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에 착수하고 피렌체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지 십 년이 훌쩍 지난 1432년, 그가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바쁘면서도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제노바(Genova,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태생의 한 젊은이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이 피렌체 땅을 밟았습니다. 격식 차린 옷매무새에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한 그는, 부친이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다가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제노바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태어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입니다. 다행히도 1428년 가문에 대한 추방령이 철회되고 알베르티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고향 땅에 드디어 발을 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낯선 피렌체에 온 것은 단지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한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대성당 공사 현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일꾼들에게 기중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찾아갔습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인문학적 지성을 갖춘 중견 건축가와 건축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인문학자는 그것만으로도 친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알베르티는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대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제노바에서 베네치아로 이주한 알베르티는 10대 중반에 파도바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0대 후반에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알베르티는 혼외 자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삼촌들의 지원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천재 조카가 인문학은 물론이고 수학과 물리학, 예술과 문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나 몰라라 하는 삼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문학 섭렵한 당대 최고 지성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하며 영향 받아 원근법·비례 숙고한 「회화론」 펴내 고대 로마 유물 복원했던 경험 토대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 집필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1435년 그의 첫 번째 예술 관련 저술인 「회화론」(Della Pittura)을 썼습니다. 이 책은 회화의 기초 이론에 관한 것으로, 알베르티는 그 서문에서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마사초 등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회화에 있어서 입체적으로 다른 거리에 있는 여러 사물을 한 평면에 표현하는 것과 그 사물들을 같은 비율로 축소하는 것, 곧 원근법과 비례에 대해서 깊게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근법(투시도법)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에게 이 책을 헌정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이렇게 회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실제로 회화 작품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작품 활동보다는 회화와 관련된 학문적 연구에 더 몰두한 듯합니다. 하지만 회화와는 다르게 건축과 관련해서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조언과 지도를 받으면서 몇몇 공사를 수주하였고, 이후 루첼라이 가문과 인연을 맺으면서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교회법을 공부한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가기 전인 1430년대 초에 로마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1450년대 초에 그는 다시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베르티는 피렌체에서 ‘팔라초 루첼라이’의 파사드 작업을 마칠 즈음이었는데, 최초의 인문주의자 교황으로 불리는 니콜라오 5세 교황이 1450년 희년을 보내면서 로마의 도로와 수로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공부하고 1444년 피렌체 공의회에도 참석한 바 있는 인문주의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알베르티는 교황청 건축 자문직을 맡았고, 교황의 배려로 하위 성직자로 임명되어 고대 로마 유적의 복원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중요한 공사가 천년이 넘은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수도교’의 보수인데, 멀리 수원지(水源池)에서 로마 시내까지 깨끗한 물을 끌어다 중앙 급수대까지 공급하는 수로 복원 공사입니다. 그 중앙 급수대에 세 개의 길, 곧 ‘트레 비에’(tre vie)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만난다고 하여 그 이름을 ‘트레비’(Trevi)라고 지었고, 훗날 그곳에 지금의 ‘트레비 분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알베르티는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고, 로마의 고전 건축에 대해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피렌체에서 건축가로서 활동한 알베르티는 총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De re aedificatoria)을 집필하여, 1452년 로마에 갔을 때 니콜라오 5세 교황에게 증정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건축서인 이 대작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알베르티의 「건축물론」에 영향을 준 책은 1세기 고대 로마의 가장 훌륭한 건축가이자 공학자인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라지고 내용만 전해져 왔는데, 그 필사본이 1415년경 인문학자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베르티는 1400년 전 고대 로마의 건축학을 최초로 연구하여 「건축물론」을 쓴 것입니다. 세상은 알베르티에게 ‘만능인’(萬能人) 혹은 ‘전인상’(全人像)이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이런 표현은 반세기 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어울리지만, 알베르티 역시 이런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지식욕을 가졌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사실상 만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알베르티는 가정환경 덕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알베르티의 생애를 쓰면서 독서를 많이 하는 예술가는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갖기 때문에 그림이나 건축에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영감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다면 그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치게 됩니다. 알베르티는 그의 인문학적, 과학적, 예술적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말라테스타 사원), 피렌체의 루첼라이 팔라초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파사드, 그리고 만토바의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드레아 성당 등을 설계하고 지었습니다. 알베르티 덕분에 피렌체의 르네상스 성당들이 바깥세상을 향하게(ad extra)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교회와 메디치가

역사 이래 유례없는 대이교(大離敎) 사태에 직면한 교회는 파리 대학에서 제안한 세 가지 해결 방안, 곧 자발적으로 사임하거나,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거나, 공의회를 통해서 교황을 선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은 자발적 사임이나 중재 재판 등을 거부하였으며 계속해서 두 곳에서 후계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러자 공의회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두 교황에 거슬러 13명의 추기경이 1409년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피사 공의회(공의회로 인정 안 됨)에는 교회가 당면한 이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400여 명의 주교, 주교 대리, 수도원장, 대학의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회의장 분위기는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공의회는 먼저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과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교황의 소송을 진행하여 폐위를 선언하였고, 이어서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교회에는 세 명의 교황, 정확히는 한 명의 교황과 두 명의 대립 교황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이 사망하고 요한 23세 교황이* 선출되면서, 피사의 교황도 후계자를 잇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발타사레 코사라는 나폴리 사람으로 비리가 있어서 평판이 안 좋은 추기경이었는데, 사람을 끄는 매력과 탁월한 수완으로 교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문제 해결 없이 점점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 요한 23세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했지만 정통 교황이 되지 못하고 폐위되었습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안젤로 주세페 론칼리)은 교회 역사의 이러한 아픔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요한 23세’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선택함으로써 교회를 쇄신하고 현대화(aggiornamento)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독일 왕 지기스문트(1410-1437 재위)는 요한 23세 교황을 압박하여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를 열었습니다. 공의회는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을 자발적으로 용퇴하게 하였고,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은 폐위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끝까지 저항하는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교황 역시 폐위하였습니다. 그리고 1417년 마르티노 5세 교황(1417-1431 재위)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교회의 대이교는 40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로 대이교 막 내려 은행업으로 부와 권력 축적한 조반니 새 교황과 폐위된 교황 화해 이끌어 브루넬리스키의 천재성에 주목하며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 건축 맡겨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태어난 1377년은 시에나의 성 가타리나가 아비뇽에 있는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던 해이고, 바로 다음 해인 1378년부터 1417년까지 교회 안에 이런 대이교가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인 1401년 브루넬레스키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 공모에서 공동 당선되었을 때, 오만하게도 이를 거부하고 로마로 떠난 그를 지켜본 한 위원이 있었습니다. 우연히도 대이교가 끝난 1417년 마흔 살의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돌아와 피렌체에 정착했을 때 그는 청동문 공모전 때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피렌체의 건설 위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1419년 피렌체 당국이 유럽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의 건축을 계획했을 때, 그는 그 시설을 가장 잘 구현할 건축가로 브루넬레스키를 지목하고 그에게 피렌체 고아원(Ospedale degli Innocenti)의 설계를 맡겼습니다. 지저분한 옷차림에 성격은 까다롭고 강한 자존심에 오만하기까지 한 거부감투성이인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을 알아본 그 사람은, 1421년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뽑히기도 한, 치밀하고 조심스러우며 속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내는 당대의 신흥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입니다. 1340년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가 중단된 큰 원인 중의 하나가 피렌체의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 등 주요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이 모두 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피렌체에는 소규모의 가족 은행들만 남았습니다. 사촌이 운영하는 작은 은행의 직원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실력을 인정받아 로마 지점장이 되었고, 1397년 사촌이 은퇴하자 로마 지점을 인수하고, 이어서 피렌체에 은행을 열었습니다. 조반니는 성공 후에도 평범한 집에서 살았고, 매일 메디치 은행까지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사람들 사이로 길을 내며 출근하는 다른 가문들의 행색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조반니가 그렇게 은행가로 성공하고 명망을 얻기 시작할 즈음, 후에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이 될 나폴리 출신의 코사 추기경은 조반니를 설득하여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립 교황이 되자 이에 격분한 나폴리 왕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평화 조약을 빌미로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조반니 데 메디치는 돌려받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돈을 대부하였습니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된 요한 23세 교황이 지기스문트 왕에게 구금되었을 때, 조반니는 교황의 석방금을 내주고 피렌체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죽은 후에 산 조반니 세례당에 묻어 주었습니다. 조반니의 이런 행보는 은행의 자금 사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지만, 메디치 은행은 고객의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지원해 주며, 그만큼 재정 상황도 안정적인 신용 있는 은행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후 새롭 뽑힌 마르티노 5세 교황이 로마로 가기 전에 피렌체에 머물렀을 때 조반니는 새 교황과 폐위된 교황이 화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에 마르티노 5세 교황은 조반니에게 감사를 표하였고, 몇 년 후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모든 계좌를 관리하는 은행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로 돌아온 때이고, 조반니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인 브루넬레스키에게 피렌체 고아원뿐만 아니라 메디치가와 인연이 있는 산 로렌초 성당의 공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1429년 조반니 데 메디치는 장남 코시모와 막내 로렌초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라. 가능한 시뇨리아에 가지 말고, 송사에 휘말리지 말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남 코시모는 메디치가의 신조와도 같은 아버지의 유언을 마음에 담고, 이제 자신 앞에 펼쳐질 시대를 당당히 맞이할 것입니다.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와 교회

조반니 치마부에(1240-1302)와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10)는 중세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을 13세기 후반 중세적이면서도 새로운 회화와 건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는 14세기를 열면서 문학과 회화 분야에서 새로움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후 15세기에 들어서서 건축, 조각, 회화 분야에서 브루넬레스키(1377-1446), 도나텔로(1386-1466), 마사초(1401-1428) 삼인방은 르네상스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시기에 교회의 상황은 조금 복잡다단했습니다. 11세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이후 인노첸시오 3세 교황(Innocentius III, 1198-1216 재위)은 교황의 권한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 면에서 황제와의 긴장과 대립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내적인 일관성으로 통일된 질서 원리를 구축하였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백성은 초자연적이고 초국가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교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서구 세계 전체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이렇듯 강한 교황권을 수립했지만, 교황은 세상의 부와 사치로부터 거리를 두었으며, 프란치스코회를 인준하고 제4차 라테란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3세 교황 이후 교황권은 다시 약해졌는데, 한 세기가 지나 보니파시오 8세 교황(Bonifacius VIII, 1294-1303 재위)에 의해서 교황권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왕권을 강화하려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IV, 1285-1314 재위)와 충돌하였습니다. 이때 교황은 세속 권력이 영적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Unam Sanctam」(하나이고 거룩한 교회, 1302)을 반포하고 필리프 4세를 파문하였습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아냐니에 머무는 교황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고, 저항할 힘이 없었던 교황은 여러 고초를 겪고 얼마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인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특히 클레멘스 5세 교황(Clemens V, 1305-1314 재위)은 리옹에서 필리프 4세가 참석한 가운데 착좌식을 거행하고 로마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채 1308년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의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교황이 로마에 머물지 않게 되자 로마 시민들은 이를 두고 ‘바빌론 유배’라고 비난했는데 여기서 ‘아비뇽 유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후 클레멘스 5세 교황은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하고 죽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소송을 진행하는 등,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후임자 요한 22세 교황(Ioannes XXII, 1316-1334 재위)이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는 독일 황제 루드비히 4세(Ludwig IV, 1314-1347 재위)를 직무에서 정지시킨 것은, 교황권이 프랑스의 국익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아비뇽의 교황들은 교황청 유지를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그것으로 인해 교황청에 대한 세상의 평판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런데 1324년 루드비히 4세는 교황 반대자들을 궁정에 모아 놓고 요한 22세 교황을 공의회에 항소하였습니다. 그들은 교계제도를 비판하고, 교황 수위권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였으며, 교회의 최고 권한은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황을 공의회에 종속시키고 공의회의 결정에 교황이 복종해야 한다는 이 ‘공의회 우위설’은 교회사에서 지속적인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는 교황의 보편교회에 대한 권한을 실추시켜서 독일 교회가 교황권에 등을 돌리는 빌미가 되었고, 결국 일어나서는 안 되는 서방교회 ‘대이교’(大離敎)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들 대부분은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스웨덴의 비르지타 성인과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의 간절한 호소는 아비뇽 교황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다음은 가타리나 성인이 교황의 로마 복귀를 호소하는 내용의 서한 일부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진정한 후계자이신 그레고리오 11세 교황 성하께,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지금 겪고 있는 폭풍우 같은 시련과 교황 성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몹쓸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교황 성하를 돕기 위해 가까이 계십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교황 성하께서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십시오. 로마로 오십시오.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성하께서는 예수님의 대리자이시므로, 당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로마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어린양처럼 오셔서 사랑이라는 무기로,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군사들의 호위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순한 양처럼 십자가를 들고 오십시오.”(장 콤비, 「세계 교회사 여행 I」, 577-579 참조) 결국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Gregorius XI, 1370-1378 재위)은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개혁을 시작할 틈도 없이 선종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에서 70년 만에 콘클라베가 열리게 되었고, 로마인 추기경단은 이를 놓칠세라 선거인단에게 압력을 가하여 1378년 봄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선출하였습니다. 프랑스 추기경단은 일단 로마에서 물러난 후 그해 가을 이번 교황 선거가 강압에 의한 무효라고 주장하며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7세 교황을 뽑고 1379년 아비뇽에서 착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두 교황(교황과 대립교황)을 갖게 되면서 40년 동안의 대이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와 충돌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300년에 처음으로 성년을 선포한 교황이지만 단테와는 악연으로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가 죽고 1305년부터 1377년까지 70년 이상 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시기를 보내고 이후 40년 동안은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의 교황을 두는 극단의 분열 시기를 보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이 혼란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삶과 사명에 미친 영향을 몇 마디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그 혼돈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쓰고, 그리고, 지으면서 교회가 초대 교회의 삶을 본받아 새로이 태어나기(Rinascita)를 바랐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토 스피리토 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산토 스피리토 성당(Basilica di Santo Spirito, 성령 성당)은 그의 건축적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최초의 성당은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피렌체에 정착하면서 1269년에 성령께 봉헌되었습니다. 피렌체에 있는 탁발 수도회의 성당들인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의 산타 크로체 성당, 도미니코 수도회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함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당대의 예술과 신학과 문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원 안에는 대규모의 도서관이 있고,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등 문인들의 방문이 잦았습니다. 이후 14세기 말에 새로운 성당 건립이 추진되면서 1434년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인 1444년에 성당 건축의 첫 삽을 뜨게 되었는데, 브루넬레스키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2년 후인 144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공사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스승의 설계대로 진행되어 1482년에 새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설계는 산 로렌초 성당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평가일 것입니다. 산 로렌초 성당은 정사각형 모듈을 기본으로 하여 평면과 입면이 모두 정형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일이 하나의 정사각형 베이로 구성되었다면 네이브는 정사각형 두 개를 나란히 놓은 크기의 베이로 구성되어, 성당 전체에 통일성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아케이드와 클리어스토리(천측창이 있는 2층)의 높이가 3대2로 완전한 정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중을 고려하지 않고 기둥의 크기를 일률적으로 통일하여서, 하중을 많이 받는 기둥에 구조적으로 부담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네이브를 따라 형성된 아일과 경당도 트란셉트를 만나면서 끊기게 되어 평면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산 로렌초 성당에 나타난 이러한 통일성의 문제점들을 대부분 해결하였습니다. 특히 아일과 경당이 네이브만이 아니라 트란셉트와 제대 뒤편의 앱스에 이르기까지 통일성을 유지하며 이어졌습니다. 네이브와 트란셉트가 만나는 코너 부분의 아일은 양쪽으로 모두 개방되어 있고, 네이브 쪽의 마지막 경당은 네이브 방향으로, 트란셉트가 시작되는 곳의 경당은 트란셉트 방향으로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두 경당이 만나는 곳의 벽은 45도로 설치되어 공유하고 있으며 벽기둥도 두 경당에 모두 작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평면 구성은 네이브와 트란셉트가 균일한 형태를 취하면서 통일성을 강화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케이드와 클리어스토리의 비율도 산 로렌초 성당에서는 3대2였는데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 와서는 1대1로 해결되었습니다. 네이브의 경당 수는 두 성당이 같지만,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트란셉트와 앱스를 네이브와 같은 형태로 구성함으로써 경당 수가 많아졌고, 경당을 원하는 후원자들의 요구를 만족시켰습니다. 조도의 통일성은 산 로렌초 성당에서도 시도되었지만,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크로싱을 받치는 벽기둥을 두껍게 하고 돔에 창을 내어 빛을 더 들어오게 함으로써, 천장(하늘)과 바닥(땅) 사이의 조도 차이를 줄였습니다. 이는 성(聖, 하늘)과 속(俗, 땅)의 공간이 균형을 이루며 통일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간의 통일성은 선형 공간 안에 중앙집중형 공간을 배치함으로써 더 잘 드러납니다. 네이브의 8베이 중에서 6베이를 제외하고 2베이만 잘라서 보면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완전한 대칭의 중앙집중형 평면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완전한 대칭의 라틴 크로스(장방형 십자가) 구성과 완전한 대칭의 중앙집중형 혹은 그릭 크로스(정방형 십자가) 구성이 한 평면에 결합한 형태입니다. 이렇게 선형 공간에 중앙집중형 공간이 더해지는 배치는 브루넬레스키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후기에 와서 완전한 대칭으로 정리되었고, 이로써 중앙집중형 공간이 선형 공간을 능가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변화는 르네상스 건축이 선형에서 중앙집중형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이러한 설계 방향이 알베르티에게 이어지고 전성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중앙집중형 평면이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전의 건축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먼저 수학과 기하학에 기초한 공학 기술자이면서, 설계 및 시공을 직접 지휘하는 현장형 건축가였습니다. 그리고 고전 정신과 시민 정신을 교육받은 인문주의자이면서, 효율적인 시공을 위해서 다양한 기계들을 발명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이렇게 현장을 중시했던 실용주의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는 정밀한 시공을 추구하며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줄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시공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현장의 장인들에게 가르쳤고 그것을 통해서 작업 능률을 올렸습니다. 또한 그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면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전수된 경험에 의지하여 건축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면을 그리고 정확한 수치를 써넣음으로써 건축의 전 과정에서 작업의 표준화와 시공의 정밀화를 이루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는 당연한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모두에게 생소하였던 파격적이고 선도적인 시공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브루넬레스키는 그가 죽고 6년이 지나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자주 비교되곤 합니다.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서 암호와 기호로 비밀 수첩을 만들어 보관했던 점도 두 거장의 비슷한 점입니다. 모두 본인 작품에 대한 독창성을 중요시한 것인데, 그만큼 그들이 발명한 작품들에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저작권이 법적으로 보호되지 못했던 시대에 발명가들이 겪는 고초일 것입니다. 다빈치의 발명품이나 스케치 중에는 브루넬레스키의 톱니바퀴와 도르래, 크랭크축 등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비밀 수첩을 없애지 않고 후대에 남겼더라면 그의 첨단 기술은 다빈치를 거쳐 최첨단 기술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브루넬레스키는 설계 및 건축 분야에서 비밀 수첩의 내용들을 이미 남김없이 쏟아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최고의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 고맙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피렌체 대성당 돔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산 조반니 세례당 청동문 공모에서 결국 낙선하여 로마로 향한 것이 1403년경의 일입니다. 그때 피렌체 대성당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대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한 1296년 당시는 피렌체가 은행업과 양모 산업의 발달로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피렌체는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웃 도시 국가들보다 더 높고 더 아름다운 성당을 갖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피렌체는 유능한 건축가의 기술력과 그것을 현실화시킬 자금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사가 오래 진행되는 가운데, 피렌체의 은행들이 도산하고 흑사병의 창궐로 1340년경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는 멈춰 섰습니다. 완성된 건물은 아름답지만, 공사가 중단되어 방치된 건물만큼 흉물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쌓다가 만 벽돌 사이에 잡초가 자라고, 지붕이 없어 눈비가 들이치니 사방에 이끼가 끼고,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에 들쥐가 우글거리는 대성당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을 때의 대성당이 이랬습니다. 피렌체와 로마를 오가며 고대 로마의 건축을 배우고 익힌 브루넬레스키는 1417년 불혹의 나이에 피렌체로 완전히 귀향했습니다. 로마에서의 고전 연구는 그의 예술적 능력을 향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관심이 조각을 넘어서 건축 분야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수학과 기하학에 뛰어났던 브루넬레스키는 고향의 삶에 적응하면서, 기중기 등의 건설 기계들을 발명하고 단일 소실점을 갖는 원근법을 창안하였습니다. 그렇게 로마 수학의 결과물들을 조금씩 내고 있을 즈음인 1418년 어느 날 시뇨리아 광장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세울 건축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습니다.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다소 냉소적인 브루넬레스키였지만, 그 공고는 그의 가슴을 두드리며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사실 대성당의 공사가 시작된 지 120년이 넘었고 공사가 중단된 지도 80년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돔의 건축 공고가 났을 때는 돔을 제외한 다른 부분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는데, 그래도 지름이 42미터나 되는 돔을 세운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난제 중의 난제였습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피렌체 설계 위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대뜸 주머니에서 달걀을 하나 꺼내어 그들에게 세워보라고 말하였습니다. 콜럼버스보다 80년 먼저. 도저히 속셈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위원들에게,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의 밑을 조심스레 깬 후 탁자 위에 세웠습니다. 달걀 세우기를 통해서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설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설계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의 돔 건축 설계는 독창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도용됨 없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브루넬레스키는 설계 위원들에게 설계 방안의 골자를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대성당의 돔이 반구형이 아니라 방금 보여준 달걀처럼 위가 뾰족한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딕 구조에서 반원형 아치보다 뾰족한 아치가 더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반구형 돔보다 뾰족한 돔이 더 큰 지름의 돔을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브루넬레스키는 달걀형의 돔에 여덟 개의 석재 리브가 마치 우산살처럼 펼쳐 들어가서 돔을 받칠 구상도 밝혔습니다. 설명을 들은 설계 위원회는 약간의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브루넬레스키에게 돔 공사를 맡겼습니다. 돔 공사의 일반적인 방법은, 고딕 성당에서 리브 그로인 볼트(rib groin vault, 석조로 된 둥근 천장)를 시공할 때처럼, 먼저 반구의 형틀을 아래부터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얹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지름이 42미터이고 거기에 들어가는 벽돌은 약 2만 5천 톤에 달합니다. 따라서 브루넬레스키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지름이 42미터인 돔의 벽돌을 쌓을 목재 형틀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거대한 돔의 하중을 최대한 분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내놓은 방법은 ‘이중 돔 구조’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판테온과 피렌체 대성당 산 조반니 세례당의 지붕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돔을 두 겹으로 만들고 내부와 외부의 돔 사이의 공간에 두 돔을 연결하는 수평 부재를 여러 층으로 쌓아서 이중 돔 전체를 일체화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벽돌을 쌓는 방법인데, 판테온의 예처럼 브루넬레스키는 돔을 받치는 벽체 두께가 4.3미터인 점을 이용해서, 내부 돔은 2.3미터 외부 돔은 1미터의 두께로 벽돌을 쌓기 시작하여 위로 갈수록 두께가 줄어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고대 로마의 축조 기술을 응용하여 벽돌을 수평 쌓기와 수직 쌓기로 혼합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쌓은 벽돌의 모양이 마치 물고기의 뼈와 비슷하다고 하여 헤링본(Herringbone) 스타일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방식은 하중이 수평과 수직으로 분산되어 벽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또한 돔에 여러 개의 리브(rib, 하중을 받아 내는 갈비뼈 모양의 구조적 요소)를 구성했는데, 먼저 팔각형 모서리에 8개의 대형 리브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개씩 16개의 소형 리브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리브에 전달된 힘을 수평으로 분산시키는 수평 부재를 설치하여 돔의 골격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구조는 대형 8개와 소형 16개의 리브가 팔각지붕을 지지하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 밖에도 주로 내력벽의 역할을 하는 내부 돔에 강철과 사암으로 고리를 만들어 일정한 간격으로 벽돌을 고정함으로써 벽돌벽이 바깥으로 밀리지 않게 하였고, 내부 돔에 긴결되어 있는 외부 돔은 붉은 벽돌로 치장되어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16년간 현장에서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고, 드디어 1436년 피렌체 대성당의 봉헌식에도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돔 꼭대기의 6미터 원형 공간에 랜턴이 올려지는 화룡점정의 순간은 함께하지 못하고, 1446년 그가 온 힘을 기울여 올린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지붕 삼아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잠들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 로렌초 성당

브루넬레스키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가 요구하는 많은 것을 습득하고 그것을 실현하였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그 시대에 맞는 건축물을 희망하였고 브루넬레스키는 그들 앞에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건축사가들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집’이라는 구성요소 안에 시민정신과 인문주의를 조화롭게 담아낸 첫 번째 건축가가 브루넬레스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은 그 시대에 피렌체에서 생겨난 건축적 특징들을 종합하고 통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고전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성뿐만 아니라 실용성을 찾아내어 그의 작품에 반영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르네상스 시대라고 명명된, 그의 시대를 중세와 단절된 시대로 보지 않고, 중세부터 발전해 오던 문명이 조금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며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토스카나의 로마네스크 역시 르네상스에 영향을 준 건축 양식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네스크 양식 안에 로마의 고전이 담겨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중세는 로마 고전의 연속이고 르네상스는 그런 중세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르네상스는 ‘고전적 중세’의 발전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고전과 중세 안에 담긴 고전이 공통으로 작용하여 고전과 중세가 르네상스 안에서 종합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당으로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을 들 수 있습니다.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전신인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피렌체의 주교좌성당이 되기 전까지 300년 동안 피렌체의 주교좌성당이었던 이 성당은 15세기에 들어 확장 공사가 추진되었고, 1421년 조반니 데 메디치의 지원으로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조반니는 오늘날 구 성구보관실(Sagrestia Vecchia)이라고 불리는 경당을 브루넬레스키에게 의뢰하여 공사 중이었기에 산 로렌초 성당의 설계와 공사도 자연스럽게 브루넬레스키에게 맡겨졌습니다. 조반니 사후 공사는 코시모 데 메디치에 의해 진행되었고, 이후로 메디치가의 사람들은 산 로렌초 성당과 깊은 인연을 맺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산 로렌초 성당은 중세 성당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산타 트리니타 성당이 그중 하나인데, 이 성당은 바실리카형 라틴 크로스 평면에 볼트형 천장의 아일, 그리고 아일 바깥에 많은 경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 로렌초 성당 역시 바실리카형의 라틴 크로스 평면에 정사각형의 크로싱과 돔이 있고 아일 주변에는 많은 기도실이 배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고전적 중세’의 형태로 브루넬레스키는 산 로렌초 성당에서 중세의 구성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일정한 길이 단위를 기본으로 정사각형 모듈을 만들어, 평면과 입면을 비롯한 성당 전체에 적용하였습니다. 아일을 하나의 정사각형 모듈로 구성하였다면, 이것을 기준으로 네이브의 한 베이는 정사각형 모듈 두 개로 구성됩니다. 이는 성당 전체에 통일성을 주기 위함인데, 이런 통일성은 실내 조도에도 적용되어 바닥에 가까울수록 창을 넓게 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창을 좁게 하여 조도를 균일하게 통일한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산 로렌초 성당의 네이브와 아일에 그가 조금 앞서 지은 피렌체 고아원(Ospedale degli Innocenti)과 동일한 독립 원형 기둥이 받치는 아케이드(기둥 상부에 아치가 연속적으로 있는 형태)를 넣었습니다. 하지만 아일과 경당은 콜로네이드(기둥이 일렬로 서 있고 상부에 수평구조물이 있는 형태)로 구획되고, 주두 대신에 엔태블러처 조각이 들어가 실제 높이가 높아졌습니다. 경당의 콜로네이드 벽기둥과 크로싱을 받치는 벽기둥이 같은 크기로 통일성을 이루었는데, 실제로 크로싱의 하중이 더 크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성은 구조적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크로싱의 하중을 줄이고자 드럼 없이 돔을 팬던티브(원형 돔을 사각형 구조물 위에 올릴 때 사용하는 삼각형의 곡면 구조물)에 바로 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돔의 높이가 낮아져서 외관상으로 묻혀있는 것처럼 보이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돔의 조도가 어두워졌습니다. 지금은 돔 위에 지붕이 있어서 외부에서 돔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아일과 경당이 네이브 부분에서는 이어지다가 트란셉트를 만나면서 끊기는 평면 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평면이 트란셉트보다 네이브 중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이점에서도 평면의 균형과 통일성이 감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란셉트 부분에서 아일과 경당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일만 사라지고 여러 경당이 트란셉트를 둘러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때 같은 크기의 경당을 배치하면서 구석 부분에 비례에 맞지 않는 공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공간에 구 성구보관실(Sagrestia, 제의·성합·성작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한국에서는 보통 ‘제의실’이라고 부른다)과 신 성구보관실을 배치했습니다. 구 성구보관실은 본 성당보다 먼저 완공되어 사용되었고, 신 성구보관실은 설계에는 있었으나 실제로 100년 후에 미켈란젤로가 완성하였습니다. 산 로렌초 성당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설계되고 시공되었지만,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브루넬레스키 사후 메디치가의 건축가인 미켈로초에 의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파사드는 여전히 미완성으로 보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산 로렌초 성당보다 1~2년 앞서서 그가 속한 길드의 결정으로 세계 최초의 고아 보육 시설인 피렌체 고아원을 설계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것은 그의 시민정신과 인문주의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회랑을 갖춘 클로이스터(안뜰) 형태로 평면이 구성되었고, 입면은 건물 파사드의 로지아와 클로이스터의 로지아에서 모두 아케이드를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는 형태로, 이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반으로 한 ‘고전적 중세’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물의 정형화와 통일성을 설계에 적용하여 시공의 효율성과 실용성을 증대시켰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재가 절약되고 공사인력의 수급이 쉬워졌으며 건설 기계가 발명되어, 대성당 돔에 대한 오랜 기도가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게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13세기와 14세기 문학과 미술, 건축 분야에서 활동했던 피렌체 사람들 덕분에 15세기에 들어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그렇게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세상의 관심이 피렌체로 집중되고 있을 때, 피렌체를 떠나 폐허가 된 고대 로마의 유적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직 1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로마에 온 20대의 청년을 꽤 의식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피렌체에서 유행했던 인문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금세공 기술자들입니다. 그런데 청년이 자신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로마로 떠나자, 소년도 그 길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세상이 싫은 청년은 훗날 피렌체 대성당에 붉은색 돔을 올려 새 시대의 도래를 증명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많은 소년은 바르젤로 미술관의 청동 다윗상으로 곧 세상을 놀라게 할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입니다. 후대에 이들은 마사초(Masaccio·1401-1428)와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3대 ‘창시자’로 인정받습니다. 도나텔로는 고전을 잘 표현하는 훌륭한 조각가로 성공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조각상들을 연구하고, 무너진 유적들 사이를 파헤치며 부서진 조각상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나텔로는 뭔가를 마음속에 숨겨 놓고 드러내려 하지 않는 열 살 위의 브루넬레스키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더구나 브루넬레스키는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지금 그가 하는 일과 생각이 궁금하여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피렌체에서 이미 이름이 알려진 그가 로마까지 와서 자신과 같은 조각 분야의 연구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나텔로의 우려는 브루넬레스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보통 사람들이 예견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결심한 바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큰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짐작이 가는 한 가지는, 당시 피렌체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으로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 앞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부조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로마로 향했으니, 도나텔로처럼 대부분이 브루넬레스키가 고대 로마의 조각 기술을 더 배우러 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추측들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기초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정부 관리였던 아버지로부터 공화정과 시민 정신을 배웠고, 정통 귀족이자 은행 가문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중상주의와 실용주의를 익혔습니다. 따라서 그는 셈법, 수학, 기하학 등 실용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라틴문학에서 단테의 작품까지 인문주의 서적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고전을 배우기 위해서 이미 10대에 로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던 것은 금세공 분야였습니다. 이는 당시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그러한 실용주의자를 육성한 메디치 가문의 영향이 컸습니다. 따라서 브루넬레스키는 시민 정신과 인문주의에 바탕을 두고, 학문보다는 현장 중심으로 이론과 실습을 배워나갔습니다. 그래서 현장에 필요한 기계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스마트워치에 해당하는 기계식 알람 시계도 발명했습니다. 그러던 중 1401년 피렌체 대성당 산 조반니 세례당의 두 번째 청동문 설치를 위한 공모전 공고가 났습니다. 주제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정해진 규격에 청동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세공에 자신 있었던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실력을 뽐낸 멋진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심사를 맡은 34인 위원회는 그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를 공동 당선자로 발표했습니다. 출품작에서 드러나듯, 작품 성향이 너무 다른 기베르티와는 공동으로 작업할 수 없음을 알았던 브루넬레스키는 이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단독 당선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거부되자 더 이상 금세공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피렌체를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몰두했던 것은 도나텔로가 상상하는 고대 로마의 청동 조각상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건축에 관심을 두고 로마에서 고대 건축물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높이와 폭, 길이를 측량하여 그들 사이의 비례관계와 지붕의 경사도 등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얻은 로마 건축물의 정보를 양피지 위에 기록해 두었는데, 혹시 모를 유출에 대비하여 비밀 기호와 아라비아 문자로 치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 세기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랬다는데, 천재들의 애환이겠지요? 특히 그가 로마에 머무는 이유는 판테온 때문이었습니다. 1500백 년 동안 굳건히 서 있는 판테온의 돔을 보는 순간, 그는 고향 땅에 돔 지붕을 덮지 못한 채로 수십 년이 흐른 대성당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육중한 콘크리트 돔은 어떻게 아래로 무너지지 않을까? 이 돔의 엄청난 하중을 받는 외벽은 어떻게 밀리지 않고 버티고 서 있을까? 그런 끊이지 않는 의문들 속에 브루넬레스키는 수도 없이 돔을 오르내리며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연구를 이어갔고, 결국 몇몇 실마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우선 돔의 하중을 가볍게 한 것입니다. 돔 하부의 두께는 약 6미터인데 오쿨루스(원형 개구부) 두께는 1.5미터에 불과합니다. 상부로 갈수록 돔의 두께가 얇아진 것입니다. 또한 돔의 재료도 상부로 갈수록 가벼운 것을 사용했는데, 하부는 콘크리트와 벽돌의 혼합을, 중간은 콘크리트와 응회암의 혼합을, 그리고 상부는 콘크리트와 화산암의 혼합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돔의 안쪽 면을 격자 형태의 요철 구조체로 구성하여 돔의 무게를 줄이면서도 구조적으로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높이와 너비, 돔의 지름이 보여주는 수치 사이의 비례 등 판테온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 10여 년 동안 로마를 여러 차례 오갔습니다. 그렇게 고대 로마의 건축 기술을 습득한 브루넬레스키는 1417년 피렌체로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을 벌이고 맙니다. 멋지게!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12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단절과 연속 사이

지금까지 소개한 시인 단테, 화가 조토, 그리고 조각가이자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 그들이 만든 「신곡」, 스크로베니 경당의 프레스코화, 그리고 피렌체 대성당(돔 제외)과 산타 크로체 성당 등은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중세의 손길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새 시대를 향해서 던지는 어떤 물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중세와 르네상스가 서로 맞물려 있는 시대의 작품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르네상스를 정의하는 데, 다시 말해서 르네상스의 시기와 특징을 밝히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16세기 피렌체 대성당 돔 안쪽의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를 비롯한 수많은 회화를 남긴 화가이자 우피치 궁전과 피티 궁전 등을 설계한 건축가, 그리고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을 저술한 최초의 미술사학자로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는 그의 책에서 “14~16세기에 활동한 예술가들의 공통점은 고전을 재탄생(Rinascita, 부활)시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리나시타’ 개념 안에는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와 차별되고 단절된 새로운 시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언급대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 곧 인본주의, 중상주의, 고전주의 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런 사상들을 중세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명 현상으로 본다면, 르네상스는 문명 전체의 차원에서 중세를 대체하는 새로운 변혁 운동이 분명합니다. 19세기 미술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인 스위스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1818-1897)는 그의 역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0)에서 르네상스를 중세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라고 언급합니다. 중세를 종교적 전체주의가 강조된 시대라고 본다면 르네상스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개인주의가 출현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경우 정치, 예술, 철학 분야에서 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삶과 경험이 신 중심적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 가치를 통해서 재해석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부활하여 인문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중세에서 단절되었던 고전이 르네상스에서 다시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르네상스가 근대 서양 문명의 시작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 중심으로 삶 인식하는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 부활하기도 중세-르네상스 대립적으로 인식하지만 구 시대-새 시대는 공통·일치점도 있어 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르네상스는 쇠락한 그리스도교 문명을 인문주의로 부활시킨 새로운 문명의 발생으로 정의되고, 그 경우 르네상스의 시작은 14세기가 됩니다. 이렇게 중세와 단절된 새로운 문명 현상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중세를 탈피하고 중세를 완전히 대체합니다. 따라서 중세와 르네상스는 문명 전체의 차원에서 대립적 구도를 이룹니다. 그리스도교와 고전의 대립, 신 중심과 인간 중심의 대립, 그리고 건축에서는 포인티드 아치와 반원 아치의 대립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문명 전체가 아닌 예술 분야의 차원에서 보면 르네상스가 발생한 시기는 14세기에서 조금 더 늦춰진 15세기 이후로 정의됩니다. 이 주장은 14세기를 중세와 르네상스의 중첩 시기로 본다는 것인데,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 겹치는 기간이 있다는 것은 두 시대가 단절되지 않고 서로 연속적인 측면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1872-1945)는 그의 저서 「중세의 가을」(Herfsttij der Middeleeuwen·1919)에서 14~15세기를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라, 중세의 세계관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쇠퇴하는 시기라고 언급합니다. 중세 후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 예식과 미술, 그리고 문학에 반영되어 감성적이고 상징적인 문화가 지배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식적이고 상징적인 삶의 방식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런 형식적이고 고착된 사고방식은 중세 문화를 쇠퇴하게 만들어 새로운 사고방식의 등장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중세의 종교적이고 집단적인 세계관과 근대의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문화가 혼재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를 ‘중세의 가을’이라고 표현하면서 르네상스가 중세와 대립하는 시기가 아니라 중세적 감수성이 연속되는 시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중세 후기는 문화적으로 풍요로웠지만 그 한계도 드러내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의 시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중세가 암흑의 시기가 아니라 감수성과 문화적 깊이가 무르익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중세와 르네상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르네상스뿐만 아니라 중세에도 고전에 대한 연속성이 발견됩니다. 철학 분야에서 중세의 스콜라철학은 헬레니즘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하고, 건축에서도 중세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나아가 르네상스 시대에도 중세의 연속성이 나타납니다. 특히 건축 분야에서 브루넬레스키의 반원형 아치는 토스카나의 로마네스크에서 이미 쓰인 건축 요소입니다. 그리고 건축 양식의 르네상스는 1420년에 시작되었지만 구조 분야의 르네상스가 시작된 1490년까지는 중세의 구조 기술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문명 전체의 관점에서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서로 단절된 것으로 보이지만 예술 분야 등 각각의 분야별로 보면 상호 연속성이 존재합니다. 이는 고대에는 문명과 예술이 고전이라는 일치점을 갖고 있었고, 중세에도 문명과 예술이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일치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명과 예술이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건축의 경우만 보더라도 고대 건축과 중세 건축은 사회와 일체성을 유지했지만, 르네상스에서는 사회와의 일체성을 잃고 예술적으로도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전 양식을 가져와 건축가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아르놀포가 설계한 피렌체 대성당은 중앙 상부에 돔이 계획되었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무리였고, 한 세기가 지나서야 브루넬레스키에 의해서 올려집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은 두 시대의 단절 덕분인가요, 연속 덕분인가요? 아니면 단절과 연속 사이일까요?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산타 크로체 성당

고딕 건축에서 르네상스 건축으로 넘어가는 문턱 앞에 선 노장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는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이미 르네상스를 향한 발걸음을 앞서 내디딘 젊은 단테와 조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 분야에도 르네상스의 기운이 밀려들고 있는 것을 의식하면서,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서 절정의 고딕 성당을 설계하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준비로 지금의 시대를 완성하고자 지은 피렌체의 성당들이 있습니다. 고딕 성당이라고 하지만 프랑스에서 시작하고 발달한 고딕 성당과는 사뭇 다른 토스카나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지은 성당들입니다. 사실 이탈리아의 건축은 고딕이나 르네상스의 시대에 상관없이 그 내면에는 언제나 고대 로마 건축의 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성당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입니다. 13세기 초 이탈리아에는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회가 창설되어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수도회들은 수도원 경내에서 기도하고 일하는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세상에 나가서 설교하고 탁발하는 수도회였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카리스마 때문인지 입회자가 급속히 늘어났고,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수도회원이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수도회는 도시마다 분원을 만들었고 공동체가 어느 규모 이상이 되면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1219년 볼로냐에서 12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피렌체에 도착하여 공동체를 이룬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팽창하면서 수도회는 1279년경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아르놀포의 스승인 니콜라 피사노(1220-1284)가 성당을 설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당의 파사드는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470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에 의해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시토회 고딕 성당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성당 내부의 길이는 99미터이고 너비는 28미터입니다. 네이브월(네이브와 아일 사이의 벽체)은 확실하게 분할되지 않은 상태에서 클리어스토리(네이브월의 2층)에 해당하는 부분에 작은 원형창이 있고, 아케이드(네이브월의 1층)는 고딕 성당임에도 포인티드 아치가 아닌 반원 아치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네이브월의 반원 아치와 가는 기둥은 내부 공간에 수평적 개방감을 주고 설교에 맞춤인 실용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고딕 양식이면서도 고전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전과의 연속성은 평면에서도 볼 수 있는데, 3랑식 6베이의 평면은 별도의 성가대석이 없고 앱스와 좌우의 경당들은 둥근 형태가 아닌 정사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라틴 크로스 형태로 진화하기 전인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 양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천장이 석재 리브 그로인 볼트(리브가 있는 교차형 둥근 천장)로 축조된 것은 이 성당이 고딕 양식임을 알게 하여 줍니다. 미술 분야의 르네상스가 건축 분야보다 앞섰기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는 르네상스의 미술 작품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먼저 네이브 중앙에는 조토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레스코화에 그린 것과 같은 형태로 1290년에 제작한 높이 4.5미터의 대형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왼쪽 아일 끝에는 최초로 원근법을 사용한 마사초의 ‘삼위일체’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조르조 바사리는 이 그림을 보고 벽이 뚫려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고전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는 이 그림은 눈높이를 그림의 하단에 맞추면 원근법상의 소실점이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이 장엄하게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 안아주고 성령이 성자의 머리 위에 내리는 모습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학·미술 분야 변화가 더 빨라 고딕 양식과는 다른 성당 지어지고 성당 내에는 르네상스 미술품 놓여 피렌체에서 도미니코회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견줄 성당으로 프란치스코회에서 봉헌한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이 있습니다. 1211년 프란치스코 성인이 피렌체를 방문한 후 이곳에 프란치스코회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도회의 성장으로 많은 수도자와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새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1294년 당시 피렌체 최고의 건축가인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아르놀포는 제대를 중심으로 한 경당들과 성가대석 그리고 트란셉트의 공사를 진행하던 1310년경 사망하였지만, 그의 제자들에 의해 138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성당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의식한 탓인지 더 큰 규모로 지어져, 성당 내부는 길이 115미터 너비 38미터에 이르는 3랑식 7베이의 바실리카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평면과 네이브의 형태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큰 차이가 없으며, 그 외의 공간 역시 당시 토스카나 지방의 성당들과 유사합니다. 다만 네이브월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보다 발전된 형태로, 팔각기둥과 고딕 양식의 특징인 포인티드 아치가 높은 아케이드를 형성하고, 그 위층에 높이는 낮지만 클리어스토리가 들어서서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반면에 천장은 성당의 너비가 넓어졌기 때문에 무거운 리브 그로인 볼트 대신 경량의 목조 평천장으로 올리는 등 축조 기술의 한계도 드러냈습니다. 성당의 제단에는 중앙에 다각형의 앱스가 있고 양옆으로 직사각형 경당이 늘어서 있습니다. 중앙의 앱스에는 리브 그로인 볼트가 우산 모양으로 설치됐고, 길고 좁은 랜싯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빛을 제단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바르디 경당과 페루치 경당이 있으며 그 안의 프레스코화는 모두 조토의 작품입니다. 특히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르네상스인들의 무덤이 많은데, 단테의 기념비,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등의 무덤이 있습니다. 14세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하던 시기에 지어진 이 두 성당을 보면, 건축가가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마태 13,52 참조)의 마음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옛것을 소중히 여기며 새것을 희망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12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아르놀포 디 캄비오

경제·예술·문화 크게 성장했던 피렌체 기존 대성당 확장한 웅장한 성당 원해 아르놀포, 확장 설계 후 공사 중 사망 조토·탈렌티·브루넬레스키 거치며 완공 피렌체 사람들이 세운 성당 가운데 단연 최고는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피렌체 대성당 Duomo di Firenze)’일 것입니다. 그 대성당의 광장 우측에 성당을 바라보는 두 개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오른쪽 상은 아직 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대성당 돔의 설계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이고, 왼쪽 상은 그보다 130년 전에 대성당을 설계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5–1310)입니다. 조토의 스승 치마부에(1240-1302)가 피렌체 화단을 이끌고 있을 때, 아르놀포는 동시대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시에나의 콜레 디 발 델사(Colle di Val d’Elsa)에서 태어난 아르놀포는 젊은 시절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1220–1284)의 제자로 시에나 대성당의 설교단 공사와 페루자 대성당 분수대 공사에 참여하면서 조각가로서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오르비에토 성 도미니코 성당의 드 브라예 추기경 무덤의 조각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이 작품은 르네상스 무덤 유형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후 아르놀포는 로마에서 활동을 하면서 성 바오로 대성당과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체칠리아 성당의 제단 위 캐노피(발다키노, Baldacchino) 공사를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니콜로 4세 교황의 의뢰를 받아 로마의 성모대성당에 구유 조각상을 제작하였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도 언급한 이 조각상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레치오 동굴에 구유를 재현한 지 7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후 아르놀포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의 설계를 수주하면서 피렌체 생활을 시작하였고,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Palazzo della Signoria, 현 팔라초 베키오)의 설계도 맡았습니다. 이 무렵 피렌체의 주교좌성당(두오모)인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의 규모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가 정치와 경제, 예술과 문화에서 크게 성장하면서, 경쟁 도시인 시에나와 피사의 대성당을 능가하는 웅장하고 거대한 대성당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에 피렌체는 산타 레파라타 대성당을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1296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새 성당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아르놀포는 피렌체 시민들의 바람에 맞춰 새 성당이 판테온을 능가하는 큰 돔을 갖도록 설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새 성당의 본당 부분이 기존의 산타 레파라타를 포함하게 계획하여, 상당 기간 옛 성당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옥편 11장과 13장에 아르놀포의 출생지인 콜레디발델사의 전투가 인용됩니다. 이 구절들로 미루어보면, 단테는 아르놀포가 피렌체 대성당 공사를 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났고, 그에게 존경심을 가진 듯합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310년 아르놀포는 대성당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사망하였고 공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이때 아시시와 파도바 등지에서 작품 활동을 벌이던 조토가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1320년대 초에 그는 아르놀포가 설계한 산타 크로체 성당의 페루치 소성당과 바르디 소성당에 프레스코화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중단된 대성당 공사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330년경 산타 레파라타 대성당에서 성 제노비오의 유해가 발견되어 대성당 프로젝트는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습니다. 당시 피렌체 경제는 양모 무역과 은행업의 발달로 매우 번창했고, 신흥 상인 계급 재력가들은 대성당 공사를 아낌없이 후원하였습니다. 이렇게 대성당 공사는 재개되어 건축 책임자로 조토가 선정되었고 대성당 광장에 조토의 종탑이 세워졌습니다. 조토 이후 1351년 프란체스코 탈렌티가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아르놀포의 대성당 평면 계획을 확대 수정하였습니다. 아르놀포의 평면은 아일(창측 복도)이 정사각형 모듈을 갖지 않는 직사각형이고, 아일의 두 배인 네이브(중앙 신자석) 역시 정사각형이 아닌 가로가 긴 직사각형이었습니다. 이런 평면 계획은 산타 크로체 성당에도 나타나는 아르놀포의 전형적인 설계 형태입니다. 탈렌티는 그런 아르놀포의 계획을 변형시켜서 네이브 한 베이(bay)를 정사각형 모듈로 만들었습니다. 네이브가 직사각형에서 정사각형으로 바뀌면서 네이브 한 베이의 종방향 길이가 늘어나게 되었고, 성당도 종방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탈렌티는 아르놀포의 파사드도 수정하였는데 아르놀포가 설계한 외부 측면의 채색 대리석 장식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아르놀포의 원래 대성당 설계가 산타 크로체 성당의 설계에 머문 것은 아닙니다. 아르놀포는 산타 크로체 성당의 천장을 목조 평천장으로 올렸지만, 피렌체 대성당에서는 석조 둥근 천장으로 설계하였습니다. 이스트엔드(성당 동쪽의 거룩한 공간)의 구성도 산타 크로체는 중앙에 커다란 앱스(제단이 있는 반원형 돌출 부분)가 있고 좌우에 일자 형태로 경당이 늘어서 있는 반면에, 피렌체 대성당은 세 개의 팔각형 앱스가 크로싱(네이브와 트란셉트가 교차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세 방향으로 둘러 있고 그 위에 대형 팔각 돔이 얹히는 방식입니다. 이런 피렌체 대성당은 아케이드(아치열이 있는 1층)가 높고 클리어스토리(천측창이 있는 2층)가 낮은 2단의 네이브월(nave wall)을 갖고 있으며 수평성을 드러내는 띠 형태의 장식 요소로 인해서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네스크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르놀포의 평면도를 보면서 문득 그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대성당을 설계할 때 폭이 40미터가 넘는 돔을 올리는 방법을 생각했는지 말입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한 경당에 있는 프레스코화를 보면 1367년경 돔에 대한 어떤 공사가 있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1380년 대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돔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브루넬레스키가 올 때까지 지붕 없이 5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대성당 광장 옆에 말없이 앉아있는 두 거장은 지금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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