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거나 숨겨져온 성적 욕구 ‘몸의 속량’ 관점에서 바라보며 자유 안에서 최종 선에 응답해야
우리는 성적 표현의 여러 양상이 공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개방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성이 모두에게 선으로 체험되진 않는다. 단순히 쾌락과 순간적 감정에 몰입해 행동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인식하고 바라보는지 개인의 의식과 사회적 분위기는 중요하다. “육의 욕망 영역에서 생기는 음욕은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모든 ‘역사적’ 인간이 경험하는 일종의 내적이고 신학적인 실재입니다. 역사적 인간이란 비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 해도 자기의 ‘마음’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44과 1항)
성적 욕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긴 역사 동안 왜곡되고 숨겨져 왔다. 철학적 사조, 문화와 관습으로 성(性)의 의미를 축소·왜곡하거나 보지 못하게 덮었다. 만약 누군가 성(性)을 공론화한다면 그는 불순하고 품위 없는 사람, 덕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 의미가 변질, 변형되게 한 원인으로 영지주의와 마니교를 말한다. 그들은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다. 영지주의는 정신을 선으로 육체를 악으로 단정하고, 육적인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니교는 물질과 육체를 악의 근원으로, 성은 단지 성적 위안을 줄 뿐 인격적 사랑의 길을 열어 주지 못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의 구원관은 그리스도 역사 전반에 걸쳐 몸에 대한 종교적 사고를 병들게 했다. 그래서 교황은 인간의 몸, 특히 성적인 모든 가치를 폄하, 평가, 이해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과 맞지 않다고 말한다.
교황은 육의 욕망 행위에서 더 근원적인 ‘갈망’을 보도록 한다. 갈망이 인간 존재의 주체성을 결정하면서 인격체로서 자신의 존엄성에 참여하는 요소라 말한다. 몸의 윤리적 의미를 ‘몸의 속량’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악은 몸의 근본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경항, 습관)과 관련되므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고, 욕망에 든 진리가 무엇인지 질문하자는 것이다.
“마니교적 태도는 결국 인간의 성을 ‘무가치하게’ 만듭니다.”(45과 3항) 몸과 성은 성사적이고 사랑은 인격이다.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성과 관련된 행위, 감정, 욕망, 정체성 등은 두 사람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이 안에 사랑받는 사람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역동성이 있음을 뜻한다. 성을 통해 ‘너 내 안(Intus)에 있음’이 더 깊은 안(Interior)까지 파고 들어간다. 서로의 안에서 서로가 ‘나의’로 소속되고 ‘하나’ 됨을, 타자 안에 나의 세상이 만들어진 신비함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교황은 남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여자는 성과 생명 탄생이 연결됨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지만, 남성은 그런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므로 성행위를 하나의 행위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으로 직접 성과 인간의 신비(잉태, 출산)가 연결된다는 것을 체험하는 여성이기에 더 진중하게 생각하고 성행위에 저항하는 마음도 크다.
인간의 선(Bonum)은 ‘최종 선(Bonum)’을 향해 있고, 인간 행위는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 선에 대한 응답을 찾는다. 성 또한 몸의 질서에 있다. 힘으로 열 수 없는 문이 하나 있으니 마음의 문이다. 힘으로 그를 꺾을 수는 있어도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그토록 존엄하고 귀한 나와 너가 서로 다른 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