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격렬한 불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 사랑에 대한 진리를 우리가 이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풍요롭게 분석했다. 아가서를 혼인의 가시적 표징인 몸의 언어를 올바르게 읽는 것에서부터 해석해 혼인의 성사적 표지를 이해하도록 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고 지속시키는 사랑은 영적임과 동시에 관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대의 젖가슴은 야자 송이 같구려. … 그대의 젖가슴은 포도송이, 그대 코의 숨결은 사과, 그대의 입은 좋은 포도주 같아라.”(아가 7,8-10) 두 연인은 서로가 선물임을 발견하며 체험한다.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지만, 몸의 언어와 서로를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몸의 뿌리는 영적인 사랑이다. 마음이 참된 사랑을 갈망하고, 갈망은 몸의 감각으로 이어져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의 울림을 듣는다. 아가서 7장은 가장 관능적이고, 8장은 완전히 신학적이다. ‘몸의 언어’인 에로스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사랑을 드러낸다. 밤에도 멈추지 않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열망과 긴장, 탐색에서도 사랑의 얼굴이 드러난다.(아가 2,17; 3,1-2; 5,6.8 참조) 관능이 넘쳐남에도 경건함이 드리워져 있다. 참된 사랑의 신비, 곧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게 열린 이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선 성(性)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몸·성·사랑에 관한 올바른 앎이 자신을 제대로 세울 수 있고, 타자 또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욕망에 대한 두려움도 정화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은 하느님 신비로 넘어가기 위한 참으로 가치 있는 고통이요 견딤이다. ‘표징’에서 드러난 인간적 실재가 ‘계약과 은총’의 신적 실재를 표현한 것이라면, 에로스는 자신의 완성을 바라보고, 완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아가페)이 에로스를 이끈다. 도착점에 대한 황홀함이 현재를 자극하고 이끈다. 그 여정에서 에로스는 모든 착복이나 지배 단계들을 초월하고, 소유와 욕망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들에서 초월해 나간다.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아가 5,8)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는 것은 에로스의 한계(몸의 약함, 죽음, 정열)를 뜻한다. 몸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교황은 연약한 몸의 제한성을 볼 때 ‘사랑은 몸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고, 사랑의 무한함은 몸의 유한함에 비해 대단히 거대한 것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몸은 ‘부서지거나, 폭발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의 사랑이 그랬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인간 몸에서 폭발한 것이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아가 8,6) 사랑은 결코 죽음에 굴복하려 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교황은 아가서가 세계의 어떠한 문학보다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라 말한다.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아가 8,6) 격렬한 불길은 큰 불길, 성령의 불꽃을 뜻한다. 결국 인간적 사랑과 신적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에서 출발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에로스가 신적 친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기 위해선 몸의 언어가 전례 언어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전례 안에서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입맞춤(만남)’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그 절실함도 우러나기 때문이다.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아가 8,6)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그대는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

아가서 사랑의 이중창에는 누이와 오라버니로 불리는 ‘형제적’ 구성과 “그대는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4,12)이라는 구성이 있다.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은 불가침성을 말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표현을 언어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진리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한다.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의 은유적 표현은 여자의 몸이 갖는 신비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인 ‘나’의 전 구조 안에 가장 깊숙이 선물의 본질적인 진정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연인과의 일치가 갖는 심오한 측면과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은유는 닫힌 정원을 여는 열쇠가 여자에게 있음을, 매우 고귀한 가치를 지닌 여자의 신비를 말한다. 남자는 문을 두드려 열어줄 것을 청할 순 있지만 부수고 쳐들어가 침범할 수는 없다. 여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제공하며, 자신의 열망을 명백히 밝힌다.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아가 5,2) 신부는 여성성의 신비에 대한 주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남자의 눈앞에 내어놓는다. 친교의 일치를 살기 위한 전제는 바로 선물의 자유다. 이 은유적 표현은 인간이 인간에게 밝혀진 것 외에 또 다른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과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내적인 불가침성을 발견하도록 한다. 참된 사랑은 신비를 훼손하지 않고 인격의 신비에 근접해야 한다. 아가서에서 여자는 남자-신랑의 가장 깊은 체험 안에서 결코 훼손되지 않는 신부-누이이며, 자기의 여성성을 지닌 내밀한 신비의 주인이다. 아가서의 연인들은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고, 혼인적 행위를 통해 결합을 이루고 있다. 사랑의 대화 안에서 ‘닫힌 정원’이 신랑의 몸과 영혼 앞에서 열린다. 그리고 깊은 존경과 경이로움 속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종속을 통해 드러난 그녀의 신비를 지킨다. 선택과 선물의 자유 안에서 그녀는 그에게 문을 열고 자신의 신비를 드러낸다. 신랑은 이 신비를 온전히 알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다가가 그녀의 신뢰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고, 그녀가 열어준 정원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표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내 몰약과 발삼을 거두고 꿀이 든 내 꿀송이를 먹고 젖과 함께 내 포도주를 마신다오.”(아가 5,1) 사랑의 노래에서 소유격 ‘나의’가 자주 불린다. 인격의 내적 진리에 부합하는 의탁의 심오함 전체가 담겨있음을 단언하는 의미이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배우자에게 소속되길 원하고, 상호 속함 안에서 심오한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서로에게 속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자신의 운명이 지어졌음을 말한다. 인간의 삶은 우선 주어진 선물이다. ‘낳음’ 받았고 완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이는 큰 질서를 지녔고, 애덕의 훈련을 통해 성숙된다. 특히 정결의 덕은 인격체가 모든 성적인 욕망과 정서를 남편과 아내 사랑의 관계 안으로 통합하도록 돕는다. 부부관계에서 성적 결합은 이런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이 결합을 통해 자신도 타자도 더 잘 알게 된다. 내가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만 자신을 선물로 기꺼이 내어주는 몸의 언어다. 그때 부부는 사랑의 일치에 의해 그들 몸의 일치를 이해할 수 있고, 타자의 몸과 그 몸에 쓰인 성에 대해 존중하는 방법도 배운다. 부부 관계는 하느님 안에서 존재(ut in Deo sit)로 향하는 최종 목적이 있다. 사랑은 두 인격(하느님의 위격과 인간의 인격)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친교이며, 일체 속 관계의 완성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아가서’에 따른 사랑에 관한 교리 마무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이라는 대주제를 아가서를 통해 정리하며, “교리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교리서의 미국판 서문을 쓴 마이클 발트슈타인은 아가서의 묵상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신학하기’로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에로스에 대한 사랑의 시는 오직 기도 안에서만 ‘우리 마음 안의 노래’로 다시 울려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아가서 구절들이 교회의 전례 안에서 울리고 있으며, 태초의 성사적 실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로스가 거룩함의 시원이요 본질적 표징임을 인식하려면 이원론적 에로스 이해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가서의 시들은 하느님과의 ‘혼인적 일치’로 부르심에 대한 경험을 표현한 언어이다. 성적인 특성과 신성함의 통합,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여”(아가 1,8),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 얼마나 더 향기로운지!”(4,9-10)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5,2) “일어라, 북새바람아! …이 맛깔스러운 과일들을 따 먹을 수 있도록!”(4,16) 이러한 표현들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둘만의 관계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음을 말한다. 즉 육화된 실재, 성사적 실재의 가장 본질적 요소를 확인한다. 생명이신 하느님의 혼인적 사랑의 신비는 인간이 소유하는 ‘질료성’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교황은 아가서 시편들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성적인 측면과 신성함을 통합해야 한다며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했다. “충실하고도 행복한 인간적 사랑은 인간에게 신적 사랑의 특질들을 드러내 준다.”(뒤바를르, A.M Dubarle) “아가서의 내용이 성적인 동시에 신성하다.”(리스, D.Lys) 신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신랑의 능력이며 사랑에 대한 시험이자 척도다. 통합적 의미에서 몸에 대한 이끌림은 항상 그 대상인 사람, 그 자체이다. 이는 마음으로 보는 전망이며, 바라보는 이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고 결정한다. 아가서에서 신부를 깊게 응시하는 신랑의 태도는 신부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바라봄’이 존재의 지향성을 결정한다면, 연인은 선물의 진리에 따라 살아감을 결정한다. 신랑은 여자를 선물로 받아들이며 애틋이 존중하는 태도로, 이름이 아닌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 불러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 불러 주길 여자가 원했던 것이다. “아,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던 오라버니 같다면!”(아가 8,1) 교리서는 신랑의 인식에서 누이가 신부로 가는 과정은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고 한다. 자신의 연인을 누이로 부르면서 사랑의 동기를 평가하고, 누이는 두 사람의 존엄성이 같음을, 갈망하는 것이 음욕이 아닌 사랑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몸의 언어’에 속하는 누이는 혼인적 사랑의 진리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아가서의 연인은 참된 에로스가 소유와 이기적인 만족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증거한다. 상호적 황홀경 안에서,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때 누구의 경멸도 받지 않고 나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으련만.”(아가 8,1) 이러한 경험이 깊은 내적 평온함을 가져온다. “나는 평화를 찾은 여인처럼 그렇게 당신 눈앞에 있습니다.”(아가 8,10) 교황은 하느님 모상인 남자와 여자가 신실한 자기 증여의 선물로 받아들인 때를 ‘몸의 평화’로 묘사하고, ‘나의 누이, 나의 신부’로 부른 것이라 한다. 이 신성한 유대는 초자연적 질서 안에서 구성됐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의 언어’와 ‘몸의 예언주의’ 표지와 내용

“큰 신비”(에페 5,32)의 세 번째 요점인 ‘한 몸’은, ‘몸의 언어’와 ‘몸의 예언주의’를 드러내는 표지(標識)이며 내적 구성이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성체성사의 선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토대로, 성경이 말하는 본래적 부르심과 배우자의 자기 증여를 다룬 부분이다. 부부의 구원적 사랑을 통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몸”(에페 5,31; 창세 2,24)이 되는 신비를 보여줬다. 교리서는 몸은 인간 주체성의 표현이므로 ‘한 몸’을 이루려면 배우자는 각각 ‘하나의 주체’가 돼야 한다며,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페 5,28)이라는 말씀으로 이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에페 5,25)이 배우자 간 개별적 인격성의 경계를 흐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본질적인 ‘두 주체성’은 항상 ‘하나의 주체성’을 기초로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배우자에게 자신을 진실한 선물로 내어주며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의해 자신을 잃거나 잠식당하게 된다. 그렇게 된 경우는 ‘한 몸’도 일치도 아니다. 신랑 신부의 친교 행위로 표현되는 몸의 언어는 성사적 표지의 기초이자 그 중심이며 내용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신랑 신부가 몸의 언어 없이 혼인 서약만으로 ‘혼인이 완전히 성립될 수 있느냐?’라는 신학적 논쟁을 이어왔다. 그 이유는 혼인 서약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준비 단계에선 성사적 표징이지만, 육체적 결합 없이는 완전한 혼인으로 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식 중 이뤄지는 혼인 동의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겠다는 지향의 질서 안에 있는 순간이고, 혼인은 서약의 교환과 육체적 결합을 통해 비로소 완결된다고 봤다. 혼인 서약은 혼인 성사의 ‘형상’이 되고 남편과 아내의 몸은 ‘질료’가 된다. 그들은 스스로 고백하고, 육체적 결합을 통해 고백을 실제화한다. 따라서 혼인 서약의 교환은 지성과 의지 그리고 의식과 마음의 수준에 따라 영적 실재인 사랑, 증여, 충실함을 표현하지만, 몸의 언어 없이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지성과 의지의 영적 표현은 그에 상응하는 육체적 표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신랑 신부가 증인들 앞에서 하는 서약 “당신을 내 아내/남편으로 맞아들여, …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습니다”를 표지의 측면에서 혼인의 성사성으로 분석했고, 이 표지에 담긴 몸의 언어는 창세기(2,23-25 참조)에 기원을 두고, 에페소 서간(5,21-33 참조)에서 그 최종 완성을 만나게 된다. 혼인 반지를 교환할 때 “나 누구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반지를 드립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그들 사랑의 기원과 지향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음을 말한다. 둘이 하나 되는 긴장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실제로 드러나며, 인간 존재의 신비가 스스로에게 계시되는 놀라움을 체험하게 된다. 반지를 끼워줄 때, 배우자가 절반을 건네고, 당사자가 반지를 깊이 밀어 넣는다. 이는 두 주체가 자유로운 인격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행위의 표현으로, 그 안에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네, 제가 당신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한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성사 이전의 성사입니다(Presacramento). 오직 영원한 사랑의 가시적 표지입니다.”(「트리티코 로마노(Trittico romano)」, II, 3)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교회의 성사성과 가장 오래된 성사의 관계

“큰 신비”(에페 5,32)의 두 번째 부분은 교회의 성사성과 가장 오래된 성사 사이의 관계다. 곧 남편과 아내의 일치(창세기)라는 가장 오래된 표징과 “때가 차자”(갈라 4,4) 아들을 보내어 혼인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드러낸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두 표징을 하나의 위대한 표징과 성사로 봤다. 계시의 두 단계를 말한 ‘큰 신비’,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태고의 단계와 때가 찼을 때 말씀의 육화로 가능해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 후자가 앞의 것을 비추며 이끌고 있다. 그리스도-교회, 남편-아내의 일치를 연결하는 것은 몸 신학 전체 맥락의 핵심 열쇠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하나의 위대한 성사를 형성하는 이 두 표징의 상호 관계, 곧 성사적 질서의 토대는 이미 예언서를 통해 호소 됐다. 이사야서, 호세아서, 에제키엘서, 아가에서 하느님 사랑의 특징은 조금씩 다르나 한결같이 신랑의 정결을 말하고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는 아주 특별하고 풍부한 신학적 내용이 담겨 있는데, 아마도 하느님 편에서 가장 강렬한 사랑의 선언이고 자신의 전부를 건 엄숙한 고백일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이사 54, 4-5) 불충실한 신부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신부를 향한 신랑의 자비로운 사랑의 동기를 강조한다.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관계는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인격적이다. 강생 사건은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당신의 자유롭고 영원한 사랑에서 왔다. 그러면서 사랑의 동기와 혼인 그리고 계약의 동기가 연결되며 창조주에서 구원자로 발전한다. 호세아서에서는 처음으로 부부 관계가 출산이나 재산 보장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로 ‘인격화’됐다. 잠언에선 혼인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2,17)이라 했고, 말라키서에서는 신부를 “너(신랑)와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2,14)로 전한다. 구원적 사랑이 예언서들에서 어떻게 혼인적 사랑으로 드러나는가에 대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사도 바오로가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이란 말을 반복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오로는 구원자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을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음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도 바오로는 구원적 사랑을 교회와 혼인해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만드는 부부 사랑으로 계시한다. 성사에 대한 이해가 고대보다 넓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안에 숨겨진 신비의 계시와 성취를 의미했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준비한 ‘감추어진-계시한(hidden-revealed)’의 긴장 안에서 ‘신비-성사’의 관계로 이해한 것이다. 혼인이 계약으로 성립된다는 것은 감정에 의한 순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이 메말라 갈 때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계약자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 포기가 아니라 도전해야 한다. 이때의 선택 하나하나가 파스카, 곧 죽음과 부활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결정들에 현존하고, 우리의 변화 그 중심에 함께 하신다. 이렇듯 부부 사랑은 신적 사랑의 친교를 지향하고,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의 원천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좁은 의미로는 세례를 받은 신랑, 신부에게 해당되지만, 넓은 의미론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의 혼인도 ‘시원적 성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이는 큰 신비입니다”(에페 5,32)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사도 바오로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유비로 선포하면서 ‘큰 신비’라 했다. 큰 신비에 함축된 여러 의미를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1~2장 참조)에 대한 재조명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갈라 4,4 참조) 숨겨 두신 혼인의 계획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서 완성돼야 할 ‘한 몸’의 신비다. 혼인의 내적 의미인 이 세 가지가 혼인이 가야 할 길이고, 진리이며, 역동하는 생명, 곧 사랑의 길이다.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과 가장 오래된 혼인과의 관계다. 사도 바오로는 단순히 외적인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둘의 관계를 유비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그들의 혼인을 재조명하라는 이유는 부부가 나누는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성을 갖기 때문이다. 공적으로 동의하고 맺은 혼인의 계약은 존중과 신의 그리고 사랑의 충실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변화 성숙의 여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고통, 슬픔과 즐거움의 일들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는 길이고, 이 참여를 통해 혼인의 성사성이 갖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제시된 이유는 혼인이 영원한 신적 신비의 가시적 표징이 되는 성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남편과 아내를 결합시키는 이 유비에 놀라움을 더하는 것이 있다. 티도 주름도 없는(에페 5,27 참조), 즉 추함도 늙음과 노쇠함도 없다는 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사랑이 ‘영원한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랑을 영적인 아름다움의 표징으로 이해했다. 교회도 부부도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나누는 혼인적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적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고, 아가페적 사랑이 그 정점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눈물과 상처 그리고 좌절을 체험할 것이고, 후회와 간절함에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 여물어진다. 즉 서로를 받아 내고 품는 과정을 통해 둘만의 새로운 시간들이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먼저 고찰한 후 사도 바오로가 말한 신랑 신부의 관계를 바라본다면 혼인의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이는 둘이 하나되기 전 원고독의 이중성(본성 그 자체로서 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과 완전한 주체성, 상호주체성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교리서는 말한다. 결국 혼인의 본질은 인간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신비가 그 원천이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혼인적 사랑으로 시간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신비가 그 중심이다. 이러한 여정을 사랑의 신학 용어로 설명하면, 에로스적 특성이 넘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에로스적 사랑의 특징은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다. 자신을 열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에 그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과 자신들의 체험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에게 발견되고 드러나야 할 신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의 의미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사랑일까? 감정에서 출발한 사랑이 영혼을 확장시키는 사랑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사랑도 순종도 그 시작과 끝은 ‘나’가 아닌 ‘그리스도’가 근원이요 모델이다. 유비로 선포된 위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감을 따기 위해선 먼저 감을 바라봐야 하듯, 주님의 선물을 먼저 바라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으로 너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혼인에 담긴 신비는 거룩함 그 자체를 관조할 때, 윤리적 도리나 삶을 짓누르는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는 여유를 얻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에페 5,23) 그리고 “남편 여러분, …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에서 그것이 가능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유는 교회에 당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인에 관계된 이 말씀들은 ‘처음’부터 혼인의 신적 제도를 지향하는 배우자적 사랑의 정신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한 몸”(창세 2,24; 에페 5,31)을 이루게 된 그 특별하고도 유일한 관계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3) 이 유비는 다른 서간과 함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1코린 11,3)를 연결해서 보면 몸은 아내와 동의어로 쓰였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15)에서 몸적-혼인적 교회론을 볼 수 있다. 예수는 머리이자 구원자이지만, 남편은 머리이나 구원자는 아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사도의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유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절에 동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완벽하고,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순종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교회에 해당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상호 순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근원은 존중이다. 교리서에서는 존중을 인간 사랑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자각하는 것으로 봤다. 한 가정을 구성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안에서 꽃피우는 자각이다. 존중은 인간 사랑 그 자체의 뼈대가 된 하느님과의 관계에 우리 눈을 열어준다는 것, 즉 다른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모습을 알아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말씀의 육화에는 겸손이 전제되어 있듯 타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격성을 바라보고 그 인격성 앞에 겸손해야 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그 고유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근원과 분리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적 신비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서로의 몸은 경계선의 벽으로 남을 것이고 혼인의 위대한 신비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손함은 사랑의 위대함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킴을 뜻한다.”(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랑과 책임」)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상호 순종의 의미

에페소 5장은 현시대에선 공감하기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순종을 점진적으로 전개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21절)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22절)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23절)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설정한 사도 바오로의 21절 말씀은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과는 달라 분명 논쟁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비롯됐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을 먼저 주셨고, 남자와 여자는 선재한 이 선물에 의해 상호 순종을 받아들이고, 그 순종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받아들인 순종의 근원은 그리스도이고, 타자를 그분의 인격 안에서 대하는 것을 말한다. 교리서는 순종을 존경의 차원에서 열었다(교리서 89과). 존경은 부부 관계의 바탕을 구성하는 골격이고, ‘선물’에 대한 믿음과 몸이 지닌 성사적 의미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리를 이해할 때 더욱 깊은 인식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 방향의 중요한 교차점이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비로, 인간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으로 교회 안에서 실현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세례 받은 사람과 공동체들이 신적 계획에 동참하는 삶을 말한다(교리서 88과). 순종은 개인성이 무시된 무조건적 따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완전히 하나를 이룬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과 사랑의 완전한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발타사르는 순종을 내어줌의 힘(능력)이라 표현했다. 이렇듯 순종의 내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부부 상호 관계 안에 영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두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가지이고, 가지가 원천을 경외하듯이 서로에게 순종함을 말한다. 이는 세상의 부부들이 서로 배려하고 받아들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 삶의 모습에 그리스도 현존의 향기가 있고, 이 현존은 그들에게 선물 된 사랑을 보존하는 질서가 된다. 선물을 살아가는 본래적인 방법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균형적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원죄는 이 균형적 사랑을 파괴했고, 욕정에 사로잡혀 선물의 삶이 아닌 지배 구조로 타자를 바라보게 했다. 상호 순종은, 서로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유혹과 자신에게 기울어져 닫혀 버린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최종선을 바라볼 줄 아는 더 높은 호의적 사랑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상호 순종의 소명은 남성성 여성성의 서로 다름에서 상호 보완성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나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자유의지가 동화되어 일어날 때까지 사랑과 은총으로 감싸고 기다리시듯, 상대에 대한 사랑이 수용성과 감수성으로 넓어질 때, 상호 순종의 빛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혼인은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출발하지만, 그 출발 안에는 그들의 과거도 함께 들어온 크나큰 사건이다. 남성성 여성성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 달라, 사고하는 것과 그 외 많은 것이 다르다. 때론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그대 앞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일치되지 않는 크고 작은 아픔들, 미움도 거리도 생긴다. 이때 있는 그대로 보아 주고 기다려 주는 것은 순종의 덕이고, 이 덕은 더 나은 변화를 위한 기폭제가 된다. 그래서 상호 순종은 복음적이며, 부부에 대한 하느님의 숨겨진 계획은 두 사람의 완성을 희망하게 된다. 만약 혼인이라는 배가 출항할 때, ‘상호 순종’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거센 파도가 있을 수 있는 바다에서도 떠내려가지 않는 지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그리스도교적 혼인

교리서 제5부(87과부터 113과)의 주제는 에페소 서간과 예언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적 혼인이다. 땅에서 맺은 혼인의 근원과 최종목적지는 어디인지, 어떻게 할 때 순항할 수 있는지를 선포한 부분이다. 혼인은 공적 계약이고,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노래가 두 인격의 본질을 이룬다. 수많은 아픔과 기쁨, 고통과 죽음을 헤쳐가면서 두 인격의 관계가 전 생애를 통해 서로를 성숙하게 하고 완성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람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고, 그분에 대한 신뢰가 성장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도 성숙하기 때문이다. 만약 혼인이 문화와 인간학적으로 단순하게 축소된다면, 인류에게 주어진 혼인의 그 위대한 신비에 이르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여정이 될 것이다. 5부에서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는 말씀은 에페소 서간 5장 22절부터 33절까지다. 사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익숙하고, 혼인미사에서 선포되는 독서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가 몸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유비(類比)가 에페소 서간을 통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2,24 참조)이 지닌 참뜻을 반추하고 완성하는데, 그 신학적 의미가 사뭇 깊고도 놀랍다. 혼인은 창조 질서이며 은총의 질서에 속하고, 또한 구원의 성사다. 만약 혼인을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만 바라본다면, 평행선에 자신들을 두게 되어 세상이라는 파고를 헤쳐 나가기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이 평행선에서 다른 한 점을 발견할 때, 즉 그리스도와 관계를 둔 삼각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혼인에 깃든 은총과 인간의 구원적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혼인과 가정을 사목 중심에 두는 중요한 이유다.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친교가 신랑 그리스도가 신부 교회에 대한 사랑에 실제로 참여하는 방법이고, ‘영원히’와 연결돼 있기에 교회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목이다. 교리서 전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제5부는 ‘한처음’(마태 19,4; 마르 10,6 참조)과 인간의 ‘마음’(마태 5,28 참조) 그리고 미래의 ‘부활’(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5 참조) 그 정점에 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관점에 이르기 위해선 인간 몸에 관한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조명되고 해석돼야 한다. 에페소 서간은 다양성과 성의 다름에 기초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을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에페 5,1)으로 살아가길 초대했고, 그 절정에 남자와 여자의 혼인을 그리고 이 관계의 바탕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관계를 선포했다. 한처음부터 성의 다름은 단순히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내어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와 만나고, 보이는 타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절대 타자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담고 있기에 혼인은 새로운 계약과 은총의 표지이며, 창조와 은총의 질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혼인적 사랑에는 하느님 계획 안에 다른 최종 목적지가 내재해 있음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유비를 통해 혼인이 인간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이라고 에페소 서간은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의 계약적 의미를 아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 본성과 그 근원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하며, 윤리 조건의 근본 가운데 하나인 ‘혼인과 가정’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원인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동정과 독신에 쓰여진 몸의 혼인성

교리서 4부는 몸의 의미를 계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동정과 독신 성소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다. “존재의 동일한 혼인적 의미를 토대로 남성 또는 여성인 몸으로서 전 생애 차원에서 인간을 혼인으로 의무 지우는 사랑이 형성될 수 있다면, 인간을 ‘하늘 나라를 위한’ 금욕으로 전 생애 차원에서 의무 지우는 사랑 또한 형성될 수 있습니다.”(80과 6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성 안에서 교회에 대한 혼인적 사랑(에페 5,22-23 참조)을 완성했음을 기억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천지 창조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8) 하신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성에 거룩함(聖性)과 아름다움(善性), 두 가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했기에 거룩하고(창세 1,26-27 참조), 내용이 조화롭고 그 질서가 존중됐기에(창세 1,28-30) 아름답다. 거룩함(聖性)과 아름다움(善性)이 씨앗처럼 뿌려졌고, 인간은 선물 받은 자유를 통해 자신의 행위들을 성장시키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즉 인간이 무한을 향해 열려 있음을, 그 과정에 하느님도 인간도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죄를 범한 후에도 거두어 가지 않은 인간의 자유가 그것을 말한다. 처음 선, 그 자체가 근원이 되어 갈망이 태어나고 완성되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 선택하는 인간의 외적 반응은 자신의 내적(영혼)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동정과 독신의 성소가 ‘넘치는’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인간 본성에서 가장 탁월하게 축복받은 부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부부애 신비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근거하며 ‘놀라운 사랑’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다. 그 이유는 본성, 성, 관능 이런 것들이 변화 성장을 통해 한 인격으로 성장 완성되는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모를 돕기 위해 교황은 인격 안에서 동정 독신 소명이 ‘양성(Formation)’의 관점보다 정확히 ‘성숙화, 변화의 과정(transformation)’과 관련될 때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외로움은 그분을 만나는 고독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몸’은 몸의 혼인적 의미를 회복할 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에서 당신 몸을 혼인적 선물로 교회에 내어놓았고, 부활한 몸으로 실제로 찾아와 나와 한 몸을 이뤘다.(성체성사) 인간 존엄성과 몸의 혼인적 의미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자신 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했고 자신의 전부를 건 특별한 선택이 바로 신적 사랑에 대한 응답 행위다. 그리고 혼인적 사랑의 행위인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적 삶이 먼저여야 한다. 그런데 그분은 나의 어려움을 한순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칼’과 ‘불’을 주겠다 하신다.(마태 10,34, 루카 12,49 참조) 자신이 가는 길에 무절제하고 부정적인 욕망이 있으면 칼로 단호히 잘라야 하고, 아직 내 마음이 수동적 사랑으로 미적거리고 있다면 불이 타올라야 한다. 연소의 특징은 바닥에서 위로 오르고, 위로 오르면서 옆으로 전파된다. 내 가족처럼 달라붙어 편안하게 느끼는 것에서 과감히 일어서야 한다. 최고의 가치를 알 때, 그곳에 이르려는 열망이 활활 타오를 때, 그것은 가능하다. 성령의 불꽃이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신다.”(묵시 22,17)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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