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계속 전진하라!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감은 일종의 여정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적 여정’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여정 중에 있는 존재다. 이 지상 여정은 마치 순례 여정과도 같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순례 중인 나그네이자, 순례자다. 사막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는 내적생활에서의 진보였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초점이 놓여 있다. 즉 어떻게 하느님을 향한 이 순례 여정에서, 내적생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다. 장작에 불 붙이기 사막 교부들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혹시라도 타성에 젖어 내적생활에 퇴보하게 될까를 우려했다. 그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압바 모세가 압바 실바누스에게 물었다. ‘사람은 매일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부지런하다면 매 순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실바누스 11) 요한 콜로부스는 말한다. “매일 일찍 일어나 모든 덕과 모든 하느님 계명을 실천하십시오.”(요한 콜로부스 34) “압바 포이멘은 압바 피오르가 매일 새롭게 시작했다고 말했다.”(포이멘 85) 두 수도승이 영적 담화를 나누던 중 한 수도승이 다른 수도승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작을 우리 마음에 비유해 볼 때, 불은 우리의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차가운 마음은 우리 영성 생활의 가장 큰 장애다. 마음에 열정이 없을 때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해진다. 열정을 상실한 마음은 수도승의 고질병인 ‘아케디아’(영적 태만)로 이끈다. 사막 수도승들은 늘 수도승 생활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곤 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열정의 불이 꺼지지 않게 돌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수도승은 누구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매일 불에 불을, 열정에 열정을, 열의에 열의를, 갈망에 갈망을 더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천국의 사다리」 1,6)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고 계속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열정을 잃어 우리 마음은 불 꺼진 싸늘한 장작처럼 식곤 한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열정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붙여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이 여정에서 열정은 우리를 지치지 않고 계속 전진하게 하는 에너지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끝없이 나아간 모세의 삶처럼 매일 새로운 열정 가슴에 품고 영적 진보 강조한 사막 교부들 익숙한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 여정 멈춤 없이 계속하길 끝없는 진보 그리스어 ‘에펙타시스(epektasis)’는 끝없는 진보를 뜻한다. 이 진보 개념은 특히 니싸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부각되는 핵심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성 생활에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변의 존재이신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끝없는 움직임, 이것이 그레고리우스의 진보 개념이다. 영혼이 하느님과 동일하지 않다면, 선에 참여하는 영혼의 이러한 진보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만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한을 향하는 유한한 존재다. 이는 이동 중인 존재, 갈망의 존재를 의미한다.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간 삶을 산 모세가 그 전형이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덕과 사랑은 현세에서건 내세에서건 한계나 종료점이 없다고 말한다. 진보는 단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생명의 표지라고 한다. 완전함의 본질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절대 완전해지지 않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위(僞)마카리우스에게서도 이 진보에 관한 주제가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적 은총을 더 많이 받을수록 천국에 대한 그의 갈망은 더욱더 만족을 모르게 되며,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 더욱더 타오른다. 그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가 더욱더 은총을 받아야 하고 그 은총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굶주림과 갈증을 느낀다. 그가 영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을 가난하게 생각한다. 천상 신랑에 대한 그의 영적 갈망은 만족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모음집 2,10,1) 따라서 ‘충분하다. 나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주님은 무한하시고 도달하기 어려운 분이시며, 그리스도인은 감히 자신이 주님께 도달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밤낮으로 그분을 찾으며 겸손히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모음집 2,26,17)이다. ‘수도 생활에는 졸업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이는 수도 생활이 일시적 과정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해 이어지는 지속적 여정이라는 의미에서다.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에 따르면,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교’(규칙 머리말 46)다. 이 학교에서 졸업이란 아마도 자의건 타의건 이 학교를 떠나게 될 때, 그리고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일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멈춤은 퇴보이자, 죽음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있다. 성인들이 이 지상에서 도달한 이러한 완성은 단지 부활 후, “부활한 육신이 새로운 신적 옷으로 덧씌워지고 천상 양식으로 양육될 때”(모음집 2,12,14) 얻게 될 바를 미리 맛보는 것일 뿐이다. 완성에는 끝이 없다.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멈추게 되고 결국 뒤로 처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늘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끝없이 나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까지, 아니, 저세상으로 건너간 뒤에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오늘을 살아라!

‘오늘을 살아라!’ 사막 교부들의 이 권고는 ‘오늘을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경구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한 시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여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을 살아라 역시 오늘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다. 하루살이 인생 우리는 자칫 이미 지나간 과거에 저당 잡혀 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가불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확실한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 속에 살게 된다. 사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올지 안 올지 불투명하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일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서 새날을 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마치면 다시 죽음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우리 삶은 매일이 부활과 죽음의 연속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가사 중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구절이 있다. 딱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한 시간은 오늘이기에 그렇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내일 내가 다시 새 날을 볼 수 있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루살이 인생인 셈이다. 물론 이는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 의미에서다. 현재에 머무는 삶 현재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Nunc et hic)’ 머무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현재 지금 여기에 머물며 오늘 하루를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이런 모습은 일상에서 흔치 않게 목격된다. 예컨대, 여러 사람과 악수할 때 악수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다음 악수할 사람을 쳐다보며 악수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이라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 공동 기도 중에 마음이나 정신이 현재 낭송하는 시편 구절이 아닌 벌써 다음 구절에 가 있다든지, 기도 후의 일들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마음 없이 건성으로 하는 것이다. 자기가 싫어하거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에서도 이런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라는 이 귀한 생명의 시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하든, 그릇을 닦든, 음식을 하든, 그 외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문을 여닫거나 식탁을 차릴 때도 거기 마음이 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머무는 삶이다. 매일 새롭게 새 생명 얻으며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삶 현재에 충실히 최선 다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 살길 현재에 충실한 삶 현재에 머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에 충실한 자세 곧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 역시 중요하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삶은 곧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기도 하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한다면, 오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매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허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러 해 전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자차만 손상되었을 뿐이다. 사고 상황에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겼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멀쩡히 살아 있었다. 이때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평소에 너무 익숙하여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새롭게 다가왔다. 또 내게 허락된 이 생명의 시간을 감사하며 귀하게 여기고 기쁘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일상이 타성에 젖을 때마다 이 죽음의 체험을 떠올리며 다짐을 새롭게 하곤 한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오늘을 자기 생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경건하게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 ‘너의 마지막 때를 기억하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 7,36)”(「천국의 사다리」 6,61) 그래서 현재에 충실한 삶은 죽음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이유로 고뇌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곤 한다. 적지 않은 경우, 우리 고뇌와 슬픔, 불안과 좌절의 원인은 내 안에 있을 수 있다. 무엇인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욕망은 우리가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을 누리며 충실히 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이 귀한 생명의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낸다고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안타깝지 않을까? ‘인생이 허무하다’란 말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하나는 부정적 측면인데, 곧 허무주의다. 이것은 고질병이다. 여기에 빠지면 기운이 빠지고 삶이 무의미해지고 심지어 생명을 포기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이와 달리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바탕을 둔 경우다. 이 경우, ‘인생이 허무하다’란 말은 이 세상의 유한성과 우리가 향해야 할 지향점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인생을 더욱 값지게, 감사하게,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게 해준다. 이는 참된 신앙인이 갖게 되는 태도다. 코헬렛 저자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고 했을 때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 세상 여정을 마감할 때까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늘 현재에 깨어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 교부들이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라!” 하고 권고하는 이유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과녁을 겨냥하라!

‘과녁을 놓치지 말고, 제대로 겨냥하라’는 말이 있다. 과녁을 놓치면, 늘 엉뚱한 곳을 겨냥하게 된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종종 삶의 목표, 즉 과녁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엉뚱한 곳을 겨냥한다. 그리고 거기에 불필요한 시간과 힘을 쏟게 된다. 사막 교부들은 과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부들의 금언집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는 그들의 엄격한 금욕 수행에 지레 기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녁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막의 관대한 사랑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자 그들의 생활 방식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금욕 수행은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결국 사막 수도승의 과녁은 하느님과 사랑이었다.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이를 보여주는 흥미롭고 교훈적인 일화가 많이 있다. 과녁을 겨냥한 예들 다음 일화들은 인간이 정한 규정보다 하느님의 계명인 애덕이 우선임을 잘 보여준다. 압바 모세는 주간 단식 주간에 방문한 형제들을 환대하기 위해 요리를 조금 만들었다. 그러자 이웃 수도승들은 이에 대해 성직자들에게 고발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압바 모세의 놀라운 처신을 알았기에 모두 앞에서 말했다. “오, 압바 모세, 당신은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모세 5) 또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수도승들이 단식 규정을 깨고 열렬히 환대해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그들이 한 원로에게 그렇듯 쉽게 단식을 깨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단식은 늘 할 수 있지만, 내가 여러분을 항상 대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식은 확실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 선택에 달려 있는 반면, 하느님의 법은 우리에게 절대적 의무인 애덕을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니, 나는 온갖 열성을 다해 여러분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떠나면 나는 다시 단식 규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카시아누스 1) 압바 포이멘은 사순절이라 주저하며 자신을 방문했던 한 형제를 환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나무문을 닫으라고 배우지 않고 혀의 문을 닫으라고 배웠습니다.”(포이멘 58) 이 애덕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형제들을 보호했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듣거나 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죄를 지어 집회가 소집되었고 압바 모세도 초대되었다. 가기 싫었던 그는 마지못해 구멍 난 바구니에 모래를 가득 채워 가져갔다. 마중 나온 형제들이 의아해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죄가 뒤로 줄줄 새 나오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다른 형제의 잘못을 심판하러 가고 있습니다.”(모세 2) 포이멘의 다음 일화도 우리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몇몇 원로가 압바 포이멘에게 와서 물었다. ‘공동기도 중에 조는 형제를 보면 우리가 그를 흔들어 기도 중에 깨어 있게 해야 합니까?’ 압바 포이멘이 대답했다. ‘나는 자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면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누이고 그를 쉬게 할 것입니다.’”(포이멘 92) 압바 디오스코루스는 거지를 만나자 좋은 투니카를 내주었다. ‘어째서 헌 투니카가 아니라 집회에 갈 때 입는 좋은 투니카를 주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같으면 예수님께 헌 투니카를 드리겠소?” 이 일화는 애덕이 전례의 성대함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사막 교부들은 늘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고 과녁을 겨냥했다. 오직 하느님 향한 마음으로 관대한 애덕 보여준 교부들 수단과 목적 혼동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하느님 뜻 실천 주객전도 주객전도는 수행의 길에서, 우리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예컨대, 어떤 외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대한 의존 혹은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되 그 겉모습을 보고 거기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바라봐야 할 본모습,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신앙생활을, 영성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든 간에 직접 사물의 본질을 향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늘 피상적인 차원으로 끝나게 된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강을 건너라고 만든 뗏목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수단, 방편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주객전도의 우를 범하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에 집착하고 그 내면의 깊은 뜻을 놓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신앙과 문화, 다른 민족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과녁을 겨냥하라 중국에 임제 의현이라는 유명한 선사가 있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살불 살조사(殺佛 殺祖師)’,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섬뜩하고 살기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뜻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어떠한 것에 얽매여 본질(과녁)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뼈 있는 가르침이다. 임제 선사는 여기서 ‘무의도인(無依道人)’, 즉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본질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자유로운 주체적, 자립적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직접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통찰함으로써 온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물 안에는 하느님 현존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 안에도 그분을 닮은 참된 인간 본성(眞我)이 깃들어 있다. 이것을 찾고 깨달아가는 여정이 우리 영성생활이 아닐까 한다. 이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기에 우리는 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 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없이 인간을 막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과 사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고 참된 인간성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더는 아쉬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 깨달음 자체가 우리 삶을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문자로 표현된 책 자체보다도 그 안에 담긴 내용, 곧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 하느님 뜻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바로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과녁이다. 우리는 길을 간다. 함께 가지만 결국 혼자 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본질과 핵심을 향해 소신껏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무의도인의 자유로움으로 홀로 우뚝 서서 타인의 지표,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 안에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고 지금까지 배워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삶이 말하게 하라!

우리는 요즘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온갖 말이 넘쳐나지만, 권위 있는 말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말의 힘과 권위는 언행일치에서 온다. 말에 권위가 없는 것은 말에 행동과 삶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없는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삶을 통한 가르침 사막 교부들에게는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삶의 모범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스승은 제자를 받아들인 후에도 침묵을 지켰다. 가능하면 제자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네가 보는 바를 행하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압바 오르는 “가서 내가 행한 바를 본 대로 행하십시오.”(오르 7)라고 말했다. 압바 테오도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명령을 내리기 위해 공동체의 장상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가 원한다면, 그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행하리라.”(익명의 압바 373) 제자는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스승의 말보다도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배웠다.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많은 방문객이 단지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기쁨에 가득 찼고, 충분히 선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안토니우스를 방문했던 한 형제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부님, 저는 당신을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익명의 압바 27)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일종의 등대가 되어 수많은 이를 다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삶을 통한 가르침이 낳은 열매이리라! 삶의 모범 사막에서 스승은 입법자도, 법 전달자도 아니었다. 그는 삶의 모범이었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몇몇 형제가 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책임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원로가 말했다. ‘아니요, 다른 무엇보다도 형제의 일을 하십시오. 그들이 형제처럼 살고 싶다면 스스로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 형제가 원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부님, 그들은 제가 책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원로가 그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들의 입법자가 아니라 모범이 되십시오.’”(포이멘 174) 스승은 말보다는 삶의 모범으로 더욱 스승이 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일종의 모범이지 법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자기 말로써 규칙이 되지만, 그보다는 자기 행동으로써 더욱 확고한 규칙이 된다. 펠루시움의 압바 이시도루스가 말했다. “말없는 삶이 삶 없는 말보다 더 낫습니다. 침묵하며 감화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리치며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과 삶이 서로 부합할 때 온갖 철학(금욕 생활)을 형성할 것입니다.”(펠루시움의 이시도루스 1) 행동과 모범으로 가르치고 제자와 함께 생활한 교부들 권위 내세우거나 명령하지 않고 침묵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 깊이 있는 인격이 스승의 조건 삶으로 받은 가르침 필자에게는 삶으로 가르침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 두 경험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나는 1990년대 초 양성기 때, 파코미우스의 생애를 읽었을 때였다. 거기서 접한 몇몇 일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파코미우스는 ‘코이노니아’라는 거대한 공동체 전체의 영적 사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형제와 똑같이 규칙을 준수했다. 코이노니아에 속한 각 수도원을 방문하면 그곳 형제들과 똑같이 기도하고 노동했으며, 식사 배식을 받기 위해 형제들과 같이 줄을 섰다. 어느 날 파코미우스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파코미우스를 방문한 테오도루스가 스승이 다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모습을 보고, ‘빨리 새 담요를 가져다 덮어드리라’고 수사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파코미우스는 테오도루스에게 “그대는 형제들 중 누가 아플 때 그를 방문해 본 적이 있느냐?”며 이를 만류했다. 이처럼 파코미우스는 장상으로서 어떤 특권을 누리거나 예외를 두지 않고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규칙을 준수하고자 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유학 중이던 1999년, 여름 방학을 프랑스의 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지낼 때였다. 당시 이 공동체의 아빠스님은 필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과 모범적인 생활은 신선한 충격 자체였다. 장상이었지만 권위적이라든지 엄격하고 요란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조용하고 온화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소박하고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 안에 깊이 현존하는 분이었다. 아빠스의 모관도 쓰지 않았고, 나무로 된 소박한 목장(牧杖)과 평범한 반지와 목 십자가가 전부였다. 겉으로 봐선 다른 형제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곧 공동체가 이분을 중심으로 굳게 결속돼 있음을 느꼈다.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친구 수사의 다음 말을 듣고 궁금증이 풀렸다. “우리 아빠스님은 형제들이 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하셔!” 실제 식사 후 설거지며, 형제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공간 청소며, 본인이 할 시간과 여건이 되면 뭐든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을 보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형제들 모두 이를 평범한 일처럼 여기는 모습을 보고서였다. 그의 이런 솔선수범과 모범이 바로 공동체 일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승을 갈구하는 시대 우리 시대는 어찌 보면 스승이 필요한, 아니 스승을 갈구하는 시대 같다. 우리에게는 본받을 모범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 스승을 찾아야 할까? ‘삶이 말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참된 스승 식별의 1차 기준일 것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속기 쉽다. 요란하고 현란한 말로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자는 흔히 짝퉁일 경우가 많다. 내적으로 공허하고 내실이 없을 수 있다. 말이나 외적인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봐야 한다. 우리가 본받을 스승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그런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일상 안에, 내 주변을 잘 보면 분명 화려하고 떠벌이진 않지만, 삶과 인격에 깊이가 묻어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잘 못 볼 뿐이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은 타의 지표가 된다. 우리도 삶으로 말하려 노력할 때 그러할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하느님 자비를 기억하라!

사막 교부들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는 ‘하느님 자비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 한계와 나약함으로 인해 넘어졌을 때, 교만이라는 외줄을 타고 깊은 구렁을 건너가려 할 때, 하느님 자비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고 겸손하게 해준다. 성전에서 기도한 복음의 세리가 좋은 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부끄러워 얼굴도 못 들고 하느님 자비를 구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세리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그분께 겸손하게 자비를 구할 수 있었다. 겸손은 바로 자기 자신을 늘 죄인으로 생각하고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자세다. 하느님 자비를 구함 사막 교부들은 복음의 세리를 본받아 죄에 떨어졌을 때 즉시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했다. 압바 파울루스는 말했다. “진창 속에 목까지 빠져 있는 나는 하느님 앞에 울며 말합니다.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대(大)파울루스 2) 압바 루키우스는 새끼를 꼬면서 시편 51편을 암송했다. “나는 갈대를 물에 담그고 새끼를 꼬면서 하느님과 함께 앉습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하느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크신 선과 풍성한 자비로 제 죄에서 저를 구하소서.’”(루키우스 1) 또 위(僞)마카리우스 이렇게 말한다. “항구하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면, 은총은 원수로 인한 모든 고뇌에서 그를 해방시킨다.”(모음집 2,56,7)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온갖 위험과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는 결코 하느님 자비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분 자비를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 자비는 겸손한 죄인에게만 미칠 것이다. 압바 모세는 말한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주님은 즉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모세 7)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그분 앞에 나아갈수록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느끼게 된다. 그때 자신이 하느님 자비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그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호의와 자비는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다. 하느님 자비를 기억함 언제가 한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분은 젊은 나이에 갑자기 불치의 병을 얻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이 상황에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지인이 자신에게 “별은 밤에 빛납니다”라고 했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지금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밤에 있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사랑을 체험하는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긍정적으로 변하고 생활의 모습도 밝아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의 힘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똑같은 고통을 당하더라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고통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 자비와 사랑을 느끼고 그분 현존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 밝을 때는 빛나는 별을 볼 수 없다. 어두울 때 별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고, 그 별에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서서 방향을 잡고 별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나갈 때나 건강할 때, 삶에 어떤 도전도 없을 때는 우리와 늘 함께하는 하느님 자비를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난관에 봉착하거나 시련과 곤경에 처할 때 우리의 간절함이 하느님을 찾게 하며, 그때 바로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 자비를 기억해야 한다. 별은 밤에 빛나기 때문이다. 하느님 자비에 희망을 둠 사막 교부들은 항상 하느님 자비를 기억하고 그 자비에 희망을 두었다. 압바 포이멘은 말한다. “하느님은 손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조차 현세에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용기를 갖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오.”(포이멘 94) 베네딕토가 제시하는 선행의 마지막 도구가 바로 “하느님 자비에 대해 결코 실망하지 말라”(규칙 4,74)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 여정은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 자비의 힘으로 가는 것이다. 그분의 자비가 없다면, 누구도 이 여정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넘어짐을 통해 하느님 자비를 더 깊이 느끼고 확신하게 된다. 그 자비는 복음의 탕자와 같은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인내와 기다림, 관용과 용서, 조건 없는 사랑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 자비는 우리를 좌절에서 용기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동력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쉽게 넘어질 수도,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넘어지면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하느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베트남 공산 치하에서 13년간 옥고를 치른 응우옌 반 투안 추기경은 이런 말을 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인간적 약점이나 허물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의 인간적 한계를 안고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걷다 보면 무수한 잘못과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자비 때문일 것이다. 또 그 누구에게도 미래가 없을 수 없다. 이는 죄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 죄인이 내일은 의인이 될 수 있고, 오늘 의인이 내일은 죄인이 될 수도 있다. 죄와 허물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때 누구나 의인과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죄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 약하기에 죄를 짓게 되는데, 반복해서 죄를 짓다 보면 악한 습성이 몸에 배어 결국 악인이 되는 것이다. 나약함으로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은 악인보다 회개와 구원의 길로 돌아서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악의가 없는 약한 사람의 여백은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질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죄에 슬퍼하라!

우리가 인간인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큰 착각일 뿐이다. 에고(거짓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도 완전 무구할 수 없다. 온갖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 노력의 일환이 바로 자신이 범한 죄를 늘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야고 4,9) 슬픔의 길 사막 교부들은 한결같이 수도승은 자기 죄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암자에 앉아 당신 죄에 대해 우십시오.”(대大마카리우스 2)라고 말한다. 또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자기 죄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묻자 포이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죄를 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눈물로 죄를 대속하고, 덕을 얻고 싶은 사람은 눈물로 그것을 얻습니다. 우는 것은 성경과 교부들이 ‘우시오!’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준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포이멘 119)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계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 중에 언제나 눈물을 받기 위해 가슴받이를 착용했어야 할 정도라고 전해진다. 일부 예외는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수도승은 바르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의 항구한 접촉으로 인해 그들의 양심은 더욱 순수하고 섬세해졌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적 연약함으로 짓게 되는 죄가 아무리 작아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압바 마토에스는 말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만큼 더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마토에스 2) 실제 우리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닦으면 닦을수록 우리 자신의 티와 허물이 더 자세히 비추어진다. 마음에 때가 껴서 흐려질수록 양심도 무뎌지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 순수하게 될수록 우리 양심도 더욱 섬세해질 것이다. 상이한 참회 방식 죄에 대한 사막 교부들의 생각은 정확히 같지 않고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참회하는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일례로 결혼하기 위해 사막을 떠난 두 명의 형제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후에 그들은 후회했고 교부들은 그들에게 동일한 보속을 주었는데, 곧 일 년 동안 은둔해서 빵과 물로만 엄격히 생활하는 것이었다. 일 년이 끝나갈 무렵, 한 사람은 창백하고 우울해하였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고 즐거워했다. 전자는 자기 잘못과 자기 몫으로 주어진 형벌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으로 일 년을 보냈고, 후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불순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분께 대한 생각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익명의 교부 186) 두 경우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참회 방식이다.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렇듯 상이한 참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결과 역시 상이하다. 이는 죄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필자의 견해로는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 더 마음이 끌린다. 영적인 슬픔 슬픔, 탄식, 통회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 펜토스(pénthos)가 있는데, 이는 절망과 좌절을 초래하는 자연적 슬픔과 다른 영적 슬픔이다. 압바 모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얻기 어려운 덕이 세 가지 있습니다. 항상 울며 슬퍼하는 것, 자기 잘못을 언제나 기억하는 것, 그리고 매 순간 자기 눈앞에 죽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영적 슬픔 역시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비롯된다. 곧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 악에서 해방되려는 갈망, 완전함에 대한 갈망,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하느님께 대한 갈망 등이다. 이 슬픔의 경우에는 여전히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언젠가는 나에게 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리라 믿는다. 따라서 영적 슬픔은 고뇌가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 슬픔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 교부들이 말하는 슬픔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에서 울며 슬퍼했다. 또한 자기 죄와 타인의 죄에도 슬퍼했고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도 울었다. 눈물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시적 눈물 흘림이 아닌 마음 상태다. 사막 교부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은 마음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눈물의 열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맞는 말이다. 눈물 없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반드시 어떤 열매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열매를 맺게 된다. 그 열매란 과연 무엇인가? 첫째, 눈물은 몸을 정화한다. 사막 교부들은 “높은 곳에서 오는 눈물은 몸을 정화시키고 거룩하게 한다”고 말한다. 둘째, 눈물은 죄를 쫓는다. 압바 롱기누스는 기도와 시편 중에 큰 통회를 체험하였다. 어느 날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압바, 수도승이 기도 중에 우는 것이 영성생활의 법규입니까?”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천사들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에 떨어졌으므로 울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서는 울 필요도 없습니다.”(교부들의 금언, 작자 미상) 셋째, 눈물은 악마와 싸우는 무기가 된다. 압바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그대 마음에 엉뚱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기도하려 하지 말고 눈물의 검을 갈으십시오.” 넷째, 눈물은 기도를 낳는다. 압바 파울루스가 말했다. “진창 속에 목까지 빠져 있는 나는 하느님 앞에 울며 말합니다.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대大파울루스 2) 끝으로 눈물은 기쁨을 준다. 암마 신클레티카는 말한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엄청나게 많은 싸움과 아주 많은 고통이 따르지만 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옵니다.”(신클레티카 1) 모세 압바의 말대로 우리가 늘 자기 잘못을 기억하고 울며 슬퍼하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산다면, 우리의 슬픔과 눈물, 탄식은 열매를 맺고 마침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우리의 영적인 슬픔도 커질 것이다. 엄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은 너무도 큰 여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작은 것에 만족하라!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요즘 우리 사회에 회자하는 말 중 하나다. 2010년 무렵 영미권에서 등장한 말로,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말한다. 물건을 줄일 뿐만 아니라 적게 가짐으로써, 삶의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데 중점을 두고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생활 방식이라 하겠다. 일상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을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막 교부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했던 원조 미니멀리스트다.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분을 닮기 위해 작은 것에 만족하며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살았다. 사막 교부의 생활 방식을 보면, 즉시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고행과 극기는 가히 초인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 가난과 궁핍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포기와 이탈의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최소한의 것만 둔 독방 그들은 독방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두었다. 멜라니아는 이집트 수도승들을 방문하다가 헤페스티온이라는 거룩한 수도승의 독방 안을 엿보게 되었다. 거기에 돗자리 하나, 작은 마른 빵 몇 개가 담긴 광주리 하나, 소금 바구니 하나 외에 세상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독수도승의 비품 목록을 제시하는 문헌은 없지만 여러 문헌에 산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주전자, 손잡이 달린 항아리, 단지, 작업용 칼과 송곳과 방추와 바늘, 농기구 등이 필요한 기본 비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교부 이사야스처럼 단 한 권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수도승들도 점차 벽장 속에 책을 쌓아 두기 시작하자 어떤 원로는 애통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들은 책을 썼고, 우리 교부들은 그것을 실천했으며, 교부의 후예들은 그것을 암기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책이 필사되고 체계화되었으며, 책장 속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익명의 압바 228) 압바 이사악은 카시아누스에게, 수도승들이 한두 개의 방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속적 욕심으로 넓은 공간을 누리려고 호사스런 가구가 딸린 네다섯 개의 방이 딸린 필요 이상으로 큰 암자를 짓는다고 한탄했다.(담화집 9,5) 단순하고 검소한 의복 독수도승의 의복은 매우 단순하고 거칠고 초라했다. 아마도 성경이 엘리아와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는 것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엘레는 넝마 조각을 기워 걸쳤고, 깔개를 걸쳤던 수도승도 있었다. 압바 이사악의 전언에 따르면 압바 팜부스는 이렇게 말했다. “수도승의 옷은 사흘 동안 자기 암자 밖에 놓아두더라도 아무도 가지고 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이사악 12) 당시 옷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수도복의 재질은 매우 다양했지만, 너무 남루하거나 값비싼 옷을 입어 눈에 띄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악령이 부추기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너무 남루하지도 너무 값비싸지도 않은 옷을 입는 것이 규정이라면 규정이었다. 초기 사막 교부들은 한 벌의 투니카(Tunic)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지키려 노력했다. 주말과 주일 교회에 갈 때 입는 좀 더 좋은 투니카 한 벌을 소유하는 관례가 즉시 정착되었다. 엄격한 식사 규정 사막에서 음식과 음료와 관련된 규정은 매우 다양했다. 이러한 다양성은 개성, 나이, 건강 상태, 그리고 장소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점차 체험을 바탕으로 일반 규정이 생겨났다. “식사의 빈도, 소비된 음식, 음료의 양과 질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포만감을 피하고 약간 배고플 정도로 육체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한다”(규정집 5,5-8)는 것이다. 즉, “배불리 먹으려는 욕구가 아니라 자기 체력과 나이에 따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양을 취하는 것”(담화집 2,21,1), 이것이 기본 원칙이며 황금률이다. 지나친 고행도 과도한 음식과 음료만큼이나 피해야 한다. 탐식의 악령은 고행을 줄이게 하며, 헛된 영광의 악령은 고행을 더 하도록 한다. 식단은 무척 단순했다. 통상 빵과 물과 소금이었고, 매일 작은 빵 두 개로 만족했다. 하지만 병자와 손님을 위해 규칙이 완화되기도 했다. 늘 애덕이 엄격함에 앞섰기 때문이다. 기름을 사용할 경우는 극소량만 사용했고, 고기는 전혀 없었다. 팔라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가 사순절 동안 빵도 물도 먹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주일에 그저 식사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양배추 몇 잎을 씹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06) 미니멀 라이프 경험 필자가 신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울 때 ‘파르보 콘텐투스’(Parvo Contentus)란 분사구를 접하고서 이 말마디가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은 것에 만족하다’란 뜻의 이 말마디는, 자연스레 갓 시작한 필자의 수도 생활과 연결되었다. 그때부터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산다’는 기치 아래, 가능한 한 온갖 필요를 줄여나가며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하는 훈련에 돌입했다. 이런 생활 방식이 서서히 몸에 배어 갔지만, 시간과 더불어 불필요한 것이 하나둘 쌓여 갔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산다는 것은 삶을 단순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필요하고 부차적인 것에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필요한 한 가지 것(Unum Necessarium)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다. 온갖 인간적 욕망과 집착은 삶을 복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모으고 집착하게 만든다. 시간이 가면서 더 깊은 확신이 드는 것은, 살아가는 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에게 한 가지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죽은 후 후배들이 필자의 짐을 정리하느라 고생하지 않게 해야겠다는 것이다. 분명 4세기 이집트와 21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리적, 사회적 환경은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사막 교부의 미니멀 라이프의 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삶에 부차적인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본질적이고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려 했던 그들의 자세와 정신은 여전히 본받을 만하다. 우리가 신앙의 관점에서 추구해야 할 미니멀 라이프는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는 삶의 자세일 것이다. 더 많이 소유하려, 더 많이 누리려 하다 보면 자칫 그 목표인 행복을 잃을 수 있다. 육체의 욕구를 과도하게 충족시키려 하다 보면 영혼이 병들고, 마음도 평화를 잃게 된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며 영혼을 살찌우고 마음의 평정을 위한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고 지혜롭지 않을까?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24 제3455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버려라!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9,34) 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한 마디로 자기 자신과 소유를 다 버려야 당신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리다’는 ‘갖다’, ‘소유하다’, ‘모으다’의 상대어다. 흔히 우리는 무언가를 갖고 소유하고 모으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구와는 반대된다. 이런 면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Christianos)은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제자’를 뜻한다. 따라서 ‘버리라’라는 요구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단 부르심에 따라 버리는 방법과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 복음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마태 19,27)라고 말한다. 실제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삶의 터전과 가족을 떠났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생계를 위한 유일한 수단임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이런 철저한 포기는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 특히 수도자나 사제로의 부르심은 일종의 소명이다. 그래서 직업 의식이 아닌 소명 의식이 필요하다. 소명 의식이 없을 때 단순히 한 직종을 선택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성소의 고귀함과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은 결코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의 이상 실현을 위한 방편도 아니고, 생계를 위한 직종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며 예수를 따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사막에서의 포기 일부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실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고향과 환경, 가족과 친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집착과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아르세니우스와 같은 귀족 출신의 인물에게는, 화려했던 이전 삶의 조건을 포기하기 위한 영웅적 결단이 필요했다. 사막 수도승들의 포기는 철저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었다. 예컨대, 부와 권력, 명예, 세상의 가치, 옛 생활 습관(악습), 온갖 인간적 집착과 애착 등이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고)과 의지도 버렸다.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을 찾는 데 전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자신과 세상 쾌락과 재물을 포기해야 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0쪽) 이는 사랑 때문에 사랑에 응답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응답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금욕적 노력이었다. 세 단계의 포기 카시아누스는 성경의 권위와 사부들의 전통에 따라 수도승이 실천해야 하는 세 가지 포기를 이야기한다. “첫째 포기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둘째 포기는 과거에 가졌던 마음과 육신의 습관과 악행과 감정을 배척하는 것이다. 셋째 포기는 우리 마음이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미래의 것을 바라보며, 볼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다.”(담화집 3,6) 이를 외적 포기, 내적 포기, 관상적 포기라고 한다. 포기는 수도승을 끊임없는 기도로 이끌어준다. 포기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마음의 순결을 얻은 수도승은 순수한 기도로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러한 포기 없이는 끊임없는 기도도, 마음의 순결도, 순수한 기도도, 하느님과의 일치도, 하느님 나라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카시아누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막 교부의 가르침이다. 포기하는 자 어느 날 대(大)마카리우스가 우연히 만난 수행자들에게 “내가 어떻게 수도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들이 말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수도승이 될 수 없습니다.”(대(大)마카리우스 2) 그래서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수도승은 ‘포기하는 자’(Renuntians)로 불렸다.(규정집 4,1) 다시 말해 수도승은 ‘버리는 자’인 것이다. 독방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있는 수도승은 이 세상 것을 포기한다. 사실 어떤 원로의 말처럼, 무소유의 감미로움을 맛본 사람은 의복과 물 주전자까지도 거추장스럽다. 그의 정신은 이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46쪽) 사막 교부들은 자기 뜻의 포기도 강조한다. 테베의 압바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 앞에 값진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아프고 유혹을 당할 경우 감사하게 그것을 맞이하는 것, 어떤 인간적인 것도 중히 여기지 않으며 하느님 현존 안에서 자신의 모든 일을 순수하게 수행하는 것, 끝으로 자기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영적 사부 밑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것으로 정말 고결한 왕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테베의 요셉 1) 압바 모세는 자기 뜻을 포기할 때, 하느님은 그와 화해하시고 그의 기도를 받아들이신다고 말한다.(모세 4) 압바 포이멘도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의 황동 벽이자 걸림돌’(포이멘 54)이라고 하면서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다. 버리는 훈련 ‘버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자기 뜻조차 내려놓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가,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기가 그토록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종의 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세월과 더불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키려 너무 많은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이 세상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 갈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 여지없이 우리가 소유하고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느님 외에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버리는 지혜, 내려놓음의 지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사랑을 드러내라!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간 일차적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그들을 사막의 고독과 침묵 속으로 이끌었고 하느님만을 찾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웃사랑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을 환대와 애덕 실천, 봉사와 섬김 등으로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압바 포이멘이 말했다.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일은 이 세 가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이웃에게 행하는 선입니다.”(포이멘 160) 사막 교부들은 독방의 고독 속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며 개인의 성화에만 열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압바 포이멘의 말대로 그들은 이웃에 대한 구체적 사랑 실천 역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웃에게 드러내는 사랑, 곧 선행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필수 불가결인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사막 교부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금언집에는 인간애를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다. 대표적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압바 아가톤은 말했다. “나병* 환자를 만나 그와 서로 몸을 교환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아가톤 26) 이런 생각과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사랑, 그리고 인간애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다. 같은 암자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두 압바의 다음 일화도 깊은 상호 사랑을 보여준다. “한 압바가 다른 압바에게 말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우리도 한번 다투어 봅시다.’ 그러자 다른 압바가 대답했다. ‘나는 어떻게 다투는지 모르오.’ 첫 번째 압바가 말했다. ‘보시오, 내가 우리 사이에 벽돌 한 개를 놓고 그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겠소. 그러면 당신이 ‘아니오, 그것은 내 것이오’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이로 인해 다툼이 시작될 것이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 벽돌 하나를 놓고 첫 번째 압바가 ‘그것은 내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압바가 ‘아니오, 그것은 내 것이오’라고 했다. 다시 첫 번째 압바가 말했다. ‘그것이 당신 것이라면 가져가시오.’ 이렇게 해서 결국 논쟁을 계속할 수 없어 다툼은 끝나버렸다.”(익명의 압바 352)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두 압바는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여,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말았다. 반면 우리는 싸움의 기술을 너무 잘 터득하여 매번 사소한 것으로 분노하고 싸우고 있지는 않은가? 방문객에게 드러낸 사랑 독수도승들은 누가 방문하면 주저 없이 자신의 고독과 침묵, 엄격한 삶의 질서를 깨고 손님을 환대했다. 방문객을 맞아들이는 것은 곧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에게 베푸는 환대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방문객의 성향이나 방문 목적을 불문하고 그를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처럼 환대했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사람의 첫째 의무는 단식을 깨고 방문객에게 식탁 봉사를 하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방문객에게 한 말씀이나 교훈적 담화를 통해 영적 활력을 되찾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회복도 도와주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빵과 물밖에 없는 독수도승은 손님에게 딱히 내놓을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손님에게 더 좋은 식단을 제공하기 위한 음식을 따로 보관해 두었다. 사실 손님이 왔다고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자신의 질서와 규칙을 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님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주인에게 규칙을 깨게 한 것에 사과하곤 했다. 그러면 주인은 이렇게 다정하게 대답했다. “나의 규칙은 그대에게 원기를 회복시켜 평화로이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익명의 압바 283) 어떤 원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내 뜻을 포기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이중의 공로를 얻게 됩니다.”(익명의 압바 288) 손님의 방문은 수도승에게 애덕 실천의 기회를 제공하고 수도승을 일깨워 자신의 독수도승생활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검증해 주는 이점도 있었다. 손님이 떠나면 그는 다시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다양한 방문객 사막에서의 방문은 통상 수도승 간의 방문이었다. 보통은 젊은 형제가 원로나 영적 사부를 방문했다. 유명 인사는 신분을 불문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유명 인사의 방문을 피하곤 했다. 압바 시몬은 한 행정관이 찾아왔을 때 “띠를 두르고 종려나무를 전지하러 나무 위로 올라갔다. 방문객들이 도착하여 그에게 소리쳤다. ‘원로, 그 독수도승은 어디 계시오?’ 그가 대답했다. ‘여기에는 독수도승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다시 떠나갔다.”(시몬 1) 압바 모세는 어느 날 집정관이 자신을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습지로 달아났다. 집정관 일행이 길에서 만난 모세에게 “원로, 압바 모세의 암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들에게 말했다. “그에게 뭘 원하십니까?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모세 8) 사막 교부들은 오히려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나 악명 높은 사람을 더 환대했다. 방문객 중에는 물건을 훔치거나 수도승을 살해하기도 했던 도적과 강도들도 있었다. 대개는 약탈을 방치했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도적들이 자기에게서 훔친 물건을 낙타에 싣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다.(대(大) 마카리우스 40) 한 원로는 약탈하는 강도들에게 “형제들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서두르시오”라고 말해 강도들을 몹시 당황케 했다(익명의 압바 554). 또 어떤 원로는 기도 시간에 강도들이 들이닥치자, 형제들에게 “그들이 자기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시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합시다”(익명의 압바 607)라고 말했다. 사막 교부들이 하느님 사랑을 드러낸 방식은 우리에게는 너무 낯설고 심지어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서 모든 이를 향한 열려 있는 자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애덕 실천을 위한 적극적 자세와 노력, 비폭력,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의 자유로움 등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릅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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