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1) 경향신문 폐간

박영호
입력일 2025-06-25 08:32:28 수정일 2025-06-25 08:32:28 발행일 2025-06-29 제 3448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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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비판’ 목소리 높인 교회, 정론직필 추구하며 불의에 맞서다

“정부 당국은 지난 4월 30일 밤 10시를 지난 경향신문사에 대해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하여 발행 허가를 취소’한다는 통지서를 보냄으로써 폐간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 한 조각의 통지서로 인하여 이 나라가 자유를 얻은 이듬해인 1946년 10월 6일에 복간된 이래 13년간 다른 어떤 신문에 못지않게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열렬하였으며 민국의 수립과 반공전선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고 발행부수 20만 수천부를 헤이게 되어 한국에서 둘째가는 대신문의 지위를 차지해 온 가톨릭의 일간지는 지령 제4324호를 마지막으로 뜻하지 못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가톨릭시보 1959년 6월 10일 자 1면 사설 중에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의 폐간은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필화사건입니다. 1959년이 시작되면서, 당시 84세의 이승만이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히자, 경향신문은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이 갈아치울 수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가뜩이나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천주교회와 경향신문이 눈엣가시 같았던 터라, 정부는 결국 그해 4월 30일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해 경향신문 폐간 명령을 내리고 밤 10시를 기해 윤전기를 멈추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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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는 6·25 전쟁 이후, 독재로 기운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 정치인인 장면 박사를 적극 지지했다.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가 원래부터 이처럼 정치적 갈등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바탕으로 교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폭적 지지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 독재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교회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력한 신자 정치인인 장면(요한, 1899~1966) 총리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장기 독재 꿈꾸던 이승만 정권, 교회 운영 언론사 탄압
가톨릭시보, 정부 조치 강력 비판…4·19 혁명 이후 경향신문 복간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는 1969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나의 回想錄: 병인교난에 꽃피는 비화」(가톨릭출판사, 335쪽)에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박사는 이런 난국(6·25전쟁)에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다가온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재선을 노리고 자유당을 조직하여 자기 세력 확장에 급급했다. ⋯ 이 박사의 독재는 점점 심해갔고, 한편 경향신문은 이 박사의 독재를 규탄하는 논조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면) 박사는 이 박사의 정적(政敵)이 되고, 나도 이 박사에게 정치가가 아닌데도 야당 정치 주교로 낙인찍히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는 신자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투표를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회는 장면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의 정치권 진입을 위해서 힘을 모았습니다.

천주교회보는 1956년 5월 6일 자 2면에서 ‘병든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앙 깊고 학식 넓은 인격자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장면 박사의 출마 인사와 공약을 사진과 함께 실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투표하실 때는 부통령 후보자 여덟 명 중에 첫 번째로 적혀 있는 두 자 이름 ‘장면’ 밑에 표를 찍으시기 바랍니다”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덧붙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교회 탄압

선거 결과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장면 박사가 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자유당 대통령과 민주당 부통령이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권이 창출된 것입니다. 장면 박사의 부통령 당선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승만과의 정치적 공존과 예상되는 대립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 부통령으로서 장면 박사의 정치적 삶은 유배 생활과도 같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천주교회 탄압은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해 1955년 대구대목구가 운영하던 매일신문사를 습격하고, 노기남 대주교를 탄핵하고자 1958년부터 1959년 사이 교황청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신자 공무원들은 파면과 좌천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

폐간 조치의 신속한 재고 요청

가톨릭시보는 폐간 조치가 내려진 4월 30일 이후 발행된 6월 10일 자 사설에서, 정부의 경향신문 폐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바탕으로 정부 조치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1면 전체의 절반 가까운 지면을 할애한 이 사설에서 정부의 폐간 조치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임을 강조했고, 정부가 제시한 폐간 사유 다섯 가지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 오직 민주적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지 관권에 의해 그 존재마저 말살되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으니,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반공과 민주 언론 창달의 한 횃불이었던 유력한 일간신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사설은 이어, 경향신문이 순수한 종교 신문은 아니었기에 이번 폐간 조치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아닐 수 있지만, “무신론적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대항해 반공의 대열을 지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우’인 가톨릭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에 금이 가게 하는 유감스러운 처사”라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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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시보는 1959년 6월 10일자 1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경향신문 폐간 조치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한 이유는 다음 다섯 개 기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1959년 1월 11일 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支離滅裂相)’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 사실을 날조,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2월 4일 자 단평 ‘여적(餘適)’이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 셋째는 2월 15일 자 홍천 모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 처분 기사가 허위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4월 3일 자에 보도된 공산 간첩 하모 씨의 체포 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도왔다는 점, 마지막으로 4월 15일 자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 기사 ‘교안법 개정도 반대’가 허위 기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정부의 폐간 사유를 반박한 후 사설은 경향신문의 폐간이 영구적인 조치, ‘완전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부가 이 결정을 하루속히 재고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361일 만에 복간

경향신문은 정부의 폐간령에 대해 행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고등법원이 6월 26일 행정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려 발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법원 판결 직후, 정부는 폐간 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다시 무기한 발행 정지라는 행정 처분을 내려, 발행은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대법원 특별부는 연합부를 구성해 군정법령 제88호의 위헌 여부 심사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키로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전인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했고, 대법원 연합부는 4월 26일 경향신문에 대해 행정처분 집행 정지를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경향신문은 정간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 복간됐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