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조토 디 본도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모두 시대의 이름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낯설거나 모르는 표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대 안에서조차 문학, 미술, 건축 등 분야에 따라 그 시작 시점이 다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문학 분야가 먼저였고, 다음이 미술 분야이며, 성당을 포함한 건축 분야가 가장 늦습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우리 삶 안에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흐름을 따라 문학에 이어 미술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 가운데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1337)라는 피렌체 사람이 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조토는 피렌체 외곽 베스피냐노 마을의 양 치는 목동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뾰족한 돌로 바위에 양 떼를 그리는 것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치마부에(Giovanni Cimabue·1240–1302)가 보게 되었답니다. 그림을 본 그는 조토를 제자로 삼기로 하고 피렌체로 데리고 왔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던 조토는 그렇게 치마부에로부터 사실주의적 화법을 체계적으로 배워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토는 스승이 그린 인물화를 감상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잘생긴 코에 파리 한 마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잠시 후 외출에서 돌아온 치마부에는 코에 앉은 파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쫓으려 했습니다. 물론 파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제자의 사실주의적 표현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오른 것을 본 스승은 허공을 가른 길 잃은 손으로 “이 녀석!” 하며 멋쩍은 꿀밤을 주었을 것만 같습니다. 중세 시대의 성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실제 모습이 아닌 성경 속의 비중에 따라 위치와 크기 및 묘사의 정도가 정해지고 배경 역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금색으로 처리됩니다. 하지만 조토의 그림은 인물들의 위치와 크기가 실제에 가깝고, 그 자세와 표정도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됩니다. 그림의 배경도 자연 풍경이나 건물로 처리됩니다. 이런 화법은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으로 표현되었던 중세의 그림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조토의 활동 시기가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난 때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시대적 분위기는 이미 비합리주의적 신비주의보다 사실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무역과 은행업은 합리주의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발전하였습니다. 정확한 계산을 전제로 하는 상업 분야의 융성으로,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고가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조토 역시 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젖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토가 사실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내용은 여전히 성경이나 성인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회화의 대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토는 평생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프레스코화의 특징 때문에 아쉽게도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가 피렌체를 떠나 첫 번째로 맡은 작품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레스코화 작업으로 추측됩니다. 1253년에 완공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수도회의 창설자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90년 전후로 조토는 대성당의 상부 성당 벽면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와 전설을 28개의 프레스코화에 담아냈는데, 특별히 보나벤투라(Bonaventura·1221–1274)가 쓴 성인의 전기를 바탕으로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프레스코화 연작에 십자가가 한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조토는 비슷한 시기에 이것과 같은 모양의 십자가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에도 봉헌합니다. 조토의 십자가는, 다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숙여서 표현된 것과 달리, 그리스도의 몸이 수직으로 표현되어서 구부러진 다리에 몸의 무게가 더 많이 실리게 보이는 점이 특징입니다. 자신 몸을 가누지 못하고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음 앞에서 거룩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참사람으로 오신 구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조토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303년부터 1305년에 작업한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 프레스코화입니다. 경당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연작은 안나와 요아킴, 마리아,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 공생활,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최후의 심판 등 구원 역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조토의 진품을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구세사의 중요한 사건들 외에 양쪽 벽면 하부에, 사추덕(현명, 용기, 절제, 정의)과 향주삼덕(믿음, 사랑, 희망)으로 구성된 ‘7개 덕’과 절망, 질투, 불신, 불의, 분노, 불안, 어리석음의 ‘7개 악덕’을 상징하는 14개의 알레고리가 무채색으로 그려져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입구 상부의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나팔을 부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후광이 빛나는 가운데 심판을 하는 단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토는 건축에도 재능을 보여,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시작한 고딕 양식의 피렌체 대성당 공사를 이어 맡았고, 그때 그 유명한 조토의 종탑을 세웠습니다. 이 종탑은 설계와 재료 면에서 대성당과 조화를 이루도록 고딕 양식을 취하면서도, 내력벽의 두께를 줄이는 대담함을 보임으로써 구조 역학 측면에서 수준 높은 기술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조토는 1337년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피렌체 대성당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조토는 인물의 표정과 태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마치 감정을 가지고 대화하고 있는 듯한 회화를 구현한 최초의 화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술 분야에서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 피렌체의 고딕 건축을 주도했던 노장 아르놀포도 조토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시대의 기류를 조금은 감지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2025-01-12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단테 알리기에리

르네상스 시대를 연 사람들 이야기는 사실 당시의 피렌체 사람들 이야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첫 번째는 단연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입니다. 물론 시인 단테가 르네상스 시대의 성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 이야기라면 피렌체 대성당에 돔 지붕을 얹은 피렌체 사람 필립보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보다 100년이나 앞선 단테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테가 피렌체에 퍼트려놓은 뭔가 모를 새로움에 대한 희망의 물결이 브루넬레스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르노강을 따라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단테가 미친 영향은 그의 「신곡」(La Divina Commedia) 안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당시의 서적들은 귀족이나 지식인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라틴어로 써져서, 일반 대중은 읽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신곡」은 모두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토스카나의 피렌체 방언으로 씌었습니다. 그래서 피렌체 사람 대부분이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글을 몰라도 누군가 읽어주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신곡」은 당시 피렌체 사람들이 가졌던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심성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가톨릭교회의 사말(四末, 죽음, 심판, 천국, 지옥) 교리는 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이 「신곡」을 읽으면서 손을 놓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내세(來世)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살던 그곳 그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동시에 단테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피렌체 사람들이 고전에도 관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고 현세의 삶이 모두 「신곡」 안에서 어우러져 피렌체의 평범한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습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이야기하는 피렌체의 이야기 중에서 오늘날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피렌체의 아르노강에는 우피치 미술관과 피치 궁전을 연결하는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라는 그야말로 오래된 다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보석상들이 즐비한 이 다리에 「신곡」 천국편의 한 글귀가 새겨져 있는 표석이 있습니다. “그렇건만 피렌체가 그 마지막인 성대(聖代, 평화의 시대)에 희생을 드려야 한 것은 다리를 지키고 있는 저 이지러진 돌이어야 했었구나.”(「신곡」 천국편 145-147, 최민순 신부 번역) 1215년 여름 피렌체 근교의 콘타도(contado, 귀족의 별장)에서 피렌체 귀족들의 파티가 열렸습니다. 그러던 중 부온델몬티 가문의 청년과 우르베티 가문의 청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다행히 사태가 수습되고 그 표지로 부온델몬티 가문의 청년과 우르베티 가문 소속의 아미데이 가문 처녀를 혼인시키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하루 전날 부온델몬테는 도나티 가문의 아름다운 여인에 매혹되어 그녀와 혼인하기로 약속하고, 다음날 아미데이 가문이 기다리는 성당이 아닌 도나티 가문으로 가서 그녀와 약혼 서약을 하였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아미데이 가문은 이 소식을 듣고 극도의 모멸감에 복수를 결심하고, 어느날 폰테 베키오를 건너고 있는 부온델몬테를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부온델몬테가 도나티 가문의 꾐에 넘어간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미데이 가문의 살인 때문에 피렌체의 평화가 사라졌다고 노래합니다. 이후 피렌체는 황제당과 교황당으로 분열되어 끝 모를 복수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1300년 단테는 정치에 입문하여 교황당 백파의 일원으로 시뇨리아의 의원이 됩니다. 그런데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흑파를 지지하여 백파는 실각하고 단테는 1308년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습니다. 그해 단테는 「신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옥편 제19곡 제8환 제3낭에서 그는 성직을 매매한 죄인들이 구덩이에 거꾸로 틀어박히고 발은 불에 태워지는 벌을 받는 것을 봅니다. 단테는 거기서 니콜라오 3세 교황을 보고 성직자의 부패를 탄식하며, 니콜라오 3세가 가상 현실로 보니파시오 8세를 보는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저(니콜라오)는 소리치되, “진작부터 너 여기 있었느냐, 보니파시오야, 진작부터 너 여기 섰었느냐, 기록(미래를 예언한 기록)이 나를 속여 몇 해나 틀렸도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천국을 여행하며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정화되고 구원되는지를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성찰합니다. 단테는 천국의 안내자 베아트리체를, 어렸을 때 그녀의 집에서 그리고 성인이 될 즈음 우연히 거리에서, 단 두 번 만납니다. 하지만 단테가 「신곡」의 전작인 「새로운 삶」(La Vita Nuova)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짧은 만남으로도 그의 사랑을 확정할 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단테에게 이 혼돈의 세상에서 영원한 고요함과 아름다움 자체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여러 도시를 전전한 단테는 1318년 라벤나에 도착하여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궁정에서 머뭅니다. 이곳에서 단테는 「신곡」의 천국편 집필에 집중하였고, 1320년 드디어 지옥과 연옥을 지나 천국에 이르는 12년 동안의 대장정 「신곡」을 완성합니다. 다음 해 단테는 라벤나의 외교 사절이 되어 주변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베네치아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습지를 지나다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 라벤나에서 그가 그리던 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신학과 철학, 문학과 과학을 관통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수용하고, 당대의 혼란한 정치의 풍자에까지 이르는, 단테의 정신이 고스란히 베인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훗날 피렌체 사람들은 산타 크로체 성당에 그를 기억하는 무덤과 조각상을 남겨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1998년 사제품을 받았다. 2001~2008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했고, 2017년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고대·중세 건축사 연수를 했다. 현재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통합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2025-01-05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시대의 이름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성당들의 이야기다. 인생이 어느 단면만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성당도 지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공존했던 것들, 곧 정치와 경제, 종교와 사회, 문학과 예술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강한수(가롤로) 신부가 르네상스 시대 성당에 담긴 이야기들을 매주 풀어나간다. 피렌체의 유명한 바르젤로 미술관(Museo Nazionale del Bargello)에 가면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의 다윗 청동상과 산 조르조 조각상, 그리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바쿠스 조각상과 브루투스 흉상 등 미술책에 나올 법한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원래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고위 행정관 포데스타(podestà, 중립을 위해서 외국인을 임명)가 머무는 건물이었는데 13세기에 지어져서 19세기 중엽까지 경찰서, 법정, 감옥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302년 어느 날 이곳의 법정(현 도나텔로 방)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한 건의 판결이 선고됩니다. 당시 피렌체는 황제당(기벨린)과의 전투에서 이긴 교황당(구엘프)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교황당은 얼마 가지 않아 교황과 긴밀한 동맹을 원하는 흑파와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는 백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러한 혼란 중에 백파가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피렌체에는 장차 이탈리아를 넘어서 온 세상이 기억할 시인 한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며 절체절명의 위험에 처해 있는 그는, 바로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백파에 가담했고, 흑파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등에 업고 피렌체를 위협하자 교황과 협상하기 위해 백파를 이끌고 로마로 갔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단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파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나, 단테만은 로마에 머물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피렌체는 흑파의 손에 넘어갔고, 1302년 피렌체 법정은 단테의 재판을 진행하여 로마에 억류된 그의 항변은 듣지도 않고 2년의 유배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6년 후인 1308년 백파가 피렌체를 재탈환하려는 음모에 단테가 가담했다는 이유로, 단테는 종신 유배형 곧 아르노강의 베키오 다리에 다시는 갈 수 없는 영구적인 피렌체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단테가 「신곡」을 1308년에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해와 종신 유배형을 받은 해가 같은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현실이 단테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르젤로 미술관의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당시 포데스타 경당) 제단에 ‘파라디소’(paradiso, 천국)라는 제목의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조토(Giotto di Bondone·1267-1337)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이 그림 속에는 파라디소로 향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 있는 단테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단테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후에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토는 나이 든 단테의 모습이 아닌 정의를 위해서 전투에 나서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잊지 못하는 피렌체 시절의 열정 가득한 젊은 단테의 모습을 남겨주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을 두 살 아래의 조토는 피렌체를 주름잡았을 당시의 단테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토는 최초로 단테의 초상을, 그를 단죄한 법정의 성당에 그것도 하느님 나라의 성인들 무리 속에 그려놓았습니다. 조토는 단테에게는 죄가 없다고, 오히려 「신곡」에 나오는 것처럼 그를 단죄한 자들이 지옥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단테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피렌체에서 추방된 단테가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조토를 다시 만난 것은 페라라에서입니다. 화가이며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는 “조토가 단테에게 매우 좋은 친구였다”고 말합니다. 오랜만에 조토를 만난 단테는 고향 친구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조토가 거기서 그림 작업을 의뢰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또한 조토는 젊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1375)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얼마나 가까웠는지 보카치오가 “피렌체에서 조토만큼 못생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사실인 듯, 조토가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에서 인생 최고의 역작을 작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멀리 외지에서 작업을 할 때면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지냈는데, 그가 파도바에서 작업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날 단테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비범한 외모를 쏙 빼닮은 그의 자녀들이 작업장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단테는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찌 저리도 못생긴 아이들을 낳았는가?”하고 조토에게 장난기 섞인 우스갯소리를 건넸습니다. 이에 조토가 “여보게 밤은 어둡지 않은가?”하고 응수했다는데, 그 순간 멈칫하다 서로를 쳐다보며 박장대소했을 대가들의 짓궂으면서도 소탈한 모습이,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듯, 아련합니다. 14세기 전후 아직은 세상 속 작은 도시인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살 터울의 절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펜을 들고 다른 사람은 붓을 들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이전에 보고 들은 것과는 다른 그들만의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살았던 오래된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는 중세 시대의 신 중심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인문주의가 발생했고, 경제 분야에서는 양모 무역과 은행업의 발전으로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중상주의가 생겨났습니다. 이와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새로움은 천 년 전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자취를 감췄던 그리스와 로마 곧 고전이 부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문주의의 발달이 대중의 종교적 신심을 대체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삶 안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적 가치는 문학과 예술, 경제 전반에 걸쳐 더 활발히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 방식에 인문주의와 고전주의가 도구로 사용된 것인데, 이런 새로운 표현의 물결이 문학 분야에서는 단테에게서 그리고 미술 분야에서는 조토에게서 처음으로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대의 조심스러운 변화를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시대의 이름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200년이 지난 1550년경 조르조 바사리의 저서에서인데, 그는 생물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지듯 미술도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중세 미술을 넘어서서 다시 태어나는 이 시대가 미술의 ‘리나시타’(Rinascita), 곧 미술의 재생(부활)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이름이 이 시대를 지칭하게 된 것은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가 그의 역사서에서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부터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1998년 사제품을 받았다. 2001~2008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했고, 2017년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고대·중세 건축사 연수를 했다. 현재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통합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