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상현동성당

대림시기 교회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분주하다. 성당은 바로 그 예수님을 맞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다. 모든 성당이 그런 곳이지만, 특별히 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성당이 있다. 바로 제1대리구 상현동성당이다. ■ 성탄 그리고 십자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광교호수로 420. 상현동성당 입구에 들어서 성당을 바라보자 눈이 부셨다.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눈이 부셨다. 바로 성당 정문 위 외벽에 자리한 거대한 모자이크화의 황금빛에 햇빛이 반사돼서다. 배경이 황금빛으로 장식된 이 모자이크화는 아기 예수를 안아 든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하는 동방박사의 모습이 담겼다. 배경을 채운 황금빛은 주님을 경배하는 시간이 바로 황금과 같이 귀한 시간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마치 성당을 향하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황금의 시간을 알려주는 듯하다. 성당 마당에 빠질 수 없는 성상, 성모상도 아기 예수님과 깊은 관련이 있다. 상현동성당의 성모상은 성모님 홀로 있지 않다. 천사상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의 성모상은 바로 성모영보(聖母領報)를 표현한 것이다. 루카복음 1장에 나오는 성모영보는 천사가 성모님께 장차 태어나실 예수님을 알리는 모습이다. 마치 천사의 모습에서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라는 성모송의 인사가, 성모님에게서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삼종기도의 응답이 들리는 듯하다. 이미 태중에 오셨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성당 입구에서 성탄을 느낄 수 있다면 성당 건물 내·외부는 십자가의 형상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일단 성당 전체의 형상이 십자가다. 그러나 전통적인 십자가 형태의 성당 건축이 십자가의 머리 부분에 제대가 자리한다면, 상현동성당은 그 반대 모습이다. 제대에서부터 십자가가 뻗어나가는 형상으로 설계됐다. 또 십자가가 교차하는 부분을 향해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형상을 통해 십자가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속죄의 상징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성당 안의 십자가상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십자가상에 매달린 예수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못 박혔던 오른손을 내리고 있었다. 스페인 루고교구 멜리데 후렐로스의 성요한성당에 소장된 십자가상을 본 따 만든 작품이다. 언제나 우리의 고달픈 삶을 아시고 먼저 구원의 손길을 뻗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자 하는 희망이 담겼다. 거기에 제대 위로 높게 솟은 둥근 천장을 둘러싼 가시관 형태의 나무조각을 바라보면, 십자가의 수난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이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 하비에르와 하비에르 상현동성당에는 여러 성인들의 성상들도 많이 세워져 있었다. 성당 내부에 있는 성모상과 성 요셉상 외에도, 성당 입구에는 리지외의 성 데레사 수녀, 성 정하상(바오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성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하상과 김대건 신부는 한국을 대표하는 성인이고, 우측에 자리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상현동성당의 주보성인이다. 그리고 ‘소화 데레사’, 혹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도 불리는 리지외의 데레사는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한 성인이다. 하비에르 신부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를 만나 감화돼 예수회 창립에 동참한 신부다.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들, 그리고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를 펼쳤고, 중국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던 중 1552년 12월 3일 선종했다. 입구의 성상 외에도 입구 안쪽에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이콘이 설치돼 있었다. 이를 통해 성당을 드나드는 신자들이 성인의 선교 정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상현동성당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주보성인으로 모신 것은 성인의 선교정신을 본받고자 한 것도 있지만, 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따랐던 우리 신앙선조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기리고자 하는 뜻도 있다. 비록 시복시성이 되지 않았기에 성당의 주보로 삼을 수는 없었지만 상현동성당은 건축 당시부터 ‘권일신 기념 성당’으로 계획된 성당이다. 권일신은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권천례(데레사)의 아버지로,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과 함께 우리나라에 교회를 창립하는데 기여한 한국교회의 초기 지도자다. 우리나라의 첫 세례자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을 통해 세례를 받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앞장서던 권일신은 1791년 신해박해 중 붙잡혀 순교했다. 상현동성당은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이자 순교자인 권일신의 신앙과 선교정신을 기억하고자 성당 마당에 권일신을 기리는 공간을 조성했다. 성당 마당 휴게공간에서 ‘직암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순교기념비’와 권일신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한국교회를 창립하고 이끌어간 권일신은 형조에 붙잡혀 숱한 형벌을 받고 장독으로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권일신의 생애를 보여주듯 동상은 포승줄에 묶여 무릎을 꿇은 모습임에도 평안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듯 했다.

2024-12-01

[수원교구 성당 순례] 중앙성당

경기 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16. 안양중앙시장을 마주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이 자리에는 콘크리트 구조의 독특한 형상의 건물이 서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자태가 마치 겹겹이 절벽을 이루는 산의 모습 같기도 하고, 일단 건물의 웅장함이 주는 위용이 있다. 만약 이 건물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글귀가 없었다면,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을 듯하다. 바로 제2대리구 중앙성당의 모습이다. ■ 기도하는 손과 방주 아마 중앙성당을 건물 외양만보고 성당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 듯하다. 전통적인 성당의 건축양식과도 다르고, 현대의 다른 성당들의 모습에서도 유사점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페라하우스처럼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유명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크다. 그러나 이 성당을 설계한 모티브를 생각하고 보면 성당건축이 지닌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중앙성당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독일 화가 엘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의 형상을 표현하는 건물이다. 너무 큰 크기 때문에 <기도하는 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성당 주위를 크게 돌아보니 손의 형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산이라고 생각했던 면이 가지런히 펴낸 손등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기도하는 손’ 형상화한 건물 외관 소외된 이들 위한 교회 역할 강조 구원·삼위일체 표현하는 성당 내부 일치돼 복음 선포하는 공동체 상징 두 손이 모여 있지 않은 듯 보이는 듯한 모습에 의아해하는 중 성당이 지닌 또 다른 형상이 보였다. 바로 구약의 대홍수 때 노아가 탔던 ‘방주’의 형상이다. 중앙성당은 하느님을 향한 교회의 모습인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미지에 세상 안에서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교회의 역할을 상징하는 ‘방주’의 형태를 담아낸 형상이다. 마치 중앙성당에 모인 중앙본당 신앙공동체의 모습처럼 보인다. 본당은 1956년 안양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유치원을 세워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또한 1971년 객지에서 저임금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노동자를 위해 세운 성당 맞은 편에 세운 근로자회관은 오늘날 가톨릭사회복지회관으로 이어와 여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성당 외양도 독특하지만, 성당 내부는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중앙성당 내부는 기둥이 없는 노출콘크리트 방식으로 건축됐다. 현재는 노출콘크리트 형태의 내부 인테리어가 많이 익숙해졌지만, 1993년 기공, 1999년 준공한 중앙성당이 건축될 당시에는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었다. 그것도 이렇게 큰 규모의 성당 내부 전체가 노출콘크리트 공법으로 건축된 것은 국내에서는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성당 외양이 그랬듯 내부 역시 신앙적인 상징으로 가득했다. 특별히 제대 쪽에는 상징이 많다. 제대는 예수님의 무덤을, 성당 내부 벽의 주름은 예수님의 입었던 수의를 의미한다. 제대 좌우 벽면에 있는 거대한 십자가 형태는 예수님의 좌우에 세워진 십자가를 나타낸다. 이에 제대 곁에는 예수부활상이 세워져 있다. 제대 뒤로 세로로 길게 뻗은 스테인드글라스는 하늘로 향하는 구원의 길을 뜻하고, 제대 중앙 상부에서 내려오는 3개의 빛줄기로 삼위일체를 드러내고 있다. 제대만이 아니라 성당 내부 전체의 디자인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성당 전체에 얽혀있듯이 감싸고 있는 격자 모양의 들보 형태는 포도나무 줄기를 상징하고, 그 들보 사이에 자리하는 마름모꼴들은 포도송이를 나타낸다. 바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 5)라는 말씀을 성당 전체에 걸쳐 형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성당이 그저 건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당공동체가 한 몸을 이루는 일치가 하느님의 성전을 이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앙성당에 모인 공동체는 성당이 보여주는 것처럼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공동체를 이루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제대 왼편에 있는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를 보면 이곳 본당 공동체가 지닌 역사의 뿌리를 알 수 있다. 본당 공동체의 모태가 된 수리산 교우촌을 일궈낸 이가 바로 최경환 성인이기 때문이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경환 성인은 복자 이성례(마리아)와 자녀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수리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교우촌이 형성됐다. 최경환 성인은 신자들에게 훌륭한 신앙인의 표양을 보이다가 1839년 붙잡혀 순교했다. 최경환 성인이 순교한 후 수리산 교우촌 신자들은 수리산에 최경환 성인의 묘지를 만들고 신앙을 이어왔고, 그 공동체가 안양공소로, 또 안양지역의 첫 본당, 중앙본당으로 이어왔다. 중앙성당은 이처럼 특색 있는 건축으로 2003년 안양시에서 건축문화상을 받았다. 또 국내뿐 아니라 해외 유명 예술·건축 전문지들을 통해서도 극찬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중앙성당 건축의 진가는 건축에 담긴 의미를 살려 하느님께 기도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2024-11-17

[수원교구 성당 순례] 신봉동성당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거룩한 전례의 쇄신과 증진에서는 온 백성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위해 최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전례헌장」 14항)고 말한다. 이에 공의회 이후 성당 건축은 하느님 백성의 ‘능동적 참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해나갔다. 제1대리구 신봉동성당은 이런 전례의 능동적 참여가 돋보이는 성당이다. ■ 공동체의 참여로 지은 성당 신봉동성당을 방문해 본 일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스테인드글라스의 강렬한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제대 뒤편에 자리한 가로 9m, 세로 6m 규모의 유리화는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와 달리 납선이 없을 뿐 아니라 빨강·노랑·초록·파랑의 색조가 수묵화처럼 번져나가듯 자유롭게 펼쳐져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해 유럽에서 ‘빛의 화가’, ‘스테인드글라스의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김인중 신부(베드로·도미니코 수도회)의 작품이다. 제대의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아니다. 제대 좌우로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가로 1m, 세로 6m 크기의 스테인드글라스 12개와 세라믹으로 제작된 14처의 십자가의 길도 김 신부의 작품이다. 또 1층 로비의 성모상 위에도 직경 1m가량의 원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자리하는 등 건축면적 2210.07㎡에 4층 규모의 성당이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졌다. 무엇보다 좌우로 긴 타원형의 성당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가 가깝게 보이도록 설계됐다. 신자석이 제대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듯 펼쳐져 있어 앞뒤가 긴 성당에 비해 제대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 게다가 기둥도 없도록 설계돼 제대를 바라보는데 장애가 없다. 앞뒤가 긴 일반적인 성당이 입구 반대편에 자리한 제대의 권위를 강하게 드러냈다면, 타원형 성당은 모든 이에게 열린 참여적인 공간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그러나 공간에 기둥이 없고 타원형이라고 해서, 그저 제대가 가깝다는 것만으로 반드시 전례의 능동적 참여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신봉동성당은 그렇다. 많은 성당들이 사목자나 일부 전문가들의 구상과 기획으로 세워지곤 하지만, 신봉동성당은 성당 건축 기획 단계에서부터 본당 공동체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2008년 수지본당에서 분가해 신설된 신봉동본당은 새 성당을 짓고자 기획하는 단계에서 본당 신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성당 건축에 어떤 지향을 두고자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경청하는 자리였다. 김인중 신부의 작품을 중심으로 성당을 건축하자는 생각도 이 설문조사를 통해서 구체화됐다. 본당 신자들은 직접 프랑스를 찾아 김 신부를 만났다. 본당 공동체와 김 신부가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빛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위안을 얻는 성당을 만들고자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 왔다. 본당은 성당의 콘셉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김 신부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은 프랑스 건축가이자 신학자 베르나르 게일러 씨를 찾아 성당 디자인을 진행했고, 이를 건축으로 구현해 지금의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다. ■ 순교 신심으로 세계와 유대하는 성당 한 본당의 성당을 짓는데 기획과 설계 단계부터 국제적인 협력이 돋보였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작가를 통해 성당의 콘셉트와 스테인드글라스, 성미술을 구상했고, 프랑스의 건축설계사에서 성당 설계를 진행했다. 그러나 신봉동성당에는 그보다 의미 있는 국제적인 무엇이 있다. 바로 이미 200여 년 전 이 일대에서 사목하던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통한 유대다. 프랑스 앙굴렘교구 출신인 오매트르 성인은 1863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봉동성당 인근 손골에 자리를 잡고 우리말을 익히며 신자들을 사목했다. 성인은 1866년 병인박해에 체포돼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이다. 프랑스에서 우리나라에까지 와 주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교사. 신봉동성당은 오매트르 성인의 고향인 프랑스 앙굴렘교구 성 오매트르 베드로 성당과 연결돼 있다. 신봉동본당과 성 오매트르 베드로 본당이 2018년부터 자매결연을 맺고 오매트르 성인의 정신을 함께 이어받으며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봉동성당 곳곳에서 오매트르 성인을 만날 수 있다. 성당 1층 외부에는 오매트르 성인의 동상이, 내부 로비에는 오매트르 성인의 이콘이 자리하고 있다. 본당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카페의 이름도 ‘카페 에제끄1837’이다. 에제크는 오매트르 성인의 고향 지명이고, 1837년은 오매트르 성인이 태어난 해다. 이처럼 성당에는 오매트르 성인의 선교정신을 계승하며 순교 신심을 고취시키려는 본당 신자들의 뜻이 가득 담겼다. 무엇보다 성당 감실 아래에는 오매트르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체조배와 함께 순교자인 오매트르 성인의 유해를 공경할 수 있는 것이다. 오매트르 성인을 현양하는 손골성지가 성당 인근에 있어 함께 순례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2024-11-03

[수원교구 성당 순례(6)] 권선동성당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의 순간, 그리고 성모 승천과 천상 모후의 관을 받는 성모의 모습이 제대 뒤편에서 햇살을 타고 찬란하게 내려온다. 묵주 기도 영광의 신비의 모습이다. 제대를 바라보고 오른편에는 고통의 신비가, 왼편에는 환희의 신비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을 뿌린다. 묵주 기도 성월에 참 어울리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신자들을 맞는 이곳은 제1대리구 권선동성당이다. ■ 빛이 충만한 성당 미사가 없는 시간 고요한 성당에 들어서자 마치 성당의 온 불을 밝힌 듯 밝은 성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의 전등을 아직 켜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온 성당이 밝았다. 특히 이 채광은 알록달록한 색유리를 타고 마치 성당을 무지개처럼 수놓는 듯했다. 성당을 내부를 밝게 채울 정도로 둘러싼 창문들은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져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그저 빛의 아름다움만 강조하지 않았다. 제대 중앙과 좌우 익랑(翼廊, Transept) 양 끝의 창문을 채운 영광의 신비, 환희·고통의 신비를 담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을 묵주 기도의 신비로 가득 채워준다. 제대 앞에서 묵주를 손에 쥐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성화 한 장면, 한 장면을 바라보노라면 성모님을 통해 주님의 생애를 따라가는 묵상의 길로 초대받는다. 특별히 성가대석 위의 원형창에는 성당 주보의 모습이 담겼다. 권선동성당의 주보 성모승천의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성당 전체를 내리비춘다.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아니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성모님을 통해 주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었다면, 제대화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담았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제대화를 제작한 김겸순 수녀(마리 테레시타·노틀담 수녀회)는 성당에 오는 모든 이들이 이 성미술 작품들을 통해 성당에서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는데 도움을 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들을 구상하고 제작했다고 한다. 온 인류를 위해 생명이 빵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형상으로 제작된 감실이 자리한 중앙에는 어린양과 성경의 모습이 그려졌고, 중앙의 좌우측에는 12사도와 12천사, 12도성의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 맨 왼쪽에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이, 맨 오른쪽에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제대와 독서대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장하는 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다. 성당 내부가 아름다운 빛과 성 미술로 기도를 자아내는 공간이었다면, 외부에서 바라본 권선동성당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듯한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권선동성당은 건축면적 1792㎡에 연면적 7476㎡에 지하 2층 지상 5층의 규모의 건물이다. 종탑 높이는 55m로, 1992년 건축 당시 한국교회 성당 종탑 중 최대 높이였을 뿐 아니라, 성당 높이 33m, 성당 외부 길이 71m, 폭 19~33m에 달해 규모면으로는 가히 대(大)성당이라고 불릴만한 성당이었다. 규모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성당 건축양식 중 하나인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철골·콘크리트구조에 붉은 벽돌로 외벽을 채워 성당 건축의 전통적인 미를 극대화했다. 제대와 신랑(身廊, Nave), 그리고 여기에 교차하는 익랑으로 십자형태의 구조를 지닌 성당은 외부도 고딕성당의 입체적인 구조를 살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의 멋을 느끼게 해준다. ■ 100년, 그 너머를 바라보고 짓다 이렇듯 내부, 외부 면에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지닌 덕분에 1999년 경기도건축문화상에서 우수한 건축물로 선정됐고, 영화 <신부수업>을 비롯해 여러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의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권선동본당 공동체가 1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후에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당을 세우고자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본당은 당시 국내의 많은 성당들이 지은 지 십 수 년도 지나지 않아 비좁고 노후화해 재건축을 해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적어도 100년을 내다보며 성당을 지어야겠다는 신념으로 새 성당 마련을 준비했다. 그래서 성당의 실용성 면도 크게 고려했다.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갖춘 것은 물론이고, 소규모 전례를 위한 소성당과 신자들이 이용할 교리실과 휴게실, 식당 등의 편의공간, 장례를 위한 영안실까지도 갖추고 있다. 주차공간도 넓고 교통도 편리해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성당 내부도 성당 좌우측의 기둥 옆 공간인 측랑(側廊, Aisle)을 최소한으로 좁혀 복도로 사용하게 하면서 제대가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을 최소화했고, 건축 당시부터 성당의 음향이 반사되는 면의 각도와 마감재료를 조절해 모든 자리에서 음향이 잘 들릴 수 있도록 했다. 100년을 내다본 덕분일까 권선동성당은 교구 내에서도 중요한 성당으로 자리 잡았다. 넓고 신자들의 접근성이 큰 덕분에 교구나 대리구, 여러 교구 신심단체들이 성당에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고, 2006년 교구에 대리구제가 시작될 당시에는 수원대리구 중심 성당으로, 2018년 대리구제 개편 이후로는 제1대리구 중심 성당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2024-10-20

[수원교구 성당 순례(5)] 하우현성당

묵주 기도처럼 순례에 어울리는 기도가 또 있을까. 묵주 기도가 지닌 특유의 리듬 덕분에 묵주를 들고 길을 걸으면 걸음걸이마다 기도에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 제2대리구 하우현성당(경기도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처럼 자연에 둘러싸인 묵주 기도의 길이 있다면 더욱 좋다. 이번 성당 순례는 하우현성당을 향했다. ■ 순례가 피정이 되는 곳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 하우현성당에 들어서면 신발장 위에 적힌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이 거룩한 곳이라고는 생각해 왔지만, 막상 성경의 말씀을 눈앞에 두고 신을 벗으니, 이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느낌이 더욱 피부로 와닿는다. 성당에는 누구나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좌식 책상과 의자, 그리고 성경과 각종 기도서들이 놓여있었다. 그래서인지 미사가 없는 시간대에도 여러 신자들이 성당을 찾아 조용히 기도하며 머물렀다. 피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이곳은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옛 정취를 간직한 성당의 풍경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6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성당이다. 그러나 하우현에 성당이 자리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됐다. 하우현에는 1894년에 초가 공소 강당이 세워졌고, 1900년에는 본당으로 승격됐다. 교구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본당이다. 현재 성당은 1965년 건축한 건물이다. 성당을 둘러싼 자연도 피정을 느끼게 해주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우현성당은 성당이 위치한 의왕은 물론이고 과천·성남·수원·안양 등 인근 도심지에서도 차량으로 10~15분 내외면 갈 수 있는 위치다. 하지만 청계산과 광교산 자락에 둘러싸인 이곳은 도시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오히려 멀리 외딴곳을 찾은 듯하다. 성당 옆에 자리한 사제관도 특별한 정취를 더한다. 이 사제관은 하우현본당 초대 주임 샤플랭 신부가 1904년 신축한 건물이다. 서양식 석조에 한국 전통의 골기와를 얹은 형태로, 한불 절충식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또 건축 당시 초대 주한프랑스 공사가 기증한 종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사제관은 경기도 지정기념물 176호로 등록돼 있다. ■ 신앙선조들을 현양하는 곳 하우현성당이 이런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예로부터 교우촌이 자리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우현은 산과 숲에 싸여 천혜의 은거지였을 뿐 아니라 서울과 가까워 교회와 신자들의 소식을 접하기 용이한 이점이 있었다. 박해 당시에는 1802년 순교한 복자 한덕운(토마스)를 시작으로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 신부, 하느님의 종 서태순(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의 종 이조여(요셉), 순교자 김준원(아니체도)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하우현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이곳 출신 순교자들의 기록으로 적어도 신유박해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당은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 신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우현성당을 바라보고 오른쪽 출구로 나서서 5km가량 산길을 오르면 ‘둔토리토굴’을 찾을 수 있다. 도보로는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국사봉 인근에 자리한 둔토리토굴은 루도비코 신부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숨어지내던 곳이다. 루도비코 신부는 하우현에 자리한 교우촌에서 우리말을 배우고 또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신자들의 집을 찾으며 성사를 집전했다. 또 6·25전쟁 당시 순교한 ‘하느님의 종’ 필립 페랭 신부도 하우현본당 제3대 주임으로 사목해 하우현성당은 순교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순례지기도 하다. 이런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하우현본당은 성당 내에 루도비코 신부의 동상을 비롯해, 한덕운 복자상, 하우현성당과 관련된 성인, 복자 순교자들의 모습을 담은 모자이크화, 하우현 순교 선조 6위 현양비 등을 설치했다. 교우촌과 순교자들, 그리고 그 후로 이어오는 하우현의 신앙 역사에 담긴 교회사적 가치로 교구는 2020년 11월 29일 하우현성당을 교구 순례사적지로 선포한 바 있다. 하우현성당에서는 주일에는 오전 10시30분, 오후 4시 미사가, 월~토요일은 오전 11시 미사가 봉헌된다. 매월 첫 토요일 오전 11시 미사는 성모신심미사로 봉헌된다.

2024-10-06

[수원교구 성당 순례(4)] 옛 서둔동성당

순교자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지에도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이 있지만, 교구 내 222개 본당 중에도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이 있다. 바로 제1대리구 서둔동본당의 옛 성당은 전 교구민이 뜻을 모아 순교복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복자성당이다. ■ 토착화를 추구한 성당건축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호서로21번길 32. 골목길을 오르자 붉은 벽돌에 푸른 지붕이 올라간 건물이 보인다. 옛 서둔동성당이다. 일단 건물의 형태가 독특하다. 성당 전체가 타원형에 가까운 8각형의 형태다. 벽돌을 쌓아 올린 외벽 위로는 마치 한옥의 정자를 떠올리게 하는 기와가 올라가 있다. 그리고 기와가 올라간 처마와 외벽 사이에 지그재그 형태로 창문이 자리하고 있다. 8각형의 건물보다 인상적인 건 8각형의 측면에 해당하는 자리에 세워진 종탑이다. 입구이자 종루인 이 탑은 높이가 자그마치 18m에 달한다. 본 건물의 높이인 9m의 두 배에 달하는 높이다. 종탑에는 사각 정자형태의 기와지붕과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성당이 언덕 위에 세워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건축 당시에는 서둔동 어디에서나 이 종탑이 보였을 만하다. 1969년 완공된 이 성당은 토착화를 추구한 외관으로 건축 당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토착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선교지역의 문화에 적응해 교회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토착화는 1965년 종료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강조된 개념으로, 옛 서둔동성당은 공의회의 정신을 성당 건축을 통해 추구하고 있다. 전 교구민 건축기금에 뜻 모아 순교 복자 기리는 공간으로 설계 신자 수 증가로 새 성당 지었으나 옛 성당 보존하며 역사·의미 기억 국회의사당 등 국내 유명 건축에 참여한 바 있는 서울대학교 윤장섭 교수가 설계한 이 성당의 외관만이 아니라 내부도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설계돼 건축학계에서 평판을 얻은 바 있다. 특히 외벽에서 1m가량 떨어진 자리에 세워진 14개의 기둥이 돋보인다. 이 기둥들은 지붕하중을 지지하는 공포대를 떠받드는 형태로 설계됐는데, 노출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한 배흘림 양식으로 제작됐다. 내부 골조를 노출시켜 그 자체로 건축적인 장식으로 삼았고, 외벽과 지붕 사이에 자리한 창문으로 성당 전체를 자연광으로 밝게 채울 수 있도록 했다. 다만 현재 이 성당은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고, 본당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어, 성당으로 사용할 당시의 내부 모습을 볼 수는 없다. ■ 순교자를 기리며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미를 성당건축에 녹여낸 것만이 토착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옛 서둔동성당은 순교복자를 기리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성당은 외벽과 지붕 사이에 창문을 둬 자연채광이 가능하도록 설계됐지만, 건축 당시 벽돌로 이뤄진 외벽에는 별도의 창문이 없었다. 이런 설계로 순교자들이 붙잡혔던 감옥을, 그리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피난처 카타콤바를 떠올리게 해줬다. 주교회의는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앞둔 1965년 각 교구마다 병인박해 순교복자를 기념하는 성당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아직 복자였던 한국 순교자들을 전국적으로 현양하기 위한 다양한 순교자 현양사업 중 가장 주된 결정 사항이었다. 이에 교구는 1965년 6월 15일 열린 사제회의를 통해 순교복자 기념성당 설립을 위해 논의했다. 교구는 당시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던 서둔동에 복자성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교구 차원에서 성당 건축비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옛 서둔동성당을 세울 당시 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주교는 교서를 통해 교구민 한 명, 한 명이 순교정신을 따르며 절약한 돈을 모아 성당건축기금으로 봉헌하기를 권장했다. 그저 성당건축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교정신을 따르는 봉헌을 통해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얼을 되새기고 신심을 깊이 할 수 있도록 도모했던 것이다. 이런 방침에 따라 전 교구민이 성당건축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교구 사제들도 매달 2대의 미사예물을 봉헌하는 방식으로 기금 모금에 함께했다. 그러나 교구민들의 십시일반 모금으로는 건축기금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고 교황청의 원조금과 서둔동본당 신자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건축기금을 마련했다. 이런 준비과정을 통해 1968년 5월 서둔동본당을 설립하고 성당 건축에 들어갔다. 마침 그해 10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돼 의미를 더했다. 또 성당이 완공된 1969년 9월 16일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지 12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옛 서둔동성당은 순례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교구 내 조성된 성지들처럼 전적으로 순례를 위한 공간으로 자리했던 것은 아니지만, 복자성당으로서 순교복자를 현양하고자 하는 이들이 순례하곤 했다. 1973년에는 한국의 성지들을 순례한 일본 히로시마교구의 신자들이 이 성당을 순례하며 성체조배를 하기도 했다. 서둔동본당은 본당 신자수의 증가로 302.34㎡ 규모의 옛 서둔동성당으로는 전례공간이 충분하지 않게 되자, 새 성당을 건축했다. 그러나 옛 성당을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성당에 담긴 역사와 의미를 옛 성당 입구에 기록해 성당의 역사를 기억하고,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2024-09-15

[수원교구 성당 순례(3)] 남한산성순교성지성당

우리나라 전통적인 가옥, 한옥. 나무 내음이 가득한 한옥에 들어서면 선조들의 자취가 물씬 느껴지곤 한다. 교구 내 성당 중에도 조선시대를 살아간 순교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한옥 성당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순교성지성당이다. ■ 한옥으로 지은 성당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남한산성순교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남한산의 숲을 배경으로 한옥 형태의 건물이 보인다. 건물은 한눈에 봐도 주택용 한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연면적 296.29㎡ 규모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를 혼합한 2층 한옥 건물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형태면에서 일반적인 한옥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본래 한옥이라면 측면에 자리할 합각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2층 구조로 높게 지어져 마치 명승지의 누각을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 한옥 건물을 누가 보기에도 성당이었다. 합각에는 붉은 십자가가 원 안에 새겨져 있었고, 겹으로 층지어 쌓인 듯한 처마 밑에는 한자로 성당(聖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수현(베르나르도) 서예가가 제작한 현판에서는 특히 성(聖)자가 눈길을 끌었다. 귀(耳)는 크게 입(口)은 작게 썼다. 귀를 크게 열고 침묵 속에서 하느님께 나를 맡기라는 의미가 담겼다. 당(堂)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담은 성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성당은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동시에 다양한 교회의 상징이 구석구석 담겼다. 외벽에도 십자가를 비롯해 알파와 오메가, 물고기 등의 상징물이 들어갔고, 백지사형을 당하는 순교자의 모습이 담긴 양각도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제대를 향해 길게 뻗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제대 뒷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님은 박해시기 목칼을 쓴 모습이다. 십자가 주변으로 빛이 퍼져나가는 듯한 형상이 보인다. 빛처럼 보이는 작은 조각들은 예수님의 가시관을 이루는 작은 가시들이다. 또 나무로 된 천장과 기둥 곳곳에도 장미 조각이나 비둘기 모양의 양각 등이 새겨져 있었다. 교구 내에도 한옥 구조를 지닌 성당들이 몇몇 있지만, 아직 한옥이 많이 지어지던 당시에 지은 건물이 대부분이다. 반면 남한산성순교성지는 2014년 완공,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한옥 성당이다. 남한산성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맞춰 신축 건물도 한옥 형태로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광주 유수부(留守府)의 치소(治所), 즉 지금으로 치자면 도청이 소재한 큰 도시였다. 박해 당시 광주는 현재 광주시 지역뿐 아니라 한강 이남의 서울시 강남·송파·강동·서초구 대부분의 지역과 성남·하남·의왕시 등에 이르는 지역을 아우르는 곳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각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해읍정법(該邑正法), 즉 체포된 신자들을 거주지에서 처형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광주라는 넓은 지역에서 살다 체포된 신자들은 이곳 남한산성에서 처형당했다. ■ 영혼의 안식처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어주소서.” 이곳 성당에서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미사가 봉헌된다. 미사가 끝나니 한옥 건물에 걸맞게, 구성진 우리 가락이 들려왔다. 연령을 위한 위령기도였다. 2005년 ‘영혼의 안식처’로 선포된 남한산성성지는 성당에서 매 미사 후에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곳이 영혼의 안식처가 된 것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순교자, 복자 한덕운(토마스)의 영성을 따르기 위해서다. 성당에서도 역시 한덕운의 영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당 좌우 창문들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일곱 성사 등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담겨있는데, 그중에는 한덕운의 일화를 담은 스테인드글라스도 있다. 한덕운은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800년 10월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상황을 살필 요량으로 행상인으로 변장해 서울을 찾았다. 서울을 돌아다니던 한덕운은 청파동에서 거적에 덮인 홍낙민(루카)의 시신을 보고 애통해하며 수습했다. 또 서소문 밖에서는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한덕운 자신 역시 박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덕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결국 한덕운은 체포됐고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성당을 나와 성지 입구 쪽을 바라보면 순교자 현양비가 보인다.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한덕운을 비롯한 21위와 무명 순교자 300여 명을 현양하기 위해 세운 비다. 현양비 옆에는 한덕운의 삶을 형상화한 ‘남한산성의 피에타’상이 있었다. 한덕운이 순교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의 동상이다. 이렇듯 한덕운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다 마침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기고 이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었다. 한덕운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느냐”며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2024-09-01

[수원교구 성당 순례(2)] 제2대리구 분당성요한성당

판교IC에서 태재고개 방향으로 언덕길을 오르면 언덕 위로 서있는 건물이 보인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현대풍을 가미한 건물로 화강석을 외장으로 한 웅장한 건물. 우뚝 솟은 탑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리스어 키로(XP)와 물고기를 합친 십자가 형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로 498에 자리한 제2대리구 분당성요한성당이다. ■ 예술과 함께하는 성당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피에타 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교황청의 원본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일 뿐 아니라 재료 역시 원본과 같이 토스카나 지방의 원석을 사용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피에타 상을 멀리 떨어져서 유리 너머로 감상해야 한다면, 분당성요한성당에서는 장애물 없이 더 가까이서, 또 더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피에타 상을 중심으로 성당을 오르는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가면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는 성경의 장면이 담긴 타일 벽화 ‘하느님의 인간 구원 역사’가 펼쳐진다. 벽면에는 천지창조에서부터 예수님의 승천에 이르기까지 구약 9장면과 신약 13장면이 담겼다. 1층에서 5층에 이르는 벽면을 가득 채운 이 작품은 길이만도 240m에 달한다. 3층 대성당도 성미술로 가득하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를 비롯해 강론대, 독서대, 성수대 등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된 김대건 성인상을 조각한 것으로도 유명한 한진섭(요셉) 작가의 작품이다. 십자가와 제대 위 성령상은 이용덕(루카) 작가가, 성당 창문을 채운 유리화는 떼제공동체의 마르크 수사가 제작했다. 파이프오르간 역시 또 하나의 예술품이다. 독일에서 제작된 이 오르간은 총 65개의 스톱과 5134개의 파이프, 3개의 콘솔로 구성됐다. 규모나 음색에 있어 전국에서 손꼽히는 파이프오르간이다. 이 밖에도 고해소, 감실 등 대성당에만 6명의 작가의 작품들이 채워졌고, 성당 전체에 걸쳐 10명이 넘는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성당 안팎 구석구석에서 성당과 조화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성당 설계 당시부터 기획, 제작된 작품들이다. 특히 각 작품에는 성당 설계와 공간에 담긴 의미와 맞물려 성경과 신학의 의미도 담겨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성당이 그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신자들이 작품을 마주함으로써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 본당은 이런 다양한 예술품들을 신자들이 감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알고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성당 곳곳의 예술품들을 해설해 주는 ‘본당 투어’도 운영하고 있다. 초대본당 주임이었던 고(故) 김영배(요한 사도) 신부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꼭 자리에 있지 않으면 가치 없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많은 작가들이 제안을 받아들여 혼신을 다해 작품 제작에 들어갔고, 나는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신학적인 사고를 불어넣어 이 작품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도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 ■ 더 많은 신자들을 품기 위해 대성당 입구 오른편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두상과 유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당의 주보성인은 성당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한 성인인데, 왜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는 분당성요한성당에 인접한 태재고개가 김대건 신부와 인연이 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태재고개는 절두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로 옮기던 길목이다. 더 많은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박해를 무릅쓰고 순교한 김대건 신부처럼, 분당성요한성당도 더 많은 신자들을 품기 위해 건축됐다. 성당은 지하 5층, 지상 5층으로 대지 3962.9㎡에 연건평 2만306.5㎡에 이르는 규모로 지어졌다. 대성당은 3층 1600석, 4층 1000석으로, 한 번에 2500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고, 소성당까지 합하면 3000여 명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다. 건축 당시에는 국내뿐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화제가 됐다. 이렇게 큰 성당을 지은 이유는 성당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분당 신도시 계획이 진행되면서 분당 지역에는 40만 명의 인구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3년 분당성요한본당이 설립되던 당시에는 분당에 성당부지가 단 두 곳뿐이었고, 설립된 본당은 분당성요한본당 하나뿐이었다. 건축 당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큰 성당을 지어야 했던 것이었다. 이후 분당성요한본당이 여러 본당을 분당해 나가면서 지금은 분당구에만 7개의 성당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분당성요한성당은 1만5000명이 넘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함께해 여전히 많은 신자들을 품어주는 성당으로 자리하고 있다. 분당성요한성당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본당 신자뿐만 아니라 교구민들도 품어주는 성당이기도하다. 2006년 교구에 대리구제가 시작되면서 성남대리구 중심 성당으로 지정됐고, 2018년 대리구제가 개편된 후에는 제2대리구 중심 성당이 됐다.

2024-08-18

[수원교구 성당 순례(1)] 제2대리구 옛 구산성당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마련된 거룩한 곳 성당. 우리가 기도하는 성당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름다운 성미술과 건축에 담긴 이야기, 교회와 사회의 큰 사건에 함께했던 역사, 신앙선조들과 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공동체와 얽힌 흔적들…. 우리 교구 안에 있는 성당을 찾아 그 성당에 스민 우리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좋은 순례의 여정이 되지 않을까. 성당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본다. ■ 통째로 옮긴 성당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 131. 하얀 외벽에 검은 지붕을 얹은 구산본당의 옛 성당(이하 옛 구산성당)은 단아하면서도 7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움도 간직하고 있다. 70여 년이라 하면 건물에 새겨진 역사에 감탄이 나오지만, 옛 구산성당의 특별함은 그저 오래된 건물이라는 점이 있지 않다. 건립한 지 70년이 넘은 성당이라면 교구 내에도 여럿 있다. 옛 구산성당이 특별한 것은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성당이 이 자리에 없었다는 점이다. 70년이나 된 건물이 7년 전에는 없었다니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옛 구산성당은 지금의 자리에서 220m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원형보존 이전, 바로 성당 건물을 통째로 이 자리에 옮긴 것이다. 1956년 건축된 이래 구산 자락의 한 자리를 지켜온 옛 구산성당이었지만, 2009년 5월 하남시 미사지구 개발이 추진되면서 성당은 철거 위기를 맞게 됐다. 본당은 성당을 보존하고자 고민한 끝에 성당을 원형 그대로 옮기기로 뜻을 모으고 2016년 원형보존 이축공사를 추진했다. 60년이 넘은 낡은 건물을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성당이 이동하면서 파손되지 않도록 내·외부 벽면과 바닥을 H빔으로 지탱하고, 건물 전체를 롤러 바퀴에 올렸다. 건물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와이어와 도르래, 모터 등을 활용해 하루 최대 12m씩 이동하는 방식으로 성당을 옮겼다. 목조가 아닌 벽돌조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이동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 구산 신앙공동체의 역사가 녹아든 곳 경제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새로 성당을 짓는 것이 더 저렴하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옛 구산성당이 건축학적으로 빼어나거나 미술적인 가치가 대단히 큰 건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옛 성당을 이례적인 방법으로 보존한 것은 옛 구산성당에 그런 경제적인 가치 이상의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옛 구산성당은 구산 교우촌 신앙공동체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옛 구산성당을 찾으면 입구 옆에서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의 동상을, 그리고 성당 제대 안에 모셔진 김성우 성인의 유해를 만날 수 있다. 덕분에 이곳이 김성우 성인이 신앙의 씨앗을 뿌려 일군 구산 교우촌임을 느낄 수 있다. 구산 신앙공동체는 성인의 순교 이후에도 박해를 견디며 구산에 묻힌 성인의 묘소와 성인이 전한 신앙을 지켜왔다. 1956년 구산의 신자들은 6·25전쟁을 딛고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할 집을 세우고자 공소 경당을 짓기 시작했다. 논을 빌려 신자들이 공동으로 경작을 하며 쌀 100가마니를 수확해 자금을 모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강변에서 자갈과 모래를 채취해 건물을 세워나갔다. 그렇게 신자들의 땀방울로 완성해 낸 것이 131㎡ 규모의 벽돌조 건물인 옛 구산성당이었다. 옛 구산성당을 보존한다는 것은 그 신앙의 역사를 보존하고 물려준 신앙공동체의 뜻을 앞으로도 이어 나간다는 의미기도 한 것이었다. 건축적인 의미도 있다. 옛 구산성당의 외관은 벽돌로 쌓아 올린 고딕 건축 양식이며, 내부는 강당형으로 제대를 바라보는 2열의 긴 의자가 배치된 형태다. 6·25전쟁 이후 유행했던 성당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명한 건축가나 작가의 손으로 탄생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신자들이 신앙을 담아 쌓아 올린 성당의 아름다움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덕분에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옛 구산성당의 가치는 교회 밖에서도 인정받았다. 경기도는 2023년 3월 28일 옛 구산성당을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옛 구산성당은 하남시 문화재 중 경기도 등록문화재 1호다. 건축물 자체의 가치뿐 아니라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벽돌 건물을 원형이축한 방법이 건축기술사적 측면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경기도문화재위원회는 “구산성당은 시대상을 잘 반영한 건물로 공소건축물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며, 원형 이축이라는 근대문화유산의 보존방법론을 새롭게 제시한 사례로 등록문화재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옛 구산성당은 현재 평소에는 미사가 봉헌되지 않고, 본당에서 장례가 났을 때 장례미사만 거행하고 있어 성당에서 미사 참례는 어렵다. 그러나 화·목·토 오후 1~6시, 수·금 오전 9시~오후3시, 주일 오전 9시~오후 6시에 개방하고 있어 누구나 성당을 찾아 성체조배 하며 기도할 수 있다.

2024-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