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걷고 기도하고] 광주대교구 가톨릭 목포성지

12월 8일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장 마리아 대축일’이다. 성모님의 군단 레지오마리애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곳에 광주대교구 가톨릭 목포성지(담당 최종훈 토마스 신부)가 있다. 목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언덕에 자리한 성지 곳곳에는 성모상과 성모칠고상, 피에타상 등을 모셔두어 따스한 성모님 품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준대성전 성지 안에 있는 산정동 준대성전(주임 정윤수 프란치스코 신부)은 2021년 선포된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준대성전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두 개의 종탑과 돔으로 구성돼 있다. 성지의 주 출입구 가까이에 준대성전 지하 1층 입구가 있다. 그 양옆에는 본당과 전남 지역이 겪은 아픔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교회 사건뿐만 아니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물론 세월호 참사까지 담고 있다. 준대성전 2층 입구 앞은 작은 마당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서 준대성전을 올려다보니 또 다른 웅장함이 느껴진다. 준대성전 중앙 문 위에는 ‘준대성전’(BASILICA MINOR)이라는 황금색 글씨가 있고, 아래에 프란치스코 교황(1936~2025)이 이를 승인했다는 표지가 설치돼있다. 순례자들은 정해진 날에 통상 조건을 갖추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성대한 외관에 비해 내부의 성당은 아늑하다. 기둥이 없어 제대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순례자 역시 시선이 막힌 곳이 없어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그렇게 잠시 앉아 하느님을 오롯이 마주해본다. 파이프 오르간은 비교적 성가대석에 가까이 있어 전례에 최적화됐다. 화사한 햇살에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과 색감이 특히 부드럽고 생생하다. 구약과 신약의 주요 사건과 성모님의 칠고칠락 등이 사실감 있게 다가온다. 보목과 증거자들이 맞이해 주다 몇몇 신자가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 한 중년 부부가 제대 가운데 모셔져 있는 십자가 보목 앞으로 다가가 묵상한다. 남편은 불편해 보이는 몸을 이끌고 아내와 함께 깊은 절을 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간절함이 엿보인다. 본당은 크게 세 가지 보물을 모시고 있다. 성 십자가 보목과 아기 예수의 성 데레사(소화 데레사·1873~1897) 유해, 그리고 성인의 부모인 성 루이 마르탱(1823~1894)과 성 젤리 마르탱(1831~1877) 부부의 유해이다. 이 보물들은 제대 가운데와 양옆 기둥에 모셔져 있다. 특히 올해는 아기 예수의 성 데레사 시성 100주년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복도에는 다양한 성상과 성화들이 상세한 설명과 함께 비치돼 있다. 작품들을 묵상하며 1층 소성당에 들어가 본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형상이 보인다. 또 다른 성인들의 유해다. 성 김대건 신부(안드레아·1821~1846)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1818~1866), 성 마리아 고레티(1890~1902) 유해가 모셔져 있다. 밭에서 또 다른 보물을 발견한 기분으로 잠시 묵상한다. 한국의 ‘성모님 군대’가 결성된 곳 목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가톨릭성가 349번 <마침 성가>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 … 주님의 힘만 믿어 굳세게 가렵니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대성전 앞마당 메모리얼타워 꼭대기의 예수성심상도 시내를 향해 양팔을 벌려 축복하고 계신다. 메모리얼타워는 가운데가 뚫린 원통의 나선 오르막 형태다. 벽면에 오병이어, 가나의 혼인 잔치 등 최성호(루카) 작가의 부조 20점이 자리하고 가장 낮은 곳에 검은색의 피에타상이 있다. 성모광장에 있는 이춘만(크리스티나) 작가의 성모칠고상은 투박하면서도 정 많은 우리네 성모님 모습으로 그 아픔들을 묵묵히 담아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지에는 은혜의 성모님, 파티마 성모님 등 여러 모습의 성모상이 특히 많이 있다. 한국 레지오마리애의 발상지답다. 1897년 설립된 산정동본당은 1950년대 레지오마리애가 한국 최초로 도입된 곳이다. 레지오마리애를 들여온 당시 광주지목구장 하롤드 헨리 신부와, 또 다른 주축이었던 산정동본당 주임 안 토마스 신부를 중심으로 1953년 본당에서 두 개의 쁘레시디움 첫 주회를 했다. 이를 기념해 성지는 2017년 한국레지오마리애기념관을 개관했다. 기념관 외벽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벡실리움(표장)이 설치돼있다. 내부에는 중정을 두어 휴식 공간도 마련해 놨다. 기념관 성물방에는 성탄을 기다리며 성가정상이나 천사상이 있는 여러 가지 스노우볼이 마련돼있다. 전원을 켜니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새어 나온다. 고민 끝에 구유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가정상이 있는 것으로 골라 본다. 흩날리는 반짝이 눈 속에 예쁜 모습 가득 담은 스노우볼을 들고 성지를 나선다. 이번 대림 시기 동안 내 마음속 침전물들도 흔들어내 정화하고 가꿔 예수님을 모셔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

경북 칠곡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는 한국관광공사가 올해 7월 테마로 선정한 ‘불편한 여행지’다. 디지털 기기와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고요와 침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주목받은 것이다. ‘불편함’이라기보다 익숙한 자극을 내려놓고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장소라는 의미다. 2024년 5월 문을 연 센터는 수도원 고유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신축 시설을 갖춰 현대인들이 머물기에 쾌적하면서도,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낸 절제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머무름과 침묵, 기도 속에서 마음의 쉼과 영적 양식을 전하고 있는 센터를 찾았다. 고전과 현대, 세상과 성소의 경계 왜관역에서 10분쯤 걸어 수도원에 다다르면 성스러운 작은 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수도원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센터는 건축계 거장인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노출콘크리트 건물이다. 1928년 세워진 옛 왜관성당 곁에 자리해 예스러움과 현대의 미가 대비되며 서로를 더 돋보이게 한다. 수도원에는 196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피정의 집이 있었지만, 건물이 낡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설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숲이었던 부지에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8년간의 구상과 회의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때마침 승효상 건축가가 천주교 시설을 짓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있음을 알았고, 많은 설계도를 제작한 끝에 완성된 디자인으로 2년에 걸쳐 건축이 진행됐다. 센터는 ‘선’이라는 기본 개념을 가진 ‘경계 위의 집’이다. 이 집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간다는 뜻이다. 승효상 건축가는 이곳을, 세상의 경계 밖에 있는 수도원을 동경해 찾아온 사람들이 힘을 얻는 장소로서 철저한 고독과 깊은 묵상의 삶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특히 큰길과 맞닿은 서측에 100m 넘는 길이의 콘크리트 벽을 세워 물리적으로 세상과 분리했다. 벽에 난 좁고 기다란 틈으로는 햇빛과 세상 풍경이 새어 들어온다. 건물을 통해 바깥을 누리다 서측 콘크리트 벽과 건물 사이에는 중정 ‘하늘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센터의 모든 층에서 유리 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볼 수 있다. 정원에는 붉은 열매를 맺는 팥배나무를 심어 새들과 공간을 공유한다. 그 뜻을 아는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정원 가득하다. 바닥에 난 정돈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하얀 성모자상이 은은한 기쁨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크리스티나 수녀의 작품이다. 하늘정원부터 4층 하늘성당까지 이어지는 외부 계단은 성 베네딕도의 계단이다. 끝에는 낭떠러지와 난간만이 존재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표현한 것이다. 2~4층 계단에는 기도소로 가는 다리가 있다. 삼각 모자를 쓴 기도소 나무문에 가느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 박혀 있다. 내부는 한 평 남짓이지만, 높은 천장 때문에 좁은 느낌이 경감된다. 하늘성당에는 제대도 감실도 없지만 공간 자체에서 거룩함이 느껴진다. 수도원의 다른 십자가와 달리 하늘성당 첨탑 십자가는 왜관 시내를 향한다. 고깔 모양 첨탑 안을 들여다보니, 베네딕도의 별이라 명명된 빛살들이 긴 꼬리를 사방으로 뽐내며 빛나고 있다. 수도원에 들어오면서부터 까마귀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했는데, 실제로 첨탑 십자가가 세워진 뒤부터 까마귀가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까마귀와 성 베네딕토(480?~547)에 얽힌 일화가 떠오른다. 성인을 시기한 누군가의 음모로 독이 든 빵을 먹을뻔했을 때, 까마귀가 빵을 물고 가버려 성인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베네딕토 성인의 이콘과 그림 속에 까마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거룩한 향기 가득한 내부 1층 하늘정원에서 경당으로 향하는 길. ‘선’과 ‘빛’, ‘그림자’의 조화를 꾀했던 건축가의 의도대로 우측 창틀이 만든 그림자의 선들이 경사로를 장식한다. 아래로 향하는 경사로는 지하무덤으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설계했다. 창밖으로는 추모벽이 보인다. 수도원에 머물다 세상을 떠나게 될 분들의 이름을 새길 곳이다. 아프리카에서 구해 제작한 육중한 나무문을 당기자 12m의 높은 천장 끝까지 거룩한 향기가 가득한 공간이 나타난다. 경당이다. 제대 오른쪽 십자고상은 최종태(요셉) 작가의 작품이다. 그 주위로 열두 사도를 뜻하는 사각형의 붉은 빛들이 세상으로 퍼져나가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 고상 아래 감실을 둘러싼 붉은빛은 그리스도께서 성혈로서 늘 존재하심을 상징한다. 돌아온 탕자가 새겨진 감실은 수도원 금속공예실 작품이다. 왜관수도원 유리화 공예실에서 만든, ‘선’을 강조한 은은한 빛깔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경당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나무 제대와 의자 등은 수도원 목공소에서 제작했다. 센터 내 대부분의 가구는 수도원 목공소에서 만든 것이다. 파이프 오르간은 독일에서 기증한 연습용 악기로 마치 경당의 구조에 맞춰 만들어진 것처럼 공간과 조화롭게 들어서 있다. 센터 1층에는 벽면 가득 망치가 전시된 ‘망치실’도 있다. 한 환경 운동가가 모아 기증한 것인데, 수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는 모토와 잘 어울린다. 센터 와 하늘다리로 연결된 마오로관은 1957년 지어진 건물을 센터 건축 때 함께 리모델링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천장을 뜯어내니 지붕의 잘 짜여진 목재 구조가 나와 그대로 보존하고 노출했다. 피정 강의가 주로 이뤄지는 마오로관 대강당은 수도원의 은인 고(故) 구상(요한 세례자) 시인과 그의 친형 하느님의 종 구대준(가브리엘) 신부의 이름을 따 ‘구상·구대준 홀’로 불린다. 센터 곳곳에 자리한 하삼두(스테파노) 화백의 작품은 수도자들의 기도 준비 모습이나 성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이 묘사하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 속 수도자들은 2차원의 경계 안에 있지만, 실제로 수도원 대성당에서 만난 수도자들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일하고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모두 경건하며, 현실과 그림 사이의 경계마저 흐려진다. 그렇게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그날, ‘마지막 때’를 묵상하며 나는 경계 위의 집을 나선다. ■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 피정 안내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는 기도 안에서 쉼과 영적 풍요를 선사하는 다양한 피정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 배우기 피정’을 비롯해 성모승천·성탄·부활 등 전례 시기 맞춤 ‘전례피정’도 열린다. 5~11월에는 ‘한Ti 가는 길’, ‘군위 사유원과 함께하는 문화 피정’, ‘가을 문화 피정’도 마련된다. 여름에는 ‘수도 생활 배움 피정’이 열리며, 6~9월에는 평화의 참된 의미를 배우는 ‘평화 학교’가 열린다. 이 외에도 본당이나 각 단체에서 위탁이나 자체 피정을 진행할 수 있고, 휴식형 개인 피정도 가능하다. 숙소는 1인실과 2인실이 있다. 피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순례 길잡이 - 주소: 경북 칠곡군 왜관읍 관문로 61 - 문의: 010-6791-0071 센터 사무실 - 홈페이지: http://osb.or.kr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의정부교구 양주 순교성지

이스라엘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제외하면, 성지들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순교 터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의정부교구는 조선시대 경기도 일대를 관할했던 양주 관아에서 피로써 믿음을 증거한 무명 순교자 5위의 순교지를 확인했다. 2016년 성지로 선포된 뒤 올해 9월 20일 성당 봉헌식을 마치며 더욱 거룩한 순교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한 양주 순교성지(담당 최민호 마르코 신부)를 찾았다. 순교자의 선혈을 품다 양주 순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다섯 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다. 「치명일기」에 따르면 1866년 김윤오(요한)와 권 마르타 부부, 그리고 김 마리아, 박 서방이 순교했고, 1868년에는 홍성원(아우구스티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교구는 여러 증언을 통해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던 땅을 찾아냈다. 볼거리가 풍부한 양주별산대놀이마당과 양주향교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서면, 검붉은색을 띤 아담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양주 순교성지다. 이는 순교자의 선혈을 상징하는 색으로, 순례자의 집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9월 20일 봉헌된 ‘천국 가는 길’ 성당의 외벽은 모두 같은 색이다. 야외 제대 너머 성모 동산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6개의 물동이 항아리 ‘기도 전구함’이 순백의 성모상을 둘러싸고 있다. 이 항아리들은 수원교구 용인 고초골공소에서 가져온 것으로 성당 건축 당시 성인의 유해 대신 기도 카드를 담아 제대 아래 봉헌됐다. 성모상 옆에는 특별 제작된 컵 초가 놓여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까지의 3일, 즉 72시간 동안 탄다.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컵 초에는 기도 지향이 담겨 있어, 천상의 제단으로 피어오른다. 십자가의 길은 산화철로 만든 단순하면서도 큼지막한 형태로, 각 처에는 고초골공소에서 가져온 항아리가 자리해 숫자를 표시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15처까지 있어 두 팔 벌린 영광의 예수님도 만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꽃길이라는 의미로 사철 피는 꽃도 함께 심어놨다. 성지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순례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특히 매일 오후 3시에는 최민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한다. 성지 입구 순례자의 집은 순례자들의 휴식 공간이다. 수십 가지 다양한 성모상과 벽면을 모두 차지한 십자가의 길 수묵화가 눈길을 끈다. 힘찬 필치의 수묵화는 석창우(베드로) 화백의 작품이다. 희생과 인내 끝에 다다를 목적지 ‘천국 가는 길 성당’은 성지의 중심에 자리한다. 성당 외관 정면에는 순교자들이 옥에서 썼던 ‘목칼’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다소 두려울 수 있는 고문 도구를 표현했지만, 성당은 그 너머의 희망을 드러낸다. 조형물은 십자가의 길과 같은 산화철이다. 칼 아래는 고난을 넘어 거룩한 내면으로 들어서는 ‘순교의 문’이 있다. 건물 전체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형태를 띠도록 설계되었다. 양옆에는 제의방과 경당이 자리한다. 지붕은 스페인에서 들여온 석재를 층층이 쌓아 ‘천국의 계단’을 형상화했다. 성전에 들어서면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의 <양주 순교성지 성화>를 마주한다. 이 작품은 성당 설계의 바탕이 된 그림으로, 하늘로 오르는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하단에는 골고타 언덕의 바위가, 좌우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다. 그 안쪽으로 올리브나무 가지를 밟고 천국으로 오르는 순교자들이 표현돼 있다. 송이송이 피어난 작은 꽃들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상징한다. 한가운데는 이곳 양주 순교성지가 있고, 순교자들이 썼던 칼 역시 그려져 있다. 성당 중앙에는 ‘천국의 문’이 영롱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품고 있다. 요한묵시록 21장 21절의 “열두 성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있다는 구절을 형상화한 것이다. 상단에 놓인 열두 개의 연노랑 유리는 진주처럼 반짝이며 천상의 문을 상징한다. 방주에 실려 엿본 하느님 나라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룩한 공간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세속과 구분된 이곳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내부는 마치 커다란 배 안에 들어온 듯 아늑하면서도, 하얀 대리석과 따뜻한 목재의 조화가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실제로 성당 내부는 노아의 방주를 묘사했으며, 순백의 제단 부분은 ‘예수 부활 성당’을 본떠 예수님이 운전하는 ‘천국 가는 배’를 나타낸다. 좌석은 총 144석으로, 요한 묵시록(7, 1-8)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 중 뽑힌 14만4000명을 상징한다. 12와 12를 곱한 수가 그 의미의 바탕이다. 12는 곧 열두 제자를 뜻한다. 그래서 각 의자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문양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첫 줄의 문양은 성 베드로를 뜻하는 ‘천국과 지상의 열쇠’다. 제대 뒤 감실에는 성모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를 감싸는 벽은 성령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졌다. 이곳은 최후의 만찬이 열린 장소이자 성령이 강림했던 ‘다락방’을 상징한다. 야외 제대 뒤 성모상을 떠올리게 하는 배치다. 또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담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돼 있다. 성당 안에는 꼭 들러야 할 비밀 공간이 있다. 왼편 경당이다. 천장이 비스듬히 낮아지도록 설계된 경당에 들어서면 동굴 같은 엄숙함이 감돌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천장에 새겨진 삼위일체 부조의 위엄 있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성부의 손, 성자의 성체, 빛이신 성령이 벽의 경계를 넘어 순례자에게까지 흘러든다. 경당 오른쪽 벽에는 한국교회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해 세계 유명 성인과 가경자 최양업 신부 등이 그려진 유리화가 빛을 발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다. 제대 왼쪽에는 성모상과 기도 초, 기도 카드가 고요함 속에 봉헌돼 있다. 성당과 경당 구석구석 스테인드글라스, 유리화에는 최성호(루카) 작가의 손길이 닿아있다. 다시 천국 가는 길 성당의 ‘천국의 문’과 ‘순교의 문’을 차례로 나선다. 목숨 바쳐 하느님을 증거했던 순교자들 덕에 하느님 나라를 살짝 맛본 환희의 마음을 안고. ◆ 순례 길잡이 - 주소: 경기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 62 - 미사: 매일 오전 11시(월요일 제외) 십자가의 길과 하느님 자비의 5단 기도: 매일 오후 3시(월요일 제외) - 문의 : 031-841-1866 성지 사무실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원주교구 풍수원성당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횡성의 경계인 도덕고개를 넘자, 강원도 첫 마을 ‘풍수원(豊水院)’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호원이나 조치원, 신례원, 이태원처럼 ‘원’(院)을 품은 곳은 예로부터 관원이나 나그네가 말을 세워놓고 쉬어가던 장소였다. 풍수원 또한 강원에서 한양으로 혹은 한양에서 강원으로 향하던 이들이 하룻밤 머물거나 잠시 숨 돌리던 고장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박해를 피해 피난길에 나선 신자들이 풍수원에 정착한 것은 220여 년 전 일이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경기도 용인에 살던 복자 신태보(베드로)를 비롯한 40여 명이 당시 깊은 산골이던 이곳에 터를 잡아 교우촌을 이뤘다. 그리고 80여 년간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성당 초입에 ‘1888년, 유적지 풍수원성당’이라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 새겨진 그해 프랑스 선교사 르메르(Le Merre,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해 초가집 여러 채를 이은 ‘초가 사랑방’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본당 역사의 시작이다. 당시 본당은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는 12개 군 29개 공소에 신자 수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입구를 지나 오르막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정면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걸음이 빨라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붉은색 벽돌 옷 입은 성당이 한 뼘씩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솟은 뾰족탑과 십자가, 붉은색과 회색 벽돌이 어우러진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성당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자리에 다다랐다. 성당과 어우러진 느티나무의 푸르름. 그리고 나무 그늘에서 묵주기도를 봉헌하며 미사를 기다리는 신자들. 늦여름 순례자의 눈앞에 펼쳐진 성당 마당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우리가 ‘옛 성당’ 하면 떠오르는 바로 이런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본당 역사를 이야기할 때 본당 2대 주임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896년 강도영(마르코)·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와 함께 한국 땅에서 처음 사제품을 받았다. 정 신부는 수품 후 곧바로 본당에 부임해 1943년 선종할 때까지 47년간 이곳에서 사목했다. 정 신부는 자신의 돈과 신자들의 헌금으로 초가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남녀 불문하고 신자 모두 힘을 보탰다. 중국인 목수 진 베드로와 함께 서양식 벽돌을 굽고 벽을 쌓았다. 그리고 착공 1년 만에 한국인 사제가 지은 첫 서양식 성당이자 강원 최초의 성당이 하느님께 봉헌된다. 좌우 기둥과 아치형 천장이 조화를 이루는 성당 내부는 아늑하고 정겹다. 옛 모습 그대로인 ‘십자가의 길’이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는 은은한 빛을 쏟아낸다. 미사에 앞서 묵주기도가 봉헌된다. 성당과 한 형제처럼 벽돌 옷 입은 사제관은 성당 뒤편에 있다. 1912년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역사관으로 사용된다. 본당 설립 당시 사용했던 촛대와 십자가, 성합, 기도서를 비롯해 밭에서 발견된 제작연대 미상의 예수성심상, 정규하 신부가 사용하던 책상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성당 왼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커다란 예수성심상 곁에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숲이 선사하는 싱그러운 공기와 어우러진 호젓한 등산길. 이철수 판화가가 표현한 예수님 수난 장면을 한 처 한 처 묵상하며 오르다 보면 묵주동산에 다다른다. 땅에 묻힌 축구공 크기 묵주알을 하나하나 지나며 성전에서 미처 하지 못한 성모송을 봉헌한다. 묵주동산을 지나 내려오면 넓은 광장 곁으로 유물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옛 농촌의 일상에서 쓰이던 농기구와 민속품뿐 아니라 본당 설립 초기 사용하던 성광과 성합, 제병기, 정규하 신부가 사용하던 병자성사 가방, 십자가 등 신앙인들의 자취가 서린 유물도 만날 수 있다. 유물전시관 옥상에 옹기 100여 개가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그 너머로는 가마터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옹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박해시기 풍수원 교우촌의 모습이, 가마터에서 벽돌을 굽고 어깨에 지고 나르며 하느님 집을 짓기 위해 비지땀 흘렸을 옛 신자들의 헌신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다. 저 옹기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며 기도했을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며 성당을 나선다. ◆ 순례 길잡이 -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 미사: 주일 오전 11시(토 오후 7시) / 화~토 오전 11시 - 성체 현시: 화~금 오후 1시30분~2시30분 - 문의 : 033-342-0035 본당 사무실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제주교구 ‘이시돌길2’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가톨릭 성인은 누구일까? 바로 스페인의 농부 출신 성 이시도르(1070~1130경)일 것이다. 한림읍 금악리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성이시돌목장을 시작으로 성지와 피정 센터 등이 조성돼 많은 사람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교구 순례길인 이시돌길 또한 이 일대 총 33.2km에 3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1코스는 성이시돌성지를 한바퀴 돌며, 2코스는 성이시돌센터 전시관에서 조수공소까지이고, 이어 3코스는 고산성당에서 마친다. 이중 성당과 오름 등 자연과 문화가 조화된 이시돌길2 11.8km를 나섰다. ‘푸른 눈의 돼지 신부’를 기리며 파랗게 펼쳐진 성이시돌목장 너머로 한라산이 구름에 겹겹이 싸여 어렴풋이 보인다. 이시돌길2 시작 지점인 성이시돌센터로 가기 위해 맥그린치로를 걷는다. 명예도로명인 맥그린치로 양옆으로 시원하게 가로수가 뻗어있다. 수의학을 전공한 아일랜드 출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임피제 신부(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1928~2018)의 이름을 딴 맥그린치로는 금악북로 3.8km 구간이다. 임 신부는 1954년 한림공소에 부임했다. 가난하고 피폐했던 제주에 정착한 임 신부는 양돈과 목축업, 신용 협동조합, 병원과 요양원 등을 통해 제주 경제와 복지 발전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 공로로 5·16 민족상, 막사 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훈장, 아일랜드 대통령 특별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선종 후 명예국민증을 헌정 받았다. 성이시돌센터 앞에는 손을 내민 예수상과, 동물들과 함께 있는 임피제 신부의 상이 차례로 순례자들을 반긴다. 센터에 들어서면 밭을 일구는 성 이시도르의 스테인드글라스 조명을 마주하게 된다. 이어 내부에는 임 신부의 공로를 기리는 공간과 기념품 가게, 카페가 자리한다. 닫혀있지만 열린 곳 성 클라라 수도원은 봉쇄 구역이지만 수도원의 관할인 금악성당은 공개돼 있다. 금악성당은 2025년 정기 희년 전대사 지정 순례지이다. 전대사를 받기 위해 아침 7시 미사를 드린다. 바로 옆 성이시돌피정의집에서 온 순례자들도 눈에 띈다. 의자에 앉아서 제대 위의 성 다미아노 십자가를 바라본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는 아시시 성 클라라 대성당에 원본이 있다. 성 프란치스코(1181/1182?~1226)가 이 십자가가 있던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하던 중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성당 안 좌우 벽에는 물결치는 나무 살 사이로 단순하면서도 따뜻한 터치의 ‘십자가의 길’ 유화가 걸려있다. 그 위로는 자연광이 들어오는 맑은 천창이 있고, 흔치 않게 하단 부분에 연녹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자리한다. 오늘 미사는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 이어돈 신부(리어던 마이클 조셉·성골롬반외방선교회) 주례다. 이 신부는 강론에서 “요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죠? 순례자들은 ‘비가 오지 마라’, 농민들은 ‘비가 와라’하면 하느님은 어떡하시라고”하더니 “비가 밤에만 오면 되나?”라는 현답을 내린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선다. 성당의 곡선과 직선 그리고 푸릇한 자연과 회색빛 벽돌이 오묘하게 조화롭다. 오른쪽에 일자로 솟은 종탑 상단에도 성 다미아노 십자가가 보인다. 노란 서양금혼초가 가득한 풀밭 위 최종태(요셉) 작가의 예수성심상이 특유의 따뜻한 모습으로 성당을 마주 보고 있다. 잠시 묵상한 뒤 이어지는 순례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또 다른 시작 앞에서 신창본당 소속 조수공소로 가는 길에 금오름이 있다. 울창한 숲 안으로 슬쩍 들어가 본다. 출발 지점에 ‘희망의 숲길’이 조성돼 있다. ‘희망’이 주제인 이번 정기 희년과 잘 어울려 발걸음이 가볍다. 정상에 오르니 너른 분화구가 펼쳐진다. 탁 트인 풍경을 만끽하다가 세찬 바람에 돌아선다. 이것이 성령의 바람이라면. 걷다 보니 야자수와 돌담 안으로 아담한 붉은 벽돌 건물이 드러난다. 이시돌길2의 종점인 조수공소이다. 공소 건물 옆에는 현무암으로 작게 만들어놓은 동굴 안에 야외 제대와 루르드 성모상이 각각 모셔져 있다. 안내 리플릿에 보니 ‘야외 성모상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작은 성모상이 있다’고 돼있는데 찾지 못해 아쉽다. 공소에 딸린 사택은 사전 신청 시 개인 피정으로 사용 가능하다. 이곳은 끝이 아닌 이시돌길3의 시작이다. 우리 인생 순례의 마지막 순간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의 시작이듯이. 주님을 따라 걸으며 잠시 숨을 골랐던 쉼표를 뒤로 하고, 다시 인생 순례로 발길을 내디딘다. ◆ 순례 길잡이 - 제주교구 이시돌길2(santoviaggio.com) - 성이시돌센터 :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53 - 금악성당 :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20 - 미사 : 월, 금~토(오전 7시), 화~목(오후 12시), 주일(오전 11시) - 조수공소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조수2길 10 - 미사 : 주일(오전 8시 30분)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합덕성당

서해안고속도로 송악나들목을 나와 충남 내포(內浦)의 너른 평야를 달린다. 11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솔뫼성지 방문 이후, 이곳 내포는 교황 방문 성지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솔뫼와 신리, 여사울 등 천주교 성지를 알리는 입간판들이 교차로마다 세워져 있는 걸 봐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말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전교로 싹튼 ‘내포교회’는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이자 신앙 못자리라 불린다. 초기 조선교회 어느 곳보다 많은 신자가 공동체를 이뤄 신앙생활을 했고 때문에 신해박해(1791년) 이후 무진박해(1868년)까지 크고 작은 박해마다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성직자 대부분도 이곳 내포를 터전으로 활동했다. 합덕삼거리에서 신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농촌의 여느 풍경과 전혀 다른 이국적인 모습. 대전교구 합덕성당이다. 내포가 한국교회 신앙 못자리라면 합덕성당은 내포교회의 중심이다. 그 수식어를 대변하듯 성당은 내포의 너른 평야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아담한 성모동산이 ‘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라 새겨진 비석과 어우러져 순례자를 맞이한다. 합덕본당의 역사는 1890년 충남 예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본당’(현 예산 양촌공소)이 설립되며 시작됐다. 이후 1899년 현재 자리로 성당을 옮기면서 본당 이름을 합덕으로 바꿨다. 현재 성당은 제7대 주임인 필립 페랭(Philippe Perrin, 백문필 필립보) 신부가 1929년 세운 것이다. 계단 맨 위 예수성심상과 하늘 높이 뻗은 두 개의 첨탑이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아름답다. 두 첨탑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한 순례자는 두 첨탑이 마치 하늘 향해 두 손 뻗은 기도 손이라 표현했는데 직접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성당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는 말씀 그대로다. 제대까지 줄지어 선 회색 기둥이 아치형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성가정을 주보로 모신 성당답게 제대 뒤에는 ‘성가정화’가 십자고상을 대신해 걸려 있다. 1930년대 당시 본당 주임이던 페랭 신부의 사촌이 그린 것이다. 좌우 스테인드글라스의 은은한 빛 머금은 성화를 마주하며 자리에 앉는다. 제대 우측으로는 성 김대건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와 페랭 신부의 유품인 십자가가 모셔져 있다. 성당을 나서 골고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옛 사제관 건물 뒤로 돌아가면 황석두(루카) 성인, 그리고 한국전쟁 때 순교한 페랭 신부, 총회장 윤복수(라이문도), 복사 송상원(요한)의 순교비와 봉분이 14처 곁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합덕에서 30년째 사목하던 페랭 신부는 신자들의 피난 권유에도 “내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며 성당에 남아 있다가 8월 14일 고해성사 중 인민군에 체포됐다. 그때 곁에 있던 윤복수와 송상원 또한 자신들은 신부님을 모시는 사람들이니 “신부님과 함께 갈 것”이라며 페랭 신부를 따랐다. 체포 한 달 후 페랭 신부는 대전 목동에서 두 평신도는 당진에서 순교했다. 이들은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속해 있다. 넓은 잔디마당의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성당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푸르름을 뽐낸다. 고목(古木)만큼이나 오랜 세월, 합덕성당은 이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해 냈다. 본당 출신 사제·수도자만 100명을 넘는다. 내포 순교자들의 신앙 열정이 이곳 합덕 사람들의 면면으로 이어져 결실을 이룬 것이다. 본당이 한국교회 ‘성소의 못자리’라 불리는 이유다. 미사를 마친 할머니들이 하나둘 교리실로 모인다. 레지오 회합을 위해서다. 지팡이와 보행기에 의지하는 불편함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둘 모인 할머니들이 성모님 곁에 촛불 밝히고 묵주기도를 봉헌한다. 할머니 한분 한분의 정성 담긴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합덕성당의 지금,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게 했음을 마음에 새긴다. 성가정의 어머니 성모상 바라보며, 할머니들처럼, 성모송을 봉헌한다. ◆ 대전교구 합덕성당 - 주소 :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 미사 : 주일 미사(오전 6시·10시, 토요일 오후 5시) 화 오후 5시, 수~금 오전 10시 - 문의 : 041-363-1061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구대교구 성모당

대구시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을 지나면 114년 역사를 간직한 대구대교구청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의 낮고 짧은 오르막길을 오른다. 언덕에 다다르니 평일에도 많은 신자들이 모여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열심히 바치고 있다. 동네 어르신부터 먼 곳에서 온 순례객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바로 대구대교구 성모당이다. 기도가 이뤄지는 곳 성모 발현지로 잘 알려진 프랑스 루르드 성모 발현 동굴의 크기와 바위 모양을 본떠 지은 성모당은 대구대교구 제1주보 ‘루르드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기도하는 곳이다. 대구대교구 신자뿐 아니라 타지역 신자들도 많이 찾으면서 한국교회 신앙의 요람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특별한 은총으로 시작된 장소라는 사연도 한몫한다. 성모당은 설정 당시 아무것도 없던 대구대교구가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운 곳이다. 1911년 4월 8일 한국교회에 대구대목구(현 대구대교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6월 26일 부임한 플로리앙 드망즈 주교(Florian Demange·한국명 안세화·1875~1938). 황무지 같은 임지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성모께 모든 것을 의탁하기로 결심한다. 교구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주교관(교구청사) 건축 ▲신학교 설립 ▲주교좌성당 증축 등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세 가지 소원을 성모께 서원하고, 이 모든 것이 이뤄지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성모동굴(성모당)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모든 사업이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서원 2년 만인 1913년 주교관 건축이 이뤄졌다. 1914년에는 성유스티노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주교좌계산대성당 증축에는 난항을 겪었다. 그러던 중 계산본당 보좌 소세 신부(Hippolytus Saucet·한국명 소세덕·1877~1921)가 중병을 앓아 임종 직전에 이르렀다. 드망즈 주교는 성모께 ‘소세 신부를 낫게 도와주시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당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기적처럼 소세 신부가 건강을 되찾자 드망즈 주교는 1917년 7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918년 10월 13일 성모당을 봉헌했다. 성모당 윗부분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이라는 글귀는 191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께 바친 서원이 1918년 이뤄졌음을 뜻한다. 전대사 은총 받는 성모 순례지 성모당에는 1973년 5월부터 성모의 밤 행사가 열리면서 전국적인 성모 신심의 중심지가 됐다. 지금도 매년 5월 성모 성월이면 본당별로 성모의 밤 행사가 열린다. 한국을 찾은 콜카타의 성 마더 데레사 수녀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각각 1981년과 1984년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대구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됐다. 성모당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성모 순례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안장되면서 더 잘 알려진 로마 성모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과 성모당이 2009년 영적 유대를 맺으면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는 로마 성모대성당을 순례했을 때와 동일한 영적 은총이 주어진다. 그러나 신자 대부분은 전대사를 목적으로 성모당을 찾진 않는다. “시간 날 때마다 여기 와서 성모님께 제 잘못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제 기도를 전해주십사 부탁드려요.” “마음이 정말 편안해져요. 가슴에 쌓아둔 상처와 고통도 여기에 오면 한결 편해지는 걸 느낍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와야 하지만, 그래도 자꾸 오고 싶어 자주 와요. 왠지 여기에서는 성모님께서 제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 기분이랄까요?” “날씨 좋을 때 여기 만 한 곳이 없어요. 그런데 눈과 비 올 때도 운치 있고 좋아요.” 각자 다른 사연으로 성모당을 찾지만, 편안함과 영적 위안을 위해 성모께 기도하는 마음은 같았다. ◆ 순례 길잡이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로4길 112 - 미사: 월~토 오전 11시 - 고해성사: 월~토 오전 10시~11시20분 - 문의: 053-250-3055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3면

[성모 성월 특집] 베트남 짜끼우 ‘성모발현 성당’을 가다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 성모성월을 맞이해 베트남 주교회의 인준 성모 발현지인 짜끼우를 찾았다. 베트남 정부는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에 걸쳐 교회를 박해했다. 베트남 교회는 박해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오며 짜끼우와 라방을 성모 발현지로 인준받았다. 그중에서도 짜끼우는 성모님이 발현해 박해를 물리친 역사가 있는 베트남의 성모 신심을 대표하는 지역이다. 짜끼우 성당과 성모동산을 걸으며 짜끼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발현하신 성모님 19세기 후반 베트남 정부는 프랑스 식민 통치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다. 당시 베트남 중부 꽝남(Quảng Nam) 지방의 작은 마을 짜끼우에는 브루이에레 신부가 사목하고 있던 작은 성당이 있었다. 박해가 거세지던 1885년 9월 반탄(Văn Thân)군은 성당을 공격하려고 사방을 둘러쌌다. 신자들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적으로도 밀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브루이에레 신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성모님께 기도해달라고 당부했다. 반탄군과 맞서 싸우던 청년들을 제외하고 본당의 노인, 여성, 어린이들은 성모송을 외우며 성모님께 전구했다. 저항이 지속되던 중 반탄군은 성당에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때 성당 꼭대기에 하얀 옷을 입은 성모님이 발현하셨고 반탄군의 대포가 모두 빗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반탄군은 코끼리 부대를 동원했지만, 성모님과 희고 빨간 옷을 입은 1000여 명의 아이들이 그들을 향해 오자 코끼리들이 겁에 질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본 반탄군은 사기가 꺾여 공격을 멈췄고, 성당과 신자들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군인과 주민들의 증언 덕에 짜끼우에 성모님이 발현하신 일이 널리 알려졌다. 베트남 교회는 성모님의 발현 덕분에 열악한 상황에서 반탄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짜끼우를 성모 발현지로 인준했다. 1898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짜끼우성당을 지어 ‘믿는 자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봉헌했다. 다낭교구 성모신심의 중심지로 발돋움 현재의 짜끼우성당은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성당 제대에 있는 성모상과 감실은 기존 모습이지만 신자 수가 늘어나 단층 삼각 지붕에서 2층 성당으로 증축됐다. 성당 전면에는 성모님이 발현하셨을 때의 모습을 본뜬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왼편에는 ‘이곳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1885년 9월 10일과 11일)’라는 문구가, 오른편에는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라는 짜끼우 성모님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 아래는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상이 있고 양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성전으로 이어진다. 하얗게 칠해진 성전 안에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왼쪽 벽면에는 대형 묵주와 성모상이, 오른쪽 벽면에는 요셉 성인상이 보인다. 요셉 성인상 왼편에는 자비의 예수님상이 놓여 있다. 성전 오른쪽으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성직자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초대 다낭교구장인 팜 응옥 찌(Phạm Ngọc Chi) 주교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성당을 떠나기 전 기나긴 박해를 견뎌온 베트남 교회를 위해 묘역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짜끼우성당을 나와 10분간 걸어 성모님의 발현을 기념해 지은 짜끼우 성모동산에 도착했다. 1971년 당시 교구장이었던 팜 응옥 찌 주교는 짜끼우를 다낭교구의 성모 신심 중심지로 인정했고, 매년 5월 31일 짜끼우에서 전국 규모의 성모 대회를 열고 있으며, 매년 10만 명이 넘는 순례객들이 방문해 순례한다. 베트남 교회의 믿음 보여주는 자리 성모동산은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악을 물리치는 미카엘 대천사상을 볼 수 있다. 그 뒤로는 경당이 있는데 마리아의 ‘M’자를 형상화한 지붕과 종탑 가까이에 걸어져 있는 묵주가 있다. 경당 내부 성모상 아래에는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경당을 나오면 ‘치유의 물’이 솟는 야곱의 우물과 그 양쪽에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성모님 발현 재현 기념탑 왼편에 소성당이 있다. 맞은편 십자고상 앞에서 잠시 묵상하고, 소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소성당은 베트남 성당 건축 특징 중 하나인 성전 양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조성돼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는 성당에 앉아 조용히 성체조배를 하는 신자도 볼 수 있었다. 경당에 앉아 짜끼우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의미를 되새기며 순례를 마무리 지었다. 짜끼우는 오랜 박해의 세월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베트남 교회의 역사이자 신자들의 믿음이 담긴 장소였다. 오늘날에도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딘가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이들에게도 그 메시지가 닿기를 기도한다. ※ 순례 문의 가톨릭신문투어(http://www.cttour.org)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2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성당

유명 가톨릭 미술가 작품 가득한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 화강암 성당과 중정·회랑·잔디마당 어우러진 기도의 장소 6·25전쟁 순교자 묘역은 2017년 성지로 선포 북한강과 나란한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 시내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회벽돌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이다. 성당은 예전 그대로 약사리고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지만 주변은 변화가 있었다. 2013년 성역화 사업으로 성당 앞은 중정과 회랑이 조성됐다. 교구의 얼굴인 주교좌성당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낼 뿐 아니라 신자들이 언제든 찾아와 묵상하고 기도하는 순례의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춘천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엄주언(마르티노, 1872~1955) 회장의 세례명을 딴 말딩회관을 지나 두 팔 벌려 춘천 시내를 아우르는 예수성심상 곁으로 계단을 오르면 아치 너머로 널따란 중정, 잔디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정원 좌우에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봉헌할 수 있는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끝에 한국교회 석조성당의 대표작이라 할 죽림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건축 역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궤를 같이한다. 죽림동본당은 1949년 엄주언 회장을 비롯한 신자들과 당시 본당 신부였던 토마스 퀸란 주교(Thomas F. Quinlan, 한국명 구인란)가 마련한 현재 자리에서 성당 건축의 첫 삽을 떴다. 그런데 외벽을 쌓고 동판 지붕까지 얹는 공사까지 마무리한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성당을 지키던 성직자들은 미사 도중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공습으로 성당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공사는 중단됐고 전쟁 중 이 터에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수녀들이 주민들을 돌보며 식량을 나눠줬다. 결국 성당 공사는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1953년에야 마무리됐고 1956년 6월 성당 봉헌식이 거행됐다. 대대적인 보수공사(1998년)를 거친 성당은 2003년 6월 25일 근대 건축 유산 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됐다. 화강암을 차곡차곡 쌓은 성당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고풍스럽지만, 성당 곳곳에 자리한 성미술 작품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작품이 담은 의미를 새기다 보면 이곳이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회랑의 끝 성당 오른편에 최종태(요셉) 작가가 제작한 예수성심상이, 왼쪽에는 이춘만(크리스티나) 작가가 고(故) 김세중(프란치스코) 작가의 원작을 살려 다시 세운 성모자상이 성당을 보듬어 안 듯 자리하고 있다. 성당을 나드는 청동문도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에 걸린 아일랜드풍의 옛 십자 문양 한 쌍은 강원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전쟁 후 주교좌성당을 건축하는데 힘을 보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업적을 기린다. 문양 아래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생명의 땅 이집트로 가는 장면과 예수의 산상설교 장면이 부조로 표현돼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고 따스함이 묻어나오는 공간. 제대와 감실, 독서대 등 성당 내부의 성물과 좌우의 유리화 등도 모두 내로라하는 가톨릭 미술가들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오전 11시 미사를 앞두고 성당을 찾아 주님과 하나 됨의 시간을 갖는 신자들이 앉아 있다. 성당 뒤편 너른 공간은 지난 2017년 성지로 선포된 춘천교구 성직자·순교자 묘역이다. 이곳에는 6·25전쟁 때 순교해 현재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이광재(티모테오) 신부 등 춘천교구 순교 성직자들이 잠들어 있다. 가장 오른쪽 하느님의 종 프랜시스 캐너밴(Francis Canavan, 1915~1950,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생애를 읽어 내려 간다. # 1950년, 한국말을 배우며 사목을 준비하던 손 신부는 당시 지목구장인 토마스 퀸란 신부와 함께 성당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체포됐다. 다른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수백 명의 전쟁포로와 함께 북한 깊숙이 압송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내몰린 손 신부는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선종했고 동료 성직자들의 손에 의해 차디찬 압록강 변에 묻혔다. 손 신부 곁에는 춘천지목구의 첫 한국인 사제 김교명(베네딕토) 신부, 패트릭 라일리 신부(Patrick Reilly, 라 바드리시오), 백응만(다마소) 신부, 앤서니 콜리어 신부(Anthony Collier, 고 안토니오,), 이광재 신부, 제임스 매긴 신부(James Maginn, 진 야고보) 등 6·25전쟁 중 순교한 성직자들의 생애와 순교 상황 등이 빛바랜 흑백 사진과 함께 안내돼 있다. 현대의 순교자들. 불과 7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아픈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성직자들이 하루빨리 시복시성의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며 묘역 앞에 섰다. 예수성심을 주보로 하는 성당 마당 곁에서 이곳에 잠들어 있는 성직자들이 닮고자 했던 예수성심을 떠올려 본다. 성당 곁 예수성심상 아래 새겨진 글귀를 기도 삼아 봉헌한다.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성심은,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마음 자체이며 온 인류 구원의 중심이자 원천이시다.’ ◆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cafe.daum.net/uf99) -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3 - 문의 : 033-254-2631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4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제주교구 정난주길

# 두 살 배기 아들 황경한을 품에 안은 정난주(마리아)가 유배길에 올랐다. 조선의 유배지 중 가장 멀다는, 중한 죄인들만이 보내진다는 제주로 가야 한다. 경기 마재 양반가 정약현의 딸은 이제 대역죄인의 아내이자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가 됐다. 신유박해의 참상을 알리겠다며 배론에서 백서(帛書)를 썼던 남편 황사영(알렉시오)은 중국으로 가던 편지가 발각돼 처형당했다. 당당히 목숨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남편을 원망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정난주는 품 안의 어린 아들 생각에 한없는 눈물을 흘린다. ‘경한이만은 일생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 마음먹은 정난주는 유배길 뱃사공과 포졸을 매수해 경한을 제주도 북쪽의 작은 섬 추자도 언덕에 내려놓는다. 포졸들은 이후 ‘뱃길에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다’고 보고했다. 아이를 섬에 두고 다시 배에 오르는 길.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어미는 자식과 생이별한 채 노비가 되어 제주 땅을 밟았다. 제주 서남단. 산방산과 모슬봉이 우뚝 솟은 널따란 평야에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성지 진입로 양옆으로 높다란 야자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제주의 성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성지 입구 역할을 하는 아담한 아치형 돌담 옆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성모자상이 순례자를 반긴다. 돌담 안은 소박하고 아늑하다. 아담한 잔디밭 둘레를 십자가의 길 14처가 감싸안고 있다. 정난주의 묘는 잔디밭 너머 커다란 십자가 아래 자리하고 있다. # 제주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정난주는 모진 시련을 믿음과 기도로 이겨냈다. 교양과 학식, 굳은 신심에서 우러난 믿음의 덕으로 ‘서울 할망’이라 불리며 이웃의 사랑도 받았다. 관비를 담당하던 대정의 김씨 집안은 그의 성품을 높이 사 어린 아들을 맡길 정도였다. 김씨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관비 신분인 탓에 추자도의 아들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결국 37년의 길고 긴 유배 생활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던 그는 1838년 병으로 숨을 거둔다. 김씨 집안을 비롯한 이웃들이 모슬봉 북쪽 속칭 한굴밭에 조성한 정난주의 묘는 130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학자들의 확인을 거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된다. 1994년 ‘대정’으로 명명된 성지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새 단장 성역화됐다. 정난주의 묘소 앞 화병에는 누가 가져다 바쳤는지 모를 꽃이 놓여 있다. 매일 정성 바쳐 헌화하는 듯, 작년 이곳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향기가 느껴질 만큼 화사하고 싱싱한 꽃들. 피 흘려 순교하지 않았지만 삶으로 신앙을 증거해 온 ‘백색 순교자’를 기리는 제주 신자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대정성지는 제주교구 순례길(Santo Viaggio) 중 ‘고통의 길’이라 불리는 ‘정난주길’의 출발지다. 이곳에서 모슬포성당에 이르는 총 13.8km의 길에서 추사 김정희의 귀양지,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섯알오름 위령탑, 일본군 군사기지와 격납고 시설이 있는 알뜨르 비행장, 1901년 신축교안 때 순교한 이규석 삼부자의 묘 등 제주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순례길 종점인 모슬포성당 내 ‘사랑의 집’에는 특별한 일화가 있다. 1954년 대정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인 ‘사랑의 집’은 6·25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들이 기초를 닦은 건물이다. 당시 중공군 포로수용소의 설리반(Sullivan, 蘇) 군종 신부는 포로들과 함께 성당 석조 외벽공사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중공군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과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 해서 ‘통회의 집’이라 불리다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자는 뜻에 따라 ‘사랑의 집’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 정난주 마리아 할망의 묘소 앞에서 짧은 기도를 마치고 모슬포성당을 향한 순례길을 시작한다.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의 지붕과 산방산을 곁에 두고 걷는 여정. 묵주를 손에 들었다. 제주의 이른 봄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 순례 길잡이 - 제주교구 정난주길(santoviaggio.com) - 대정성지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 - 모슬포성당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영서중로 22 - 미사 : 토요일(오후 7시30분), 주일(오전 6시30분, 오전 11시, 오후 7시30분)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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