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겠습니다

10년 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 가장 슬프고 가장 아픈 주님 부활 대축일을 보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떤 글도 쓰지 못한 보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뜰에 핀 금낭화가 눈에 들어왔다. 금낭화의 불어 이름은 ‘마리아의 심장’(Coeur de Marie)이다. 꽃 모양이 심장에서 피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서 ‘피 흘리는 심장’(영어), ‘눈물 흘리는 심장’(독어)이라 명명했을 것이다.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본 어머니 마리아의 심장에서 어찌 피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세월호 참사 때 많은 사람이 제 자식을 잃은 것처럼 함께 울었다.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수많은 약속이 있었고,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한편에서는 유족들의 피맺힌 목소리에 귀를 닫고 노란 리본에조차 적대감을 표시한다. 불편한 기억들을 자꾸만 지우려는 사람들과 세력에 거슬러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저 피해자로 남아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난을 사회화했다. 다수의 유가족이 국가의 보상금을 거부하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벌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받았다. 그 배상금을 출연해 재단을 세웠고 지난해 11월에는 다른 여러 재난 참사의 피해자들과 연결망을 만들었다. 녹슨 세월호는 진작 인양되었지만 새로운 ‘한국호’는 아직도 진수되지 않았다. 공동체는 점점 파편화되고 개인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지만, 우리 사회는 거기서도 배우지 못했다. 일상의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극도의 경쟁과 효율 추구, 소비와 과시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누군가는 세월호의 기억을 지우려 했을 때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고 해병대 채상병의 죽음이 있었다. 기후 위기와 결합된 재난 참사도 계속된다. 그래도 높은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가장 많이 환기된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그리스도인은 기억의 백성이다. 부활의 증인인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참혹한 죽음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았다. 2000년 동안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기억하고 경축한다. 성경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마지막이 아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시작된 예루살렘의 교회, 그 새로운 공동체에 함께 계셨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깊은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나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며 새로운 한국 공동체의 초석을 놓고 있다. 1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오열하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함께 울어야겠다. 금낭화의 서양말 이름처럼 눈물 흘리는 마리아의 마음으로.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21

여기 와서 고개 숙이라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제주 4·3을 알지 못했다. 현 작가는 소설을 출간한 뒤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독재 시절에 이 책은 금서가 되었다. 나라가 민주화되자 대통령이 국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고 4월 3일은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제주의 4·3 평화공원에 가 보면 희생자의 규모와 비극의 강도에 전율하고 유족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극단적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정권이 바뀌자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려 한다.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이루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4·3 유적지 가운데 애월읍 하귀리의 ‘영모원’은 특별한 곳이다. 주민들은 마을 출신 항일운동가와 4·3 희생자, 4·3 및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군인과 경찰을 모두 영모원에 모셔 추모하고 있다. 지난해 평화 순례를 하면서 이곳에 들렀을 때, 화해를 위해 진력해 온 고창선 선생(1935년생)의 증언을 들었다. 4·3의 광풍이 지나간 이후로 하귀 마을은 갈라졌고 고통과 원한에 응어리진 마음으로 수십 년을 살았다. 사정이 비슷한 마을이 제주와 전국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여기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들의 생각이 비석에 담겨 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6·25의 아픔이 한반도에 닥치기도 전에 이 죄 없는 땅 죄 없는 백성들 위에 아직도 정체 모를 먹구름 일어나서 그 수많은 목숨들이 지금도 무심한 저 산과 들과 바다 위에 뿌려졌으니, 어느 죽음인들 무참하지 않았겠으며 어느 혼백인들 원통하지 않았으랴. 단지 살아있는 죄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마음들은 또 어떠했으랴.” 비석을 세운 이들은 수많은 무고한 죽음과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기억하면서도 “오래고 아픈 생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고”,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면서 화해를 시도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하귀리 분들은 슬픔과 아픔이 너무 크고 깊어서 용서와 화해 없이는 그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정의를 세우려는 시도만으로는 해결도 치유도 될 수 없다고 믿었을까? 제주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비석 앞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14

라마단 식사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에 해질녘에 먹는 저녁 식사를 ‘이프타르’라 부른다. 낮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조차 마시지 않은 사람들이 저녁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프타르는 보통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하지만 한국에 사는 무슬림들은 유학생이나 이주노동자, 난민처럼 혼자인 경우가 많다. 올해는 이음새 회원들이 라마단 동안 무슬림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식사 준비는 아들 셋과 사는 시리아 난민 어머니 한 분께 부탁했다. 토요일 저녁 전철 역 근처의 한 사무실에서 열린 이프타르에는 시리아, 수단, 모로코, 한국, 일본, 프랑스 국적의 17명이 모였다. 종교간 대화라기보다 이웃의 조금 다른 문화를 만나는 문화 교류에 방점을 둔 시간이었다. 비무슬림 참가자들에게도 가능하다면 한 끼를 금식하고 오도록 권했다. 나의 경우 점심을 먹지 않고 오후에는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갈증을 좀 느꼈지만 견딜만했다. 우리 대부분에게 라마단 식사는 처음이었다. 무슬림들과 한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무슬림 친구들은 우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 우리는 한국어와 아랍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서로의 생각과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고 경청했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압둘와합과 12년 전 열아홉 살의 나이로 한국에 온 압둘라만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 두 시리아 친구 덕분에 아직 한국말이 서툰 수단의 유시프는 아랍말로 자기 얘기를 할 수 있었고 유머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압둘라만의 어머니 루브나 바샤르가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고 안전한 곳에서 함께 모여 식사하고 얘기 나누니 너무 행복합니다. 그런데 고향에서 지금도 고통받고 어렵게 지내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랍어와 영어, 코란과 이슬람 교육 선생님인 그는 우리가 먹은 음식을 이틀 전부터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아 여럿이 싸서 나누었다. 신실한 무슬림 여성 루브나는 헤어지기 전에 그의 글이 실려 있는 책을 한 권 나에게 건네주었다. 제목은 「아랍 무슬림 여성들의 이주 여정에서 만난 오아시스」. 한국이주인권센터가 ‘와하 커뮤니티’의 협조로 펴낸 이 책은 한국에 사는 아랍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국적과 배경이 다른 열 명의 이야기를 단번에 읽으면서 나는 아랍 문화와 무슬림들의 신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올해 라마단이 끝날 무렵에 다시 한번 이프타르 모임을 갖기로 했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루브나의 얘기를 더 들어볼 예정이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좌석을 늘였지만 공지하자마자 인원이 찼다. 이번에 무슬림들을 만나면 ‘앗살라무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고 인사하리라.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07

에이미와 게이코

에이미 미야케는 도쿄의 국제기독교대학 3학년을 갓 마친 여학생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한 사실을 대학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큰 사안으로 다루어지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모르거나 외면하는 과거였다. 엄청난 수치심과 커다란 죄책감을 느낀 에이미는 “젊은 세대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자문했다. 마침 대학생들의 평화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이 있었다. 영국에 가서 과거 일본의 전쟁 포로들을 인터뷰하는 그의 프로젝트도 뽑혀서 100만 엔(약 900만 원)을 지원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를 위해 활동해 온 게이코 홈즈 여사를 제일 먼저 찾아갔다. 1948년 미에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공부한 게이코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영국인과 결혼했다. 미에현의 이루카 구리 광산에서 일하다 사망한 영국군 포로 16명의 기념비를 보았던 이 부부는 뒤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게이코는 1984년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긴 애도의 시간을 보내던 중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는 영국 포로의 비석이 있던 자리가 대리석과 꽃으로 단장된 것을 보고 감동했다. 게이코 홈즈는 영국 극동 전쟁 포로의 연례행사에 참석했고 1992년 26명의 전쟁포로와 두 명의 미망인을 데리고 이루카 (현재명 아타야)의 추념식에 갔다. 일본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 사무쳤던 이들은 주민들이 가꾸어 온 기념공원을 보았고 50년이 흐른 뒤에 그들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았다. 치유의 시작이었다. 에이미는 영국인 전쟁포로와 억류 민간인, 가족 등 200명이 참석한 ‘평화와 우정’ 모임에도 갔다. 거기서 만난 20명을 영국 각지로 찾아가 인터뷰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게이코 홈즈가 만든 단체인 ‘아가페’와 함께 일본으로 화해의 순례를 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가 일본인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에이미는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사죄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일본인이 사죄해도 금방 용서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에이미는 잘 안다. 그는 상대가 용서하지 않고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는 7월 에이미는 네 명의 친구들과 다시 영국에 간다. 학생들이 인터뷰할 사람들은 10월에 일본에 오고 이들이 참석하는 ‘화해의 예배’가 도쿄의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열린다. 게이코를 존경하는 에이미가 영국 다음으로 한국에 와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서로 연락하기로 했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3-31

메가와티와 대현동

인도네시아 배구 선수 메가왓티 퍼티위(등록명 메가)가 큰 인기다. 메가 선수는 2023-2024 시즌 여자 프로배구 정관장의 아포짓 히터로 활약하고 있다. 첫 경기부터 대활약을 해서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던 그는 뛰어난 실력과 좋은 성격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정관장이 7년 만에 봄배구를 하게 된 것에는 다른 외국인 선수 지아와 함께 메가의 공이 제일 컸다. 동부 자바의 젬버 출신인 메가는 무슬림이다. 그는 한국 배구에서 처음으로 히잡을 쓰고 경기를 뛰는 선수다. 인구 2억의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18살 때부터 히잡을 썼다는 메가는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같이 더운 나라에서도 히잡을 쓴 채 운동을 했지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메가 선수는 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에게 인도네시아 문화도 소개한다. 그가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동료와 나누어 먹는 모습은 영상으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펼치는 그의 활약은 인도네시아에도 거의 실시간으로 알려진다. 덕분에 정관장 유튜브는 프로배구단 최초로 실버 버튼을 받게 되었고 이제 한국말보다 인도네시아 말 댓글이 더 많이 달린다. 메가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자부심이 되었다. 메가가 인도네시아의 손흥민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시즌 3위를 확정한 정관장이 플레이오프에서도 기세를 몰아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승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기대하는 팬들이 많고 충분히 ‘일을 낼 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미 정관장이 더 많은 연봉으로 내년에도 메가를 잡아두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히잡을 쓴 채로 경기장을 누비는 메가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인도네시아 사람이자 무슬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인들과 인도네시아 인들이 관중석에 뒤섞여 함께 응원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한국에는 3만6000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살고 있다.(2022년 통계) 스포츠 중계에서 무슬림 여성의 히잡이 장시간 노출되고 ‘다름’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대구 대현동에서는 이슬람 사원을 지으려는 무슬림 유학생들의 소박한 소원이자 권리가 주민들의 반대로 몇 년째 막혀 있다. 온갖 구실로 사원 건축을 방해하는 불관용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무슬림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거기에 기생한 편견과 혐오를 키워온 한국에서 메가의 존재는 소중하다. 올봄에 메가와티가 팀을 승리를 이끌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고 싶다. 무슬림을 향한 차가운 시선이 멈추고 대현동에 그들의 사원이 세워져 신자들이 기뻐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그들은 우리의 손님이자 이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3-24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경계를 넘어 함께 걷는 사람들

3월초 접경지역 파주와 연천의 강둑과 들판, 산길과 도로변을 ‘생명평화순례’가 새겨진 녹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걸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사와 불교 스님, 원불교 교무가 함께하는 ‘2024년 DMZ 생명평화순례’는 2월 29일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했다. 4대 종단 20여 명이 유동적으로 참가해 400km를 걸어 3월 21일 동해안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 마친다. 전 구간을 다 걷는 사람도 여럿이다. 순례 이틀째인 3·1절에는 임진각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타종과 순례 선언문 낭독 등의 행사도 했다. 이주 노동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평화누리길’을 걸었다. 장파리공소까지 가서 밤을 지낸 순례단은 셋째 날 연천의 백학공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이날 저녁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는 초대를 받은 나는 ‘이음새’ 이사를 맡은 목사 세 분과 함께 가 순례단에 합세했다. 아침 기온이 영하 10℃였지만 오후에는 조금 풀렸다. 걷는 분들 가운데 아는 얼굴도 여럿 보였다. 접경지대를 4대 종단이 함께 기도하며 걷는 것은 처음이라 더 뜻깊다. 총무 역할을 하며 길 안내를 맡은 성공회의 김현호 신부는 “하루 종일 같이 걷고 식사도 함께 하니 옆에서 코 고는 소리조차 정겹다”고 했다. 10년 전부터 철원 접경지대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본인 잇코 스님도 네팔에서 수행 중인 젊은 스님과 함께 전 구간을 걷고 있다. 날이 추워 빨리 걸은 까닭에 예정보다 두 시간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학공소에서 일행은 떼제의 노래를 배우고 바로 기도를 시작했다. 교파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소리가 우렁차고 아름다웠다. 한국어로 독서를 하고 일본어로도 한 대목 읽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미가 4,3-4 참조 공동번역) 기도 한복판에 자리한 긴 침묵의 시간은 종교인들을 더욱 하나로 모아주었다. 우리는 한반도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미얀마, 남수단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화해의 기운이 사라진 지금, 이 순례는 평화의 불씨를 되살려 보려는 종교인들의 기도 수행이다. “종교가 없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참석자는 “대립과 분열의 시대에 4대 종단이 어울려 순례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며 "돌아가면 주위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경계를 넘어 함께 걷는 모습이 그에게는 어떤 설교나 설법보다 더 와 닿았던 것이다.

2024-03-17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돌들의 춤

평일 낮 12시,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해군기지 입구 로터리에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길가 천막에서 미사와 묵주기도를 마친 정선녀 공소회장도 합류했다. 자전거에서 막 내린 미국인 여성 ‘카레’가 오늘도 배낭에서 스피커를 꺼내 발언을 시작한다. “인간띠는 평화의 섬 제주에 폭력적으로 세워진 군사기지를 반대하고, 제주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노래와 춤으로 나누는 자리입니다. (…) 세상 도처에서 전쟁으로 인해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으며 고통받고 있는 무고한 이들에게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하는 자리입니다. 깃발을 들거나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게 다정한 모양으로 모여주세요.” 음악과 함께 일동은 제각기 깃발 하나씩 들고 해군기지 정문 앞까지 걸어가 ‘해군기지 폐쇄하라!’, ‘전쟁을 멈춰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평화운동 단체인 ‘개척자들’의 활동가 ‘아샤’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바로 전날 “집단학살에 더는 공모하지 않겠다”며 워싱턴의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분신한 미국인 아론 부시넬이 남긴 글을 읽었다. 스물다섯 살의 공군 현역이었던 그는 자신의 극단적인 항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에 비하면 전혀 극단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우리는 자문하곤 합니다. 내가 노예제 때 태어났다면 난 뭘 했을까? 짐 크로우 시대 남부에서 태어났다면? 아파르트헤이트라면? 우리나라가 집단학살을 자행했다면 난 뭘 했을까? 답은 바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잠시 묵념한 뒤에 다른 청년 ‘이상’이 한영애의 ‘조율’을 노래했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모두 함께 손잡는다면….”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의 반대운동이 뜨거웠던 강정에 해군기지가 세워지고 여러 해가 흘렀다. 일부는 떠났지만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강정 지킴이’로 남았고 잠깐 왔다가 정착하는 청년들도 계속 생겨났다. 살아있는 평화 교육의 장이 되어가는 강정마을 한복판에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도 있다. 다시 카레의 목소리가 들린다. “더불어 온 세상 생명들이 평안히 살아갈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그 기도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강정댄스를 추겠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셨다. 3월 7일은 12년 전 대규모 경찰력이 투입되고 강정 해안의 거대한 너럭바위 구럼비 발파가 시작된 날이다. 그날도 카레와 아샤, 이상과 공소회장은 해군기지 앞에 모여 연대하는 방문자들과 함께 춤을 출 것이다. 외침보다 훨씬 부드럽고 더욱 강력한 돌들의 춤을.

2024-03-10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우리들의 블루스

다운증후군을 가진 화가 정은혜(마리아)씨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하고 나서 유명해졌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정은혜 화가나 드라마의 우영우 변호사 같은 사람을 주변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줄어든다면 다행이다. 서울 동숭동 노들야학의 ‘노들노래공장’에서는 중증장애인과 발달장애인들이 매주 한 번 모여서 협업으로 노래를 만든다. ‘우리의 노래 우리가 만든다’는 기치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로 하는 것이다. 2022년 2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여기서 만든 노래 45곡의 악보와 활동사진을 담은 노래집이 나왔다. 거기 실린 ‘우리들의 행진’은 이렇게 노래한다. 매주 목요일 우리가 간다 여기 저기로 동네 한바퀴 / 탈시설해서 밖에 나가자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요. / 저상버스 지하철 빨리 타고 싶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너무 오래 했어요. / 그래도 노래 불러요. 우리가 행진하면 세상 바뀐다. 노들노래공장 홈페이지(nonogong.kr)에서는 이들이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를 듣고 악보와 음원도 다운받을 수 있다. 이것은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중증장애인 학생들의 ‘문화예술 활동’, ‘권리옹호 활동’, ‘장애인식 개선 활동’이 맞춤형 노동으로 인정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학생들은 난생처음 ‘일하러 간다’고 남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임금도 받았다. 1년 계약직인 이 공공일자리는 노들야학이 석 달 동안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점거하고 싸워서 노동에서 배제된 장애인 ‘몫의 일부’로 얻어낸 것이었다. 서울시는 올해 이 권리중심 맞춤형 일자리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그 결과 중증장애인 350명과 전담 인력 5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2020년 7월 서울시가 시범사업으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이걸 없앤 것이다. 그래도 노들노래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주 모여 노래를 부른다. 76쪽짜리 노래집이 3만8000원인 것은 이 노래공장의 지속을 위한 홍보와 투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다운증후군 화가 정은혜씨는 부모의 엄청난 노력으로 대학 교육까지 마쳤지만 직장을 찾을 수 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편견 가득한 시선 때문에 시선강박과 조현병을 앓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치유되었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들의 블루스’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뒤, 유리 빌딩의 좀 시끄럽지만 ‘이상하고 멋진’ 노래공장에서 새로운 노래가 계속 들리면 좋겠다. 천재가 아니라도 좋다. 우리 이웃이자 시민인 중증장애인,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만든 노래가 ‘우리들의 블루스’처럼 사랑받게 될 그날을 기다린다.

2024-03-03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착한 사마리아인

의정부 가능동의 주택가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이 있다. 이주민과 난민들이 노동을 통해 생활비를 벌고 새 출발의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장이다. 수단, 이집트, 우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온 여덟 명이 양질의 밀랍초와 아로마초를 만든다. 초 주문이 많지 않은 요즘은 청과 잼, 천연비누도 만들고 있다. 노동 허가도 일자리도 얻기 어려운 난민들에게 이곳은 일터이자 삶을 나누는 공동체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월세가 싼 이 동네에 산다. 수단에서 온 자키와 유시프, 이집트 사람 무하메드는 무슬림이다. 이 젊은이들은 난민 신청을 했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재신청을 하고 심사를 기다리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 오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겼고 삶이 여전히 불안정한 탓에 건강도 좋지 않다. 그래도 여기서 일을 할 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인보 성체 수녀회의 김보현 수녀와 진은희 수녀는 초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이들에게 전수했다. 작업장 바로 앞집에서 주민으로 사는 두 수도자는 골목에서 만나면 영락없는 동네 아줌마다.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난민들이지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려 애쓴다. 가난하고 약한 이의 삶을 체험으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보고 나서 이 일을 시작한 두 수녀는 같은 눈높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수도복을 입지 않아 무시당할 때도 있지만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더 잘 이해하고 그들과 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2014년 1월부터 2023년(5월 말 기준)까지 10년 동안 한국에 온 난민 신청자는 8만5105명이다. 그중 난민 심사 완료자는 절반을 조금 넘는 4만7897명, 난민 지위를 인정한 것은 987명뿐이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2.1%로, 세계 평균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난민과 이주민을 향한 한국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다.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수백만이 난민 생활을 했던 나라이지만 그 기억이 다 사라져서일까? 이곳에서 난민들이 당하는 소외와 냉대는 적지 않다. 의정부에 살면서 주말에 인천과 안산까지 가서 친구들을 만나는 난민 청년들은 고향 음식을 해 먹을 때 제일 즐겁다. 유시프는 일주일 전부터 수단의 가족들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이 크다. 나는 꽃피는 봄에 이 친구들과 함께 걸을 계획을 세웠다. ‘이음새’ 회원들과 이들의 얘기를 들으려 한다. 지난해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은 초 판매 수익을 다른 난민 지원 단체에 장학금과 후원금으로 보냈다. 초를 만들며 내면의 빛을 찾아 밝히는 이 난민들이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주고 있다. 그 선함이 아로마 향처럼 기분 좋게 한다.

2024-02-25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마지막 증언

1945년생 채영희씨는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오늘도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아버지 채병기씨(당시 24세)가 미군정 치하에서 10월 항쟁과 연루되어 잡혀간 뒤로 가족에게 긴 고통과 질곡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12월 초까지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10월 항쟁’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강압적인 식량 공출 정책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다. 그 여파는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로 이어져 엄청난 규모의 희생자를 낳았고,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연좌제의 피해를 입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영희씨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과 이웃의 외면, 경찰의 감시 속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가 큰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재판도 없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후에도 경찰은 그가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내려올지 모른다며 감시와 괴롭힘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끼니때마다 따뜻한 밥을 담요 속에 묻어두고 명절이면 새 옷을 장만해 아버지를 기다렸다. 처절한 아픔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채영희씨는 “아버지라는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성당에 나갔다. 하지만 좌익으로 몰려 죽은 이들과 가족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성직자는 없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지자 그는 조사를 거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족회 활동을 이어갔다. 마침내 2016년 대구시의회에서 ‘10월 항쟁 등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고 2020년에는 학살지였던 대구 가창댐 아래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 채씨는 국사편찬위원회에 긴 증언을 남겼다. 트라우마를 물려줄까 두려워 자녀들에게조차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고령의 유족들이 말하기 시작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적다. 공익단체 ‘이음새’는 봉인된 기억인 유족 이야기를 동영상 시리즈로 제작하고 있다.(유튜브: 이음새_마지막 증언) 우리가 기억하고 공감하는 것은 유족의 트라우마 치유에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편가르기와 진영 논리의 뿌리에는 해방 공간과 6·25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 형성기에 있었던 이 비극은 이념과 정파를 넘어서는 보편 인권의 문제다. 유족 가운데는 보수 정당 지지자도 많다. 10월 항쟁이 역사 교과서에 실리고 아버지들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될 날을 기다리는 채영희씨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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