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주님의 기도를 전체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고 오늘날에도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성무일도 아침·저녁 기도와 미사 등 하루에 세 번씩 바칩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및 그와 유사한 시기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마태 6,9-13;루카 11,2-4; 디다케 8,2)가 주님의 기도를 전하며 후대에 삽입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마침 영광송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모두가 사용합니다. 종말론과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후기 유다교는 여러 청원 기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청원을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내용상 그와 유사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로 모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선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넘어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주권자이시면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와 유혹과 악 등 우리의 구차한 삶을 돌보시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의 품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과 관련되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첫 번째 청원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청원에 답하실 때 기도하는 이는 이 거룩함에 사로잡히고 변화됩니다. 두 번째 청원은 하느님이 지니신 임금의 주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나라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곳으로 기대했고(이사 9,6; 32,15-17; 52,7; 60,17)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은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자기 뜻을 억누르거나 윤리적으로 완벽히 행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인 정의와 평화는 기도하는 이가 하느님이 원하신 피조물로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때, 하느님과 함께 자기 뜻을 펼치고 행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네 번째 청원은 유일하게 물질적 선물에 관계되지만,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신뢰, 타인과 함께 나눌 시간 등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을 선물하시고 과거에 대한 미련 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을 온전히 살도록, 영원한 현재인 하느님 앞에서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다섯 번째 청원은 상처받은 삶의 치유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얽히고설킨 자기 삶의 역사 전체의 화해를 청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너그러우심을 청하듯이 자신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른 마음을 드러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이끌어 주십사는 여섯 번째 청원은 일상의 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궁극적 유혹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늘 동행해 주시기를,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기를 청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청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눈감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청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지시어 그분의 품 안에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일곱 가지 청원 중 용서의 청원에서만 인간의 행위가 나타나므로 주님의 기도는 완전히 하느님 중심적인 기도이며 그 안에 그분 안에서 평화로이 숨쉬고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의 여여함이 드러납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신뢰하는 보잘것없는 이들: 루카복음서의 기도

성전에서 시작해서(1,8-10)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끝나는(24,53)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분으로 제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은 기도 자체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시편 22,19)라는 시편 말씀을 예수님의 입에 올리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1,6)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 제시한 루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 드러내며 죽음도 봉헌의 의미로 달리 해석 같은 루카가 저술한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등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을 입에 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스테파노는 그분의 첫 증인입니다. 분명 시편을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은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는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실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루카는 다른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과감하게 달리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부재중에 사람들 멸시를 받으며 처절한 외로움 속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당신에게 죽음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기도 중에 봉헌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기도하시면서 죽으시고 죽으시면서 기도하시는 루카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뛰어난 비유 세 가지를 들려줍니다.(끊임없이 간청하여라: 11,5-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18,1-8;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14) 끊임없는 간청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첫 번째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11,2-4)를 해설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지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께서 비유에서는 친구의 청을 귀찮게 여기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마지못해 그에 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십니다. 비슷한 모습이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그다음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어떤 재판관의 모습과 하느님이 비견됩니다. 과부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재판관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과부가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그에 응합니다. 항구한 신뢰와 용기가 기도에 필요합니다. 과부와 세리가 지닌 용기와 겸손 하느님 향한 따뜻한 신뢰가 핵심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겸손도 필요한데, 이것을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라는 세 번째 비유가 이야기합니다. 성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남다름을 내세우며 장황한 감사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대비됩니다. 과부와 세리, 그들이 지닌 용기와 겸손을 연결하는 것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은 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품는 따뜻한 신뢰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으로 마무리됩니다(18,15~17). 루카는 기도하는 이들이 부모 앞의 어린이들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기도의 골자로 가르칩니다. 우리도 늘 자신의 사정을 하느님께 아뢰고 그분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리시라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그러한 삶에 초대하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2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기도의 길잡이인 마태오(마태 6,5-8; 18,19-20)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산상설교(5~7장)의 한가운데 주님의 기도를(마태 6,9-13) 배치하고 그의 서두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태오는 이렇게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특성을 드러내면서, 당시 유다교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의 기도와 구분을 시도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환경에서 쓰인 디다케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너희의 단식은 위선자들의 단식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한다. 하지만 너희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셨던 것처럼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마라.” 여기서 단식과 기도 등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실천이 사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는 바리사이들이나 디다케가 쓰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달리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행동을 통해서 사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마태오 복음서는 기도를 개인의 것으로 변화시키고 유일하신 분과의 친밀함을 기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를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입에는 오르지만, 마음에는 없는 기도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그런 기도를 오래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식과 같이 그분을 신뢰하는 이만이 하느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몇 사람이 있어야 예배가 성립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많은 토론을 벌였습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남자 10명을 정족수로 여깁니다. 여기에 마태오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중요한 것은 숫자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 또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질입니다.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튼튼한 공동체, 보이지 않게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께 기도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이 바로 기도가 이루어질 정족수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 아니면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것, 아니면 주일에 공동체가 모여 성대히 미사를 거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느님을 푸근한 아버지로 느끼는 이에게는 이 모두가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자신의 소원을 앞세우는 이들에게,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그중 어떤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 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나의 기도에 대한 확신인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인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루카 11,9-10 참조)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모든 기도가 들어질 것처럼 여겨지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경우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내지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등의 성경 본문은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주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루카 11,11-13 참조) 이어지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핵심 본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들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떨치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라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사는 어린이들처럼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6,25-34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1-22; 마르 11,22-24; 루카 17,6 참조) 하지만 기도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빵과 생선을 주되, 돌과 뱀을 주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가 청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또 산을 옮기는 대신 산을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기도할 때는 마치 하느님만이 계신 듯이, 일할 때는 마치 자기만이 있는 듯 행하라!”는, 루터 내지 이냐시오 로욜라로 소급되는 영성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총의 영역에, 활동은 윤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은 각각 고유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자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설명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드릴 때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라는 데레사 성녀의 단순한 기준,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제가 옮길 수 없는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제가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제 자신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또 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혜를 주소서! (어느 수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활동과 기도: 마르코 복음서가 가르치는 기도

기도는 거룩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권력과 부의 상징이 아니라 기도의 장소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함이 기도와 활동을 연결시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2-38)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군중에 휩싸여 계시지만 당신의 활동에 매몰되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는 복음서 끝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에 질려 이 시간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시는 동시에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맡기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지막 활동, 즉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세 가지 힌트를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로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찾는 것이고, 셋째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간결하고 급박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즉각적인 특징을 지니며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활동은 바로 고요함으로 물러감 내지 홀로 하느님과 기도함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마치 생리 과정처럼 숨을 들여 쉼과 내심으로, 묵상과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긴장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각인시켜 왔습니다.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도미니코회의 ‘묵상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 예수회의 ‘활동 안에서의 관상’ 내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 가르멜 영성과 일반 직업 생활을 연결하는 최근 새로운 영성 공동체의 모습 등은 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을 낸다’, ‘충분한 시간’, ‘시간이 가는 것을 잊는다’, ‘시간을 투자한다’, ‘시간표’, ‘시간을 쓴다’, ‘예약 시간’, ‘시간을 희생한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적다’, ‘후회되는 시간’, ‘시간 낭비’, ‘무의미한 시간’, ‘시간을 죽인다’ 등.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반성하게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활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동은 기도를 실제가 되게 하며 기도는 행동을 진리 안에 놓는다.”(에버하르트 베트게: 개신교 신학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친구)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03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시편 22; 마태 27,46)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시편 22편을 읊으셨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침묵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만 기도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에 허무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선 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유다인 회당 안 동편의 기도하는 곳에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라!”는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기도는 자기 영혼에게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질문, 두려움과 의심에서 나오는 하소연과 고발, 침묵과 경청,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타인을 향함, 청원과 신뢰, 더듬으면서 답을 찾아감, 기도가 들어졌음에 대한 확신, 감사와 찬양과 충실함의 맹세 등으로 이루어진 시편 22는 기도가 상대방과 나누는 극적이면서도 참된 대화임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멀리 계신 듯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2,2) 시편 저자는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22,15)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22,22)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놓인 벽에 금이 가고 그것이 허물어지면서 기도하는 이는 갑자기 하느님 앞에 마주 섭니다.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가 실현되고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22,4)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바로 기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아계신,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답하지 않는 죽음의 벽 앞에서 서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마태 27,39-44; 시편 42,4)라는 믿지 않는 이들의 빈정댐,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라는 신앙인의 절규는 침묵하시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기도가 즉각적으로 들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갈고, 하느님이 관대함으로 맷돌을 천천히 돌리신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준엄하게 만회하신다.”(플루타르코스/섹스투스 엠피리쿠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는 말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때가 되면 그분이 개입하실 것이라 희망합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비극을 희극으로 당장 바꾸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혜와 희망의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22,25)라는 구절은 항구히 기도하는 이의 체험을 전해줍니다. 기도하는 이는 자신을 버러지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으로부터 긍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의 먼지를 응시하면서도 모태로부터 자신을 빚어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참회 기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시편 51편, 130편)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위령기도를 바치는 위령성월이 다가옵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하시나이다.”(시 130,1-40: 최민순 역)라는 구성진 위령기도 소리를 들으면 돌아가신 가족과 친지를 떠나보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막막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함께 바치는 위령기도는 경황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줍니다.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 51편과 130편은 죄를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죄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과연 들어 주실까요? 시편은 악인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를 행복한 이로(시편 1편 참조), 죄인을 하느님이 미워하는 이 내지 기도하는 이의 원수로(시편 63,10-12; 139,19-22) 칭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들은 깨끗하고 흠 없는 이들입니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라네.”(시편 15,1-2).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당신께서 제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중에도 캐어 보시며 저를 달구어 보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시편 17,3) 그러므로 반복하여 죄짓는 이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집회 34,31)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은 죄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 기도 반성과 회개, 신뢰로 용서 구하며 하느님과 관계 회복 위해 애써 하지만 참회 시편은 죄를 지음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 중의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의 결백하심에 대비시킵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5-6) 이어서 시편 저자는 변화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로이 만들어 주시길,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 51,12-14) 끝으로 시편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겸손되이 자기 잘못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종합하자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올바르고 정직하거나, 적어도 그렇기를 원해야 한다고, 또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반성과 회개, 그분에 대한 신뢰로 하느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힘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상태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죄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극명한 대비 속에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이 죄스러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에 근거합니다. 이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용서를 구하는 시편 기도가 이 무상함을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게 해달라는 이들의 기도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느님(토빗 3,16;3,11-15;13,1-14,1)

20번 정도 기도를 언급하는 토빗기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4,19;12,6.7.17.20), 건강과 안전의 청원(5,17), 보살핌과 축복의 청원(7,11;9,6), 후손의 기원(10,11), 부모 공경의 청원(10,13), 자비와 평화의 기원(7,11), 하느님 찬양의 권고(12,6), 조신함과 성공의 청원(4,19), 자비와 구원의 청원(8,4)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토빗기는 죽고 싶다는 이의 기도도 들려줍니다. 토빗은 고지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외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미 고향에 살 때도 집안 사람들과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물을 드렸고, 이방인들 사이에 포로로 살면서도 까다로운 음식 규정을 지키고 동족에게 큰 자선을 베풀고,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1,6-20) 축젯날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된 상황에서(민수 9,10;19,11) 하필 성결법을 지키고자 방이 아니라 담 옆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그의 고집스러운 신앙생활은 이웃은 물론이고 부인조차 불편하게 한 듯싶습니다.(2,14) 아내를 의심하고 그와 다툰 뒤 토빗은 자기 연민에 쌓여 죽기를 청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3,6) 한순간에 눈이 멀어버린 토빗과 남편을 일곱이나 잃게 된 사라 절망 속에서도 목숨 거둬주시길 기도 진실한 기도 하느님께 다다르자 두 사람 고쳐 주도록 라파엘 파견돼 모든 문제 해결되면서 하느님 찬양 일곱 남자와 결혼했지만, 신랑과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모든 남편을 잃은 사라는 이웃의 흉흉한 입담과 자기 신세 한탄으로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부잣집 딸입니다. 그녀로부터 매 맞은 여종들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하자 사라는 목을 매 죽으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남아계실 아버지가 받을 수모를 생각하여 하느님께 죽음을 청합니다. “분부를 내리시어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다시는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게 하소서. … 아버지에게는 저를 아내로 맞아들일 가까운 친족도 일가붙이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남편을 일곱이나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저를 모욕하는 저 말이라도 들어 보소서.”(3,13-15) 둘 다 외로움의 낭떠러지에서 죽고 싶은 생각으로부터 올려진 절망적인 기도이지만 이는 하느님 앞에 다다르고 마치 극의 한 장면처럼 라파엘이 파견됩니다.(3,16-17)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을 기도로 장식합니다.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 내 후손 가운데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임금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나 얼마나 행복하리오? … 복을 받은 이들은 거룩한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라.”(13,4.16.18) 그의 시선은 포로 생활과 나그네살이라는 현실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릅니다. 재산이 많은 토비야 이야기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도 재산을 많이 모으는 유다인들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 하지만 토빗, 토비야, 사라, 라구엘, 라파엘 등 앞 세대와 뒷세대, 남녀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띕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12,8;14,8-9)는 말씀은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선행을 잊지 않게, 재산을 지닌 이로 하여금 자선을 잊지 않게 도와줍니다. 기도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12,12)는 라파엘 천사의 말씀 자체가 힘이 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13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다니엘의 참회 기도(다니 9,2-23)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전형적인 참회 기도를 전해줍니다.(참조: 느헤 1,4-11;9,4-37; 에스 4,17⑬-㉚) 다니엘은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채워야 하는 햇수를 곰곰이 생각합니다.(예레 25,11-12) 기도에 앞서 그는 단식하고 자루 옷을 두르고 재를 쓰고 준비한 후, 진지하게 기도와 간청으로 탄원합니다.(9,3) 그의 기도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배신을 길게 고백하고 (9,5-11.13-14) 하느님의 용서를 반복해서 청합니다.(9,9.16) 그런 다음 ‘이제’(9,15.17)라는 말을 통해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밝힙니다. “주님, 당신의 그 모든 의로운 업적을 보시어,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분노와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 주님,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어 황폐한 당신의 성소에 당신 얼굴을 빛을 비추십시오. … 눈을 뜨시어 저희의 폐허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성을 보십시오.”(9,16.17.18) 다니엘은 자신이 청하는 바를 단순히 민족의 해방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높인다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때, 그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얼굴을 마주 봄으로써,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느님의 입장을 반영한 기도를 하느님은 바로 들어 주십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며 아뢰고 있는데, 지난번 환시에서 본 가브리엘이라는 이가 저녁 예물을 바칠 때 빨리 날아서 나에게 다가왔다.”(9,21)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청원이 시작될 때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다는 사실과 그 말씀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다니엘을 ‘총애를 받는 사람’(9,23)이라고 칭합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들을 총애하십니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정도까지 쓰인 글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은 역사의 한 인물이라기보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와 벨사차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와 키루스 등 여러 임금 밑에서 일했던, 또 그 이후 환시를 통해 가려진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보았던 이스라엘 포로 출신의 여러 재상 내지 현인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공통으로 유배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 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고(2,18.20-23), 기도 금령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렸으며(6,11), 우상이나 괴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경배했습니다.(14,4.25) 또 그의 동료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불가마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했고(3,16-18.26-45.52-90), 다니엘이 구한 수산나도 죽음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13,42-43)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박해 시대에 숨어 살면서도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계속되는 어려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도 덕분입니다. 다니엘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환상과 환시와 꿈, 수수께끼와 비밀, 혼수상태와 와병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불안정한 현실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시사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다니엘은 그러한 상황이 다른 이들의 탓이 아니라 자기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 그 시간을 정화와 순화와 단련의 계기로 받아들이고(12,9), 어떠한 상황도 하느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생명의 탯줄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침·저녁기도, 성무일도, 매일 미사, 신앙을 전달하는 방송과 매체는 그에 큰 도움을 줍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06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햇곡식을 바치며 올리는 기도 (레위 23,9-14;신명 8,7-10;26,1-11)

더운 여름이 지나고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던 우리 민족은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 함께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조상께 감사드리는 추석을 지내왔습니다. 성경 안에도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레위 23,9-14) 레위기는 책 전반에서 제물과 제사와 축제를 자세히 규정하는데, 그 안에서 기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물의 봉헌은 피를 뿌리거나 제물을 태우거나 흔들면서 침묵 중에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됩니다. 하지만 모든 수확의 맏물을 담은 광주리를 갖다 바치며 하는 기도를 소개하는 신명기 26장은 예외를 보여줍니다. 맏물을 바치는 이들은 우선 사제에게 “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가 들어왔음을, 오늘 주 당신의 하느님께 아룁니다”(신명 26,3)라고 말합니다. 이어 광주리를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놓으면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26,5-9) 끝으로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26,10) 이어 그것을 하느님 앞에 놓고 그분을 경배하며, 레위인과 이방인과 더불어, 즉 하늘과 땅의 모든 이와 더불어 기쁨의 잔치를 벌입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과 그의 성취를 고백합니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 … 너희는 배불리 먹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 때문에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신명 8,7-10)라고 예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확의 맏물을 봉헌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것 자체가 하느님 약속의 성취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 기도에서 인간 노력의 결실이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약속과 성취라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괄되면서 영원한 가치를 얻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과 연결될 때 그것은 헛되이 지나갈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서 있을 것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생각해 볼까요?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매우 간단한 기도이지만, 자기가 차리든 남이 차리든, 비싼 돈을 내고 먹든 얻어먹든, 배고픔을 달래고 힘을 얻는 매 식사가 이 기도를 통해 영적인 차원을 얻고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감사 기도를 통해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에 대해 건강한 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새빠지게 일해 모은 것을 내 마음대로 쓴다’는 자신 안에 고립된 생각은 우리를 타인으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감사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하심을 상기시키고 타인에 대한 의무를 일깨우며 우리를 우리가 가진 것의 소유주가 아니라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루는 관리자로 만듭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26,5-9)은 선택된 백성에게 고유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서 신앙고백을 작성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의 이끄심을 고백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면, 어떤 처지든 현재를 수용하고 미래를 그분에 대한 신뢰 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때에 선사하셨습니다. 땅에서는 영원에서든 모든 것은 그분의 선하심으로 살아갑니다.”(안톤 베젤리, 오스트리아 신부)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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