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에 착수하고 피렌체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지 십 년이 훌쩍 지난 1432년, 그가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바쁘면서도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제노바(Genova,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태생의 한 젊은이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이 피렌체 땅을 밟았습니다. 격식 차린 옷매무새에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한 그는, 부친이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다가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제노바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태어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입니다. 다행히도 1428년 가문에 대한 추방령이 철회되고 알베르티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고향 땅에 드디어 발을 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낯선 피렌체에 온 것은 단지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한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대성당 공사 현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일꾼들에게 기중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찾아갔습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인문학적 지성을 갖춘 중견 건축가와 건축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인문학자는 그것만으로도 친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알베르티는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대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제노바에서 베네치아로 이주한 알베르티는 10대 중반에 파도바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0대 후반에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알베르티는 혼외 자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삼촌들의 지원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천재 조카가 인문학은 물론이고 수학과 물리학, 예술과 문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나 몰라라 하는 삼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문학 섭렵한 당대 최고 지성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하며 영향 받아 원근법·비례 숙고한 「회화론」 펴내 고대 로마 유물 복원했던 경험 토대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 집필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1435년 그의 첫 번째 예술 관련 저술인 「회화론」(Della Pittura)을 썼습니다. 이 책은 회화의 기초 이론에 관한 것으로, 알베르티는 그 서문에서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마사초 등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회화에 있어서 입체적으로 다른 거리에 있는 여러 사물을 한 평면에 표현하는 것과 그 사물들을 같은 비율로 축소하는 것, 곧 원근법과 비례에 대해서 깊게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근법(투시도법)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에게 이 책을 헌정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이렇게 회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실제로 회화 작품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작품 활동보다는 회화와 관련된 학문적 연구에 더 몰두한 듯합니다. 하지만 회화와는 다르게 건축과 관련해서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조언과 지도를 받으면서 몇몇 공사를 수주하였고, 이후 루첼라이 가문과 인연을 맺으면서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교회법을 공부한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가기 전인 1430년대 초에 로마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1450년대 초에 그는 다시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베르티는 피렌체에서 ‘팔라초 루첼라이’의 파사드 작업을 마칠 즈음이었는데, 최초의 인문주의자 교황으로 불리는 니콜라오 5세 교황이 1450년 희년을 보내면서 로마의 도로와 수로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공부하고 1444년 피렌체 공의회에도 참석한 바 있는 인문주의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알베르티는 교황청 건축 자문직을 맡았고, 교황의 배려로 하위 성직자로 임명되어 고대 로마 유적의 복원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중요한 공사가 천년이 넘은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수도교’의 보수인데, 멀리 수원지(水源池)에서 로마 시내까지 깨끗한 물을 끌어다 중앙 급수대까지 공급하는 수로 복원 공사입니다. 그 중앙 급수대에 세 개의 길, 곧 ‘트레 비에’(tre vie)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만난다고 하여 그 이름을 ‘트레비’(Trevi)라고 지었고, 훗날 그곳에 지금의 ‘트레비 분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알베르티는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고, 로마의 고전 건축에 대해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피렌체에서 건축가로서 활동한 알베르티는 총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De re aedificatoria)을 집필하여, 1452년 로마에 갔을 때 니콜라오 5세 교황에게 증정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건축서인 이 대작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알베르티의 「건축물론」에 영향을 준 책은 1세기 고대 로마의 가장 훌륭한 건축가이자 공학자인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라지고 내용만 전해져 왔는데, 그 필사본이 1415년경 인문학자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베르티는 1400년 전 고대 로마의 건축학을 최초로 연구하여 「건축물론」을 쓴 것입니다. 세상은 알베르티에게 ‘만능인’(萬能人) 혹은 ‘전인상’(全人像)이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이런 표현은 반세기 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어울리지만, 알베르티 역시 이런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지식욕을 가졌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사실상 만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알베르티는 가정환경 덕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알베르티의 생애를 쓰면서 독서를 많이 하는 예술가는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갖기 때문에 그림이나 건축에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영감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다면 그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치게 됩니다. 알베르티는 그의 인문학적, 과학적, 예술적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말라테스타 사원), 피렌체의 루첼라이 팔라초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파사드, 그리고 만토바의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드레아 성당 등을 설계하고 지었습니다. 알베르티 덕분에 피렌체의 르네상스 성당들이 바깥세상을 향하게(ad extra)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0면