τηρέω)에서 유래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어, 잔치가 끝날 때까지 좋은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되자 과방장은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 2,10) 여기서 ‘남겨두었다’라는 말이 테레오인데, 포도주를 양적 차원에서 남겨두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포도주의 질적인 상태까지 변하지 않고 그 본래의 맛과 향이 잘 ‘보존되었다’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 테레오에 ‘~와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쉰’(σύν)을 덧붙여,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다’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보존했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천사의 말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온전히 그 말씀에 일치시켜, 말씀의 본질적인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간직한다는 것은 간직하려는 대상에 나의 생각과 뜻을 일치시키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내가 그 안에 머물면서 반복해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특별한 간직함은 끊임없는 ‘기억의 현재화’로서 ‘되새김’을 의미합니다.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번역되는 ‘쉼발로’(συμβάλλω)가 쉰테레오 뒤에 함께 사용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쉼발로는 원래 ‘의논하다, 함께 이야기하다, 협의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는 본래 주사위를 던져 제비를 뽑거나, 씨앗을 땅에 뿌린다거나, 그물을 바다에 칠 때와 같이, 무엇을 ‘던진다’라는 뜻을 가진 ‘발로’(βάλλω)에서 유래하지요.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βάλλω) 의미 물음은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한다는 점에서, 내가 나와 함께 의논하고 이야기하는 것(συμβάλλω)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할 때, 곰곰이 되새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곰곰이 되새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전할 때에도 마리아는 이미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 참조) 하였고, 잃었던 소년 예수를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루카 2,51 참조) 하였었지요. 마리아는 항상 곰곰이 생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이해하기 힘들 때마다 그 안에서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며 순종하였습니다. 간직하고 되새긴다는 것. 그것은 결국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끊임없이 주님의 뜻과 말씀의 의미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기념하는 우리는 마리아의 그 모범을 따라 힘겨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안에 숨겨진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그분 마음에 내 마음을 두는 거룩한 행위이며, 내 마음이 주님 마음 안에서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201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 부원장, 의정부교구 고양동본당 주임을 거쳐 2024년부터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5학년 원감으로 소임하고 있다. 2025년 「애니그마, 말씀의 수수께끼1」을 저술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8면

[말씀묵상] 대림 제4주일

“00 축하합니다. 00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000의 00 축하합니다.” 소중한 누군가의 생일이나 축일이 되면 촛불을 켜고, 사랑과 축복의 마음 담아 함께 노래하곤 합니다. 생일이나 축일뿐 아니라 혼인, 기일 등의 소중한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려고 새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기도 하고, 휴대전화에 입력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누군가 또는 어떤 날을 기다린다는 것이 선물로 다가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함께할 기쁨에 설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다림의 선물 중에서 부활과 더불어 가장 귀한 선물을 꼽는다면,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탄이 아닐지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올해에도 오시고, 또 심판의 때에 오실 것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와 성탄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성탄쯤에 찾아주실 수많은 분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명동대성당은 10월 초부터 준비를 시작하였답니다. 대성당 입구 쪽 마당에는 빈 구유가 자리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명의 봉사자께서는 대성당을 향해 올라오는 계단과 대성당을 둘러싼 나무들 그리고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는 성화도 아름답게 꾸미셨습니다. 차가운 날씨에도 기쁘고 행복하게 준비하시는 봉사자들을 뵈면서, ‘이분들은 이런 봉사의 실천으로 아기 예수님께 드릴 구유 예물을 준비하고 계시는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구유 예물을 준비하고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라는,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기도를 떠올리며 그동안 얼마나 충실히 준비하며 살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만이 전부인 삶을 내가 살고, 또 교우들께서 그렇게 살아가실 수 있도록 사목자의 역할을 성실히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기쁨과 즐거움, 만족함의 순간뿐 아니라, 슬픔과 어려움, 힘듦의 순간도 있습니다. 슬프고, 어렵고, 힘든 그 순간에 하느님께 은총과 평화를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순간을 이겨낼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순간에는 더욱더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좋은 순간에는 자기가 잘나서 또는 자기가 잘해서 이룬 듯 착각하며 하느님을 곧잘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이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각자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다윗 왕실,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이사 7,14)라고 전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로마 1,6-7 참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믿고 고백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부족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곧 오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향기로운 구유 예물을 마련하여 봅시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12-25 제3471호 21면

[말씀묵상] 주님 성탄 대축일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서로에게 축하의 말과 선물을 건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온정을 나누고 사람들 사이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가득한 은총이 더 많은 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 넘치는 신비를 전하기 위해 성경은 오신 그분이 누구시고 어떤 분이신지에 집중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데 ‘그냥’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으셨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셔야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셨나? 그렇다면 그분은 전능하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바라셨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어째서 아드님의 고통을 바라셨을까요? 히브리서와 요한복음은 만물이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히브 1,2; 요한 1,3 참조)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콜로 1,15-20 참조)에서 같은 어휘와 표현으로 창조와 구원을 묘사합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만물이 구원되는 것은 곧 창조의 완성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으로서 창조와 구원의 과정과 목표가 되셔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의 의문을 다시 던져봅시다. 애초에 하느님은 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사실 그분에게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실 텐데 말이죠. 창조란 오히려 그분의 완전성과 유일무이성을 깨뜨리는 자기 부정이고 희생이며,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인 행위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분은 사랑의 표현인 창조를 하실 수밖에 없으셨고, 그것은 그분의 본질에 포함된 행위였던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도 사랑이라는 본질과 연결됩니다. 부부의 사랑을 통해 자녀가 탄생하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적인 사랑으로 창조가 그리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불완전한 사랑에서도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형태가 아무리 바뀐다 해도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어떤 결실도 얻을 수 없습니다. 환멸과 상처만이 남을 뿐입니다. 당신의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사랑의 스승이시며, 사랑 자체인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보고 알게 됩니다.(요한 1,18 참조) 그분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요한 1,9 참조)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생애가 모두 심오한 신비이지만, 그분은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그 모든 것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말씀이, 진리가, 사랑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성탄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된 창조의 완성, 구원이 시작되는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는 이 은총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단련하고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를 이해하려 하고,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에게 용서를 청하고, 마음이 가기는커녕 생각만 해도 죄를 지을 것만 같은 이를 사랑하기로 결심합시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사랑으로 창조되고 구원되었으니,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믿고 고백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 그동안 ‘말씀묵상’을 집필해 주신 변승식 신부님, 김명숙 교수님, 함원식 신부님, 조성풍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5-12-25 제3471호 22면

[말씀묵상]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세례자 요한은 사해 동북쪽에 있는 마케루스 성채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갈릴래아의 영주 안티파스가 이복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비판한 결과입니다. 따지고 보면 안티파스가 헤로디아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두매아 출신으로서 유다의 통치자가 된 헤로데 가문은 늘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와 이혼하고 유다 독립전쟁의 영웅 마카베오 가문이 세운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의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기 아내를 버린 안티파스를 세례자 요한이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유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파스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안티파스는 요한이 세력을 규합해 정통성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한 자신을 축출할지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감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전해 들은 요한은 두 제자를 보내 그분의 정체를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여기서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약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좀 이상합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한 이래 오직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데 온 삶을 바쳤으며,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께 세례까지 베푼 요한이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말입니다. 지금 요한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힘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면 메시아가 맞는 것도 같지만, 그분이 이어가는 행보는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심판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더 크게 보이는 모습은 정의로운 심판자보다 자비로운 치유자가 아닙니까? 게다가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오히려 메시아의 정의를 외치던 자신이 안티파스의 불의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혀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요한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이 말씀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가 도래하면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요한에게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요한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서에는 위에서 언급한 메시아의 모습뿐 아니라 심판하는 메시아의 모습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심판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오심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음을 몰랐기에 오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궁극적인 심판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이는 세례자 요한처럼 메시아께서 오셨음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성경은 메시아의 시대에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닷물처럼 흐르리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우리가 체험하는 이 세상은 종종 더 아름답고,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워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져 가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왜 늦어지고 있을까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오셔서 시시비비를 준엄하게 가려 주시기를 학수고대할 텐데요. 아직 마지막 때가 오지 않은 것은 하느님이 사람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설사 그가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비의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 모든 것은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가 권고하듯이, 가을비와 봄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해야겠습니다. *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릅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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