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깨어 있어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루카 21,34-36 참조)고 자주 권고하신다. 사도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사막 교부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수도승이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이투의 어떤 형제는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경우 매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 “자, 형제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깨어 있음의 의미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깨어 있음의 일차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음은 맑은 정신 상태와도 같다. 바오로 사도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한다. 포이멘 압바도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포이멘 135)라며 정신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내적 자세다. 초기 수도승들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함으로써, 항구히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 내적 깨어 있음(nepsis)은 매사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 무엇을 할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다.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악령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를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혹은 ‘주의’라고 부른다. 깨어 있음과 기다림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즉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복음의 열 처녀(마태 25,1-13) 이야기를 기억한다. 모두 깨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고, 신랑이 왔을 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수도승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사람, 즉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차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깨어 있음과 기도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권고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제 눈이 새벽에 앞서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시편 119,148 불가타역) 또 “한밤중에도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납니다.”(시편 119,62) 이처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금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미티’라고 불렸다. 사막 교부들도 주님과 사도의 권고에 따라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 이것이 수도승 전통을 통해 이어져 온 밤중기도(viglilia)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일어나더라도 쏟아지는 졸음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세상이 잠든 때 깨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마음의 경계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잠뿐만 아니라 불순하고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음은 마음을 늘 순수하게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테오도라 암마는 “우리가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유혹은 사라집니다”(테오도라 3)라고 말한다. 누군가 아가톤 압바에게 “육체의 금욕과 내적으로 깨어 있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요. 육체의 금욕은 잎이고, 내적 깨어 있음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가톤 8) 안토니우스 압바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암자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릅니다.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부 지키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안토니우스 10)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깨어 사는 삶 사막 교부들은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어 있어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깨어 산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매사에 의식을 갖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부들이 말한 ‘내적 깨어 있음’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온갖 헛된 인간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깊이 없이 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내적 자세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늘 내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미혹 속에서 헤맬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내려가라!

우리 스승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이 강생의 신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이 그분을 내려오게 하였고, 당신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게 하였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예수님을 본받고자 전 삶을 투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려 부단히 노력했고 제자들에게도 ‘내려가라’ 권고하였다. 역설의 신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우리가 자신을 낮출 때 높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가장 높은 사람이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타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 가르침은 분명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위로 올라가 남 위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역설의 길,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 남을 섬기는 길로 초대받았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겸손의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임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겸손을 위한 분투 사막 교부들은 겸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겸손은 그들 일상생활의 본질과도 같았다. 그들은 겸손에서 멀어져 교만에 빠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교만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의 제자란 상상할 수 없었다. 온갖 덕에 나아간 사람을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래서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겸손을 위해 분투했다. 어떤 수도승들은 사제품을 주려는 주교를 피해 도망 다니곤 했다. 그들은 늘 초심자로 남아있기를 바랐고 매일 초심자로 시작하려 노력했다. 피누피우스 압바가 대표적이다. 매우 큰 수도원의 연로한 사제였던 그는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열렬히 추구했던 겸손을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몰래 수도원을 도망쳐 신분을 감추고 먼 곳에 있는 다른 수도원에 지원자로 입회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자기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본래의 수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오랫동안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겸손한 삶을 악마의 질투로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에 슬퍼했다.(규정집 4,30.31) 최상의 덕 오르 압바는 겸손을 ‘수도승의 화관’이라고 했다.(오르 9) 7세기 시리아 수도승 이사악은 겸손을 ‘하느님의 옷’이라고까지 하였다. 수도승 전통에서 겸손은 모든 덕의 절정이자 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참된 겸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완덕과 순결의 끝에 도달 할 수 없다”(규정집 12,23)고 말한다. 다음 일화는 교부들이 겸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형제가 ‘당신이 본 환시를 말해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파코미우스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죄인이라 하느님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소. 그러나 무엇이 위대한 환시인지 들어 보시오. 당신이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 그것이 위대한 환시요.’”(「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300쪽) 겸손한 사람은 바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마태 11,29) 닮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지 못한 수도승이나 신앙인은 스승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 겸손은 악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덕이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겸손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다. 악령은 겸손한 자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번은 악령이 칼을 들고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다가와 그의 발을 자르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겸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악령이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두 가지고 있다. 너는 단지 겸손 때문에 우리와 구분된다. 너는 겸손으로 우리를 능가한다.’”(대大마카리우스 35) 카시아누스는 겸손 없이 우리는 어떤 악령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규정집 6,1) 이처럼 겸손은 악령이 범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반면, 교만은 악령이 공격해 들어오는 빈틈과도 같다. 우리가 교만할 때 악령은 우리를 쉽게 공격한다. 악령은 아무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악령의 공격을 심하게 받는다면 하느님께 앞서 나갔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수록 악령은 우리를 더욱 맹렬히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악령의 공격을 피하는 최상의 무기는 교만일 것이다. 순종의 토대 아담은 스스로 올라가려 했기에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쫓겨났다. 교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불순종의 토대라면, 겸손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해주는 순종의 토대다.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겸손과 순종의 길을 가고자 그토록 노력했고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싸웠다. 신클레티카 암마는 “못 없이 배를 만들 수 없듯이, 겸손 없이 구원될 수 없습니다”(신클레티카 26)라고 말했다. 또 테오도라 암마도 “금욕 수행이나 철야 혹은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테오도라 6)고 말했다. 겸손이 구원의 유일무이한 무기인 순종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인간적 성숙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사람의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오래전에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떠나는 날 한 노(老) 신부님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이 죄인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필자가 몸 둘 바를 몰라 “신부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하자, 그분이 말했다. “우리 노인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죄를 지었기에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그분에게서 묻어나는 겸손을 강하게 느꼈었다. 이런 겸손한 모습은 평생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감추어진 삶을 통해 몸에 밴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인격과 언행을 통해서도 이런 겸손이 묻어나온다면,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의 참 제자일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들어라!

현대인의 가장 큰 취약점은 아마도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해 대부분 자기표현이나 말은 잘하지만, 남의 말을 듣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사실 자기 말을 하기보다 남의 말을 듣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공통된 경험이란 생각이 든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오늘은 사막 교부들이 우리에게 주는 ‘들어라!’는 권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압바 요셉이 압바 니스테루스에게 물었다. ‘제 혀를 통제할 수 없으니,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말을 할 때 평화롭습니까?’ 그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원로가 말했다. ‘평화롭지 못하다면 어째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입을 다무십시오. 그리고 대화가 있을 경우, 말하기보다는 경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니스테루스 3) 이 금언은 경청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말이 우리에게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하고 공허한 말은 오히려 내적 고요와 평화를 앗아간다. 우리는 너무도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듣지 못하는 곳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대화와 타협, 화해와 일치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갈등과 대립, 불목과 분열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왜 그럴까? 들음, 대화의 전제 들음은 대화의 전제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참된 대화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받고 주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말을 주는 데, 즉 자기 생각과 의견 혹은 주장을 관철하는데 강조점을 두다 보면 대화는 늘 공전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마찬가지다.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기보다도 끊임없이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참된 기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하며 선행되어야 한다.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듣더라도 잘 들어야 한다. 잘못 들으면 그릇된 응답이 나올 수 있다. 각자 자기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기에 늘 동문서답이다. 잘 듣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침묵과 열린 마음이다. 이 둘은 함께 가야 한다. 아무리 침묵하고 있어도 마음을 닫아걸고 있으면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닫힌 마음을 지배하는 고정관념과 편견, 선입견이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듣지 못하고 건성으로 듣게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것은 참된 들음이 아니다. 들음은 경청이 되어야 한다. 경청은 한자어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귀 기울여 들음’(傾聽)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음’(敬聽)이다. 따라서 참된 들음은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런 경청이야말로 참된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갈등과 대립, 불목과 분열에서 벗어나 평화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들음, 순종의 시작 들음은 순종과 직결된다. 순종이 우리 구원 여정에서 중요한 이유는 침묵에 관한 지난 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듣다’(audire)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유래한 ‘순종’(oboedientia)은 간단히 말해 ‘말을 듣는 것’이다.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은 곧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는 것과 같다. 이처럼 순종은 들음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들은 것을 실행할 때 완성된다. 순종은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다시 그분께 되돌아간다. 이는 곧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에는 바로 사랑이 있다. 따라서 순종의 길은 곧 사랑의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가신 길은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의 길이었고,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는 그분이 가신 이 순종의 길, 즉 사랑의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들음, 제자의 표지 사막에서 ‘들음’은 주로 제자에게 강조된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자였고,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고 명령하는 자였다. 제자는 스승이 하는 모든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다. 스승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순종함으로써 제자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격정을 길들이게 되어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게 된다. 수도승은 ‘듣는 자’다. 이는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제자임을 뜻한다. 그의 참된 스승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래서 늘 듣는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들은 바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늘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 안에 담긴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세상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늘 배우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축적된 자신의 경험으로 말이 많아질 수 있다. 또 남을 가르치려는 유혹을 더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사실 말이 많아지면 추해질 수 있다. ‘나 때는~’이나 ‘꼰대’ 취급받지 않으려면 말을 줄이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말 많은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들음(경청)일 것이다. 들음은 제자의 표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이기를 바란다면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머물러라!

사막 교부들의 금언 모음집을 읽다 보면 ‘독방에 머물라’는 권고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 권고는 특히 사막으로 물러나 수도승 생활을 시작하는 초심자나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수도승에게 주어지는 권고다.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수행으로 간주됐다. 독방에 머무는 수행 누군가 압바 비아레에게 “제가 구원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근심 없이 당신 독방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비아레 1)라고 말했다. 또 구원을 위한 말씀을 청한 형제에게 압바 히에락스도 비슷한 권고를 하였다. “당신 독방에 머무르십시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도록 하시오. 단지 누구에게든 악한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히에락스 1) 독방에 머무는 자체가 마치 구원에 중요한 수단인 듯한 인상마저 준다. 독방을 떠나려는 유혹이 들 때, 원로에게 가서 자기 생각을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권고는 언제나 ‘독방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이런 말이 덧붙는다. “가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일하지 마시오. 다만 독방을 떠나지는 마시오.”(아르세니우스 11) 이 권고에 놀라 또 다른 원로를 찾아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전혀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독방에만 머무르십시오”(파프누티우스 5)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독방을 나가려는 유혹에 대한 원로들의 처방은 한결같았다. 즉 독방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절대 독방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 항구히 머물라는 것이었다. 이 권고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무의미하게까지 들릴 수도 있다. ‘단순히 독방에 머무는 것 자체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왜 그토록 중요한 수행으로 간주하여 권고했을까? 독방에 머무는 이유 이 권고는 사막 인구가 증가하던 시대에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하느님과 홀로 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자기 암자에 은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러 사막에 왔다. 사막에 항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독방의 고독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핵심은 자기 독방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어디서도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방은 그들의 금욕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압바 모세는 어떤 형제가 한 말씀을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가서 당신 독방에 앉으십시오, 그러면 독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입니다.”(모세 6) 그들은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것이 수도승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준다고 믿었다. 독방에 머무는 수행은 정주(定住)와도 관련된다. 정주란 한곳에 항구히 머무는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사랑, 깊은 신앙이 전제되며, 무엇보다도 인내와 끈기가 요구된다. 정주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서약하는 삼대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여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을 통해 하느님을 찾겠다는 약속이다. 사실 여기저기 이식(移植)된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듯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수도승도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곳에 머무는 것은 중요하다. 유혹자와의 싸움 수도승을 독방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적은 아케디아(akedia)다. 이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오는 권태나 지루함, 무기력 혹은 나태라 하겠다. 이레네 하우스헤르에 의하면,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아케디아와 대적하는 데는 큰 용기와 영웅적인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부들은 알고 있었다. 아케디아는 정주에 권태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34~135) 고독과 권태의 버거움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회피하기 위해서 독방 밖으로 나가려는 끈질긴 유혹에 저항하면서 독방에 머무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수도승이 견뎌야 할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외출의 유혹은 강하게 엄습했고 온갖 구실로 다가왔다. 한 형제는 9년 동안 독방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는 매일 떠나기 위해 외투를 준비했고, 저녁이면 “내일 떠나야지!” 하고 말했다. 이튿날엔 “주님을 위해 오늘도 여기 머물러야지!”라고 했다. 9년 동안 이렇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모든 유혹을 거두어 주셨고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같은 책, 135) 참된 머무름 독방에 머무는 것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압바 암모나스는 말한다. “사람은 독방에 백년을 머물면서도 독방에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포이멘 96) 참된 머무름은 몸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머무는 것이다. 몸으로 독방에 머물면서 밖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독방을 떠난 것이었다. 압바 요한의 다음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누군가 자기 영혼 안에 하느님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의 도구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독방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하느님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독방에 머물기 위해 세상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구도, 이 세상의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독방에 머물 수 없습니다.”(요한 콜로보스 44) 참된 머무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라고 말씀하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 교부들이 그렇듯 독방에 항구히 머물라고 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 항구히 머물라는 권고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한 강론에서 주교, 사제, 수도자,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머물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 살기, 머물기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 전부를 특징짓습니다.”(「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세요 I」, 74)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머물라는 이 권고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하여 늘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사막 교부들은 그런 우리에게 ‘머물러라!’고 권고하며 마음으로 내려가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잡고 이리저리 떠다니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침묵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 배우는 두 번째 삶의 지혜는 ‘침묵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자기표현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에 거침없는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침묵의 중요성 사막으로 물러난 그리스도인들은 침묵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사막 교부의 금언에는 그들이 침묵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다. 일례로,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스케티스 사막을 방문했다. 형제들이 팜보 압바에게 대주교가 감화될 수 있도록 그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테오필루스 2) 팜보 압바의 이 대답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준다. 즉 ‘침묵 자체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사람을 진정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현란한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다. 성숙한 인격과 고귀한 품성, 진실성, 내적 깊이를 드러내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일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법을 배울 때까지 3년 동안 입에 돌을 물고 살았다는 아가톤 압바의 이야기도 전해진다.(아가톤 15) 우리에게는 너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막 교부들이 침묵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왜 침묵을 그토록 중시하고 강조했을까? 침묵과 경청 침묵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듣기 위한 것이다. 자기 안팎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분주히 떠들면서 우리는 결코 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침묵 중에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은 들음, 곧 경청과 연결된다. 침묵은 잘 듣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 경청은 순종의 시작이고,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최초 인류는 불순종으로 낙원에서 쫓겨나 하느님에게서 분리되고 멀어졌다. 우리가 멀어진 하느님께 되돌아가 그분과 다시 일치되기 위해 우리가 잡아야 하는 무기는 순종이다. 따라서 침묵은 곧 경청을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순종과도 연결된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이유로 순종을 강조했고, 순종의 시작인 경청, 경청의 전제인 침묵을 그토록 중요시했던 것이다. 사막 전통에 충실한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아무리 좋고 거룩하고 교훈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제자들에게도 말하는 것을 드물게 허락할 것이다.”(규칙 6,3) 또 “점잖지 못한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 웃음을 자아내는 말은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금하고 단죄하며, 이런 담화를 위해 제자가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이다.”(규칙 6,8) 심술궂은 침묵 베네딕토 성인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는 고대 수도승들이 전혀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하지만 고대 수도승들은 대화를 금지하지 않았고 유머도 지니고 있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애덕이 요구할 때 말하지 않는 경우를 ‘심술궂은 침묵’이라 표현하며 이런 침묵은 가장 포악한 말보다 더 고약하다고 말하고 있다.(담화집 16,18) 실제로 말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공격수단이 될 수 있다. 그는 또 ‘분노의 무거운 침묵’을 언급하며 “그 목적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겸손과 인내를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원한을 더 오래 간직하려는 것”(규정집 12,27,6)이라 말하고 있다. 포이멘 압바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사람은 항상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참으로 침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포이멘 27) 침묵은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말해야 할 때 상대를 무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적이고 교만하거나 비겁한 침묵은 모두 심술궂은 침묵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사막 교부들은 코헬렛의 이 말씀에 따라 침묵이란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말해야 할 때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때 해서 늘 문제가 된다. 참된 침묵 침묵은 단지 외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적 침묵으로 시작되지만 내적 침묵, 곧 마음의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 아무리 외적 침묵을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엄청 수다스러울 수 있다. 또 이웃에 대한 비판이나 불평불만, 뒷담화로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참된 침묵이란 마음의 침묵, 곧 하느님 사랑으로 내적 고요와 평화 속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침묵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의 의미나 중요성을 모른 채 말이나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현하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나 속으로 늘 시끄럽고 불안하다. 침묵 중에 내면으로 들어가 고요와 평화중에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노력이 아쉬운 때다. 사막 교부들의 ‘침묵하라!’는 권고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씀처럼 다가온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물러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서 듣게 되는 첫 마디는 ‘물러나라’는 권고가 아닐까 한다. 이 권고는 본래 ‘세상에서 달아나라’(fuga mundi), ‘세상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아르세니우스의 물러남 물러남의 대표적 인물은 압바 아르세니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황실 고관으로 황제의 아들들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렸던 고관대작이 어느 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물러났다. 아르세니우스에 관한 금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황궁에 살던 시절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끄소서.’ 한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피해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고독한 생활로 나아가면서 그는 다시 같은 기도를 바쳤는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세니우스,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아르세니우스 1-2)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는 권고는 구원을 위한 길로 간주되어 이후 수많은 동방 수도승의 모토요 생활 지침이 되곤 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행에 옮긴 대표적 인물로 제시된다. 아르세니우스는 스케티스 사막(4세기 이집트 북부의 수도승 생활 중심지 중 하나)의 한 암자에 살면서 암자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고독과 고요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 로마의 한 귀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아주 매몰차게 대하였다.(아르세니우스 28) 그는 고요를 지키려고 주교들과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맞섰다. “압바 마르쿠스가 압바 아르세니우스에게 말했다. ‘왜 우리를 피하시는 겁니까?’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소. 수천수만의 하늘의 군대는 하나의 뜻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자고 하느님을 떠날 수 없소.’”(아르세니우스 13) 물러남의 이유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독과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는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고독과 고요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독과 고요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내적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 없이 우리는 결코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권고하시는 자녀다운 신뢰의 덕을 뜻한다. 즉 이 지상 생활의 근심과 일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을 밀쳐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아니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막으로 물러난 동기와 목적은 적어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물러남 우리는 분명 가정과 사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 모두 사막으로 물러날 수 없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세속적 가치와 정신,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라는 울타리,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에고일 것이다. 이런 것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삶에서 ‘함께’와 ‘홀로’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있음’이 사람들과의 친교의 때라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고요의 때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일상과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고독과 고요 중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과 하느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고요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이다. 예수님도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의 필요에 봉사하셨지만, 어떤 결정적 결단의 순간이라든지 유혹의 때 혹은 재충전이 필요한 때에는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홀로의 시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그분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셨다. 고독과 고요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허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만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다닐 수 있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모르고 인간적 친교만을 추구하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의 가벼움과 공허함을 종종 보게 된다. ‘홀로 있음’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물러나 홀로 고요히 침묵 중에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앞만 바라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물러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정이나 어떤 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일상에서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 본문에서 인용된 사막 교부의 일화나 말의 출처는 알파벳순 모음집 사막 교부들의 금언(베네딕다 워드, 「사막 교부들의 금언」,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7 참조)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1-12 제3425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연재를 시작하며 - 사막 교부란

신문사로부터 올해부터 격주로 사막 교부의 삶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우리와는 너무도 먼 4세기 이집트 사막이었다. 이렇듯 큰 시공의 차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심지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욕망과 싸우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치열한 삶, 그 삶이 가르치는 지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가 되었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란 주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이다. 그에 앞서 이번 첫 회에서는 먼저 사막 교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막 교부 어떤 이에게는 ‘사막 교부’(Desert Father)란 표현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 교부라고 말할 때, 엄밀한 의미로 4세기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의 사막에서 생활했던 유명한 독수도승을 일컫는다. 초세기 교회에서 ‘교부’는 본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성립되는 부자 관계를 적용한 데서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놓고 교회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준 분을 교회 교부(Church Father)라고 칭한다. 한편 실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수도승 생활의 토대를 놓은 거룩하고 위대한 수도승은 수도승 교부(Monastic Father)라고 불린다. 사막 교부는 수도승 교부에 속하며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의 시조라 하겠다. 4세기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던 그리스도인들 안에 점차 새로운 영적 부성(父性)이 생겨났다. 이 영적 부성은 더 이상 교회 안의 공적인 기능과 교계제도에 연결되지 않고 ‘지혜’(분별력)와 ‘말씀의 특별한 은사’에 연결되었다. 이 은사를 얻은 사람만이 남을 지도하는 영적 사부가 될 수 있었다.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은 자기 압바(Abba, 영적 사부인 원로)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따라서 독수도승을 지도하는 원로를 ‘사막 교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막으로 간 이유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자 악령들의 본거지였다. 또한 온갖 유혹과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장소,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였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자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한 가지 필요한 일’, 곧 ‘하느님 찾는 일’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소음과 동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깊은 고독과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하고 근본적인 포기와 물러남은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더 잘 응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막에서 새로운 박해자 악령들과의 치열한 싸움과 엄격한 금욕생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 자체가 자신을 포기하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순교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수도승 생활을 순교의 지속이라 하였고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도 했다. 그들의 삶이 중요한 이유 사막 교부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사막 교부들은 복음을 더 철저히 살려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 삶의 심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수도승 생활과 영성의 뿌리와도 같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을 충만히 실현하는 삶의 한 양식이며, 수도승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막 교부의 모범적인 삶과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사막 교부의 삶과 그들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그들의 외적 삶의 모습이나 방식을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오늘 우리를 위한, 나를 위한 어떤 가치와 정신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가치다. 구체적 삶의 양식은 그것을 담는 외적인 그릇에 불과하다. 외적인 틀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금언을 통해서 우리는 온갖 인간적 욕정과 악습에 맞선 치열한 싸움, 인간의 나약함, 하느님의 자비.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 신앙과 희망 등 우리 삶을 위한 지혜로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여전히 영적 사부인가? 사막 교부의 영웅적인 삶과 성덕은 당시 수많은 사람을 사막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벌이 향기를 맡고 꽃을 찾듯 수도승들의 거룩한 삶과 성덕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그들은 구원에 필요한 한 말씀을 듣기 위해 유명한 원로들을 찾아갔다.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사막의 원로를 찾아간 이들의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적 스승, 영적 사부를 갈구한다. 우리에게는 가시적인 모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려 노력했던 참 신앙인의 모범이 필요하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에 나타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승의 인격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이자 영적 사부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제자가 스승에게 다가가듯 그들에게 다가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의 지혜를 청해보자. “압바,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기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참조할만한 자료를 소개한다. 「수도 영성의 기원」(분도출판사, 2015), 「사막 교부들의 금언」(분도출판사, 2017), 「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분도출판사, 2006), 「담화집(제1-13담화)」(분도출판사, 2022), 「담화집(제14-24담화)」(분도출판사, 2023), 「천국의 사다리」(분도출판사, 2020),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1995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립 로마 성안셀모대학교 수도승 연구소에서 수도승 신학을 전공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성 베네딕도회 사막수도원에서 3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원장, 분도출판사 사장,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 등을 거쳤다. 「수도 영성의 기원」, 「천국의 사다리」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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