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사순의 때를 보내며

사순의 때는 회개의 시간 잘못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제, 나는 돌아온 탕자의 마음으로 십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사랑, 한없이 내어주신 펠리컨 사랑 그 사랑 앞에 고개 숙이고 나를 돌아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무심히 던진 무례한 말과 행동들, 사랑과 정의를 외면한 죄악들을 돌아보며 주님께 참회의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사순의 때는 은총의 시간 십자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 지고 가시는 골고타 언덕길의 주님 고통을 아파하며 내 죄의 허물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는 은총 입기를 원합니다. 미움과 질투, 완고함과 교만함. 탐심과 집착으로 칭칭 감겨진 내 몸을 주님 십자가 희생 사랑으로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타작마당의 빛나는 알곡처럼 언제나 주님 앞에 수정같이 맑은 모습으로 서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순의 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한없이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인류를 위해 비우고 비우신 사랑 죄악에 가득 찬 세상 구하시려 권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사랑 찢기고 상처 난 성체에 피 흘리시며 한없이 낮아지신 희생의 사랑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무례함과 무지와 완악함을 용서하시며 그 성혈과 생명수로 온 인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사랑을 바라봅니다. 사순의 때는 거듭나는 축복의 시간 이제는 미움과 분열로 닫힌 마음이 주님의 영을 받아 용서와 화해로 강물 같은 평화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은혜로 내려주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약동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끌어안는 사랑,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 안는 뜨거운 사랑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주님! 이 사순의 때에 제 존재와 하느님 사랑 기억하게 하시어 십자가 주님의 희생 사랑을 닮아 가게 하소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글 _ 김영희 요셉피나(서울대교구 묵동본당)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2면

[내 눈의 들보]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한국교회는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뜩이나 청년 신자가 귀해진 상황에 청년들이 함께 대규모 국제행사를 준비해서 성공시킨다면 순교자의 피로 세운 한국교회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질 것이고, 침체하고 있는 교회 성장의 새로운 동력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큰 규모의 국제행사이기도 하지만, 가톨릭신자가 다수를 점하지 않는 종교다원사회에서 개최되기에 교회의 힘만으로는 행사 준비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웃 종교와 함께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조도 구해야 한다. 이런 현실적 고민, 그리고 행사를 더 잘 준비해야 한다는 의지로 어떻게든 국가기관과의 협력구조를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정점이 ‘2027 제41차 서울 세계청년대회 지원 특별법안’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법안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서울 세계청년대회의 성공을 위해 국가와 국가기관, 단체의 행정, 재정지원을 의무화하고 조직위원회 활동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기존 규정에 예외를 적용해 달라는 것이다. 많게는 전 세계 수백만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행사인데 인구의 10% 남짓을 점유하고 있는 종교인 가톨릭교회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국가적 지원 없이는 행사 자체를 진행할 수 없기에 특별법의 요청은 정당하고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특별법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특혜라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당장 불교계가 큰 반발을 하고 있고, 작은 규모의 민족종교도 염려를 거두지 않고 있다. 종교 간 갈등이 가장 적은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종교다원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지점이다. 교회가 나서서 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법안 제정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사실인 만큼 이 법안을 통해 얻게 될 ‘혜택’을 버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에서 현실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세계청년대회라는 이 거룩한 행사를 돈과 권력의 힘으로 치르고자 하는 욕심이 없는지? 그리고 큰 의미를 가진 축제이지만 이웃에게 행여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이 맞는지? 사순 시기, 버림과 비움을 묵상해야 할 때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인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인지, 가난한 교회인지를 선택하기는 힘들어도 낮은 자리를 굳이 찾아가 말할 수 없는 이, 들을 수 없는 이, 걸을 수 없는 이의 입이 되고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는 길이 바로 복음의 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길은 영광과 환희로 가득 찬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그 길 끝에서 구원이라는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다. 그 믿음이 약하기에 세상의 권력과 돈의 힘으로 영광된 외향과 승리의 표상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더 큰 믿음을 가져 보자. 한국의 신앙인들이 믿음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복음을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인다면 명문화된 특별법 같은 규정이 없더라도 이웃 종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권한을 가진 정부나 기관들의 협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우리 교회의 힘으로 성공시키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글 _ 이은석 베드로(정의평화민주가톨릭행동 전 사무국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2면

[독자마당] 생명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박봉일 베드로’

나는 보았네, 그날의 아름다움을! 나는 보았네, 그늘 주님께서 역사하심을! 그날, 저는 아들 시몬과 며느리 세라피나, 손녀 소피아와 함께 경북 영천시 괴연동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박봉일 베드로 공덕비 제막식, 괴연공소 설립 123주년 기념행사’라는 현수막이 아름답게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민들도 마을회관에 현수막을 정성껏 걸어 두었더군요. 공경하올 신앙의 선조 박봉일 베드로(1867~1950) 증조부님! 우리 후손들에게 천지 창조주 천주님, 참 진리를 믿도록 이끌어 주심에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증조부께서는 30년 동안 공소회장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배고픈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셨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옷을 주셨고, 잠잘 곳이 없는 걸인에게 2~3일씩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셨으며, 걸인의 옷을 세탁하여 입혀 주셨습니다. 병든 이에게는 손수 약을 처방하시어 달여 먹여 정성을 다해 돌보셨으며, 비신자 임종자에게는 대세를 권유하여 대세를 주셨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두루 찾아다니셨습니다. 또 교우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릴 장소(공소)가 없을 때 당신의 땅을 기증하여 공소를 지어주셨고, 후손들에게는 신앙을 엄하게 가르치셨으며, 막내 아드님을 사제로 키우셨고, 8남매 아들·딸들을 잘 키우셔서 후손에 사제 여섯 분과 수녀 두 분이 나게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적 집안 어른들로부터 증조부께서 신앙인으로 잘사셨다는 막연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증조부의 거룩한 삶을 찾아서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해보았으나, 찾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온 지도 아마 40여 년이 훌쩍 넘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애써 찾으려고 하는 저에게 많은 은인을 보내 주셔서, 드디어 공덕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모인 후손들은 다짐했습니다. 물려받은 거룩한 신앙을 후손들에게 잘 전해 주어야겠다고. 글 _ 박경순 수산나(대구대교구 성김대건본당)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2면

[독자마당] 떠난 자리 남겨진 자리

또 한 번의 송별사를 쓰고 읽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참으로 지난하다. 그래서인지 누가 써도 송별사는 슬프고 아프게 들린다. 이 새삼스러운 헤어짐으로 인하여 본당 사제와 신자로 살았던 지난 시간에 대하여 서로의 마음을 되짚어 보게도 된다. 그 마음 저편에 말없이 계시는 하느님도 다시 보게 된다. 송별사를 쓰기로 맘먹는 순간부터 심사가 몹시 혼란스럽고 미사 때마다 분심이 한가득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억들에 시도 때도 없이 코끝이 시큰거린다. 그리고 마음속 밑바닥에 깔아 놓았던 노여움과 서운함에 또 한 번 남모르게 목울대를 자극한다. 미사포는 눈물과 콧물로 하얀 얼룩이 그득하다. 봉사하게 해 주신 하느님 은혜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감사하지 못한 때가 기억나 가슴이 아프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우울한 마음을 하느님께 들키는 순간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3년에서 길게는 5년에 한 번씩 공식적으로 하는 본당 사제와 이별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심해지지도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만날 때 우리는 헤어짐을 기약해야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헤어짐이 전제된 만남이다. 특별히 본당 사제와 친밀함이 있든 주일에만 한 번 만나는 신자이든 우리 성당 신부님이 바뀌는 건 참 생경하고 낯설다. 또 어떤 성품과 습관이 있는 사제일까 염려 섞인 호기심이 몸에 익을 만할 때 이 이별이 일어난다. 수 없이 겪고 경험한 본당 사제의 모습들을 기억하는 원로 신자들도 무심해 보이는 표정 뒤에 서리는 서운한 마음은 인지상정인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같은 날 오전에 정든 이별을 하고 돌아서 낮에 새 부임 사제를 맞게 된다. 새 사제를 반기고 환영 인사를 나눈다. 너무도 당연한 사제 이동에 이제는 이력이 난 어른들이다. 누가 새로 오시든 그분은 우리 성당 신부님이고 또 우리를 잘 이끌어주실 하느님의 대리자다. 조금 젊은 신자가 묻는다. “그렇게 서운하게 이별하고 돌아서서 다시 생글 웃으며 새 신부님을 맞는 거 맞아요? 제 자신이 정신이 좀 나간 사람 같아요.” ‘천주교 신자들과 사제들의 숙명 아닐까 싶어’라 말하며 나도 웃는다. 가시는 분 짐 정리를 도울 때가 있다. 조심스럽게 사제복을 접어 이삿짐을 싼다. 기다란 수단의 단추를 세어보고 싶다. 옷장은 온통 검은색이다. 로만 카라도 만져본다. 어느 신자에게서 받은 듯 보이는 보라색 셔츠는 아직 포장지에 싸인 채 그대로이다. 지난번 신자들과 도보순례 때 입으셨던 빨간색 운동복이 보인다. 이빨에 끼인 고춧가루 한 조각 같다. 오신 분 이삿짐을 풀어 빈 장롱을 채워 넣어드린다. 이 분은 운동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사제는 집이 편안해야 해요. 그래야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줄어요.” 짠한 마음이 든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삶은 보이는 것 뒤에 숨은 가늠이 어려운 무엇이 있을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인간적 걱정과 사념들 너머에 시선을 두고 마음을 기울이는 이들과 우리는 같은 주소를 쓰는 하느님을 희망하며 산다. 가시는 분, 오시는 분 모두 건강과 행복을 기도하는 건 신자의 운명인 것 같다. 글 _ 이순일 마리아(의정부교구 마석본당)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2면

[내 눈의 들보] 나는 순례자인가? 순례 관광객인가?

어느 흑인이 백인들만 들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성당 앞에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를 한다. “주님, 저 아름다운 성당 안을 꼭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자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너무 애통해 하지 마라. 나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셨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신자에 따라서는 느끼는 바가 클 수도 있다. 오랜 시간 성지 안내 봉사를 해 오면서 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잘 가꾸어진 성지는 우리 것이 없어지고 유행 따라, 개인 취향 따라, 욕심 따라 낯선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어색하게 반긴다는 것이다. 새로 지어지는 성전은 화려한 유리화와 고급진 소품들로 채워진다.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의 끔찍한 가난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하다. 눈으로 보는 화려함에 모두들 눈이 먼 듯하다. 좁은 방바닥이 꺼질까 다닥다닥 붙어 앉아 미사 드리던 어느 성지 옛 건물은 없어지고, 미안한 듯 우리를 반기는 드넓은 논에는 골프장처럼 고운 잔디가 입혀져 있다. 옛 선교사들이 들여온 채소인 크레송(Cresson, 물냉이)이 지금도 도앙골 도랑에서 순례객들을 반기는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다. 부엉골 신학교 터를 찾아 현장에서 설명을 들으면 감격스럽다. 우리는 웅장함과 화려함보다는 소박함과 부족함을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커다란 건물과 일본식 정원으로 관광지화 되어 가는 성지와 볼 것, 먹을 것, 쉴 곳 찾아 편승하는 관광 순례객들을 보곤 한다. 갈 때는 거룩하지만 돌아올 때는 음주와 고성방가로 신나는 본당 성지순례를 원하는 신자들도 본다. 가끔은 순교영성보다 헌금을 설명해야 하는 사제들도 있다. 신자와 순례객이 줄어도 대형 성지를 운영해야 하는 어려움 앞에 답답한 현실이지만 부끄럽게도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도 비겁한 방관자가 되어 가는 듯하다. 어머니 품속 같이 편히 쉬고 다시 찾고 싶은 성지가 그립다. 10년 전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초면 다큐 작가와 1박2일 성지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천주교 쪽에서 필요한 다큐를 만드는 사진작가로 왔으니 기록으로 남길 만한 성지를 소개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도 풀 겸 한국 천주교회사를 조금씩 설명하고 배티성지를 가자고 했더니 다큐 작가는 배티성지는 이 다큐를 찍으려고 아무 지식도 없이 혼자 다녀 온 곳이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큐 작가가 배티성지에 늦은 오후쯤 도착을 하니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 6인 묘소였다고 한다. 금방 다녀올 줄 알고 출발을 했는데 처음에는 경치에 취했다가 묘소 앞에 도착해 정신을 차리니 어두컴컴한데 무덤만 있어 너무 무서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단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가 천주교에 대해 좋은 것을 알리려고 왔으니 여기 계신 분들이 저 무섭지 않게 해 주시라” 말했다며 웃었다. 그동안 성지 안내를 하면서 지식 전달과 안전에만 급급해 중요한 것들을 놓친 건 아닌지, 비신자 다큐 작가가 본 성지는 어떤 곳이며 그가 이해하는 순교자들은 누구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순례자라면 내가 방문한 성지에 작은 초 하나라도 봉헌해서 누구 탓하기 전에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성지를 우리 스스로가 보존해야 한다. 어느 순례 자가 성지 설명을 듣고는 모진 고통과 굶주림을 참았던 신앙 선조들 생각에 점심은 아주 조금만 먹었다고 했다. 어떤 방식이든 신앙은 각자의 몫이지만 우리들은 하느님 진짜 사랑으로 살아가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자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 _ 이래은 데레사(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부회장)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22면

[독자마당] 다가온 새해, 희년을 보내며

소금인형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지난 주일 저녁 청년 미사 중 부주임 신부님의 강론에서 류시화 시인의 <소금인형>을 들었다. 이날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한 복음이었다. 신부님께서 들려주신 소금인형 이야기는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소금인형이 대상을 향해 다가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바다는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이자 세상을 말한다. 소금인형이 바닷물을 통해 녹아내리는 모습은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소금인형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교훈은 소금인형이 바다라는 대상에 자신을 희생하며 내어놓는 것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사랑과 이해이며 대상과의 일치이다. 묵상 중 요즘 나는 어떤 모습, 어떤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떳떳한 신앙 활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있어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개인의 안위와 행복만을 좇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본다. 잘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와는 반대로 위로하기보다는 위로받기만을 바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기만을 바라며,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만을 바라는 건 아닌지 말이다. 소금인형의 이야기처럼 상대방과 세상을 잘 이해하려면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나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하며, 이해할줄도 사랑할줄도 알아야 한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의 말씀처럼 일꾼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평범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각자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훌륭하다. 2025년 희년을 지내면서,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며 신앙인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글 _ 김지헌 다니엘(서울대교구 동작동본당)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22면

[독자마당] 복자 권상문의 세례명은 수정해야 한다

주교회의에서 간행한 「천주교용어집」에는 세례명(洗禮名, 라틴어 : nomen baptismatis, 영어 : baptismal name, Christian nam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세례명은 가톨릭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세례 때 새 이름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뜻한다. 세례명은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고 애쓴다. 흔히 본명이라고도 한다.” 박해시대 때 세례명은 「사학징의」(邪學懲義)나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에서 죄인들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공초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사학징의」 공초에서 유관검은 세례명에 대해 진술하기를 “서양의 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본떠 짓는 것(報名段, 擇其爲學頗勤之人)”이라 했고, 정복혜(칸디다)도 “사호를 부르는 것은 죽은 뒤에 좋다고 해서 짓는 것(盖称號者, 死後爲好云)”이라 진술했다. 이렇듯 세례명은 시대에 따라 보명(報名), 사호(邪號), 별호(別號), 성명(聖名), 본명(本名), 영명(靈名) 등 다양하게 불려 왔다. 한국교회 초기의 세례명은 중국에서 활약한 예수회 선교사 드 마이야(J.de Mailla, 溤秉正, 1669~1748) 신부가 1년 365일 매일 그날에 선종한 성인들의 전기를 수록한 「성년광익」(聖年廣益, 1783년 발행)에 따라 정했다. 그러나 한자음에 대해 충분한 연구 없이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역의 세례명도 다수 생겨났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복자 권상문(權相問, 1769~1802)의 세례명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1874년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된 권상문의 세례명은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인데, 「성년광익」에 따르면 ‘파사제앙’(巴斯第盎)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초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 1801년 2월과 3월의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과 주문모 신부는 각자의 공초에서 진술하기를 권상문을 ‘권파서’(權巴西), 혹은 ‘권파서략’(權巴西略)이라 했다. 파서(巴西)나 파서략(巴西略)은 ‘바실리오’(Basilius)다. 따라서 권상문의 세례명은 ‘세바스티아노’가 아니라 ‘바실리오’다. 달레 신부의 기록보다 무려 70여 년이나 앞선 기록이고, 또한 동시대 사람의 증언이므로 달레 신부의 기록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그동안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수년 동안 복잡한 절차에 따라 수없이 많은 연구와 검토를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세례명조차 대수롭지 않게 대강 보아 넘긴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복자 지위에 올랐고 장차 성인 반열에 오를 분의 세례명을 달리 기록하고 부른다면 말이 되겠는가? 또 일생 동안 그 복자나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분의 덕행을 본받고자 하는 신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혹여 교황청까지 보고 되어 복자위에 올랐으니 세례명을 수정하지 말고 넘어가자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하고만 있을 것인가? 김춘수 시인의 시 <꽃> 중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꽃 중의 꽃이 되신 천상의 복자시니 참으로 더욱 송구할 따름이다. 글 _ 박용식 스테파노(수원교구 북여주본당)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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